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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이 “성경문답자”에게 답변함―성경 해석과 우상숭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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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이 "성경문답자"에게 답변함

 

성경 해석과 우상숭배에 관하여

 

 

최근 신문 기사에 따르면 “성경문답자”는 “성경 진리의 전문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1977년 10월 8일 방송에서 그는 적어도 네 가지 성경구절에 대해 완전히 틀리거나 진의가 분명치 않은 해석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방교회들은 그가 진정으로 그가 말한 것을 믿는지 묻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 대하여 그는 “그것이 말씀을 자신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으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이 둘의 비밀을 확인하는데 있어 전치사 “~과 함께”(with)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단지 본체에서만이 아니라 인격에서 하나의 연합을 증명하는 데 있어 이 구절의 끝에 있는 동사 “이시니라”(was)도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경문답자는 이 구절 후반부의 “하나님”(God, Theos) 앞에 관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대신 “신격”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구절은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아니라 “말씀은 곧 신격이시니라”로 읽힐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외에도 “하나님”(God, Theos)은 요한복음에서 관사 없이 16번이나 나옵니다. 그런 경우 모두 “하나님”을 “신격”으로 대치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 6절은 “신격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고 읽어야 하고 요한복음 3장 2절은 “당신은 신격으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로 읽어야 하고 요한복음 17장 3절은 “유일하신 참 신격과 그 보내신 자”라고 읽어야 하고 20장 17절은 “나의 신격, 나의 신격”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침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 받았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17:3)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승천했음을 믿습니다(20:17).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절이 단지 본질만이 아닌 인격이신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확대역 성경(Amplified Bible)을 번역한 학자들은 요한복음 1장 1절을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태초에 [모든 시간 전에] 말씀[그리스도]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라.


그들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각주에서 “‘하나님’이 강조된 표현,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임을 믿지만 양태론의 방식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반부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를 피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계셨음을 비밀스러운 복수성과 단일성의 방식으로 믿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며 성경 문답자는 이 구절은 문맥상 창조를 말하는 것이며 반드시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인 “그 안에[말씀] 생명이 있었으니”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문맥상 분명히 부활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2-44절을 연구해 보면 그 문맥을 알 수 있습니다. 42절은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그 다음 42-44절에서 우리는 “심고....다시 살며”가 네번이나 반복되어 쓰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원칙입니다. 어떤 것이 한 방면에서 심겨지지만 이와는 다른 방면으로 부활합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2-44절). 45절은 그것이 부활에 관한 논의일 경우 바로 결정타를 날리는 구절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에서 ‘되었다 함과 같이’가 쓰인 것인 바로 그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하반부를 요한복음 1장 4절로 해석하는 관점은 확실히 합당한 주해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말씀(Logos)인 반면 마지막 아담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이란 단어의 의미는 사람이고 고린도전서 15장 47절은 명확하게 “둘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미리 존재했던 말씀에 생명이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의 요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요점은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따라 사람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33년의 인생을 거쳐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입니다.


성경문답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생명주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는 상당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령 외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고 했고 로마서 8장 2절에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했고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는 “영은 살리는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경우에서 “영”이란 단어는 성령을 나타냈고 매 경우 그 영은 생명을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부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3장 17절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합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질문자가 “17절의 주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은 “내가 믿기로 아버지입니다”였습니다. 같은 논의에서 그는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대답을 수정하여 “나는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아버지가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바울이 언급한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과도 정확하게 부합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그 영이라고만 말합니다....거기서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앞의 두 답변을 결합해 말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3장 17절의 “주”가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하였고 두번째로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했고 세번째로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했고 네 번째로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요한복음 4장 24절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해석하며 마쳤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12절에서 그가 “굉장히 명백하게”(great plainness of speech)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문답자는 이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입니까? 만약 ‘고린도후서 3장 17절의 주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3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수건을 벗긴다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계속해서 만약 우리가 수건이 벗겨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 돌이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14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수건을 벗기고 16절에서는 주님이 수건을 벗깁니다. 확실히 16절의 주님은 14절의 그리스도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오늘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 “주는 영입니다.” 만약 주님이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께 돌이키고 그분을 접촉합니까?


18절로 내려가서 우리는 “주”란 단어를 다시 봅니다. 먼저 우리는 반드시 18절의 주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반드시 18절의 주님이 17절의 주님과 다른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3장 17절 상반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구절에는 “영광”, “주”, “형상”과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영광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4:6)이라 말했으며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4:4)이니라 했고 주에 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4:5)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18절의 주는 반드시 그리스도입니다.


수건을 벗기시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16절의 주가 그리스도임을 보여드렸습니다. 18절의 주 역시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드렸습니다. 우리는 귀납적인 논리에 기초해서 17절의 “영”이신 주가 또한 그리스도임을 단호히 주장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주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주라고 말하는 것은 이 문맥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삼일성의 구성원의 절대적인 구별(삼신론과 같은)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가 제시한 것 같은 해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을 성경에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우리는 성경문답자가 어떻게 그의 신학에 의거해 성경을 해석했는지에 대한 네 번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사람이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있는지 없는지가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시험에 실패한 것입니다.


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질문했던 사람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분이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살 수 있습니까? 성경문답자는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서 거하는 것은 삼일성을 대표하는 성령의 인격 안에서입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가 성경을 그의 고상하고 정결한 신학 관념 안에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 안에는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며 성령은 이 땅위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경의 어디에서 성령이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말합니까? 로마서 8장 3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9-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이라고 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동등한 용어들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대표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우리의 간증과 체험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은 하나님의 모든 참된 자녀가 그러한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묵과함


마지막으로 성경문답자는 성경이 우상숭배를 정죄한다고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의 실행을 묵과했습니다. 그의 설명은 로마 카톨릭이 “신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정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위 어느 그리스도인 교회도 그들의 우상숭배 실행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교황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혼들이 연옥에 가고, 떡과 포도주가 문자그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성체화되고, 주교들이 사도의 진정한 계승자들이며, 마리아가 공동 구속자이고, 물침례의 의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고, 주님의 종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함을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끝이 없고 구역질나게 합니다.


카톨릭교회가 자신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말합니다. 나는 카톨릭이 베드로가 첫 번째 교황이었다고 말할 때보다도 그들이 신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때 그 음녀를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성경문답자에게 놀랐습니다. 그도 또한 로자리오 묵주를 만지고 성수를 사용하며 성호를 긋는 미신적 실행을 믿는 것일까요?


성경문답자의 교사는 유명한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였습니다. 이것이 반하우스박사가 두 바벨론이라는 책의 겉 표지에서 로마 카톨릭 교황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두 바벨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들은 오래된 주장들이며 종종 오래된 논쟁들에 기초한다...로마의 이단적 실행은 거의 대부분 이교도의 관습으로부터 왔다.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숭상 - 숭배와 같은 것임)하는 것이 실제로는 비너스와 아스타르테를 숭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벨론으로부터 온 것임을 볼 때 그 체제의 중심이 사탄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증가하고 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도 그렇다.


계시록 18장 23절에 따르면 만국은 다 그녀의 “복술”에 미혹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카톨릭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확실히 미혹된 것입니다. 그리고 카톨릭의 해석을 대중에게 전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카톨릭의 악한 책략을 돕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말을 다른이들에게 전하는 대신 지방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계시록 18장 4절에서의 요한과 함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하(題下)의 다섯 기사 가운데 세 번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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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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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8.15. 01:13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들은 오래된 주장들이며 종종 오래된 논쟁들에 기초한다...로마의 이단적 실행은 거의 대부분 이교도의 관습으로부터 왔다.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숭상 - 숭배와 같은 것임)하는 것이 실제로는 비너스와 아스타르테를 숭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벨론으로부터 온 것임을 볼 때 그 체제의 중심이 사탄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증가하고 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도 그렇다."---- 한국내 이단감별사들이 문제 삼는 소소한 쟁점들에 비하면 이러한 노골적인 우상숭배(마리아 숭배)는 당연히 정죄되고 배척되어얄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단감별사들이나 공 교단 중에서 로마 천주교를 정식으로 이단으로 규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단 정죄의 잣대가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굽는 한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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