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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게 잘라냄 - 성경적 삼위일체의 몇 가지 난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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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게 잘라냄

성경적 삼위일체의 몇 가지 난제들

 

 

조직신학은 우리에게 사물들을 질서 있게 유지할 것, 곧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구별하여 혼란시키지 말 것을 가르친다. 만일 성경이 그런 작업을 가끔씩 비틀지만 않았다면 그것은 잘 통했을 것이다. 신학이 신성한 진리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반면에, 성경은 겉으로 보기에 우리가 자연스럽게 존중하고 쉽게 강요하는 조직적인 특성이 없이 다만 단순히 기술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신학적인 작업을 위해 성경자료의 어느 부분을 선택적으로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선택적으로 무시하기 쉽다. 삼일성에 대한 성경 기록과 수세기 동안 발전해 온 신학 이론이 그 증거이다. 신학의 정형화된 문구는 “본질 안에서 하나이고, 위격 또는 인격 안에서 셋이다.”, 그리고 “셋은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본질, 위격, 인격, 구별, 분리 등이 실제로 성경의 서술어(敍述語)가 아니라 성경 용어에 근접하도록 이끌어낸 설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없이는 성경의 용어들이 서로 모순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몇 가지 난제들

 

다음 구절들을 상고해보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고전 15:45)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후 3:17)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구절들이 합당하게 이해되려면 상당한 설명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만약 그 구절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삼일성 안의 구별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와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성경 용어들을 어떻게 합당하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조직 신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구절들은 무엇을 말하며, 신학자들이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교육받아 온 것은 무엇인지 상고해 보기로 하자.

 

첫째, 이사야 9장 6절은 그리스도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오심을 분명히 예언하는 구절로 수세기 동안 이해되어 왔다. 적어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이 구절의 주제는 주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근거하여 신학은 우리에게 삼일성의 제 2격은 육체가 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즉시로 우리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표현에 부딪친다. 무심코 우리는 이것을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려 하지만, 삼일성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해석하도록 돕기 위하여 신학이 끼어든다. 우리는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버지는 삼일성의 첫 번째 위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격의 위격들 간의 구별을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는 이것을 아들에 관한 서술어로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분이 아버지이신가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그러한 해석을 우리가 여기서 고려할 필요는 없겠다.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통념에 따라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용어가 신격 안의 아버지를 가리키지 않고, 직접적으로 아들에 해당되는 서술어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도 나타난다. "마지막 아담"은 분명히 사람이 되신 삼일성의 제 2격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 그분은 [하나의]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한다. 얼른 볼 때 다시 우리는 여기에서 언급된 분을 삼일성의 제 3격이신 영 하나님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은 우리가 아들과 그 영을 구별해야 한다고 명령함으로 그것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해석―아들에 근거한 영의 개념―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경 해석가들은 "생명 주시는 영"을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상태로 본다. 먼저 그분은 물질이셨다. 지금 그분은 영이신데, 단지 영이신 것이 아니라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끝으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이 구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인 것처럼 보이는, 아들과 그 영의 동일시는 우리에게 셋 가운데의 구별을 유지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신학의 명령에 의해 저지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주"와 "영"이라는 용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3장 17절의 상황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전형적으로 주석가들은 "주"는 구약의 여호와를 가리키며, 바울이 여기에서 율법을 주시는 분인 구약의 여호와를 진리를 계시하시는 분인 신약의 그 영과 병행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 세 구절들에 대한 전통적인 취급 방식에는 공통된 해석 장치가 작용하고 있다. 각각의 경우에서 그 구절의 서술어는 삼일성의 위격을 혼란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신학이 지시하는 것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다음과 같이 간략한 내용을 읽는다. 1) 아들은 아버지로 불리우신다. 2) 아들은 그 영이 되셨다. 3) 아들은 그 영이시다. 그러나 위격들(hypostases)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서술어의 일부는 자신의 위격적 의미를 빼앗기고, 보다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렇게 하면 이사야 9장 6절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삼일성 안의 아버지의 위격이 아닌 아들의 은유적 역할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도, 우리는 "영"을 신격 안의 위격의 영이 아니라 영적인 본질, 그러나 생명을 주는 본질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무리해야만 "영"의 위격적 의미가 부인될 수 있는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도, 우리는 주어인 "주"가 아들에 대한 위격적인 언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이라고 어쩔 수 없이 이해해야 한다.

 

 

몇 가지 해석적인 문제들

 

이러한 해석들은 삼일성의 셋 가운데 존재하는 구별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확실하게 존중한다. 아마도 그것은 이러한 개념들이 우리의 해석을 형성해 왔고, 또한 우리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처음부터 이해해 왔었기 때문에, 이처럼 해석된 듯하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 방식을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능한 한 성경 해석에 영향을 주는 선입관을 배제하고자 하더라도, 성경의 특정 본문들을 해석함에 있어 신학 이론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그러한 해석을 하게 만든 삼위일체적 특정 개념에 대해서도 비난하지 않는다. 참으로 셋은 영원히 구별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그러한 개념들이 이런 어려운 구절들을 합당하게 해석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가? 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개념과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해석할 방법은 없는가? 다시 말해서, 이 난해한 구절들이 삼일성에 관한 정통적인 이해를 따르면서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가? 우리의 대답은 ‘할 수 있다’이며,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심각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삼일성의 위격들에 관한 성경의 서술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아버지", "영", "주"라는 용어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삼일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 속으로 몇 가지 부가적인 의미들을 불러들이게 된다. 삼일성의 위격들에 관한 성경의 서술을 묵살함으로 우리가 이러한 구절들 안으로 불필요하게 끌어들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상고해야 하며, 그 결과 이러한 구절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사실상 우리의 이해가 더 악화되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일반적인 관점은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아버지 하나님이 아닌 (아마도 이스라엘에 대해) 아버지의 역할을 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로든 아버지시라면, 그분은 아버지가 되시기 위한 참된 근거를 가지셔야만 한다. 우리는 그분이 어떤 면에서 아버지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그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이 영원한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같이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이신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분이 아버지이신가? 그분이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하듯이 그분의 백성들을 감독하고 돌보신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이신가? (Keil and Delitzsch, ad loc. 참고하시오.)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참된 아버지가 아니라 다만 은유적으로 아버지이시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를 들어, ‘그분은 단지 은유적으로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또 다른 서술어들을 은유적으로 취하게 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에서 은유적 의미를 완전히 제거한 후 그것에 다가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면에서 참된 아버지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아버지가 되시기 위한 참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분은 다만 아들이실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이시기도 하며, 그렇다면 그분은 영원한 삼일성 안에 계신 아버지와 구별될 수 없게 된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신학적 함정을 피하려다 또 다른 함정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라는 말을 아버지 하나님과 별개로 언급함으로, 우리는 무심결에 아들에게 아버지 자격(fatherhood)을 부여하고 우리가 유지하고자 하는 구별을 무너뜨린다. 사실상, 아들에게 아버지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이사야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아들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보다 영원한 구별을 더 손상시킨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로는 영―생명을 주시는―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다. 우리가 이사야 9장 6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문제점들이 여기에서 다시 나타난다. 만일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라면, 어떻게 그분이 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삼일성의 제 3격과 구별되는가(요 6:63, 고후 3:6)? 아들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구절은 많이 있다(요 5:21, 6:27, 17:2). 그러므로 문제는 생명을 주시는 아들의 기능이 아니라, 그러한 기능 안에서 그분을 영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금, 삼일성의 세 번째 위격에 의거하지 않고 아들은 생명 주시는 영이라고 주장함으로, 우리는 세 분 가운데의 영원한 구별을 손상시키는 불필요한 속성을 아들에게 부여하게 된다. 우리가 두 생명 주시는 영들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연관된 문제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석의적(釋義的)이다. 쟁점은 "주"의 지시 대상에 있다. 신학적인 고려로 인하여 대부분의 성경 해석가들은 그 용어를 구약의 야훼(Yahweh), 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God)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본문 내용은 이것보다 더 구체적이다. 여기에서 바울의 요점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던 너울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14절에서도 똑같이 말한다. 그것은 구약 성도들에게 너울을 벗기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다. 16절에서 바울은 언제든지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그 너울이 벗어질 것이라고 선포한다. 틀림없이 이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에 의해서 너울이 없어진다. 여기에서 일련의 명사 연결 관계를 깨뜨리고, 16절과 17절에 있는 "주"가 "그리스도" 아닌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의 자연스러운 배열을 깨뜨리는 것이다. 성경 주석가들은 본문에서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용법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더 안전한 대안

 

삼일성의 셋 가운데의 구별을 혼란시키지 않으려고 할 때, 덜 눈에 띄지만 똑같이 심각한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신학적인 요구를 피상적으로 만족시킬 수는 있으나,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처음에 우리로 그러한 시도를 하게 했던 동일한 불편함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다지 분명치 않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더 안전한 대안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고, 그 서술어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렇게 함으로써 셋 가운데의 구별을 혼란시켜 신성한 삼일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인 ‘구별’과 진리가 아닌 ‘분리’ 사이의 큰 차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봄으로써 그것을 풍성하게 한다.

 

아마도 일부 해석가들이 이러한 성경적 삼위일체의 몇 가지 난제들에 대해 갖게 되는 어려움은 삼일성의 경륜적인 방면에 대한 이해 부족과, 본질적 삼일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부터 유래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조망한다면, 주된 초점을 그분의 행동보다는 그분의 존재에 더 둘 것이고, 셋 가운데의 구별은 매우 예리하게 잘 정의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삼일성 안에 있는 그분의 유출(emanation) 및 사람을 완전하게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행동을 포함한 하나님의 경륜을 상고하는 일에 착수하면, 구별은 덜 분명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분이 행동하실 때 삼일성은 단일하며, 삼중이 아니다. 그러므로 셋 중 누구도 결코 다른 둘과 독립적으로 행동하시지 않는다. 한 분이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두 분 역시 그분과 함께 하신다.

 

예를 들어, 육체 되심 안에서 삼일성의 세 분 모두가 행동하시며,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처럼 단지 아들만 행동하신 것이 아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는 육체 되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삼일 행동(triune action)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그대 위에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것입니다.”(눅 1:35) 아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마 1:20), 여전히 하나님이 그분의 아버지이시다.

 

땅에서의 사역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아버지께서 하고 계신 일을 하신다고 선포하셨다. 아마도 그분의 선포 중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요한복음 5장 17절과 14장 10절일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또, 10장 38절과 14장 11절 참조)

 

삼일성의 세 분은,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롬 8:11)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관련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는 한 가지 노력 속에 행동하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갖는다.

 

성경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는 매 사례 속에서 그들 각각의 위격들 가운데서는 구별되지만 그들의 행동 안에서는 하나로 운행하시는 삼일성의 세 분을 보게 한다. 그러므로 삼일성 중 한 분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두 분 또한 행하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삼일성 가운데 다른 두 분과 독립된 한 분의 행동은 결코 없다. 세 분 가운데의 인격적 구별이 유지되면서도, 삼일성의 모든 일이 하나의 일이므로, 한 분이 행동할 때 다른 두 분도 그 한 분과 동일시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세 분 사이의 구별은 성경의 기록에서 덜 예리하게 유지된다.

 

이것이 성경상의 삼위일체에 대한 난제를 푸는 열쇠이다. 이 세 구절은 모두 매우 경륜적인 구절들이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말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바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경륜의 시작인 그분의 육체 되심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셨을 때 아들은 아버지 및 그 영과 독립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의 오심은 또한 아버지의 오심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십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요 14:9-10)

 

확실히 아버지는 아들과 동일시되지 않고 아들도 아버지와 동일시되지 않지만, 삼일성의 세 분은 서로가 절대로 분리되어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실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항상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원한 정체성 안에서 하나님은 구별된 세 분이시나, 그분의 경륜적인 구원하시는 행동에 있어서 그분은 한 분으로 일하시며, 주신 바 된 아들은 그분의 일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로 불리우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다른 단계가 포함되며, 경륜적인 삼일성이 강력하게 언급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처리하였고, 옛 창조를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과 함께 종결하였다. 그러나 새 창조가 발아되고 하나님의 신성한 요소―신성한 생명과 본성―가 믿는 이들에게 적용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분(the life-giver)으로 불리워지나,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

 

바울은 간단한 말로,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 안에서 그분의 부활의 미덕을 적용하기 위해 믿는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참으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그분은 여전히 삼일성의 제 2격이시지만, 그러나 경륜적인 시각에서, 곧 삼일성의 제 3격이 지금 제 2격의 인격과 성취들을 적용하신다는 점에서, 제 2격은 제 3격이 되셨다.

 

사도들의 글의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아들과 그 영의 긴밀한 동일시가 유지된다. 세 곳에서 바울은 그 영을 제 2격의 영으로 언급한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을 확증하는 그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그는 우리의 아들의 자격이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그분의 아들의 영”에 의해 효력을 갖게 되고 또한 강화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한 우리 구원의 완전한 효능에 대한 그의 신뢰를 선포한다. 사도행전에서도 누가가 바울 및 그의 동료들이 복음을 위하여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여행하려는 것을 금지하는 “예수의 영”을 기술할 때, 적어도 한 번은 아들과 그 영이 동일시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서 그 영은 다만 아들의 대행자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미덕과 효능 안에서 아들의 "운반자"와 "전달자"(Andrew Murray에게서 인용함)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부활 안에서 아들의 모든 소유와 어떠하심은 그 영으로서 믿는 이들에게 유용하게 되었다. 확실히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나, 아들은 그 영 안에서 오시고, 그 영은 아들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아들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께 참여하도록 믿는 이들에게 그분 자신을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그 영이 되신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바울의 선포는 동일한 것을 말한다. "주"라는 용어가 14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리킨다는 것을 결코 회피할 필요가 없다. 17절에 있는 주님은 14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이시며, 그 영이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요소로 믿는 이들을 변화시키시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라고 선포한다.

 

그분이 새 언약 안에서 영광의 근원이시며 우리는 그 영광에 의해 영광 안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실제(practicality)는 그 영이시다. 바울은 우리가 주 영에 의해, 주 영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 안으로 동일하게 변화되고 있음을 특별히 말하고 있는 18절에서 아들과 그 영의 이러한 동일시를 계속하고 있다. "주 영(Lord Spirit)"이라는 복합적인 칭호는 믿는 이들의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적용함에 있어서 아들과 그 영의 긴밀한 동일시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격들을 제시할 때 막연하게 애매하지 않다. 신학이 신성한 진리의 내용을 보다 낫게 배열하고 조직화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의 배후에 들어올 때에, 우리는 성경의 기록이 제시하는 것보다 그러한 배열에 결단코 우선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위격들이 성경 안에서 우리 앞에 두어진 방식은, 그분의 복수성과 단일성을 다 존중하면서, 어떻게 그분이 그분의 위격 안에서 구별되며 그분의 행동 안에서 단일하신지에 대해 그분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길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성경의 서술은 우리에게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본을 제공하며, 우리가 그분을 묘사하는 표준이 된다. 우리는 성경이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으며, 성경에서 말하듯이 그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겁낼 필요도 없다. 우리의 신학은 성경이 서술하는 모든 영역을 받아들여야 하며, 삼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어떠한 분이심을 가장 잘 말하고 있는 풍성한 성경의 표현을 우리에게서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는 여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케리 로비쇼우 (Kerry S. Robichaux)

 

영문 : https://www.affcrit.com/pdfs/1996/01/96_01_sc.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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