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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지요?(3)

 

다른 일들에도 바쁘실텐데 두 번이나 시간을 내셔서 성의있는 답글을 써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정석 박사님의 글 내용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이해했습니다.


1. "삼위일체를 혼동 없이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님이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수용해야 합니다. 성자는 성부와 다른 분입니다."(삼위 간의 분명한 구별)


2. 우리 안에는 <성령님(3격)만 존재론적으로 내주하시고> 성부(1격)와 성자(2격)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는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위 교수님의 글 내용 중 1번은 삼위일체론의 핵심 두 축 중 하나인 <삼위는 엄격하게 구별된다>는 원칙을 선명하게 천명하신 것으로 보이며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2번 내용은 삼위일체론의 또 다른 축인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한 하나님(one God)이심>(신6:4, 고전8:4, 6)에 저촉되거나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선 다음과 같은 항목들에 있어서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키거나 추가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1. 글 문맥 상 <권성수 박사님>은 삼위를 구별하시되 삼위 전체인 성부, 성자, 성령님이 '존재론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굳게 믿고 계신다고 보입니다.


이 교수님이 예상하시는 것처럼 저도 권 박사님 역시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각각 구별된 분들이심>을 믿으실 것으로 생각하며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교수님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 박사님은 이정석 교수님의 견해와 달리, <성령> 뿐 아니라 <성자>(그리스도)와 <성부> 또한 <존재론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 박사님이 삼위(특히 성자와 성부)의 존재가 사람 안에 내주하신다는 근거로 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는 요한복음 14:23 본문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후 문맥을 볼 때 (1) 위와 같이 말씀하시는 분은 역사적인 예수이며, (2) '우리'는 성부와 예수님 두분을 가리키며, (3) '성령으로 대리된 내주일뿐 두 위격은 존재론적으로 내주를 안 하신다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령과 함께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는 상호내재 방식으로 얼마든지 삼위 모두가 내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 박사님은 이것을 신비적인 연합이라고 표현했지만 성자와 성부가 배제된 성령만의 존재론적 내주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2. 웨스터민스터 신조 2장 3절과의 충돌문제-한 본체를 이루는 삼위가 존재범위를 달리할 수가 있는가?


(1984년 김의환편- 생명의 말씀사)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1요5:7, 마3:16, 17, 28:19, 고후13:14). 성부는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으시고, 낳으신 바 되지도 않으시고, 나오시지도 않으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낳으신 바 되셨으며(요1:14, 18)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요15:26, 갈4:6)"


(영어) "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Holy Ghost. The Father is of none, neither begotten nor proceeding; the Son is eternal begotten of the Father; 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위 웨스터민스터 2장 3절 내용을 보면 삼위일체는 (1) 세 각각의 위격들(three persons), (2) 한 동일본질 (one substance)뿐 아니라 (3) 한 본체(the Godhead)를 가지신 분입니다. 또한 위 (2)의 본질은 (3)의 본체와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AA 하지의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김종흡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년) 64쪽은 웨민 신조 2장 1절을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은 한분만 계십니다(신 6:4, 고전8:4, 6)>라고 적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쓰인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할 때 '분'은 <person> 이 아니라 <Godhead>로 보입니다.


이런 전제하여 <한 본체(Godhead)를 가지신 한 하나님(one God)>이 1/3(성령)은 거듭난 사람 안에 존재론적으로 내주하시나, 그외의 2/3(성자, 성부)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특성상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위와 같이 <존재의 범위를 각각 달리하는 삼위>는 이미 한 본체의 정체성을 깨뜨린 둘 또는 셋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처럼 삼위 중 다른 두 위격은 제외되고 성령님만 사람 안에 존재론적으로 내주하신다는 관점은 one Godhead(골2:9)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된 특징중 하나를 심각하게 손상시키지는 않는지 우려가 되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삼위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가 구별되면서도 한 존재 범위를 갖는 것은 얼마든지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설사 교리적인 체계화가 어렵더라도 성경 본문이 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 들이는 것이 무리하게 명료한 이론구성을 하느라고 성경본문 중 어느 하나를 왜곡시키거나 무시하는 것보다는 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정석 교수님은 주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는 천상에는 안 계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인성(육신)에 국한된 경우에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신성방면인 아들 하나님(성자) 부분에는 우선 다음 두 성경본문이 이 교수님의 견해와 관점을 달리합니다. 우선 요1:18은 지상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면서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이라고 현재시재를 쓰고 있습니다. 차라리 <아버지 품 속에 계셨던>이라고 과거시제를 썼더라면 우리의 관념에 부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들하나님이 성육한 후 지상에 계시는 그 순간에도 하늘의 아버지 품속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외에 요3:13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신 주 예수님 본인을 가리키면서 자신이 그 순간에 하늘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 표준역, 킹제임스 역, 다아비 역 모두 <he that descended out of heaven, (even) the Son of man, who is in heaven > 이라고 함으로 그분이 이 땅 위에서 말씀하시던 그 순간에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who is in heaven이 생략됨).


이런 성경의 본문들은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사람의 이성으로 무우 토막 자르듯이 정연하게 체계화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심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그 모든 말씀들을 믿음으로 아멘 할 뿐입니다.


3. 이외에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직접 사람 안에 내주하심을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성경 본문들을 모두 <성령님> 또는 <성령님의 대리에 의한 그리스도>(또는 성자)의 내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학적인 해석을 가하지 않고 그냥 성경본문대로 읽고 또 그렇게 믿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평강이 있습니다.


1) 요일5:12 : <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기서 생명이 있다(have) 없다는 말은 사람 안에 내주를 가리키는 표현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자체>가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지 <성령에 의해 대리된 아들> 또는 <성령>을 생명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아들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는 저 천상에만 계시고 자신 안에는 안 계신다고 믿는 것은 생명 또한 저 천상에만 있고 자신 안에는 없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누구를 영접하는 것인가 하는 다음 요점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2) 요1:12 :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우리가 우리 안으로 영접하는 대상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 검토대상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4:12를 볼 때 아들 하나님이신 주 예수의 이름임이 분명합니다. 즉 성령님(3격)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신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인격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그 이름을 영접하면서 그 존재는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3) 골1:26-27 :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비밀은 <너희 안에 안에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요엘의 예언도 있던터라 성령을 육체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비밀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 내주하심은 감추어진 비밀이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을 배워 능통했으되 그가 다매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4-5)는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사울에게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이 열려 이 비밀을 보았을 때 자신이 핍박하던 주의 제자들 안에는 천상의 주 예수님이 '나'(I)라고 할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요일5:12)으로 내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네가 왜 성령으로 대리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4) 고후13:4-5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를 말씀하고 있지 '성령의 대리를 통한 내주'를 말하지 않습니다.


5) 로마서8:10 :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 이 역시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6)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산다' 또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표현을 여러번 하고 있습니다(빌1:21, 갈2:20 등). 이런 성경본문의 전후 문맥은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일 뿐 성령 또는 성령에 의해 대리된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부나 성령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부른 예가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루이스 B. 스미디즈가 쓴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원제: UNION WITH CHRIST) (오광만 역, 여수룬, 1991년)은 예수와 성령간의 관계,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등에 대하여 매우 객관적인 관점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 중에는 신약에서의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을 주욱 살펴본 후 저자가 내린 결론들 중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언급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체적인 개체인 예수라는 인물이라는 것이 분명하다"(위 책 173쪽 아래에서 9-6줄)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사람 안에 존재론적으로 내주하시는 위격> 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은 사람의 이성 또는 특정교단(또는 특정 성경교사)의 교리적 관점만을 절대시하여 단정지을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을 제 안에 갖게 했습니다. 아울러 최삼경 목사의 <세 영들의 하나님> 사상은 성경에 그 근거가 없거나 최소한 <성령=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라는 개혁신학의 전통적인 입장과는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이라는 원래 글의 취지가 유지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이정석 교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도 지지도 유보하셨음으로).


다시한번 저의 질의에 대해서 마다하지 않으시고 두번이나 성의있게 이 교수님의 입장을 선명하게 밝혀 주신 것에 대하여이 박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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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석 교수님의 답글


잘 이해를 해주어 고맙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같은 분이 아니라 같은 본성을 가진 다른 분이라는 삼위일체적 신앙을 인정하고 고백하시는 것이 귀합니다. 여기서 혼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목회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님 만이 내주하고 성부와 성자는 하늘에 계시다는 원칙에 대해서는 잘 수긍이 가지 않는 것 같군요. 앞으로 언젠가 이해되리라고 기대합니다.


권성수 교수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를 들으셨는데, 그 신학적 틀은 분명합니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사도신경적 신앙구도입니다. 먼저 이런 구조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세부적이고 모호한 구절들을 이해하여야 건전한 해석이 됩니다. 저는 권 교수님이 사도신경을 거부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면 결과적으로 권 교수님에게 큰 무례를 범하게 됩니다. 타인의 견해를 말할 때는 항상 조심하고 그의 큰 신학적 구도를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오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양성과 인격을 나누는 것입니다. 신성이나 인성이란 인격이 아닙니다(a-hypostasis).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이루며, 모든 행동은 인격이 수행하는 것이지 성(nature)이 수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성으로는 제한을 받아도 신성으로는 편재하고, 예수님이 인성으로는 지상에 있으면서도 신성으로는 하늘에 있었다는 생각은 인격의 통일성과 불가분리성을 부정하는 위험을 초래합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도 우리 안에 있는 속성들이나 요소들의 동인을 인격이 종합하여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 모든 행동은 우리 인격의 책임이지 결코 한 요소의 결과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을 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 17:11) 모든 신학적 선입견을 버리고 이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기 바랍니다.


그 동안 질문해 주셔서 감사하니다. 이제 종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구나 남의 말을 수용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아무리 올바른 말이라도 기존의 신학적 틀이 있기 때문에 즉시 설득되지 못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대화의 가치는 새로운 생각과의 만남이며, 점진적인 사고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교회의 하나됨과 자기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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