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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 안 하셨다?

 

히브리서 2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구O님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위(히2:11)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아닌가요?

2. 위에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 거듭난 우리 믿는 이들이지요? 아닌가요?

3. 위에서 '난지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위 유형이 낳아진 방식이 차이가 있나요? 없나요?

4. 위 본문은 주 예수님이 누구를 가리켜 형제라고 부른다는 것입니까? 양자가 또 다른 양자들에게?

     아니면 맏아들이 다른 양자들에게?

 

paul77 12

성자인 창조주 하나님이 거룩케함을 입는 우리 피조물을 가리켜 형제라고 할 수 있느냐,
그것도 법적인 양자들에게...이것이 제 질문의 요지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데요.
저는 개혁신학의 이 구절 해석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hoooo 12.01.28. 10:42
<법적인 양자들>에게까지도 형제라고 불러주시니....그게 은혜의 정수가 아닐까요? 그런데, 정말로 궁금한데요.....

폴님은, 하나님의 친자(친아들)라고 봅니까?

  paul77 12.01.28. 11:00
일단 <창조주가 피조물을 형제라고 불러 주어서 감사하다>는 것이 
홀OOO님의 견해라고 정리해 두어도 되겠습니까?
  hoooo 12.01.28. 11:04
<감사하다>는 정도로 되겠습니까? 그런데, 저의 질문은 왜 이리저리 빠져나가십니까? 다시 질문을 드리지요

: "폴님은, 하나님의 친자(친아들)라고 봅니까?"

  paul77 12.01.28. 11:33
생명되신 주님이 내 안에 사십니다
그분이 저의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3:4, 1:27).
이런 사실을 가리켜 어떻게 부를 것인지는 홀OOO님 신앙 양심을 따라서
판단하시지요.
  hoooo 12.01.28. 11:42
ㅋ 자신을 하나님의 친아들로 여기지 않으면 신앙양심이 없는 것일까요? 폴님? 두렵군요.

폴님의 양심이 어떤 것인가 상상해 보기 시작합니다. <생명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

<그 분이 저의 영광의 소망>이라고 하는 말도 윗니의 신학적 배경을 고려하게 되니,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상하게 액면 그대로가 아닌 것 같군요. 같은 말을 사용하는데 다른 뜻이 담긴 것 같이 말입니다.

  hoooo 12.01.28. 11:44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의 직답을 회피하신다면, <폴님은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친아들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널리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paul77 12.01.31. 05:35
이런 논쟁이 개혁신학을 하신 분들과는 일어날 수 있어도 참되게 주관적으로 주님을 내주하시는 분으로
체험한 사람들끼리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위에서 홀OOO님이 네가 친자냐?"라고 하신 질문의 의미가 네가 삼위의 제 2격 (독생자)이냐 라는
질문이라면 당연히 아니요! 이지요. 
그러나 생명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네 안에 들어오셔서 너의 (새사람)의 인격과 생명이 되셨느냐 라는
질문이라면, 당연히 크게 아멘이지요. 

'
 
paul77 12.01.31. 05:40
개혁신학은 양자 또는 양자의 영을 크게 오해하심으로 이런 논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양자'라고 할 때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그런 의미의 양자를 말하는 것이 '결코'아닙니다.
만일 실제로 난 것이 아니고 법적으로만 자식이 된다면 그냥 그렇게 선포하면 될 일이지 
요한복음 3:6처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그영으로 난것은 영이다>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영으로 난 것이 영이다 라는 말은 그 앞의 육으로 난 것이 육이다..와 원리가 같음을 말합니다.
즉 성경해석의 일반원리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 점은 히2:11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적인 선입관을 본문해석에 대입하여 해석을 굴절시키는 것이
 
paul77 12.01.31. 05:46
성경본문보다 교리를 중시하는 분들이 쉽게 범하기 쉬운 잘못입니다.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짓느니라."(롬8:15)..여기서 우리가 받은 양자의 영은 무엇일까요?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우리 곧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를 받는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여기서 우리가 받은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본문이 양자될 것=우리의 몸의 구속..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이런 본문들은
법적으로만 하나님 자녀/생명과 무관...의 신학으로는 결코 풀수 없는
 
paul77 12.01.31. 05:50
것들입니다. 이처럼 양자의 영 곧 우리가 받는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가 우리 안에서 역하하시면서
우리를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일이 지금 교회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엡3:16-17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거처를 정하시는 일 또는
갈4:19처럼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뤄지는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생명이 우리 안에 주어지고 또 계속해서 주어짐(요10:10하)의 결과입니다.
이런 과정의 마지막이...양자 곧 우리 몸의 구속인 것입니다. 
법적으로 호적정리해버린 양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들이지요.
 
paul77 12.01.31. 05:52
양자..라는 성경용어는 우리가 내주하시는 생명이 자라서 장성한 아들들이 됨으로
법적으로 후자의 지위에 맞는 존재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갈4:5가 말하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할 때의 <아들의 명분>(휘오데시아)와
동일개념임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paul77 12.01.31. 05:55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생명의 영접으로 인한 거듭남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밖에 계시고
법적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고
말하면서 2장(16절)과 16장(25-26절)에서 언급한 <바울의 복음>(my gospel)이 개혁신학계 내에 아직 닫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paul77 12.01.31. 05:59
위 히2:11을 삼위의 제 2격이신 하나님의 아들 창조주가 피조물인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 안 했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그것은 참람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무슨 형제가 있습니까? 이 부분은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는냐>
라고 하셨을 때 언급된 <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풀립니다. 이런 각도에서 함께 이 본문을 더 풀어보기를
희망합니다.
 
hoooo 12.01.31. 07:38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거를 두 가지 들었습니다. 하나는 입양이요, 둘은 중생이라고 했습니다. 저의 이 두 가지 근거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한다면, 폴님의 말이 얼마나 참람한 말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님과 같이 고집스러운 사람, 참으로 오랫만입니다.
  paul77 12.01.31. 09:17
사실은 제가 그 주제와 관련해서 '휘오데시아'가 어떻게 adoption 으로 번역이 되었고, 입양이라는 이상한 교리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자료들을 찾아 올리려다가 저에게 경고를 하셨기에 버렸습니다.
제가 아는 한 생명의 유기적인 연합 개념을 배제한 법적 입양 개념은 엡1:4-5, 갈4:5, 롬8장의 하나님의 자녀 개념을 크게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을 보는 많은 창 중에 하나일 뿐이지요. 저는 개혁신학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갭..을 메꾸는 루터의 접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이러한 루터의 신학도 소화하지 못하고 내칩니다. 최근에 핀란드 핼싱키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루터
  hoooo 12.01.31. 09:24
님의 아전인수식의 해석에 지쳤습니다. 양자됨의 근거가 입양만 아니고 중생이라고 했다면, 단순한 법적 개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개혁신학을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있다면 배울 생각이 없는 줄로 알겠습니다. 배울 마음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해야 님의 귀에 울림이라도 일어나겠습니까? 거듭남 체험에 대해서 말하자면 님도 못할 것이 없는 저의 체험이 있습니다. 거듭남의 체험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양자됨의 근거를 제가 둘이나 들고 있는 것에 귀기울였어야 할 것입니다. 님의 체험이 도대체 무엇인지.....다른 사람의 체험과 신학에 귀기울이지 않는 그 체험이 무엇인지....의아스럽습니다.
 
paul77 12.01.31. 09:21
원전을 재검토한 칭의 개념에 대한 더 전진된 연구..관련 논문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듭남은 신학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실재입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신학적으로 세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해도 삶속에서 느끼고 체험하는 실재가 있습니다. 당연히 성경에서도 그런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말해도 '참람하다'면 어떻게 대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제자들도 심지어는 주 예수님도 하나님과 예수님 등 신적 존재와 관련하여 그런 말을 들었었지만, 나중에 그런 간격들이 다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린 알고 있지 않습니까...
  hoooo 12.01.31. 09:25
....
  무OO 12.01.31. 13:05
폴님은 말씀 자체에 모순을 가지고 계십니다.
'거듭남'과 어떤 이의 '종교경험'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검증할 수 없는 개인의 거듭남이나 종교경험의 문제를 성경적 입장에서 대상화할 때 신학이 없이 참과 거짓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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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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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6.21. 00:11
개혁신학을 귀히 여기는 분들은 중생 개념에 있어서도 크게 둘로 나뉘는 것을 봅니다. 즉 순간 중생론과 연속적 중생론이 그것입니다. 매우 복잡한 이론을 전개하지만 그 내용은 제가 이해한 바로는 <중생(좁은), 믿음, 중생(넓은)>이라고 단순화 시킬 수 있습니다. 앞의 둘을 중생으로 보는 견해와 뒤까지를 경험해야 중생이라고 보는 견해로 나뉘는 듯 싶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적 역사하심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중생한 사람으로서의 반응내지는 열매가 있어야 참 중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비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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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6.21. 00:16
앞의 주장은 뒤의 주장이 중생에 인간의 행위를 가미시킨다는 의심을 하는 것같고, 뒤의 주장은 앞의 주장이 한국교계 내에서 지금처럼 느슨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 내는 주된 원인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비칩니다. 그렇다면 중생은 무엇인가? 오3:6처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이 두 영이 하나로 연합된 것이 중생입니다. 이것이 믿음 이전에 발생할 수가 있을까요? 요1:12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중생으로 인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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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6.21. 00:23
휘오데시아 즉 우리 말로 양자로 번역된 단어도 생명되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가신 결과 외적으로도 성숙한 아들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을 말하지(이것이 하나님의 기쁜 뜻이며 창세전에 예정된 것임), 인간세계의 양자맺음처럼 생명관계는 쏙 빠진 채 법적 지위만 얻는 것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위 꼬리글 쓰신 분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거가 둘인데 하나는 입양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이다>라고 한다면 입양과 중생이 어떤 관계인지 좀 더 설명이나 대화가 피요하겠지요. 만일 중생으로 생명이 들어오고 그 생명이 자라서 입양(생명이 성숙한 결과 상속할 수 있는 법적 지위도 같는)되는 것이라면 양측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참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 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심을 인정하는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요일5:11-12 본문 해석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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