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나눠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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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형제님의 교통(2014년 6월 13일)

 

형제님들, 특별히 이런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교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한국에서 8주간을 보냈습니다. 병이 걸렸던 기간은 7주간입니다. 원래는 조금 시간을 내어서 한국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형제자매들의 봉사를 제가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형제자매님들에게 감사하다는 교통을 하고 싶어서 시간을 갖기 원했습니다. 제가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개별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한 교회 한 교회를 다 만나서 감사하다고 교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님들이 교회들을 대표하시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사용해서 형제자매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형제님들께 감사드리고 또 간접적으로는 한국의 모든 교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번처럼 심각한 병에 걸렸던 적은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10년 전이었습니다. 그때에 암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번째는 5년 전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경미한 중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최근 이 10년 사이에 주님께서 저에게 이 세 번의 체험을 안배해 주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위치만 니 형제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질병이 걸리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원인은 사람의 범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징벌적인 심판을 주십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잘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세 번째는 사탄의 공격입니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해 볼 때 저의 경우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병이 생겼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하시는 역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람의 겉 사람을 파쇄함으로써 그 사람의 타고난 성분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 조성되게 하는 겁니다. 여름 훈련기간 동안에 저희들이 야곱에 관해서 다루게 될 텐데, 31장에서 그가 주님에 의해서 만져집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능력이 제해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에게서 제거되었던 부분, 다루심 받았던 부분은 나쁜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강함입니다. 주의 회복 안에서 이 말씀은 아주 독특하고 특별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이런 말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도 이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파쇄 하십니다. 이 파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조성되시는 겁니다. 위치만 니 형제님께서는 이 말씀을 말했던 첫 번째 사람입니다. 이 형제님은 이 말씀에 이어서 변화를 교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선시키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 형제님은 사람의 파쇄와 영의 해방을 교통하셨습니다. 모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들의 은사가 사역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은사에서 사역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은사를 말하고 있고, 고린도후서는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사가 사역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허무시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허무시는 이것이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본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제가 젊었을 때 한 동역자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몇 주 전에 제가 병이 들었을 때 이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몇몇 성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대나무 밭을 가꾸고 있는데 그 대나무 밭에 가장 아름다운 대나무가 있었습니다. 가장 잘 자랐고, 잎도 가장 무성하게 번성하게 있고, 그래서 이 주인이 이 대나무를 아주 사랑했습니다. 이 대나무는 주인에게 말했습니다.“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제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때 이 주인이 말했습니다. “진짜 그럴 것이냐?” 대나무가 말했습니다. “진짜입니다. 저의 마음은 참됩니다.” 어느 날 주인이 와서 이 대나무를 잘랐습니다. 그때 이 대나무가 아주 고함을 쳤습니다. “주인님 뭐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곳에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있는데.” 이 대나무를 자르고 난 후에 대나무에게 설명도 하지 않고 그 가지들을 다 자랐습니다. 원래는 아주 멋있는 대나무였죠.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줄기만 남아 있는 대나무가 되었습니다. 이 대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끝났구나!” 그러고 나서 이 대나무를 둘로 쪼갰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쪼갰습니다. 반으로 쪼개고 난 후에 그때 이 대나무는 “나는 진짜 끝났다.” 그런데 이 주인은 아직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나무 안에 있는 방해하는 마디들을 다 드러내 버렸습니다. 대나무가 말했습니다. “또 무얼 하실 겁니까? 하고 싶은 데로 다 하십시오. 이제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주인이 이 대나무를 진흙에다 던졌습니다. 그 주위에는 진흙들과 먼지들이 있었습니다. 이 대나무가 말했습니다. “나의 장래는 더 이상 없다.” 그리고 난 후에 이 산에서 나오는 물이 이 대나무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를 통해서 모든 대나무 밭에 물이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전에 동역자가 저에게 교통했던 이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주의 회복 안에서 모든 사람은 사역의 방식으로서 봉사해야 합니다. 자신의 은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은사가 아니고 우리의 생명의 공급입니다. 오늘 아침에 영어찬송 449장(한국어 찬송은 344)을 불렀는데 주님의 뜻대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토기장이이고 나는 진흙입니다. 이 찬송가를 중국어에서 참조해보시면 영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어에서 3절은 영어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3절에 보시면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 목적은 우리 자아를 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완전히 깨끗하게 만드십니다. 이 완전히 깨끗이 되는 것은 죄로부터 구출되는 문제가 아니고 자아로부터 구출되는 문제입니다. 영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는 의미가 아주 얕습니다.

 

워치만 니 형제님께서 이 찬송을 번역하실 때 이 찬송에 대하여 더 깊은 이해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어떤 일이든지 그 목적은 우리를 단지 죄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아를 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때에야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수 있습니다. 이 8주 동안 제가 주님께 만져진바 된 것은 이 방면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가 생각한 것은 한 동안 저는 저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세달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전심으로 저의 몸을 돌보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지난 주일날 떡 떼는 집회 때 주님께서 저에게 한 구절을 주셨습니다. 엡 5:29절입니다.“아무도 자기 육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양하고 보살펴 줍니다. 그리스도도 교회를 이같이 대하십니다.” 그 말씀에서 보면 어떤 사람도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항상 소중히 품고 돌봅니다. 성경의 말씀은 사람이 자기의 몸을 보양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도도 교회를 이같이 대하십니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자기 몸을 돌보는 것처럼 이것은 하나의 예표이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돌보는가를 말해주는 하나의 예표입니다. 저는 제 몸을 이렇게 까지는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이 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운동을 하고 식사하고 잠자고 이것이 저의 책임입니다. 제가 한국 형제자매들에게 많은 짐을 드렸다는 것, 또 제가 두 세 달을 더 요양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한국의 형제자매들에게 짐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홍콩교회의 장로들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홍콩에서 좀 쉬라고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겁니다. 며칠 전에 란 형제님께서 오셔서 홍콩형제님들의 느낌을 저에게 교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홍콩에 가서 몇 달을 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홍콩이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만약 좋지 않다면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형제님들과 교통하고 싶은 일입니다. 이것이 형제님들에게 제 상황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두 번째는 제가 최근에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부담 중에 하나입니다. 그 부담은 다음 세대를 온전케 하는 겁니다. ‘다음 세대’, 그리고 ‘온전케 함’ 이 두 단어입니다. 제가 먼저 다음세대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젊은 직장인 형제자매들에게 교통하고자 하는 말을 교통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처음 한국에 온지 30년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가 저의 나이가 36살이었습니다. 지금은 66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에 온 이유는 한국의 교회들 가운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저는 장상택형제님과 장오신형제님을 뒤 따라서 왔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한국에서의 주님의 증거와 나눌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많은 동역자들 가운데서 저와 한국교회들과의 관계가 가장 깊다고 느낍니다. 제가 며칠 전에 말씀드렸는데 처음 왔을 때에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다 젊은이들이었습니다. 84년도에 이 형제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유스호스텔에서 집회를 했을 때, 그때 계셨던 형제님들이 계시죠. 그때 기억하실 겁니다. 모든 형제자매님들이 다 30대 였습니다. 이 형제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젊은 이들인 것을 보시고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아주 해방이 되셨습니다. 형제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방되신 적이 없습니다. 형제님은 너무나 행복해서 심지어는 신발을 벗어서 탁자 위를 쳤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이 형제님께서 신발을 벗고 던진 것은 그 이전에는 없을 겁니다. 저도 이전에는 본적이 없습니다. 그때가 한번이었습니다. 정말 한번 밖에 없습니다. 이형제님께서 그렇게 해방되어서 말씀을 교통하셨습니다. 형제님은 한국 교회들의 증거에 대해서 아주 부담이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84년부터 지금까지 30년이 지났습니다. 30년은 한 세대입니다. 86년부터 저희들이 전시간 훈련을 시작했는데 판파도 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텍사스에서 온 형제였습니다. 그때 그 형제는 결혼도 하지 않은 형제였습니다. 작년에 그 형제의 딸이 FTTA 훈련에 왔습니다. 이 자매의 나이가 그녀의 아버지가 훈련을 올 때의 그 나이와 똑같았습니다. 바꿔 말하면 전시간 훈련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은 2세대들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번에 남아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훈련생들, 여기 있는 봉사자들을 접촉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거의 다가 회복의 2세대였습니다. 제가 각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이 다 주의 회복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돌보는 이들이 우리의 다음세대, 2세대들이라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서의 주님의 증거가 1세대에서 2세대로 전환됐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특별집회를 해 보면 한 눈에 볼 때는 다 중년들 장년들입니다. 평균연령대가 50여세인 것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 30년 전에 집회에 오셨던 그 분들이 대부분이 신실하게 여전히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연령대가 정확하게 30년이 증가된 겁니다. 주의 회복 전체를 볼 때 연령대가 30대에서 한 세대 올라왔습니다. 이것은 한 방면에서는 좋은 것이고 또 한 방면에서는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증가되고 번식되지 않는다면 다시 30년이 지나면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30년 후에 주님께서 저를 여전히 이 땅에 남겨 두실 지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봉사하고 있는 우리 세대가 30년이 지나면 대부분은 이 땅에 있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살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때에는 봉사를 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처음 봉사를 시작할 때 장상택 형제님, 장오신 형제님을 따라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형제님들께서 “다음 세대가 일어나야 된다. 세대가 전환되어야 된다.”고 교통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른 시간 안에 장상택 형제님은 돌아가셨고, 장오신 형제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이 형제님이 가장 오래 사셨죠. 97년도에 형제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이 저를 가르쳐서 “연장하신 형제님”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아주 적응이 안됐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주의 회복 안에 들어왔는데 36세 때부터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장하신 형제님이라고 말을 들을 때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필사적일 때 우리는 그 기회를 붙잡게 됩니다. 저는 주님께 아주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30년 동안 주님께서 긍휼을 주셨기 때문에 제가 사역의 중심에 있게 되었습니다. 또 사역을 섬기게 되고, 저희는 사역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교회들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니고 사실상 주님의 긍휼과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오늘 앉아계신 형제님들 모두는 지난 30년을 주님의 증거를 위해 자신을 드렸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신실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형제님들이 아마 앞으로도 계속 신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다음 단계에서의 우리의 신실함은 다음세대를 온전케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가 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도록 온전케 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제가 형제님들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을 하든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 A형제님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캠퍼스를 봉사했습니다. 형제님의 이런 봉사는 주님이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A형제님이 형제님의 시간을 세상에 드리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이런 봉사를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대가 전환되어야 하는 시기에 이미 와 있습니다. 아마 형제님은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지금은 그 시대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시간들 안에서 우리가 신실해야 한다고 할 때 어떻게 신실해야 할 것인가? 내가 봉사하는 것에 신실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에 신실해야 하는 겁니다. 한 회사를 보시면 이 회사가 창업을 할 때는 회사에 대해서 창업한 사람이 가장 큰 공을 합니다. 그는 그의 기능들을 회사에 다 투자합니다. 그러나 그 회사가 성장하고 나면, 예를 들어 삼성을 보시죠. 삼성의 창업자. 이분이 회사에 대한 가장 큰 공헌은 다른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만약 온전케 하지 못한다면 이 회사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분이 회사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던지 간에 그 다음단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의 공헌은 거기에서 멈추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회사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회사에 대하여 더 큰 공헌을 하려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고 다음세대를 온전케 해야 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그릇을 위해서 그분은 뒤로 물러가야 합니다. 그다음 사람들이 일어나서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발전과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중국의 지도자를 보십시오. 등소평의 가장 큰 업적은 모든 나이 든 간부들을 물러나게 하고 새로운 젊은 사람들을 키워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국가는 장래가 있는 겁니다. 지금 주의 회복을 볼 때에 세대가 전환되어야 하는 시기에 와 있습니다. 미국이 그렇고, 대만이 그렇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교회들을 보면 보편적으로 50~60대 입니다. 어떤 분은 더 연세가 드셨습니다. 전에 우리가 이런 말을 다 교통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전히 제 안에 이 부담이 있습니다. 다음세대를 온전케 하셔야 합니다. 첫 번째는 다음세대의 중요성을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들을 온전케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부담의 두 방면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음세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음세대를 키워낼 것인가? 우리는 그들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제가 특별히 느끼는 것은 그들을 온전케 하려면 그들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4년 전에 제가 한국의 동역자 형제님들을 사막에 있는 저의 집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님들, 그때가 기억나실 겁니다. 우리가 함께 추구했던 메시지가 있죠. 이 형제님이 쓰신 “교회 안의 목양과 젊은이들을 온전케 함” 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책에서 이 형제님이 많은 말씀을 교통하셨습니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그들이 하도록 내어 주는 것이다.” 이 형제님 말씀 가운데서 제가 받은 유익이 있다면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조금 봉사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무 많이 봉사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각지 교회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적게 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 너무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많이 일하는 어머니의 딸은 일을 배우지 못합니다. 딸에게 그 일을 하도록 배우게 하려면 어머니가 그 일을 양보해 주어야 합니다. 저에게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제가 하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양보하기는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저의 간증을 하지요. 이 형제님이 계셨을 때 LSM의 모든 봉사를 형제님이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제가 그 봉사를 할 때 아주 즐거웠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 봉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형제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모든 책임이 저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그 봉사를 할 때 저는 여전히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환경 가운데 역사하셔서 2004년이 되었을 때 책임을 다른 사람이 맡게 되었습니다. 비록 LSM에서 봉사하고 있지만 실재적으로 많은 사무적인 일들, 업무, 일의 결정을 제가 결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을 결정하는 것, 그것은 우리 형제님들에게 큰 유혹이 됩니다. “이일은 내가 결정을 해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결정한 일은 내가 그 일에 많이 참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 대해서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마치 할 일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제가 형제님들에게 간증을 하죠. 저 개인도 이일을 위해서 일정기간 조정이 필요했습니다. 쉽지가 않았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봉사를 조절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약 그렇게 조절하지 않았다면 오늘도 여전히 많은 문서에 사인을 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큰 일, 작은 일 다 제가 관리를 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날 저를 또 따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게 주신 은혜입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 했던 것이 그 전에 했던 일보다 더 가치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방식으로서 봉사하는 겁니다. 바로 생명과 진리로서 봉사하는 겁니다. 행정과 안배로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진리입니다. 행정과 안배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유혹이 됩니다. 이 형제님은 동역자들은 마땅히 그런 일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형제님께서 대만에 가셨을 때 두 세 명의 동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모든 행정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형제님은 그들을 즉시 교회의 행정에서 제외하셨습니다. 제가 형제님들께 말씀드리죠. 그들 중 취 형제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취 형제님은 행정에서 아주 유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취 형제님도 행정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취 형제님은 그것을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이 형제님이 우리를 봉사를 못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취 형제님은 주의 회복을 떠났습니다. 피터첸형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님도 행정의 봉사에서 제외 되셨지만 피터첸 형제님은 여전히 신실하게 회복 안에 남아계십니다. 피터첸 형제님도 행정을 하지 못하도록 이 형제님이 똑같이 안배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12 집회소에서 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피터첸 형제님은 전환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피터첸 형제님에 대해서 감탄합니다. 형제님은 오랜 기간 동안 행정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를 가든지 항상 교회들을 잘 섬기고 계십니다. 형제님들, 이것이 동역자의 운명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행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행정을 장로들에게 맡긴다고 하지요. 사실상 저는 장로들에게도 장로들이 행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장로들은 목양을 해야 합니다. 이 형제님께서 말씀하시길 교회 안에서 80%가 목양이라고 했습니다. 20%가 행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행정은 1층입니다. 목양은 2층입니다. 형제님들께서 이 숙소 동을 짓는다고 하셨는데 또 서울교회도 건축을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행정은 1층입니다. 2층은 모두가 다 목양이어야 합니다. 목양은 행정보다 더 높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농담이 아닙니다. 지금 대만에서 60세 이상의 장로들은 봉사의 행정에서 나왔습니다. 뒤로 물러난다는 말은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물러나는 것이 아니고 한 단계 올라가야 합니다. 어디로 올라가야 합니까? 목양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 대북교회 처럼 큰 교회의 가장 큰 필요는 바로 목양입니다.

 

 

제가 이번에 몇몇 훈련생들에게. “교회 안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훈련을 오게 됐냐?”고 물었습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교회 안에서 자랐을 때 부모들이 다 주님을 사랑했는데 본인들은 아주 부모님을 거슬렀고 교회에 대해서 흥미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연장하신 자매님이 그를 목양하고 그를 돌봐 주었습니다. 1대 1의 목양을 해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훈련을 참석할 부담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특별집회가 그를 만진 게 아니고, 훈련이 그를 만진 게 아니고, 목양이 그를 만진 겁니다. 목양이 사람을 만지는 것은 특별집회가 사람을 만지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지금 한국에는 많은 중장년의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자매님들이 목양하고 계십니다. 그런 자매님들이 계시지 않는다면 형제님들만 했다면 아마 이런 사람들은 다 떠났을 겁니다. 지금 책임 형제의 가장 큰 책임은 목양입니다. Y형제가 아침에 저를 만나러 왔는데 훈련들에 대해서 부담이 있었습니다. 청년집회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속 그런 방향만 생각한다면 인수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형제의 관념은 여전히 집회를 통해서 사람을 온전케 하려는 관념이다. 내가 집회에서 사람으로 전환 돼야 한다고 말했지 않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집회를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1대 1 관계를 통해서 사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B형제도 시인했습니다. 이 두 세 사람, 이렇게 이 두 세 사람을 돌보는 것이 특별집회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이 형제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겁니다. 만약 동역자와 장로들이 이 목양의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 20%의 행정의 일은 젊은이들에게 맡긴다면 교회 안에 있는 목양의 힘은 크게 강화될 겁니다. 제가 말한 행정은 일을 교통하고 일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 까지 포함됩니다. 어떤 경우 우리는 “행정을 젊은이들에게 맡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러분이 교통하십시오. 결정은 내가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통하십시오. 교통을 하고난 후에는 나에게 반드시 교통을 해야 합니다. 내가 결정을 합니다.” 라고 합니다. 행정이란 무엇인가? 행정은 일을 교통하는 것이고, 일을 결정하는 겁니다. 결정하는 것도 그들이 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상수 형제님께서 우리에게 훈련시킬 때 하신 방법입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죠. 제가 1970년도에 LA를 갔습니다. 그때 이 형제님께서 젊은이들을 온전케 해야 한다고 교통하셨습니다. “장로들은 젊은이들을 관리해서는 안 된다. 청년봉사는 청년들이 하게 놔두라. 그들이 잘못을 범하면 잘못을 범하도록 그냥 두라.” 그때 제가 LA에 가장 연세가 드신 장로를 만나봤습니다. 가장 연장하신 분이었죠. 그 형제님은 위치만 니 형제님의 자매님의 동생입니다. 처남이죠. 제가 그 형제님에게 물었습니다. “청년봉사를 어떻게 합니까?” “이 형제님이 교통하셨다. 청년봉사는 우리가 만질 수 없다. 청년 형제들이 교통할게 있으면 그 형제들이 교통한다. 그 교통의 해결책이 없으면 이 형제님께 물어보아라.”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죠. 그때 미노르 첸, 제랄드 첸, 잔소, 댄톨, 하워드히가시 형제님은 모두 다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전진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잘못을 범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심각한 실수를 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잘못을 했느냐? 장로들을 쫓아냈습니다. 진짜 그렇게 했습니다. 라니 첸 형제님이 버클리 교회 집회소의 옥상에 올라가서 “혁명을 해야 된다.” 고 그렇게 교통을 했습니다. 청년들은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이형제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이 형제님은 젊은이들이 실수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우리에게 실수할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실수하지 않으면 배울 것이 없습니다. 배우려면 잘못을 범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들과 동역자들은 우리의 봉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이 봉사를 젊은이들에게 맡기면 나에게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일을 맡겼는데 그들이 잘못을 범하면 책임은 내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냥 하는 게 났습니다. 내가 하면 실수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맡겨서 실수를 하면 결국에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알 고 있죠. 다른 이들이 하게 맡기는 것이 자기가 직접 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제가 볼 때는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한 중점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온전케 하는가가 중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맡겨서 하게 두는 것이 중점이라는 겁니다. 형제자매들 대부분은 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들 봉사를 잘 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이 나에게서가 아니고 주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한번은 제가 어떤 동역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들을 온전케 해야 한다. 온전케 하지 않으면 책임을 질 수 없다. 그래서 8년 10년 내가 그들을 온전케 해야 한다. 이 형제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온전케 해야 한다. 너무 빨리 그들에게 봉사를 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잊어버린 것은 이 형제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때는 아주 빠른 시간에 봉사들을 맡겼습니다. 84년도에 장로를 세우셨는데 오유성 형제님이 그때 학교에서 선생님이었습니다. 전시간 봉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유성 형제님에게 맡기셨습니다. 저도 그 예 중에 하나입니다. 처음에 훈련을 제가 할 때에 50% 이상은 실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 가운데서 배웠습니다. 저는 이 형제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대단합니다. 만약 저에게 물어 보시면, 제가 이 봉사를 맡긴다. 그러나 한번 실수를 하면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님은 젊은이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대만에서 젊은이들에 의해서 이 형제님은 팔렸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또 젊은이들을 신뢰했죠. 그 젊은이들이 또 실수했습니다. 그러나 또 젊은이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또 젊은이들이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젊은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스티븐 강 형제님과 위트니스 리 형제님 두 분을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사람을 온전케 했습니까? 강 형제님은 한 사람도 온전케 하지 못했습니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한국, 대만, 미국, 각지에서 수많은 많은 사람들을 온전케 했습니다. 이 형제님은 사람은 온전케 하셨는데 오늘 우리는 이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려면 내가 해야 한다. 반드시 나와 교통을 하고 해야 한다. 사실상 맡긴다고 했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결정을 내가 하겠다. 그러나 형제님들, 내가 해야 할 일은 사실상 목양이어야 합니다. 생명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을 결정하는 것은 행정에 대한 부분입니다. 제가 이렇게 간단하게 교통을 드립니다. 동역자들만이 아니고,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이전에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교통해야 할 두 번째 부담입니다. 이것이 형제님들에게 교통해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 동반자들이 아닙니까? 함께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을 열어서 여러분에게 주의 회복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제가 이 형제님에게서 배운 것을 말씀 드린 겁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세대를 온전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걸 교통하면서 저의 교통은 끝날 겁니다. 세 번째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죠. 제가 3월에 한 가정을 데리고서 이스라엘을 갔습니다. 이 형제님은 큰 사업을 하시는 분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입니다. 이 형제님은 260억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형제에게 학교가 200개가 있고, 병원이 있고, 가장 큰 쇼핑몰, 이런 것들이 다 이 형제님의 것입니다. 하루는 이 형제님에게 물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부(富)는 삼대(三代)를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1대가 부유하게 된 후 3대가 되면 재물이 다 흩어집니다. “형제님, 형제님은 맨손으로 이 과업을 일으키셨고 이런 경제 왕국이 형제님의 손아래 있습니다. 어떻게 형제님은 이 부(富)를 유지하시고 제 삼대에 까지 물려주실 건가요?” 이 형제님은 이 문제를 아주 오랫동안 연구를 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형제님에게는 아주 필수적으로 직면해야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형제님이 말했습니다. 연구를 해 보니 가장 큰 원인은 이 가족이 내적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가 대물림 되지 않는다. 부(富)를 잃어버린 가문들을 보니 대부분은 다음세대들이 싸운다는 것을 본 겁니다. 어떤 경우는 형제간에 싸우고, 어떤 경우는 형제간은 싸우지 않지만, 형제들의 부인들이 서로 싸우는 겁니다. 이 형제님이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이 형제님의 아버지가 이 형제님이 어렸을 때 징기즈 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다섯 명의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다섯 명의 아들에게 나무를 하나씩 주었습니다. 이 나무를 다 가지고 오너라. 해서 그 나무들을 함께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이 다섯 명의 아들에게 이것을 꺾어 보라고 말했습니다.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 묶은 것을 풀어서 이 나뭇가지를 하나씩 주고 그것을 꺾어 보라고 말했습니다. 다 바로 꺽였습니다. 그래서 징기스칸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다섯 명이 흩어지면 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하나로 묶이면 전 세계라고 할지라도 너희들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제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자기의 부(富)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대해서 저에게 설명한 겁니다. 저는 이것을 주의 회복에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의 회복은 가장 큰 가업입니다. 이 부(富)는 260억불 보다 더 큰 겁니다. 오늘 만약 우리가 흩어진다면, 모든 사람, 각 사람이 다 패배당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합친다면 어떤 사람도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다시 이 형제님에 대해서 말씀 드리죠. 이 형제님의 자매님의 동생, 이 처남이 형제님을 팔았습니다. 처남이 같이 은행을 했는데 이 처남이 형제님을 은행의 이사에서 쫓아내려고 한 겁니다. 그때 사람들이 형제님에게 말했습니다. “정부에 가서 빨리 고소를 하라.” 그렇게 고발을 하면, 경찰들이 오고 이렇게 하면 반드시 그는 쫓겨날 겁니다. 그리고 감옥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가 처남을 쫓아내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인도네시아의 그 이씨 집안의 싸움을 봐라. 이 처남하고 싸운다.” 그러면 이 가정을 가문을 아주 가볍게 대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정부에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정 안에서의 하나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떤 사람도 이 가족을 감히 건드리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2세대를 괴롭히면 1세대가 합칩니다. 이 형제님은 이것이 힘이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난 후에 주의 회복에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주의 회복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처리한다면 결과적으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본다면, 주의 회복 안의 여러분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이 부(富)는 3대를 가지 못하는 겁니다. 이 형제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일은 동역자들 가운데 한마음 한뜻을 유지하는 겁니다. 동역자들이 결정하는 것이 모든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기꺼이 내 자신을 내려놓고 한 마음 한 뜻을 유지하기 원합니다. 여전히 저는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의 회복은 한 마음 한 뜻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가치가 있습니다. 가장 힘이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주의 회복을 볼 때 “아! 여러분은 한 마음, 한 뜻이군요!” 라고 말하게 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저의 말은 여기서 다 교통했습니다. 형제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14년 6월 13일 앤드류 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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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자 2021.01.02. 21:04
출처 : https://blog.naver.com/jtai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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