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 자매가 먹은 가나안 족속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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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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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 자매가 먹은 가나안 족속
라이프스타디 500 메세지가 한 놀라운 일
[민수기 14장 9절]
다만 여러분은 여호와를 거스르지 말며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을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느 청년 자매
제2부: 어느 청년 자매의 구원과 회복
(부제: 사막에서 먹은 가나안 족속)
3장: 놀라운 구원
어느 초등학생들의 텃세
초등학교 5학년 때 저는 친구 따라 교회에 몇 달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동네에서 조금 큰 교회였고 친구와 저는 어린이 성가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매주마다 성가대에서 부를 곡을 프린트해서 나누어주었는데,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그 악보를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두었고, 이후 교회를 나가지 않은 약 15년간의 매우 오랜 시간 그 찬송을 혼자서 피아노로 연주했습니다. 믿음도 없었지만 찬송이 좋았습니다. 그때는 단지 찬송 곡의 멜로디가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말씀과 기도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15년 뒤에 주님을 믿게 되기까지 보이지 않는 끈과도 같았습니다. 그 어린이 성가대에는 거의 고정적으로 솔로 파트를 전담하던 저와 동갑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뱃속부터 그 교회를 다닌 모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가대 선생님이 이번에는 새로운 사람이 솔로 파트를 해보자고 하시면서 저를 지목했고, 그렇게 어느 주일 솔로 파트를 제가 부르게 되었는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교회에 온 지 얼마 안 된 뉴페이스인 제가 주목받는 솔로 파트를 하게 되자, 모두가 철없는 그때 저는 그 여자 아이와 친한 무리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고 그들은 텃세를 부렸습니다. 그 성가대에서는 소프라노와 알토 파트를 나누어서 연습했는데, 목소리 톤이 낮은 저는 알토였고, 그 여자 아이는 소프라노였습니다. 제 목소리 성량은 작지 않고 큰 편이었는데, 그 여자 아이는 저 때문에 자기 파트가 헷갈린다며 저리로 좀 비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 같이 왔던 친구가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혼자 남아서 무리에 끼지 못한 저는 그렇게 교회를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신―나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
그렇게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후로 교회를 접촉할 아무런 기회가 없었고, 20대 중반까지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여러 신들은 나약한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기 위해 실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설정한 다음, 그 존재에 하나님, 예수님, 부처, 마리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지금은 선교사가 된 주님을 믿는 옆자리 친구와 공부는 안 하고 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토론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신이 있다면 증명해 보이라고 말하며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어놓고 기호에 맞게 여러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저는 주변에 믿는 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복음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습니다.
어느 기독교 회사에 입사하다
그러던 중 대학교 마지막 학기 때 여러 회사에 지원하던 중 저는 E회사에 최종 합격하게 되었는데, 그 회사는 기독교 회사였습니다. 그 회사는 입사 지원서에 종교가 무엇인지 적는 종교란이 있었는데, 저는 당연히 그 란에 “무교”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독교 회사라고 대충은 들었지만 입사 후 이 정도로 기독교 문화가 강한 회사인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입사할 때 한 달간 신입사원 합숙 연수를 했는데 그 한 달간 잠언 31장으로 매일 아침 1장씩 동기들과 QT(Quiet Time, 아침 부흥과 비슷) 나눔을 했어야 했습니다. 저는 믿음은 없었으나 교훈적인 얘기 같은 잠언으로 QT 나눔을 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믿음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구가 기독교이고, 그 믿는 사람들이 다 어디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저명한 지식인들과 과학자들도 있는데, 그들이 단체적으로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무언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단체적으로 미치기에는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과 많은 지식인들도 그 무리 안에 있기 때문에 단체적으로 미치기는 어렵고 정말 무언가가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습니다.
한 달간의 합숙 연수가 끝난 후에 부서에 배치되었는데 매주마다 회사 내에서 예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신입사원이라는 이유로 동기와 함께 예배 찬양팀으로 차출되었습니다. 믿음은 없었지만 15년간 혼자 찬송을 연주했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고 음악이 좋아서 거부감 없이 참석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예배 찬양팀을 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것은 주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성경 읽기 대회―무신론자가 읽은 사복음서
그렇게 1년 차의 회사 생활을 하던 중 겨울에 직원 수련회가 있고 그 수련회 몇 달 전에 성경 읽기 대회를 한다는 공지가 내려왔습니다. 모세오경을 읽으면 상품권 5만원, 역사서까지 읽으면 7만원, 신약을 읽으면 5만원 등으로 읽는 구간에 따라 포상이 있었습니다. 각 부서에서는 리더가 솔선수범해서 업무 시간 도중에 30분씩 시간을 내어 함께 성경 읽는 것을 독려했습니다. 회사에는 주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신기하게도 포상으로 돈이 걸리니 안 믿는 사람들이 상품권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때 성경을 읽어서 기독교인 무리들 안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 읽기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한 직원이 건네준 개역 성경을 읽는데 도무지 잘 읽히지 않았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발음도 어려운 이름들만 나열되어 있질 않나, '가라사대'를 비롯한 익숙하지 않은 성경의 문체가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모태 신앙 동기에게 성경을 읽어보고 싶은데 도무지 잘 읽히지가 않는다고 말하니, 그 동기가 현대 문체로 쓰여진 메시지 성경(유진 피터슨 저)이라는 책을 추천해줬고, 마침 회사 복지몰에서 그 책을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돈을 들이지 않고 포인트로 살 수 있었습니다.
책을 주문해서 사복음서를 읽었는데 성경을 처음 읽어 본 무신론자였던 제 눈에 사복음서는 약간의 상황 서술만 다르고 거의 동일한 이야기를 서술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더욱 의아해졌습니다. '저자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거지?' 그 시대에 핸드폰도 컴퓨터도 아무것도 없는데 4명의 저자가 짜고 친 고스톱도 아니고, 4명이 작당해서 재밌는 얘기를 지어내기엔 하나도 재미 없고 흥행하지 못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처절한 이야기였습니다. 즉, 그 허구로 지어내기엔 아무런 유익이 없어 보이는 그 이야기는 거짓 없는 실제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직원 수련회에 가기 전까지 메시지 성경이라는 책으로 신약 전체와 모세오경을 다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나서 책을 추천해줬던 모태 신앙 동기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나는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는 거지? 그 존재가 나타나야 내가 믿을 수 있을텐데 말이지.” 그 동기는 제게 대답했습니다. “믿음은 그분이 선택하신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야.” 저는 이 대답을 듣고 더 이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 화가 났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분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는 차별적인 분이란 말인가요?' 동기는 선택된 자고, 나는 선택되지 못한 자라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존재를 아이러니하게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수련회에서 만난 주님
그러던 중 직원 수련회가 다가왔는데 부서에서 찬양팀이었던 저는 수련회 찬양팀으로 선발되어 다른 직원들보다 하루 일찍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참석해보는 수련회에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찬양을 연습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찬양 인도자가 강단에서 비어있는 의자들을 바라보며 내일 이 자리에 앉게 될 직원들을 위해 의자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무언가 큰일 났다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부서에서는 가볍게 찬양할 수 있었어도 여기는 가볍게 올 자리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믿음이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어떻게 안 믿는 직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속으로 '와, 큰일 났다. 여기는 내가 올 곳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홀로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저찌하여 저녁 예배의 찬양팀 찬양이 끝나고 저는 반주자와 함께 강단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초청되어 오신 목사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여러분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니, 이 예배 한 번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상처가 치유될 수 있으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지 않았겠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심리학도 전공하신 분이었는데 예수님이 수천 년 전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당대의 극악무도한 형벌이라고 하시면서 정말 생생하게 그 장면을 묘사했는데 저는 마음이 아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죄가 없는 분이 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잔인한 형벌을 당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분조차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아버지께 버림받았다고 했습니다. [마 27:46, 막 15:34] 제구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시며 부르짖으셨는데,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목사님이 이 성경 구절을 말하시는데, 저는 사복음서를 다 읽었기 때문에 저는 그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신 그분조차도 아버지께 버림받으셨다는 사실에 저는 충격에 휩싸였고, 망치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 나면서 깨달아진 것이 있었는데, 이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이 생생합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벌레만도 못한 오늘의 나의 죄를 위해 수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었는데 이것이 기적처럼 믿어졌습니다. 이어서 목사님은 지금 이 시간 인생의 모든 상처들을 꺼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따돌림당한 기억, 인생에서 너무 외롭고 힘든 기억 등을 모두 꺼내어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치유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끝나고 조명이 어두워지고 잔잔한 반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시간은 원하는 대로 머물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 따라 잠깐 교회에 다닐 때, 화장실에서 배가 너무 아파서 기도해 본 이후로는 기도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고 눈을 감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간 저의 인생의 상처를 그분 앞에 꺼냈습니다.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이 흘렀고 못 봐줄 얼굴이 되어 기도 시간을 마치고는 화장실로 급하게 달려가서 얼굴을 닦았습니다. 이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나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아는 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핵심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의 긍휼로 그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고, 제 안에 믿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구원받은 이후로 저는 약 6개월 동안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기도하거나 영적인 일들에 대해 들을 때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
아무도 교회 가자고 권면하는 이 없이 구원받은 후 스스로 동네 교회를 찾아가서 주일 예배를 몇 차례 드려본 이후에 말씀에 감동이 되어 직원으로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에게 교회 등록하러 왔다고 얘기해서 그렇게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 1시간으로는 제 안의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초신자였지만 1년 1독을 3년 연속으로 했고, 채워지지 않은 갈급함을 채우려고 신앙 서적들을 미친듯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CS 루이스, 존 번연, 유진 피터슨, 릭 워렌, 고든 맥도날드, 헨리 나우웬, 카일 아이들먼, 오스왈드 챔버스, 필립 얀시 등의 저자들이 쓴 서적들을 50권 가까이 구원받은 직후부터 초신자 때 읽었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은 도대체 어떤 예수님을 만났을까, 그들은 어떠한 믿음의 지경에 올라갔을까 너무 궁금했고, 책을 통해 저도 깨달아 빨리 그러한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은혜를 받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그 은혜는 오래 가지 못하고 여전히 제 안의 깊은 갈급함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행위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선한 행실을 강조하면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는가? 구원받은 사람이 이후 살인을 저지르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것인가, 아니면 받은 구원이 취소되는가? 그렇다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구원받은 후 선한 행실을 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인가?' 특히 이러한 내면의 궁금증들은 설교나 책으로도 해소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점차 힘들어졌습니다. 생명의 흐름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기 싫었는데 주일에만 말씀으로 번뜩이고 나머지 날들은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인지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교회 청년부에 다녔던 저는 중년 지체들과는 단 한 번도 섞인 적이 없었고, 어느 지체의 집에 가본 적도 없었습니다. 8년을 다닌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과 한 마디 대화도 해본 적이 없었으며, 가끔 청년들과 평일에 카페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코로나가 찾아왔고 대면 예배를 못 하게 되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다니던 교회에서 나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유튜브에서 그동안 듣고 싶었던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 또는 고인이 되신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 헤매며 나 홀로 방구석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2년의 시간은 교파의 아무런 방해 없이 즉각적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전적인 주님의 긍휼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