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2)

by 작은성도 posted Aug 0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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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2)

 

 

[이인규님] 필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교회의 이단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이 세가지 교리는 오직 한가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즉 “예수그리스도는 God-man의 첫 샘플이며,...

 

---> 믿는 이들에게 주님을 영접한 이후의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닮은(지방교회 측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격을 제외하고 그분과 똑같이 되는) 성화된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방교회 측의 답변은 이것이 주님의 '되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에는 그분께는 '신성'만 있었을 뿐 '인성'은 아직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 그분은 '신성'이 있으시면서 동시에 '인성'도 있으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 되셨다. 이것을 지방교회 측은 '하나님-사람(God-man)'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마치 "웨슬리는 예수는 그 자신이 선포한 자, 즉 신-인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전통에 서 있다."(김영선,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70쪽)와 같다).

 

 

[이인규님] 지방교회 교인도 그와 똑같은 God-man이 될 수 있다” 라는 공식을 맞추기 위하여 모든 것을 전개시키고 있다. 즉 지방교회 교인에게 그 영(그들은 성령이라고 하지 않는다)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예수와 똑같이 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그 영’은 성령이 아니며, 그 영은 과정과 단계를 거친 양태론적인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 (이 부분은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상세하게 설명드려야 할 것 같다. 이인규님도 "가장 중요한 세가지..."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그분의 '신성'에는 변함이 없으셨지만 그분의 '인성'은 벗어버리신 것도 아니요 이전과 같이 다시 죽으실 수 있는 인성의 상태로 부활하신 것도 아니요, 성경의 기록에 따라 영화롭게 되신 인성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빌 3:21). 성경은 이것을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회복역)고 기록하고 있다.

 

즉 그분의 성육신 때에는 신성에 인성이 더해지셨고,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는 그분은 여전히 신성이 있으시고 인성이 있으시지만 그 인성은 더 이상 죽지 않는 하늘에 속한 몸, 영화롭게 된 인성이 되셨다는 것이다(고전 15:44). 그리고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는데, 성경은 아들이 성육신 하셨을 때 아들이 성육신 하신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성령의 상호내재는 여전히 유지되는 상태로 성육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의 표현으로 말하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셨다(요 1:14, 요 6:46에 쓰인 'para'라는 전치사는 'from with'의 의미임). 즉, 아버지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버지는 한 면에서 아들을 보내셨고 동시에 '상호내재'라는 삼위의 변치않는 원칙으로 인해 아들의 성육신에 '참여'하셨다. 이것은 성부 고난설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은 지상사역시 한 면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요 17:1) 동시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도 계실 수 있게 된 것이다(요 17:21).

 

이런 삼위의 본질적인 방면으로 인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은 더욱더 그분이 취하신 '인성'과 관련하여 복잡한 방면들이 있게 되었다. 한 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주셨고 그분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심판하셨지만 동시에 아들 안에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이 부활은 심지어 하나님의 영이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이 되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영원토록 존재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그 명칭이 나타나게 된다. 즉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성령이 계셨고 하나님의 영이 계셨지만(같은 영을 말하는 것임) 아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없었던 것이다(요 7:39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그분의 '인성'을 벗어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신성'에 더해 그분의 영화롭게 된 '인성'도 포함된 영이다. 이러한 영은 그분이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즉 그분의 부활하심 이전에는 '신성'의 영만이 존재했을 뿐, '신성-인성'의 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분이 부활하신 이후에 비로소 이러한 영이 존재하게 되었고 바로 이 영의 상태로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 오실 수 있는 분이 되셨다(롬 8:9-10바울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한 점은 (8)번 글 참조). 물론 그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롬 8:34).

 

그분은 한 면에서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셨지만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시라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우리는 거듭나거나 성화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외적으로 그분의 인도를 구하고 그의 축복과 보호를 구할 뿐 그분과 '연합'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성육신 때 '하나님-사람'으로 오셨고 그분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부인하심으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우리의 본이 되셨다(요 6:57).

 

그리고 이제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러한 본을 '재생산'하고 계신다(롬 8:29). 그분이 우리 안에 처음 들어 오셨을 때 (우리가 그분을 믿고 영접했을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고, 오랜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점점 더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엡 3:17). 그리고 이렇게 거처를 정하시는 것의 결과가 조금씩 성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인내하고 때로는 엄위하며 동시에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예수님과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신격에서는 아니지만 그분과 동일한 '하나님-사람들(God-men)'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말할 때 '성령'은 보통 신격의 세번째 위격의 '통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성경은 '성령'이란 표현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 '예수의 영(행 16:7)',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더 많이는 단순하게 'the Spirit'이라고 언급한다(요 7:39). 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성령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 안에 인성이 포함된 '그 영(the Spirit)'이시기 때문이다(계 22:17). (참고 http://www.localchurch.kr/3374)

 

이런 부분은 이인규님의 눈에는 '비성경적인 교리'로 보일지는 몰라도 지방교회 측은 사실상 마르틴 루터 이후로 주님의 회복의 노선의 모든 적극적인 유업을 계승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은 개신교가 서방교회의 전통 아래 있어 덜 주목받고 있는 교부 시대의 적극적인 유산도(예를 들면 신화(Deification) 진리) 계승하고 있음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즉 이 부분은 기본적인 교리에서 더 깊이 추구해야만이 알 수 있는 심화된 진리이며 성경과 신학을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람이 평가할만한 교리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 '되셨기'(요 1:14, 고전 15:45) 때문에 우리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의 영 안에서는 (그분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God-men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주된 부분인 혼과 관련해서는 아직 천연적인 사람인 부분이 많을 것이다(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와 같은(고전 3:1)). 그러므로 그분을 닮아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영 뿐 아니라 우리의 주된 부분인 혼 안에도 거처를 정하시게 되며(엡 3:17) 결국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변형되어(고전 15:44, 빌 3:21) '신격에서는 아니지만'(골 2:9, 행 10:26, 행 14:11-15)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요일 5:12, 벧후 1:4, 요일 3:2). 이것이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다(롬 8:30, 골 1:27).

 

 

[이인규님] 지방교회의 책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전형적인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성자 예수로 오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으로 왔다는 세 과정과 세 단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한 인격을 말하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읽고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적으로 매우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

 

--->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양태론처럼 보이는' 글들을 죽 나열한 다음에 위와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지방교회 측의 글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신약은 우리 하나님이 삼일(triune)이심을 계시한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삼일성에 관해 세 가지 주요 학설―삼위 양식설, 삼신론, 성경에 따른 순수한 계시―이 등장했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모두 영원한 것은 아니고 또 동시에 모두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가르치며, 단지 한 하나님의 세 가지 잠정적 나타남일 뿐이라고 말한다. 삼신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세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삼위 양식론과는 전혀 무관해야만 한다. 삼일성에 관한 그러한 극단적인 견해는 이단이다. 마찬가지로 세 하나님이 계시다고 가르치는 것도 역시 큰 이단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5-36p)

 

"삼위 양식론은 하나 안의 셋의 극단적인 면이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 안의 셋에 대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삼위 양식론은 극단에 치우쳐서 성경의 제한을 뛰어 넘고 있으며 셋 안의 하나인 면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무효화하고 있다. 삼위 양식론은 하나의 면에 관한 성경의 한도를 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극단위에 있는 이단이다. 삼신론은 반대편의 극단 즉 셋의 극단이다. 삼신론은 셋의 면에 관한 성경의 한도를 넘어서 셋의 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의 면을 소홀히한다. 또한 그것도 역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분명히 셋이기 때문에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삼위 양식론처럼 삼신론도 성경의 한도를 뛰어넘어서 하나의 이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은 둘 다 극단적인 것으로서 이단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6p)

 

"여러 해에 걸쳐서 나는 삼일 하나님에 관해 많은 메시지들을 전해 왔다. 만일 그 메시지들 안에 있는 어떤 문장들을 그 문맥으로부터 끄집어 낸다면, 내가 삼위 양식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또 어떤 문장들을 그 문맥으로부터 끄집어 낸다면, 마치 내가 삼신론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삼위 양식론도 삼신론도 가르치지 않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7p)

 

이인규님은 본인이 인용한 말과 위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조화시킬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이 보기에 지방교회 측은 "대내적인 가르침과 대외적인 주장이 다른 이러한 이중적인 성향을 가진" 단체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실 이것이 이인규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방교회 측이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신실한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런 지방교회 성도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위와 같이 말했다면 이것은 그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 얼마나 방해가 될 것이며 대다수의 지방교회 측 성도들은 정말로 믿을 것이 아닌가?

 

 

[이인규님]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정통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을 하고 있다. 그는 정통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한다.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287쪽)

 

---> 누가 봐도 "'어떤'('모든'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라고 한 대목은 문제가 없는 표현 같은데(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인규님은 "정통 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인규님은 누군가가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정통 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라고 말해 주겠는가? 이인규님이 위 인용문을 비판하는 이유는 혹시 '자신을 비판한다'고 느껴서인가?

 

 

[이인규님] 아래 글을 보면 지방교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노골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태론의 시각으로 볼 때에 정통삼위일체는 삼신론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초석이 된 니케야신조까지 부정을 한다.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내신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아 신조의 교리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439쪽)

 

---> 니케아 신조는 325년에 채택된 신앙 고백문이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기초로 381년에 채택된 신앙 고백문이다. 그런데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자인 김명용 교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2000년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로, 또한 가장 정통적인 신조로 꼽히는 신조이다."라고 주장하며,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통 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즉 성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이 세 분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조는 이 세 분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어느 곳에서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 정통 삼위일체론의 결정적인 신조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인규님은 이러한 장로교 신학자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니케아 신조를 기초로 채택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고도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장로교 신학자가 있는데, 니케아 신조를 보고 위와 같이 말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것인가? 위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충분치 않다"고 말한 것을 이인규님의 주장처럼 "삼위일체의 초석이 된 니케야신조까지 부정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한 것일까? 이인규님이 결코 인용하지 않는 지방교회 측의 다음과 같은 자료도 있다. 이런 자료도 함께 인용하고 평가해야 '선동하는 사람'이 아닌 공정한 이단 연구가가 아닐까?

 

"비록 사도들의 신조가 단순한 방식으로 쓰였지만 그것은 교부들이 심도있고 철저하게 연구를 하고 말씀을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 니케아 신조에 이단적인 것이 전혀 없고, 실제로 나쁘지 않지만 여전히 그 내용들에 있어서는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아직 정본(正本)으로 공인받지 못한 일곱 권의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한국복음서원, 2001, 61-63쪽).

 

그리고 지방교회 측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종성 박사님의 글에 대해서는 이인규님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대한 고백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고백과 비교할 때 매우 간략하다. '또 성령을 믿는다'로 되어 있을 뿐 아무 설명이 없다. 이와 같이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조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고백만으로는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권위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 그러나 사도신조의 내용 구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삼위일체론의 표준이 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삼신론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언급하면서도, 그 셋이 하나라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1995, 85-86쪽과 머리말 참조)

 

 

[이인규님] 즉 양태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삼위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지만, 자신들은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고 상호내재한다고 가르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캘빈의 시대에도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가 있었다. 그가 주장한 내용이 바로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베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IVP, 234쪽)

 

---> 양태론의 가장 큰 특징은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었다면 당연히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은 삼위의 '동시존재'를 믿기 때문에 이인규님이 언급해 주신 것처럼 '양태론'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베투스는 '삼중적인 신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칼빈 등이 그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중이다(인용 부호를 자세히 보라). 즉 세르베투스의 입장에서 누군가가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라는 말이다(이인규님이 '아마도' 비판에 눈이 멀어 누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인규님] 앞에서 충분히 검토한 바와 같이 지방교회는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으로 육신을 입고 왔으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의 세 과정, 세 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세 과정과 세 단계의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고 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웃을 수도 없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으로 육신을 입고 왔으며"라는 주장이 문제가 있다면 여기서의 '하나님 자신'을 이인규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인규님은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리고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죽으시고 부활하여 생명 주는 영이 되신 것은 '성경 말씀(고전 15:45)'인데 이인규님은 성경 말씀에 무슨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참고로 지방교회 측의 성육신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래의 글을 인용해 보겠다.

 

"계획이 세워진 후에는 아들은 그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실 필요가 있었다. 아들은 성육신되시기 위해, 즉 육신이 되시고 사람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오셔서 삼십 삼 년 반 동안 인생을 사시고,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아들은 오셔서 이 모든 역사를 이루셨지만, 이러한 역사들을 홀로 이루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이루셨다. 아들은 오셔서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여 만유를 포함한 구속 역사를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이루셨다. 만일 아들이 홀로 스스로 오셨다면, 다시금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동시 존재하심과 상호 내재하심 그리고 그 본질을 위태롭게 했을 것이다."(장로훈련 Ⅲ. '이상을 실행하는 길' 중에서)

 

 

[이인규님] 성경을 보면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파송한다.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위의 파송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의 황당한 주장을 들어 보면 양태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 이인규님은 삼위가 '구별'되는 것에 지나쳐서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지방교회 측의 주장이 이인규님에게 양태론처럼 보이는 것이고 이인규님이 삼신론자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인규님에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몇가지 드리고 싶다. 왜 예수님은 요 14:16에서 (아버지께 구하셔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후에 요 14:18에서 '내가' 너희에게 온다고 하셨는가? 그리고 요 14:23에서는 "우리(예수님과 아버지)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는가? 왜 성령을 파송했는데 내(예수님)가 오시고 심지어 우리(예수님과 아버지)도 함께 오시는가?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시는 분인데, 왜 그분들이 오셨는가?

 

 

[이인규님] 그렇다면 보내는 성부하나님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있고, 보내심을 받으시는 성자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 있으며, 파송되는 성령에게도 동시존재, 상호내재가 된다면, 삼위일체는 구위삼체가 되는가?

 

---> 이인규님은 "...삼위일체는 구위삼체가 되는가?"라고 질문해 주셨는데, 만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가 '다른' 분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에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당연히' 같은 분이 아닌가? 이인규님은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기도의 대상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할 때의 그 '아버지'가 '같은' 분이라고 믿지 않는가? (이해가 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의 답변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말 같아서 심히 우려스럽다('도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인규님께 적용하자면(요 20:29), "그대는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믿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하실 것이다).

 

이시점에서 먼저번 글에 언급한 대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로버트 고벳)"에 관한 글을 소개해 주고 싶다.

 

"성경에서 우리의 관점에 전달된 진리의 양면성은 그것이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를 산출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영광이다. 미심한 점을 밝히며, 다양한 외형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의 법칙을 유지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다양한 결과들을 추적하여 하나의 원칙을 찾는다. 이러한 완전함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그는 회피하거나 부인한다."

 

고벳은 계속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본성상 그분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원칙으로 계속하여 역사하신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벳은, "만일 성경에서 외견상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원칙이 병행하는 것이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복수 안의 단일성」, 「단일성 안의 복수」는 세상과 성경이 모두 기초로 삼는 중요한 원칙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명백하게 모순되는 문장에 관해 고벳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행동하려고 하기 전에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둘 모두를 명백하게 확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벳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받아들이는 근거는 우리가 그것들을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둘 모두를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에 관한 많은 논쟁이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고벳이 말한 것처럼, "진리에 대한 반대되는 관점들은 다른 시대에 고찰되었던 주제의 다른 부분들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벳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시는가? 그분이 그들의 기질과 지적인 편견에 상반되는 진리의 관점을 확증하실 때, 그들은 그분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편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것 중 한 가지를 무시할 것인가?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성도는 둘 다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류가 없으신 그의 아버지께서 각각을 차별 없이 증거하시기 때문이다."("삼위 양식론, 삼신론,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 중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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