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비교 - 구원파, 장로교, 주재권 구원, 지방교회측
- 새예루살렘
- 2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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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비교 - 구원파, 장로교, 주재권 구원, 지방교회측
섭리님이 이곳에 오셔서 구원파의 구원론과 지방교회측 구원론을 같은 맥락으로 보고, 그 부족에 대한 대안으로 존 맥아더 목사님의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파의 구원론과 지방교회측의 구원론은 같은 맥락이 아닙니다. 둘째는 지방 교회측의 구원론은 대안으로 제시된 주재권 구원론보다 더 뛰어나고 성경적이고 균형잡힌 구원론이기에 그러합니다.
이제 위 네 가지 구원론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간략하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파 구원론
구원파 안에는 그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죄(엄밀히 말하면 죄들) 문제를 해결했다는 간증들이 쏟아집니다. 그야말로 죄가 동에서 서가 멀듯이 멀리 떠나갔다는 해방감과 자유함을 맛보게 되면 자신에게 그런 기쁨을 선사한 그 단체나 인도자에 대한 무한 충성과 헌신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교회론(특히 몸에 대한 인식부족)과 생명 방면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부족하다보니 소위 ‘모임’을 위한 외적인 봉사와 헌신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인 줄 오해하고, 돈을 바치고 몸으로 모임이 운영하는 회사에 거의 무보수나 저임금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구원만 받으면 죄를 지어도 상관없고 회개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장로교단 구원론
장로교단 구원론은 한 마디로 칭의론이 핵심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우리의 죄들을 해결했음으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억압 아래 있지 않으며, 이것은 하나님도 바꿀 수 없는 법정 선언임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교리적으로 가르쳐짐으로 머리 속에서는 믿으려고 애를 쓰되 실제 체험적으로 안 믿어질 때 갈등하다가 소위 ‘깨달음’으로 죄를 해결하는 구원파쪽으로 가기도 합니다. 사실 구원파는 처음부터 불신자인 경우도 있지만, 기성교회를 다니지만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민하다 구원파에 가서 그것을 해결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로교단은 성경에 그런 것이 있기에 거듭남, 성화 등을 가르치지만 신학자마다 그 정의가 달라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한 예로 모 인터넷 카페에서는 같은 장로교 목회자들간에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을 논하다가 회원들이 대거 이탈하여 따로 카페를 차린 일도 있었습니다. 한 쪽은 다른 쪽이 알미니안 요소를 가미해서 정통 개혁주의 구원론이 아니라고 하고, 다른 쪽은 이것이야 말로 참된 개혁주의 구원론이고 이 구원론이 보급이 안 되어 오늘날 장로교단 내에 구원의 확신과 열매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암시를 줍니다. 구원론이 ‘거듭남이란 무엇인가’에 머물고 있는 셈입니다.
주재권 구원론
위에서 제가 소개드린 맨 마지막 자료(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주재권 구원파’(LS)와 ‘값없는 은혜파’(FG) 사이의 논쟁의 핵심은 “결국 중생(거듭남, regeneration)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입장 차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즉 주재권 구원론이 주장하는 것은 확실하게 거듭난 사람은 당연히 회개하고 당연히 삶속에서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그것이 없다면 ‘참되게 거듭난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거듭났지만 영적으로 어린아기인 소위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분들이 볼 때 삶의 증거가 미미하고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면이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또는 오늘날 한국교계에서 보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아예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여기에 주재권 구원론의 가장 큰 맹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열하고, 아비의 아내와 살고, 소송을 일삼고, 심지어 부활이 없다고 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라고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기들(고전3:1)이라고 했을지언정 불신자 취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위에서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분들 웹사이트에는 폴 워셔가 같은 맥락의 구원론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어 폴 워셔의 한국 내 집회가 홍보되기도 합니다. 큰 틀에서 볼 때에 폴 워셔 그리고 주재권 구원론을 주장하는 존 맥아더, 그리고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같은 부류라고 할수 있습니다. 즉 구원의 복음이 너무 값싸고 쉽게 전해져서 <거짓된 신자들을 양산하는 복음전파>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CCC의 사영리, 심지어 세대주의자들이 전하는 영접기도 등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분들이 확실한 거듭남을 주장하는 것은 좋은데, 영적 출생에 불과한 (물론 이것이 귀하지만) 거듭남을 구원의 전부처럼 비중을 두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남 이후 생명의 성장 또는 다른이들과 함께 건축되는 방면에 신약의 대부분을 할애합니다. 서신서는 이 두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이 성화 부분을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점을 너무 강조하고 사람 편의 책임이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불균형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면, 그렇게 많은 서신서 내용이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서신서는 불신자가 거듭나라는 촉구가 아닙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세속화되고 하나님의 계획과는 핀트가 빗나간 엉뚱한 일에 종교적인 열심을 쏟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에서 속히 벗어나서 생명이 자라고 몸이 건축되는 일로 돌아오라는 반복된 권면이 신약의 서신서입니다.
지방교회측 구원론
이미 앞에서 다뤘기에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 네 가지입니다. 1) 죄들의 용서(예수님의 보혈로), 2. 사람의 영의 거듭남(요3:6), 3. 사람의 혼의 변화(벧전1:9, 고후3:18), 4. 사람의 몸의 구속(롬8:23, 빌3:21)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는 구원 자체이신 주 예수님(눅2:30 ‘나의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는데’ 이 말은 강보에 쌓인 아기 예수를 가리켜 시므온이 한 말임.)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의 자기 부인을 토대로 우리의 마음 안에 들어오시고 마침내 우리의 몸까지 그분의 거처로 만드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방면을 단체적인 시각에서 본 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엡1:23)이요 새 예루살렘입니다(계21:10).
결론적으로 존 맥아더 목사님 그리고 섭리님이 제시하시는 주재권 구원론은 칭의 내지는 확실한 거듭남에 머물 뿐, 생명의 성장 방면이나 몸의 건축 방면이 빠졌거나 강조되지 못한 불완전한 구원론일 뿐입니다. 섭리님은 이런 토론을 통해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하)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고민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댓글 14
구원론에서 칭의론이 핵심인 곳은 장로교가 아니라 루터파입니다. 잘 아시고 쓰셔야 합니다. 장로교는 '개인의 구속사 위주다' 라고 쓰실려고 하셨을거라고 제가 나름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문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시고 계십니다. "장로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해결했음으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억압 아래 있지 않으며, 이것은 하나님도 바꿀 수 없는 법정 선언임을 강조합니다. "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개혁신학은 죄인이자 의인인 2중 신분을 얘기합니다.
연속적 중생론과 순간적 중생론 얘기하셨는데 용어를 제가 다시 알려 드립니다. Definitive Santification 결정적(본질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입니다. 칼빈 신학교의 존 머레이 교수가 청교도들의 성화론들을 정의하여 위의 용어들을 사용했고 결정적 성화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신학입니다. 그러나 이 '결정적 성화'는 '점진적 성화'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 성화'에 근거하여 '점진적 성화'가 체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진작에 루터파의 '칭의'가 중심이 되는 신학과 결국 유사한 모습이 되는 것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설명하는 다른 '용어'사용으로 봐야 합니다.
개혁주의 성화를 놓고 목사님 간에 논쟁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계속 국내 목사님들의 신학 수준에 너무 큰 기대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결정적 성화'나 존머레이 교수 책을 안읽어본 목사님들이 대다수인게 현실인거지 개혁주의 신학이 단순해서 forensic 법정적인 부분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비판은 계속 말씀 드리지만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 됩니다.
둘떄, spiritual 영적이라는 표현을 positional 한것과 practical 한 것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워치만니 같은 사람들이 (위트니스 리나 지방 교인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20대에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식의 글을 쓰면서 positional 한 것과 practical 한 관점에서의 용어적 구분 없이 쓴 결과로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이 단어에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positional 한 의미에서 모두가 spiritual 하지만 실제적인 면에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처럼 carnal 육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실제적인 면에서 자라지 않고 carnal 한 크리스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유사 그리스도인이며 가라지 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류가 개신교와 지방 교회 안에 많다는 것 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자의 경우 이미 100 퍼센트 영적인 사실을 모르거나 잊고 뭔가 추가적인 어떤 영적 느낌을 찾는 오류에 빠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