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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측은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따르는가?

 

지방 교회측은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따르는가?

 


혹자는 구원론에서 있어서 칼빈주의는 전적은혜를, 펠라기우스주의는 전적인 행동을, 가톨릭이나 알미니안들 그리고 지방 교회측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라 인간의 동역이 필요하다고 함으로 반펠라기우스주의를 주장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아마 지방 교회측 성도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용어 자체도 생소할 것입니다. 또한 단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을 뿐인데 ‘반펠라기우스주의’는 또 무엇인가 라는 반응이 십중 팔구일 것입니다.


우선 편의를 위해서 1. 반펠라기우스라는 말에 관련된 자료 소개, 2. 지방 교회측 성도들이 믿고 실행하는 것을 뒷받침 하는 몇 곳의 성경구절들과 해석, 3. 이런 비판에 대한 간략한 입장을 말씀 드리는 식으로 글을 구성해 보겠습니다.

 


1. 어거스틴의 전적 타락을 전제한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그리고 반론


우선 인터넷 검색에서 얻은 관련 내용 일부를 인용 소개해 보겠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부르신 사람은 멸망 받을 수없다<참조: 성도의 견인>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후에도 그 은혜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어거스틴이 죽기 직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거스틴 사후에도 계속되다가 529년에 이르러 오렌지 회의에서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사항에는 명백하게 펠라기우스와 반펠라기우스를 정죄하고 있으나, 그 결정문의 끝에 첨가되어 있는 요약 구절은 반어거스틴적이어서 이 결정문의 일관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dotor ecclesie(교회의 박사)지만 그의 은총론은 여지껏 공식적으로는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후대에 발전된 교리 심지어 공식적 재가를 받고 있는 교리조차 반펠라기우스적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흘러 왔다. 교회의 이런 불충실한 태도는 반펠라기우스 논쟁을 조정할 때 그대로 놔두게 된 애매하고도 곤혹스러운 점들로부터 야기된다.“


http://www.imr.co.kr/Gracebd2/view.asp?ac_tablename=imrbd1&cat_name=&idx=177&sn=&ss=&sc=&key_word=&pageno=97&startpage=91


위 예에서 보듯이 어거스틴의 사상에 근거한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포함된  ‘튤립’(TULIP)은 개혁 신학쪽에서는 존중되지만, 그것이 절대 진리는 아닙니다. 만일 이것이 절대 진리라면 오늘날 장로 교단을 제외한 ‘튤립을 믿지 않는 순복음, 감리교단, 성결교단 등은 이단이어야 할텐데, 이 문제로 이들을 공식적으로 이단이라고 규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2. 지방 교회측은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따를 뿐입니다.


신약의 서신서는 어거스틴의 주장과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라’(do) 또는 하지 말라(not do)고 명령한 곳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말씀들은 순종하면 보상이, 어기면 그에 대한 정반대의 댓가가 따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갈라디아서 5장16절입니다. 즉 “그영을 따르십시오”라는 명령 뒤에 육체의 일들(19절)과 그 영의 열매(22)를 대조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그 영을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정반대로 육체의 욕망을 따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주의자들은 그 영을 따르는 것도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참되게 거듭난 사람은 ‘모두’ 그리고 ‘항상’ 그 영의 인도만 따라야 할 터이나 오히려 현실은 개혁신학계 쪽 성도들 상당수도 참되게 거듭난 이후에도 상당부분 육체를 따라 육체의 열매를 낳습니다(분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갈5:20). 만일 이것이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심지어 이러한 육체의 열매도 하나님의 은혜가 낳은 결과라는 궤변을 말하든지 아니면 그들은 참 신자가 아니라 가라지 불신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적 틀에 묶인 억지 해석은 현실과 거리가 있고 성경본문 문맥과도 어긋납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는 것이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말합니다(갈5:2-3). 그런데 그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거스틴주의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가라지이고 참 신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그 영(성령)을 받은 자들’이었고(갈3:2), ‘그 영으로 시작한 자들’이었습니다(3절). 그들이 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3:26, 4:6-7). 참 신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대교 거짓교사들에게 속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고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발생했기에 그들을 다시 제 궤도로 돌이키기 위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쓴 것입니다.


이런 실제 상황은 거부할수 없는 은혜 교리로 설명이 안 됩니다.


은혜는 너무나 풍성하고 늘 부족함이 없지만, 아직 다 변화되지 않은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그 은혜를 거부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 거듭난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른 불순종이고, 그에 따라 심판과 징계가 따른다는 것이 성경의 균형잡힌 가르침이고 우리가 겪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교리로 무시해 버리는 어거스틴주의자들에게는 1)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안 믿었다고 지옥 보내 버리는 매정한 하나님, 2) 거듭난 이후 경륜적으로 잠시 실패한 믿는 이들(위 갈라디아 교인들처럼)을 ‘가라지’로 몰아가는 영적 분별의 눈멈, 3) 생명의 성숙을 재촉하는 하나님의 경륜적인 징계를 말하는 구절들을 무시함으로 그리스도의 심판대(혹은 하나님의 심판대, 고후5:10, 롬14:10)의 심판을 경홀히 여기게 하는 무책임, 4)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이분법 구도에 빠지게 하는 오류 등이 발견됩니다.


이제 이  자유의지 문제를 회복역 성경과 그 각주 내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그러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십시오.”(행2:40)


회복역 각주3 “‘구원받다’는 피동적이지만, ‘받으십시오’는 능동적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것이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기 위해 능동적이어야 한다….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므로 사람이 주도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이여, 구원을 받으십시오!”


2)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빌2:12)


회복역 각주5 “우리는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았고, 이제는 순종하여 이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 이렇게 순종하는 것에는 우리가 혼 안에서 참되게 하나되는 것도 포함된다(빌2:2).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한 번만에 영원히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구원을 완성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지는 일이다.”


3)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8:13)


회복역 각주3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지만 반드시 그 영으로써 해야 한다. 한 면으로는 우리가 먼저 주도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 영은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다른 한면으로는 우리는 성령의 능력도 없이 우리 자신이 노력하여 몸을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상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지만 우리의 순종에 따라 그 은혜가 열매를 맺거나, 불순종에 따라 그 은혜가 거부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만 보아도 어거스틴의 전적 타락에 근거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교리는 문제가 있습니다(첨언 참조). 또한 은혜를 받고 안 받고가 우리의 자유의지에 영향을 받는다는 성경적인 입장을 반펠라기우스라는 교리적 굴레로 뒤짚어 씌워 정죄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어떤 교리를 따르는 것은 설사 옳아도 본인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일 때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경 66권을 있는 그대로 믿고 아멘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고 빛이 될 것입니다.

 


3. 전적인 은혜를 말하는 개혁신학의 실행적인 모순


개혁신학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the work of faith,살전1:3)마저도 ‘행위구원’으로 몰아 배척하면서도 정작 십일조 안 내면 교인 지위를 박탈하는 정관을 만드는 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합동교단 모 신학자는 신학지남에 낸 논문에서 오직 믿음(전적인 은혜)을 주장하고 믿음의 행위조차도 거부한 한국 개혁신학계의 배경을 분석하면서, 높은 행동규범을 가르친 유교사상을 깨뜨리고 복음을 받게 하려는 지나친 믿음 강조에 대한 반작용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친 결과, 오늘날의 한국교계의 상황은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미국의 경우 어떤 교단에서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동성애자들이 지금도 버젓이 강단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습니다.


첨언: 어거스틴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반박하는 수많은 성경 근거들의 인용은 <극단적인 칼빈주의의 이해> (이재명, 278-332쪽)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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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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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작성자 2016.01.30. 09:42
어떤 목사님이 지방 교회측은 칼빈의 튤립을 어떻게 보는지를 물어 오셨습니다. 비록 지방 교회들을 대표하는 글은 아니지만, 예전에 써 놓았던 글이 있길래 조금 더 다듬어서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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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작성자 2016.01.30. 10:00

"다만 필자는 ‘불가항력적 은총’이 공동 선언문에서 제외되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싶다. 개혁 교회 가운데 이것을 강조하는 교파라도 공동 선언문이 제시하는 칭의 교리에 대한 본질에 동의하면서 다양성 차원에서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 제2차 오렌지 공의회(529)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극단적 은총론을 수정한 이래 루터교의 일부와 개혁파 교회의 일부를 제외하곤 ‘불가항력적 은총’ 교리를 추구하지 않아 왔기 때문에, 개혁파와 감리교와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동참하는 공동 선언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적 은총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http://www.duranno.com/moksin/ctg_detail.asp?CTS_ID=57852&CTS_YER=2006&CTS_MON=10&CTS_CTG_COD=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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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작성자 2016.01.30. 10:08
"2) 칭의에 대한 공동 이해를 설명하기
(1) 칭의에 관련된 인간의 무능과 죄
본 선언문은 위 주제 아래서 첫 번째로 칭의에 관련된 인간의 무능과 죄를 논한다. 본 선언문은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완전히 의존한다.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일어난다”(4.1.19)라고 하면서, 양측의 미묘한 차이점들(4.1.20, 4.1.21)을 나타낸다. 즉 루터의 이신칭의론에서 루터는 복음을 수용하는 주체(의지)의 전적 수동성을 말하고, 트렌트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선행 은총’ (prevenient grace)을 전제하면서도 이 주체의 자발성을 루터보다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다음의 인용문은 양측이 복음에 대한 인간 주체의 반응 차원에서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행동’(God's justifying action)을 향한 준비 및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동의에 의해 ‘협력하기’(cooperate) 때문에 우리가 의인화를 받는다고 말할 때, 이들은 그와 같은 ‘인격적 응낙’(personal consent) 그 자체를 은혜의 효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능력들로부터 발생한 행동이 아니라고 본다(4.1.20).

루터교 사람들도 인간이 ‘은혜의 사역’(the working of grace)을 배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이 칭의에 대해 다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강조할 때, 이들도 믿는 사람들이 말씀에 의해 발생하는 신앙에 완전히 인격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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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작성자 2016.01.30. 10:16

인간의 구원의 과정에서 '자유의지'가 어느 만큼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오랜 이견의 한 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결국 위 합의는 어느 정도 일치점을 찾은 셈입니다.
1.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행위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은혜의 효과").
2.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배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부인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개혁신학은 위 둘 중 1번만 강조하고 2번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해 왔다고 할수 있으나 루터파는 이번 합의에서 2번을 인정한 것입니다.

체험적으로는 사실 위 2번이 문제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이에 대해서는 엄중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가시려는 또 하나의 안정 장치요 사랑의 표현입니다. 즉 징계는 사랑하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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