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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구원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下)

 

2.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속죄의 언약> 비판 재 반박


앞의 <서론 글-신화(Deification)>에 이어 이제 원세호님의 구체적인 구원론 비판들에 대해 항목별로 재 반박하겠다. 먼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은 원세호님은 같은 내용들을 항목만 달리해서 여기 저기에서 중복해서 언급함으로 이에 대한 반박 역시 중복되는 면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내용은 어느 한 곳에 중점적으로 반박하고 그 후의 <중복된 비판>에 대해서는 간략히 다룬 후 앞글을 참고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러한 <중복 비판> 외에도 원세호님의 비판 글은 <반대를 위한 반대>, <본문비판과 무관한 자기주장의 전개>, <불필요한 헬라어 문법 제시>, <비판 취지와 관계없는 장황한 성경인용>,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없는 짧은 본문 인용>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글쓰기는 독자들이 원세호님의 비판대상인 원 저자의 취지를 파악치 못하게 하고 있다. 또한 원세호님이 비판 글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원세호님의 말 중 상당부분이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 된 정보만 전달하고 있다. 또한 원세호님은 자신의 좁은 견해를 토대로 상대방의 말은 너무 가볍게 <거짓말>로 단정하는 경솔함을 보이고 있다. 이런 특징들은 원세호님의 구원론 글 전반에 걸쳐서 발견된다. 이제 각 항목별로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구속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었다. 만일 예정이었으면 범죄도 예정일 것이 아닌가? 이러한 예정은 없다'라고 주장하여 성경의 예정을 부인한다...따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계에서 이미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주권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 그러므로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이다.>


** 반박: 워치만 니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 <워치만 니 주장: ① "또한 구속의 사실도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시다. 이는 구속이 긴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직 구속이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일 구속이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사람은 죄를 반드시 범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예정은 없었다>"(15.(교회) p.10).


위 글에서 보듯이 워치만 니는 성경이 말하는 <예정> 자체를 부인한 적이 없다. 단지 '무엇을 예정했는가' 하는 <예정의 대상> 이해에 대해 원세호님과 다를 뿐이다. 즉 엡1:5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셨다. 또한 롬8:29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실 것>을 예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정 된 것은 <하나님의 '휘오데시아'(아들의 명분)(갈4:5)가 되는 것>,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이다. 위 두 구절은 우리에게 <구속>이 예정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구속>을 예정하고 <인간의 범죄>를 예정했다는 기록이 있으면 원세호님은 성경근거를 제시해 보기 바란다.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없고 사람 구원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 잡은 자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15. p.14 ; 워치만 니)...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셨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한 사람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구원하시고 땅을 다스리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 이유는 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다스리고 계시는데 땅을 다스릴 사람이 필요치 않고 인간들이 이미 치리권을 받아 다스리고 있다(창1:27-28).>


** 반박: 원세호님은 자신의 비판 글에서 아래 워치만 니 본문 처음에 나오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라는 말을 삭제시켰다. 그러다 보니 원세호님이 제시한 문맥은 마치 워치만 니가 <사람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왜곡되었다. 그러나 워치만 니 글의 원래 문맥은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은 다만 사람을 구원하는데 있지 않고, 더 나아가서 피조물인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즉 원문은 'not only...but also' 의미의 문장임에도 원세호님은 이것을 'not...but'구문으로 왜곡시켜 놓고 비판을 하고 있다.


원세호님 주장대로 이 땅을 '인간들이 이미 치리권을 받아 다스리고 있다(창1:27-28)'면 왕국이 이 땅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왜 지금도 원세호님을 포함한 수다한 개신교인들은 '나라(왕국)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는가? 이미 이뤄진 일을 또 이루라고 기도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원세호님은 지금 '땅을 다스리는 진리'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 <워치만 니 주장: ②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권위를 행사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가운데 권세 잡은 자를 필요로 하셨다">(15(교회). p.14,하).


3) <원세호님의 비판: ③ 인간은 하나님의 필요는 생각지 못하고 개인 구원과 같은 사람 좋은 것만 생각한다는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을 때(롬3:23)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의 은총이었다(요3;16). 그런데 사람이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롬5:12; 롬5:8,19) 구원하셨으며 피조물인 인간들의 구원은 단체가 대상이 아니라 개인이다(요3:16 ; 누구든지). 그러므로 '워치만 니'는 하나님의 생각을 극진히 하는 듯하면서 성경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지 못한다>는 말을 반박하려면, 인간이 늘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한다는 논리를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과 함께 펼쳐야 옳은 것 아닌가? 그럼에도 원세호님은 이와 전혀 무관한 성경본문들을 장황하게 인용했다. 그리고는 워치만 니가 성경을 부인한다는 경솔한 단정을 하고 있다.


창세기 6:5는 '여호와께서 사람의....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한다. 이사야 55:9에서도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라고 하신다. 신약인 마16:23에서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꾸짖으셨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마라'고 권했다(골3:2). 만일 이들이 원세호님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필요만을 생각하고 자신들 좋은 것 생각하기를 거절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런 권면은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골로새서 3:2의 권면이 필요한 생활을 살고 있는지는 원세호님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성경을 부인하고 있는 것인가?


4) <원세호님의 비판: ④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복음전파와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사탄을 손해주어 이 땅을 탈환하는 것이며 만일 못한다면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라는 내용이 '워치만 니'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 땅은 인간 피조물들에게 주셨다(창1:28-30). 그리고 언제 땅의 통치권을 빼앗긴 일이 없다.>


** 반박: 이 땅의 통치권 문제는 앞의 2) 에서 이미 다뤘다. 성경에서 땅이라고 할 때 그것이 흙먼지 날리는 진짜 땅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원세호님은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나라(왕국) 임금은 사탄 마귀이다(요12:31, 엡2:2). 그는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음에도 아직은 온 세상이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요일5:19). 계11:15는 이 <세상의 왕국>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야 비로소 온전히 <그분의 왕국>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성경기록들과 인간이 이미 땅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원세호님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참인지 다시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5) <원세호님의 비판: ⑤ '워치만 니'의 24. p.12, 6-14줄의 주장은 순서가 문제이다. 예수님은 2000여 년 전에 이 땅에 육체로 오셨고 조건부적으로 모든 피조물 인간을 위하여 정죄 당하며 대신 심판을 받고 부활하셨다. 특히 죽음이 전 인류의 영, 혼, 몸을 침투하고 통과했으므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 되었다. 그 이유는 영과 몸 즉 영혼에 죄가 들어 온 것이며(롬5:12) 영, 혼, 몸에 침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요한복음 3:16절대로 믿음으로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을 얻어지는 것이지 따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이다.>


** 반박: 워치만 니의 원문을 소개하고 반박해 보자.


<워치만 니 주장: ⑤ "죽음이 전 인류의 영과 혼과 몸을 침투했다. 사람의 어느 부분도 죽음이 통과하지 않은 곳이 없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구원의 길은 인간 개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개조나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죄는 죽음으로부터 구조가 있기 전에 정죄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24.(영에 속한 사람1) p.92).


위 워치만 니 주장은 매우 성경적이다. 원세호님이 위에서 인용한 롬5:12의 바로 뒤 내용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즉 롬5:12 후반부는 타락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말하고 있다. <죽음이 전 인류의 영과 혼과 몸을 침투했다. 사람의 어느 부분도 죽음이 통과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워치만 니의 말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한 죄와 사망의 오염이 인간의 일부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 미쳤다는 말이다. 주님도 눅 9:60에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고 하심으로 거듭나기 전의 불신자들은 하나님 눈에 죄인일 뿐 아니라 죽은 자이기도 함을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죄인일 뿐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구원의 길이 개조나 수리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라는 워치만 니의 주장은 성경적이다. 이것을 문제 삼는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의심스러울 뿐이다. 또한 <요한복음 3:16절대로 믿음으로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을 얻어지는 것이지 따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이다> 라는 원세호님의 주장은 위 문맥과 동떨어진 말이다. 믿음으로 영생 얻는 것은 무엇이고 따로 생명 얻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런 말이 워치만 니 본문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


6) <원세호님의 비판: ⑥ 구속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짓이다. 이 주장은 성경 롬8:29; 엡1:4-6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태초, 천지창조 태초(창1:1) 이전 영원 영계에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성경은 계시한다.> <⑦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는 구속이 없다. 결코 구속은 예정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한다>


** 반박: 이 점은 이미 1)번 글에서 충분히 반박했다. 원세호님은 무엇이 예정된 것인가 하는 예정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다. 원세호님은 이런 동일한 내용들은 하나로 묶어서 한꺼번에 다뤘어야 했다.


7) <원세호님의 비판: ⑧ '구속이라는 것은 창조 가운데 얻지 못한 것을 회복하는 것이며, 구속은 창조목적의 수단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과 같이 구속이 회복인가? 거짓된 정의이다. 구속이란...속전을 받고 놓아주다, 속전을 받고 해방 시켜주다, 해방, 구속, 놓아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구속은 예수님이 대신 값을 성부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은 죄 사함을 받음이다. 회복이 아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 반박: 역시 워치만 니 본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자.


<워치만 니 주장: ⑧ "구속의 지위는 창조보다 더 높을 수 없다. 무엇을 구속이라고 하는가?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서 얻지 못하신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은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우리에게 준 것이다.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신다. 구속은 화목하게 하고 회복시키는 것이지만 창조는 뜻을 세우고 정하신 것이다. 구속은 일보 후퇴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창조를 소홀히 하지 않고 구속을 모든 것으로 여기지 않기 원한다">(13. (거룩하고 흠이 없어라) p.23, p.24).


원세호님은 워치만 니 글 본문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오직 부정적인 비판에만 마음을 쏟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구속'을 설명하는 문장에서 '회복'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따로 떼어내어 억지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원세호님은 <...이들의 주장과 같이 구속이 회복인가? 거짓된 정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 워치만 니 글 어디에도 <구속을 단지 회복>이라고 말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했다는 가정을 전제한 원세호님의 비판은 의미가 없다. 지방교회 측은 성경상의 구속(redemption)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741)


8) <원세호님의 비판: ⑨ 타락 때문에 구속이 필요하나 하나님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구속은 회복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회복이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상태로 바로잡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담이 타락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 되었다. 그 이유는 모든 성도들은 에덴동산(땅에 있는)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사함을 받고(회복이 아님) 영생하기 때문이다(골1:14; 요3:16). 회복이란 말 자체가 성경에 없다. 구속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회복의 수단도 아니다....지방파는 성경에도 없는 '회복'을 사용하여 뜻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 반박: 본문을 인용하고 재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⑨ "타락 때문에 사람에게는 구속이 필요하다. 그러나 구속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구속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다. 구속은 단지 하나님의 회복의 과정이다. 구속은 타락한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5.(사람의 영) p.45).


위 원세호님의 짧은 인용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당신이 구속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에게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구속받은 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두신다. ...구속은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최종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는 것이다. 그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넣는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엄밀히 말해서 거듭남은 우리의 타락과 아무 관계가 없다. 구속은 우리의 타락을 해결하지만 거듭남은 하나님의 목적을 해결한다".


위 단락의 소제목이 <거듭남과 하나님의 목적>임으로 위 문맥의 주제는 거듭남과 구속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이다. 그럼에도 원세호님은 이런 문맥과 전혀 무관한 '회복'이란 단어 하나만을 트집잡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엔 원세호님이 비판하는 '아담이 타락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란 언급이 전혀 없다. 이처럼 본문에도 없는 것을 가정하여 비판하고, 문장 중 한 특정 단어를 떼어내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원세호님은 <회복이란 말 자체가 성경에 없다>라고 단정하고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행3:21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은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원세호님은 성급한 단정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연구와 충실한 자료 조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3.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은혜의 언약> 비판 재 반박


원세호님은 <속죄언약>과 <은혜언약>을 자신의 비판 글 제목으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 두 개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http://my.netian.com/~shinogil/study/studyb10.html). 그러나 그는 각기 다른 제목을 단 것이 무색해지도록 동일한 주제를 이곳 저곳에서 중복해서 다루고 있다. 원세호님의 비판 내용도 앞글에서 다룬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같은 내용들은 한 곳에 묶어서 한꺼번에 다뤄주었어야 좋았을 뻔했다.


아마도 여기 저기 산재한 자료들을 여러 사람이 발췌하여 자신의 교리 틀에 억지로 꿰어 맞추어 비판하려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원세호님은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책 2-4 권씩을 나눠주고 그들이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발췌하게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발췌된 내용들만을 토대로 이런 비판 글을 쓴 것 같다. 이처럼 원문의 전체 문맥을 고려치 않고 편견을 가지고 떼어낸 극히 일부 문장을 토대로 비판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변증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충분한 연구 검토를 거쳐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권면하고 바로 잡아야 할 소위 이단감별사의 기본적인 사명을 저버린 처사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구속과 생명을 얻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속을 성취하였지만 구속과 관계없는 생명 얻는 일을 위하여 자신을 나눠주시는 일'이라 주장한다. 위의 주장은 크게 잘못되었다...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으심으로 조건부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을 받고(골1:14) 의로 인하여...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도록 허락되었다. 이미 구속은 죄에서 해방되고 생명 곧 영생을 얻는 것이지 다시 생명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크게 잘못된 주장이다>.


** 반박: 워치만 니의 원문을 인용 소개하고 반박하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① "구속과 생명을 얻는 것과는 두 개의 명확히 구별되는 사실이다. 구속이란 우리의 죄를 처리하는 소극적인 면이다. 우리는 범죄 했으며 죽어야 마땅하다...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셨다,...그러나 구속과는 관련이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독특한 면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하여 생명을 얻어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자신을 나눠주시는 일이다">(15.(교회) p.50).


독자들은 언뜻 보면 무엇이 쟁점인지 모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워치만 니 주장은 <구속과 생명을 얻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세호님은 <구속은 죄에서 해방되고 생명 곧 영생도 얻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세호님이 구속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다. 즉 구속에 대한 진리인식이 선명하지 못함으로 원세호님은 본의 아니게 거짓주장을 하고 있다.


엡 1:7은 <구속 곧 죄 사함>이라고 함으로 구속과 죄 사함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죄 사함이 곧 생명의 영접은 아니다. 이러한 죄 사함과 생명의 영접인 거듭남의 차이에 대해서는 앞의 서론 글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다. 참고로 일부를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죄 사함은 '예수의 피'로 인한 것이나 거듭남은 '생명 되신 예수님 자신'으로 인한 것이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나 거듭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 구속 주 사이에 '사람 밖'에서 이뤄진 사건인 반면, 거듭남은 그 구속주가 부활 후 '사람 안'에 직접 들어오심으로 체험된다. 예표 상 죄 사함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이뤄졌으나, 거듭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에서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 체험된다. 로마서 5:10은 '(피로)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라 '고 말함으로 피로 인한 죄 사함과 화목을 생명으로 인한 구원과 구분하여 말한다...이처럼 죄 사함과 거듭남은 각기 다르다."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는 죄를 처리하고 물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게 한다.'하며 이것이 주님의 옆구리가 주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어이없는 주장이라 사료된다.>


** 반박: 먼저 위 내용의 출처인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의도>로 선별된 사건들만의 기록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요20:30-31). 그러므로 요한복음 내용 중 베다니 촌의 나사로의 부활 같은 기적적인 사건 뿐 아니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사례들조차도 그것이 실제 사실임을 믿음과 동시에 그 영적인 의미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다음 인용설명을 읽어보기 바란다. 결코 어이없는 주장이 아니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788).


<워치만 니 주장: ②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눠주시는 일을 상징하는 물을 쏟으셨다는 사실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계시해 준다. 그런데 후자의 문제는 죄와 구속과는 상관이 없는 사건이다. 피는 우리 죄를 처리하고 있는가 하면 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주님의 상하신 옆구리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내용이다">(15.(교회) p.51).


3) <원세호님의 비판: ③ 로마서6:3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죽음과 부활을 그와 함께 하는 것이며,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인 것이다(롬6:6). 또한 십자가가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없으며 십자가는 죄의 몸이 멸함 받는 것을 의미한다(롬6:6).>


** 반박: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다만 그분의 죽음만이 아닌 우리를 포함한 죽음이다(롬6:6). 우리는 이러한 함께 죽음의 사실을 롬6:3이 말하는 침례를 통해 믿음으로 체험하고 또 증거 한다. 그러므로 <침례>는 다만 형식적인 의식만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침례를 통해 아담의 영역 안에서 태어난 우리가 또 다른 영역인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다. 다음 내용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808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809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326 (갈3:27)


<워치만 니 주장: ③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롬6:3),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죽음과 부활을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다">(22(정상적인 교회생활) p.11).


4) <원세호님의 비판: ④ 한 사람을 구원의 단위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에 반대되며 하나님의 정하신 길은 개인들만이 아니라 가정을 얻는 것이며, 노아의 8식구 구원이 증거인 것으로 주장한다. 위의 주장은 그럴 듯 하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그 이유는 요 3장16절이 '누구든지' 믿으면 영생을 얻도록 약속되었다. 더욱이 사도행전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희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하셨는데, 이곳에 가로되는 3인칭 복수로 바울이 여러 말을 했으나 '주 예수를 믿으라 에서 '믿으라'가 단수이며, '네 집'도 단수이고 구원받는 것도 단수이다. 이 교훈은 구원받을 집은 모두 주 예수를 각각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행16:31). 히브리서 11장7절에 '믿음으로' 에서 노아는 '믿음으로'가 단수이며 개인적임을 나타내고 노아의 가정의 8식구도 같은 믿음으로 구원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구원은 개인적인 증거가 많다(막5:34; 10:52; 눅3:6; 7:5; 8:48; 롬11:14; 고전1:21; 딛3:5; 히7:25). 집단 가족 구원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아니다. 가족은 조직이며 조직은 개인이 단위이며 개개인의 신앙대로 구원되어서 그것이 가족이든 개인이든 믿음으로 구원된다. 지방파의 거짓된 주장은 또 다른 계획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반박: 원세호님은 <가로되는 3인칭 복수로 바울이 여러 말을 했으나 '주 예수를 믿으라 에서 '믿으라'가 단수이며, '네 집'도 단수이고 구원받는 것도 단수이다.> 라는 말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헬라어 단수 복수를 따진다. 원세호님은 이러한 도움이 안 되는 헬라어 문법 설명이 논점을 흐려놓아 더 혼잡케 하는 면은 없는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는 가족 중 한 사람이 구원받는 바로 그 순간에 다른 불신 가족들도 덩달아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가정 단위의 믿음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더 유익함으로, 복음전파 시 가족 중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온 가족을 구원받도록 하라는 권면의 말을 하는 것이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희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의 말씀을 평이하게 읽고 믿고 또 이를 근거로 온 가족이 구원받도록 간구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 말이 어떻게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거짓된 주장인가? 원세호님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비판을 자제하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④ "한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의 단위로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된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은 개인들만이 아니라 가정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그 분의 구원의 단위를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홍수로부터 단지 노아와 그의 아내만 구원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또한 그들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구원하셨다"(창7:7)>(17.(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p.94).


5) <원세호님의 비판: ⑤ 사죄의 은혜(칭의)는 주님의 보혈로부터 오며 구원의 은혜(성화)는 주님의 십자가로부터...용서는 보혈로부터 오고 십자가에 오지 않는다는 진리의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크게 잘못된 주장이다. 그 이유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형틀이며... 십자가의 도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용으로 한다. 보혈의 구속적인 역사를 십자가로 예표하신 것이다(고전1:18 ; 십자가의 도).


...위의 교훈에 의하면 십자가와 관련된 의미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포함한 십자가의 죽음인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눌 수 없다. 십자가의 사역은 보혈의 사역과 구별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피는 (은혜)칭의, 십자가는 성화와 관련된 것이라 구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 마16:24; 눅9:23; 14:27등은 또 다른 의미로 고난을 상징하며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바에야 못 숫자도 말하고 명패도 말하고 피가 몇 방울인지도 말해야 할 것 아닌가? 십자가는 형틀이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포함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는 십자가를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위에서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 핵심주장은 <십자가의 사역은 보혈의 사역과 구별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이런 주장이 옳은 것도 같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워치만 니의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비판에 불과하다.


왜 그런가? 워치만 니는 본문에서 로마서는 5장 11절까지는 복수의 <죄들>(sins)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해결되었음을 전제한다. 그런 다음 롬5:12-8장까지는 복수의 죄들이 아니라 단수의 죄(sin)가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한 다음 이 단수의 죄 문제는 보혈이 아니라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마16:24)으로만 해결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654).


물론 보혈이나 십자가나 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는 '보혈(예수의 피)을 힘 입으라' 하고(히10:19) 또 다른 곳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권면한다(마16:24). 전자는 밖으로 표출된 <죄들>을 해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죄들을 짓게 하는 우리 안에 내주 하는 <죄>와 하나된 옛 존재 자체를 처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786). 영적인 성숙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안다. 죄와 죄들의 차이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워치만 니 주장: ⑤ "또 (로마서) 5장12절에서 8장까지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말했을 뿐 보혈은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죄의 은혜(칭의)는 주님의 보혈로부터 오고 구원의 은혜(성화)는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구원은 보혈에서 오지 않고 십자가에서 오며 용서는 십자가에서 오지 않고 보혈로부터 온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고 암송하고 묵상한 때에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계속 연구하여 나갈 때 이러한 진리의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26.(산제물), 생명의 말씀사 p.89-90).


6) <원세호님의 비판: ⑥ 많은 경우에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반드시 다 하나님의 일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창1:26-28절에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었으며... 단4:12; 5:21; 요17:2; 사40:10; 시89:9; 대하20:6 등에 만군의 여호와가 통치하시고 만물 다스리는 통치권을 이미 주셨는데 무슨 통치권을 차지한다는 것인가?>


** 반박: 땅에 대한 통치권 문제는 <속죄언약> 이란 제목 아래서 이미 다뤘다. 원세호님은 왜 이처럼 같은 내용을 여기 저기에서 중복해서 다루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 자신은 영원토록 만물을 통치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사람이 지금 이 땅을 통치하고 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워치만 니가 의미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통치권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의 의미는 로마서 8:19-23의 말씀의 성취와 관련된다. 이런 일이 지금 성취되었는가?


7) <원세호님의 비판: ⑦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것을 스테반 집사가 보았으며, 그 분이 신성뿐이면 (우리를) 동정하실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기에 지방파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로 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스테반이 본 것은 성령 강림이후이기 때문에 지방파의 주장은 자체 모순이 된다. 그리고 3.1하나님 사상은 보좌 우편에 계실 수 없다. 지방파의 주장은 거짓이다.>


** 반박: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알지 못하면 여기서 원세호님이 보여 주는 것처럼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고 만다. 삼위를 각각 분리된 세 사람처럼 생각하는 원세호님의 삼신론에 의하면 아들 하나님은 부활 승천 후 저 하늘 보좌에만 계신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성도들 안에는 절대로 아들 자신은 계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원세호님은 자신 안에 생명 되신 아들하나님 자신이 계신다고 절대로 고백할 수가 없다(요일5:12).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하시려는 구원의 역사가 잘못된 교리체계로 인해 막혀버린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원세호님 뿐 아니라 최삼경 목사, 차영배 교수 등 한국 교계 내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변증 글에서도 관찰된다.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로서 하늘 보좌 위에 계신다(행7:56).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에도 생명으로 계신다(골1:27). 둘 다 성경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둘 다 믿고 아멘해야 한다. 또한 특정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어느 한 쪽의 성경 말씀을 무시하거나 부인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바울은 특히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방면의 진리가 비밀이라고 말한다. 즉 이러한 진리는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한다(골1:26). 지방교회의 가르침이 모순된 것이 아니다. 원세호님의 교리적인 수건이 문제이다. 주님이 원세호님에게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주시기를 바란다.


8) <원세호님의 주장: ⑧ '침례는 구원과 관계 있으며 거듭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 침례는 죄 사함 받게 하고 성령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한다고' 주장한다. 세례는 구원하시는 '표' 곧 (안티튀폰 ; 단수)이며 형상과 같은, 일치하는, 상응하는 유사한, 표현 등의 의미이다. 그리고 '더러운'은 (뤼포스 ; 단수)로서 더러운, 도덕적으로 부패함, 부도덕, 오물이라는 뜻으로 죄와 관계되어 있으며, '제하는'것은 벗어 던지다, 집어치우다 인(아포티테미)에서 유래한 (아포데시스)로서 따로 놓음, 벗어남을 의미한다. 다시 요약하면 육체의 도덕적 부패함인 죄를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니므로 세례는 죄사하는 능력이나 거듭나는 표가 아니다. 세례는 행위이며 예수님이 세우신 율례나 자유케하는 율법에 속한다(약2;12). 죄 사함과 관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워치만 니'의 주장은 큰 거짓 말이다.>


** 반박: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원세호님의 장황한 헬라어 관련 언급은 별 도움이 못되고 있다. 이 침례관련 반박은 원세호님이 뒤에서 별도 항목으로 다루고 있음으로 그곳에서 하도록 하겠다. 단지 여기서는 구원의 개념이 매우 포괄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워치만 니가 주장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관련 성경 구절만 인용 소개하고자 한다. 이처럼 동일 주제를 여기 저기 흩어놓고 중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독자들을 배려한 조치가 아니다. 연륜 있는 신학자의 글쓰기 태도는 더욱 아니다. 아래 워치만 니 주장은 다음 성경 구절들에 근거한다.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420


행2:38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326


<워치만니 주장: ⑧ "침례는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 총 결론으로서 구원과 극히 큰 관계가 있으며 사람이 거듭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 침례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한다">(4.(50 필수과정 1) p.98,13-16줄).

 


4.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구원의 대상 선택과 소명> 비판 재반박


원세호님은 위와 같이 거창한 제목을 달아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그 비판 대상이 된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1권 단 한 권뿐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원세호님은 이 책 중에서도 단 세 쪽(p 8, 10-11)의 본문 중 일부를 떼어 내어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저자의 의도는 무시된 채 자신이 미리 기획한 틀에 맞는 내용만을 떼어내어 함부로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또한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전달함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양심에 거리끼는 불의한 일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처럼 원세호님에 의해 왜곡된 자료보다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워치만 니의 <그리스도인의 50 필수 과정 시리즈>를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은 총 5권이 한 세트로서 워치만 니가 새 신자 양육교재로 집필한 것이다. 즉 성경에서 새 신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기본진리 50 가지를 추출하여 깊이가 있으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50 가지 진리 항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침례 2) 과거를 끝냄 3) 헌신 4) 입으로 시인함 5) 세상과의 분별 6) 교회에 가입함 7) 안수 8) 차별을 없이함 9) 성경 읽기 10) 기도 (이상 제 1권) 11) 일찍 일어나기 12) 집회 13) 각종 집회 14) 주일 15) 찬송 16) 찬미 17) 떡을 뗌 18) 간증 19) 사람을 주께로 인도함 20) 온 집이 구원받음 (이상 제 2권)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22) 사죄와 배상 23) 용서함과 회복함 24) 믿는 이의 반응 25) 해방 26) 우리의 생명 27) 하나님의 뜻을 구함 28) 재물을 다루는 방법 29) 직업 30) 혼인(결혼) (이상 제 3권) 31) 배우자 선택 32) 부부 33) 부모 34) 친구 35) 오락 36) 말 37) 의복과 음식 38) 금욕주의 39) 질병 40) 행정적인 사하심 (이상 제 4권) 41) 하나님의 징계 42) 성령의 통제 43) 마귀를 대적함 44) 머리를 덮는 문제 45) 교회의 길 46) 합일 47) 형제를 사랑함 48) 제사장 직분 49) 그리스도의 몸 50) 교회의 권위(이상 제 5권)(http://mall.kgbr.co.kr/) 이제 각 비판 항목들에 대해 재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지방파는 구원의 대상은 세상이며 구원이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세상에 속해 있는 자는 멸망한 사람이라고 한다(36(50필수과정 1권. p.8)....그런데 구원받는 것이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성도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 하였고(마5:13,14), 세상은 주님이 죄 사하는 곳이며(마9:6), ...심판이 세상에 임하게 된다(눅21:26)...세상의 행사는 악하며(요7:7), ...주님이 심판하러 세상에 오셨다(요9:39).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으며(요11:27), 세상 심판으로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요12:31)...이 세상엔 임금이 있다(요14:30). 세상은 성령님의 책망을 받으며(요16:8), 이 세상 임금은 심판을 받고(요16:11), 주님은 세상을 이기셨다(요16:33).... 성도는 세상에 있으나(요17:11),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다(요17:14,16).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가 속한 곳이 아니며(요18:36),...심판 아래 있다(롬3:19)... 세상에는 죄가 들어왔다(롬5:12)... 세상에는 더러운 것들이 있다.(고전4:13), 세상에는 음행자들과 사귈 수밖에 없기도 하며(고전5:10), 세상은 성도의 판단 대상이다(고전6:2). 세상 신이 있는 곳이고(고후4:4),... 세상 풍속도 있으며(엡2:2),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가 존재하지만(엡6:12), ...범죄로 세상과 벗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4:4). 세상은...정욕을 인하여 썩어져 감이 있는 곳이며(벧후1:4), 심판을 받은 세상(벧후2:5)이고, 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세상이다(1요4:3)....미혹자가 많이 나오는 세상이나(Ⅱ요1:7), 세상 나라는 주의 나라가 됨이다(계11:15). 위의 모든 성경구절은 '세상'과 관계된 성경 전체 (신약)이다.


어느 곳에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이라 한 곳이 있는가? 한 곳도 없다. 세상은 성도가 살아야 할 곳이다. 구원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다. 구원의 대상은 인간인 성도 자신들인 것이다(요3:16).>


** 반박: 원세호님은 위 글에서 마치 워치만 니가 일반적인 구원의 의미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 그러나 원래 본문(위 책7-26쪽)은 침례를 설명하는 단락이다. 따라서 위 본문은 <일반적인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침례를 통해 얻어지는 구원의 방면>을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워치만 니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한 마가복음 16:16을 제시하고 있다. 흠정역도 'He that believeth and is baptized, shall be saved'라고 말함으로 믿고 침례 받은 사람이 구원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성경 근거가 한 곳도 없다는 원세호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원세호님이 자신의 문하생들이 뽑아준 대목만이 아니라 원래 책자 본문을 한 번 만 제대로 읽고 비판했어도 이런 거짓된 단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도행전 2:40-41 도 베드로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고 전하자 이 말을 받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말함으로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원세호님이 세상의 핵심 구성요소가 불신자인 사람들임을 알았다면, 구원의 대상이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모순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워치만 니'는 '구원 얻는 것과 영생 얻는 것은 구별이 있고 구원이 개인적이며 영생을 얻는 문제일 뿐 아니라 잘못된 무리에서 구원받는 문제이다' 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잘못된 무리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구원은 요3:16; 엡2:8-9절과 같이 개인적일 뿐이며, 인간 중심의 사망과 고난, 인생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영적인 구원은 영생과 관계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잘못된 무리에서 구원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특히 명심할 것은 구원은 건져냄을 중심한 개념이고, 영생은 생명과 관계된 것으로 서로 개념이 다르지만 구원과 영생은 영적인 경우 원인과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영생이 인간이 하나님 되는 조건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오직 피조뿐이기 때문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위에서 뒤죽박죽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 증거를 세 가지로 제시해 보겠다. 첫째, 워치만 니는 구원과 영생에 구별이 있다고 했는데 원세호님은 이것이 잘못된 주장이라고 했다가 뒤에서는 구원과 영생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함으로 워치만 니의 두 개념 사이의 구별 주장을 따라가고 있다. 왜 원세호님은 이처럼 경솔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없다. 둘째, 워치만 니는 위 막16:16, 행2:40-41 등을 근거로 구원이 영생 얻는 것과 잘못된 무리들(즉 불신 세상)에서 구원받는 것 둘 다를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원세호님은 아무런 근거제시도 없이 후반부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2:40은 우리가 하나님 없는 패역한 사람들(의 조직)으로 부터 구원받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953). 셋째, 워치만 니 본문 어디에도 영생이 하나님이 되는 조건이라는 말이 없다. 없는 말을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다.


<워치만 니 주장: ② "우리 가운데서 구원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으나 흔히 남용되고 있다. 여러분은 구원 얻는 것과 영생을 얻는 것에는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생을 얻은 것은 개인적인 일이지만 구원을 얻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생을 얻는 문제일 뿐 아니라 또한 잘못된 무리에서 구원받는 문제이다...">(위 책, p10)


3) <원세호님의 비판: ③ 구원을 얻는 것은 한 무리에서 나와 다른 무리로 들어가는 것이고 영생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말하고 구원 영역은 영생 영역보다 넓고 세상에서 나오는 것을 포함한다고 '워치만 니'는 주장한다. 그러나 구원과 영생은 서로 말이 다르며 뜻이 다른 것이다. 영생은 생명의 연장적인 표현이며, 구원은 인생 문제의 불행한 모든 것과 멸망을 포함하여 건져냄을 받는 것을 의미하므로 다르며, 구원은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으면서 건져냄을 받고 최종적으로 부활과 변화를 포함하며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 반박: 위에서 원세호님의 비판 요지가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다. 관련 워치만 니 글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③ "구원 얻는 것은 한 무리에서 나와 다른 무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 것은 내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말하고 내가 어디에서 나오는 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 얻는 것은 나오는 것과 들어가는 것을 다 (포함한다)[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영역은 영생을 얻는 영역보다 더욱 넓은 것으로서 세상에서 벗어나고 세상에서 나오는 것을 포함한다">(위 책, p.10).


우선 원세호님은 매우 부주의하게 본문을 인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겠다. 즉 위에서 ( )부분은 본문에 있으나 누락시킨 것이고 [ ] 부분은 워치만 니 본문에는 없으나 원세호님과 문하생들이 추가시킨 것이다.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이런 일들이 단순한 실수이기를 바라겠다. 또한 워치만 니가 구원과 영생이 다르다 고 하자 <그러나>로 그 말을 받은 후 원세호님 역시 구원과 영생이 말과 뜻이 다르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즉 같은 취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무슨 비판 글인가? 또한 구원이 세상에 있으면서...건저냄을 받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워치만 니가 세상에서 벗어나고 나오는 것을 마치 속세를 떠나 산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나 워치만 니 역시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별된 생활을 말함으로 크게 볼 때 둘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④ 지방파의 주장인 세상의 네 가지 요소는 그러한 면이 있는 것이며 성경 근거가 요14:30; 요18:36; 엡6:12; 약4:4; 벧후2:5에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올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으니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곳이며(요3:16), 주님이 죄 사하는 곳이며(마9:6),...이러한 중요한 세상을 이미 형벌 받은 마귀 악령을 겁내서 나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완전히 마귀에게 빼앗긴 세상으로 잘못 선전하고 나올 필요도 없는 이 세상을 거짓으로써 미혹하니 '워치만 니'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성경이 말하는 '세상'(코스모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으므로 위와 같이 혼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원세호님은 1) 에서는 자신의 입으로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가 속한 곳이 아니며(요18:36), 심판 아래 있고(롬3:19), 세상에는 죄가 들어왔고(롬5:12), 세상에는 더러운 것들이 있고(고전4:13), 세상에는 음행자들과 사귈 수밖에 없고(고전5:10), 세상 신(고후4:4)과 세상 풍속(엡2:2),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가 존재하고(엡6:12), 범죄로 세상과 벗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약4:4). 세상은...정욕을 인하여 썩어져 감이 있는 곳이며(벧후1:4), 심판을 받은 세상(벧후2:5)이고, 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세상이고(1요4:3),.미혹자가 많이 나오는 세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곳인데 워치만 니가 거기서 나와야 한다고 했다며 크게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세호님은 우리가 주님나라가 속한 곳도 아니고, 심판 아래 있고, 죄가 있고, 더러운 것들이 있고, 음행자들과 사귈 수밖에 없고, 세상 신과 세상 풍습이 있고, 적 그리스도 영이 판치고 미혹자가 많이 나오는 그런 세상에서 나오지 말고 눌러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인가? 이처럼 세상과 벗된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데도 그리해야 하는가? 그렇지가 않다.


원세호님은 성경이 여러 방면으로 말하고 있는 <세상>을 어느 한 의미로만 일괄적으로 해석함으로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이다. 요 3:16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죄 있고 타락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런 방면의 세상은 사랑하신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430). 그러나 약 4:4, 요일2:15 등이 말하듯이 그것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세상은 요3:16의 세상과는 다른 의미이다. 즉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조직으로서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8257). 요일 5:19은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아래 워치만 니의 글은 이런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세호님은 자신의 목양 아래 있는 성도들이 이처럼 악한 자 사탄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세상에 푹 빠져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워치만 니처럼 거기서 나오기를 원하는가? 이처럼 목자 된 사람들이 진리의 어느 한 면만을 알고 다른 방면을 모를 때 순진한 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워치만 니 주장: ④ "성경 안에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큰 사실이 있다. 첫째로,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정죄되었다. 둘째로,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있다. 셋째로, 세상은 주 예수를 못박아 죽였다. 넷째로,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세상의 네 가지 큰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가 어떠하든 세상 안에 있는 사람인한 그는 멸망하고 정죄받은 사람이다">(위 책, p.10).


5) <원세호님의 비판: ⑤ 성경에서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 정죄된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미 연구한 바와 같이 세상이 정죄 된 것이 아니라 죄와 관계된 인간이 속한 세상이 정죄 되었다면 나올 필요가 없다.>


** 반박: 이 문제는 이미 바로 앞 4)에서 충분히 반박했다. 원세호님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 된 세상에서 나오라는 워치만 니 말을 반박하며 <세상에서 나올 필요 없다>고 고집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가르침이다. 이러한 원세호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여전히 세상 풍속과 어둠의 주관자들이 역사 하는 곳, 정욕을 인하여 썩어져 감이 있는 곳인 세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참된 구원과 침례를 체험하는 성도들은 골1:13에서 언급한 '흑암의 권세(세상)에서 건져냄을 받아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짐'을 체험한다.

 


5.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회개와 회심> 비판 재반박


원세호님이 제목으로 내세운 것과 그 아래 담겨 있는 내용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우선 아래 원세호님이 제기한 네 가지 비판 항목 중 그가 이 단락의 제목으로 단 <회개와 회심>과 관련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원세호님의 책이 신학 박사가 직접 쓴 것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엉성하고 학문적인 체계가 없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반박글을 쓸 때 어떤 항목은 원세호님의 논리적인 문제와 그로 인해 도출된 무책임한 결론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드러내는 정도만으로도 족할 것도 있는 것 같다. 이제 항목 별로 간략히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영과 혼과 몸이 유죄선고 받고 형벌을 치룬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형벌을 받지만 용서도 받는다(1요1:9-10). 그리고 혼은 죄가 따로 인정되지 않고 영혼의 형벌은 영과 육체의 죄와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되다.>


** 반박 : 워치만 니는 어디에서도 형벌만 받고 용서는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받을 심판을 그리스도가 받으셨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었음으로 그분이 받으신 심판은 곧 우리가 심판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사실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것을 부인하고 원세호님이 문맥과 무관한 '용서'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영혼과 몸이든 영과 혼과 몸이든 이곳 문맥과 무관하다. 여기서의 요점은 타락한 우리의 <온 존재가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간과한 채 자신의 2분설 주장을 무리하게 펼치는 것은 전체 문맥과 동떨어진다.


<워치만 니 주장: ① "무엇이든지 죄인들의 몸과 혼과 영에 떨어질 심판은 완전히 그리스도 위에 떨어졌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자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그와 연합된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며 그의 심판은 우리의 심판으로 간주된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형벌을 치룬 것이다...">(24.(영에 속한 사람1) p.101)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주님은 대속물로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고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생명체인 몸을 대속물로 바치신 것이지, 죽으시는 대속물과 사람을 위한 생명의 대속물이 서로 각각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은 마20:28; 막10:45에 증거 하시기를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라 하셨다.>


** 반박: 우선 이 내용은 위에서 원세호님이 제목으로 단 <회개와 회심>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 또한 원세호님은 비판 대상 본문 읽기에 심각한 문제를 보이고 있다. 주님이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신 것과 그것은 그분이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 라는 주장을 부인하면 원세호님은 지금 성경 본문을 부인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20:28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 목숨'(프쉬케)을 준다고 되어 있음에도 원세호님이 (생명체인) 몸만 대속물로 주셨다며 성경을 부인하면 안 된다. 또한 본문에 없는 말을 토대로 어떤 비판을 가하는 일도 옳지 않다. 성경 말씀 그대로를 말해도 '잘못되었다'며 부인하면 원세호님의 판단기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다.


3) <원세호님의 비판: ③ 성경이 보여주는 네 가지 기본적인 사실이 있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밭이며(마24:4; 13:38), 구원의 대상이며(요3:17), 하나님의 원수들이 있으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곳이 세상이다(요3:16; 12:47). 그리고 하나님께로 난 성도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곳이다(요16:33; 1요5:4). 주의 나라가 될 세상(계11:15; 1요4:14)이다. '워치만 니'는 하나님과 원수인 세상 네 가지만 기본 사실로 축소하여 거짓 말을 하고 있다.>


** 반박: 원세호님은 똑같은 말을 앞의 <구원의 대상 선택과 소명> 4)에서 이미 다뤘음에도 이곳에서 중복되게 다루고 있다. 더구나 앞에서는 '④ 지방파의 주장인 세상의 네 가지 요소는 그러한 면이 있는 것이며 성경 근거가 요14:30; 요18:36; 엡6:12; 약4:4; 벧후2:5에 있는 세상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더니 이곳에서는 돌연 태도가 바뀌어 '세상 네 가지만 기본 사실로 축소하여 거짓 말을 하고 있다.'고 상반되게 말하고 있다. 원세호님은 이처럼 자신의 주장을 상황에 따라 바꾸면 안될 것이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④ '동정으로 머무는 일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유리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된 고자도 처녀로 머무는 자도 있으며...그리스도도 천국에 들어가려고 스스로 고자가 되셨다' 라고 '워치만 니'가 주장한다. 주님이 하나님이신데 천국에 들어가려고 결혼 안 했다니 이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며...신성모독이다. 그리고 계14장의 십사만사천 인이 여자로 더럽히지 않고 정절을 지킨 것은 고자나 고녀인 처녀들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 창1:28절의 생육법을 성경대로 행한 자들로...이들은 6째 인봉을 뗀 후에 계7:1-17절에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인 들림 받은 성도들 전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워치만 니'의 주장은 창1:28절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것을 더럽히는 것으로 오해되도록 할 위험한 것이며 웃기는 거짓 주장이다.>


** 반박: 자세히 보면 워치만 니 본문은 <주님 자신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고 처녀로 머무는 사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원세호님은 이것을 <그리스도도 천국에 들어가려고 스스로 고자가 되셨다>고 말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신성모독 운운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원세호님은 이처럼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읽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누구 말이 옳은지 아래 워치만 니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기 바란다. 이런 사례는 원세호님이 얼마나 무성의하게 이 책자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또한 계 14 장의 처음 익은 열매 해석에 대한 이견은 이곳의 원 주제인 <회개와 회심>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9049).


<워치만 니 주장: ④ "동정으로 머무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유리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기에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고 처녀로 머무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뿐 아니라 계14장에 이를 때, 당신은 처음 익은 열매들(십사만 사천 인)이 다 동정으로 머문 사람들로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랐음을 볼 수 있다. 이 십 사만 사천은 특히 일찍이 들림 받은 사람들이다...바울은 동정으로 머무는 사람은 확실히 고난을 덜 받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한다">(34.(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3권) p.181).


5) <원세호님의 비판: ⑤ 생명 주는 영으로서 영 된 예수는 오 주 예수여! 할 때 즉시 사람 영에게 들어오신 다는 주장이다. 위의 주장이 크게 잘못된 것은 '생명 주는 영은 성령이고 성령은 부활 승천하신 보혜사 예수 영'이라는 것이다. 예수 영은 오순절에 다시 오셨다고 주장하므로 성령은 그 영이고 그 영은 생명 주는 그리스도 영이기 때문에 잘못 되었고, '오 주 예수여' 하고 부르면 즉시 들어온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 이유는 예수는 창조주로서 편재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신데, 사람이 하나님을 불러 부리는 짓을 하는 것은 성경의 근거가 없고 신성 모독적 행위이다.>


** 반박: 롬 10:13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이 말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려면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구원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의 구원은 당연히 마지막 아담이시나 부활 후 생명주는 영이 되신 주님자신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심을 포함한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을 부인하면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가 창조주이시고 편재하시는 분임으로 신성모독이 되어 그분을 부를 수도 없다는 말은 그럴듯하나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원세호님은 '창조주가 사람 안에 들어오시는 것은 사람이 그림을 그려놓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힘들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어디나 편재하시는 하나님을 구태어 사람 안에 영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구원론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세호님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 이전에 자신이 얻은 구원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자신>(요일5:12)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엄중한 진단이다. 생명이 없는 성도는 성경이 말하는 가라지에 해당된다(마13: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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