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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글 5 - 이인규님 삼신론 확증, 지방 교회들이 양태론이라는 주장 반박(1)

 

1. 쉬운 토론을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이유들


사실 이 토론은 매우 간단한 토론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삼위일체론에 대한 원론적인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쌍방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주로 '상호내재 개념'에 대한 이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점만 찬찬히 따져 보시면 누가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누가 성경적인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후하게 본다 해도 '이인규님 식의 상호내재 개념'은 정통교부들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러한 이인규님의 비성경적이고 비정통적인 상호내재 개념이 그로 하여금 삼신론 이단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위 '이인규식 상호내재 개념'의 거짓됨만 선명히 드러나면 그 동안의 이인규님의 이런 저런 질문들, 의문들은 다 풀려나갈 것입니다. 지금 이인규님은 자신의 5번째 글에서 위트니스 리의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 한다'는 말이 틀렸고, 요14;10, 마6:9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도 계시고 하늘에도 계신다'는 주장이 틀렸다며 이에 대해 해명하고 답변하라고 다그치고 있으십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이것은 이인규님이 성경말씀 그대로 믿지 않고 사람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성경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 이인규님의 또 다른 혼란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과정을 거친'이란 말은 하나님의 신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성 안에서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을 거친 것을 말한다고 몇 번을 설명해드려도 막무가내입니다. '최종 완결된 영'에 대해서도 이미 고전15:45의 '생명 주는 영'과 관련해서 충분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급한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의 말은 잘 듣지도 않고 똑 같은 말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인규님은 웨인 그루뎀이든 누구든 자신이 인용하면 보편적인 신학자이고, 제가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 앤드류 머레이는 문제가 많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비판의 기준이 되어야 할 '정통신학' 그리고 '정통교회'에 대한 개념정의 자체가 안된데서 오는 혼란입니다. 그저 모든 것이 이인규님 중심입니다. 그러나 정통삼위일체라는 것도 세세히 따지고 들어가 보면 이인규님처럼 정통을 가장한 이단들이 나올 만큼 복잡한 면이 있음을 이 분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한 본질, 세 위격'이란 간단한 말로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가 다 설명된다면 지금처럼 신학을 했건 안 했건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독자들을 실제적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은 이인규님이 위트니스 리의 말을 왜곡시키고 자신 맘대로 거짓되게 단정하고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인규님이 양태론 증거라며 인용한 내용들은 글의 앞뒤를 무시하고 떼어낸 몇 개만 추가적인 설명이 조금 필요할 뿐, 대부분 성경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이인규님은 '성육신 이전에 그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 되신 후에 그분은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는 말이 양태론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태론은 커녕 성경적 사실일 뿐입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위격이란 단어는 성경에 없다'라는 말이 양태론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분'이란 말은 정통교회 삼위일체 조건으로 제시된 명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페르소나'가 성경용어가 아니고 터툴리안이 고안해 낸 것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들이 양태론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이인규님의 지금까지의 비판은 만사가 다 이런 식입니다.


2. 삼위일체관의 핵심과 어려움(문제점)


이인규님은 아니라고 하실 지 모르나 사실에 있어서 쌍방은 모두 삼위일체에 있어서 "하나"인 방면(본질, 본체, 실체, 우시아, 섭스텐시아)과 "셋"의 방면(페르소나, 휘포스타시스, 인격, 위격, 위)이 있음을 다 믿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지금 토론하는 것은 이런 원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 간 것이지요. 즉 교회역사상 정통 삼위일체를 입증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캅바도키아 교부들처럼 세 위격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분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거스틴처럼 한분 하나님에게서 시작하여 구별된 세 위격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쌍방이 이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의지한 개념이 '상호내재' 개념이었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들은 모두 정통 삼위일체관을 수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람들로 인정되고 있지만 전자는 삼신론자로 후자는 양태론자로 각각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에서 셋과 하나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와 함께 특별히 "상호내재 개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매우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호내재 부분에서 미흡한 것이 있으면 아무리 '셋'과 '하나'를 인정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삼신론' 또는 '양태론'의 의심을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 분들은 이인규님이 자신은 독립된 세 인격도 믿고 상호내재도 믿는데 왜 자기를 삼신론자라고 모함하느냐는 말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이인규님이 어떤 '상호내재'를 주장하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따져 보아야 합니다.


3. 상호내재의 오류에서 오는 삼신론 가능성과 해악들


'하나님에게 인격이 셋이다' 하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그러면 그런 분들이 어떻게 한 분되심을 유지하는지를 성경에 부합하게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 있게 됩니다. 여기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고유한 특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치 세 사람(인격)들이 있지만 그들은 다 사람이라는 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든지 또는 사실상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계신 것처럼 착각하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성경적인 가르침에 못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삼신론 이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인규님의 삼신론 이단성이 왜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빗나간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입증하기 전에 참고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예를 제시하겠습니다.


1) 캅바도키아 교부들에 대한 삼신론 시비


바실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로 대표되는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위격과 실체(본질)라는 용어를 구별했을 뿐 아니라 381년 콘스탄니노플 신조 작성에 크게 기여한 정통 교부들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교부들조차도 위격과 실체(본질)의 관계를 '개별과 보편의 문제로 파악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삼신론시비에 휘말렸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그레고리는 '유노미우스를 반박하며'에서도 삼위께서 마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동일한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동일한 신성을 나누어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했었다. 각 개별자에게 '사람'이라는 보편어를 적용할 수 있듯이 '하나님'이라는 보편어를 성부, 성자, 성령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도 바실처럼 그 비유로 말미암아 삼신론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이에 대한 반박과 해명을 해야 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240쪽).


위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삼신론 시비에 대해서 김석환 박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페리코레시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실체의 단일성'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본성' '동일본성'의 의미가 강조됨으로 '실체의 단일성'이 비교적 약하게 말해진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 그러니까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위격에 강조를 두고 세 독립적인 실재에 초점을 맞추어 삼위일체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그 경우에는 엄격하게 말해서 '실체의 단일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동 본성'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동일본성'이다. 그래서 위격들의 공동체가 세 하나님으로 말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 원리를 도입, 활용하였다. 각 위격들이 다른 위격들을 상호관통하고 서로 포용하며 언제든지 함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세 위격이 함께 하는 '동일본성'을 말하였고, 페리코레시스에 의한 '한 하나님'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언제든지 그 이론이 삼신론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이 점은 캅바도키아 교부들 생존시에도 일어났던 일인데, 비록 기독교 역사상에서 페라코레시스가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이와 같은 오해의 가능성과 또 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비판적으로 지적될 수 있다'(344쪽)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 이인규님은 왜 삼신론자인가?


이인규님은, 자신은 '삼위의 독립된 인격'도 믿고 '상호내재'도 믿는데 왜 삼신론자라고 모함하느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 두 가지를 말해도 얼마든지 삼신론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위에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삼신론 시비를 소개드렸습니다. 이인규님은 이것을 가지고 또 경솔하게 지방 교회들은 캅바도키아 교부들도 삼신론자라고 한다고 함부로 왜곡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인규님은 아래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상호관계적인 면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라며 더 극단적이고 이단적으로 상호내재 개념을 착각함으로 삼신론자입니다. 예수님 자신과 정통신학자들은 위격들을 포함한 삼위 전체의 각각의 상호내재를 말하나 님은 각 인격체는 아니고 편재성이라는 신적 본성만의 상호내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상호내재도 아니고 정통신학자들의 상호내재도 아닙니다. 삼신론 이단사상인 '이인규식 상호내재'입니다.


저는 먼저 그 동안의 토론에서 드러났던 이인규님의 이단적인 상호내재 개념의 생생한 증거들을 토론방과 관찰방에서 가져와서 소개하겠습니다.


# 즉 최목사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세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을 한 것이고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 삼위는 각각 그 세 인격에 대한 구별성으로 볼 때에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습니다. 인격 안에 인격이 있다면, 구별되지 않으며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안 갑니까? 즉 상호관계란 "세 위격들간의 구별적인 관계"입니다. 인격 안에 있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 (상호내재가 인격 안의 인격이 아니라는 증거, 한가지만)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는 내 안에서 본 바니라... 윗 문장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안이라는 인격적인 장소에서 보았다는 뜻인가? 빌립보 교인들은 모두 귀신들인가?


위 내용들은, '이인규님식 상호내재'는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 성령 인격은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처럼 각각의 인격들인데 삼위 각각의 "인격자체"는 제외된 채 편재성 같은 신성한 본성 안에서만 상호내재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에게 대비시켜 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즉 '이인규식 상호내재 개념'은 쉽게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하늘에서 각각의 인격들로 나란히 계시던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 성령 인격을 다 포함하는 전체신격 중 1/3인 아들 인격만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육신을 입으셨고 나머지 2/3인 아버지 인격, 성령 인격은 여전히 하늘에 남아 계시고 다만 편재성으로만 지상의 아들 안에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고 하면 양태론이다.


2) 1/3 인격인 아들이 침례 물 위에서 올라올 때 또 다른 1/3인격인 아버지 인격은 하늘 보좌에 계셨고 나머지 1/3 인격인 성령은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 이 때 삼위 서로 안에는 참된 인격들은 제외된 편재성 만 상호내재 하신다. 여기서 성령 인격은 아들 인격에게 내려 온 다음 아들 인격과 같이 있었는가 아니면 나중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3)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던 '아들 인격'은 아버지 인격과 성령 인격은 제외된 전체신격의 1/3 인격이며 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인격은 어디든지 다 계신다는 편재성 개념으로만 지상사역시의 아들인격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지상사역시의 아들 인격 안에 "구별된 방식"으로 아버지 인격도 상호내재 하셨다고 말하면 양태론이다.


4)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아버지 인격, 성령 인격은 제외된 1/3 인격인 아들 인격만이며 아버지는 편재성이라는 신성한 본성으로만 아들 인격 안에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면 성부 고난설이다.


5) 육신을 입은 아들 인격이 부활 후 하늘로 다시 돌아가서 하늘에 남아 계시던 아버지 인격 옆 보좌에 나란히 앉아 계시고 이번엔 전체 신격 중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제외된 1/3 성령 인격만 이 땅에 또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사람 속에 생명으로 영접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인격을 생명으로 영접했다고 해도 그 생명 안에는 아버지 인격은 물론이고 아들 인격도 없고 아버지와 아들은 편재성으로만 1/3 인격인 성령 안에 계실 뿐이다.


이제 위와 같은 이단적인 '이인규식 상호내재개념'이 왜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를 열거해 보겠습니다.


① 성경이 말하는 상호내재와 다릅니다.


주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반복해서 상호내재를 언급하십니다(요14:10-11, 17:21). 여기서 '나'라든지 '아버지'라는 표현은 위격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위격은 제외된 편재성만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② 다음과 같은 학자들과 신조들의 상호내재 개념과 다릅니다.


-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성공회 주교,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요14:10)라고 선언하신 바와 같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1권, p169, 성문).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 된다(협성대학교 김영선 교수).


-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케누스(Damascen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장신대 김명용 교수).


- 그런데 캅바도키아 교부들 가운데서도 이 페리코리우시스라는 개념을 통하여 '신격 내에서 위격들 사이의 관계가 세 인간들의 공통의 인간성(common humanity)과의 관계와 유사하다'라는 개념을 배격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이 문제를 분명히 한 사람은 닛사의 그레고리였다(250쪽). '한 신격이 항상 세 존재양식들(three modes of being) 안에서 또는 행위 영역들 안에서 또는 상호 관계들(mutual relations) 안에서 한 실체적 실제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로부터 떨어져서 생각되실 수 없고, 아들께서도 성령으로부터 떨어져서 파악되실 수 없다. 아들께서는 항상 아버지 안에 계시고, 성령께서도 항상 아들과 함께 계신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252쪽).


-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일성과 삼위성을 논하면서 위격들의 '상호내주'의 관점에서의 삼위일체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셋은 상호간에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서는 무한하시다.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시다'(김석환, 위 책 299쪽).


- 8세기 중엽에 활동한 다마스커스 요한도 '각 위격은 각각 다른 위격 안에서 어떤 연합 (coalescence) 없이 존재(being)를 가지신다(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843-844).


- 칼 바르트도 '신적 존재양태들(the divine modes of being)이 상호간에 서로 서로를 아주 완전하게 조건지으며 스며들어서 하나가 항상 다른 둘 안에 계신다'(Karl Barth, CD 1/1, p 370)(김석환, 위 책 300쪽).


-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과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함께 만난다. 각 품격은 서로 혼합되거나 혼돈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1972년).


위에서 본 신학자들과 신조는 한결같이 "위격(인격) 간"의 "구별됨을 잃지 않는 방식의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지 '이인규식 상호내재' 개념처럼 인격 하나는 저기 떨어져 있고 또 한 인격은 여기 떨어져(분리되어) 있으면서 어디든지 계신다는 편재성으로만 한 분 하나님을 이루신다고 말한 것이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이인규님 식으로 '인격 안에 인격이 없는 방식의 이단적인 상호내재'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 번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삼위의 존재적인 방면의 상호내재는 인정하지만 상호관계성 안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은 없다'는 이인규님 말의 모순


통상 삼위일체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 각 인격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을 '내재적(또는 존재적) 삼위일체'라고 하며 이 때 삼위간의 내재적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이 상호내재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적인 방면은 곧 삼위의 상호관계를 의미하지 이인규님처럼 삼위의 존재방면이 따로 있고 상호관계 개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달리 아버지, 아들, 성령 자체의 관계가 아니라 외부적인 관계 즉 사람들의 구원사역 등 삼위 하나님 자체 이외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경륜적인 삼위일체'인 것입니다. 즉 존재적으로 삼 위격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은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시면서 이러한 구별된 내적 존재를 흩트리지 않으신 채 창조와 구속 등 경륜적인 방면을 거치시는 것이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그림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종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저의 주장을 지지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신성 안에 삼위가 상호관계를 가지면서 존재한다는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 Trinity, 또는 Essential Trinity)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관계 개념에 의하여 더 자세히 설명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내적 관계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세 위격(페르소나) 사이에 동등성이 있다.
(2) 세 위격이 각기 완전할 뿐 아니라 셋이 합하여 하나의 동등성을 이룬다.
(3) 신성 안에는 일체의 분리가 없다.
(4) 그 셋은 함께 서로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0쪽).


위 조건 중 (4) 번 항목이 중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셋(위격들)이 함께 서로 내재한다고 말하고 있지 이인규님처럼 편재성(신적 본성)이 서로 내재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위 인용문에서 '셋'이 편재성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의 본성이 셋으로 분리되는 것이 되어 명백한 삼신론이되는 더 큰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인규님의 상호내재 개념은 '이인규식 이단적인 상호내재' 개념이지 정통 삼위일체가 결코 아닙니다. 이 분은 편재성이 어떻고 라고 말함으로 독자들을 속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된 세 인격들을 말함으로 삼신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묘하게 감추어진 이단교리는 꼼꼼히 따져보고 살펴서 듣지 않으면 그럴듯하게 사람을 속일 수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최삼경 목사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이단적인 구원관과 연결됩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지금 하늘에는 '하나님'이신 '아버지 인격', '하나님-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아들)의 인격'이 남아 계시고, 우리 가까이 오시고 영접된 하나님은 전체 신격의 1/3인 성령 하나님 인격뿐입니다. 물론 성령님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편재하는 방식으로는 계실지 몰라도 실제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안 계십니다. 이런 식의 삼위일체관은 구원론에 있어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영접한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들의 실제 인격은 제외되고 다만 편재성으로만 함께 하는 전체 신격의 1/3 성령 하나님 인격은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제외된 불완전한 하나님 또는 부분적인 하나님이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는데(요일5:11) 아들의 편재성만 있고 아들의 실제 인격은 저 하늘에만 계시고 우리 속에는 안 계시니 우리가 가까이 오신 성령님을 영접해도 엄밀히 따지면 참된 생명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된 거듭남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셋째, 이인규님식 상호내재 개념은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다른 예수를 영접하게 합니다. 즉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삼위 중 홀로 육신을 입었기에 '하나님 사람' 이시지만 우리가 영접한 예수는 편재성이라는 "신성한 속성뿐이며" 실제 예수의 인격도 없고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입은 "인성"은 더더욱 없습니다. 다른 예수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인규식 상호내재 개념이 가져오는 이단적인 구원론은 나중에 보겠지만 교회론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5) 아버지 집에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성경은 오늘날 거듭난 믿는 이들로 이뤄지는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딤전3:15). 그러나 이인규님식대로 라면 이 집엔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안 계시고 다만 멀리서 편재성으로만 방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편재성이라는 것이 어디든지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땅 위의 거듭난 사람들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별 의미도 없게 됩니다.


이처럼 이인규님의 이단적인 상호내재 개념이 가져온 삼신론 이단 사상은 우리의 기본신앙을 파괴하거나 변질시키고 맙니다. 또한 이 이단사상이 가져올 믿는 이들의 생활에 미치는 독소적인 해악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세한 문제점들은, 구원론, 교회론 등 하나님이 사람 속에 어떻게 계시며 역사하시는지 등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앞으로의 토론에서 더 깊이 다뤄질 것입니다.


4. 지방 교회들이 양태론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들


이인규님은 자신의 양심 안에서 지방 교회들이 사벨리우스 이론으로 알려진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변형된' 이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이기도 하고 '사벨리우스 + 프락세아스'식이라고 슬쩍 돌려 말하기도 하십니다.


저는 이번 반박문에서는 이인규님의 삼신론을 입증하는데 지면을 중점적으로 할애했기 때문에 이미 글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간략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들을 일부 소개 드리고 다음 기회에 왜 위트니스 리가 절대로 양태론자가 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들과 그 외에 이번에 다루지 못한 부분들을 다루겠습니다.


우선 사벨리우스 양태론은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며, 세 위격을 말하더라도 승계 되는 방식의 삼위―아버지가 아들되신 후 더 이상 아버지는 없고, 아들이 성령되신 후 아버지, 아들은 안 계신다―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벨리우스 양태론자들은 삼위의 영원함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영원성을 주장하면 일단 그것만으로도 사벨리우스 양태론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프락세아스는 '아버지만 하나님이시다'는 유일신 생각으로 가득하여 성부 자신이 동정녀 태에서 나시고 아버지 자신이 고난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신론이므로 3의 방면은 아예 거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삼위가 구별된다느니 아들이 아버지와 상호내재 하신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삼위의 영원한 구별과 삼위의 상호내재를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사람이 프락세아스 이론과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양태론 관련 이론들과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측이 이러한 이단과 전혀 무관하다는 증거들을 다음 글에서 위트니스 리의 1차 자료의 인용을 통해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상세하게 반박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면 이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이 사벨리우스나 프락세아스의 양태론 이론과 무관하다는 증거들 몇 개를 소개하고 이 글의 1편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인규님은 어찌하든지 저와 지방 교회들을 자신이 준비해 둔 양태론 이단 덫에 걸려들게 하려고 온갖 왜곡을 다 동원하시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음의 몇 개 안되는 인용만으로도 이인규님의 지방 교회측이 사벨리우스와 프락세아스 양태론이라는 거짓정죄는 사실이 아닌 것이 증명되고도 남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288쪽).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 내재함이 모두 있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310쪽).


끝으로 이인규님이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방 교회들 안에는 이인규님 이상으로 교회 역사와 양태론을 포함한 신학 이론에 밝으신 형제님들이 수두룩하십니다. 저는 거기에 비하면 정말 작은 형제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위트니스 리나 지방 교회들이 이인규님이 말하시는 양태론을 참으로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면 이인규님이 지적하시기 전에 저희 스스로 분별할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저희가 신학도 안한 평신도이신 이인규님 만한 진리에 대한 분별과 확신도 없이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가며 지금 이 좁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님은 지방 교회들 소속 성도들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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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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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3.11.07. 02:26
이인규님같은 분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한국교계를 대표하여 정통과 이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성향의 가르침이 한국교계 안에 있기에 그분이 그런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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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3.11.07. 02:27
보통 한국교계는 삼위가 한 동일본질과 세 독립된 인격들로 이뤄지고 있고, 특히 세 인격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최삼경 목사님처럼 '세 사람이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식으로 존재하는 삼위 하나님'을 정통 교리로 착각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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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3.11.07. 02:31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서 꼬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한국교계가 one naturem three persons 만 강조했지 웨스트민스터 신조에도 거론된 one Godhead(신격)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one) 라고 할 때 그것은 본질이 하나이시다 라는 말도 되지만, one Godhead(골2:9)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이 빠진 채 세 인격이 독립 심지어분리되어 계신다는 말을 자꾸 강조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삼신론을 주장하는 쪽으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최삼경, 이인규님은 물론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거의 대부분이 최소한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이런 오류에 빠져 있는 것으로 관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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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3.11.07. 02:38
즉 박윤선 박사님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영음사, 1999)23쪽에서 말하는 "본질상 단일하신 신격(神格)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웨민 2장 3절)라는 문장에서, <단일하신 신격 안에>가 바로 one Godhead 입니다. 따라서 바른 삼위일체는 1. 단일 신격, 2. 세 구별된 인격들, 3. 동일 본질...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데, 한국교계는 2와 3만 강조하고 1은 언급하지 않음으로 결과적으로 삼신론적인 경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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