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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성령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

 

반복해서 지적하는 것은 이것이다. 원세호님의 비판 글은 동일 내용이 중복해서 다뤄지고 있다. 체계가 없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학문적인 가치가 떨어진다. 원세호님은 자신의 지방교회 비판 책자를 교회론, 기독론, 신론 등의 제목을 붙여서 썼다. 그렇다면 사전에 잘 살펴보고 유사하거나 동일한 비판내용들은 하나로 묶어서 일괄 비판을 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주의 이름 부르는 실행'을 비판하려면, 기독론이든 성령론이든 어느 한 곳에서 일괄적으로 다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원세호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반박하는 입장에서도 불가피하게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게 된다. 이것이 합당한가?


또한 <성령>인가 <그 영>인가도 지금처럼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과대포장할 일이 아니다. 우리말 성경은 동일하게 성령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은 <the Holy Spirit>과 <the Spirit>를 구분해서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문을 따라 <the Holy Spirit>을 <성령>으로 <the Spirit>를 <그영>으로 읽고 말하는 것이 무슨 그리 큰 잘못인가? 물론 앞에서 이미 쓰였던 '성령'을 정관사를 써서 'the Spirit' 이라고 함으로 문자 상으로는 '그영'이지만 사실상은 '성령'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도 <그영>이라고 했다는 사실만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그영>을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다소 복잡한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면 1) 마1:18, 20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시킨 영으로서의 성령과 고전15:45의 육신을 입었던 예수의 인성을 포함한 의미의 생명 주는 영 곧 <그영>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삼위의 3격으로서 신성만 있으시다면, 후자는 그 영 안에 예수의 인성도 포함되셨다는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롬8:16의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라고 할 때'의 성령은 원문이 the Spirit으로서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2)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고전 6:17 말씀처럼 <주의 영>과 <사람의 영>이 연합하여 한 영이 된 상태의 <그영>이 그것이다. 롬8:13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문은 역시 the Spirit 이며 우리의 영과 연합된 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지방교회측은 이러한 영에 대한 분별과 인식이 있다(워치만 니,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한국복음서원, 2000년, 26쪽; 위트니스리, 온전케 하는 훈련(II), 한국복음서원, 1993, 124-146쪽). 만일 원세호님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비판했다면 좀 더 깊이와 무게가 있는 진리토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세호님은 이런 부분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단순한 표현상의 이견이나 자신의 <예수=성령> 또는 <아버지=예수=성령> 틀에만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했다.


결국 원세호님의 비판 글은 핵심을 비껴갔다. 대신에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차이점들만 중복되게 나열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들의 대부분은 그의 삼신론적인 사상 내지는 지방교회측의 더 심화된 그영 이해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다. 결코 지방교회측 성령론이 거짓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세호님의 그영 이해가 비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1.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그 영」에 대한 독특한 주장> 비판 반박


이제 구체적인 항목들을 다뤄가며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요14:16-17절의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하여 성경을 잘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또 다른 보혜사는 그 영이며 부활 안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순절 때 오신 그 영' 이라고 하므로 성경을 인용해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 반박: 비판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① "요한복음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였다(14:16-17상). 보혜사는 실제(진리; 필자 주)의 영인 것이다. 영이 없다면 실제가 없으며 모든 것이 바로 의문과 교리가 된다. 17절 하반 절은 계속하여 이 실제의 영에 대해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14.(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 p. 47).>


이미 이 '또 다른 보혜사'도 앞의 기독론 반박에서 다뤘던 것이다. 핵심만 다시 짚어보기로 하겠다. 원세호님은 이 '또 다른 보혜사'가 <부활하신 아들 하나님은 제외된> 성령 만이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원세호님은 우리의 생명 되신 아들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영접했는가? 원세호님은 아들과 성령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입장임으로 성령 받은 것이 곧 아들을 영접한 것이라고 얼렁뚱땅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과 성령을 분리시키고, 또 다른 보혜사와 보혜사를 기계적으로 분리시킨 결과는 <아들의 실존체는 사람 안에 안 계신다>는 심각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것은 성경적인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요일5:12는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린도 전서 15:45의 <생명 주는 영>을 요14:16-17의 <또 다른 보혜사>라고 믿으면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이 생명 주는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구별되나 상호 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을 지칭할 때에는 다른 두 위격도 포함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임을 원세호님은 알아야 한다.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생명이 인간의 영을 통해 교통을 이룰 때 중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 영을 통하여 공급될 때 성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듯 하지만 틀린 것이다. 그 이유는 거듭남이나 중생은 인간 영에 관한 신분에 관한 즉 출생에 관한 것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을 때에(롬10:9-10; 요3:3-6) 즉 예수의 이름을 믿는 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게되는 순간 거듭나게(요1:12)되어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을 받은 사람이 중생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 반박: 원세호님은 중생의 시점과 상태를 혼동하고 있다. 자신이 확실히 체험한 사람의 말은 간단명료하다. 확신이 있다. 그러나 위 원세호님의 말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영을 받은 사람이 중생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중생의 참된 의미를 오해했거나 본인이 아직 참된 중생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원세호님의 두리뭉실한 설명과는 달리 중생을 말하는 성경본문은 아주 명확하다. 즉 요3:6 후반부는 중생을 '그영으로 난 (사람의) 영'(and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이라고 했다. 즉 중생은 <출생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중생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이라고 한 고전6:17처럼 <한 존재와 또 다른 존재의 연합의 문제>이다. 위 구절에서 '합한다'는 동사인 '콜라오'(2853)는 '아교'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뜻이 '아교로 붙이다'는 말이다. 중생을 통해 우리는 서로 안에 거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상태를 갖는다(요15:4-5).


3) <원세호님의 비판: ③ 지방파의 주장은 성령님이 인간의 영과 연합해서 명목상 구별되며 하나가 되어 있어서 영이 풀린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영이 풀린다는 교훈이 없으며 성령님과 인간 영이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근거도 성경에 없다.> <⑤ 성령님이 인간의 영에 내주 하심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 영은 능력 있고 하나님이신 성령은 무능한 분으로 주장하므로 무례한 주장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편재하시는 분이시다. 인간 피조물 영에게 들어가면 풀려나올 수 없다는 망언을 해서는 안 된다.>


** 반박: 우선 원세호님은 정경사에서 나온 책자인 '자아가 죽을 때'를 참고했다. 그러므로 한국복음서원에서 나온 동일 책자인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과는 페이지나 문체나 단어사용이 많이 다르다. 실제로 원세호님은 위 비판내용을 38-39 쪽에서 인용했다고 하나 한국복음서원 책자 해당 페이지엔 그런 내용이 없다. 이런 차이가 반박 글 작성시 어려움이 된다는 것을 원세호님은 알기 바란다. 이제 원세호님의 위 주장을 반박해 보겠다.


(1) 'the release of the Spirit'이란 원문은 '영이 풀렸다'라고 번역하기보다 '영의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다. 영이 풀렸다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2) 또한 <성령님과 인간 영이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근거도 성경에 없다>는 원세호님의 주장은 거짓이다. 이 말은 고전6:17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함으로, 영이신 주님과 우리의 영이 연합되어서 한 영(one spirit)이 되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원세호님은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함부로 '성경근거가 없다' 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3) 또한 우리 안에 주인이신 영 하나님이 살고 계시지만, 실제 체험에서는 우리가 주인노릇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원세호님은 항상 성령님께 복종하는 삶을 사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주님이 원세호님보다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원세호님은 본인의 실 생활을 한 번만 돌아보았어도 '무례하다' '망언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상한 인격을 가지신 주님은 우리를 힘으로 강압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우리가 자발적인 헌신과 믿음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 순종하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엔 '성령을 근심케 말라'(grieve not the holy Spirit of God)(엡4:30),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Quench not the Spirit)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때 옛 자아가 강하게 살아서 주님을 이기고 만다. 오직 많은 실패를 거쳐 자아의 실상을 알고 겉 사람이 파쇄된 자만이 사도 바울처럼 그의 삶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 수 있다(갈2:20). 다시 권하건대, 원세호님은 지금처럼 말꼬리만 잡지 말고 위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책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참고로 위 책자 서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자아의 파쇄(부인)이다. 자아가 파쇄되어야 영이 해방된다. 마르틴 루터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교황이나 추기경이 아니요 나의 자아>라고 말했다. 자아는 파쇄가 필요할 뿐 아니라 분리가 필요한 것이다. ...헌신과 통제와의 관계, 파쇄와 분리의 필요성, 분리되는 방법 등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이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④ 성령님이 사람의 영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인간의 영에 전능자로서 내주 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며...편재하시므로 약속하신 대로 인간의 영에 내주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영을 사용해서, 통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말하라.>


** 반박: 원문을 좀더 넓게 인용하고 반박해 보기로 하겠다.


<워치만니 주장: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때는 사람의 영을 입고 오신다. 이것은 마치 전등의 전기가 하늘의 번개같지 않고 전선을 타고 가는 것과 같다. 오늘날 전력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전선이 있다. 전선을 입고 가는 것이 전기이다.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전하(Electric charge)라고 하는데, '하'라는 단어는 짊어진다는 뜻이다.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기가 전선을 입고 전선을 타야 한다. 하나님의 영도 이와 같이 사람의 영으로써 성령을 짊어지게 하고 사람의 영으로 성령을 사람가운데로 가져오신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영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한국복음서원, 2000년, 26-27쪽).


원세호님의 위 주장은 핵심이 없다. 즉 비판 요지가 분명치 않다. 원세호님은 성령의 편재를 아무 곳에서나 적용하여 말하지 말기 바란다.


성령은 분명히 편재하신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 안에는 안 계신다. 이것을 부인하면 신자나 불신자의 차이가 없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믿은 성도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된다. 양육도 마찬가지이다. 영을 사용한 사람의 말씀공급 만이 참된 양육을 가능케 한다. 이와는 달리 단지 자기 생각 속에 있는 성경지식 전달만으로는 영과 생명을 공급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날 자신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일을 하신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신 주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셨다. 그 다음에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I serve in my spirit)고 했다(롬1:9).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의 일의 주된 부분을 천사나 불신자나 하늘에서 번개처럼 나타나시는 방식에 의뢰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자신의 영 안에 계신 주님과 하나되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즉 하나님은 오늘날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빌1:21)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경륜을 이뤄 가신다. 이런 원칙을 알면 영적 생활에 진보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골로새서 1:29, 빌립보서2:13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5) <원세호님의 비판: ⑥ 인간의 겉 사람이 성령의 훈련을 통해서 깨어지고 성령의 계시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분리된다는 주장은 성경 근거도 없는 소리이며, 믿는 사람은 롬7:18-25절과 같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된다(롬8:13). 무엇이 성령의 훈련과 계시로 깨지는가?>


** 반박: 우선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워치만 니가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정의를 먼저 소개해 보겠다.


'로마서에서 '내 속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는 말씀이 있다(롬7:22). ...또한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하는 것을 보여 준다(3:16).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한다(고후4:16). 성경은 사람을 속사람과 겉사람으로 나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의 영은 속사람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의 밖은 겉사람이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 사람의 영이 바로 속사람이고 보통 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겉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영과 그분의 생명을 두신 곳은 바로 우리 속사람이다. 이 속사람 밖에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으며 가장 밖에는 우리 전체의 육체인 우리의 몸이 있다'(워치만 니,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서울: 한국복음서원, 2000년), 10-11쪽).


(1) 계시로 겉사람과 속사람이 분리됨: 주님을 영접하고 난 이후에도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분 못하고 겉사람으로 헛되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도 바울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그 당시의 최고의 신학 공부를 마쳤다(행22:3). 그러나 다매섹 도상에서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그도 겉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 결과는 참된 주의 자녀들인 교회를 핍박한 것이다(빌3:6). 이처럼 성령의 계시가 없으면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분하고 분리하기가 곤란하다. 계시가 있어야 육체를 따른 삶이나 봉사가 무익함을 안다. 이에 대해서는 빌3:3-8을 읽어 보라.


(2) 성령의 훈련(징계)을 통해 겉사람이 깨짐: 히브리서 12장의 주의 징계는 주로 우리의 겉사람의 파쇄를 목적으로 한다(5-11). 즉 주님의 징계는 주로 우리의 겉사람을 다루어 그 안에 주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본성을 덧입게 하려는 것이다.


히12:10-11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케 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슬퍼 보이나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은 '너희는 유혹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생각의 영'(the spirit of your mind)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 엡 4:22-24와 같은 맥락이다.


옛사람을 벗고...새 사람을 입는 과정에 성령의 훈련이 있다. 이런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원세호님처럼 성경 근거가 없는 소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원세호님도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되면, 아래의 워치만 니의 말에 아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지 않고 계시와 체험을 통해 참되게 아는 사람이 복되다. 원세호님도 이런 축복을 얻기 바란다.


<워치만 니: ⑥ "겉 사람은 성령의 훈련을 통하여 깨어집니다. 겉 사람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됩니다"(히4:12)>(35. p.55, 워치만 니).>


6) <원세호님의 비판: ⑦ 성령님이 주의 이름의 보호자이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의 후견인이 되려고 오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전능자 하나님이신데 무슨 보호자와 후견인이 되며, '이름'을 보호하고 후견하려고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주의 이름 안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모임 주장이다.>


** 반박: 원세호님의 지금 같은 지엽적인 것을 주목하고 성경적인 사실은 부인하는 비판은 옳지 않다. <주의 이름 안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모임 주장이다>라는 원세호님의 말은 마18:20 본문으로 반박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마18:20의 영어원문은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일 때 우리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이름 즉 그분의 인격과 임재 안에서 모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어떤 <물리적인 장소>를 말함이 아니고 모임에 오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원세호님은 성경에 있니 없니 하는 말을 너무 경솔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성령이 주님의 이름을 '보호한다'(protects) 또는 '후견한다'(guards)는 말도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내어 비판할 일이 아니다.


워치만니는 위 말 바로 앞에서 <오늘 주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지만 그분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있고 그분의 영 또한 우리 가운데 있다>라고 말한다. 또한 인용문 바로 뒤에는 <성령은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 계셔서 주의 이름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주의 이름 안으로 모여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위 문맥에서 '주의 이름'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모임에 참석한 성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의 임재 또는 증거를 의미한다. 즉 성령은 주님의 이름이 모임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권위로 역사 되어 그 모임을 통해 주님의 임재와 인격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에 보호자와 후견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같은 차원이다(마6:9). 이것을 <아버지 이름은 원래 거룩한데 무슨 또 거룩히 여김을 받느냐>고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러한 성령의 역사나 주의 이름의 나타남을 무시하는 예배모임도 많다. 그러나 그런 모임은 마18:20 이 말하는 예배모임은 아니다.


7) <원세호님 비판: ⑧ 요한 복음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라고 성경이 증거 하는데 성경에도 없는 '함께'를 첨가하고 번역해야 한다고 하니 거짓도 이만 저만이 아닌 주장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낼 때 아버지도 함께 보냈다고 번역해야 한다고 거짓 말을 하다니...>


** 반박: 이런 주장은 다 <삼위>를 <분리된 갑, 을, 병 같은 세 사람들>처럼 오해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원세호님 말 대로라면, 예수님 승천 후 보혜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저 하늘에 남아 있고 제 3격만 이 땅에 오셨어야 한다. 이런 논리로는 고전 15:45, 계 5:6 같은 성경본문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므로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은 구별되게 상호내재 하심으로 다른 두 위격도 포함한다고 해석해야 옳다. 만일 세 하나님들만 강조하고 이것을 부인하면 즉시 삼신론이 될 것이다.


이제 위트니스 리 주장의 본문을 조금 더 넓게 인용해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15장 26절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이 구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영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구절에 두 번 쓰인 헬라어 전치사 파라(para)가 <...로부터 함께>를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사실상 이 헬라어 전치사의 기본 사상은 <함께>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있는 <파라>를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그영을 보내실 것을 분명히 가리키는 <함께>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위 책, 13-14쪽).


<요한복음 15:26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그영을 보내시며 그 영은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14:26은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영을 보내신다. ..이 두 구절을 읽은 후에...누가 그영을 보내는가 아들인가? 아버지인가? ...아들과 아버지는 다 보내시는 분이다. ...결국 그영이 올 때 셋이 다 온다. 이는 그 영이 아들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오시며, 그영이 아버지에 의해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단지 그 영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그 영을 갖는다>(14쪽).


위 내용에서 위트니스 리는 1) 헬라어 '파라'라는 기본 전치사의 의미 안에 'from with'의 뜻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Darby의 Holy Bible 1291쪽 각주 h를 참조). 2) 요15:26, 14:26 은 삼위의 상호내재 진리를 기초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세호님의 비판은 '파라'에 대한 이견이나 삼위가 상호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전개해야 옳다. 무조건 <거짓도 이만 저만이 아닌 주장이다>라고 할 일이 아니다. 삼위를 분리시키는 삼신론 시각으로는 고전 15:45, 계 5:6, 또는 요8:16, 29(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등의 말씀이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진리이다.


8) <원세호님의 비판: ⑨ 성령님이 오실 때 셋이 다 오고 그 영이 주어질 때 아버지와 함께 인간 안으로 들어와 함께 하는 영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더라도 영은 성령님 하나님이신데 물건 같이 '갖는다'고 말을 하니 무례하고 변질된 성경 근거 없는 소리이다.>


** 반박: 삼위를 <갑, 을, 병 같은 세 사람>처럼 이해하면 위 주장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 갑이 혼자 갔는데 을과 병이 함께 갔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삼위의 상호내재 진리에 대한 신학적인 무지에서 오는 혼돈이다. 반복하지만 '갖는다' 역시 'have'라는 영어의 한글 번역 상의 문제이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기 바란다. 진짜 하나님을 물건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9) <원세호님의 비판: ⑩ 창세기1:2절에서 그 영(성령님; 필자 주)이 알을 품었다고 주장하는데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니라"고 계시된 성경을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알이나 품는 이상한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운행하시니라"가 rchaph(라하프)인데 '움직이다, 흔들다, 운행하시다'로 의미를 해석해야지... 알이나 품고 날개 치는 새 모양으로 표현하다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 알은 무엇이며 수면에 알을 품다니 성령님을 '그 영' '그 영'하는 속셈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어근이 '알을 품다' 이지만 수면에 운행하실 것이라 믿어야 하지 않겠나?>


** 반박: 역시 말꼬리 잡는 비판에 불과하다. 원세호님은 운행하다는 동사의 어근이 '알을 품다'인 것은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문맥에서 알을 품다 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아보았어야 했다. 원세호님은 문장 표현이 좀 색다르면 원래의 책자의 앞 뒤 문맥을 좀 더 폭넓게 읽어보는 성의를 보이기 바란다. 이제 조금 더 넓게 본문을 인용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⑩ "그 영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인데 삼일 하나님의 위격 중 세 번째이다(창1:2; 롬8:9; 고전2:11; 마28:19; 고후13:13).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먼저 알을 품고 있는 영으로서 언급된다. 창1:2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알을 품고 계셨다고 말한다..."(11(그영). p.9).> <닭이 달걀들을 품는 것은 어떤 살아있는 것들을 산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산출하시려고 죽음의 상태 위에 그분의 날개를 펼치고 품고 게셨다. 창세기 1:2 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그분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한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위 위트니스 리의 하나님의 영 해석을 읽고 전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원세호님의 눈에만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원세호님은 앞으로는 좀더 무게 있게 비판하는 방법을 고려해 보기 바란다.


10) <원세호님의 비판: ⑪ 온 종일 '오 주 예수여'라고 이름을 부르면 영으로 적셔지고 충만하고 잠겨진다 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사례가 있는가? 없는 주장이며 성령님이 물인가? 적셔지고 잠겨진다는 말인가? 성경에 없으면 해서도 안 되고 무슨 체험이 있어도 따라 해선 안 된다.> <⑫ 간단하고 단순하게 '오 주 예수여'를 피곤 할 때나 문제가 생기거나 할 말이 없을 때에도 하며 5분 만 해도 불이 붙게 된다고 위트니스 리는 ⑥ p.59, 하1-12 줄에 강조한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며 예증이 없는 실행이며...거짓 영의 역사(요8:44)로 사료되니 금하기를 바란다.> <⑬ 주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영 (성령) 안에 있게 되고 영으로 채워지고 잠겨진다고 주장하나 마음이나 체험은 있을 것이나 성경에 없는 실행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 반박: 주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은 초대 교회에서도 발견된다. 즉 사울은 주의 제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일을 할 때 주의 이름 부르는 자들을 잔해했다고 성경은 말한다(행9:14, 21). 또한 로마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의 부요를 체험한다고 말한다(롬10:12). 이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을 말한다(롬10:13). 이것을 원세호님처럼 죄인이 구원받을 때 딱 한 번만 부르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어서 고전 12:3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예수를 한 인간으로만 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런 고백을 하지 않는다(https://www.localchurch.kr/952).


원세호님이 주의 이름 부르지 않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성경에 없는 실행이라는 경솔한 말은 자제하기 바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권했다(딤후2:22). 사도 바울은 주의 이름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고 권하고 있는데, 원세호님은 그런 말은 성경에 없으니 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 누구 말이 참인가?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지방교회측의 <주의 이름 부름> 관련 사이트 http://callingonthelord.chch.kr/ 를 방문해 보기 바란다.


원세호님도 비판만 하지 말고 깊은 속으로부터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해 보기 바란다. 또는 이것을 영어 식으로 'Lord Jesus!'(주 예수여)라고 선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행7:59, 계22:20).

 


2.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그 영 곧 성령에 대한 양식적 주장> 비판 재반박


<구별된 삼위의 상호내재>(요14:11)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사9:6, 고전15:45, 고후3:17, 계5:6)을 모르면,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원세호님처럼 삼위를 <갑, 을, 병, 세 사람>식으로 보는 삼신론 이단사상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트니스 리나 지방교회는 양태론자가 아니다. 다만 삼위의 구별된 상호내재를 부인하는 삼신론 자들에게는 양태론 자처럼 보일 뿐이다. 한국 교계 내에는 그 동안 삼신론 성향의 이단감별사들의 영향으로 균형 잡힌 성경적인 삼위일체관도 양태론처럼 오해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원세호님의 비판 글을 반박하기 이전에, 서론에 갈음하여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다뤄보고자 한다.


차영배 박사나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의 신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들도 위트니스 리가 사람 안에 삼위 하나님이 다 계심을 믿는다는 것을 자신들의 비판 자료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한 예로 차영배 박사의 인용 글 일부를 제시해 보겠다.


'...엡4:6, 고후13:5, 롬8:11...이 세 구절의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우리는 다만 삼일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87-경륜, 16쪽).(차영배,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0월호, 128쪽). '그러나 위트니스 리...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고 한다: '오늘날 세 분 모두가 모두 우리 영 안에 계신다. 우리는 세 분이 분리되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64-신약2, 176쪽).(위 교회와신앙, 131-132쪽).


위 내용에서 위트니스 리의 말은 1) 믿는 우리 안에 아버지, 아들, 성령 세 인격이 다 계신다. 2) 그러나 이들은 분리된 셋은 아니다. 3)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계신다. 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위트니스 리는 4)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심을 믿는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39-40쪽). 그렇다면 이것이 균형 잡힌 정통 삼위일체가 아닌가? 사람 안에 구별된 아버지, 아들, 성령 세 인격 모두가 계심을 믿는 사람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역사상 이런 양태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억지 주장이 그 동안 한국교계 내에서 세력을 얻었는가? 그것은 외견상 신뢰를 받았던 일부 이단 감별사들의 판단기준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음이 폭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틀린 정답>을 가지고 <맞는 시험 답안지를 틀렸다고 채점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동안 삼위일체 진리에 전문가를 자처해왔던 차영배 박사, 최삼경 목사, 원세호님의 이단적인 삼위일체관을 비판해 보겠다.


1) 차영배 박사의 오류: 삼위를 분리된 세 하나님들로 믿는 것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이 아니고, 오직 그에게서 나오시는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 만약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처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출19:17-22 인용). 성자 하나님도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몸과 영혼이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위 월간 교회와 신앙, 124쪽).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하신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서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위 잡지, 122쪽).


위 차영배 박사 주장의 요점은 <사람 안에는 오직 성령만 계신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은 안 계시며 계실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 요14:20, 23, 요일4:15, 2:23-24, 롬8:10, 고후13:5, 골1:27, 3:4, 요일5:11-12 본문말씀을 정면 부인하는 비 성경적인 주장이다. 2) 따라서 이렇게 믿으면, 그 사람은 참된 생명을 영접한 것이 아니다(골3:4, 요11:25, 요일5:12). 3) 또한 삼위는 동일본질을 가지신다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이나, 차영배 박사는 성령의 본성은 사람 안에 내주해도 문제없고, 아버지는 사람을 태워 죽이는 본성을 가지신 것이 되어 삼위의 다른 본성을 주장함으로 이단사상이다. 4) 결국 삼위 중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보다 <열등한 위격>임을 주장하는 이단사상이다. 5) 총신대 신학대학원 권성수 신약학 교수는 <예수 믿는 사람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권성수, 로마서 강해I(롬1-8장),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8, 405쪽)>라고 말함으로 이러한 분리된 세 하나님들 이단사상을 배척한다. https://www.localchurch.kr/1500


2) 최삼경 목사의 오류: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는 것


"그러나 필자와 통합 측에서 위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보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하나님의 경륜, p. 16)으로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는 '삼일(三一)하나님'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 그렇다. 그는 비록 인격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셋'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영을 말할 때는 '한' 영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영이시요 성령님도 '한' 영이신데 어떻게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가?(교회와 신앙 96년 12월호 136쪽)."


"예를 들어보자. 한 하나님 속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무슨 뜻인가?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누가이단인가, 도서출판 생명나무, 1999년, 102쪽,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6월호, 164-165쪽)."


위 최삼경 목사의 주장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삼위는 세 영들이다 2) 지상 사역 시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신다. 즉 한 분 하나님(아들) 안에는 두 분 하나님(아버지, 성령)은 안 계신다.


그러나 최 목사처럼 삼위를 <분리된 세 영들>로 보면서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면 결국 <세 하나님들>을 믿는 삼신론 이단 사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장 통합 측 87차 총회는 다음과 같이 최삼경 목사의 주장을 세 하나님을 믿는 삼신론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이단대책위원회 연구보고서를 공식 채택하였다(https://www.localchurch.kr/9563).


<연구 보고서: 최목사는 분명 각각의 본질을 가진 '세 영들의 하나님', 곧 세 분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그의 주장은 삼신론적임을 보이고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페르소나'를 '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신론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할 때는 언제나 영은 하나님의 속성 곧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 '영'이란 단어를 한 하나님 안에서 인격의 개체를 표현하는 의미로 쓸 수 있으나 그러한 삼위하나님을 세 영들의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은 삼위일체론에서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한 인격으로 한 영이시요 아들 하나님도 한 인격으로 한 영이시며 성령 하나님도 한 인격으로 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 영들의 하나님이다"라는 주장은 삼신론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결국 세 하나님이 되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상충된다.>


이러한 내용은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적 이단 신론이 결코 다른 사람들의 신론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아타나시우스 신조와도 상충되는 최 삼경 목사의 삼신론적 기준으로 그동안 함부로 양태론으로 정죄 된 모든 사례들에 대한 전격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 마땅하다.


아래 자료들은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 사상을 비판하는 내용들이다.


https://www.localchurch.kr/1371
https://www.localchurch.kr/1381
https://www.localchurch.kr/1407
https://www.localchurch.kr/1420
https://www.localchurch.kr/9914
https://www.localchurch.kr/9563


이제 독자들의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신다>라는 속성과 <삼위의 상호내재 사실>에 대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아래에서 소개해 보겠다.


(1)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


# (존 캘빈) "성부는 성자와 함께 동시에 한 성령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 및 성자와 다른 신일 수 없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전적으로 계시기 때문에 옛 교부들은 삼위의 본질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용납지 아니했다" "..삼위가 분리됨으로 삼중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차영배, 삼위일체론, 총신대출판부, 1986년, 229쪽)


# (터툴리안) "삼위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는 될 수 없다"(H. Bavinck, G. D. II 2, p288 "Ze Zijn unus Deus, ze Zijn niet te scheiden").


# "삼위는 "우눔"(unum, 하나)이고 "우누스"(unus, 한분)가 아니며, 서로 "디스팅크티오"(distinctio, 구별)이지만, "디비수스"(divisus, 나누어짐)되거나, "세파라투스"(separatus, 분리)되지 않는다"(차영배, 위 책, 208쪽).


(2) 삼위의 상호내재 하심에 대한 교부들의 견해


아래 인용문들은 모두 김석환 박사(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인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년)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상호내재 개념)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간에 한 동일실체가 전부 다 들어 있다. 각 위격 상호간에, 또 위격과 실체간에 공동내재성(immanence) 또는 상호상통성이 있다. 두 위격이나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그 성경적인 근거는 요한복음 14:10의 말씀이었다(29쪽).>


독자들은 위 내용이 각 위격 상호간과 위격과 실체간의 공동내재성을 모두 말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서 보기 바란다.


# (아타나시우스의 상호내재 개념)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를 통해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4;10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는 일곱 번 이상씩이나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하나가 다른 것 안에 포함될 수 있으며, 또 그 다른 것이 그 하나 안에 포함될 수 있는가? 또는 도대체 어떻게 더 크신 아버지가 더 작으신 아들 안에 포함될 수 있으신가? 또는 우리에 관하여 기록된바,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또 우리의 존재를 갖느니라(행17:28)는 말씀을 생각할 때, 만일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112-113쪽). 아타나시우스는 또 위와 관련하여 '성 삼위일체의 제 2격은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님(Whole or entire God)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고(114쪽), 성자의 존재가 성부에게서 오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부 안에 계심을 안다'고도 말합니다(115쪽)>.


# (불(Bull) 주교의 상호내재개념) <셋이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시고,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시며 서로를 관통하신다(Defensio Fidei Nicaenae II, 9. 23)(250쪽)>.


# (아우구스티누스의 상호내재개념)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만 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시다(299쪽).>


김석환 박사는 이것을 '단일성과 삼위성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각 위격이 상호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심을 진술한다'고 해설하고 있다(325쪽).


# (다메섹 요한의 상호내재 개념) <각 위격은 다른 위격 안에서...존재를 가지신다(300쪽)>.


# (바실의 상호내재 개념) <...아들 전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며, 또 아버지 전체를 그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because the whole Son is in the Father and has all the Father in Himself)(요14:11)....또 아버지의 위격은 아들의 형태 안에서 알려진다>(149-150).


3) 원세호님의 오류: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는 것


이 부분은 그 동안 여러 차례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며 비판해 왔다. 우선 원세호님은 성경(요14:10-11)과 정통 교부들이 믿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인한다. 대신에 삼위를 부부나 가족 구성원 간의 하나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삼위는 남편과 아내처럼 <분리>된 인격(원세호님은 '실존체'라는 표현을 사용함)이나 부부라는 의미에서 하나(에하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삼위 하나님을 세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은 삼신론적 주장이다. 즉 정통 신학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세 사람이지만 인간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는 의미 '투리우시오스'를 사용하면 삼신론에 기운다고 경고한다(김석환, 위책, 146쪽 각주 78). '삼위가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처럼 각기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https://www.localchurch.kr/1407를 참고하기 바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예장 통합측 87차 총회는 원세호님의 삼위일체 사상은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공개 천명한 바 있다(http://www.eedan.net/edan1-5.php).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그 동안 한국 교계 내에서 삼위일체 진리에 대해 전문가를 자처해 온 사람들에게 심각한 삼신론적 요소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그 동안 신론에 대해 자신들의 잘못된 기준으로 판단했던 모든 결정들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든지 성경과 정통 신학자들의 관점에 기초하여 공정하게 다루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진리 검증 시 특정 개인의 명성이나 소속 교단 배경 때문에 판단이 굽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 일수 없는 증거들을 그의 책자에서 일부 인용하여 소개하겠다. 그리고 원세호님의 양태론 비판에 대해서는 각 항목 별로 간략하게 반박하겠다. 왜냐하면 그가 주장하는 모든 것의 뒤에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는 그의 삼신론 이단사상이 판단기준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점은 위에서 충분히 반박했다.


아래 내용은 위트니스 리의 <신약의 결론-하나님>, <성령>(한국복음서원)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위트니스 리: 삼위 양식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는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신격 안의 세 분이 연속적인 세 단계 안에서 각기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믿는다. 즉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본질적으로 모두 동시에 같은 상태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그러나 신성한 경륜에 있어서 그 세 분은 연속적인 세 단계 안에서 제각기 역사하시며 존재하신다. 그러나 그분들의 경륜적인 역사와 나타나심에 있어서조차도 여전히 그 셋은 본질에 있어서 동시 존재하며 상호내재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아들 안에서 그 영에 의해 택하셨다(엡 1:4, 벧전 1:2下). 아들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그 영으로써 구속을 이루셨다(요 8:29, 히 9:14). 그 영께서는 우리 안에서 아들로서(요 14:26, 고후 3:17) 아버지와 함께(요 15:26) 역사하신다. 그분들의 역사와 나타나심은 경륜적인 것이지만, 그분들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는 영원한 것이다. 셋 모두 본질적으로 영원하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버지께서 영원하시다고 말하고, 히브리서 1장 12절과 7장 3절은 아들이 영원하다고 말하며,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한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그분들의 존재하심과 존재에 있어서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8p-


<위트니스 리: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아버지, 그 영, 그리스도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삼위 양식론자라는 비난은 거짓된 것이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다. 삼위 양식설은 하나님이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며, 아들의 계시는 승천과 함께 끝났다고 가르친다. 아버지, 아들, 영의 영원성은 삼위 양식설에 의해 부인되었다. 삼위 양식설은 이단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5-306p-


<위트니스 리 주장: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형식화된 사도신경은 사벨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위 양식론과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신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단지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남일 뿐이라는 것이다... 삼위 양식론에는 성경적인 어떤 근거가 있으나, 이단적인 극단으로까지 너무 멀리 나아갔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하나의 면을 보았으나, 셋의 면에는 실수를 범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가 끝난 뒤에는 오직 성령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격의 셋 가운데 있는 동존재와 상호 내재의 영원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이것을 부인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29-30p-


<위트니스 리 주장: 계시록 1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아버지와 성령과 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뿐 아니라 심지어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도, 오순절 후에도 함께 계신다. 다른 많은 구절들이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영원토록,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시에 존재하신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73p-


이제 원세호님의 비판을 구체적으로 그러나 간략하게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요14:16-18을 근거로 예수님은 보혜사이시고 '또 다른' 보혜사도 그 예수님의 실제이며 영이신 예수님 자신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유인 즉은 18절로 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방파의 주장은 예수 영=성령님으로 이것이 성경을 부인..변질시킨 주장이다.> <⑦ '성령 그가 오는 것은 내가 오는 것이고 내가 오는 것은 그가 오는 것이다. '그'와 '나' '나'와 '그'는 하나' 라고 위트니스 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인용하는 성경 요14:16-19절에 한 곳에라도 그런 증거가 있는가?...그러나 지방파는 예수 보혜사 = 성령 보혜사 = 하나이다.> <23) '요14:16-17절의 '그가' 14:18절에 '내가'로 바뀌었으므로 '그가'는 아버지이시고 '내가'는 예수시니 예수가 아버지이시고 또 다른 보혜사가 예수'라는 주장이다.>


** 반박: 이 주제에 대해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반박했다. 이 땅에 오신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은 제외된 제 3 위격(1/3하나님)만으로 볼 것(원세호님)인지, 아니면 또 다른 보혜사 성령 안에 아버지와 아들 역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신다고 볼 것 인지의 문제이다. 또한 고전 15:45의 생명 주는 영 말고 또 다른 보혜사가 있다면 원세호님은 (1) 그 보혜사 영은 생명 주는 영과 어떻게 다르며, (2) 성도들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외에 그 또 다른 보혜사를 언제 어떻게 영접하는지를 성경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두 다른 영들을 두 번에 걸쳐 영접해야 한다는 원세호님식 주장은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원세호님 식으로 생각해 가다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잘못된 믿음이다.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이 세상에서는 주님과 성령님은 하나이시다. 성령님이 그 분(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워치만 니의 주장이다. 성령님은.. 예수님...개체 인격이 있으며 독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안에 계심'이나 '안에 있다'는 것은 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지방파는 성령님이 예수님 안에 들어 있어 하나라고 주장하니 이것은 결국 예수 = 성령 하나이란 거짓된 주장이다.> <③ '성령님은 제2의 주 예수님 자신...'라고 주장한다. 사도행전2:31-33절...예수 그리스도와 성부와 성령에 대해 각각 독립되다 고 증거...(그 영)=성자(성령 강림 시 강림한 영)라는 지방파의 주장은 거짓이다.>


** 반박: 위 주장 역시 삼위의 상호내재를 오해한 비판이다. 이것은 원세호님이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주장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은 갑, 을, 병처럼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은 되시지만 한 위격이 움직이실 때 다른 두 위격도 구별됨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함께 움직이시는 그런 분이시다. 삼위가 상호내재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삼신론 이단이 된다. 상호내재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원세호님 신론의 근본적인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3) <원세호님의 비판: ④ 성령의 인치심은 분배하심이며 적셔짐이며 분배이다라고 주장하며 이 영은 마지막 아담이다라고 고전15:45절을 제시한다...'인 치심'이 '분배'라니 사전을 다시 써야하지 않겠는가? 또한 성령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주장하는데 고전15:45절 어느 곳에 마지막 아담 예수님께서 성령이라고 했는가, 그 성구에 없지 않는가? 성경에 없는 거짓 말이 되는 지방파의 주장은 마지막 아담=성령=그 영이다. 이것이 양태론이 아니란 말인가?>


** 반박: 원문을 소개하고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④ "성령의 인 치심은 신성한 분배이심임: 사실상 성령의 인 치심은 신성한 분배하심이다. 성령의 인 치심은 적셔짐이며 적셔짐은 분배하심이다. 적셔짐이 있는 곳에는 분배하심이 있다. 이 영은 생명 주는 영 되신 마지막 아담이다(고전15:45). 오늘 이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은 구속을 성취하셨고 우리의 죄들을 씻으셨다. 이제 그 분은 우리 속에 살아 계시고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인치고 계신다"(31. (하나님의 경륜과 분배하심)p. 38).>


원세호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하)고 한 말씀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어야 하는지를 잘 연구해 보기 바란다. 주님이 우리 안에 생명이신 주님 자신을 날마다 분배하시고 우리는 그 생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이뤄지지 않겠는가? 엡1:23은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한다.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이 생명으로 지속적으로 분배되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영과 혼과 몸에 생명이 충만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른 것이다(엡4:13). 골2:19는 '온 몸이...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란다'고 한다. 마디와 힘줄에 해당되는 장성한 지체들의 <공급>은 다른 말로 <분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자라게 하는 것도 그분 자신의 우리 안에서의 증가를 통해 이뤄진다. 흠정역은 이 부분을 'increaseth with the increase of God'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증가란 말은 언뜻 들으면 이상하다. 그러나 그런 표현이 성경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안에 증가될 수 있는가? 역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심을 통해서 가능하다.


원세호님은 고전 15:45의 <생명주는 영>과 또 다른 영인 <성령>이 성도 안에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성도들 안에 얼마나 많은 영들이 계신가? 그리고 그 영들은 언제 몇 회에 걸쳐 영접해야 하는가? 이것 역시 삼위를 분리된 세 하나님들로 보는 삼신론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⑤ '사실상 그리스도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 아버지는 그 영(성령)과 함께 계신다. 그 셋은 구별이 있으나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분을 가질 때 셋을 갖는다' 라고 지방파는 주장한다....성경 증거를 변질시키는 자들이며 마3:16-17절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파는 아버지, 아들, 그 영=하나=셋인 도형이다...무슨 거짓 말로 변명을 하겠는지 자못 궁금하다.>


** 반박: 이것 역시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는 삼신론 이단 사상의 영향을 받은 주장이다. 누가 성경증거를 변질시키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마3:16-17은 경륜적인 관점에서 아버지는 하늘에,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만일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아들 안에는 아버지와 성령은 안 계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삼신론이다. 본질적으로 삼위는 항상 구별된 상태로 상호 내재하신다. 원세호님은 피조물에 불과한 하늘과 땅 같은 공간의 차이가 창조주 하나님인 삼위를 분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영이심을 잊지 말라(요4:24). 심지어 예수님이 입으신 인성조차도 삼위를 분리시킬 수 없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토록 상호내재 하신다.


5) <원세호님 주장: ⑥ 성경에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가서 죽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주 잘못 되었다.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가셨다는 말이 아닌가? 성경 어디에 그렇게 가셨는가?(마27:2; 막15:1; 눅23:1; 요19:13) 끌려가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고전15:45절을 인용하여 생명 주는 영이라 주장하나 그것은 다른 소리이다.>


** 반박: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가시지 않았다면 누가 그분을 끌고 갈 수 있겠는가? 그분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마26:53). 그러나 주님은 (1)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고(54절), (2) 구속의 임무를 감당하시며(마1:21, 요1:29), (3) 한 알의 밀알로서 (생명을 해방하여) 많은 밀알을 얻으시려고(요12:24) 십자가로 스스로 가셨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여러 차례 밝히셨다(마16:21, 17:22-23, 20:18-19, 26:2). 고전15:45 의 '조오포이에오'(2227)를 개역 성경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생명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라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다. Baker 출판사의 Thayer 의 신약성경사전도 이 단어를 'to cause to live, make alive, give life'로 말하고 있다(274쪽). 원세호님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6) <원세호님의 비판: ⑧ 아들과 그 영이 한 분이시다 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아들=그 영 (성령)이라 함인데 성경 수 곳의 '각각 독립된' 기록을 부인하는 주장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단 한 줄을 인용한 후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원문을 조금 더 넓게 인용해 보겠다.


"(요14장) 17절은 <그영이...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하고 20절은 <내가 너희 속에 (있겠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여러분의 체험에 의하면 여러분 안에는 몇 분이 계신가? 두 분인가? 아니면 한 분인가? 확실하게 한 분이다! 17절은 그영이 우리 속에 있다고 말하고 20절은 아들이 우리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오직 한 분이 계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들과 그 영이 한 분이심을 뜻한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 주의 회복, 한국복음서원, 1990년, 37쪽).


위 내용은 참으로 아멘이 된다. 우리 안에 그영과 주님은 각각 분리되어 여기 저기 계시지 않는다. 대신에 구별되게 상호내재 하심으로 한 분으로 계신다. 원세호님은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음으로 이것이 이상할 뿐이다.


7) <원세호님의 비판: ⑨ '성령은 실제 영이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실제이다. 성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났으며 그리스도는 나타난 하나님이시고 영도 실제가 되신 그리스도'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양태론적 주장인 변명할 여지가 없이 성경을 변질...>. <⑮ 근본이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고 아버지의 아들은 그 영으로서 실제화 되었다 라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근본이신 아버지 = 아들로서 체현 = 그 영으로 실체화되었다는 양태론적 주장이다.> <(1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며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체화이다'. 라고 주장, 성경을 인용하였는데...>.


** 반박: 역시 하나님의 경륜 방면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우선 원문을 인용해 보자.


<위트니스 리 주장: ⑨ "성령이란 무엇인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요15:26).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의 헬라어 의미는 '실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실제의 영,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령의 놀라운 인격 안에서 실제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떨어진 분이 아니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떨어진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나타난 하나님이요, 그 영은 실제가 되신 그리스도이다"(7(하나님의 경륜) p. 16, p. 17).>


<예수님이 아버지의 체현>이라는 말은 요1:18, 14:9, 11에 근거한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실제>라는 말은 요15:26, 고전15:45, 계5:6을 보기 바란다. 특히 원세호님은 자신의 신론으로는 <...보좌 앞에 어린양이 섰는데...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는 계5:6 말씀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삼신론적 사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경본문이 많다. 오직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신다는 균형 잡힌 삼위일체론으로 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누가 성경을 변질시키는가? 원세호님 자신이 아닌가?


8) <원세호님의 비판: ⑩ 지방파의 주장은 고후 3:17과 고전 15:45절을 인용하여 마지막 아담이 생명 주는 영이 되었고 생명 주는 영은 성령이다라는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이 그 영 곧 성령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변명을 하여도... 그리스도가 성령 그 영이라는 증거가 없다.> <⑪ '성령 들어오실 때(사람 속으로) 하나님이 공급되는 것이고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으므로 삼일 하나님이 오신 것이' 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공급된다니 이것이 무엇인가?...세 인격은 실존적 개념인데 한 영 안에 있다니 아버지 = 아들 = 그 영이 하나임이 된다. 이들의 주장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 반박: 위 주장 역시 아들과 성령을 분리된 두 다른 하나님들로 보는 다신론 이단 사상의 산물이다. 세 인격은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 한 신격(Godhead, 골2:9) 안에 계신 세 인격이시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세 사람 같은 세 하나님들로 착각하면 안 된다. 원세호님은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그리고 지금같이 말꼬리 잡는 식이 아니라 그 문맥의 참된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기 바란다.


9) <원세호님의 비판: ⑫ 지방파의 주장은 '예수는 살아 있는 성령이신 그리스도이다' 라는 것이다.>


** 반박: 위 주장 역시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비판이다. 균형 잡힌 삼위일체관은 고후 3:17의 '주는 영이시니'를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이시라고 읽는다. 그러나 이것은 위격의 혼동을 의미하지 않고, 기능과 활동에서만 그러하다고 이해한다. 이점은 박형룡 박사의 신학지남 논문('주는 영이시다')(1978년 봄호(통권 180권), 28-39쪽) 내용으로도 지지된다.


10) <원세호님의 비판: ⑬ 지방파는 로마서 8:6;13절을 성령과 관계된 것으로 설명하는 해석은 잘못이다. 그 이유는 이 성경에 나타난 '영'은 모두 성도의 거듭난 영을 말하고 성령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이런 방식으로 거짓되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


** 반박: 원세호님은 <로마서 8:6,13절에 나타난 '영'은 오직 성도의 거듭난 영을 말하고 성령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근거가 있는가? 성령이 성도의 거듭난 영 안에서 연합되셨다 고 하면 말이 된다(고전6:17). 그러나 성령을 제외시킨 성도의 영이란 주장은 비 성경적이다. 이미 거듭날 때 성도들의 영은 성령과 유기적인 연합을 가진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포도나무와 가지 같은 신비적인 연합이라고도 한다(요15:4-5). 원세호님 본인에게 사람의 영에 대한 신학 지식은 있으되 연합된 영에 대한 체험과 이해는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


11) <원세호님의 비판: ⑭ 위트니스 리는 '첫 번째 영은 생명 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자신이고 이 영은 최종 완성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첫 번째 영 = 성부 영 = 과정 거친 그리스도 영 = 삼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억지풀이 자의적 해석으로 성경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10(삼일 하나님) P. 5, 4-7, 위트니스 리).> <(17) 그 영 성령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 완결된 영이라고 주장하며...>


** 반박: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자.


<위트니스 리 주장: ⑮ "첫 번째 영은 생명 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 영은 최종 완성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삼일 하나님은 세 부분으로 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그 영이 되셨다">(10. p. 5).


고전15:45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한다. 이것은 구별되시나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가 아들 안에서 성육신 하시고, 인생을 사시고,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생명 주는 영 안에는 부활 후 영화롭게 된 예수님의 인성이 포함되나 이것은 부활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요7:39는 이것을 말한다. 다시 설명해 보자. 성육신 이전에는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사람이 되신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부활 이전에는 존재론적으로 영이신 하나님 안에 인성이 포함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부활 후에 그러한 영 즉 예수의 영화롭게 된 인성을 포함한 '생명주는 영'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최종 완성되신 삼일 하나님>이란 말의 참된 의미이다. 이 계시를 개혁 신학자 중에는 앤드류 머레이가 보았다는 것은 이미 밝혔다(그의 책인 '그리스도의 영'(기독교문서선교회)을 참고하기 바란다). 원세호님은 무조건 성경을 부인한다고 경솔하게 말하고 있다.


12) <원세호님의 비판: (18)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롬8:2).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다 (갈4:6).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며(마10:20), 아들 하나님의 영이 기도하다'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생명 영 성령 = 하나님의 아들의 영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인가? 아니다, 거짓된 주장이다>.


** 반박: 우선 원문을 인용 소개하고 반박해 보자.


<위트니스 리 주장: 18) "성령은 신선한 생명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는 생명의 영이다(롬8:2).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영이다(갈4:6). 그 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일 뿐 만 아니라(마10:20), 아들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그 분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신다. 그러한 영으로 인하여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성령은 우리의 영과 하나로 언급되어 우리를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영이시다">(고전6:17).(10(삼일 하나님). pp. 90-91).


우리 안에 들어오신 생명 주는 영은 삼위 하나님과 예수의 영화롭게 된 인성을 포함한 일종의 복합적인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을 성령, 생명의 영, 아들의 영,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많은 영들이 우리 안에 각각 떨어져 계신다는 말인데 그것은 더 이상한 주장이 되고 만다. 원세호님은 이렇게 믿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원세호님은 이러한 영들을 몇 번에 걸쳐 영접했는가? 말이 안 된다. 성도들의 체험과도 다르다.


13) <원세호님의 비판: (19) '예수는 그 이름이고 영은 인격이다. 그리하여 예수 이름을 부르면 그 영 성령이 온다'는 주장이다.> <(20) '예수님은 그 영 성령이다' 라는 주장이다(3. (성경의 핵심)p.138).> <(21)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한 그리스도로 제자들에게 생명 주는 영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라고 위트니스 리가 주장한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부활체) = 생명 주는 영 성령으로 돌아 왔다는 것이다. 이는 양태론적 주장이다.> <22) 지방파는 '요20:22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 곧 그 분 자신을 호흡하여 넣었다고' 주장한다. ...지방파의 주장은 부활하신 예수 = 성령이라니 거짓 주장이다.>


** 반박: 역시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19) "오, 주 예수여, 라고 부를 때 그 영이 온다. 마치 어느 형제 이름을 부를 때 그 형제가 오는 것과 같다. 예수는 그 이름이고 그 영은 그 인격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영이 온다">(6.(그영과 몸) p. 27). <(20)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오시는 분은 바로 그 영이시다. 우리는 성령을 부르지 않고 예수를 부른다. 우리가 예수를 부를 때 왜 그 영이 오시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그 영이시기 때문이다">(3. p. 138). <(2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으로 바로 그 뉴마로서 제자들에게 돌아오셨다는 이 중대한 문제를 보지 못한다....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생명 주는 영으로 돌아오신 이 중대한 문제를 보지 못한다">(3.(성경의 핵심) p. 181).


고전 15:45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나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지막 아담>은 <주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생명 주는 영>은 누구이신가? 바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시다. 두 분의 차이는 신성에는 없다. 인성에서 차이가 있다. 즉 전자가 성육신 때 입으셨던 '육의 몸'이 부활 후에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신 것뿐이다. 바로 직전 구절인 고전15:44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빌 3:21 식으로 '영광의 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생명주는 영>이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하는 그 분이시다. 주 예수님은 부활 후 하늘 보좌 우편에도 계시고, 거듭난 우리 영 안에도 계시는 비밀한 분이 되셨다(롬8:10, 34, 엡5:32). 그분은 생명으로 우리 안에 직접 들어오신 것이다(골3:4, 요일5: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하나님이 저 하늘에만 계시고, 우리 안에는 안 계신다고 말하면 안 된다. 주 예수님은 이 다음에 하늘 나라 갔을 때나 만나 뵐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완전한 설명이 못된다. 이런 말은 자신 안에는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안 계신다는 고백일 수 있다. 바울은 날마다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산다고 했다. 이것이 모든 성도들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갈2:20).


그러나 바울도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을 때는 참된 믿음을 갖지 못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신학지식은 있었겠지만 신학지식이 곧 생명은 아니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한 그 많은 봉사는 사실상 교회를 핍박한 것이었다(빌3:6). 바울은 나중에 빛 가운데서 이것을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1:13). 오늘날에도 이러한 헛된 봉사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원세호님은 주 예수 님의 <실존체>가 생명으로 사람 안에 영접될 수 있는 분임을 믿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제 생명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이다. 만일 원세호님이 이런 실제적인 믿음과 체험을 통해 참되게 주님을 알게 된다면 아래의 본인의 말이 얼마나 경솔하고 부끄러운 단언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원세호님 주장) 이상의 연구는 지방파의 주장의 일부분이며 속속들이 거짓을 체계화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 말의 배후에는 요한복음 8:44절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필자가 한국에 있는 수다한 사이비들을 연구 40여 년을 하였지만 이토록 주도 면밀하게 거짓을 합리화한 경우는 접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태를 방치한다면 한국 및 세계 기독교가 어떻게 될 것인가? 안타까운 심경이다.>


생명 주는 영이신 주 하나님이 원세호님을 불쌍히 여기시고 또한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주님은 <유대 종교인들>이 <참된 주의 제자들>을 핍박할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다. 이러한 예언은 오늘날에도 성취되고 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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