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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 목사의 신학과 교리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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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 목사의 신학과 교리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평가

 

 

정동섭 목사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에 상담심리로 석사를, 가정사역 전공으로 Ph.D.를 받은 상담 전문가이자 가정사역자입니다. 이것은 그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18년간 상담심리와 기독교 교육을 강의했고, <분노의 기술>, <결혼>, <크리스천 카운슬링>, <자존감 세우기> 등을 번역 혹은 저술했고, 현재도 가족관계 연구소 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그의 이력이 잘 말해 줍니다. 특히 다소 논란이 있었던 <하나 되는 기쁨>(양승훈) 역시 그가 깊이 관여했다고 알려진 부부상담 서적입니다.

 

그런데 그가 최근에 펴낸 <지방교회의 실체>(요단출판사)라는 책의 추천 내용에는, “지방교회 교리를 분석하고 비판한 귀한 저술”, “가장 잘 준비된 (신)학자”, “누구보다 지방교회를 정확하게 잘 알고 계신 분”, “이단들의 뿌리와 교리에 대해 가장 심층적인 비판을 한 책 … 본서의 백미라고 한다면 역시 지방교회의 교회관에 대한 비판”, “탁월한 … 신학자”, “심각한 교리를 정확히 파악” 등 마치 정 목사가 저명한 (조직) 신학자라도 되는 것 같은 온갖 찬사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전문 신학자가 아닙니다. 또한 그가 구원파 전문가일 수는 있지만, 추천인들의 평가처럼 지방교회를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내를 따라 지방교회 집회를 몇 개월 참석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전문가인 것처럼 보이려고, <지방교회 실체> 책을 쓸 때 책 후미에 소개한 참고도서들을 직접 읽고 연구한 것처럼 말했습니다(49쪽). 그러나 그런 말은 일종의 자기 과시일 뿐, 관련 지방교회 책자 목록의 대부분을 그가 직접 읽지 않은(읽을 필요가 없는) 정황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정 목사가 소위 ‘지방교회 전문가’라는 말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정 목사가 그동안 의도적으로 숨겨왔던 충격적인 내막이 있습니다.

 

정동섭 목사는 과거에 월간 현대종교, 도서출판 두란노의 목회와 신학, 침례신학대학 출판부, 도서출판 하나 등을 통해 거의 같은 내용의 지방교회 비판 논문을 중복해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가 직접 연구하여 쓴 것처럼 발표된 이런 글들은, 사실은 미국에서 지방교회들을 비판하던 영문 책자들을 무단으로 표절하여 소개한 것입니다. 특히 짧은 기간에 초판 3쇄까지 인쇄한 <그것이 궁금하다>(도서출판 하나)의 지방교회 ‘교리 비판 부분’은, CRI 연구원이던 그레첸 파산티노 부부 외 1인이 써서 <The New Cult>(CRI)에 부록으로 수록되었던 “The Local Church of Witness Lee”의 교리 부분을 100퍼센트 표절했고, 그 외의 다른 두 영문 책자 일부를 표절하여 짜깁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출처였던 이 영문 서적들은 우리의 강력한 이의제기로 각각 명예훼손 판결, 신문지상을 통한 정정 광고와 재고 회수, “우리가 틀렸었다”라고 공식 사과한 것들이고, 내용 자체가 거짓이고 불법에 해당하여 결코 재유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지방교회 전문가’라는 정 목사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이러한 불법 자료를 무단으로 표절하여 본인의 연구물처럼 발표한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남의 글을 표절하여 손쉽게 책을 낸 터라 굳이 원문 책자에 소개된 참고 도서들을 일일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었고, 그냥 자기 책 말미에 첨부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위와 같은 불의한 일에 대해, 지방교회 측은 지난 1995년에 정 교수와 출판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그 결과 <그것이 궁금하다>는 그다음 해에 절판되고 모든 재고는 총판을 통해 유통에서 회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이러한 사실을 최대한 덮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가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이 <지방교회의 실체> 책자가 자신이 표절했던 책자인 <그것이 궁금하다>의 “수정 증보판”임을 직접 밝혔고(134쪽), 내로라하는 분들이 남의 지식을 훔친 일종의 ‘장물’을 온갖 찬사와 함께 추천한 것을 보고, 부득이하게 표절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일하지는 않으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정 목사의 <지방교회의 실체> 중 교리 비판 내용에 대해 약 10쪽에 걸쳐 ‘방어’적으로 반론했습니다. 이 글은 그가 우리를 비판할 때 의존했던 판단 기준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공격’적인 평가입니다. 그의 책에서 정 목사가 한 교리 비판 분량은 240여 쪽에 달할 만큼 방대하지만, 대부분은 이인규 권사 등 남이 쓴 글을 가져온 것이고, 정작 정 목사 자신이 직접 연구해서 내린 평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그가 직접 밝힌 자신의 판단 기준은 비성경적이거나 거짓된 것이 많습니다. 이제 이런 그의 판단 기준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겠습니다.

 

 

신론 비판: 정동섭 목사는 “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나, 위격상 셋이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들을 신론의 정통성 판단 기준으로 삼았습니다(145-146쪽). 물론 우리도 이러한 고백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은 삼위일체론의 기초에 해당하고,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사실 신론에서의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복잡 미묘한 기준은 아래에서 보듯이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야 나옵니다.

 

그것은 위와 같은 고백을 믿었던 일부 정통 교부들도 이단 시비에 휘말렸던 사실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김석환 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교부들의 삼위일체>(기독교문서선교회, 2001)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 정 목사처럼 삼위의 ‘본질상 하나, 위격상의 셋’을 믿었던 캅바도키아 교부들도 삼신론 시비에 휘말린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신격의 삼위를 “베드로, 야고보, 요한”처럼 ‘사람이라는 동일 본질을 가진 세 인격체’로 설명한 것이 삼신론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129쪽).

 

따라서 이런 삼신론 혐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고안된 것이 삼위가 서로 안에 내주하신다는 페리코레시스(περιχορησις) 교리입니다(요 14:10-11)(221-270쪽). 주후 4세기에 논의되기 시작한 이 페리코레시스 교리는 8세기에 가서 동방교회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요한에 의해 더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서방교회 계열인 한국교계는 김명용 박사 등 조직신학자들은 이 개념을 잘 알고 있지만, 정 목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단 대처 전문가들은 이 상호 내주 개념을 낯설어합니다. 그 결과 남을 신론에서 양태론이라고 정죄하던 장본인들이 소위 공교단에 의해 삼신론 이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참고로 이들이 실명으로 정 목사의 책에 추천사를 썼기에, 우리도 부득이 실명을 밝히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최삼경 목사의 경우 공개 토론에서, 우리의 ‘세 위격, 한 영’을 배척하고 ‘세 위격, 세 영들’을 주장하다가 한기총과 통합 교단으로부터 삼신론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참고로 통합 교단 이대위가 총회에 보고했던 <C 목사 삼신론 연구보고서>는 “그러므로 ‘(C 목사의) 하나님은 세 영들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삼신론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은 결국 세 하나님이 되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아다나시우스 신조와 상충된다.”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인규 권사의 경우 상호 내주를 ‘빌립보 성도들이 멀리 있는 바울과 교통 하는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분리된 위격들을 전제로, 성부만 여호와라고 주장하다가 고신 교단과 합동 교단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김홍기 목사의 경우 토론에서 상호 내주를 세 위격이 아닌 ‘본성 간의 상호 내주’라고 주장하여, 마치 삼위가 복수의 본성을 가지신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이것은 지난 교회 역사에서 있었던 ‘동일 본성’과 ‘유사 본성’ 논쟁을 아는 이들이 보기에 참으로 아슬아슬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정동섭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주로 이 세 사람(특히 이 권사)의 주장을 빌려 지방교회 측을 공격했고, 이들도 실명으로 표절 책자인 <지방교회의 실체>를 적극 추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계의 이단 사역자들의 민낯이자 현주소인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이고 정통에 해당하는 삼위일체론은 칼빈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가 말한 것처럼 ‘주기도문의 성부가 배타적으로 제1격만이 아니라 삼위 전체(The Triune God)’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한 위격의 하나님을 말하더라도 그 특정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배제하지 않은 온전한 하나님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웨인 그루뎀도 “아버지는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 아들 역시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오는 “여호와”는 단지 성부나 혹은 성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로 그 하나님, 즉 하나님 전체이십니다.

 

그럼에도 정동섭 목사는 자신에게 위 로레인 뵈트너와 웨인 그루뎀과 같은 ‘성부’ 관이 없고 오히려 그들이 이단처럼 보일 것입니다. 웨인 그루뎀은 정 목사와 같은 이들을 향하여,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의식 중에 삼신론적 견해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독특한 인격성을 인정하지만, 나누이지 않은 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일성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바르게 진단합니다(조직신학(상), 은성, 356쪽). 따라서 정 목사는 양태론으로 공격받으니까 삼신론이라고 역공을 취한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위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기독론 비판: 정동섭 목사는 “어느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되거나… 한 적이 없었다”(174쪽)라고 말하여, 예수님의 양성 구별을 부인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권사의 엉터리 주장을 가져와서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는 지방교회 측을 양성의 분리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인자)로 구별하여 말했고(마 16:16, 8:20), 칼케돈 신조도 “양성의 구별이 연합으로 제거되지 않고”라고 했고,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루이스 벌콥도 자신의 칼케돈 신조 해설에서, “그러나 신인의 수난은 참으로 무한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신성은 감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근거와 기초를 이루는 것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이다.”라며 양성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극히 성경적이고 당연한 말도 정 목사(이 권사)처럼 양성 구별을 부인하는 시각에서는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정 목사는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을 전후하여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셨다고 말한 것에 대해,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다”고 강하게 부정합니다(175, 179쪽). 만일 이런 그의 말이 맞으려면, 주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처음부터 썩지 않는 몸을 가지셨거나, 아니면 부활 후에도 다시 죽을 수 있는 몸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이든 주님의 인성은 죄만 없으시지 우리와 똑같다는 칼케돈 신조를 정면으로 위반한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사실 정동섭 목사의 기독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주 예수님이 승천 후에 저 하늘에만 계시고 우리 안에는 안 계신다는 사상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구조적으로 주 예수님을 사람밖에 묶어두는 교리를 성자를 대리한 성령의 내주 교리로 보완하려고 하지만 성경에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요일 3:24 헬라어 원문 참조). 이처럼 삼위를 분리시키는 신론에서 비롯된,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를 부인하는 그의 사상은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서도 정 목사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고후 13:5).

 

그동안 한국 교계는 소위 이단을 감별하는 이들의 말은 무조건 맞다고 여겨 그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퍼 나르거나 정 목사처럼 자신의 책에 차용하는 식으로 이단 대처 사역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권사 같은 소위 ‘평신도 이단 사역자’의 경우 그의 무리한 이단 정죄가 차츰 문제가 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예장 합동과 고신 교단이 이 권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류 금지를 결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정 목사는 이러한 공교단의 결정을 무시하고 이 권사의 주장을 그대로 자기 책에 가져다가 지방교회 측을 비판했고, 심지어 그의 추천사까지 버젓이 실었습니다. 이처럼 원칙도 없고 수치를 모르는 행위를 주님은 엄중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고후 5:10).

 

 

인간론 및 인죄론 비판: 정동섭 목사는 삼분설은 헬라 교부들이 지지하고, 이분설은 라틴 교부들이 지지한다고 말합니다(190쪽). 그런데 그는 삼분설은 이단 혹은 신비주의로 빠질 수 있어 반대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분설의 위험성은 전혀 없을까요? 사실 영과 혼을 같이 보는 이분설로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일들의 세세한 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생명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신 결과인 거듭남, 변화, 형상을 본받음, 몸의 변형과 같은 구원의 여러 방면들을 두리뭉실하게 알 수밖에 없고, 성도들은 교리적인 관념을 붙들 뿐 정작 영적 생명은 매우 어리거나 아예 없으면서도 자기는 소위 정통 교회 소속이니 문제없을 거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혈로 인한 구속의 실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롬 3:24), 그분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영 안에 들어와서 내주하고 계십니다(요 3:6, 골 1:27). 따라서 ‘나는 의인이다’라고 말로만 외친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거듭난 영 안에 둘 때(롬 8:6), 비로소 칭의의 실재를 체험하고 더 나아가 삶 속에서 의로운 표현도 갖게 됩니다(13절). 그런데 정 목사처럼 사람의 영이나 생각(혼)은 같다고 믿으면, 이런 것들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정 목사는 말은 “칭의론은 교회의 사활이 걸린 교리”라고 하지만(278쪽),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분설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이 사활이 걸렸다는 칭의론이 통일되지 못하고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습니다. 거듭남 혹은 구원의 확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두 이분설의 부작용입니다.

 

관련하여 정 목사는 “’육신’에 있다는 말의 뜻은 …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이고, ‘영에 있다’는 말은 ‘거듭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개념”이라고 주장합니다(267쪽). 이것은 거듭난 사람은 육신 안에 있을 수 없고, 항상 영 안에 있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한 마디로도 그가 육체가 무엇이고, 영이 무엇인지를 체험적으로는 잘 모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 목사의 주장과 달리, 바울은 이미 거듭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영적으로) 죽을 것이지만,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롬 8:13). 이것은 거듭난 후에도 얼마든지 육신을 따라 살 수 있음을 전제한 말입니다. 따라서 정 목사처럼 ‘육신에 있다’는 말을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정동섭 목사의 죄론이 혼동 속에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했습니다. 즉 그는 죄를 죄 된 행위로만 알뿐,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롬 5:12)에서 언급된 사람들 안에 ‘들어온’ 죄(sin entered into)에는 무지합니다. 이처럼 육체도 모르고 죄의 본질도 모르는 사람은 영적인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 목사가 육체의 소욕에 이끌려 표절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후에도 별로 죄의식이 없고, 오히려 그 증보판 책을 낼 담력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인간론과 죄론에 대한 그의 바른 진리 인식의 부족에서 온 것일 수 있습니다.

 

 

구원관 비판: 정동섭 목사는 “정통교회는 이신칭의 구원에서 일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271쪽).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 논쟁, 혹은 김세윤 박사와 최갑종 교수가 제기한 소위 ‘유보적 칭의론’에 대한 최덕성 박사와의 반론 등을 모르고 이런 말을 했다면 무지한 것이고, 알고도 그렇게 말했다면 양심적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정 목사가 의지하는 이신칭의 구원론은 여전히 다툼이 있는 일종의 미완성 구원론입니다. 일부 개신교가 포함된 루터교회와 로마 천주교가 함께 서명한 ‘칭의론에 관한 공동 선언문(JDDJ)’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 문제는 더 혼미해집니다.

 

타락 후에 인류에게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포함한) 죽음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구원론은 이 둘을 해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경은 죄들은 주 예수님의 대속의 피 흘리심으로, 죽음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해결됨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정 목사가 개신교의 구원론을 대표한다고 소개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 내용을 보면, ‘모든 죄로부터 전적으로 깨끗하게 되고 완전하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할 뿐, 로마서 5장 10절 하반절이 말하는 생명에 의한 구원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287-288쪽). 이것이 바로 정 목사가 의존하는 신학의 한계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소위 ‘주입된 의’ 또는 ‘유입된 의’는 이단이라고 배척합니다(298쪽).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은 하지만, 여기서의 예수를 믿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들을 구속해 주신 사실을 믿는 것에 국한되고, 그분 자신이 부활 후에 우리 안에 영접되신 것은 제외시키는 믿음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허물과 죄들 가운데 죽어 있었던 우리의 영이 그 영의 내주로 다시 살아나는 거듭남도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합니다(요 3:6). 즉 칭의론 뿐 아니라 거듭남도 '순간적 중생론'과 '연속적 중생론'으로 첨예하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또한 내적인 변화가 중심인 우리의 혼의 구원이나 몸의 변형을 통해 영광 안으로 이끌림 같은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각 단계가 이들에게는 낯설 뿐입니다(롬 12:2, 벧전 1:9. 롬 8:23, 히 2:10). 이러한 구원론의 혼돈은 주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신인합일설’ 이단이라고 거부하고,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는 성경의 기록도 삼분설이라고 배척하는, 정 목사가 선호하는 편협한 교리체계의 부작용입니다(골 1:27, 살전 5:23).

 

 

교회관 비판: 정동섭 목사는 지방교회 측 교회론의 이런저런 면을 비판했을 뿐, 자신의 교회관을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난 글에서, 그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고 … 거듭나고 중생한 새사람들”(328쪽)로 정의한 것에 대해 이런 교회관이 틀리지는 않지만 ‘새사람들’에서 하나의 유기체인 ‘한 새사람’으로 더 전진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추가하여 여기서는 그가 “지방교회는 역사적 정통교회를 부정한다”(322쪽)라고 했을 때 그 말의 실체를 조금 자세히 따져보고자 합니다. 정 목사는 정통교회를 “사도적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교회”라고 정의했습니다(323쪽). 그는 이어서 이 교회는 1) 신구약 성경을 유일한 신앙 기준으로 삼고, 2) 초대교회 4대 신조를 믿고, 3) 종교개혁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적 교회, 이를테면 사도 바울이 정의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의 충만”이며(엡 1:23), 그 외의 것들은 후대에 아전인수 격으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실체가 금방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로마 천주교는 2000년 8월 6일에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제프 라칭거의 주도로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이라는 문서를 발표했는데, 17항목에서 “단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베드로의 후계자에 의해서 및 그와의 교제 안에 있는 주교들에 의하여 통치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속한다”라고 천명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로마 천주교만이 교회이고 정 목사가 말한 오늘날의 개신교는 정통교회가 아닙니다. 반대로 천주교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거부할 것이니 그 역시 정통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방교회 측의 교회론을 비판하는 이들과 토론할 때마다 이 ‘정통교회’ 문제가 대두되기에, 토론 상대방이었던 최삼경 목사와 김홍기 목사에게 아래 사실을 인정하는지를 거듭 질문했지만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아마도 시인도 부인도 곤란한 사안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재준 목사는 보수주의 신학에 대하여 더욱 가혹한 평을 내렸다. 그는 말하기를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히 위장된 실제적인 인본주의요, 정통적인 이단이라고까지 극언하고 정통주의를 일종의 이단으로 몰아붙였다”(김진복, 한국장로교회사, 1995년, 156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으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 `시인`이라는 단어의 뜻은 ... 어떤 고문이나, 환란, 고난, 고통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믿는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을 `시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일경에 동조했던 무리들이 오늘날 신앙의 정통을 부르짖는다고 떠들어대며 가장 잘 믿는 이들처럼 자신들의 속을 감추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우상숭배를 받아들였다면 분명히 이단이다"(김진수 목사, 현대종교 97년 9월호, 57-59쪽).

 

“거기(한기총)에는 예장 통합 측 같은 자유주의적 교단이나 기성기침 같은 포용주의적인 교단들이 가입되어 있고, 그뿐 아니라 기장이나 기감 같은 자유주의 교단들까지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 교회들은 NCC뿐 아니라, 이러한 타협주의적인 단체도 배격해야 한다. 보수 교회들은 자유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보수 교회들과만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김효성, 현대교회 제문제,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66쪽).

 

이런 다양한 시각의 정통교회 기준에 따르면,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더 구체적으로 신사 참배한 모든 교단들과 기성, 기침, 기장, 기감 등은 정통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 목사가 말하는 정통교회의 실체는 사실상 한국에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지방교회 측이 말하는 성경적인 교회관을 배척하고, 상황과 주체에 따라 바뀌는 소위 정통교회의 정의만으로는 바른 교회관 더 나아가 건강한 믿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정 목사는 알아야 합니다.

 

 

종말론 비판: 바른 종말론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하는지, 혹은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구원의 경륜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성경 66권이 말하는 내용들의 최종 결론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 보는지와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요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이자 하나님께서 일하신 최종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동섭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새 예루살렘을 진짜 금으로 된 물질적인 공간으로 이해하고, 그 금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 영원한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참고로 그의 책의 종말론 부분은 이단 규정된 이인규 권사가 지방교회 측을 공격할 때 하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정 목사가 이 권사의 말을 얼마나 의지했는지는 검색창에 ‘이인규, 지방교회’라고 쳐보면 금방 알 수 있음).

 

“Lee의 해석에 의하면 결국 성도들의 영원한 소망인 새 예루살렘도 문자적 실체가 없는 영적 상징물이 된다. 즉 새 예루살렘은 그의 영적 해석을 위한 존재일 뿐이다. 성도들의 영원한 본향, 소망을 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121쪽). (요한복음 14장의 아버지 집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해석을 비판하는 문맥에서) “새 예루살렘도 문자적으로 물질적인 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구속받은 자들로 이뤄진 살아 있는 구성체라고 했으며 … 과연 어떻게 어디서 하나님과 거하게 될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날 영원히 신자들이 있게 될 영원한 소망인 새 예루살렘은 Lee의 영적 해설로만 남게 되었다”(137쪽). “실제적인 천당과 물질적인 새 예루살렘”(376쪽), “죽어서 가는 장소적인 개념의 천국”(379쪽).

 

우선 정 목사가 말하는 소위 ‘죽어서 가는 장소적 개념의 천국’은 예수님과 강도가 갔던 ‘낙원’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낙원은 그의 주장처럼 죽은 이들이 영원히 살 공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실 때 그 낙원에서 나오셨고, 우리 또한 장차 휴거 될 때 거기서 나와 낙원에 있던 영과 혼이 땅에 묻혔던 몸과 결합되어 공중으로 휴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 목사의 종말론에는 이러한 1) 몸을 입은 부활이나 2) 공중으로 휴거 됨, 3) 그 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의 과정 등이 생략되었습니다(살전 4:16-17, 고후 5:10). 따라서 죽으면 천국 가서 거기서 영원히 살 거라고 착각하게 하는 그의 주장은 성도들을 속이는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종말론입니다.

 

한편,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아버지 집’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지방교회 측과 “하늘의 천국”이라는 정 목사의 주장이 대립합니다. 이것은 “내가 가서”와 “다시 와서”(3절)를 십자가로 가심과 부활 후에 우리에게 오심으로 볼 지(위트니스 리) 아니면 승천과 재림으로 볼지(정 목사)의 문제입니다. 정 목사처럼 생각하면, 주님은 아직 재림 전이시므로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도록 하겠다”(3절) 혹은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20절)이라는 말씀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것은 아래에서 보겠지만, 그들이 지금 현재 주님의 몸인 교회의 실재를 놓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그중에서도 14장부터 17장은 매우 깊습니다. 즉 “나의 아버지 집”(14장), “포도나무와 가지들”(15장), (여자가 낳은) “아이”(16장)는 같은 실체, 즉 주님과 우리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장에 있는 성전 혹은 아버지의 집이 구약의 성막과 성전처럼 물질적인 건물에서 주님 자신으로 전환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19-21절). 실제로 이 사건 이후로 성전 혹은 아버지 집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고전 3:16), “여러분도…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있습니다”(엡 2:22), “이 (하나님의)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딤전 3:15), “우리가 하나님의 집입니다”(히 3:6) 등의 말씀처럼 일관되게 유기체인 교회인 주님의 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주님의 몸인 교회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산출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요 12:24).

 

이제 아래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정 목사가 상상하는 진짜 금으로 된 물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의 장래 모습이라고 본, 저명한 두 개혁 신학자(이필찬 교수, 황창기 박사)의 말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정 목사는 비록 우리가 한 말은 배척하더라도 이분들이 본 새 예루살렘의 관점은 마음을 열고 잘 소화해 보기 바랍니다.

 

“목회자든 신학생이든 평신도든, 누구도 성경으로서의 요한계시록을 상식적인 차원으로 읽는 경우마저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1:2과 21:9에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새 예루살렘은 곧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21:9-22:5의 말씀을 소위 ‘내가 본 천국’으로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는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이 천국을 묘사하는 데 이 본문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내가 본 천국으로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해로는 특정 소수 집단만이 그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이단적 해석에 대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며,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는 열두 문은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백성을,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는 열두 기둥은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면,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은 어느 소수 집단이 아닌 전체로서의 교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 공동체라는 자명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어느 소수 집단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방지하고 반박할 수 있다(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 10장을 참조하기 바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쓴 것이다”(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론 참조).

 

“‘새 예루살렘 성’은 요한계시록의 구원론적 비전의 완성 혹은 정점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을 장소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참고. 찬송가 541장; 사 65-66), 아니면 인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신천신지는 장소적으로, 새 예루살렘 성은 예수님의 신부 즉 인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 실제로 지상 교회는 이 영광스러운 미래의 세계를 이미 이 땅에서 맛보고 있다. 신천신지와 그 안에 사는 새 예루살렘 성을 묘사하는 계 21-22장 전체는 상징으로 해석되어야지 미래 천국의 장소에 관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예수님은 신천지에 사는 새 예루살렘 성인 교회의 눈물을 씻으신다”(한국동남성경연구원 원장 황창기 박사, www.kosebi.org).

 

이처럼 성경 진리의 핵심 중의 핵심인 그리스도 자신과의 성도와의 연합(요 14:20)을 정 목사는 ‘신인합일사상 이단’이니 ‘4위 1체라는 해괴한 교리’니 하며 조롱하고 반대하다 보니, 그의 구원론과 교회론과 종말론은 그 실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쏙 빠진 채 공허한 교리로만 남게 된 것입니다. 설사 새 예루살렘이 정 목사의 주장처럼 진짜 순금으로 된 으리으리한 건물이라고 해도 마음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고 그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까지 자라기를 소망하는 이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는 어떤 분의 가치관에도 미치지 못한 값싼 소망이자 비진리입니다. 한 마디로 정동섭 목사의 종말론은 가짜입니다.

 

 

결론: 정동섭 목사는 “워치만 니의 신학적 사상은 주로 세대주의와 형제교회, 그리고 케직 사경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97-98쪽). 일부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차별화 하나, 위트니스 리 역시 형제회를 거쳤고 워치만 니를 통해 케직 사경회의 영성을 전수받았습니다. 따라서 정 목사는 자신이 참으로 학자적인 양심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두 유산을 물려받은 지방교회 측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형제회의 존 넬슨 다아비는 1) 성경의 무오성, 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3) 대속의 죽음, 4) 몸을 입은 부활, 5) 재림 혹은 성경적인 기적을 믿는 소위 <근본주의 5대 강령>의 핵심 내용을 제공한 인물입니다. 메이첸은 그 당시 자유주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이 근본 진리를 사수하려고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따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합동 교단의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가 바로 이 메이첸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지방교회 측은 최소한 이 근본주의 5대 강령을 고수하는 믿음에 있어서만큼은 합동 교단 못지않게 보수적입니다.

 

또한 케직운동(Keswick Convention)은 1870년대 영국의 중상류층 신자들 가운데 크게 확산되던 것인데, 고도의 영적인 삶과 그리스도의 성결을 지향했습니다. 구체적으로 1) 죄 포기, 2) 주의 뜻 순종, 3) 하나님 섬김, 4) 하나님과 사귐, 5) 소유됨, 6) 성령의 채우심, 7) 봉사라는 7 단계를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케직 영성의 특징은 1) 개인적인 기도에서 은밀한 만남, 2) 숨어 있는 죄의 각성, 3)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 4) 성령의 능력 체험, 5) 하나님 임재 체험, 6) 새 성품으로 변화, 7) 순종과 헌신의 삶, 8) 높은 형태의 성결, 9) 풍성한 승리의 삶입니다. 한편, 기독교학술원장인 김영한 박사는 제 56회 월례 발표회에서, “케직영성은 … 기독교학술원이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위대한 유산”이고, “오늘날 성장이 정체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케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지방교회 측은 폴리갑의 제자로서 영지주의자를 대항하여 <이단 논박>을 쓰고, 인류의 참된 기원과 그 종착점을 설명하는 ‘총괄 갱신’(recapitulatio) 신학을 외쳤던 이레니우스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받아 "그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de incar. 54, 3)"라고 말했던 아타나시우스 등으로 대표되는 동방교회 측이 추구하는 신화(Deification)를 발전적으로 수용합니다. 이것은 고신의 유해무 교수가 자신의 책 <신학: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송영>에서 이러한 동방교회 구원론을 고대교회의 유산으로 여겨 “우리의 신학과 신앙생활에 도입할 필요성이 크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270쪽).

 

그렇다면 정 목사는 형제회와 케직 사경회의 유산 그리고 거기에 동방교회 구원론의 장점을 더한 지방교회 측의 신앙(교리)에 대해, 지금과 같은 편향적인 시각을 떠나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는 것이 공정합니다. 그것은 행크 헤네그래프의 CRI가 “우리가 틀렸었다”라는 논문을 통해 했던 것처럼,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전 세계 지방 교회들은 몇 가지 지엽적인 진리 해석에서는 이견이 있으나 (위 근본주의 5대 강령 같은) 핵심 진리에서는 정통이고, 참되게 거듭난 그리스도의 몸 안의 지체들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정동섭 목사에게 큰 긍휼을 베푸사 정 목사가 넓혀진 마음으로 이러한 화목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고후 5:20)(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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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지방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