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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 논쟁 - 현재 진행형

 

성령론 논쟁 - 현재 진행형

 

 

주 예수님의 승천이후 사람 가까이 다가오신 분이 세 위격들 중 누구이신가 를 다룬다는 점에서, 성령론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지난 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 성령론은 현재도 절대적인 정설이 없는 미완의 교리입니다. 이 말은 어느 일방이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면(정통이라면) 그 반대쪽은 이단이 되어야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 글은 보혜사 성령(또는 성령론)에 대한 논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함께 인식 함으로,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상대방을 쉽게 정죄하기 보다는 서로 배우는 분위기를 이곳에 조성하려는 취지로 쓰여졌음을 밝힙니다. 이제부터 성령론과 관련된 몇 가지 대립 사례들을 소개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 발진설(Filioque) 논쟁


“내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보내실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proceeds) 진리의 성령(the Spirit of truth)…”(요15:26)이란 본문에서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나오시는 것인지 아니면 성부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오시는 것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오랜 다툼이 있습니다. 즉 동방 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아들을 ‘통하여’(through)나오셨다는 것이고, 서방 교회는 성령이 성부’와’(and) 성자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언뜻보기엔 ‘and’인가 아니면 ‘through’ 인가의 문제이지만 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역사적 교회는 서방과 동방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또한 분열 전에 바로 이 문제로 동방교회 포티우스(Photius, A.D. 867)가 서방교회를 이단이라고 했고 서방 교회는 이에 반발해서 동방 교회를 이단이라고 맞 받아 쳤습니다 (김호식, 성령론-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사역, 도서출판 한글, 1998, 61쪽).


따라서 위 내용대로라면 현재 정통교회를 자처하는 서방교회(로마 천주교, 개신교)는 동방 교회가 보기에 이단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논쟁


우리가 아는 것처럼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는 개혁 동지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분열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성만찬의 영적 의미에 대한 이견때문이었습니다. 즉 천주교의 화체설을 반대하면서도 같은 개혁자들인 루터는 ‘공재설’, 칼빈은 ‘영적 임재설’ 쯔빙글리는 ‘상징설’을 각각 주장했습니다(http://kr.blog.yahoo.com/mythway/6605).


그런데 이러한 외견 상의 성만찬에 대한 이견은 사실상 성령의 임재 등에 대한 이견임으로 그들에게는 적당히 타협하거나 서로 양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1529년 말브르크 회담의 결렬 이후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쿠르트 알란트, 네 사람의 개혁자들, 컨콜디아사, 1983, 38-39쪽). 이런 상황에서 만일 어느 한쪽이 자신들의 의견만이 정통임을 고집한다면 다른 쪽은 부득이 이단적인 주장이 될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론에 대한 이견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장로교가 우세한 한국에서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이 성경적인 견해로 간주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 김호식 박사님은 칼빈의 성만찬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성령이 영구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재하시는 역사, 삼위의 하나님께서 내재하시는 역사 같은 교리를 허용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령론이 신학적인 문제로 거론되지 못하고 성령을 단순히 은혜의 수단(구원의 방법)으로만 간단히 취급했는데 이것이 칼빈주의 신학의 논리적인 심각한 문제점이다”(김호식, 위 책, 131쪽).


이 싸이트에도 칼빈신학에 기초한 성령론을 가지신 분들이 방문하고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위 김호식 박사의 지적을 귀담아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단일론과 협력론 대립


성령께서 구원을 성취하시는 역사에 어떤 정도로 참여하시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오늘까지도 개신교 안에서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김호식, 위책, 63쪽). 즉 루터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완전타락설에 의거해 성령의 일방적인 역사에 의해 구원이 이뤄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단일론(Monergysm)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는 구원은 사람이 믿기로 작정하는 의지적인 능력과 성령의 역사의 조화를 통해 이뤄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협력론(Synergysm)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맞을 수는 없는데 만일 둘 중의 하나가 정통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처럼 구원론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대립각인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은 둘 다 정통교단이라고 평가됩니다. 이것은 구원론에서 정통교리와 다르면 이단이라는 최0경 목사님의 이단정의를 놓고 볼 때도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 구약과 신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문제 등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동일한가 즉 1) “주님이 보내실 (I will send) 성령”(요15:26)과 구약의 성령은 어떻게 다른가 2) 구약 때도 신약처럼 사람 안에 영구적으로 내주하시는 사례가 있었는가 등등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신, 구약에서의 성령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견해는 신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릅니다(이순태, 현대성령론 평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3-59쪽 참조). 그럼에도 어느 한 쪽의 의견을 절대시 한다면 다른 쪽은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관계


웨스터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자 개핀 박사께서는 고전 15:45의 ‘생명주는 영’을 경륜적인 방면 즉 기능에 있어서 성령과 동일시 즉 “높여지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기능적 단일성”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차영배 박사는 이것을 “양태론적 사상”이라고 반박합니다. 물론 양태론은 이단사상입니다(차영배, 성령론 - 구원론 부교재, 경향문화사, 1994, 75쪽).


만일 차 박사님(한국 교계 이단감별사들 대부분이 같은 견해를 보임)이 맞다면, 메이첸 등이 1929년에 설립한 장로교 개혁주의의 본산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양태론 이단을 조직 신학자로 채용했다는 결과가 됩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이외에도 개혁파 신학자요 저술가인 앤드류 머레이는 요한복음 7장 38-39절이 언급하는 영에 대하여 때로는 <성령의 내주>로 때로는 <“신인(神人)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임하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앤드류 머레이, 그리스도의 영,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9, 43-44쪽). 이러한 견해는 제 3격 성령만 우리 안에 오셨다 거나 보혜사 성령은 제 3격만을 가리킨다는 사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한쪽은 정통이고 다른 쪽은 이단일까요? 그러나 최소한 제 이해에 따르면 이 방면의 진리는 흑백논리로 단순화 할 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고신대대학원 변종길 교수님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혹은 그영)( 요7:39)’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삼았습니다(변종길, 성령과 구속사, 개혁주의신행협회, 2006)  또한 루이스 스미디즈가 쓴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여수룬)은 51-88쪽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례들은 이 주제가 간단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요20:22와 행2:4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 고 하신 그 성령과 사도행전 2:4의 성령의 임함(세례)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첨예한 이견이 있습니다.


- 그 외에 국내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례들


이처럼 성령론에 대한 대립 사례들을 주제별로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이 성령론 관련 논의를 너무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자제하고 진지하게 서로 배우는 자세로 임하자는 것에 있는 만큼 두 가지 사례를 추가로 소개하고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한국교계 내에서 성령 세례를 중생 시점으로 보는 개혁파 신학과 중생 후 추가적인 경험(소위 제 2의 축복)으로 보는 오순절교단(순복음교회) 간의 대립이 있어 왔습니다. 이 역시 성령론 관련 이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견은 초기에는 이단시비 사유들 중 하나로 거론되다가 지금은 오순절 ‘교단의 특수성’ 이라는 명분으로 잠정적으로 절충된 상태입니다.


또 하나는 소위 한국교계의 대형교단을 대표하여 이단상담 책임을 가지셨던 어떤 분이 성부도 한영, 성자도 한영, 성령도 한영 도합 세 영들이신데 ‘세 위격을 한 영’이라고 한 것은 양태론 이단이라고 하자 이것을 반박하는 공개토론이 있게 된 사례입니다. 토론결과 이단을 정죄한 쪽이 소속 교단으로부터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다른 신관 또는 다신론 이라는 평가를 받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성령론과 관련된 이견에 따른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위 변종길 교수님은 “성령은 온 우주에 편재하시는데 어떻게 또 우리에게 오실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 “성령론은 하나님의 진리 중에서 대단히 깊고 섬세한 부분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변종길, 우리 안에 계신 성령, 2003, 생명의 말씀사, 10-12쪽).


이런 점들을 두루 감안해 본다면 이곳 OOO 공간에서 성령과 관련하여 자신과 다르면 성급하게 배척하거나 정죄하기 보다는 서로 배우는 자세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전통이 세워지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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