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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장로교신학자 논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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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아래 자료는 박형용 박사가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에 발표한 것입니다. 1) 원문에는 한문과 헬라어, 히브리어가 혼용되어 있으나 편의상 한국어로 바꾸어 표기했으며, 2) 난하 각주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主는 靈이시다


-고린도 후서 3;17- 朴 炯 庸


바울의 성령론과 기독론을 올바로 이해하고 바울서신을 올바른 견지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후3:17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主는 靈이시다: Now the Lord is the Spirit-NASB)의 뜻을 알아야한다. 이 구절은 많은 주석가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구절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호 퀴리오스와 토 프뉴마를 본문에서 동일시 할 수 있었느냐하는 것을 밝혀내는데 있다. 그러나 호 퀴리오스와 토 프뉴마가 동일시 되어지는 이유를 밝히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할 두 가지 문제는 첫째로,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느냐하는 것이요 둘째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문제의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들은 왜 바울 사도가 주님(호 퀴리오스)과 성령(프뉴마)을 동일시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데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첫째 문제인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가를 연구하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로 견해를 달리한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문의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퀴리오스가 여호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29-35절을 그 자신의 시대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고 믿는데 있다. Dunn은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30절에 나타난 단어 독사(히:카란, LXX: 엔 데독사스뭬네, 주:광채, 영광)을 취하여 고후3:7-11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출애굽기 34:33에 나타난 칼륌마(히:미스베, 주:수건,너울)를 취하여 고후3:12-14에서 그 의미를 전개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두 개 용어(광채, 수건)는 출34;34f의 중심된 구절에 대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다. 출 34;34f는 다음과 같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Dunn의 주장은 출애굽기 34;34f절 이전의 구절들이 출34:34f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고린도후서 3장에 있어서도 고후3:16절 이후의 구절들에 있어서 바울의 해석은 고후3:16절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3:16)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이전 구절들이다. Dunn은 본문에 나타난 수건이 모세 당시에 유대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세의 얼굴을 가리웠던 같은 수건(토 아우토 칼륌마)이라고 주장한다(고후3:14). 그러므로 그 수건을 제거할 행위는 마땅히 같은 행위여야만 한다. 이와같이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16절)했을 때 그 뜻은 모세 당시에 그 수건을 벗기기 위해 되어졌던 같은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고후 3:16이 출34;34에서 인용한 것임을 설명하고 따라서 고후3:16절의 주(Lord: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확실하다. 바울 사도는 그람마의 옛 계약과 프뉴마의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 다음 출애굽기 34장의 중심된 구절이 그의 논리에 있어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주가 성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후3:16,17절의 주(Lord)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Dunn의 논리는 구약(O.T)과 신약(N.T) 사이에 서로 상충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그 사상에 있어서 상충될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노력한 사도 바울의 논리의 중요성은 두 계약 사이의 유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두 계약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해석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은 예수님과 성령을 동일시하는 이 어려운 진술(statement)과 부딪쳐 보지 않고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몇가지 이유는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이 본문에서 적당한 해석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1) Dunn이 주장한대로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의 구절들을 기초로 새로운 계약의 사역을 해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Dunn의 주장에서 결여된 점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바울이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 때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신약이 취급되어진 것이다.(3절 이하; 14절). 이와같은 이해의 결핍은 고후3:17절을 문맥 안에서 다루지 못한데서 부터 기인된다. 고후3:17절은 결코 문맥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성경해석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본문을 고찰하면, 사도 바울은 고후3:1-4:6에서 사역(ministry)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고후4:5절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크리스토온 이에수은 퀴리온)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고후3:14절은 또한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이)라고 말하며 16절에서는 사람이“퀴리온(主)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라고 설명한다. 이와같이 문맥에 나타난 퀴리오스를 연구할 때 퀴리오스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와같은 사상은 빌2:9 이하에 타나탄 사상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퀴리오스(主)라는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시므로 모든 입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또한 베드로도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主(퀴리오스)가 되셨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主(퀴리온)와 그리스도(크리스톤)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라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고후3:16,17에 나타난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킴이 확실한 것이다.


(2) 출애굽기에서는 없어질 영광에 대해서 언급이 없지만 바울사도는 고후3장에서 의문의 사역이 없어질 영광과 의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혹은 성령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과 비교하고 있다.

바울은 정죄의 사역(직분)과 의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9절). 로마서 5:16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아담으로 말미암은 정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를 비교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상은 구약 자체가 진리의 완전한 뜻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전한 뜻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의 사역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면 본문의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본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문맥을 통해서 증명을 하였다. 문맥의 뜻에 비추어 생각할 때 퀴리오스는 여호와를 가리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제 우리들은 두 번째 질문을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고후3:17절의 프뉴마가 진정으로 성령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Hughes 박사는 고후3:17절의 토 프뉴마가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靈(spirit)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주는 영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에게 돌아감으로 오해의 수건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따라서 Hughes는 고전15:45; 고후3:6; 롬8:15절에 나타난 프뉴마도 성령으로 해석하지 않고 靈으로 해석한다. Hughes는 또한 말하기를 “이 귀절 전체를 통하여 우리들은 대문자로 성령(the Spirit)을 쓰지 말고 소문자로 靈(spirit)을 써야한다. 비록 우리들의 판단으로 여기서 성령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지만 그러나 바울의 논리 가운데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별히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도들의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 성령의 직무(office)라는 바울의 명백한 교훈을 생각할 때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Hugghes 박사의 입장은 다음의 이유로 본문맥에서 타당하지 않다.


1) 바울은 고후3:3에서 먹(멜라니=ink)과 성령(프뉴마티 데오 조온토스)을 비교하고 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의문(그람마=letter)과 성령(토 프뉴마)을 6절에서 비교하고 있다(cf. 롬2:29). 그러므로 본 6절에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프뉴마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같이 사용된 조오포이에이(give life)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서신 다른 곳에서도 명시된 것처럼 특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기인된다는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롬8:2,6,11;cf.고전15:45). 바울은 다음으로 헤 디아코니아 테스 카타크리세오스(정죄의 직분=정죄의 사역)와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의의 직분=의의 사역)을 비교하고 있으며(9절), 이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는 바로 헤 디아코니아 소우 프뉴마토스인 것을 말하고 있다(9절). 여기서 디카이오쉬네스와 프뉴마토스가 동격으로 사용되어졌다.(주: 의의직분과 영의직분에서 의와 영이 동격으로 사용되었다는뜻) 그런데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전6;11)고 말함으로 성령과 의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그러므로 고후3:8의 프뉴마토스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성령을 가리키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한 것이다.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도 자유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졌다. 이 사실은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에서 성령과 자유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참 자유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롬8:2; 고전12:13; 갈5:13ff.).


이상에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17a)를 둘러싼 가까운 문맥에서 투 프뉴마의 용법을 관찰해 볼 때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고후3:17a의 토 프뉴마만 구태여 성령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2) 우리들은 이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증명하였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때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 퀴리오나 18절의 퀴리오 프뉴마토스와 같은 표현들에 나타나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들이 바울 서신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성령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롬8:9; 갈4:6/ cf. 행5:9; 8:39; 16:7).


이상에서 증명한 대로 고후3:17a에 나타난 토 퓨뉴마는 Hughes의 주장대로 靈(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고후3:17a의 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다른말로 표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본질이 무엇인가? 이렇게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일시 되어졌다는 사실은 본문이 뚜렷하게 증명하지만 무슨 의미로 동일시 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지 않다. 고후3:17절은 교리적인 정의가 가득찬 머리를 가지고 바울서신을 대하고 증거자료로서 확증을 찾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극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광범위한 문맥을 고찰할 때 바울 사도는 그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옹호하고 있다. 바울의 소명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거짓 사도들보다도 훨씬 탁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탁월성은 그의 개인 인격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진정한 문제는 그의 직무의 탁월성과 합법성에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의 직무(office)가 모세의 직무보다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바울 사도는 그가 계약 역사에 있어서 더 탁월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또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 사도는 옛 계약과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다. 먹(ink=멜라니)은 성령과 비교되어졌고(3절) 그리고 성령은 다시 의문(토 그람마)과 비교되어졌다(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6절). 이 명제가 뒤따라 나오는 구절들에서 더욱 확장되어 진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영광(독사)의 초월성을 제시하면서 반면에 옛 계약의 영광(독사)은 사라져 갔다고 말한다(7,11절). 바울 사도는 분명히 여기서 기독교인의 사역의 본질과(3:3,4:1) 모세를 使者로 한 죽음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3:7,12,13). 옛 계약은 정죄와 죽음의 사역(직분=ministry)으로서 모세와 관련이 되어졌고 반면에 새로운 계약은 의와 생명의 사역으로서 성령과 관련이 되어졌다(7절 이하 참조). Smedes는 말하기를 “여기 옛 계약과 새 계약이 있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초월하다. 새 계약은 광대하게 초월한 영광을 가지고 있다. 새 계약은 생명이 사망에서 다르고, 자유가 속박에서 다르며, 확신이 공포에서 다른 만큼, 혹은 소망이 절망에서 다른 만큼, 옛 계약과 다르다. 새 계약은 세상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주었다. 바울의 사도직은 계약 역사의 새 시대, (즉 새 계약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사도직은 더 초월한 사도직인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의 전체적인 논리는 구속 역사의 실재(reality)에 의존되어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대칭은 역사적이다. “그 대칭은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구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계속되는 국면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구별된 것이 바로 새 질서인 것이다. 성령은 새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활동적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ministry)이라고 말한다(8절).


고후3:12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덮여졌고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벗겨질 수 있는 수건(칼륌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옛 계약이 무슨 이유로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하고 있으며 반면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옛 계약이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었기 때문이며(14절)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었기 때문이다(15절). 그러나 새로운 계약의 효력은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어진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14절). 그 수건은 언제든지 사람이 주께로 돌아가면 제거되어진다(16절).


이상에서 명백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의 논리 가운데 17절에 당도하기도 전에(3절 참고) 이미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관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새로운 계약의 유익은 넘치는 영광과 생명과 의로움이다. 이 사실은 바로 새로운 계약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새 질서 안에서 사역하심으로 의와 생명과 영광과 같은 은사를 산출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이와같은 성취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되어진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을 고찰할 때 주와 성령을 동일시하여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17a)라고 말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主는 靈이시다” 했을 때 퀴리오스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프뉴마의 개념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와 성령을 동일시 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라는 종말적인 의미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Hamilton은 말하기를 “여기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이거나 존재에 있어서의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동력적(dynamic)이며 구속적 행위에서 발생된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Hamilton은 계속해서 언급하기를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취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믿음의 모든 의지와 목적을 위해 주님 자신이 그의 백성 위에 임재하셔서 은혜를 부여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성령이 새 질서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새 질서는 바로 성령의 질서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광범위한 문맥을 통해 관찰해 볼 때 “主는 靈이시다”(17a)라는 표현을 주관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적 역사적 전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동일시하는 것은 그 성격상 구속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라고 표현한 것이다.


17절 하반절의 내용도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자유(엘류데리아)의 개념이 17절 하반절에 언급되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바울이 경륜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갈5:1;롬8:2). 영광, 생명, 의, 평화 등의 개념과 더불어 자유 역시 새로운 계약의 특징들 중의 하나로서 성령의 사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갈4:21과 5:1;5:13과 5:16ff 비교 참조). 18절에 기술된 대로 주와 성령 사이를 밀접히 연결시키는 것은 17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결국 주와 성령은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는데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종합해 보면 바울의 사상은 역사적이다. 새로운 시대는 옛 시대보다 탁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졌다. 성령은 창조적이고 활동적인 영으로서 새 시대를 주관하시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활은 성령에 의해 조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主는 靈이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기능과 성령의 개념을 교대로 사용하는 예를 바울서신 내에서 찾아 비교함으로 지금까지의 증명이 더 확실해질 것이다.



신자들의 생명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 생명을 가졌다(롬8:11).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가졌다(골3:4).


신자들의 소망


우리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롬5:5; 15:13).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고전15:19).


신자들의 기쁨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롬4:17; 갈5:22).

우리들은 主님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빌3:1;4:4).


신자들의 자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전12:13; 롬8:2).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갈5:1).


신자들의 칭의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고전6:11).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갈2:17; 고전6:11).


신자들의 성화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롬15:16).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고전1:2).


신자들의 인침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4:30).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1:13)


신자들의 교제


우리들은 성령의 교제로 축복을 받는다(고후13:13).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교제 안으로 불리움을 받았다(고전1:9).


신자들의 행위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한다(갈5:25).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골2:6; 1:10).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접근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2:1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3:12).


신자들의 확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1:27).

우리들은 한 주님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4:1).


신자들의 율법 이행


성령은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8:2).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10:4).



이상에 열거한 병행 구절들은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바울 사도가 성령과 그리스도를 교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과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이와같이 성령과 그리스도를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하여 교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현상으로서 공관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 안에 있는 우리들”(롬8:8a), "너희 안에 있는 성령“(롬8:9a;11c),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롬8;10)등의 표현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롬8:9b)이나 “그리스도의 영”(롬8:9c)을 교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주는 영이시다”(고후3;17a)라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총회신학대학 교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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