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성경 진리를 나누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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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를 이기는 자로 이끄신 다는 뜻 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또 다른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제공하십니다. 또한 그분은 세상의 그 어떤 축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란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승리한 신자"와 "패배한 신자"로 나누어 생각하는 지방교회의 신자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천국에는 그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방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마태복음 8장 12절에 나오는 "바깥 어두운 데"(즉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가 패배한 신자들을 위한 장소라고 합니다. 그런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기는 자를 "믿음의 인내를 지닌 구별된 성도들"로 이해합니다. 때문에 패배한 성도들은 천국의 외곽 지역으로 추방되어 온전한 축복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성경에 명백히 위배 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참 신자이면서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 신자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베드로는 "너희는 ....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참 성도는 누구나 궁극적으로 "이기는 자"가 됩니다. 믿음을 저버리는 이들은 사실 처음부터 그리스도께 속한 참 성도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요일 2:19).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으로 알려진 교리입니다.


"이기는 자"를 비롯해 그와 유사한 표현들이 요한의 기록에 종종 나타납니다. 사도 요한은 "이기는 자"를 성도와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그에게 참 성도는 모두 "이기는 자"로 간주되었습니다.그는 어린 성도나 성숙한 성도나 가리지 않고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일 2:13-14). 그는 모든 성도에게 적그리스도의 영을 경계하라고 경고한 뒤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고 말했습니다. "무릇 하나님꼐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라는 말씀은 요한이 이기는 자를 모든 성도로 간주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참 성도로서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들을 "이기는 자"로 간주한 사실은 교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계 2:7, 11, 17, 26, 3:5, 12, 21 참조)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는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천국이 우리의 집이 되고 우리는 그곳에서 손님이 아닌 가족의 일원, 즉 집주인의 자녀로 거하게 될 것 입니다. '기업'과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연구하면 그것만으로도 족히 책 한 권 분량이 됩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칩니다. (요 1:12) 바울도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7) 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이 승리한 성도들과 이름뿐인 성도들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기는 자들만 기업에 참여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깥 어두운 데"에 있는 이들은 기업을 얻지 못한 채 아버지의 집과 만찬 석상에서 쫓겨난 상태라는 것, 즉 천국의 이류 시민으로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이는 천국에 대한 성경의 증언과 정면으로 배치 됩니다. 그런 생각은 천국의 기업을 성도가 공덕을 세워서 얻는 것으로 만듭니다. 성도가 기업을 받지 못한 채 천국의 변방에 머둔다는 견해는 천국에 관한 성경의 증언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천국에서 각 사람의 영광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9장 16~19절에서 하나님은 충실한 두 종에게 각각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베푸는 귀인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도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마 11:11)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에 상급의 차이가 존재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주님은 충성된 성도들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며, 그것이 각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25:21~24)


그러면 보상의 정도를 결정짓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행위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불로 시험 받게 될 것 입니다.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던 일들도 단지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행위였다면 한갓 지푸라기 처럼 불타 없어질지 모릅니다. 영화의 세트장에 세워진 건물들은 겉으로는 볼때 매우 그럴듯 합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가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마치 진짜 건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불을 붙여 보면 그것들을 구성하는 재료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짚과 나무는 모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 3:14)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면 공적이 불타 없어진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것 같으리라"(15절)는 말씀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불이 붙은 건물에서 간신히 구조된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지라도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게 되지은 않습니다. 십자가의 강도처럼, 늦은 오후에 고용된 포도원 일꾼들처럼 자신이 행한 것을 훨씬 능가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까스로 불 집에서 구원받은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가 되어 천국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 하더라도 땅에서 가장 큰 자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마 11:11). 천국에서는 나중 된 자가 처음이 되고,처음 된 자가 나중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업에 관한 탈락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게 되든지 우리 모두는 어린양의 보좌 앞에 모든 상급을 내려놓으며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 확고한 계급 체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의 만찬 석상에서 쫓겨나 바깥 어두운 곳에 영원히 머무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기업은 보상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영원한 기업은 행위로 얻지 못합니다. 때문에 행위를 근거로 영원한 기업을 얻는다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신자들은 누구나 기업을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롬 8:15~17). 기업은 공로에 근거한 보상이 아니라 출생에 의해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녀의 상속권에 관해 당시 로마의 법률과 유대인의 관습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맏아들이 항상 두 배의 기업을 물려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법률은 모든 자녀가 똑같은 양의 유산을 상속 받도록 규정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인 청중을 상대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17절)라고 말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동등한 상속권을 지닌다는 데 초점을 둔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말은 모든 성도가 똑같이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7절 에서도 같은 내용이 발견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자니라." 기업은 신실한 종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행위에 따른 보상을 언급할 뿐입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의 생득권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모든 성도가 기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성도라면 누구나 유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계 21:7). 기업은 공덕을 쌓아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공덕에 기초해 할당 되지도 않습니다.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이 우리의 처소이자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식객이 아닌 온전한 가족이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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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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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24. 01:35
섭리님은 성경의 어느 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심으로 또 다른 면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말씀하신 것과 현실의 괴리로, 성경의 왜곡으로 나타납니다. 섭리님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본인이 전적으로 단번에 다 이뤄버리시면 될 것을 왜 이토록 몇천 년의 과정이 필요하며, 신약의 서신서는 왜 필요할지 의심스럽습니다. 1. 영적 생명의 성숙이 무엇인지, 2.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3. 그것을 처리하기 위하여 인간편에서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아신다면(거듭난 우리가 매일 피부에 와 닿게 체험하는 일상의 일들이 아니던가요?) 위 글이 성경의 구원의 반쪽만 말한 것임을 금방 알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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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24. 01:40
새예루살렘
계획과 결과만을 강조하시고, 긴 과정의 시간들을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말로 압축해 버리시면 왜 서신서는 그토록 반복해서 우리에게 '..하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PROVIDENCE 작성자 2014.05.24. 20:10
이래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시고 하셔야 합니다 위트니스리 신학을 방어내지 합리화 하기 위한 정도로만 피상적으로 타교단 신학을 보시다 보니 개혁주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 못하시고 최근 몇일간 인터넷으로 주재권 구원등을 처음 접하시니 그렇습니다 상황이 그러면 신중하셔야 되는데 이렇게 단정적으로 써내려 가시니 과거 지방 교회가 당한 오해를 똑같은 식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전부 앞에서와 반복 했던 같은 종류의 선입견에 찬 오해와 오류들에 불과합니다 왜냐구요? 신자라도 성화의 은혜로 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질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맹렬히 공격하시고 계시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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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27. 11:08
PROVIDENCE
섭리님이 이곳에서 소개하신 내용이 그런 인상을 주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섭리님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다 안다고 전제하신 것이고, 너무 성급하게 주재권 신학 등으로 지방 교회측의 구원을 보완 또는 바로 잡으려고 서두신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개혁신학의 스팩트럼은 매우 다양합니다. 개혁신학 내에서 1. 칭의론, 2. 중생론, 3. 성화론은 물론이고, 성령론, 교회론..등등이 이것이 개혁신학이다..할 만한 통일된 것이 없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많고 또 토론을 통해 확인된 상태입니다. 섭리님이 말씀하시는 개혁신학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해 주시고 그 뿌리도 좀 더 드러내 주시면 이 점이 더 선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만일 섭리님이 존 맥아더의 가르침을 개혁신학이라고 표현하셨다면, 당장 미국에 거주하시면서 한국의 개혁신학도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계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 김명도 박사님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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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27. 11:14
PROVIDENCE
칼빈주의 구원론을 바로 잡기 위해 나온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이니, 이 신조대로 가야한다는 주장을 소개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장로교단 신학교 총장님은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유일신을 가르치는 신조이고, 소수가 신봉하는 신조임으로 세 하나님의 구분(분리?)을 명확히 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삼위일체의 기본을 삼아야 한다는 말을 정식 논문에서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학자마다 구원의 서정 순서가 다르고,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견해가 역시 다릅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쓰신 글에는 인간의 노력을 인정하지만, 또 어떤 개혁신학을 하신 분은 그런 면에 불만을 표출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성령론에 대해서도 요7:39에서 말하는 '아직 계시지 않은 성령' 이 누구이신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답이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 영접할 성령'을 말하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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