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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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의 실체(정동섭)> 책자의 실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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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의 실체(정동섭)> 책자의 실체는 무엇인가?

 

 

세칭 구원파 공격수로 알려진 정동섭 목사(이하 ‘정 목사’)가 최근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그리고 ‘주의 회복’을 비판하는 <지방교회의 실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우리는 아래에서 그가 왜 이런 책을 냈으며,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를 그의 교리 비판을 중심으로  중요한 문제점만 개괄적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정 목사는 왜 지방교회 측을 비판할까?

 

정 목사는 ‘권O찬 구원파’ 출신입니다. 그가 구원파에 있었을 때, 영어를 잘하다 보니 유병언 씨의 통역을 맡는 등 최측근과도 가까웠지만, 그가 구원파를 나온 후로는 구원파가 사회 문제가 될 때마다 소위 구원파 전문가로서 매스컴을 타면서 대중 앞에서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구원파 전문가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지방교회 전문가는 아닙니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오래전에 아내를 따라 지방교회 측 집회에 잠시 참석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는 <지방교회의 실체>라는 책까지 펴내게 되었을까요?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부득이 그와 지방교회 측 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정 목사는 주로 구원파를 비판하는 내용에 덤으로 ‘지방교회’를 끼워 넣어 <그것이 궁금하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우리는 그 책을 검토한 후에, 상담심리학과 교육학이 전문인 그가 조직신학을 배운 적이 없는데, 교리를 심도 있게 다룬 것이 의아했습니다. 정밀 검토해 보니, 그가 쓴 지방교회 교리 비판은 미국의  CRI가 펴낸 <The New Cults> 관련 부분 전체와 또 다른 두 개의 영문 책자 일부를 번역하여(표절하여) 짜깁기한 후에, 자신의 연구물처럼 독자들에게 소개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어 원문들은 미국에서 우리의 문제제기로 이미 폐기되거나 반박된 것들입니다(그 후 CRI는 6년간의 재연구 후에 위 책자 내용이 틀렸었다고 시인하고 공개 사과함). 따라서 우리는 정 목사와 해당 출판사에게 여러 경로로 이 표절 출판을 강력하게 항의했고, 마침내 도서출판 하나 대표인 전광규 목사가 재출판을 중단하고, 시중에 유통되던 책들은 총판을 통해 모두 회수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추측건대, 이 책 회수 사건으로 정 목사가 다소 자존심이 상했을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침례교 신학대학 출판사에서 제목만 바꿔 펴내거나, 논문 형태로 두란노 목회와 신학 등의 기독교 잡지에 기고하여 쌓았던 지방교회 전문가라는 평판이 손상된 것도 그가 어떤 형태로든 재반격의 기회를 엿보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정황은 지방교회 측과 공개 토론을 벌이던 김홍기 목사에게 그가 보낸 이 메일 내용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납니다. 정 목사는 보복심리로 이 책을 출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49쪽), 그 실제 속사정은 자신의 양심과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사실 표절은 지식 도둑질입니다. 세상에서는 논문이 표절로 드러나면 공직에서 낙마하는 등 도덕적 기준이 매우 엄격합니다. 현재 학계와 교육부의 보편적인 표절 판정 기준은 타인이 작성한 “구체적인 문장 표현 단 한 구절”이라도 “인용부호와 출처 표시 없이 활용하면 모두 표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 목사는 한 줄이 아니라 CRI의 그레첸 파산티노 외 1인의 논문을 통째로 표절하여 임의로 출판하고도 이 책이 그 문제의 책의 수정 증보판이라고 밝힐 만큼 염치가 없습니다(134쪽). 지금이라도 이 자신의 표절 행위에 대해 당사자인 미국 CRI와 한국 교계 앞에 솔직히 시인하고 공개 사과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이단 연구가로서의 최소한의 도덕성이라도 유지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끝까지 지켜볼 것입니다.

 

아무튼 정 목사의 새로운 반격 카드인 이 <지방교회의 실체> 책자는 ‘장고 끝에 둔 악수’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장 합동과 고신 교단에 의해 이단 규정 및 교류 금지된 이인규 권사를 비롯한 이단성 있는 인사들의 주장 그리고 오류가 있는 불법 표절 자료를 지방 교회들을 비판하는 주된 논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毒) 나무에서 열린 열매’는 전혀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이제 아래에서는 이 책의 핵심인 지방교회 교리 비판에 대해, 본질적인 문제점만 우선 간략하게 지적해 보겠습니다. 각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반론은 별도로 있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론 비판의 실체: 정 목사는 이인규 권사(이하, ‘이 권사’)의 주장을 빌려, 지방교회 측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가 ‘성부가 육신을 입고 성자가 되셨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믿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해가 발생할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이단 감별사들 본인의 판단 기준에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권사는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셨다’라는 말을 읽을 때, 여기서의 ‘하나님’‘성부’를 가리킨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보면 이것이 아들 하나님 혹은 삼위 전체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가 다 하나님이시지 성부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말은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이나 하는 말입니다. 이 한 가지로도 그들의 양태론 가설은 무너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삼위의 상호 내재를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삼위가 영원하시고 각각 구별되심을 전제한 말입니다. 이것은 CRI 연구자도 인정했듯이, 참된 양태론자는 결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러자 교회와 신앙이 주관한 공개토론에서 김홍기 목사는 상호 내재는 삼위의 본질들이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당 본문의 ‘나’와 ‘아버지’를 위격이 아닌 본질로 보는 위험한 주장입니다(요 14:10). 또 어떤 이는 우리의 ‘세 위격, 한 영’은 틀렸고 ‘세 위격, 세 영들’이 맞다고 하다가 한기총과 소속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혹자는 소위 수증기 비유, 수박 비유를 문제 삼습니다. 물론 비유 자체는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비판보다는 CRI처럼 어떤 문맥에서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를 살피는 아량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혹은 아들과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표현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같은 취지의 표현일 뿐입니다(요 14:9).

 

칼빈주의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는 ‘주기도문의 성부는 배타적으로 제1 격만이 아닌 삼일 하나님이시다’(… The Triune God is our Father)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균형 잡힌 신관입니다. 모든 지방교회 측 비판자들도 이 관점을 붙들기를 정중하게 권면합니다. 끝으로 정 목사의 오해와 달리, 영어권은 Triune God과  Trinity를 편하게 같이 쓴다는 것은 구글 검색만 해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당장 위 뵈트너 자신도 the Triune God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기독론 비판의 실체: 정 목사는 위 신론에 이어 기독론도 이단인 이 권사의 일방적인 거짓 주장을 빌려 지방교회 측을 정죄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칼케돈 신조처럼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구별’하지만, 이 권사의 주장처럼 그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거나 ‘새로운 본성을 가진 혼합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복역 성경 요한복음 1장 14절 각주 2 내용이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정말 그러한지는 본인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 목사는 또한 “지방교회의 가장 큰 이단성”은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 즉 성령으로 변형되었다고 가르치는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입니다(고전 15:45 하). 그는 아마도 우리가 이것을 삼위의 제2 격이 부활 후에는 제3 격이 되셨다라고 믿는다고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우리는 삼위의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포함된) 온전한 하나님(The Triune God)이라고 믿는 로레인 뵈트너와 같은 관점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권사와 정 목사의 그런 오해는 기우일 뿐입니다. 그것은 삼위를 각각 분리시킨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발상입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주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이 부활 전과 후에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초점을 둔 말씀입니다. 즉 이것은 그분의 죽을 인성이 부활 후에 다시는 죽지 않는 인성이 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정 목사처럼 이런 인성의 변화마저 부인한다면, 그분은 또 죽으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인데, 그것이야 말로 심각한 이단 사상입니다(계 1:18).

 

끝으로 성경에서 ‘거룩’은 위치상의 분별과 성분상의 거룩 두 방면이 있습니다(마 23:17, 롬 6:19). 그런데 하나님의 본성만이 거룩하십니다(벧전 1:4, 16). 지방교회 측이 ‘주님의 인성이 거룩하지 않았다’라고 할 때는 후자를 강조한 말입니다. 만일 정 목사의 주장처럼 주님의 인성도 거룩, 즉 신성한 본성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그분이 참 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칼케돈 신조에 의하면, 그분의 인성은 죄만 없으시지 우리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기독론 이단입니까?

 

 

인간론 비판의 실체: 정 목사는 이 주제에 무려 85쪽(184-269쪽)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쓸데없이 장황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말을 여기저기서 반복하고, 심지어 207쪽의 “인간의 타락…” 부분은 두 번이나 연달아 적었고, 글의 전개도 삼분설에 이어 인죄론을 말하다가 다시 삼분설을 거론하는 등 두서가 없습니다. 인용 출처 쪽 수도 불분명하게 적어 원문 검증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칭 구원파와 억지로 연결하려고 명백한 거짓말(지방교회는 회개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도 슬쩍 집어넣었습니다. 이런 무성의한 모습은 그저 평소에 여기저기에서 모았던 자료들을 서둘러 대충 출판사에 넘긴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저자의 불성실한 집필 태도는 그가 쓴 내용에 대한 신뢰마저 떨어뜨릴 수 있음을 정중하게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인간 구조 삼분설 비판의 실체: 비록 장황하지만 정 목사가 인간의 구조(삼분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분설, 삼분설은 모두 성경에 있기에 어느 견해도 이단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192쪽), 지방교회 측이 주장한다는 다음 세 가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래의 비판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정 목사 본인의 성경 이해가 부족한 것이 원인일  뿐입니다.

 

1) ‘하나님은 인격이 아닌 영이라는 것이고 인간의 영에는 인격적인 기능이 없다고 한다’(184쪽): 정 목사는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합니까? 그가 출처로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영적 전쟁, p.46>은 워치만 니 전집 1집 1권 제2장인데, 영어 원문과 한글 번역 모두를 찾아봐도 46쪽과 그 전후에는 그가 따옴표로 인용한 그 단락(185쪽), 더 구체적으로 ‘영은 인격이 없다’라는 결정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전 세계 하나님의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는” 신학적인 오류라는 내용이 이처럼 출처조차 불분명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2) ‘인간의 타락에서 영을 제외시켜 전인격 타락을 부정한다’(185쪽): 이 말은 통합 교단 토론자의 주장이나, 결국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 특히 타락 시 사람의 영은 “죄의 오염으로 손상되고… 죽었다”고 가르칩니다(누가 이단인가?, 180-183쪽 참조).

 

3) ‘영에는 죄가 없고, 영에만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한다’(190쪽): 여기서의 영은 창조나 타락 시의 영이 아니라, 거듭나서 주님과 연합된 영을 말합니다(고전 6:17). 영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기보다는 거듭날 때 그분께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신 후에(요 3:6), 믿음을 통해 점차적으로 혼을 포함한 우리의 마음에까지 거처를 확대해 가십니다(엡 3:17, 2:22).

 

인죄론 비판의 실체: 정 목사는 말로는 성경으로 변증한다지만 실제로는 상대적인 기준인 자신이 선호하는 신학과 교리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영어 성경은 헬라어 원문을 따라 죄(sin)와 죄들(sins)을 구분합니다. 죄가 뿌리라면 죄들은 그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단수의 죄를 설명하면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sin entered the world)고 말합니다(롬 5:12). 그 후에 이 죄는 (사도 바울로 대표되는) 사람의 “육체 안에 거하면서”(롬 7:18-20), “왕 노릇 하며”(5:21), “사람을 지배하고”(6:14), “사람들을 속이며 죽이고”(7:11),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을 하도록” 강요합니다(7:17, 20).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죄를 ‘사탄의 본성’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정 목사는 이 죄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 “불신앙, 불순종, 교만, 미움”,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타락한 것”, “악한 행위”, “전통적으로 원죄는 아담의 역사적 범죄(타락)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 등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모두 죄들(sins), 즉 죄의 열매에 해당하고, 위 로마서 5-7장이 말하는 단수의 죄 혹은 죄의 법을 정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타락할 때 인류 안에 ‘들어온’ 단수의 죄(sin)는 무엇일까요? 개혁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이 죄를 ‘수수께끼’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정 목사 본인도 성경적인 죄의 본질은 잘 모르고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 목사는 인간 구조 삼분설과 죄론 비판에서 하지도 않은 말과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낸 내용을 적당히 짜기워, 우리를 ‘구원파와 같은 부류’, ‘신영지주의’, ‘영지주의적 이원론’, ‘삼분설로 인한 분열적 신앙생활’과 연관 지어 낙인찍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에 터 잡지 않은 이런 무모한 노력들은 잠시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결국엔 허사가 될 것입니다(마 15:13). 특히 “내 육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롬 7:18), “영은  의 때문에 생명입니다”(롬 8:10)와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에 근거한 말도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라며, 그래서 지방교회가 영지주의 이단이라는 정 목사의 반복되는 거짓 증거는 무지하고 상식을 넘은 말입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영과 혼과 몸(spirit, soul, body)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살전 5:23). 참사람이신 주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spirit, 요 11:33)과 혼(마 26:38, 요 12:27)과 몸(마 27:59)을 가지셨습니다(원문 참조).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사람의 상태를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과정에서 각각 다르게 묘사하고 있고, 또 그 내용도 매우 복잡합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노련한 의사처럼 성경 본문들을 섬세하게 살피면서 다뤄야 하고, 지금처럼 수술칼로 함부로 자르다가 무의식중에 신경 줄을 끊는 식으로 다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지, 살리는 일이 아닙니다.

 

 

구원관 비판의 실체: 정 목사는 이 책에서 구원에 관해 많이 말했지만 정작 구원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못했습니다. 즉 그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지만, 정작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지 혹은 모호성은 그가 따르는 교리 구조에서 불가피하게 파생한 부작용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두 팔로 받아 안고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라고 선포합니다(눅 2:28, 30).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 구원이고(행 4:12), 구원받는 것은 이분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는 것(영접)입니다. 그분이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것이 거듭남이고, 우리 혼에 들어오신 것이 혼의 구원, 즉 변화이고, 몸에까지 들어오신 것이 몸의 구속입니다(요 3:6, 롬 8:23, 벧전 1:9, 롬 12:2, 빌 3:21). 사도 바울은 이것들을 일컬어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을 것’(we shall be saved in His life)이라고 했습니다(롬 5:10 하). 물론 이러한 구원은 구속, 즉 칭의를 전제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 목사는 1) 영과 혼을 같이 보고, 2) 죄 사함의 칭의만을 강조하고, 3)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서 연합되심을 반대하는 교리 신봉자입니다. 이들은 주님 자신이 아닌, 성령이 그리스도의 ‘대리’로 우리에게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해야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요 1:12, 요일 5:10). 이들은 승천 후에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이 어떻게, 또 사람의 어디로 영접되시는지를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속된 성도들도 죄 사함의 칭의는 알지만, 거듭남, 생명의 자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자신들밖에 두는 그들의 교리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정 목사 본인이 이처럼 바른 구원관에서 벗어나 있다 보니, 자신과 유사한 통합 교단 토론자의 주장이나 단체 구원이라는 이 권사의 터무니없는 말을 빌려 우리의 성경적인 구원론을 비판하고 있습니다(279, 298쪽). 그는 또한 문맥의 취지를 왜곡하여 ‘지방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아울러 ‘회개하고 그분 안으로 믿고 침례 받은 후에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는 위트니스 리가 <진리공과>에서 한 말을 본인의 책에 인용하고도(280, 290쪽), 지방교회는 회개를 부인한다는 허언을 반복하는 것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 목사가 우리의 구원관을 비판하려면 지금처럼 지어낸 말이나 말꼬투리 잡는 식이 아니라 회복역 성경의 각주들(롬 5:10의 각주 2, 벧전 1:5의 각주 2)에 요약된 우리의 공식적인 구원관을 직접 읽어 보고 그 내용에 대해 비판하기를 요청합니다. 아울러 내주하시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구원관임을 눈이 열려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골 1:27).

 

 

신인합일사상 비판의 실체: 정 목사는 여기서도 통합 교단과 이 권사와 현대종교 편집장 출신인 이영호 목사의 흠결이 있는 주장을 빌려 우리를 비판했습니다. 사실 이 쟁점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즉 우리가 신화(Deification) 진리를 말할 때,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부정하는지 여부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차이를 인정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소위 신화를 거론할 때마다 반복해서 강조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사안입니다.

 

참고로 정 목사와 위 비판자들은 죄와 칭의를 강조하는 서방 교회 전통을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석하게도 그리스도를 사람밖에 묶어 둠으로써, 1) 한 알의 밀이 죽어 산출된 많은 밀알들(요 12:24), 2)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많은 아들들(롬 8:29), 3) 그리스도의 충만인 주님의 몸(엡 1:23), 4) 그날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됨(요일 3:2)이라는 성경의 주요 진리들을 소화할 역량이 없는 신학 구조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 요한의 글 그리고 바울 서신이 다루는 핵심 진리들이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아타나시우스, 이레니우스 등의 정통 교부들이 주축인 동방 교회 전통을 경계하고 심지어 배척합니다.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런 중에 개혁 신학자들 일부가 역사적인 교회의 또 다른 갈래인 동방 교회의 유산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합신의 조O수 교수, 고신의 유해무 교수 같은 경우입니다. 특히 유 교수는 <신학: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송영>(성약 출판사)에서 동방 교부들의 신학을 다루었고, 특히 제5장에서는 ‘사람의 신격화’라는 동방 교회 구원론으로 서방 교회 구원론의 부족을 보완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 목사도 현재와 같은 자신의 틀에서 나와, 이러한 분들과 대화도 해 보고 성경을 보는 관점도 넓혀 보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위 유해무 교수의 신격화 이론을 연구하고 검증한 결과를 지금처럼 한국 교계 앞에 소개해도 좋을 것입니다.

 

 

교회론 비판의 실체: 사실 이 교회론 문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즉 교회는 무엇인지를 성경에 따라 정의하고, 이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땅에 출현했는지를 성경의 기록에서 살핀 후에, 이 둘을 합하여 성경적인 교회론을 정립하면 됩니다. 초기 교회이래 지금까지 실제 역사에서 나타난 이런저런 교회 모습들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갈 방면을 살펴보기 위한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먼저 성경은 교회를 “그분의 몸”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라고 말합니다(엡 1:23). 그런데 정 목사는 교회를 “죄 사함 받아 거듭나고 중생한 새사람들”로 정의했습니다(328쪽). 이런 정의도 나쁘지 않지만, 그는 이런 ‘많은 밀알들’에서 그 밀알들로 만들어진 ‘한 떡’(고전 10:17)으로, ‘새사람들’에서 ‘한 새사람’(엡 2:15)으로 더 전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 하나뿐인 ‘주님의 몸’은 성경에서 주로 지역 단위의 교회들로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행 13:1, 고전 1:2, 계 1:11). 그러한 최초의 신약 교회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입니다(행 8:1). 이처럼 성경에 있는 교회들은 ‘지역 교회들’(local churches)이 절대다수이고, ’OO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이 네 곳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역에 있는 교회의 초기 모습일 뿐, 소위 ‘가정교회’가 아닙니다. 참고로 고신 교단은 한때 이 문제가 현안이 되자 교단 차원에서 심층 연구한 후에, 가정 단위의 독립된 교회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떤 이는 두세 사람이 가정에서 모이면 그것이 교회가 아니냐고 항변하나, ‘두세 사람’의 말도 안 들으면 ‘교회’에게 말하라는 해당 본문은 이 둘이 각각 다른 것임을 보여 줍니다(마 18:16-17).

 

여기서 소위 ‘지방교회’ 개념에 대해 분명히 밝힐 것이 있습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라는 말을 쓸 때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위 예루살렘 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그 지방에 사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 그 지방 교회라고 이해하고 그런  의미로 사용합니다. 비판하는 이들이 아무리 이 점을 악의적으로 왜곡시키려 해도 아래 내용이 사실인 것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지방 교회라 하지만 이는 지나친 말이다. 물론 입장으로 보나 원칙, 본질, 증거 등 각 방면으로 보아 지방 교회임에는 틀림없으나 양적으로 말할 때 지방 교회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예컨대 대북(臺北)의 지방 교회는 응당 대북의 전신도를 포괄 망라하고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위트니스 리, 성경에 나타난 교회, 한국복음서원, 99-100쪽).

 

끝으로 역사적인 교회 안에는 그동안 이런저런 많은 주님의 일꾼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결과적으로 위 주님의 몸인 교회의 본질인 거룩과 하나 됨에 기여했고, 또 반대로 어떤 이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심지어 나눠지게 했습니다. 주님은 그 몸의 머리로서 그 각각에 대해 엄중하게 평가하고 또 심판하실 것입니다(고후 5:10, 고전 3:17, 마 7:22-23). 물론 그때는 정 목사의 이 책도 그분의 엄중한 평가 대상이 될 것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4위 1체라는 교리 비판의 실체: 정 목사가 ‘4위 1체’라고 다소 악의적으로 번역한 영어 본문은 ‘four-in-one God’입니다. 이 원문에는 정 목사가 은연중에 내포한, 넷(성부, 성자, 성령, 교회)이 모두 신격을 공유한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일 뿐 머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은 교회 안에 있다’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므로, 지금처럼 비판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요 14:20, 17:21).

 

정 목사는 또한 “그분은 본질상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없으시다”라고 말합니다(366쪽). 그러나 그의 이런 말은 “아버지, …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안에 그들을 지키시어,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 17:11, 21)라는 주님의 간절한 기도를 대적합니다. 우리는 ‘사울아 네가 왜 를 박해하느냐’(행 9:4)라며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했던 주 예수님을 만났던 사울처럼, 정 목사가 직접 그분을 만나도 지금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종말론 비판의 실체: 정 목사는 이 항목 역시 이단인 이 권사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정 목사(이 권사)의 주장과 달리,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 동일하게 그분은 눈에 보이게 구름을 타고(마 24:30) 올리브 산에(슥 14:4) 돌아오실 것이다”(행 1:11, 각주 4). 우리는 성경적인 천국도 인정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천국은 실재(마 5-7장)와 외형(13장)과 출현(24-25장)의 세 방면이 있다”(마 5:3 각주 4 참조). 우리는 신체적인 부활을 믿습니다(살전 4:16). 우리는 믿고 죽으면 낙원에 가는 것은 믿지만, 그 낙원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에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삼 일 만에 부활하실 때 낙원에서 나오셨고, 우리도 부활할 때까지만 낙원에 있을 것이고 낙원은 일종의 임시 거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실제적인 천당과 물질적인 새 예루살렘”을 믿는 정 목사의 비성경적인 종말론을 단호하게 배척합니다(376쪽). 저 하늘 어디엔가 진짜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천당이 있다는 가르침은 심각한 누룩입니다. 성경에서 새 예루살렘은 그 기둥이 사람으로 되어 있고, 어린양의 신부로서 말도 하는 살아 있는 인격체입니다(계 3:12, 계 22:17, 21:2). 결코 거대한 진짜 금덩어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오늘날 교회가 완성된 모습이라는 종말론 전문가요 개혁 신학자인 이필찬 교수와 전 고신대 총장 황창기 박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방교회는 영지주의적, 도덕폐기론적 이단이다’라는 결론의 실체: 정동섭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지방교회와 구원파는 현대판 영지주의로 자연스럽게 도덕폐기론적 가르침을 수반하고 있다’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420쪽). 즉 “도덕률폐기주의(반율법주의)는 육체는 본래 악하고 영혼만 순결하다는 사상”을 가리키는데, 지방교회 측이 그런 사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고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말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아래 내용에서 보듯이 영지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영지주의를 배척하고 경계합니다.

 

“우리는 만물을 적극적으로 보아야 한다. 영지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만물을 악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창조물 중에서 먼저 나신 분이 되셨다. …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본다면, 우리는 창조물이 악하기는커녕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표현임을 알게 될 것이다.”(골로새서 LS #34, 309쪽).

 

그는 또한 자기가 <그것이 궁금하다> 책자에서 전혀 근거도 없이 “지방교회에 속해 있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해 놓고, 이 증보판에서 그런 말의 출처로 위 책(정동섭, 1994)을 두 번이나 제시하는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422, 430쪽). 이런 비양심적인 거짓 사실을 근거로 지방교회 측을 “분리주의 이단” 운운하는 것도 부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결론: 우리는 지방교회 측에 대한 교계의 판단은 미국 CRI의 “우리가 틀렸었다”라는 논문 내용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야 한다고 봅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정 목사의 이 <지방교회의 실체>를 포함한 위 논문 이전의 평가는, 사실 왜곡과 상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한 여러 자료들의 이합집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CRI는 지방교회 측의 각종 1차 자료들을 6년간 심층 분석 후에, 우리를 몇 가지에서는 동의할 수 없으나 이단이 아니고 정통이며, 참된 몸 안의 지체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변증가였던 노먼 가이슬러 외 1인이 반박했고(82쪽), 그 반박에 대해 지방교회 측 DCP가 4권으로 된 소책자인 <Brothers, Hear Our Defense>를 출판하여  상세하게 재반박했습니다. 그 후 노먼 가이슬러는 우리로부터 이 책들을 받아서 읽었지만, 몇 년을 별 말 없이 침묵하다가 2019년에 작고했습니다. 이처럼 공은 다시 비판하는 이들 쪽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누구든지 지방 교회들을 비판하려는 이들은 지금처럼 이미 해명하고 반박한 쟁점들을 다시 반복하는 지루한 소모전보다는, 위 노먼 가이슬러 혹은 그 이전의 CRI의 지방교회 평가와 위 <Brothers, Hear Our Defense> 내용을 먼저 충분히 소화한 후에, 그래도 남은 쟁점이 있으면 그것으로 시작할 것을 정중하게 당부드립니다. 혹은 편의상 교회와 신앙 인터넷판에 올려져 있는 지방교회 측이 쓴 10개의 반론글 내용을 놓고 좀 더 깊이 토론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주님의 대적은 수치를 당하고,  그분의 몸은 건축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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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지방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