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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워치만 니(위트니스 리) 지방교회 관련 질문 응답(1-1)

 

H 님의 진지하면서도 논점이 분명한 질문을 프린트하여 몇 번을 읽었습니다. 참되게 거듭난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교회론에 관한 성경 진리에 대해 차분한 가운데 함께 추구할 기회를 갖게 되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 즉 1) 교회는 무엇이며 2)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진리항목 중 하나입니다.

 

이제 H 님의 질문에 대해서 나름대로 답변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기존 기독교를 배척하는 식의 지방적인 교회실행은 또 다른 분열이 아닌가?

 

 

위 질문 제목과 그 안에 담긴 몇 가지 부수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답변은 포괄적이면서도 질문 요점들에 대해 최대한 선명한 답변을 시도하는 방법으로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지방 교회론의 역사적 배경

 

대적의 훼방과 공격으로 초대교회 때 잠깐 선 보였던 성경적인 교회모습은 곧 변질되기 시작했고 결국 역사적으로는 우리가 지금 보듯이 수 많은 분파적 표현들로 나타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나름대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 모습을 찾는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제가 볼 때는 다음 두 유형이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째가 종교개혁입니다. 6세기에 교황제도가 확립된 이후 종교개혁이 있던 16세기까지 근 천년 이상 단일 체제로 유지되어온 로마 천주교(물론 동방정교회, 아프리카 곱틱교 등의 분파가 일부 있었지만) 의 교회론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비판 내지는 배척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도는 '기존 천주교 실행으로부터의 개혁'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론을 그려 나가는 과정에서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수 많은 분파들로 나뉘어지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분열인지 아닌지는 뒤에서 검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의 표준적인 교회모습에서 많이 빗나가 있던 로마 천주교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종교개혁자들과 달리 소위 브레드린(형제회운동)이라 불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성경본문 자체로 돌아가서 성경에 원래 나타났던 교회 모습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 한 복판에 성공회 사제출신이었다가 그냥 평범한 형제들 중 하나가 되기를 자처한 존 넬슨 다아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론에 대해서 연구하고 썼던 책자들이 한국에서는 전도출판사를 통해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교회론에 대한 저술 내용들은 천주교나 종교개혁가들의 시각에서 본 교회사에만 익숙했던 분들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로우드밴드'의 '순례하는 교회'  http://www.jundo.co.kr/product/detail.asp?t_code=JDO110002 , 리틀 푸라우드의 '그리스도인의 모임. 교회', 알프레드 깁스의 '모임에 대한 성경의 원리-부제:내가 형제들로 알려진 자들과 함께 하는 이유' (이상 전도출판사 발행) 같은 책자들을 참조)

 

위 종교개혁적 접근과 형제회식 접근 둘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전자는 오래 전에 지어져서 이미 뒤 틀려 있는 집을 이리 저리 수리하고 복원하는 집수리 공사라면, 후자는 일단은 아예 기조건물을 다 허물어버린 후 처음 설계도면을 찾아다 놓고 도면따라 처음부터 다시 복원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현안이 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내 기독교인들에게 형제회 가르침이나 실행이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더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물론 워치만 니는 형제회 실행을 존중하되 성경에서 자신이 추가적으로 보았던 것을 더 보완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가 쓴 '교회의 길'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2. 무엇이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인가?

 

우리가 '분열이다 아니다' 또는 '나는 아닌데 당신이 분열이다'라는 말을 하려면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원모습(원형)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 성경을 통해서 선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사실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육신의 눈이나 생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영적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로 묘사되는 그리스도의 몸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어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골1:26-27, 엡3:3-6).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This is a great mystery)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엡5:32). 물론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을 가말리엘 문하생 시절이 아니라 다메색 길가에서 계시를 통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직접 우리 눈을 열어 보이지 아니하시면 '몸된 교회'라는 말을 아무리 많이 우리 입으로 말해내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객관적인 교리와 지식에 머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위대한 비밀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을 아래에서 소개드릴 것입니다.

 

1) 먼저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성경기록입니다'(엡1:23). 이것이 몸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그런 분이 '우리 안에 어떻게 계시는지' 또한 그런 분이 '우리 안에서 충만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등을 참되게 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2)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게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요17:21, 23). 위 구절은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몸의 하나가 과연 무엇인가를 말할 때 매우 중요한 핵심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믿는 이들인 몸의 하나는, 하나님의 세 위격간의 하나와 "같은" (just as 또는 even as ) 그런 하나를 말합니다. 사람이 그냥 모여서 '우리 앞으로 잘 해 봅시다 우리가 다 하나가 아닙니까' 식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이런 기도를 하실 당시에는 이런 하나의 실체가 우주가운데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 후 이런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즉 요한복음 14:20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한 그 실체가 출현했고 다소의 사울은 그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핍박하러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하나는 그 몸의 지체들을 누가 핍박할 때 그 몸의 머리이신 승천하신 그분께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9:4-5)라고 하실 수 있는 그런 실재 안에 있는 하나입니다. 하기 좋은 이론적인 말이 아니라 그런 삶의 증거가 있는....

 

3) 에베소서 4장에서는 '한 몸'을 말합니다(4절). 그러나 그 앞에는 그 한 몸을 지키는 덕목으로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함과 평안의 매는 줄로서 성령의 하나를 지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몸의 하나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좀더 상세한 모습은 에베소서 4장 16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머리이신 그리스도) 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가 실현되는 것이 바로 몸의 하나입니다. 제가 간절한 소원을 따라 현재 소망하며 추구하고 있는 교회 모습입니다.

 

4) 구약의 레위기 2:4이 말하는 소제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의 예표입니다. 소제의 재료로는 고운가루와 기름과 소금과 유향이며 절대로 넣어서는 안 될 것이 누룩입니다. 어떤 성경 교사는 여기의 고운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기름은 신성을 유향은 부활의 능력에서 나오는 향기를(빌3;10), 소금은 십자가의 죽이는 힘(롬8:13)을 가리키고 누룩은 이러한 몸에 이질적인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이런 소제의 실재가 있다면 몸의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관련된 성경인 고린도 전서 11장이 말하는 성찬 떡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보여줍니다(24절). 이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 중에 병이 들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29-30절).

 

5)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려고 정하신 곳에 성전을 세운 구약의 기록 또한 몸의 하나의 그림입니다(신12:5). 왜 성전을 바벨론에 세우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필이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성전을 세워야만 했는가(...너희 중에 그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1:5))?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몸의 하나와 관련하여 깊이 묵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기록들을 더듬어 볼때, 몸의 실재인 그영과 지역범위 내의 개 교회 실행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는 각 거듭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입니다. 즉 이 하나는 한 살아계신 신성하고 비밀하신 인격 자체입니다. 이 분이 그분의 존재를 자유롭게 나타낼 수 있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지시하고 또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살아 나타나시는 것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몸의 하나입니다. 여기엔 사도행전 9장에서 아나니아의 사례(10-17절 참조)에서 보듯이 성도들의 자기부인에 따른 머리되신 그분께 순종함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몸의 하나가 우리 영 안에 내재적으로 있다 해도 우리의 혼의 영역 안에서 소견과 관점을 고집하며 자기 생각대로 해 버릴 때 그 결과는 분열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역단위의 소위 지방교회 실행은 이러한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들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분파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억제장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소위 지방교회 라는 교회 범위 원칙 자체가 교회 분열을 막는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는 지역교회의 실행이 다른 어떤 것보다 절대적으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성경적 사실을 부인하면서 성경에 근거가 희박한 다른 어떤 것을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리 객관성이 없습니다. 

 

 

3. 무엇이 분열인가-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현재 분열된 모습인가?

 

이 문제는 소위 개신교 내부자의 목소리를 소개하는 것이 더 진실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1) 이종성 박사 교회론(대한기독교출판사, 1995년) 152쪽

 

"로마 천주교회는 지금까지 분열이 없었음은 사실이다. 종교개혁 후 지금까지 내부적으로는 수차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었으나 교회 자체가 분열되지는 않았다...(9줄 생략)...

 

<개신교회>는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한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이 분열 상태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각기 자기들의 교파 교회들을 세웠다.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가졌던 루터와 쯔빙글리와의 대결에서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고 성찬론에 대한 이견때문에 분열된 것은 그후의 개신교회가 분열되기 위한 대로를 닦은 것이 되고 말았다. 1517년부터 개신교회는 분열, 따라서 예수의 몸을 찢는 일에 대한 반성도 없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빈은 보이는 교회는 분열되어 있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고 하지만 그것은 성서적 교훈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이는 교회가 없이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없다. 보이는 교회는 분열되어 있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로 단결되어 있다고 할수 없다.(이하 생략)."

 

위 이종성 박사의 지적은 고전1:11-13 본문과 함께 분별해 볼만 합니다.

 

2) 송인규박사의 '그리스도의 찟긴 몸'(예영 커뮤니케이션, 1995년)

 

"우리가 진정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긴다면, 이토록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가 있을까? 이 질문은 21세기 한국 교회 미래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가장 심각한 물음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이 물음 앞에 결단하고자 하는 하나의 작은 시도이다.'(7쪽)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너무나 자주 분립했다. 그것도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다기 보다는 파당심, 교권 유지, 이기심, 경쟁의식, 개인 감정의 확대 등이 주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선배들의 이러한 분파의식이 아예 몸에 박혀 건뜻하면 싸우고 갈라져 나가며 이에 대해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기 의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9줄 생략 후 이어짐)

 

"이제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분립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너무 쉽게 갈라지고 걸핏하면 또 하나의 교단이나 교회를 세우며 흡사 상점을 운영하듯 교회에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우습게 아는 사단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마땅 할 것이다."(69쪽).

 

위와 같은 기존의 소위 개 교회실행이 그리스도의 몸을 찟는 분열이요 심지어 그리스도의 몸을 우습게 아는 사단의 행위라는 두 분의 시각과는 대조적으로, '한 그리스도, 한 교회'를 주장하는 HJ 님은 소위 한 지역 내의 모든 거듭난 성도들을 포함한 하나의 교회론'을 해체하고 위 기존의 교회모습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몸의 하나를 지키는 길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의 시각이 객관적이고 또 하나님의 관점와 근접한지 독자분들이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소위 지역단위별 교회를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분열인가?

 

이 점은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다면 사람마다 자기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런 '지역단위 교회론'은 성경에 가장 강력한 근거를 확보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위 파당, 교권, 이기심, 경쟁심, 개인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아예 원천봉쇄된 교회와 교회를 구분하는 원칙입니다.

 

H 님의 지적은 그런 지방교회 이론은 맞지만,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태도식의 과연 합당한가 하는 지적이 이 질문 항목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질문에 제가 답변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개인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제한됨을 먼저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만일 그러한 배척이 어떤 우월감이나 교만에서 나온 것이라면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풀려진 오해이거나 진리적 분별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런 주장을 하는 자체를 뭐라고 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별도의 글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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