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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글 7 - 적나라하게 폭로된 이인규식 삼신론의 실상

 

이 글은 원래 계획하던 글에 앞서 삽입된 글입니다. 이인규님은 토론 관찰방에서 자신의 이단적인 삼신론적인 삼위일체를 더 선명하게 밝혀주는 글을 쓰셨습니다. 이인규님은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신 것입니다. 본인은 성경적인 상호내재 개념으로 착각하고 쓰신 글이지만 그 내용은 구구 절절이 '이인규식 상호내재'는 이단적인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재차 확증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래에서 그 전문을 인용 소개하겠습니다.


사실 이 토론은 복잡하게 할 것도 없습니다. 이인규님이 입만 열면 강조하는 '독립된 세인격의 하나님'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인규식 독립된 세 인격' 또는 '이인규식 상호내재'는 성경과 정통 신학자들이 말하는 '구별된 독립'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세 하나님들식 독립된 삼위'이며 또한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 사이처럼 '세 사람들식의 독립된 삼위'를 말하는 것임이 자명해 졌습니다. 이것은 '세인격의 구별'이 아니라 '세 인격의 분리'입니다. 무서운 삼신론 이단사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 듯이 이분은 '한 본질에 세 위격(인격)'이 있으십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 위격은 어떤 관계로 계신 삼위입니까? 당연히 한 분됨을 상실치 않는 방식으로 계신 삼위여야 합니다. 이것이 정통교회 삼위일체입니다. 그분들이 참으로 성경을 아는 분들이라면 이인규님이 자주 인용하신 '루이스 벌콥, 하지, 웨인 그루뎀, ...등등은 여기까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인규님은 삼위가 어떻게 해서 한 분이심을 유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이 분들의 입장을 한 번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상태만으로는 이분들을 삼신론자라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적인 말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다릅니다. 그분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인규님은 크게 잘못 이해하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말이 너무 많았고 지나쳤습니다. 즉 위 정통신학의 선에서 더 깊이 들어가서 빗나간 자신의 삼신론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계심으로 자신의 삼신론 사상을 폭로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말이 많으면 약점도 많고 실수도 많은 법입니다. 차라리 침묵하면 안전지대에 머물 것을 아는 체를 하며 버젓이 삼신론 이단사상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도 자신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계신 것이 이인규님입니다. 국내외 어떤 분이든 좋습니다. 신학을 제대로 한 분 중에서 위 삼위의 관계가 '세 하나님들'식이라든지 '세 사람들'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맞다 는 분이 있으면 그분의 주장을 이곳에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세 하나님들이 계신다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세 사람 식의 삼위가 계신다고 믿는 것도 이단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갑파도키아 교부들도 이 점에 있어서 약점을 지적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삼위일체는 한 분이 아니고 세 분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이 틀린 것이 없다는 이인규님의주장은 삼신론입니다.


다음은 월간 목회와 신학에 소개된 장신대 조직신학 김OO 교수의 삼위일체 논문 중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http://cafe.daum.net/Boryunglitercil/Cndk/34?docid=bkdCndk3420110510204358


김OO 교수 주장:


『성경은 세 분 하나님을 가르친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세 분 되심을 뚜렷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책장을 열게 되면 세 분 되신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세 분 하나님을 나란히 언급한다: ...신약에는 구약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던 세 분 하나님의 모습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했다.'


김OO 교수는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고 말함으로 "삼위일체의 삼위는 세분 하나님'이심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인규님은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함으로 자신도 그렇게 동의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인규님 주장: 『김OO님은 논리적인 주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님이 물었던 것, 김OO 교수에 대해서는 김OO 교수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난 김교수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설명하였듯이 큰 문제도 없습니다. )


'이인규 님은 자신이 어디선가 "이미 설명하였듯이" 위 삼위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큰 문제도 없다고 말함으로 삼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인 '인격 안에 인격은 없다' '독립된 세 인격이시다'라는 말의 의미가 '세 하나님들'의 의미였음을 실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영원히 한 분이심을 일관되게 말하고 있지 '세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이것을 세 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삼신론입니다. 무어라고 또 달리 말을 바꾸어 변명하실지 모르지만 이것만으로도 이인규님이 삼신론자임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믿는 사람 치고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 하나님의 삼위가 한 하나님, 두 하나님, 세 하나님 식의 세분 하나님(들)식의 삼위입니까? 이인규님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장신대 김OO 교수 주장에 "틀린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 자기도 그렇게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 위격은 '세 사람 같은 방식의 삼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 빌립보 교회 성도1, 빌립보 교회 성도2 식의 각각 분리된 세 사람―이것을 분리가 아니라고 우기지는 마십시오―간에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으로 연결된 상태 같은 식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빗나가도 한 참 빗나갔습니다. 여기서는 초대 교회 교부들이 보여주던 '한분되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셋을 이단적으로 강조하고 하나의 방면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입니다.


2. 삼위가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인들과 같은 믿음 안에 거하는 것처럼만 상호내재 한다는 이인규님의 주장은 삼신론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처럼 각각 분리되어 떨어져 계시면서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으로 연결"되는 식으로만 하나라는 말은 참람한 삼신론 이단사상입니다. 이런 주장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는 말씀에 대해 아버지는 저 하늘에 계시고 신성은 없는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만 '뜻과 목적에서 하나'라는 의미라고 말하는 여호와의 증인들 같은 논리입니다. 신학을 하신 독자분들은 아래 인용하는 이인규님의 상호내재 개념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이단적인지를 양심 가운데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내용은 이인규님이 관찰방에 '상호내재의 성경적인 참 의미'라는 제목으로 올리신 글 전문입니다.


『제목 : 상호내재의 성경적인 참의미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나는 상호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단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지방교회 식의 상호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이 오직 아버지 안에만 계신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가 오직 예수님 안에만 계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또 아버지가 예수라는 동일실체를 말하는 개념도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온 세상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구절은 이위일체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만일 그러한 해석을 하여야만 한다면, 예수님과 하나님과 제자들은 동시존재와 상호 내재하여야만 하며 장소적인 분리가 되어지지 못하여야만 합니다..... 즉 국한된 장소와 인격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령이 아니라, 제자들과 삼위일체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윗문장을 삼위일체로 해석하면 성령은 온데간데없고 사람이 참여하는 이단적인 주장이 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 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10) 이 성경은 예수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예수가 제자들을 사랑하였으므로 제자들이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전혀 국한된 장소적이며 인격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는 내 안에서 본 바 니라...(빌1:30) 바울은 감옥에서 이 서신을 썼는데, 빌립보교인들이 바울의 안에서 본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인격적이고 장소적인 거함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한 믿음안에서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에 거하고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이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처음부터 가르침을 주신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아버지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상호내재란 무엇인가? (인격 안에 인격은 없이-필자주)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으로 연결된 유기체적인 영적인 연합을 가르킨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부분이 이인규식 상호내재의 핵심입니다-필자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예수가 Master(주)가 되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예수라는 뿌리에 연결된 가지가 되므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집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이 되었으니....."(갈3:2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


삼위의 상호내재를 설명하면서 위와 같은 성경구절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 사람은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인규님은 삼위간의 독특한 존재양식인 상호내재와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간의 관계를 혼동하여 크게 착각을 하고 있음을 독자들은 보았을 것입니다. 독립된 삼위의 관계가 아내와 남편처럼 분리되나 한 부부(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상호내재가 아님)라는 의미에서의 하나라고 이단적으로 설명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사도 바울간의 관계를 삼위일체의 상호내재의 예로 제시하는 위 이인규님의 주장도 말만 장황했지 원리는 정확히 똑같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경에서 빗나간 이단사상일 뿐입니다. 이러한 누룩이 너무나 깊이 혼합되어 있어서 여러 번 자극적인 말로 지적을 해 드려도 이인규님은 아직도 자신이 어디 계신지를 모르고 계신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3. 이인규님의 그 동안의 이단적인 상호내재 관련 말들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없다'는 주장은 한 사람 두 사람식의 인격개념에 익숙한 분들에겐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 같은 그런 식의 분리된 분이 아닙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우리가 영접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할 단계에 이르면 이 이단적인 주장이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빗나간 것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즉 최목사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세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을 한 것이고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 삼위는 각각 그 세 인격에 대한 구별성으로 볼 때에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습니다. 인격 안에 인격이 있다면, 구별되지 않으며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안 갑니까? 즉 상호관계란 "세 위격들간의 구별적인 관계"입니다. 인격 안에 있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 (상호내재가 인격 안의 인격이 아니라는 증거, 한가지만)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는 내 안에서 본 바니라... 윗 문장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안이라는 인격적인 장소에서 보았다는 뜻인가? 빌립보 교인들은 모두 귀신들인가?


자 이제 위와 같은 삼신론적인 사상에 반대되는 정통 신학자들의 상호내재 개념입니다.


4. 정통 신학자들의 상호내재 개념


위 '삼위가 인격 안에 인격이 없고 오직 같은 사랑, 같은 믿음, 같은 목적을 갖는 식의 하나(한 분)이라는 '이인규식 이단적인 상호내재 사상'과 아래 정통 신학자들의 '상호내재 개념'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성공회 주교,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요14:10)라고 선언하신 바와 같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1권, p169, 성문).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협성대학교 김영선 교수).


-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케누스(Damascen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장신대 김명용 교수).


- 그런데 캅바도키아 교부들 가운데서도 이 페리코리우시스라는 개념을 통하여 '신격 내에서 위격들 사이의 관계가 세 인간들의 공통의 인간성(common humanity)과의 관계와 유사하다'라는 개념을 배격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이 문제를 분명히 한 사람은 닛사의 그레고리였다(250쪽). '한 신격이 항상 세 존재양식들(three modes of being) 안에서 또는 행위 영역들 안에서 또는 상호 관계들(mutual relations) 안에서 한 실체적 실제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로부터 떨어져서 생각되실 수 없고, 아들께서도 성령으로부터 떨어져서 파악되실 수 없다. 아들께서는 항상 아버지 안에 계시고, 성령께서도 항상 아들과 함께 계신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252쪽).


-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일성과 삼위성을 논하면서 위격들의 '상호내주'의 관점에서의 삼위일체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셋은 상호간에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서는 무한하시다.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시다'(김석환, 위 책 299쪽).


- 8세기 중엽에 활동한 다마스커스 요한도 '각 위격은 각각 다른 위격 안에서 어떤 연합(coalescence) 없이 존재(being)를 가지신다(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843-844).


- 칼 바르트도 '신적 존재양태들(the divine modes of being)이 상호간에 서로 서로를 아주 완전하게 조건지으며 스며들어서 하나가 항상 다른 둘 안에 계신다(Karl Barth, CD 1/1, p 370)(김석환, 위 책 300쪽).


-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과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함께 만난다. 각 품격은 서로 혼합되거나 혼돈 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1972년).


위에서 본 신학자들과 신조는 한결같이 "위격(인격) 간"의 "구별됨을 잃지 않는 방식의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지 '이인규식 상호내재' 개념처럼 인격 하나는 저기 떨어져 있고 또 한 인격은 여기 떨어져(분리되어) 있으면서 어디든지 계신다는 편재성으로만 한 분 하나님을 이루신다고 말한 것이 없습니다. 위에 인용한 것을 지방교회에 유리한 몇몇 교부들의 사상을 인용해 놓고 정통교회 삼위일체라고 우긴다는 식의 말을 하는 이인규님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장한 것을 인용해야 정통교회를 대변하는 주장이란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이인규님에게 있어서는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는 신학자들은 모두가 정통이 아닌가 봅니다. 위의 신학자들은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람인데도 그렇습니다.


이인규님께 부탁드립니다.


이인규님 식으로 '인격 안에 인격이 없는 방식의 이단적인 상호내재' '삼위가 각각 떨어져 있고 (인격 안에 인격이 없고) 같은 사랑, 같은 믿음, 같은 목적과 같은 방식으로만 상호내재 한다고 말하는 신학자가 있으면 그 이론을 한 번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학도 안 하신 평신도인 이인규님 주장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위 제가 인용한 학자들의 상호내재 개념이 틀렸고 이인규님식의 상호내재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있으면 그분들이 말을 한 번 제시해 보시지요.


5. 이인규식 상호내재의 이단성을 확정지을 결정적인 질문들


저는 이 글 말미에서 이인규님에게 여섯가지 핵심적인 질문들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님은 하도 엉뚱하게 핵심을 비켜 가시는 일을 많이 하시는 분임으로 다음과 같은 전제 사항들을 먼저 열거 하겠습니다. 아래 단계 중에서 님의 사상과 다르거나 이의가 있으시면 어디에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정확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이의가 없으시면 동의하는 줄 알겠습니다. 이인규식 상호내재인 '삼위의 상호관계 안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 삼위는 편재성으로 상호내재 하신다. 같은 사랑, 같은 믿음, 같은 목적으로만 연결되신다'는 님의 말을 성경적인 사실들에 대비해서 재구성하자면,...


1) 하늘에서 각각의 인격들로 나란히 계시던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 성령 인격을 다 포함하는 전체 신격 중 "아들 인격만"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육신을 입으셨다. 신격 중 나머지인 아버지 인격, 성령 인격은 여전히 하늘에 남아 계시고 다만 편재성으로만 지상의 아들 안에 계신다. 따라서 지상 사역시의 아들 인격 안에는 아버지 인격과 성령 인격은 안 계셨다. 맞습니까?


2) 아들 인격이 침례시 물 위에서 올라올 때 또 다른 인격인 아버지 인격은 하늘 보좌에 계셨고 나머지 인격인 성령은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 이 때 삼위 서로 안에는 참된 인격들은 제외된 편재성만 상호내재 하신다. 여기서 성령 인격은 아들 인격에게 내려 온 다음 아들 인격과 같이 있었던지 아니면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여기서 보조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들 인격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왔던 성령인격은 그 후 어찌되었습니까? 하늘로 돌아갔다면 언제 돌아갔습니까?)


3)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던 '아들 인격'은 아버지 인격과 성령 인격은 제외된 전체 신격 중 아들 인격만이며 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인격은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편재성 개념으로만 지상사역시의 아들 인격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지상사역시의 아들 인격 안에 "구별된 방식"으로 아버지 인격도 상호내재 하셨다고 말하면 양태론이다.


4)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아버지 인격, 성령 인격은 제외된 아들 인격 만이며 아버지는 편재성이라는 신성한 본성으로만 아들 인격 안에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면 안된다,


5) 육신을 입은 아들 인격이 부활 후 하늘로 다시 돌아가서 하늘에 남아 계시던 아버지 인격 옆 보좌에 나란히 앉아 계시고 이번엔 전체 신격 중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제외된 성령 인격만 또 다른 보혜사로 이 땅에 오셨다.


자 이제 위와 같은 전제 하에 질문을 드리겠습니까?


1) 이인규님이 영접한 분은 아들 인격, 아버지 인격은 제외된 성령 인격입니까?


2) 이인규님이 영접한 분은 성령 인격 + (아버지 인격과 아들 인격은 제외된) 편재성으로만 함께 하는 아버지신성, 아들의 신성입니까? 


3) 이인규님이 영접한 분은 아들의 신성과 성육신 때 입으신 육신을 가진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하나님 사람)과 같은 분입니까? 다른 분입니까? 만일 같은 분이라면 어떻게 이분을 영접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다른 분이라면 이인규님은 다른 예수를 영접케 하는 이단사상을 가진 사람임을 자백하시겠습니까?


4) 성경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라고 했는데 이인규님은 생명이 있으십니까? 만일 생명이 있으시다면 어떻게 하늘 보좌에 승천하신 아들 인격을 영접했습니까?


5) 골1:27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합니다. 이인규님은 이런 그리스도를 소유하셨습니까? 이 분은 어떤 그리스도이며 어떻게 소유하셨습니까? 님의 논리대로라면 이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며 나중에 천국이나 가야 뵐 수 있는 분 아닙니까?


6) 빌2:13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 성령 인격 중 누구를 가리킵니다? 이인규님 말대로라면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절대로 사람 안에 들어오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피하지 마시고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요구합니다.


이인규님은 성경에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언급 하는 모든 구절은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제외되고 다만 편재성(신성한 본성) 안에서만 상호내재 하시는 성령 인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15:45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함으로 마지막 아담 안에 아들의 인격이 있음을 억지로 부인하지 않는다면―만일 이것을 부인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이 될 것임―아들의 인격이 부활을 통해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심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요일5:11-12, 요3;6). 여기서 생명주는 영이 무엇인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이 위 사실은 성립합니다.


이처럼 성경적인 삼위일체는 아들 인격이 생명으로 사람 안에 들어오심을 설명할 수 있지만 이인규식 상호내재에 따른 이단적인 삼위일체 사상으로는 아들 인격은 부활 승천 후 하늘 보좌에 남아 계실 뿐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 속에 들어가실 수 없는 구조적인 모순 속에 갖혀 계십니다. 그저 아들 인격은 아니고 편재성으로만 사람 가까이 오시거나 보혜사 성령이라는 대리인을 통해서만 사람 속에 오십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아들은 참된 아들 인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인규식 삼위일체론은 생명은 없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 즉 가라지들만을 양산해 낼뿐입니다(마13:24-30). 이것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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