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워치만 니의 신학고찰 -인간론과 교회론 중심- 석사학위 논문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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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워치만 니의 신학고찰
-인간론과 교회론 중심-
석사학위 논문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반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과 역사신학을 전공한 박장석 님은 위 논문을 자신의 석사학위 졸업 논문(지도교수: 김영재, 2000년)으로 발표했습니다. 지방교회 측은 최근에 검토하던 한 논문에 위 논문이 인용된 것을 보고 전문을 입수하여 살펴본 결과, 워치만 니의 인간론과 교회론이 많이 왜곡되어 소개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이 반론글은 일반 독자들이 사실에 근거하여 워치만 니를 평가하도록 자료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박사학위 논문과 달리, 위와 같은 석사학위 논문들은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보다는 기존 자료들을 인용 소개하는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이런 논문들은 1차 자료의 오류 혹은 편향성의 흠결을 거르지 못한 채 인용 소개하고, 그런 하자 있는 정보에 기초해서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위 박장석 님의 논문에서도 그대로 발견됩니다.
이제 아래에서는 논문 저자(이하 ‘저자’)의 논문 내용 순서인 1. 워치만 니와 그의 가르침 소개, 2. 평가, 3. 중국교회에 미친 영향, 4. 결론 부분 각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반론해 보겠습니다.
1. ‘워치만 니와 그의 인간론과 교회론’ 소개 부분에 대한 반론(1-35쪽)
먼저 저자는 논문(총 52쪽)의 70퍼센트가량인 35쪽 분량을 주로 워치만 니의 저술인 <영에 속한 사람>과 <사역의 재고>(최근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로 재출판됨) 내용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는 데 할애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1) “워치만 니는 교회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나누고 있다”(28쪽)는 그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2) 워치만 니가 말한 ‘행 14:23’을 “행 4:23”으로 소개(32쪽)한 것은 사소한 실수로 보이며, 3) 워치만 니가 지방교회를 “일반적인 지방교회와 분명한 지방교회로 나누었다.”(35쪽)는 주장도 사실이 아님을 밝혀 둡니다.
2. 워치만 니의 주장을 ‘평가’한 부분에 대한 반론(36-43쪽)
1) 삼분론 평가에 대한 반론: 먼저 저자는 워치만 니의 ‘인간론 평가’를 그의 삼분론 비판에 대부분 할애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1) 삼분론은 플라톤 철학에 근거하고, 2) 성경에 근거가 없으며, 3) 안토니 후크마(밀라드 에릭슨)도 삼분론을 반대한다는 논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 2)는 앞에서 저자 자신이 워치만 니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히브리서 4장 12절, 창세기 2장 7절 말씀에 근거하여 삼분설을 주장한다고 소개한 내용과도 상충됩니다. 또한 저자가 의지한 안토니 후크마는 인간을 전 인격으로 보는 입장이므로, 삼분설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이분설도 거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분론뿐만 아니라 이분론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안토니 후크마(류호준 역), 개혁주의 인간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347쪽).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한 본문을 소개하겠습니다. 그것은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한 로마서 8장 6절입니다. 위 말씀은 (혼의 주도적인 부분인) 생각이 인간의 육체와 영 중에서 어디에 두어지느냐에 따라 우리가 극과 극인 영적인 죽음 혹은 생명(평안)을 경험하게 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분설 주장처럼 혼이 영과 동의어라면, 혼의 구성 요소인 생각은 늘 영과 하나 되고, 그 결과 우리는 늘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저자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2) 교회론 평가에 대한 반론: 저자는 워치만 니의 교회론 평가도 그의 ‘한 지방, 한 교회’를 비판하는 것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1) 성경에 그런 교회모델이 있었지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그때와 지금은 시대적인 배경과 문화가 다른 것을 들었습니다. (2) 또한 그는 ‘여러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본 경우도 있다고 비판합니다.
소위 ‘한 지방, 한 교회’ 원칙은 가장 성경적인 지역교회 원칙임은 분명합니다. 그 원칙은 먼저 최초의 신약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적용되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수만 명의 성도들이 수많은 가정에서 모였지만, 성경은 이 모두를 단수로 예루살렘 교회라고 기록했습니다(행 8:1). 또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처럼 대부분의 서신서들이 이 원칙에 따라 각 지역교회에게 보내어졌습니다(고전 1:2). 한편 갈라디아처럼 도시(city) 이상의 큰 범위일 경우에는 ‘갈라디아 교회들’(복수)로 표시했고(갈 1:2), 위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듯이 도시보다 작은 가정 단위 모임들은 독립된 교회들로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원칙에 예외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전역에 있는 교회”(행 9:31)라는 표현인데, 이것은 그 당시 온 땅에서 이 세 지역에만 교회가 존재하던 초창기 때라 우주적인 교회(마 16:18)의 의미로 ‘단수’로 표시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강력한 성경의 근거와 사례를 갖는 지역교회 실행을 따르는 것이 왜 비난을 받아야 할까요? 저자는 자신의 논문에서 그 이유가 워치만 니가 교파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문화적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각종 교파가 생겨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며, 이들 또한 “전체교회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그는 “교회의 사명은 이 땅에 소금과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다원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비평을 마무리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 역시 현재 약 4만 개가 넘는 각종 교파의 출현이 주님의 주권 아래 허락된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에는 저자와 생각을 달리하고, 분열을 경계하고 심지어 책망한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합니다(고전 1:11-12, 3:3, 롬 16:17, 딛 3:10). 저자와 달리 개신교 안에도 다음과 같이 교파에 대해 성경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분도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개신교는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다. … 1517년부터 개신 교회는 분열, 따라서 예수의 몸을 찢는 일에 대한 반성도 없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이종성, 교회론, 152쪽).
3. ‘중국교회에 미친 영향’ 부분에 대한 반론(44-49쪽)
1) 인간론 부분에 대한 반론
저자는 대부분의 중국 가정교회의 인간론이 워치만 니의 영향을 받아 삼분론인데, 이 삼분론은 (1) 잘못된 구원론과, (2) 잘못된 성화론을 초래하며, (3) 결혼과 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래에서 보듯이 그의 오해 내지는 지나친 확대 적용을 한 것입니다.
먼저 그는 삼분론이 인간의 구원을 “전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이 구원받는 것”으로만 보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워치만 니의 구원론이 비록 사람의 영의 거듭남으로 시작하나(엡 2:8, 요 3:6 하),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혼이 변화받고, 몸이 변형되는 것까지를 포함한 전인적이고 완전한 구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1:5, 회복역 각주 2 참조).
또한 그는 워치만 니의 ‘성령을 의지하여 혼을 통제한다’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는 “성경적인 성화관은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롬 12:1-2)이라고 주장 했는데, 사실 워치만 니의 성화관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 ‘변화’를 “하나님께서 새로운 요소인 그리스도와 그분의 풍성을 우리 존재 안에 가져오시며, 우리의 낡고 타고난 요소는 점점 배출되게” 하여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 변화라고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롬 12:2, 각주 4 참조).
저자는 또한 중국 내 한 가정교회 인도자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예를 소개하며 그러니 워치만 니의 삼분설은 문제가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확대 적용일뿐입니다. 왜냐하면 워치만 니는 삼분설을 믿지만, 그는 새 신자용으로 쓴 <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3권 ‘혼인’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혼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성경적이고 균형 있는 관점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은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혼인은 존중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혼인은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성(性)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거룩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173쪽).
2) 교회론 부분에 대한 반론
저자는 이 부분에서 주로 소그룹으로 모이는 워치만 니의 교회론이 8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현실에 맞아서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 위트니스 리가 중국에서 대만으로 또 미국 LA 근교로 활동을 넓혔다, 한국에는 1966년에 시작되었고 한국복음서원의 출판 문서활동이 적극적이다는 등 소위 지방교회 측의 지난 역사와 활동을 소개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굳이 그의 비판 내용을 거론하자면, “기성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위트니스 리의 이단시비는 계속되고 있다”라는 한 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교단에 속하건 참되게 거듭난 모든 이들을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 인정하고 있으니, 소위 ‘기성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도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인 에클레시아는 거듭난 사람들 자신이지 어느 특정 조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핵심 진리도 아닌 교파를 반대해서 이단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4. ‘결론’ 부분에 대한 반론(50-52쪽)
저자는 이 결론 부분에서, 약 8천만 명의 중국교회 중 보수주의 신학을 가진 가정교회는 워치만 니의 삼분설을 전적으로 따른다고 진단합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 중국 선교를 위해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거나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분설의 견해를 가지고 있던 교재가 삼분설을 지지하는 책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이분설이 비록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개혁신학이 지지하는 교리이긴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신앙 생활하는 중국 선교 현장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또한 삼분설이 “세상의 문화를 터부시 하며 세상과 괴리된 기독교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런 세상적인 것들을 분별된 교회 안에 끌어들인 현재 한국교계의 현실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그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요일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