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사하심에 대해(3)

by 관리자 posted Ap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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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심의 종류에 대해 지방교회측과 장로교 재건교회 소속 목사님이신 신윤식 목사님과의 대화입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clack891/220307351677


(신윤식 목사님) ”워치만 니가 말하는 사하심의 네 번째는 왕국의 사하심이다. 이는 마 18:23-35절에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신의 동료가 빚을 갚지 앉자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둔 것을 알게 된 주인이 탕감 했던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둔 내용을 근거로 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행함에 따라 징벌을 하신다는 것이다.


워치만 니는 이것을 구원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 또한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 ‘주의 종’이라 칭함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형제를 용서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 안에 있기에 생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행한 것에 따라 징벌을 받으며 천년왕국 시대에서의 신자의 위치는 지금의 행위에 달려 있기에 행함에 따른 징벌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왕국의 사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을 받은 신자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그에 대한 징벌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자기 행함에 대한 긴장감을 가지게 할 수는 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행함에 따른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나는 구원 받았다’는 안일함보다는 징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효과는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구원 받은 자도 행함에 따른 징벌이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 징벌은 무엇인가가 의문이다. 구원 받은 자라고 해도 징벌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가 오시기 전 지금의 세대에서 자기 백성을 진리의 길로 가게 하시고 거룩한 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다. 즉 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징벌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한 은총의 사건인 것이다.


지방 교회측의 입장 : 길게 설명하셨지만 이 주제에 있어서는 워치만 니의 대부분의 주장에 큰 이의가 없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단 신 목사님께서 맨 마지막 단락에서 “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징벌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한 은총의 사건인 것이다.”라고 하신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징벌의 원인 혹은 목적은 위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사실은 그 둘 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처럼 자기 형제에 대해 거리낌이 있는 것을 해결하지 않은 사람이 나중에 ‘감옥’에 갇히는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은 문맥상 죄의 댓가로 인한 징벌임이 분명합니다(23-26절). 한편 성경은 또한 아버지께서 자녀를 징계하심은 우리로 그분의 거룩함에 유익하게 함이라고 말씀 합니다(히 12:10-11).


(신윤식 목사님) ”주가 오신 후 신자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행함에 따라 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과연 그 징벌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지 부터 생각해야 한다. 행함에 있어서 완전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행함에 매인 인간적 생각일 뿐이다.”


지방 교회측의 입장 : 모든 신자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혹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고후 5:10, 롬 14:10). 혹자는 심판을 받되 벌은 없으며 단지 큰 상 작은 상을 결정할 뿐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전 3:12-15에서 ‘금 은 보석’으로 지어야 할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축하는 자들은 장차 “불을 통과하게 될 것”을 경고 합니다. 여기의 불은 소극적인 의미로 쓰여서 “그 일이 불타 버린 사람은 손실을 입을 것”(15절)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36도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분명한 성경의 경고가 있음에도 신 목사님께서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행함에 매인 인간적 생각일 뿐이다.”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이런 태도가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너무 가볍게 받아들인 결과일까봐 두렵습니다.


(신윤식 목사님) ”마 18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용서의 가치를 모독하는 자는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둔 것은 엄청난 빚을 탕감해준 임금의 자비의 가치를 묵살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라는 말은 우리의 무거운 죄를 용서하신 용서의 가치가 우리 속에 담겨 있는가를 묻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설령 가벼운 잘못은 용서할 수 있다고 해도 내 가족을 해치거나 큰 잘못을 범한 상대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며 때문에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저주에 속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아는 신자가 용서의 가치를 알 수 있고, 그 중심에 용서의 가치가 살아있는 그에게서 용서가 나오는 것이다.“


지방 교회측의 입장 : 매우 죄송한 말씀이지만, 위와 같은 신 목사님의 본문 해석이야 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은 다른 사람으로 부터 극심한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8장 그리고 5-7장처럼 하나님의 왕국에 관련된 말씀은 우리의 천연적인 노력으로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날 때 영접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삶으로써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고 한다면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실 때 위 용서하는 문제가 그분 앞에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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