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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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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6)

 


지방교회의 독단적 성경해석(이인규님의 원글 제목)


이인규님은 일종의 고장난 저울과 같은 분입니다. 그 저울에 올려 놓은 물건의 무게는 사실과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인규님은 자신의 저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생각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착각합니다. 고장난 저울에서 나온 결과는 당연히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인규님의 가장 치명적이고 고질적인 고장난 부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셋으로 분리시키는 세 하나님들 이단 사상입니다. 그 외에 성경을 교리적으로만 이해하고, 주관적으로 성경을 알고 체험하는 부분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도 이인규님의 반복되는 오류입니다.


이제 아래에서 이인규님의 원글의 전문을 부분 부분 인용해 가면서 그의 말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인규님)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성경해석을 보면,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너무나 많다. 여느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교리를 먼저 만들어놓고 성경을 짜깁기를 하여 교리에 맞추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신도인 본인에게 흠 잡힐만한 성경해석을 하는 위트니스도 그렇지만, 위트니스 리의 황당한 성경해석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지방교인들의 생각을 하면 그야말로 쓴 웃음만 나온다.”


이인규님은 정 반대의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본문 자체를 중시하며, 오히려 교리적 체계를 세우는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모든 것을 교리의 틀 안에 넣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조직 신학자들은 이런 경우 교리를 절대시하여 그와 모순된 듯한 성경 본문들을 희생시키는 경향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그 반대입니다. 쉽게 체계화 할 수 없는 성경 본문은 무리하게 교리적인 틀에 맞추려 하지 않고, 성경 그대로 믿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리적 틀에 익숙한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의 이런 모습에 힘들어 합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이인규님은 이런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정반대의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억지 이단정죄 틀을 미리 만들어 놓고, 다른 이들의 성경적인 표현조차도 비틀어 그 틀 안에 넣고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이인규님 자신입니다. ‘하나님(2격)이 육신을 입으셨다’라는 말을 ‘성부가 성자가 되었다’는 말이라는 식으로 비튼 후, 지금처럼 양태론 근거로 반복해서 써먹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인규님) (1) 양태론적인 해석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On the Lord's Day I was in the Spirit, and I heard behind me a loud voice like a trumpet,


# 계시록 1장 10절에서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영 안에서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원문참조)라고 말했다. 이 구절에 대한 정확한 번역에 따르면 "영"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다. 더 나아가 영(spirit)의 에스(s)는 소문자(s)이어야 한다. 요한은 주의 날에 그의 사람의 영 안에 있었고, 그의 뒤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위트니스 리의 왕국, 591쪽)


요한이 성령 안에 있을 때에(was in the Spirit)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 분은 인자 같으신 분이었고(1:13)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이시다. 요한이 성령 안에 있을 때에, 뒤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는 모순이 되어진다. 왜냐하면 양태론을 가진 지방교회에게는 성령이 곧 예수와 한 실체이며 한 인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여 생명의 영이 되었다는 것이 지방교회의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여 생명의 영이 되었다는 것이 지방교회의 양태론이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이 바로 ‘사실’ 왜곡의 생생한 현장 증거입니다. 이인규님의 거짓말과 달리, 지방 교회측 누구도 ‘성부’(1격)가 ‘성자’(2격)가 되고, ‘성자’는 다시 ‘성령’(3격)이 되신다 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하시다 라고 말합니다. 성부만 참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또한 참 하나님이심을 이인규님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엉뚱한 모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인규님의 저울추가 고장난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자.....헬라어 원문에 the(호)가 없으므로, 이 영은 성령이 아니라 요한 자신의 영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영 안에 있는 경우도 있는가? 모순은 모순을 불러 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같은 계시록의 아래 성경구절도 헬라어 원문에 the(호)가 없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대로라면 아래 성경구절의 성령은 모두 성령이 아니라 요한 자신의 영이 되고 만다.


계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내가 곧 내 영에 감동하였더니)


계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내 영으로 나를 데리고...가니라)


계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내 영으로 나를 데리고...올라가)


만일 위의 계17:3과 계21:10의 Spirit 이 성령이 아니라면, 요한은 자기의 영으로, 광야도 가고 크고 높은 산으로 장소를 이동하는 초능력자가 되고 만다.


(양태론을 모순으로 만드는 성경적인 증거는 너무나 많으며, 지방교회의 양태론이란 글을 참조하라)


1) 거듭난 사람의 영은 그냥 사람의 영만이 아닙니다. 대신에 사람의 영은 또한 성령과 연합된 영입니다(고전6:17). 따라서 사도 요한의 영은 성령과 분리된 영이 아닙니다. 2) 참되게 거듭나서 영의 인도를 따라본 사람들은 이인규님처럼 “자신이 자신의 영 안에 있는 경우도 있는가? 모순은 모순을 불러 온다.”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영 안에 있다’라는 말은 자신의 존재를 대표하는 생각이 거듭난 영과 하나된 상태 안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롬8:6). 우리의 생각이 이 연합된 영과 분리되어 골똘히 자기 생각에 빠져있거나, 혹은 그 생각이 자신의 육체를 따라 살아서 육체의 열매를 맺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3) 이인규님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으면, 사도 요한의 몸이 물리적으로 밧모섬을 탈출하여 광야도 가고 높은 산으로도 장소를 이동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런 발상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의 이상과 관련된 영적인 세계에 무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몸은 밧모섬에서 있으면서 영 안에서 계시를 본 것입니다.

 


(이인규님) (2) 천국의 대한 비유: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1-33)


(지방교회의 교인이 올렸던 글이다)


# 위 말은 성경문맥을 무시한 치명적인 혼잡입니다. 성경에서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누룩'을 좋은 의미로 해석한 곳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도 우리는 유월절 이후 7일의 무교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출12:14-20 성경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유교병 즉 누룩 있는 떡을 먹는 자마다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주님은 직접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마16:11-12)을 주의하고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8:15)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우리는 누룩 없는 자이므로 '묵은 누룩,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누룩 없는 떡으로 명절을 지키라고 말합니다(고전5:7-8). 이 말은 아비의 아내를 취한 음행을 책망하면서 한 말입니다.


다른 성경에서 누룩이라는 말이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만으로 "누룩"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나쁜 것으로 해석하여야만 한다는 주장은 마치 초등학생의 해석방법과 같다.


그렇다면 계시록17장의 "여자"라는 단어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성경에서 "여자"는 모두 나쁜 의미로 해석하여야만 하는가?


이사야 14장 12절에서 사탄을 계명성(Morning Star: 샛별)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벧후1:19와 계2:28의 예수님을 가르키는 "샛별"도 사탄이 된단 말인가? 욥기38:7의 morning star도 사탄인가? 누룩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팽창"과 "확대"의 개념이다.”


이인규님은 위 구절들에서 언급된 누룩이 좋은 의미라는 식의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나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인규님 주장대로 마태복음 13장의 ‘여자’가 고운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집어 넣은 것이 <팽창과 확대의 개념>이라면, 과연 무엇이 팽창되고 확대되었단 말인지를 선명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마태복음 13장 그리고 계시록 17장의 여인은 전후 문맥상 소극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많은 개혁 신학자들 역시 이 단락을 로마 천주교에 적용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로마 천주교 안에 무엇이 “팽창”되었고 “확대”되어 있는지 이인규님이 정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다른 이들의 성경해석을 비판하려면 자신의 성경 해석이 더 옳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 이인규님의 주장은 근거제시도 논리도 없습니다. 반면에 지방 교회의 교인이 올렸다는 위 인용글에는 성경 근거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 말이 더 신뢰할만 합니까?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 가라지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큰 나무는 오늘날의 기독교계를 의미한다. 누룩은 이교도의 모든 관습, 세상적인 것, 죄 있는 것, 우상숭배를 의미한다. 여자는 로마 천주교, 심지어 기독교계까지도 의미하며, 악한 자는 사단 자신이다. (왕국, 265쪽)


# 많은 악한 영들이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 깃들이고 있다. 가지들은 귀신들의 깃들이는 곳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단지 교리가 되어서는 안되며, 우리는 이것을 실질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256쪽)


위트니스 리는 나무가 오늘날의 기독교이며 귀신들이 깃들이는 곳이라고 한다. 새가 깃드는 큰 나무가 사단을 의미한다면 모든 "새"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모든 나무가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이것이 성경해석인가?”


위 위트니스 리의 해석은 마태복음 13장 31-33절 본문을 토대로 합니다. 그 바로 앞 문맥에서 주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밀 가운데 뿌려진 가라지를 언급하셨고, 이 가라지는 원수가 뿌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후 이어지는 비유에서 주 예수님은 겨자씨가 “하늘의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가 되는 비유와 밀가루를 “몰래 집어넣어” 부풀게 한 누룩 비유를 소개 하셨습니다.


이런 본문 해석에서는 “하늘의 새들”, (여자가 누룩을) “몰래 집어넣어”라고 한 대목에 본문 해석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가 있습니다. 앞의 가라지를 포함한 이런 것들은 모두 ‘소극적인’ 의미입니다.


(이인규님) ”마태복음 외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성경을 보자....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4:30-32)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19-21)


예수님은 천국,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하여 누룩과 겨자를 비유하셨다. 겨자를 비유하신 것은 "모든 씨보다 작다"는 의미이며, "새가 깃드는 나무"는 "크다"는 개념이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누룩에 대한 비유가 생략되어 있는데, 대신에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라는 확장적인 개념이 막4:8에서 언급되고 있다. 즉 성경의 기자들은 모두 확장적인 개념으로서 겨자씨에서 나무로 커지는 비유와 팽창되는 누룩의 비유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이 된다.


바울은 누룩에 대하여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갈5:9)라고 말하였는데 이 개념도 작은 것이 큰 효과로 팽창되어진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성경에서 누룩에 대한 단어는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모두 팽창적이며 확장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인규님의 의도와 달리, 마태복음이든 다른 복음서이든 해당 내용의 영적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교묘히 말을 뒤섞고 있지만, 1) 마가복음 4:8의 ‘확대’ 의미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그렇다는 것이고, 이인규님의 오해처럼 ‘누룩’이 그렇게 확장시켰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2) 이인규님이 제시한 갈라디아서 5:9의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는 말도 전후 문맥상 할례 등 율법준수라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표현일 뿐, 결코 좋은 것이 팽창한다는 식의 문맥이 아닙니다. 이처럼 자신의 엉뚱한 선입관을 따라 함부로 성경을 풀면 ‘버려야 할 것’을 ‘고수하고 퍼뜨리는’ 비성경적인 행위자가 될 뿐입니다.


(이인규님) ”정리를 하여보자. - 천국은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아주 작은 것이라는 비유>


-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점점 커지게 된다>


-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새까지 깃들 정도로 커진다>


-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최대한 확장되어간다>


그리고 나무에 대한 신약 본문은 구약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것을 위트니스 리는 몰랐던 것이다.”


위와 같은 이인규님의 ‘정리’는 문맥을 무시한 채 본문을 이인규님의 선입관에 억지로 꿰어 맞춘 것에 불과합니다. 위 본문 내용은 참과 거짓이 섞인 오늘날의 기독교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여인이 누룩을 몰래 집어넣은 것’은 유대교도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율법준수를 통한 구원이라는 다른 가르침을 몰래 집어넣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후문맥(갈5:1-12)을 읽어보면 누룩이 부정적으로 쓰였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단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쪽은 지방 교회측이 아니라 이인규님 자신입니다.


(이인규님)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겔17:22-23)


위트니스 리는 나무가 오늘날의 기독교라고 했으며, 새가 깃드는 큰 나무가 사단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위의 구약본문이 과연 하나님이 장차 사단의 나무를 심는다는 뜻인지 지방교회에게 묻고싶다. 위트니스 리가 과연 사도라고 불리울만 하다고 생각하는가?”


위 비유(마13장)가 예수님께서 에스겔 17장 본문을 인용 소개하신 것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3장의 ‘나무’는 위 에스겔처럼 원래 나무가 아니며, 겨자식물이라는 ‘푸성귀’가 본질이 바뀌어 생겨난 ‘나무’라는데 이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이인규님처럼 아무 성경본문이나 그저 내용이 비슷하면 가져다 대비하면 성경해석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인규님) “(3) 주님의 재림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뜻하지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온다는 의미로 "도적같이 온다"고 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도적같이 온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계시록 3장 3절은 주님이 무엇인가를 훔치시기 위해 도적같이 오실 것임을 가르킨다. 우리가 그 분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 분은 쓰레기가 아닌 귀한 것들을 훔치러 오실 것이다. 생명 안에서 성숙되고 혼 안에서 변화된 사람들만이 주님이 훔쳐가실 만큼 귀한 것이다. (왕국, 558쪽)


성경에서 주님이 도적같이 온다는 비유는 약속이 없이 갑작스럽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훔쳐간다"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야말로 황당한 성경해석이다. 그와 같은 황당한 해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방교회의 양태론으로 보는 하나님 자신인 부활의 영은 지방교회 교인들에게 들어와, 성숙되게 자라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데, 곧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그 상태를 지방교회는 재림, 부활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재림,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그것을 일반기독교의 것이라고 해석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신일합일의 상태를 재림, 부활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재림에 대한 성경해석을 "귀한 것을 훔친다"고 해석하고 있다. 자신들 지방교회의 신일합일을 "귀한 것"이라고 해석하기 위함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이유는 크게 볼 때 1) 혼인 잔치 2) 이 땅을 심판하심 3) 천년 지상 통치를 위한 것입니다. 위 인용문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의 재림시 있게 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을 설명하는 문맥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바로 위 인용문 앞에서 “다른 이들보다 앞서 성숙될 몇몇 성도들은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그들이 데려감을 당할 때, 그것은 귀한 것을 훔쳐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인규님은 이런 문맥을 무시한 채 독자들이 볼 때 이상하게 생각될 것만 쏙 뽑아서 제시함으로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 거의 모든 신학 서적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갑작스럽게 나타나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성장에 의해서 오고 계신다. (왕국, 330쪽)


이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자라가시는 방면을 말한 것입니다. 이 인용문 전후 문맥은 “주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마28:20)라는 성경 말씀과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심도있게 다룬 문맥 중 일부입니다.


#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이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왕국, 329쪽)


(이인규님) “그래서 예수의 재림을 "생명의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고,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표현을 그냥 적당하게 변질시키고 왜곡시켜 해석시키는 것이다.“


이인규님은 위트니스 리가, 주님께서 “하늘로부터도 오시고, 우리 안에서도 오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따옴표까지 찍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라고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술 더 떠서 오히려 위트니스 리가 “적당하게 변질시키고 왜곡시킨다”고 나무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위 내용은, 주님이 그분의 재림시 하늘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나오신다는 살후1:10에 근거한 것입니다. 재림의 또 다른 방면입니다.


(이인규님) ”성경은 예수의 재림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 그대로 하늘로부터 오신다. 제자들이 본 그대로 오신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성경은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그리스도"(살전4:16)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예수님은 "인자가 오리라"(미24:44)라고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계22:7)라고 말씀하셨으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라고 기록하였다. 사도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라고 기록하였다. 예수의 재림은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인의 소망이 된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3:20)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다시 오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며, 누구나 볼 수 있게 가시적으로 오시며 영광과 존귀와 함께 오신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7)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26:64)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6)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살후1:7)


이와 같이 많은 성경구절을 무시하고, 여러분 안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지방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위트니스 리라는 개인에게 온 것인가를 여러분은 파악하기 바란다.”


지방 교회 성도들도 위와 같은 재림을 언급한 말씀들을 다 믿습니다. 이인규님이 사실을 정반대로 왜곡시켜서 독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우리 주님께서 재림시 하늘로부터 오신다는 위 인용 구절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나타나신다(영광스럽게 되신다)는 말씀(살후 1:10)을 둘 다 믿는 것이 성경적인 재림론입니다.

 


(이인규님) "(4) 구원받은 자도 형벌을 받는다


위트니스 리는 구원받은 사람도 어떤 형벌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우리는 어떤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잃지는 않겠지만, 뭔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천년왕국 동안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것을 놓칠 것이다. (왕국, 523쪽)


# 칼빈주의자들은 영원보장에 있어서 옳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마태복음 25장 30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 받은 후에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이 구절이 참된 믿는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거짓 믿는 자들에게 적용된다고 잘못 말하곤 한다. (왕국, 522쪽)


# 마태복음 25장 30절을 읽어보자. "이 무익한 종을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러분은 이것들이 주님의 말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구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어떤 종류의 어둠에 던져질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어둠이냐고 묻지 말라. 분명 그곳은 즐거운 곳은 아닐 것이다. (왕국, 520쪽)


지극히 성경에 따른 설명입니다. “그날에..이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검증해 줄 것입니다 …그 일이 불타 버린 사람은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불을 통과하여 받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고전3:13-15).


또한 위 마태복음 25장이 말하는 “이 무익한 종”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 14절에 따르면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으로부터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동일한 부류로 취급되었는데, 이들이 모두 믿는 이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인규님)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 위트니스 리의 황당하고 기가 막힌 성경해석이 또 시작 되어진다 .... 위트니스 리는 내어 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무익한 종도 구원을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쫓겨나는 무익한 종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데, 지방교회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내어 쫓기기도 하며, 어둠에서 이를 갈면서 받는 구원인가? 그 어둠이 무엇인가? 묻지 말라고 한다....!! 어떠한 고통적인 형벌이라고 말하며,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것을 놓칠 것이라고도 말한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마22:13, 마24:51, 마25:30, 눅13:28 등에 언급되어지지만 모두 구원을 잃게되는 표현을 말한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성경해석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경해석이 될까?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13:28)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뿐일 것이다. 그것을 옳다고 하는 지방교인들은 대체 누구인가?”


1) 이인규님은 고린도전서 3장 15절이 말하는 믿는 이들에 대한 ‘경륜적인 징계의 진리’에 무지함으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고전9:27 참조). 2)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모두 구원을 잃게되는 표현을 말한다.”라는 이인규님의 주장, 특히 ”구원을 잃는다”는 말은 알미니안주의적인 표현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성경은 “구원을 받지만 불을 통과하여 받을 것”을 말하지 구원의 상실을 말하지 않습니다(고전3:15). 3) 지방 교회측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서 …이를 간다는 것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인규님은 구원을 잃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지방 교회측은 구원과는 무관한 일종의 징계라는 것입니다.

 


(이인규님) “(5)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에노스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영이 그 안에 있었다. 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그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그의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겠는가? 에녹은 땅에 있었고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셨다면 이 땅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두 사람이 동행하는데 한 사람은 하늘에 있고 한 사람은 땅에 있다면 어떻게 동행할 수 있겠는가? 에녹이 하늘에 올라갔는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이 오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임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영인 그 영이 이 사람의 영을 접했다. 이러므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도 에녹과 동행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5:24).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 분 자신을 에녹 안으로 역사하신 것을 말한다.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28쪽)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지방교회가 주장하는대로 생각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아직 살려주는 영이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즉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약의 창세기에서 에노스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영이 그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저 신인합일이라는 사상을 어느 성경구절에나 작용시키려고 하다보니 이러한 모순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자신이 뒤짚는 경우가 되고 말았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창5:24)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에녹이 하늘에 올라가지 않았고 하나님이 내려 오셨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이 에녹 안으로 역사하였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기사와 개인의 주장이 다를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느 주장을 믿어야만 할까?”


이런 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 말꼬투리를 잡아 비판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위트니스 리 역시 에녹이 나중에 하늘로 올려졌음을 믿고 인정합니다. 위트니스 리는 창세기 5장 24절 각주에서, “에녹은 휴거된 첫 번째 사람이다…. 삼백 년 동안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과 동행한 후에, 에녹은 하나님에 의해 취해진 후 죽음을 맛보지 않는 보상을 얻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에녹이 하늘로 올라갔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말씀을 부정하겠습니까?


(이인규님) ”1. 하나님과 동행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에녹이 땅에 있기에 동행할 수가 없다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그야말로 무식한 주장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충만하신 분이며 "하늘이 그의 보좌이고 땅이 그 분의 발등상"이라는 사실을 위트니스 리는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땅에 계시지 않았고 언제나 하늘에만 계셨단 말인가?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22:6)


아브라함과 이삭은 동행하였다. 지방교회는 동행하다는 단어를 아브라함의 안에 이삭이 있었다고 해석하는가? 엠마오 가는 길에서 제자들과 동행한 주님은 제자들 안에 있었는가?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눅24:15)


2.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에녹이 하늘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경과 위트니스 리의 주장중 어느 것이 옳다고 지방교회는 생각하는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신약성경에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직접 옮겨진 것이다.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천국으로 갔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서 위트니스 리가 “에녹이 하늘에 올라가지 않았고…”라고 한 표현은 ‘에녹이 궁극적으로 하늘에 올려졌음’을 위트니스 리가 부인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가 에녹의 휴거를 믿는다는 증거는 위에서 제시했습니다. 이처럼 말꼬투리 잡는 식의 비판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성경 66권 전권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쓰고 창세기만도 120개의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전한 위트니스 리가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히11:5)라는 성경 말씀을 몰랐다고 간주하는 자체가 잘못된 발상일 뿐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위 글에서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친밀한 동행을 한 결과임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엠마오 제자들과 주 예수님 그 어느 사례이든지 모두 땅에 있었기에 동행이 가능했습니다. 만일 동행하는 어느 한 쪽은 이 땅에, 다른 한 쪽은 저 하늘에만 남아 있다면 그것이 어찌 동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11장 6-7절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땅으로 내려가서”(let us go down)라는 표현을 봅니다. 이인규님의 논리대로 라면 ‘땅이 그분의 발등상’인데 어디로 또 내려간다는 말입니까? 창세기 18장 20-21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중하니 “여호와께서 내려가서…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 논리가 성립됩니다. 특히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만나서 음식을 대접하고 동행하면서 조카 롯에 대해 대화를 나눈 여호와는 이인규님이 말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인격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무식한 것입니까?


(이인규님) “3. "동행하다"는 히브리어 "하라크"는 "걷다. 행진하다. 행동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그의 일을 함께 역사하여 주신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걸어주신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리브가를 구하러 갈 때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창24:42, 나의 행하는 길), 위트니스 리의 주장대로라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도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그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연합되어 하나님이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표현이 이인규님의 해석처럼 ”상식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당시에 하나님이 “인도하고 보호하신” 사람이 에녹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유독 에녹에 대해서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동행을 그런 식으로 일반화시키려면 이인규님은 이런 질문에 대해 답변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늘이 그의 보좌이고 땅이 그 분의 발등상”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수도 없는 그분의 자녀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심을 이인규님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에녹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산채로 들려 올려가야 마땅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인규님은 스스로 자신의 논리의 모순에 빠진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인규님) ”4. 지방교회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 안으로 역사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에녹은 영이 그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일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 안으로 들어와 직접 역사한 것을 밝힌다면, 지방교회가 여태까지 주장하던 양태론적인 주장, 즉 하나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여 살려주는 영이 될 필요성이 없어지고 만다. 성경을 보자....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겔2:2)


NIV: As he spoke, "the Spirit came into me" and raised me to my feet,


KJV: And "the spirit entered into me" when he spake unto me, and set me upon my feet,


히브리어 "보"는 "안으로 오다, 거하다"는 뜻이다. 분명히 "Came into" 이며 그것이 외적사역인지 내적사역인지 확인하기 바란다. 또 겔3:24, 단4:8, 단4:18, 5:11등도 모두 외적 사역이 아니라, 내적으로 거함을 의미한다. NIV영어성경, KJV영어성경,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을 참조하기 바란다.


또 눅1:41에서는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되어있으며 이것은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로 번역되어 충만히 채워지는 가득한 내부적인 상태를 말하며, 눅1:61에서 그 부친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을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또 모세에게 임하였던 성령을 동시에 70인의 장로에게 임하시게 하시던 일도 있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지지 아니하리라" (민11:16-17)


실제로 민11:25에서 칠십 장로에게 하나님이 신이 임하여 오순절과 같이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된다. 특히 회막에 나가지 못한 두 명의 장로(엘닷, 메닷)에게도 진 중에서 하나님이 신이 임하여, 그들도 에언을 하게 된다.”


위트니스 리는 베드로 전서 1장 11절 각주에서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의 조성과정은 시대적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영의 기능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방면은 구별해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구약에서 어떤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유력한 신학자들마다 다 견해가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약의 성령의 내주는 신약에서 믿는 이들 모두 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의 내주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신약에서는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어가지 마소서”(시51:11)라고 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버지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여러분에게 보내 주실 것이고, 그분은 영원이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요14:16).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또 다른 보혜사’는 구약과 달리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을 거스려도 그분은 속으로 “탄식하실 뿐”(엡4:30) 결코 구약처럼 “떠나가시지는”(시51:11) 않습니다.


둘째, 주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실 것’이라고 미래 시재로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도, 이 땅에는 ‘보혜사 성령”께서 아직 보냄을 받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히9:14)이신데,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심으로 아직 그 영이 계시지 않았다’(요7:39)라는 말과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지 이인규님은 답변할 수 있습니까?

 


(이인규님) (6) 천국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2-6)


지방교회는 죽어서 가는 장소적인 개념의 천국을 부정한다.


# 죽으면 천당(국)간다는 말은 이교도의 가르침입니다. 사탄이 한 최대의 거짓말 중 하나는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하늘 어디엔가 있는 집)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이교도적인 거짓 사상이 버젓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믿음 생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을 변질시킴으로 참된 성도들 생각 속에서 말끔히 씻겨져야 할 누룩인 것입니다. (지방교회 게시판의 글)


#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죽으면 주 예수를 믿는 한, 그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들이 일단 죽으면 그들은 천당에 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여러분이 왕국의 비밀을 안다면 여기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왕국, 315쪽)


이인규님은 위 인용 본문이 말하는 ‘아버지 집’이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저 하늘 어디엔가 있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됩니까? 그러나 성경은 승천하신 주 예수님이 장차 이 땅에 다시 지상 재림 하실 것(행1:11)과 심지어 감람산으로 지상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슥14:4, 그의 발이 그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리니). 심지어 그분이 오실 때 성도들도 함께 데리고 오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살전3:13,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4:14도 참조). 이인규님은 이러한 주 예수님의 지상재림을 믿습니까?


(이인규님) ”정통신학에서의 천국개념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되어지는데, 이는 성경이 그와 같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신정정치의 왕국. 둘째는 미래적이고 궁극적이며 종말적 의미의 장소적 개념, 세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순종하는 개인적인 성도로 구성되는 내면적인 의미


지방교회는 다른 성경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세 번째 개념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맞는 성경만 부분적으로 인정하며, 다른 구절에 대해서는 엉뚱한 짜맞추기로 일관하고 있다.”


이인규님이야 말로 위 재림의 예에서 보듯이 “자신의 교리에 맞는 성경만 부분적으로 인정하며, 다른 구절에 대해서는 엉뚱한 짜맞추기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 교회측 성도들은 교리적 체계에 연연하지 않고 성경 전체가 말하는 그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이인규님) ”변화산 사건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그들이 "죽기 전에" 보여준 하나님 나라와 그 왕권이다.


마태: 죽기 전에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마16:28). 마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막9:1). 누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다(눅9:27).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고, 죽어야만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왕국을 "죽기 전에" 보여주었으며 "죽기 전에" 미리 주님이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또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 그런데 부자와 나사로에 의하면, 죽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다시 말하여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


마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8:11) 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13:28)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16:22) 십자가의 강도는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신을 생각하여 달라고 하였으며, 주님의 대답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답변이었다.(눅23:42-43)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강도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었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의 곁으로 간다는 것은 성경적인 기록이다.”


낙원은 주 예수님의 경우처럼 오직 부활 전까지만 임시로 머무는 곳입입니다. 나사로나 강도나 우리는 죽어서 낙원에 갑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의 착각처럼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영과 혼은 낙원에서 나올 것이고, 우리의 육신의 몸과 결합한 후, 공중으로 휴거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살전4:16-17). 이인규님은 성경이 말하는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성경 기록만 절대적으로 붙들다 보니 결과적으로 ‘비성경적인 내세관’에 빠져 있습니다.


(이인규님)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3)


-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7)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여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으실지니이다."(욥1:20-21)


-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3-24)


-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2-24)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전15:19)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0:30)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6:9)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20:4)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없다는 지방교회..... 하나님은 천국에 계시지 않는다는 지방교회....주님은 사람의 안에서 재림한다는 지방교회....교회가 천국이라는 지방교회.....


이인규님은 자신이 인용한 위 말씀들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위 인용문들은 저 하늘 어디의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사상을 지지하는 본문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1) 히12:23-24가 말하는 ‘하늘의 예루살렘’은 우리가 이미 이른 곳(거듭난 영)을 가리키며, 장차 죽으면 갈 곳이 아닙니다. 2) 또한 고후 5:8-10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우리 몸으로 행한대로 심판받은 후, 그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3) 무엇보다도 성경은 장차 주님의 재림시 참된 성도들이 그분과 함께 이 땅에 재림할 것을 말합니다(살전3:13, 예수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4:1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잠든 이들을 예수님께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으면 저 하늘 어디로 가서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인규님) (7) 열처녀


“열처녀에 대한 비유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비하라"는 것으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을 미리 예비하라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이 비유를 또 그들의 교리인 신일합일로 짜맞추기를 시도한다.”


예비하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예비하지요? 예비 안된 사람들은 어찌됩니까? 예비 안 되어도 죽으면 무조건 천국갑니까? 그렇다면 예비한 사람이나 예비 안된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 믿는 이들이 휴거될 때, 모든 세대에 걸쳐서 죽은 자들 중 대다수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이 대다수는 마태복음 25장 1절부터 12절까지에 나오는 열 처녀로 상징되어 있다. 마태복음 25장 1절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한다. 여기 숫자 열은 대다수의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믿는 이들의 전체는 숫자 열둘로 상징되어 있다. 나머지 둘은 마태복음 24절 40에서 42절에서 발견된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믿는 이들은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숫자 둘과 25장에 있는 숫자 열에 의하여 상징되어 있는 두 부류 중에 있게 될 것이다. 두 남자와 두 여자는 일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살아있을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이에 반하여 열 처녀는 모두 잠들어 있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대다수의 죽게 되는 믿는 이들을 나타낸다. (위트니스 리, 믿는이들 2, 1015-1016쪽)


위트니스 리는 원래 열두명인데 열 처녀의 열명 외에 다른 성경 구절에 두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이 열 처녀가 모두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 처녀들이 "졸다가 잠이 들었다". "조는" 것은 병드는 것을 상징하고, 잠드는 것은 죽는 것을 상징한다. 주님이 그분의 다시 오심을 지체하시는 동안에 믿는 이들은 대다수 먼저 병들게 되고 나중에는 죽는다.(믿는이들 2, 1016-1017쪽)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조는 것은 모두 병들었다고 해석하고, 잠자는 것은 죽었다고 해석하는 모양이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열 처녀에 대한 말씀은, 워치만 니에게 이상하게 해석되더니만, 이젠 병들고 죽은 열 처녀들로 바뀌어 위트니스 리에게 난도질을 당하여 주님의 말씀이 변질되어진다. 완전히 성경말씀을 제 멋대로 해석하고 변질시켜서....자신들의 사상과 교리에 짜맞추기가 된다. 지방교인들은 모두 졸고 있는지 궁금하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잠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살전 4:13입니다. “형제님들, 우리는 여러분이 잠자고 있는 이들에 관해 알지 못하여,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마태복음 25장 2절은 처녀들을 말하는데 그들 중 다섯명은 어리석었고 다섯명은 슬기로왔다. 다섯은 넷에 하나를 더해서 이루어지며, 하나님(하나로 상징)이 더해진 사람(넷으로 상징됨)이 책임을 맡는 것을 상징한다. (1017쪽)


(이인규님) ”다섯이 넷에다가 하나를 더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더해진 것이라고 한다..... 다섯은 일곱에서 둘을 뺀다는 해석은 통하지 않는지? 그저 아무 해석이나 붙이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숫자는 특정 의미를 내포할 때가 많습니다(에드 F 벌로우, 성경숫자의 영적 비밀, 생명의 서신, 1989 참조). 다섯은 ‘하나님의 은혜’ 혹은 ‘책임’을 상징하는 수입니다(위 책, 74쪽). 피조물인 4에 한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영접될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얻습니다. 이것은 성경 해석 기법 중 하나입니다.


# 그러나 교회 시대에 생명 안에서 성숙하지 못한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천년왕국 안에 들어가서 그 시대의 신성한 복음을 함께 상으로 나누는 데 있어서 예비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 동안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천년왕국 동안 그들은 주님에게 징계를 받고 성숙에 이르도록 생명 안에서 자란 다음, 영원의 단계 안에서 신성한 복들에 동참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다시 기록될 것이다. (교회, 423-424)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임의대로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다시 기록된다고 주장한다. 주님에게 징계를 받고 생명이 성숙하게 자란 다음 다시 구원을 받는다는 카톨릭과 같은 제3의 기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이후 어떤 이들은 자기부인의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생명의 성숙에 이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십자가의 적용을 거절함으로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두 경우 모두 아무런 제한없이 저 천국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구원은 받지만 “불을 통과하여 얻은 구원”이 될 것을 말합니다(고전3:15). 이것은 천주교의 연옥교리와는 무관하며 성경의 엄중한 기록입니다.


# 기름을 파는 자들은 두 감람나무와 기름의 두 아들들인 대환난 중의 두 증인임에 틀림없다(계 11:3-4. 슥4:11-14). 대환난 동안에 기름의 두 아들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러 올 것이다. (1019쪽)


(이인규님) ”기름을 파는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혼인잔치가 시작되어 슬기로운 처녀들이 들어가게 되고 문은 닫힌 것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열 처녀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은 "재림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 기름을 파는 자가 누구인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열 처녀의 비유에 대한 핵심은 언제 올른지 알 수 없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경고이며, 누구이든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훈이다. 모세이든 엘리야이든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도와줄 수는 없다.


그 비유에서 등장하는 모든 단어와 용어가 다 어떠한 비유나 상징을 일일이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비유란 핵심적인 의미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모든 단어와 모든 용어까지를 비유와 상징으로 뜻하는 것이 아니다....게다가 조는 것은 병드는 것을 말하고 자는 것은 죽는 것을 말한다는 해석은 코메디에 가깝다.


혼인 잔치를 앞두고 병들고 죽었는데도, 병든 자들은 기름을 사러가고 죽은 자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는지? 이러한 성경해석을 "성경대로"라고 정의한다면, 과연 성경대로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열 처녀 비유가 ‘재림을 준비하라’는 교훈이라는 지적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재림을 준비하지 못하는 부류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들은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성경은 그들이 장차 있을 ‘혼인 잔치’에 들어감을 거부당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마25:10-12). 이것은 죽으면 무조건 천국가서 주 예수님과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식으로 사탕발림의 종말론을 말하는 이들의 말과는 너무 다른 내용입니다. (열 처녀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localchurch.kr/research/21863, https://www.localchurch.kr/research/21866, https://www.localchurch.kr/research/21885, https://www.localchurch.kr/research/21905, https://www.localchurch.kr/research/21929)

 


(이인규님) (8) 사내아이


“위트니스 리는 계시록의 사내아이,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도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곧 하나님이 된 지방교회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이기는 이와 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이에게 내가 민족들을 다스릴 권위를 줄 것이다. 그는 질그릇들을 부수듯이, 쇠지팡이(철장)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받은 것처럼 권위를 줄 것이다”(계2:26-27)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하면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라고 기계적으로 푸는 것은 위 문맥을 왜곡시키는 발상입니다. 주 예수님과 그분의 이기는 자들이 모두 철장으로 다스릴 것임을 성경은 말합니다.


# 사내아이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는 사실은 사내아이가 2장 26-27절에 언급된 이기는 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12장 5절에서의 "낳으니"는 사도행전 13장 33절, 34절에서처럼 부활을 상징한다. 사내아이는 죽었다가 부활한 이기는 성도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계시록 12장 11절의 "죽기까지"라는 말로 증명된다. 죽은 모든 이기는 자들은 사내아이의 부분이 될 것이다. 사내아이는 부활에 의해서 완전히 출현될 것이다. (위트니스 리, 교회 404)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 설명입니다.


(이인규님) “이미 지방교회가 말하는 부활이 어떠한 개념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내아이는 누구를 말할까?”


이인규님께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내아이는 누구를 말합니까?” 사내아이가 예수님입니까?


# 계시록 2장 13절에서 주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네가 어디 사는 곳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보좌가 있는 데라"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이 거하는 곳은 세상이다. 교회는 세상과의 연합 안으로 들어가서 세상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사탄이 거하는 곳, 즉 세상 안에 거하고 있다. 버가모 교회는 또한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에 거한다. 또다시 이것은 세상을 언급한다. 세상은 사탄의 거처일 뿐 아니라 그가 다스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제 교회는 세상과 하나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탄과 하나 되었다. 그런 세상적인 교회는 사탄의 사상과 관념과 이론과 행습들로 흠뻑 적셔졌다. (교회 385쪽)


# 교회는 사탄의 회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결국에는 세상적으로 되어서 사탄이 거하는 곳이요, 그의 보좌가 있는 곳에 거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는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이제 사탄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를 그 자신으로 흠뻑 적셨다. 변절한 교회 안에는 사탄의 깊은 것들, 즉 사탄의 비밀스런 교훈들이 있다. 이것은 바로 사탄의 깊은 사상, 사탄의 관념이 변절한 교회를 흠뻑 적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이 교회는 사탄의 체현이 된다. 합당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변절한 교회는 사탄의 체현이다. (교회 388쪽)


오늘날 세상은 교회 안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사탄의 왕국을 기독교의 교회로 본다. 사탄과 하나가 된 곳, 사탄이 거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내아이는 누구를 말하고, 그 사내아이를 쫓던 용, 즉 사탄은 누구를 말하는가? 용은 기독교, 즉 사탄이고, 사내아이는 지방교회라는 것이다.”


계시록 2:13은 사탄이 왕인 세상과 하나된 ‘버가모 교회’ 안에 사탄의 보좌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이것을 교회가 세상과 하나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은 “지방교회는 사탄의 왕국을 기독교의 교회로 본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 성경에서 여자는 보다 약한 자를 상징하고, 남자는 보다 강한 자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12장 5절에 있는 사내아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보다 강한 부분을 의미한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일부 더 강한 자들이 있어 왔다. 성경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전쟁을 치루고 하나님의 왕국을 땅으로 이끌어 내리는 집합적인 한 단위로 여겨진다. (교회, 404쪽)


위트니스 리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다음 구절에 내포되어 있다.....


# 만일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이긴다면, 진실로 우리는 이기는 자들, 즉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대적하는 상황을 이기는 자들이요, 세상과 사탄과 적그리스도들과 타락한 기독교계의 모든 타락들을 이기는 자들이다. (교회, 401-402쪽)


성경에 근거한 균형잡힌 설명입니다.

 


(이인규님) (9) 고린도후서 3:17의 영:


"주는 영(프뉴마)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지방교회는 예수가 "성령이 되셨다"고 양태론적인 해석을 하는데, 당연히 그러한 성경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지방교회가 양태론적인 증거로 인용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고후3:17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가 직접 성령이 된 것이며, 지방교회는 이것을 총체적인 삼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지방교회는 본문을 "주는 그 영(the Spirit)이시다"라고 해석한다.....정관사가 있으므로 주는 “그 영이시다”라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코메디적인 해석으로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얼마나 단편적인 짜맞추기인지를 곧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신"도 "the Spirit"이기 때문이다.”


고후 3:17절은 위격의 경륜적인 동일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방 교회측 누구도 이 구절을 놓고 삼위의 2격이 3격이 된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한 마디로 이인규님의 터무니없는 조작이요 거짓주장일 뿐입니다. 지방 교회측은 원칙적으로 한 위격은 삼일 하나님 전체이기도 하시다는 것을 믿고 말함으로, 원칙적으로 1격이 2격이 된다거나 혹은 2격이 3격이 된다는 말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정통 개혁 신학자 로뢰인 뵈트너는 주기도문에서 성부는 배타적으로 제1격만을 말하지 않고 “삼일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도 삼위의각 위격은 모든 위격들을 포함한다(all in each)라고 말합니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엉터리라는 성경구절을 대략적으로 찾아보면, 부활전의 막1:10의 성령도 the Spirit 이고, 요1:32. 33도 the Sprit이며, 눅2:27, 4:14도 the Spirit 이다. 모두 부활전이지만 "그 영"으로 해석되어 부활후의 "살려주는 그 영"이 되어야만 한다. 또 마3:16의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비둘기처럼 강림하시던 성령님도 "the Spirit"이며,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헬: 호 프뉴마, the Spirit)


예수님과 The spirit(살려주는 그 영)이 함께 공존하는 마3:16의 장면은 지방교회의 양태론을 맞추기 위한 성경해석이 얼마나 희극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눅2:27의 시므온에게 임한 “그 성령”도 양태론적인 살려주는 영이 되어야만 하며,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눅4:14의 성령도 살려주는 "그 영"이 되어야만 한다.


즉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따르자면, 창세기의 하나님의 신도 그 영이시고, 신약시대의 성령님도 그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모두 같은 영이기 때문에 아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엉터리가 된다.”


이미 알다시피 지방교회는 구약의 성령과 신약시대의 성령은 부활 후 성령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지만, 그것은 최종 완결된 영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과 성령도 최종 완결된 영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 계시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후였다. 이 영은 창세기의 하나님의 영, 구약의 여호와의 영, 마태복음 1장의 성령과 다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7-28쪽)


이 문제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영 혹은 심지어 성령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7:39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영광 받으신 시각인 부활 시점(눅24:26) 이전에 ‘그 영이 계시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은 성경 자체이지 위트니스 리의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영이 계시기 전과 후를 구별하여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4:16은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께 구해서 우리에게 보내 주실 것”을 미래시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과 그 이전의 성령 (예를 들어 마3장 침례시 강림하셨던 성령)은 같은 성령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위 위트니스 리의 설명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요7:39)은 고신교단 신학교 총장이신 변종길 교수님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합니다(https://www.localchurch.kr/16914). 따라서 독자분들은 지금의 이인규님처럼 가볍게 취급하기 보다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본 주제를 탐구해 볼 것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에서 본 것처럼 아마추어 성경 해석가인 이인규님은 지극히 피상적인 자신의 이해로 균형잡히고 깊이 있게 성경을 푼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인규님은 자신이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무조건 자신은 옳고 다른 이들은 틀렸다는 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자신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상호 교제의 차원에서 함께 성경을 알아가기를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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