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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구원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上)

 

그 동안 원세호님의 지방교회측 교회론, 신론, 인간론 비판을 차례로 재 반박했습니다. 이제 구원론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또는 구원론)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구원론에 대해서 큰 폭의 다양한 의견들이 있어 왔습니다(박상걸, 성경적 구원론, 생명의 말씀사, 1995, 366-399쪽). 한 예로 유니테리안파의 보편 구원설, 감리교단 쪽의 알미니안주의, 개혁교단의 칼빈주의는 구원관련 교리에 대한 시각 차이가 적지 않습니다(위 책, 383-385 쪽). 그러므로 본 구원론 재 반박 글은 특정 교단 교리나 학설을 의존하지 않고 성경 본문을 절대기준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필요시 부분적으로 원세호님과 한국교계가 존중하는 구원론 관련 주장들도 반박근거로 삼을 것입니다.


아래 서론 글에서는 특별히 구원의 목표와 관련된 <신화>(Deification) 진리를 중점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아래 인용한 한 개혁주의 신학자의 구원관에서 언급된 <중생>과 <성화>와 <영화>의 성경적인 의미에 대한 검토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진리는 현재 지방교회측과 관련하여 원세호님 등 일부 이단 감별사들의 오해와 부당한 정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중생과 칭의는 구원의 과거적 단계이며, 성화는 구원의 현재적 단계이며, 영화(榮化)는 구원의 미래적 단계이다".(김효성 목사, http://www.oldfaith.net/st/salvatn4.htm#10. 성화(聖化))

 


1. 구원론 관련 서론 글 - <신화>(deification)


원세호님은 자신의 문제의 변증 책자에서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측의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가르침'에 대해 여러 번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초대교회 정통 교부들과 동방정교회가 지속적으로 가르쳐온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사전 이해를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글은 지방교회측의 주장 내용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거치지 않은 비판에 불과했다. 다만 '어떻게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인 하나님이 된다고 하느냐? 불경하다' 정도의 지극히 초보적이고 피상적인 이견제시일 뿐이다.


그러나 원세호님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신학계는 아래 인터넷 영문 자료에서도 보듯이 이러한 신화에 대한 논의가 매우 진지하고 공정하다. 또한 원세호님처럼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표현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통 초대교회 교부들 중 상당수도 신화(Deification)에 대해 가르친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Gross, Jules. The Divinization of the Christian according to the Greek Fathers. Trans. Paul A. Onica. Anaheim :A&C Press, 2002 :이 책은 다마스커스 요한 등 1-8세기에 활동했던 초대교회 교부들 33인의 184개 저술들로부터 사람의 구원의 과정과 최종목표로서의 신화됨을 언급한 대목들을 뽑아내어 소개하고 있다. 원문은 프랑스어이나 지방교회측이 최초로 영어로 번역 출판했다. http://www.affcrit.com/acpress/index.html). 그들에겐 다만 신화에 대한 가르침이 그 내용에 있어서 초대교부들이나 동방교회의 경우처럼 인정될만한 것인가 아니면 뉴 에이지 주창자들이나 몰몬 교단의 경우처럼 성경의 가르침의 한계를 벗어난 것인가가 문제가 될 뿐이다.


따라서 원세호님과 여타 이단 감별사들은 <신화>(Deification)에 대해 지금처럼 무조건 성급하게 정죄부터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 이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기왕의 관련 자료들을 충분히 연구하고 기초 사실들을 정리해 보는 신학자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http://www.brown.edu/Students/ocf/introduction/deification.html (동방정교회)
http://www.theonet.dk/spirituality/spirit00-13/You_are_gods_BP.html (동방정교회)
http://www.frimmin.com/faith/theosis.html (동방정교회)
http://www.angelfire.com/ny4/djw/lutherantheology.stuckwisch.html (루터교, 동방정교)
http://www2.ida.net/graphics/shirtail/deificat.htm
http://members.aol.com/sfantatreime/Articles/Simonca/Deification_Theosis.htm
http://www.cephasministry.com/mormon_ye_are_gods.html
http://www.lightplanet.com/mormons/basic/godhead/Deification_EOM.htm (몰몬교)
http://quitplaying.com/~neirror/neirr.org/Deification.htm
http://www.deceptioninthechurch.com/godsrus.htm
http://www.antiochian.org/theology/deification.htm
http://www.theonet.dk/spirituality/spirit00-13/Mormon_Deification_AK-MWH.html
http://www.pastornet.net.au/jmm/adev/adev0363.htm
http://www.orthodoxinfo.com/phronema/frluke_newage.htm (뉴에이지)
http://www.judeministries.org/cults/newage.htm (뉴에이지)
http://www.dashhouse.com/sermons/1996/PM/961117.htm
E See Bonner, Gerald, "Augustine’s Conception of Deification".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37, October 1986, p. 369-386.


1) <신화> 진리에 대한 문제의 쟁점


장로교 전통이 강한 한국 교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이...하나님이 된다>는 표현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러나 동방교회에는 심지어 크리스마스 카드 인사말로 주고받을 만큼 이 말이 보편화되어 있다(https://www.localchurch.kr/904).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한국 교계가 주로 서방 로마 천주교 또는 그로부터 나온 개신교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동방정교회는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을 다소 전승 받아 지금도 <신화>(Deification)를 성도들의 구원의 궁극 목표로 가르쳐오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 신학계에는 이러한 동방교회 신학은 거의 소개되지 않는 것 같다.


이외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현격한 차이는 여러 방면에서 관찰된다.


전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안토니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구원론'(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서방교회는 죄의 용서를 중시하나 동방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서방교회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강조하나 동방교회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중시한다>고 양측을 비교한 바 있다(112쪽).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계 내에서 소위 이단과 정통을 판정하는 근거가 되는 교리기준은 '서방교회 성향' 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원세호님을 포함한 이단 감별사들은 자신들의 판단기준만이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닐 수 있다는 열린 사고가 요구된다. 물론 이것은 지방교회가 동방교회의 전통 아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지방교회는 성경 66권은 물론 정통교부들과 역대의 정통 신학들이 가르친 진리들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통교부들이나 동방교회에 의해 폭넓게 가르쳐지는 '신화' 관련 진리가 지방교회 내에서 구원교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배경설명을 전제로, 지방교회가 가르치는 <사람이 하나님이 됨>(신화) 진리는 그 핵심 중점들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신격>(Godhead)에서는 아니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된다(the believers in Christ have been made God in His life and in His nature but not in His Godhead).(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archives/ac_02_02.html), 2002년 10월 호, 49쪽)


(2) 이러한 신화 진리는 주로 성도들이 <하나님-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사람>이셨던 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수준의 인격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목적으로 강조된다(엡1:4-5, 요일2:6)(위트니스 리, 하나님-사람의 생활, 한국복음서원, 1998, 하나님-사람들, 한국복음서원, 1995, 하나님의 경륜의 중점들과 하나님-사람들이 가져야 할 생활, 한국복음서원, 1995).


(3) 지방교회측은 피조물인 우리가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Godhead)에는 영원히 참여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이 금지하는 이단사상이기 때문이다(위 확증과 비평, 48쪽).


따라서 원세호님을 포함하여 지방교회측의 '신화' 진리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며 비판하려는 사람은 위 세 가지 항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원세호님은 충분한 사전 연구 없이 이 주제에 접근했다. 그리고 경솔하게 비판했다. 신화 진리에 관련된 원세호님의 이러한 '피상적인 글쓰기'는 지방교회는 물론 한국교계에도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불충실한 연구와 신중치 못한 정죄로 인해 이단 감별사들의 위상만 실추시켰다.


2) 하나님의 생명, 본성, 신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정통 교부인 아타나시우스는 '그(예수님)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캅에 의해 목양 받은 이레니우스도 '그는 끝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 되셨고, 그리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그의 존재가 되게 하셨다' 라고 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94쪽). 지방교회측도 이러한 연장에서 <믿는 이들은 신격에서는 아니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 교리에 대한 검증은 피조물인 거듭난 성도들과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 그리고 그분의 신격과는 각각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검토해 나가는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믿는 이들과 하나님의 생명


요 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결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엇갈린 이해가 있다. 지방교회 측은 사람이 하나님(하나님-사람)이 되는 출발을 참된 거듭남의 체험에 두고 있다. 사실 현재 쟁점이 된 신화 진리 이해의 첫 단추는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나 성경적으로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자녀> 이해가 비 성경적인 사람이 <신화>를 바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참된 거듭남이 아닌 몇 가지 경우들을 열거해 보겠다.


<참된 거듭남>(http://www.regenerated.or.kr/life/index.html)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 이외에 하나님의 생명인 조에(Zoe)를 자신 안에 받아들인 두 번째 출생>을 말한다(요3:6-7, 1:12-13). 개혁주의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구원론>(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거듭남(중생)을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심겨짐'(168쪽), 또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171쪽)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후크마도 거듭남이 전적으로 생명의 문제임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생명>(조에)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피조물인 사람 안에 들어오시게 되는가를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11:25, 14:6 에서 예수님은 '나는...생명(Zoe)이니'(I am...the life)라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은 <주님자신>이시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생명이신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의 참 생명이 되시는가? 요5:26은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동일한 생명이 영원가운데 아들에게도 주어졌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생명이 다만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 안에만 있다면 그 생명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요일5:11-12는 '...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람인 우리는 이 <아들 하나님 자신>을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함으로 신성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다른 길은 없다. 히2:11은 '거룩케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한 근원인 아버지 하나님)에서 난지라' 라고 말한다. 즉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거듭난 우리는 동일한 아버지의 <많은 아들들>인 것이다(히2:10).(https://www.localchurch.kr/1028)


이러한 말씀들은 평이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깊고 비밀하다.


<생명>(요14:6)이신 아들 하나님이 <사람 밖>에만 계신다면 아직 <우리의 생명>(골3:4)은 아니시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우리 안의 생명이 되시도록 성육신, 죽음, 부활을 거쳐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이제 마음 문을 열고 이 영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안에 모실 수 있다(요3:6). 왜냐하면 부활 후 주님은 한 면으로 대 제사장과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로서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롬8:34), 동시에 다른 한 면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 안에 사실 수 있는 분이 되셨기 때문이다(롬8:10, 골1:27). 주님은 부활 후 생명 주는 영으로서 창세기 28:11-22에 언급된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의 비밀을 성취하셨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390) 즉 그분은 부활 후 머리로서 하늘 보좌에 계시나 이 땅위의 거듭난 모든 사람을 그분의 몸으로 하는 기묘한 <한 새 사람> <인자이신 사닥다리>가 되신 것이다(엡2:15, 요1:51). 따라서 주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땅위에 있던 자신의 몸의 지체들을 핍박하던 사울을 향하여 <왜 나를 핍박하느냐>(why persecutest thou me)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행9:4).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 주님은 거듭난 사람들의 영과 연합되신 <한영>(one spirit)이시다(고전6:17). 즉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적인 연합>이 거듭날 때 일차적으로 사람의 영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이러한 <연합된 영>이 하나님-사람의 실제이다.


이것이 지방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주님자신>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들인 <하나님-사람들>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위치와 상태이다.


이제 성경이 계시하는 <거듭남>과 유사하나 참된 거듭남은 아닌 몇 가지 경우들을 소개해 보겠다.


첫째, <죄 사함> 자체가 거듭남은 아니다.


죄 사함의 체험을 거듭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둘은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르다. 먼저 죄 사함은 '예수의 피'로 인한 것이나 거듭남은 '생명 되신 예수님 자신'으로 인한 것이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나 거듭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 구속 주 사이에 '사람 밖'에서 이뤄진 사건인 반면, 거듭남은 그 구속주가 부활 후 '사람 안'에 직접 들어오심으로 체험된다. 예표 상 죄 사함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이뤄졌으나, 거듭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에서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 체험된다. 로마서 5:10은 '(피로)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함으로 피로 인한 죄 사함과 화목을 생명으로 인한 구원과 구분하여 말한다. 이것을 법리적인 구속과 유기적인 구원이라고 구별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죄 사함과 거듭남은 각기 다르다. 체험으로 볼 때 죄 사함은 물론 거듭남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속죄의 피로 인한 죄 사함과 부활생명으로 인한 거듭남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거듭남 이후의 믿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상적인 믿는 이의 생활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갈2:20)이다.


그러나 체험에 의하면 과거에 가졌던 죄 사함의 확신만 가지고는 이런 승리의 생활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경은 이러한 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생명의 떡이시요 생수이신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실 것>을 요구한다(요6:57, 고전12:13, 요4:14, 7:39, 빌1:21, 고전15:31, 롬10:12-13, 빌2:12). 또한 옛 사람을 부인하고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말씀의 요구들을 이룰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사실상 서신서 전체의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말씀의 요구들은 보혈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주님자신이 우리를 통해 사실 때만 지켜질 수 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은 사실이 이런 생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죄 사함 확신자가 주님자신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인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째, <영적 출생이 없으면> 거듭남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신학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열심 내어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다. 다소의 사울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명망 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을 배웠다. 또한 그는 유대종교 중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했다. 그가 한 일은 열심 내어 교회를 핍박하고 유대교를 사수한 것이다. 그러나 훗날 그는 이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빌3:1-8). 심지어 그의 사역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의 이러한 일들을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다'(딤전1:13) 라고 고백했다. <믿지 아니할 때>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참되게 거듭나지 못했을 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참되게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았다(갈2:20).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길을 신실하게 갔다(고후11:28, 골1:28-29). 이처럼 그의 회심 전과 후의 삶은 극명하게 구별된다. 하나는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의 삶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거듭난 주의 종>의 삶이었다.


원세호님은 앞에서 창2:7에서 코에 불어넣어진 생기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보아 사람은 이미 피조 될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는데 지방교회측은 거듭나려면 추가적인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며 이를 정죄한 바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생명'과 '참된 거듭남'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원세호님이 거듭났는지 여부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자신의 체험을 진리에 맞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주님자신>이 사람 안에 들어오심을 부인하면 거듭남이 아니다.


요일5:12 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he that hath not the Son of God, hath not life)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아들자신>의 내주가 거듭남과 직결된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주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고 말해도 위 말씀과 상치되지는 않는다.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성령의 내주는 다른 두 위격들의 내주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박상걸 목사도 자신의 '성경적 구원론'(생명의 말씀사, 1995)에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곧 삼위 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은 이르기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아울러 우리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며...>(131-132쪽)라고 말함으로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단 소속 비중 있는 신학자 중에는 <성령님이 아들을 대신하여 우리 안에 계심으로 아들 하나님 자신은 사람 안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즉 아들 하나님의 사람 안의 내주 하심을 적극 부인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보아 온 성경이 계시하는 거듭남의 진리를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장차 목회자가 될 신학생들을 교육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래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이다.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 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월간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 호, 122쪽).


이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벧전1:23)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지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아니다' 라거나 '우리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양자>(엡1:5)로 입적된 것이지 진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다'는 주장들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잘못된 가르침들이다. 만일 누구든지 이처럼 <아들 하나님> 자신의 성도들 안의 내주를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나선다면, 그는 참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거듭남이 <생명의 씨이신 주님자신>이 사람 안에 직접 '뿌려지는' 문제요(고전15:45, 막4:26-29), 위로부터의 <출생>의 문제(요1:13하)임을 보지 못한 것이다.


위 세 가지 유형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음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3:9).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이는...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거룩하게 하시는 자(예수님)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거듭난 성도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


위 말씀들은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맏아들이신 예수님이 나신 그 동일한 근원에서 우리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행13:33, 벧전1:3). 그러므로 주 예수님도 피조물인 우리에게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않으신다. 위와 같은 성경 말씀들에 기초하여, 지방교회 측은 주님은 신격(데오테스, 2320)을 가지신 <하나님-사람>(God-man)이시고, 우리는 이 분과 연합된 <하나님-사람들>(God-men)이되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없다 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주님은 포도나무시요 우리는 가지>(요15:5), 또는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이시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골1:18, 고전12:27)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2) 믿는 이들과 하나님의 본성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는가? 벧후 1:4는 '너희로...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한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999) 물론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 중엔 피조물인 사람들이 영원히 <참여 할 수 없는 것>과 <사람의 공유가 가능한 것>이 있다.(http://www.oldfaith.net/st/god1.htm)


지방교회측이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다>고 할 때에도 이러한 상식적인 분별을 전제한다.(https://www.localchurch.kr/1093) 즉 아래에서 보듯이 지방교회측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 후에도 <하나님의 전지>, <편재>, <전능> 같은 절대적인 속성(비 공유적 속성)에는 참여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After we have been deified in full, we shall not be able to create out of nothing, and we shall never be omnipotent, omniscient, or omnipresent. Likewise, we shall not advance to the point of self-existence, a condition unique to God'(확증과 비평, 2002년 10월 호, 17쪽, http://www.affcrit.com/archives/ac_02_02.html).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람의 공유가 가능한 <거룩>, <빛>, <사랑>, <의로움> 등과 같은 신성한 본성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위 확증과 비평, 50-51쪽).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은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와 하나될 때만 비로소 제대로 지켜질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이더니 지금은 주 안에 빛이라>(엡5: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


안토니 후크마도 앞서 인용한 그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 할 수 있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더 그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동안...우리들은 하나님을 본 받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과 꼭 같아 질 수 없는 그런 방면...그러나 역시 우리가...또 하나님과 같이 되어질 수 있는 방면이 있다. 이들 방면 가운데 어떤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 속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하라'(엡4:32)...'그리스도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 행하라'(엡5:2).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기독교인 생활의 부수적인 양상이 아니라 본질적인 양상이다. 또한 역시 하나님과 같이 되고,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은 성화의 모범임에 틀림없다.'(326-327쪽).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하고 또 그에 대해 답변을 얻어내야 한다.


그것은 위 필자와 안토니 후크마가 인용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생활>에 관련된 말씀들이 1) 사람의 외부적인 수양과 노력으로 성취될 수 있는지 2) 아니면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 사람 안에서 증가(확대)되심으로 우리가 아닌 주님자신이 우리 안에서 사신 결과로 성취되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방교회의 관점은 당연히 후자이다. 즉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그들 안에서 증가되신 것인 영적 생명의 성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후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공유적인 본성에 참여하는 것의 의미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지면관계상 하나님의 공유적 본성 중 <거룩>에 한정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편의상 먼저 한국 교계 내에서의 성화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뒤에서 성경이 말하는 성화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한국 교계의 성화에 대한 이해


풀러 신학교의 이정석 교수는 논문에서 한국 교계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 이해에 심각한 혼돈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http://blog.daum.net/esjk8030/7379274)


"그러므로 나는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성화 이해에 있어서 심각하게 혼돈 되어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거대한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의 물결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킬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못하며, 따라서 이미 심각하게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무엇보다도 이미 기독교의 성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그릇된 가정이 보다 더 유감스럽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의 성화와 전통종교들이 가르치는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성화에 대한 올바른 신앙과 진정한 능력이 부족하며, 그 결과 성화에 관한 한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신비화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성화이해를 위해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겸손히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편 성결교단 신학자 중 하나는 자신의 논문에서 성결(성화)에 대한 성결 교단의 교리가 한국교계의 주류를 이루는 감리 교단, 칼빈주의(장로 교단), 오순절파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한다.(http://sgti.kehc.org/data/field/sunggyul-theology/others/13-1.htm) 이러한 주장은 한국교계 내에서 성결(성화)에 대한 통일된 관점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위 각 교단들의 관점은 성결의 대상인 인간의 상태나 성결의 완성 시기는 관심하되,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인지에 대해서는 선명한 개념정의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화(거룩케 됨)의 의미


헬라어로 성화는 hagiazo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따로 떼어 두다”“거룩하게 만들다”“신성하게 하다"의 뜻이 있다. 위와 같은 '성화'의 개념을 감안하여 성경에서 계시된 성화의 의미를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위치상의 성화(분별)>(positional sanctification)이다.


즉 금은방의 금은 거룩하지 않으나 성막 안에 옮겨진 금은 거룩하다(마23:17, 19). 이것은 그 금이 위치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따로 떼어 두어졌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지칭했다(고전1:2).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성분적으로도 거룩하다는 것은 아니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4119) 이러한 위치상의 성화는 안토니 후크마가 말하는 '즉각적인 성화'와 같은 의미이다(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338쪽).


둘째는 <성분상의 성화>(dispositional sanctification)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의 본성이 피조물인 성도들에게 더해져서 성도들이 '거룩하게 만들어 지고' '신성하게 되는' 방면을 가리킨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만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따라서 피조물인 사람이 거룩케 된다는 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더해짐으로 내적인 본성의 변화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본성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을 <대치>한다는 말이 아니다. 대신에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생긴 <흠과 주름들>이 제해지고 창조시의 사람의 본성이 회복된 그 위에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말씀 안에 있는 물>(the water in the word)의 우리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씻음과 거룩케 함을 통해 이뤄진다.(엡 5:26-27)(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843)


즉 이것은 성도들이 날마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요6:63) 앞에 나아갈 때 이 말씀이 우리의 존재 안에 역사함으로 이뤄진다. 즉 이 말씀이 한 면으로 옛사람의 타락한 요소들을 씻어내고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거룩한 본성을 우리 안에 더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결심이나 외적인 행위의 개선이 아닌 일종의 신진대사적인 내적 작용이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4015)


안토니 후크마도 이러한 '성분상의 성화' (즉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점진적인 성화)가 성도 안의 내적 본성의 변화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점진적인 성화의 본질에 관한 가장 강력한 표현은 고후 3:18에 나타나 있다. ...성도는 주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에 역시 영이신 주님에 의해 계속 그리고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 여기 '우리가...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 메타모르포메다는 단지 외부 형태의 변화가 아니고 <내적 본성의 변화>이다"(위, 개혁주의 구원론, 342쪽).


이제 이처럼 <거룩케 됨>이 <거듭 난 성도들 안의 하나님의 증가로 인한 내적 본성의 변화>임을 지지하는 성경 본문들 일부를 제시해 보겠다.


# 요10:10하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위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분의 양인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의 생명은 과연 무엇인가? 원문에서 이 생명은 <조에>(Zoe)이다. 따라서 이 생명은 죽고 부활하신 후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주님자신>이시다(고전15:45). (생명 주는) 영 앞에 붙은 수식어인 <생명 주는>(life giving) 이라는 말은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가 주로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생명을 더하여 주시는 것임을 암시한다(살전5:23상, 빌2:12-13). 초기에 생명을 얻는 것이 우릴 거듭나게 했다면, 거듭 난 이후 그분이 계속적으로 주시는 생명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생명이 성숙될 수 있다. 이러한 생명의 성숙은 당연히 성화를 동반한다.


어떤 이는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어디든지 편재하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자란다>고 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인 방면의 하나님만 알고 경륜적인 방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이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불신자 안에도 하나님이 편재해 계신다. 그렇다면 그들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편재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면에서 하나님은 불신자 안으로 영접되셔야 하고 또 믿는 이들 안에서 자라나셔야 한다(고전3:1-2, 6-7).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성장은 '행위의 개선'이나 '경건의 표현'이나 '열심 있는 봉사'나 '지식의 증가'나 '풍성한 은사'나 '능력의 증가'가 아니다. 생명의 성장은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분의 증가이다. 이러한 생명의 성장은 당연히 우리의 존재(특히 생각, 감정, 의지 부분)를 점차적으로 거룩케 한다(위트니스 리, 생명의 인식, 한국복음서원, 1988, 191-200쪽).


# 골2:19 :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위 말씀을 영어 원문에 의해 다시 말한다면 '...연합하여 하나님의 증가로 증가하느니라'이다 '...knit together, increaseth with the increase of God'이다(KJV). 따라서 위 구절이 언급하고 있는 생명의 성장은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 자신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 안에서 연합된 영(고전6:17)이 우리의 혼(생각, 감정, 의지)안으로 확장되어 감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4:23의 '생각의 영'(the spirit of your mind)(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772), 3:17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심'(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685) 같은 말씀들은 이런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 엡4:22-24 : '너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위 말씀은 참된 성화는 <한 존재>를 벗고 <또 다른 존재>를 입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성화는 타락한 옛사람을 벗고(롬6:6),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새사람을 입는 문제이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775) 다만 유교나 불교인들처럼 어떤 인간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개선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겉 사람이 후패되고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짐으로 우리 안에서 이러한 성화의 역사가 성취되도록 밖의 환경을 적절하게 안배하신다(고후4:16-17, 롬8:28-29).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통과하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전보다 더 증가되시도록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을 앙망해야 한다(고후3:18).


이 정도의 제시만으로도 성화는 어떤 사람의 자기 개선의 노력이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분의 증가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본다. 거룩을 언급하는 다음 말씀들은 이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be holy and without blemish)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the adoption of children)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거룩케 하는 자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히2:11).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5:23),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3,7), '우리 주 예수께서...강림하실 때...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


이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답함으로 이 단락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거듭난 우리는 어떻게 거룩케 되는가? 말씀과 환경을 통해 거룩이신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에 더해질 때 점점 더 거룩해진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이 더해진 <성숙한 믿는 이들>은 어떠한 분별된 생활의 증거가 있는가? 즉 그들은 안의 기름부음의 통제로 인해 결코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더구나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은밀히 사랑함으로 아버지를 근심케 하지 못한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안의 본성이 그것을 불편해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체험적으로 아버지를 알므로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자기> 부인의 삶이 있다. 이에 더하여 악한 자 <마귀>의 유혹과 시험 앞에 요동함이 없이 견고한 믿음을 지킨다. 또한 어떤 것을 하나님 자신보다 귀하게 여길 때 안에서부터 회개와 자백의 기도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몸 안의 지체들과의 사이에 자기로 인해 야기된 불편함이 없다. 그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평강의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 일서가 계시하는 <빛>과 <사랑>과 <거룩>과 <의로움>의 실제를 가진 <하나님-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요일 3:2은 이들이 주님 재림 시 그분의 영광의 몸의 형체를 입음으로 그와 같을 것을 말한다. 이것이 김효성 목사가 서두에서 말한 구원의 미래적인 단계인 <영화>이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8312)


(3) 믿는 이들과 하나님의 신격


'신격'(Godhead, 데오테스, 2320)이란 단어는 신약 골로새서 2:9에서 단 한 차례만 쓰였다. 신격은 경배의 대상이 되는 자격을 가리키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유권한이시다. 피조물은 영원히 이에 참여할 수 없다(https://www.localchurch.kr/841). 지방교회측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말할 때도 피조물인 사람은 이러한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에 참여할 수 없다는 분명한 제한을 갖는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신격과 신성은 전혀 다른 두 개념이라는 점을 잘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골2:9가 보여주듯이 <신격>(데오테스(2320), Godhead)은 하나님의 체현인 아들을 통해서만 나타나지만, 롬1:20 에서처럼 <신성>(데이오테스, deity, divinity, 2305)은 그분의 만드신 피조물들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조 원문도 이 한 <신격>(Godhead)을 삼위의 인격들(persons)및 동일본질(substance)과 잘 구분하여 표시하고 있다.(https://www.localchurch.kr/1439) 한편 한국 교계 내에서는 신격을 가리키는 'Godhead' 번역에 다소 혼란을 보이고 있으나 캅바도기아 교부인 닛사의 그레고리나 칼빈 대학교 김석환 교수 등은 신격(Godhead)이란 단어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257, 341쪽).


3) 신화 진리에 대한 한국교계의 반응


신화 진리에 대한 한국 교계 인사들의 반응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례와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사례를 각각 두 가지씩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1)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조병수 신약학 교수 : 담임했던 교회의 크리스마스 설교시 이레니우스의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를 주제로 설교했다.(https://www.localchurch.kr/922) 이 사례는 서방교회 전통의 장로교 신학자이되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경우이다.


(2) 금란 교회 김홍도 목사 : 주일 낮 대예배 시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 사례는 감리교 목회자이되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신화>가 결코 성경에서 이탈된 내용이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진리임을 확신한 경우이다.(http://www.kumnan.com/preaching/preaching.php?method=content1&no=667&start=0)


김홍도 목사의 설교 내용의 소제목만 인용소개 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거듭나는 것은 작은 신으로 태어나는 것 (요한복음 3장 3-6절) ② 신의 성품을 받아 작은 신이 되는 것 (베드로후서 1장 4절) ③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작은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④ 주님이 맏아들이 되심은 우리가 작은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⑤ 주의 재림 때 주와 같이 됩니다.


(3) 현대종교 편집위원 이영호 목사 : 이영호 목사는 자신이 월간 현대종교와 관련해서 쓴 글에서 위트니스 리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을 뉴에이지 사상에 연관지어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위트니스 리가 뉴에이지 사상과 인도 신비주의 사상이 만연했던 인도접경 곤명이라는 지방에서 3년간 사역하는 동안 주위의 이단 사설에 영향받았다는 근거 없는 가설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것은 몇 차례 쌍방이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영호 목사가 사람을 착각한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음이 밝혀졌다.(https://www.localchurch.kr/1487, https://www.localchurch.kr/1494)


"(지방교회측의 항의서한)...이처럼 인도 접경 곤명지방에서 사역했던 장본인이 <위트니스 리>가 아니고 <위광희 형제> 였음이 명백히 밝혀짐에 따라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사실을 전제로 위트니스 리를 인도 신비사상과 뉴 에이지 사상에 연결시켜 <위트니스는 인도의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사상을 주장하는 자> 라는 억지주장을 담은 이영호 목사님의 논찬 글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 시나리오에 불과했음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짓주장을 공개적으로 유포하여 신실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시킨 이영호 목사님은,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https://www.localchurch.kr/1510).


그럼에도 이영호 목사는 일체의 사과나 시정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의 연구가 잘못된 가설에 기초한 거짓내용임이 밝혀진 이후에도 이러한 부끄러운 글을 지금도 유력한 기독 인터넷 사이트(http://www.kidok.net/kidoknet/hyundai_religion_forum)에 올려놓고 있다. 이처럼 이영호 목사의 이단연구 전문잡지의 편집위원에 어울리지 않는 부실한 조사연구 태도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비양심적인 처신은 한국교계 내의 이단연구가들의 위상을 스스로 실추시킨 경우이다.


(4) 전 침례교 목사 원세호님 : 그는 자신의 책 "지방교회 주장과 성경적 변증서"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시는 것 자체를 망령된 주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사탄의 죄에 동참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원세호님의 시각에 의하면 '신화'를 가르쳤던 초대교회 정통 교부들은 다 사탄의 죄에 동참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셔서 거듭났다고 말하면 그것은 망령된 주장이 된다. 그에게는 이처럼 거듭남 관련 성경 진리조차도 안에서부터 배척되고 있음으로 그 신성한 생명의 성숙을 통해 이뤄지는 <신화>를 소화할 역량이 그에게는 있을 수가 없다.


"광대 무변 하신 창조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신10:14; 느9:6; 시146:6; 사44:24; 롐17:9 에게 담기신다는 것은 망령된 주장이다. 마치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 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아닌가?...사도 바울도 자신이 하나님들이라 말한 바가 성경에 없다. 요3:16 영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과 피조 인간이 관계되나 동시에 구주님, 주님, 독생자, 양자됨 하나님 등 다양한 신분표시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절대적 속성이 구비되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되려는 것은 피조물 사탄의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사14:13-14)."


4) 지방교회측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 요약


지방교회측이 펴내고 있는 신학 잡지인 '확증과 비평'(Affirmation & Critique) 2002년 10월호는 144쪽 전체를 <신화>(Deification)관련 특집호로 엮었다. 따라서 원세호님이나 현대종교 이영호 목사를 포함하여 지방교회측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사전에 이 자료들(http://www.affcrit.com/archives/ac_02_02.html)을 충분히 읽고 소화 한 후 자신들의 비판의견들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화에 대해 좀 더 깊은 연구를 원하면 지방교회측 LSM 소속 <A&C Press>가 펴낸 <The Divinization of the Christian according to the Greek Fathers>(http://www.affcrit.com/acpress/index.html)을 참고 할 수 있다.


이제 아래에서는 위 신학잡지 첫번째 글인 'Becoming God'(by Ron Kangas)(총 28쪽) 내용 중에서 다뤄진 여타 단체들의 신화관련 주장들과 지방교회측의 '신화' 관련 주장들 중 핵심사항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겠다. 이 신학잡지에 수록된 여타 글들은 지면관계상 이 단락 말미에 글 제목과 길이 그리고 저자만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1) 인정할 수 없는 신화관련 주장들


# <인간 안에 신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위 책 9쪽) : 이러한 주장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숨겨진 내면에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즉 신화는 (거듭남이 없는 사람조차도) 이미 자신이 하나님인 것을 깨달아 알아 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영지주의자들, 뉴에이지 추종자들이 이런 사상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 지방교회 측은 당연히 이런 사상을 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보아 배격한다.


그러므로 현대종교 편집위원인 이영호 목사는 아무 근거도 없이 지방교회 <신화>가르침을 이러한 뉴 에이지 사상과 연관지었던 것을 사과하고 시정해야 할 것이다.


# <사람의 하나님으로의 진화 주장>(위 책, 10 쪽) : 사람은 현재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될 잠재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진화를 통해 사람이 신격(Godhead, godhood)에 까지 참여할 수 있다는 주장임으로 비 성경적이다. 위 논문 저자는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진화를 통해 메꿀 수 없다'(Humankind cannot bridge the gap between God and human beings through evolution)며 이러한 진화론적인 주장을 단호히 배척한다.


# <작은 하나님들("Little Gods")의 카리스마적인 개념>(위 책, 10-11쪽) :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과 사람의 영원한 구별인 <신격>에 참여 할 수 없음을 선명하게 가르치지 않음으로 충분히 자기를 높이는 오류로 빠질 수 있다. <Paul Crouch> : 'God draws no distinction between Himself and us. God opens up the union of the very godhead(Trinity), and bring us into it.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별을 부인) <Kenneth Copeland> <Kenneth Hagin> <Benny Hinn>(http://www.letusreason.org/wf17.htm)등이 이와 연관이 있다. 이 논문 저자는 이들이 종종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남의 차원에서의 사람의 하나님 됨'과 신격(Godhead) 사이의 엄격한 선을 주의하지 않음으로 이 노선을 배척한다. 따라서 지방교회측은 비록 '작은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소 융통성을 갖되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을 소유한다는 의미'라면 단호하게 거부한다.


# <몰몬교의 신화 개념>(위 책, 11-13쪽) : 몰몬교의 신화개념은 그들의 다신주의에 기초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단일신교'(henotheistism)를 믿는다. 즉 몰몬교도들은 이 우주 안에는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많은 신들 중에서 이 지구의 유일신만을 섬긴다는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은 처음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었다가 하나님이 된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아래와 같은 몰몬교의 신론과 신화교리는 이단적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인도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아니라고 반박한다. 물론 지방교회의 <신화>교리는 몰몬교의 그것과 전혀 무관하다.


'As man is, God once was; as God now is, man may become...' 'You cannot have men becoming gods without first recognizing the fact that God was once a man who also went through the process of exaltation to godhood...' plurality of gods exist...there is an infinite number of holy personages, drawn from worlds without number, who have passed on to exaltation and are thus gods...'


(2) 허용이 가능한 신화관련 주장들


# <Billheimer 의 'Destined for the Throne' 책자에서 다룬 신화 개념>(13-15쪽) : 빌 헤이머는 그의 책에서 '영원부터 이 우주의 한 가지 목적은 신부, 어린양의 아내라고 불리는 아들(the Son)의 영원한 동반자를 산출하고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 <신부>는 삼위일체의 가장 가까운 친족(neat of kin)의 참된 일원(bona fide member)이 된다'고 한다. 또한 '그 신부의 구속된 인성은 비록 신격에 이르지는 않으나 그에 근접한 최고의 지점까지 높여진다'고도 말한다. 아래 이와 관련된 원문 일부를 인용 소개해 보겠다(더 상세한 내용에 관심이 있으면 원 자료인 'Billheimer, Paul E. 'Destined for the Throne. Fort Washington: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1975'를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through the new birth a redeemed human being becomes bona fide member of the original cosmic family, 'next of kin' to the Trinity(15-16)...God has exalted redeemed humanity to such a sublime height that it is impossible for Him to elevate them further without breaching the Godhead'(16).


# <동방정교회의 신화 개념>(15-16쪽) : <신화>(divinization, Theosis, deification) 진리는 동방정교회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되는 것 즉 그분의 에너지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구원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러 동방 종교들의 주장들과는 달리, 동방정교회의 신화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근접하더라도(closely linked to God) 사람의 인간적인 정체성은 여전히 보존된다고 한다. 한 가지 특징은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신성한 에너지(energies)와 하나님의 본질(God's essence)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하나님의 신성한 에너지'가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에너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증과 비평' 41쪽의 Kerry S. Robichaux 의 논문을 참조).


'...This process of becoming god, of constant conversion, of participation in His divine energies, is theosis' '...the final goal at which every Christian must aim: to become god, to attain theosis, "deification" or "divinization". For Orthodoxy our salvation and redemption mean our deification', 'Union with God means union with the divine energies , not the divine essence... 'We remain creatures while becoming god by grace, as Christ remained God when becoming man by incarnation" The human being does not become God by nature, but is merely a 'created god', a god by grace or by status.'


(3) 지방교회측의 <신화> 관련 주장


거듭 당부하건대 누구든지 지방교회의 <신화>관련 주장을 판단하려면 그 이전에 위 <확증과 비평> 2002년 특집호 내용 전체를 두 세 번 읽어보기 바란다. 아래에서는 일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위 책의 첫 번째 글인 'Becoming God' 중에서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 중 일부를 인용 소개해 보겠다.


# 우리는 하나님이 된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난 이후 우리가 전적으로 거룩케 되며, 변화되고,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때까지 하나님으로 적셔지고(saturated), 침투됨(permeated)을 가리킨다. 이러한 하나님이 되는 신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인성(humanity)이 제해지거나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토록 피조물과 인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신화>는 우리가 신격(Godhead)의 일부가 될 만큼 높여지거나 하나님의 비고유적인 속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충분하게 신화된 이후에도 우리는 무로부터 무엇을 창조할 수 없을 것이며 무소 부재하거나 전능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계시는 조건인 스스로 존재함의 경지에까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위 책, 17쪽).


# 우리의 영이 그 영으로 인해 (거듭)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하나님으로 난 것이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생명과 신성한 아버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18쪽).


#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분(parts of Christ)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임으로, 그 포도나무의 일부인 가지들은 그리스도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의 일부이다(20쪽).


#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오직 그분 안'(only in Him)에서만 하나님이다. 우리는 결코 신성한 능력과 특권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신들"(gods)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아니며 또한 (앞으로도)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22쪽).


#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되는 과정은 우리가 거듭나서 거룩케 됨, 새롭게 됨, 변화, 형상을 본 받음을 경유하여 영화롭게 됨으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이다(23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에서 표현하시려면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면서 사람이 되셔야만 한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사람은 여전히 사람으로 남아있으면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26쪽).


이외에 위 지방교회측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의 2002년 10월호 <신화> 진리 특집에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 Kerry S. Robichaux, Can Human Beings Become GOD? (16쪽)
* Ed Marks, Deification by Participation in God's Divinity (8쪽)
* John Pester, The Gospel of the Promised Seed: Deification according to the Organic Pattern in Romans 8 and Philippians 2 (15쪽)
* Ron Kangas, Creation, Satanification, Regeneration, Deification (13쪽)
* Witness Lee, The Seed of david Becoming th Son of God (6쪽)
* Roger Good, Children of God Becoming Deified Sons (4쪽)
* John Campbell, Deified to Be the Bride of Christ (5쪽)
* Bob Danker, Deification -Aspects of the New Jerusalem (5쪽)
* Jim Batten, Christ, the Spirit, and the New Creation (5쪽)
* Ron Kangas, Children of God, Sons of God (9쪽)
* David Yoon, Misrepresented Goal: Heaven as a Restoration of the Garden of Eden (5쪽)
* Nathan Vigil, The Conflicted Theological Construct of Adoption(5쪽)
* Nathan Betz, Heaven: An Identity Crisis(4쪽)
* Gary Kaiser, Hymns- Praise of the Lord in His Increase (4쪽).


5) 결론


결론적으로, 원세호님을 포함한 이단 감별사들과 지방교회측의 <신화>(Deification)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상이점은 이것이다. 즉 지방교회 측은 우리 안에 오신 주님자신인 <생명>(요14:6)과 주님 자신의 우리의 영 혼 몸 안에서의 증가인 <생명의 성장>(요10:10하 골2:19)을 관심하는 반면, 원세호님 등은 자신들의 교단 교리에 묶여 생명과 생명의 성장에는 인식과 체험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혹자는 천국 가는 것이 믿음생활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마7:21). 그렇다면 오늘 날 이 많은 소위 크리스챤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매우 의심스럽다.(https://www.localchurch.kr/1127) 또 원세호님을 포함한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예수 믿는다고 한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의 참된 의미인가? 신약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이것은 어떤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어떤 단계에까지 도달하는 문제이다. 즉 사람이 주님자신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그의 영이 <거듭나고> 이 생명이 우리의 존재 안에서 자라심으로 그의 혼이 <성화 되고> 마침내 우리의 몸도 주님 다시 오실 때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는 <영화>가 성취되는 것이다. 지금 주님은 이처럼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안에서 하나님이 증가되시는 완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히2:10).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피조물인 그분의 택한 백성들이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다(엡1:4-5).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생명 되신 주님자신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시고(요3:6) 날마다 증가되시어 우리의 혼을 거룩케 하시고(엡5:26), 새롭게 하시고(롬12:2), 변화시키시고(고후3:18),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롬8:29), 마침내 우리의 몸까지도 영화롭게 하심으로만 성취된다(골2:19, 롬8:23, 빌3:21). 이러한 온전한 구원의 성취는 또 다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어 온전한 사람(a perfect man)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엡4:13).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람이 하나님(하나님-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으로 충만한 <한 온전한 사람>(a perfect man)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요, 하나님의 왕국의 실제이며,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영원토록 만물을 다스리고 이들을 통해 표현되신다(창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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