개혁 신학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 관리자
- 19206
- 2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1.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한국 내의 적지 않은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절대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일치되는 것과 다소 다른 부분이 공존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림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룰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에서는 얼마간의 오해를 동반한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지상 대화를 시도함은 양측의 현존하는 이견들이 참되게 거듭난 몸 안의 지체들 사이에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따라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2.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 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이 원칙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 지방교회’ 라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합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원래의 취지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까지도 차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더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됨이 없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입니다.[2]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과거에 일반 교단에서 구원받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참된 신자일진데 단지 소속이 옮겨졌다는 이유만으로 불신자(또는 이단)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양 측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고 교제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3. 각자의 현실을 되돌아 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합니다. 김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하여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임).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 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 교단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을 자처합니다. 그렇다면 장자교단에 부합되게 위 김 교수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측이 ‘법정 선언적 칭의’ 방면의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두 성경 교사들의 도움으로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방면에 주님으로부터 얻은 풍성한 계시와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지방 교회측은 이처럼 남이 보지 못한 어떤 진리를 나는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에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진리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의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따른 소위 ‘건설구원’을 주장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흡사하지만, 진리를 제시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5]
4.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쌍방의 이견들 중 다음 몇 가지 쟁점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 한국교계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그중 어떤 이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님)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이어지는 두번 째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마16:18, 엡1:23),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행7:38).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 구약 모두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님(안티오크)은 양 진영 모두를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근거로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별도의 글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차례로 다루고자 합니다.
--------------------------------------------------------------------------------
[1] http://theflamingheretic.wordpress.com/2011/03/25/in-essentials-unity (영문)
[2] http://www.nazuni.pe.kr/faith/creeds/westminster/confession.php?chap=17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www.godssalvation.or.kr/aspects/regenerate.html
[5] http://pcouncil.net/jboard/?p=detail&code=mundab-aa002&id=12502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s://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않는 것이고
대적 앞에서 하나(요17:21)를 간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