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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토론의 전제 - 바른판단 기준의 정립(2)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한국교계 신학계에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이단감별 현장이나 이런 인터넷 공간에서는 어거스틴 신학이 양태론이라는 결론을 낳는 식의 주장들이 눈에 뜨입니다(최O경 목사님 주장, 이O규님 등).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압축되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이 OOO 공간에서는 정통 삼위일체인가요, 아니면 양태론이고 어거스틴도 양태론 이단자인가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토론이 혼잡해 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사람의 마음을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의 유비와 관련하여 단일성과 삼위성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각 위격이 상호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심을 진술한다. "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시다. 각 휘포스타시스가 각기 신적 실체의 완전한 현시이다. 모든 신적 속성 각각이 세 휘포스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324-325쪽)


참고로 원문은 ..". “So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The Works of St. Augustine "On the Trinity", Book VI, p103).

 


출처: 초대 교부시대의 삼위일체에 대한 고찰
http://reformedchurch.com.ne.kr/study/seminar/trinity.htm

 

2) 어거스틴(Augustinus)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는 초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각 교부들과 또한 신조들에 있어서 결점들을 어거스틴이 완전히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이 지금까지의 전통 삼위일체론에서 나타난 삼위일체론의 결점을 어떻게 보완하면서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을 정립시켰는지를 우리는 확인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의 "De Trinitate"는 위와 같은 연구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의 가치를 갖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우선 "De Trinitate"자체를 각 단락 별로 나누어서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를 요약해서 분석해 보고 다음으로는 개혁파 학자들에 의해서 "De Trinitate"의 핵심들이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서론에서도 밝힌바도 있듯이 어떻게 접근하고 정리해야 가장 바르게 전통적인 입장에서 어거스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De Trinitate"는 전체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앞부분의 1-8권 1장 2절까지만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부분이 철저하게 성경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일체성과 삼위격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8권 2장 3절부터는 삼위일체에 대한 흔적에 대한 연구이기에 본 논문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50)


먼저 1권에서는 간단한 서론으로서 자신이 이 책을 집필하는 목적과 방식과 도입을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방식에 있어서는 일반 反삼위일체론자들이 공통적으로 일반 철학과 이성을 통해서 접근하는 것을 비평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서"51) 그 근거에 의해서 제시하려함을 e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성을 오용해서 삼위일체 신앙을 공격하는 궤변가들을 반박하려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목적이다. 그들의 오류에는 3중의 원인이 있다. 성경은 오류를 제거하면서 점진적으로 신적 사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진정한 불사는 무엇인가? 우리가 신적 사물을 이해하도록 신앙이 우리를 양육한다".52) 1권 서론에서는 특히 철학과 이성으로서의 접근 방식으로서 "육신을 따라 하나님을 논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사람의 영혼과 같은 정신적 피조물이라고 생가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물체나 정신적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피조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해서 변함 없는 실재, 즉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들은 이미 어거스틴에서 지적되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反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되고 있다.53)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이 글이 핵심적으로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substantia, essentia)이시라고 말하며 깨닫는 것"54)을 중점으로 분석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자기보다 앞선 초대 교부들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성경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의 통일을 이루며 나눌 수 없는 동등성을 이룬다는 것"에 있음을 알고 자신도 여전히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났으므로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에 불과하며 또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며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속한다"55)라고 주장하면서 철저하게 통일성의 기초 위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삼위의 통일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그 사역에 있어서도 모든 일을 하실 때 삼위일체가 분리되서 나타나지 않고 통일적으로 역사하심을 다음과 같이 중요한 표현을 제시하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존재가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역사에도 분리될 수 없다. 즉 외부와 관련해서도 분리될 수 없다".56) 이 표현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중요한 표현임을 계속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계속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성부뿐만 아니라, 삼위일체가 불사(不死)하신다. 만물이 성부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다"57)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이 동일성을 증거하게 될 때 과연 끊임없이 전통 교부들이 격어왔던 종속론에 대한 문제, 즉 성경에 성자 자신이 성부보다 작은 것처럼 되어 있는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되게 되는데 이것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해결하고 있다. "그는 종의 형체로나 하나님의 형체로나 하나님의 독생자이므로 하나님의 형체로는 성부와 동등하며 종의 형체로는 신인간의 중보인 인간 그리스도 예수 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체로는 자신보다 크시며, 종의 형체로는 자신보다 작으시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에 성자를 성부와 동등하시다고 하며 또 성부를 성자보다 크시다고 하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처음 말씀은 하나님의 형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 말씀은 인간의 형체에 관한 것이어서 조금도 혼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58). 이런 표현은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의 위치에 있기 때문임을 고려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제시하더라도 어거스틴은 즉시로 동일성에 대한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고전15:27, 빌3:20-21의 말씀을 빌어서 "성부의 역사와 성자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다, 또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시리라'고 할 때에도 성자는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므로, 자기를 제외하시는 것이 아니다"59)라고 밝히고 있으며 역시 성령에 대해서도 "성부와 성자 두 분의 영 즉 성령도 이 통일성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성령은 성부 및 성자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그만이 충족한 것이다"라고 동일성을 제시하고 있다.60)


다음으로 2-4권까지에서는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동등성이 계속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는 문제가 깊이 있게 제시되고 있다. 즉 보냄을 받는 이는 보냄을 받기 때문에 보내는 이보다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삼위일체는 모든 일에서 동등해서, 그 변함 없고 보이지 않고 모소부재한 본성도 동등하며 불가분적으로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동동성이 삼위일체의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끊임없이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기초로 할 때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삼위의 일체성과 각 위격의 구별성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좀 더 구체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위격의 구별이 없었는가, 또는 어는 한 위격이었는가? 아담에게 나타나심. 아브라함에게 보이심". 이런 표현은 끊임없이 일체의 통일성과 삼위의 위격의 구별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구약이나 신약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를 질문하고 있다. "즉 성부이셨는가, 성자셨는가, 또는 성령이셨는가? 혹은 그런 구별 없이 삼위일체 자신이 사람의 형체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인가?".61) 이런 문제를 어거스틴은 비록 각 위격의 구별된 특징으로 나타나셨을지라도 여전히 그곳에는 삼위일체의 역사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때에도 성자와 성령의 역사가 없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위격의 사역에 따라서 계시하는 방법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62) 결국 이런 형태가 아담에게서나 아브라함, 야곱, 모세등 모두 같은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통일적인 이해로서 어거스틴은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삼위일체가 하셨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의 위격을 계시했다고 해석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라고 까지 제시하고 있다.63)


3권에서는 2권에서의 내용을 더욱 자세하게 논증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나타나신 분은 성부만도 아니요, 성자만도 아니요, 성령만도 아니였으며, 실지로 나타나신 분은 주 하나님, 즉 위격을 구별하지 않고 부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셨거나 그렇지 않으며 어느 한 위격이셨는데, 어느 위격이신가 하는 것은 성경 기록에 비친 단서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64) 이런 결론은 앞에서 계속적으로 제시했던 것처럼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은 삼위의 한 하나님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격적 구별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위격적 구별은 각 문맥에 따라서 각 위격의 독특성과 강조를 잘 찾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특별히 3권에서는 2권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 즉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 아니면 기적을 통해서 또는 빗물질적인 형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서 더욱 깊이 다루어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모든 물체적 변화의 더 높은 원인임을 그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뜻대로 쓰시며, 자기를 나태기 위해서 보이는 것들을 스스로 만드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오직 그의 변함없는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시되 빗물체적인 것과 물체적인 것, 이성적인 영들과 비이성적인 영들, 그의 은혜로 선한 영들과 그들 자체의 뜻대로 사악한 영들등 이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65)라는 말씀을 통해서 형체 있는 존재의 모든 형태와 운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제일 원일이며 최고 원인임을 증거하고 있다. 더나가서는 선한 천사뿐만 아리 하나님이 의롭게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악한 천사들의 해로운 행동도 주관하신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어거스틴은 모든 원인의 가장 높고 가장 내면적인 중추적 원인으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하며 지배하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66).


결국 이런 방식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한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의 한계에 적응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끔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 안에는 확실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셨으며, 어떤 대에는 성부께서, 어떤 대에는 성자께서, 어떤 대에는 성령께서 계셨으며, 또 어떤 때에는 위격의 구별이 없이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의미하되, 눈에 보이며 감각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피조물로 나타나셔서, 눈으로 보며 귀로 듣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사역인 것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서 어거스틴은 "우리는 우리의 아주 작은 능력과 정도로 그 본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럴지라도 그 본질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으므로 또한 결코 볼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67)


4권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방식을 소개해 주고 있다. 특히 초반부에서는 인간의 죄악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또한 불의하고 교만한 자들을 정화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의로운 한 분의 피와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낮추시는 것이었다. 우리의 본성과 같이 되셔도 우리와 같은 죄는 없으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화되어, 우리와 본성이 다른 하나님을 우리가 뵈올 수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지적해 주고 있다.68) 이런 방식은 삼위일체의 구조 자체가 우리의 구원의 핵심과도 깊이 있게 연결되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하여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어떤 영향이 있게 되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는 이런 사역이 있을지라도 보내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가 동등함을 주장하면서도 성부는 신성 전체의 처음(principium)이 되심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만일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고 하는 뜻이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라며, 이런 표현 방법 때문에 우리가 성자와 성부는 동등하며, 본질이 같으며, 같이 영원하며, 그러나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고 믿지 못할리는 없다. 성부가 더 크고 성자가 더 작으시다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은 아버지요, 한 편은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즉 한 편은 낳은 분이시오, 한 편은 난 분이시며, 한 분은 파견되는 다른 분에게 존재를 주시며, 또 한 분은 파견하는 분에게서 존재를 받으셨기 때문이다"---성자가 파견되신 것은 권능이나 본질이나 그밖에 성부와 동등하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가 성부에게서 오시고, 성부가 성자에게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자는 성부의 말씀이며, 말씀은 또한 지혜라고 부른다.69) 또한 성령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성부가 낳으시고 성자가 나신 것 같이, 성부가 파견하시고 성자가 파견되셨다. 그러나 낳으신 분과 나신 분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 파견하신 분과 파견되신 분이 하나이시다. 그와 같이 성령은 두 분과 하나이시다. 세위격이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성자가 나신다는 것은 성부에게서 오신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파견되신다는 것은 성자의 경우에는 성부에게서 오신 것으로 알려지신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성령이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뜻이며, 파견되신다는 것은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것이 알려지신다는 뜻이다".70)


이처럼 2-4권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동일하시므로, 창조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삼위일체 신으로서 분리할 수 없이 일체로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부의 음성과 성자의 육신과 성령의 비둘기를 각기 한 위격에 돌리지만, 사실은 삼위일체 전체가 함께 지으시는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신은 분리됨 없는 하나이시지만, 보이는 피조물의 형태를 통해서 분리되어 계시될 수 있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기 특유하게 계시한다고 하는 이 모든 일도 그 하나한에서 삼위일체 신이 분리됨 없이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통일적 사역은 "이것은 내가 절대로 확신하는 주장이다"71)라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삼위일체의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알 수 있다.


5권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삼지 않고 자기들의 이성을 근거로 삼아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평한다. 어거스틴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본질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낳는것과 나는 것, 나는 것과 나지 않는 것이 다르므로, 그 본질이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이 모두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논증한다. 즉 하나님은 선하시다. 또는 위대하신다, 그밖에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이지만 , 어떤 것은 관계적으로 말함을 증거하고 있다. 즉 하나님 자신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주라고 부른다. 또는 하나님 자신이 아닌 것, 예컨대 시간에 관해서도 "주는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이나 본질적 존재에는 여전히 전연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상호 관계적으로 사용한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오직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성부라고 부르며, 따라서 아들도 오직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성자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이 명칭들은 본질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어느 이름도 그 자신에 관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상호 관계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이름들은 우연성에 관한 것도 아니며 성부라고 부르는 분이나 성자라고 부르는 분은 그 자신들이 영원하며 변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부이신 것과 성자이신 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라는 이름은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고 관계에 관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변하지 않으므로 우연적인 것이 아님을 확증하고 있다.72)


이런 구조를 통해서 여전히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으로서 분리되지 않으시면서 모든 역사에 함께 사역하시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표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은 거부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성부가 전능하시며, 성자가 전능하시며, 성령이 전능하시지만, 세 전능자가 아니라, 한 전능자이시라는 것", "하나님에 대해서 그 자신을 말하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 한분 한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삼위일체 자체에 대해서 한꺼번에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분 한 분에 대해서 단수로 말하고 복수로 말해서는 안된다"73)


또한 어느 한 분에 대해서 하는 말이 그 분 자신만을 말하는 것이 상호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피조물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증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실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하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는 위대하시고 선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 하나님은 그 자신의 신성과 그 자신의 위대성과 그 자신의 양선과 그 자신의 영원성과 그 자신의 전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같은 식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으며, 또한 삼위일체를 성자라고 부르는 것도 전연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에 따라서 삼위일체를 전체적으로 거룩한 영으로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성부가 영이시오, 성자가 영이시오, 성부가 거룩하시고 성자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거룩한 영, 즉 성령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삼위일체가 아니고 삼위일체 안에 계신 것으로 이해되는 성령에 대해서는 관계적, 상대적으로 그 고유명사로 성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74)


이런 이해가 전제될 때 근원(pricipium)이란 말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어거스틴은 증거하고 있다. 즉 성부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쓰며, 성부는 또 상대적으로 근원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성부는 전신성의 근원"75)이시라는 표현을 쓸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안에 상호 자신과 관계해서 성부라는 이름이 성자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성부라고 부르는 것처럼, 성부는 상대적으로 성자에 대해서 근원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과의 관계에서는 쉽게 성부가 그 근원이라고 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근원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근원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가 한 하나님이신 것처럼, 성령과의 관계해서 성부와 성자가 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속에서 제한적으로 상대적인 의미로 성부는 모든 것과의 관계해서 근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자도 상대적인 이름이고 그가 상대적으로 말씀과 형상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성부와 관계해서 성자가 근원이라고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성자가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피조세계와 관계해서 성자도 창조자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피조세계의 두 근원이라고 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성령도 창조주로서 그 근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성부, 성자, 성령은 피조세계에 대해서 한 창조주와 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한 근원이시라는 것이다.76) 결국 이런 중요한 구조로 인해서 김영규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외적사역으로서 창조와 섭리, 구원의 역사등이 삼위일체의 동시적 통일경륜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거스틴의 핵심적인 삼위일체 이해였으며, 또한 우리의 전통 교부들의 이해였으며, 개혁파의 전체의 이해였던 것이다.77)


6권에서는 사도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 자신은 지혜가 아니고, 지혜의 아버지이실 뿐인가와, 또는 지혜가 지혜를 낳는 것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대답으로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동등성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은 삼중(三重)적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성부와 성자는 단독적인 성령과 달라서 이를테면 이중(二重)적이신 것이 아니며, 삼위일체에서는 셋이 하나보다 많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선 어거스틴은 성자는 성부의 위대성이며 그 성부와 함게 위대하심을 증거하면서, 그와 같이 성자는 성부의 지혜이시며 그런 성부와 함께 지혜로우시다고 한다. 그리고 성부는 성자와 함께 지혜로우시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즉 성부 자신이 낳으신 그 지혜와 함께 지혜로우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그 자신을 말할 때에는 다른 편을 말하지 않고 한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두분의 본질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두 분을 모두 함께 말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런 구조를 통해서 성자 없이 성부는 하나님이 아니며, 성부 없이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며, 두 위격이 함께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다.78)


어거스틴은 계속적으로 삼위와 일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경우에 동등하신 성잔, 성부 성자와 동등하신 성령이 동등하신 성부와 합할 때에, 이 분들을 각각 따로 생각한 때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게 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더 완전하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나 모두 완전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시고 세 겹이 아니시다"79),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한 분이 세 위격을 합한 것 만하며, 두 위격을 합해도 한 분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 분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한 분 한 분이 다른 한 분 한 분안에 계시며, 모든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모든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한 분 안에 계시다"80). 그는 계속해서 이런 삼위일체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됨을 또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 개혁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말씀인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81)라는 말씀을 위의 구조에서 해석하면서 여기서 "주"라고 했을 때 어느 한 위격만을 뜻하는 표현이 아니라 통일적인 구조에 따라서 위격적인 구별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여러 신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오직 한 하나님을 동시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82)


7권에서는 성자를 낳으신 성부는 어떻게 자신의 능력과 지혜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능력과 지혜임을 증거하고 있다. 특히 세 분은 세 능력과 세 지혜가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본질적 존재이신 것과 같이, 한 능력과 한 지혜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즉 전반부에서는 앞부분에서 계속 논의 되었던 삼위간의 관계를 더 깊이 다루고 있다. 성부는 존재 자체까지도 그 자신에 관해서 가지신 것이 아니라, 그가 낳으신 본질적 존재인 성자에 관해서 존재를 가지셨으며, 그 이유는 그는 그 본질적 존재에 의해서 그의 모든 존재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분은 어느 편도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며, 상호 관계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성자도 성부와의 관계속에서 본질적인 존재로 말해진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런 구조가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더욱 빛나고 있다. "성부는 그 자신이 또한 지혜이시며, 동시에 성자는 성부의 빛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성부의 지혜라고 부른다. 즉 성자는 빛의 빛이며, 두 위격이 다 한 빛이신 것과 같이, 성자는 지혜의 지혜이시며 두 위격이 다 한 지혜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한 한 본질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경우에 존재하는 것과 지혜로운 것이 동일하기 때문이다".83)


후반부에서는 헬라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이 삼위일체의 구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한 본질"(sbustantia), "세 위격"(persona)의 용어에 대한 의미를 통해서 어떤 구조를 정립해야만 이단의 방식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위격이시므로, 우리는 어떤 셋이며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면에서 사벨리우스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으로 빠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단지 피하기만 하고 언급하지 않는 다면 그 자체가 이단의 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지 않으며, 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셋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라고 했을 때에, persona라고 대답했다. 다만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essentia라고 했으므로 그들의 통일성이 이해될 뿐아니라, 세 sbustantia라고 불렸으므로 그들이 삼위일체심이 이해되기를 원했다"84). 결론적으로 헬라와 라틴 교부들의 구조를 종합적으로 해서 성부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들을 때에, 성자나 성령을 성부에게서 분리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위격들은 성부와 함께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자도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성부와 성령이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한 분을 essentia라고 할 때에 한 분이 다른 분 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훌륭하거나 또는 어떤 점에서든지 다른 분과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부 자신을 성자와 성령이라고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되다고 언급하고 있다.


8권에서는 일체성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언급해 주고 있다. 즉 진정한 본질에서 성부가 성자보다 더 위대하신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성부가 하나님이시오, 성자가 하나님이시오, 성령이 하나님시며, 성부가 선하시고, 성자가 선하시고, 성령이 선하시다. 그리고 성부가 전능하시고, 성자가 전능하시고, 성령이 전능하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셋이거나 선한 분이 셋이거나 전능자가 셋인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선한 분, 한 전능자, 즉 삼위일체 자체뿐이시라고 증거하고 있다. 즉 이말은 성부와 성자가 합하여도 성령 한 분보다 크지 않으시며, 삼위일체의 어느 한 분도 다른 한 분보다, 또는 세 위격이 합해서 어는 한 분보다 더 크신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밖에 각 위격을 상호 관계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 자체들에 관해서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임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De Trinitate자체를 분석해 보았는데 다음은 김영규 교수의 글을 통해서 어거스틴의 핵심적인 삼위일체의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는 몇가지로 이것을 정리하고 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든 여호와 하나님이든, 하나님은 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할 때도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말하는 것이다."85) 이런 이유 때문에 각 위격을 말할 때도 "같은 삼위일체 안에서 고유한 개체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혹은 피조물과의 관계에 관한 말로서 드러난다. 즉 실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가 하나요 위대하시고 선하시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86)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87)


첫째: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이 존재하신 대로 그렇게 분리할 수 없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삼위일체는 분리할 수 없이 역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글에서 어거스틴은 기본적으로 물었던 중심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입장에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은혜에 있어서나 자연에 있어서나 성령없이 아무 것도 역사하지 않으신다. 혹은 같은 신성 안에 세 위격들의 존재의 질서를 요구한다고 하였고,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의 역사는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외부를 향항 역사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라고 한 것은 하나의 공리로 여겼다.


둘째: 그 실체 혹은 본질에 관계해서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선하시다, 영원하시다, 지혜로우시다, 전능하시다는 말이지 각 위격에 관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함께 실체인 것처럼, 동시에 함께 위대하시고 동시에 함께 선하시며 동시에 함께 거룩하시고 자체에 따른 다른 것이 무엇이든지 동시에 함께 그러하다.


셋째: 위격들 상호간에 발생과 발출과 관련해서, 나시고 나오시는 주체의 수동성과 능동성이 제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성자의 발생과 관련해서, 시간과 관계없이 성부는 나은자이시고 성자는 나신 자이시다. 즉 발생에 있어서 능동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발출의 경우에는 다르게, 저로부터 성령이 발출하도록, 그렇게 성자에게 주셨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발출의 경우, 성령이 발출하도록 성부가 자체로 가지신 것처럼, 성자로부터 같은 성령이 발출하도록, 그래서 두 분으로부터 시간없이 발출하도록, 그렇게 성자에게 주셨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발출의 경우 성령의 능동성이 인정되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언급한 것은 그러나 거기에서 전과 후가 있는 시간이 사려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이는 거기에는 모든 것에 있어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넷째: 이렇게 위격들 상호간에 뿐만 아니라 피조물과 관계해서도 하나요 동일한 실체의 성부, 성자, 성령이시오 창조주 하나님과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으로 같지 않고 특별히 물질적인 피조물 형태로 말미암아 분리되어 계시될 수 밖에 없다.88)


위와 같은 평가는 위의 "De Trinitate"의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De Trinitate"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조적인 방식으로 정립해 놓은 좋은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구조와 "De Trinitate" 분석을 통해서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구조는 지금까지의 아리안주의와 사벨리안주의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극복하고 있다는데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초대 교부들은 늘 양면의 공격을 받으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한 쪽을 정립하다 보면 다른 쪽의 약점이 문제가 되는 등 계속적인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한계점들이 어거스틴에 와서는 양쪽의 도전을 모두 해결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의 문제를 접근했다는 것이다. 즉 어거스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존재가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역사에도 분리될 수 없다"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통일성안에서 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했으며 또한 성부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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