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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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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요즈음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이 이단적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기 원한다. 이 메시지는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선언하려는 것일 뿐 아니라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도와 모든 이들이 삼일 하나님에 대한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믿는 것이 성경을 따른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에 관한 이 문제는 2세기로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커다란 논란과 격심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지난 십 팔구 세기 동안 이 논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것은 대적이 성도들 간의 화합을 파괴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끊임없는 논쟁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전통적인 용어와 말과 교훈들로부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삼위일체」와 같은 이런 비밀에 관한 논쟁은 끝이 없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이러한 덫을 피하라. 이 메시지에서 나의 부담은 이 비밀에 관하여 순수한 말씀으로 여러분과 교통하는 것이다.


Ⅰ.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계시에 통제받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 언급되는 하나님(엘로힘 : Elohim)이라는 단어가 복수이기 때문에(창 1:1), 어떤이들은 그 단어를 「하나님들」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하나님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끔찍한 것이다. 시편 86편 10절은 『당신만 (홀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지, 『당신들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 대명사는 이인칭 복수가 아니라 이인칭 단수이다. 이 구절의 엘로힘(Elohim)은 히브리어로 삼중수(三重數)이다. 만일 여러분이 뉴베리(Newberry) 성경의 표를 참조한다면, 여기서의 하나님은 삼중수라는 표시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86편 10절은 『당신만 (홀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다. 이 「홀로」라는 단어가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당신만 홀로 하나님(하나님들이 아닌)이십니다.』


아마 어떤이들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창세기 1장 26절에서 자신을 「우리」라 지칭하시고 「우리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가 아니면 한 분 이상이신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자신을 지칭하실 때 「우리」와 「우리의」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나의 대답은 그분은 「삼일 하나님」이시요 「삼위일체」는 비밀이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삼위일체」를 철저히 이해하고 충분히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수학이나 화학의 영역에서 사물은 사람의 지성에 의해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그런 것은 과학이지 비밀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총명한 생각을 사용하여 삼일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그분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누구도 삼위일체를 충분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비밀로 남아 있다. 왜냐고 묻지 말라. 나는 왜 그런지를 모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것뿐이다. 다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취하라.


신·구약 모두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한다. 이사야서 45장 5절은, 『나는 여호와라 …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여기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은 삼중수(三重數)로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우리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6절과 디모데 전서 2장 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분명한 결론을 본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하나님으로 여기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 고린도 전서 8장 4절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한다. 한 하나님을 인하여 찬양한다! 이것이 기본적이고도 결론적인 원칙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믿는가? 이것은 단지 우리의 해석인가? 우리는 모두 『나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Ⅱ. 하나님은 삼일(三一)이시다


이 유일한 하나님은 삼일이시다. 여러 해 동안 시도해 보았지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른다. 지난 오십 년 동안 나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분석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결국 나는 그것을 풀 길이 없음을 알았고, 오래 전에 포기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사람아, 너는 너무 작다. 너는 결코 삼위일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A. 「나」가 「우리」임


이사야서 6장 8절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나」인가, 「우리」인가? 우리는 그분이 둘 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지는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분이 「나」와 「우리」 둘 다이심을 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하시고 또한 「우리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다. 같은 원리가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7절에서도 사용된다.


신약에서도 동일한 사상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우리의)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는 「우리」와 「우리의」가 있다. 「우리」와 「우리의」는 틀림없는 복수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하나님인가, 한 하나님인가? 물론 그들은 하나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라고 말씀하시는가? 만일 당신이 『그것은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한 하나님이 둘이 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서 주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다시금 그분 자신과 아버지를 「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라. 그들이 하나라면 왜 복수 대명사인가? 나는 모른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나 이해로는 미치지 못할 비밀이다.


B.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이 구절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그 셋이 오직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 구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름들이 아닌)으로 침례를 주고』라고 말한다. 하나의 이름을 가진 셋이 있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요, 삼위일체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책에서 앤드류 머리는, 『아버지 안에는 만유의 창시자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계시되셨고, 표현되셨고, 가까워지셨으며,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의 몸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를 위해 갖고 계신 것들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과 아들이 이루신 것은 오직 성령의 계속적인 중재와 활발한 운행하심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적용될 수 있고 효능을 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C. 셋 모두 하나님이심


1.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다


의심할 바 없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의 여러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 전서 1장 2절과 에베소서 1장 17절을 보라.


2. 아들이 하나님이시다


아들 또한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 1장 8절에서는,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들은 하나님이라 불리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말씀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요 아들이시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면 아들 또한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로마서 9장 5절은, 『그리스도 …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좋아한다.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3. 성령이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 5장 3절과 4절에서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본다. 3절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성령을 속였다고 말했는데, 그 다음 구절에서는 그가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성령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는 몇 분의 하나님이 계시는가? 오직 한 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오직 한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다만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D. 셋 모두 영원하심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소문과 비난이 있다. 나는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사상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 성경에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고 선포하기 원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1. 아버지가 영원하시다


이사야서 9장 6절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 축어역에서 이 문구는 「영원의 아버지」 또는 「영원한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2. 아들이 영원하시다


아들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아들에 관하여,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7장 3절은, 「그분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이란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직선보다는 원이 영원한 하나님의 상징인 이유이다. 그분은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다.


3. 성령이 영원하시다


성령 또한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함을 선포한다.


E. 셋 모두 동시에 존재하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한 것을 주목하라.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아들과 성령을 보내시는 아버지를 본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동시에 나타나 있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는 아버지와 성령과 아들 그리스도가 있다. 이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 성경은 아버지가 어떤 특정 기간 동안 존재하신 다음에 아들이 왔고 또 그 아들이 특정한 기간 후에는 존재하시지 않고 성령으로 대치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 이 구절에서 성경은 아버지는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은 성도들을 강건케 하며, 아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도 분명하게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신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교제가 언급되었다. 셋 모두가 동시에 나타나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 4절에서 6절은 성령의 은사와 주님의 직임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주님과 하나님을 본다. 다시금 성령과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역사하심을 본다. 성령은 은사를 주시며, 주님은 섬기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아버지께서 더이상 존재하시지 않는다거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하여 왔다거나, 또 얼마 후에 성령이 아들을 대신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셋 모두가 영원하며 동시에 존재하심을 믿는다.


F. 셋 모두 하나이심


여기에 참으로 문제가 있다. 당신은 이 셋 모두가 하나이심을 믿는가?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1. 아들이 아버지이시다


이사야서 9장 6절을 보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아기가 누구인가? 그는 예수이다. 그 아기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이 아들이 누구인가? 그는 예수이다.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을 뿐 아니라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왜 그분은 기묘자라 불리는가? 그분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분은 기묘자이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이름의 아기가 또한 전능한 하나님이라 불린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유대인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 작은 예수가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믿었다면 그들은 즉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나의 하나님은 예수시다! 나의 하나님은 그 작은 아기이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난 그 작은 아기가 나의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그의 네번째 이름 또는 칭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그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아들인가, 아버지인가?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나신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믿는다면, 당신은 또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한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이제 요한복음 14장 8절과 9절의 말씀을 보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임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어떤이들은 이 말씀이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대표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왜곡한다. 만일 여러분이 왜곡하지 않고 이 말씀을 문맥을 따라 읽는다면, 이 구절의 아들이 아버지임을 깨달을 것이다. 빌립은 아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아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었고, 너는 나를 보았다. 나를 보았으므로 너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우리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이사야서에서 아들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읽어보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여기 계신데 당신은 왜 그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까? 그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다.


다음은 소위 이단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해 몇몇 사람들이 논의하던 모임에서 녹음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 어쨌든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평강의 왕이라 전능한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임이라고 했다. 여기서 예수가 아버지라 불리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아버지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 9장 6절이 말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전통 때문에 이렇게 당연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두려워하여 예수가 아버지이심을 당연하게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전통을 위하여 있는가? 여러분은 전통을 주의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양심과 생각에 따라 모두 이사야서 9장 6절의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전통 때문에 당연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대화 가운데 이사야서 9장 6절의 분명한 말씀에 따라 예수가 아버지임을 「인정한다」는 정직한 말이 있어서 기쁘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이 구절을 왜곡하여 말하기를,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릴 뿐 아버지는 아니다.』라고 한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말인가? 당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니! 한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여기의 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을 낳은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영원한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버지라 불리는 그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그 아기도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분명히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를 인정하는 한 다른 하나도 알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냉철한 생각은 이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2.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것은 분명한 성경 말씀이다.


3.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미국 표준역)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이 누구인가? 예수이다. 생명 주는 영은 누구인가? 성령이다. 성령 외에는 생명을 주는 다른 영이 없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리는 예수가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주 예수님이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계시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주 예수는 아버지요 아들이요 영이며, 참 하나님이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4. 주(아들)는 영이시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主)는 누구인가? 의심할 바 없이 예수이다. 영은 누구인가? 물론 성령이다. 여기의 주는 예수이고, 영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를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것이다!


앤드류 머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영」 2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는 영의 생명 안으로 높여지셨을 때 「주 성령」이 되셨다 …. 제자들은 예수를 안 지 오래 되었지만, 그를 주 성령으로 알지는 못했다 …. 주님을 주 성령으로 전파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으로만 전하는 열성적인 복음 전파가 많은 듯하다 …. 그리스도를 주 성령으로 알고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믿는이들을 그의 형상 안으로 변화시키고 교회 안에 살게 할 때, 믿는이들 가운데 있는 그러한 사역은 생명과 능력의 사역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사역이야말로 참으로 그 영의 사역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지 세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어떤이들은 심지어 분명하게 그렇게 말한다. 다른이들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잠재의식 속에서는 이러한 관념을 붙들고 있다. 아마 이 메시지를 읽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이들도 과거에 그런 관념을 갖고 있었지만, 정죄받는 것이 두려워서 말하기를 꺼렸을 것이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시며 주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설교자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형제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몇 분의 하나님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세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했다. 그와 같은 말은 절대로 이단적이다. 성경의 계시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이러한 통제하는 원칙이 없이 수세기 전에 사람들은 세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격의 세 인격에 대한 말로 「위격들(person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세 위격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전통적인 용어들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말하며, 또한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삼이일(三而一)이심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별개의 세 「인격들」로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에 어긋나는 것이다.


로마서 강해로 유명한 그리피스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위격」이라는 용어 또한 종종 논박을 받는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이 용어도 부적절하다는, 심지어 명백한 오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 …. 「본질」이나 「위격」 같은 용어들을 사용해야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사람의 본질이나 인격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삼위일체에 대한 진리와 체험은 신학적인 용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신학의 원칙」에서)


G. 셋 모두 우리 안에 계심


에베소서 4장 6절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만유의 아버지시라 …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로 볼 때, 아버지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분명하다.


아들이 또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요한복음 14장 20절의 『그 날에는 …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골로새서 1장 27절의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고린도 후서 13장 5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를 볼 때 명백하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17절은 『진리의 영이라 …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 또한 우리 안에 계신다.


아버지가 우리 안에 계시고, 아들이 우리 안에 계시며, 성령 또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의 체험을 따르면, 몇 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가? 하나인가, 셋인가? 하나이다! 문자로는 셋인 것 같지만, 우리의 체험으로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Ⅲ. 비밀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절을 보고서 우리는 말씀과 하나님이 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절은 말씀과 하나님이 하나임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말씀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말씀은 하나인가, 둘인가? 둘 다이다. 이것은 비밀이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은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와 영은 하나다. 왜냐하면 주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구절에서 「주의 영」을 말한다. 이것은 주와 영이 둘임을 가리킨다. 주와 영은 하나인가, 둘인가? 이것은 비밀이다.


히브리서 1장 8절과 9절에서 어떻게 아들이 하나님이라 불리고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으로 언급되는지를 주의해 보라.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네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어』.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이여,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비밀이다.


마지막으로, 계시록 1장 4절과 4장 5절과 5장 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 영(엡 4:4)이 「일곱 영」으로 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순수한 말씀을 단순하게 취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 삼일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바를 알고 그것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순수한 말씀에 따른 진리를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과 토론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삼위일체를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제한된 지력에 따라 하나의 교리적 문제로는 완전히 이해되실 수 없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다. 삼일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즉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많은 시간을 들여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지금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 영 안에 내주하심을 지적하는 이유이다. 만일 이것이 체험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을 그다지 관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체험한 바를 사람들에게 분명히해야 했다.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는 「영적 성장」(무디 출판사 刊)이라는 책 144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바울은 부활한 주님과 성령을 하나로 보는 것 같다. 우리는 바울이 신학을 쓴 것이 아니라 체험을 적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와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체험이다. 우리가 얻는 힘과 빛과 인도는 성령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동일하게 온다.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고 있는 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용어나 교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다.

 

ⓒ 1976 Living Stream 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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