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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삼위일체 논문(전문)―미국 복음주의신학자협의회(ETS) 연례모임에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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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논문은 아랫 글(https://www.localchurch.kr/29290)에서 소개해 드린 "지방교회 관련 ETS/EPS 논문들" 중 두번째 것으로 한글 번역은 영어 원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최소한의 이해를 위해 보조 수단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비공식적인 번역이므로, 정확한 원문의 의미는 An open Letter 사이트(http://an-open-letter.org/)에 올려진 영어 원고(http://an-open-letter.org/ets-2016-the-divine-trinity-in-the-teaching-of-witness-lee)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The Divine Trinity
in the Teaching of Witness Lee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


Introduction


소개


In a ministry that spanned seven decades, Witness Lee (1905-1997) consistently taught that the God of Scripture is the Triune God. Affirming the orthodox understanding that there are “three persons in the Godhead,”[1] he taught that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are eternally “distinct but inseparable”[2] hypostases who operate indivisibly, yet still distinctly, to carry out the divine economy in time. In his view the simultaneous co-working of the three was a matter of transcendent beauty, and he imparted to his audiences a deep appreciation for the work of the Triune God to accomplish the divine intention according to what He is in His Trinity. “The divine revelation of the divine economy,” he wrote, “shows us the Divine Trinity in all His excellencies, beauties, and virtues. These excellencies, beauties, and virtues are seen in the divine coordination in the Godhead.”[3]


지난 70년 동안의 사역에서 위트니스 리(Witness Lee)(1905~1997)는 끊임없이 성경의 하나님이 삼일 하나님(Triune God)이심을 가르쳤다. 그는 정통적인 이해에 따라 "신격 안에는 세 위격이 계심"을 확증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영원히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고", 분할되지 않게(indivisibly) 역사하시는 위격들이시나, 시간 속에서 여전히 구별되는 방식으로 신성한 경륜을 수행하신다고 가르쳤다. 그의 관점에서는 세 분이 동시에 동역하시는 것은 탁월한 아름다움이었고,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바(what He is)에 따른 신성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삼일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하여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청중들에게 깊은 감상을 전하였다. <신성한 경륜에 관한 신성한 계시>라는 책에서 그는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분의 모든 탁월하심과 아름다움과 미덕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러한 탁월함과 아름다움과 미덕들은 신격(Godhead) 안에 있는 신성한 동역을 보여준다."라고 했다.


Although Witness Lee consistently condemned modalism as heresy, he was at times accused of propounding a modalistic view of the Trinity. Because he affirmed the scriptural identifications of the Son with the Father (Isa. 9:6) and the Lord, the resurrected Christ, with the Spirit (2 Cor. 3:17; 1 Cor. 15:45), some early critics of his ministry charged him with heresy, or at least heterodoxy, claiming that the identifications destroy the eternal distinctions in the Godhead. Some of those critics have since rescinded their earlier charges, but others have not, and old misrepresentations continue to flourish on the Internet and among intractable detractors who refuse to fairly evaluate Witness Lee's ministry.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modalism)은 이단이라고 일관되게 정죄하였지만, 그는 때때로 삼일성(Trinity)에 관한 양태론적 관점을 지지하는 자로 비난받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성자와 성부(사 9:6) 그리고 주님, 곧 부활한 그리스도와 그 영(고후 3:17, 고전 15:45)의 성경적인 동일시(identifications)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몇몇 초기 비평가들은 그의 그러한 동일시는 신격 안에 있는 영원한 구별됨들을 무너뜨린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사역과 관련하여 위트니스 리를 이단(heresy), 혹은 적어도 이설(異說) 신봉자(heterodoxy)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평가들 중의 몇 사람은 본인들의 초기 비난들을 철회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고 있으며 인터넷 그리고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공정하게 평가하기를 거부하는 완고한 반대자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잘못된 내용들이 여전히 유포되고 있다.


What his critics do not recognize, or what they are unwilling to admit, is that Witness Lee upheld the orthodox understanding of coinherence (perichoresis), which, as Allan Coppedge defines it, is “the mutual indwelling of each person with the other” so that “when one member of the Trinity acts, the whole Godhead is involved.”[4] Coinherence is evident in the New Testament, and theologically the concept, if not the term, goes back at least as far as Athanasius (296-373).[5] Furthermore, Witness Lee taught that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coexist eternally, indicating distinction among them, just as coinherence indicates their inseparability. By affirming the coinherent relationships of the three, and by holding to their eternal coexistence, Witness Lee affirmed the essential oneness of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and their identifications with one another without compromising their eternal distinctions in the Godhead.


위트니스 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은 위트니스 리가 상호 내재(페리코레시스) 즉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 안에 상호 내주하시며," 결국 "삼일성의 한 분이 행하실 때, 신격의 전체가 참여하게 된다"는 알란 코페지(Allan Coppedge)의 정의처럼 정통적인 이해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상호 내재는 신약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 신학적으로 그 개념은, 만약 용어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더구나, 위트니스 리는 어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영원히 동시 존재(coexist)하심은 위격들 간의 구별되심을 설명하고, 상호 내재(coinherence)는 위격들 간의 불가분리성을 설명한다고 가르쳤다. 위트니스 리는 그 세 위격들의 상호 내재적 관계성을 확립하고, 세 위격의 영원한 동시 존재를 주장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본질적인 하나를 확증하였고, 신격 안에서 위격들의 영원한 구별되심에 관한 의심을 초래함이 없이 서로 동일함(identification)을 확증하였다.


In his later ministry Witness Lee enriched the notion of coinherence by employing the term incorporation to describe the mutual indwelling of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and their working together as one. Denoting mutual existence, mutual indwelling, and mutual operation, incorporation indicates a reality in the Godhead by which oneness and distinction are preserved both in the immanent existence and in the economic activity of the three persons. Thus, when one person acts manifestly (e.g., the Son in His human living), He incorporates the operations of the other two in His distinct action, so that the eternal distinctions yet inseparable operations of the three are preserved in all that they are and do. Incorporation, therefore, maintains a proper and balanced understanding of how the three persons in the Godhead exist in relation to each other and act in relation to each other.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후반부 사역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위격들이 하나로 함께 일하심에 관한 상호 내재를 설명하려고 합병(incorpo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상호 내재 개념을 더 풍성하게 했다. 상호 존재, 상호 내재, 상호 활동을 설명하는 합병은 신격 안에 있는 한 실체(a reality)를 드러낸다. (실체의) 하나됨(oneness)과 구별됨(distinction)은 내재적인 현존과 세 위격의 경륜적인 활동 모두를 보존하게 한다. 그래서 한 위격이 드러나게 행하실 때에도(예, 인간 생활을 하신 아들), 한 위격은 자신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행위를 하는 다른 두 위격들의 활동에 협력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별되심, 더욱더 분리 불가한 세 위격의 활동은 그들의 존재와 움직임을 보존하게 한다. 그러므로 합병은 신격 안의 세 위격이 서로 관계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며, 서로 관계 안에서 행하는지에 관한 합당하고 균형된 인식을 계속 유지하게 한다.


In what follows we will explore the foregoing matters in more detail, beginning with a brief presentation of Witness Lee's orthodox Trinitarianism. We will then assess the charges of heresy against him, consider more finely his particular perspective concerning the Divine Trinity as an incorporation, and offer some concluding thoughts on his assertion that the truth concerning the Divine Trinity is not for mere doctrinal understanding but for the believers' experience of the God who is triune. We believe that by properly evaluating Witness Lee's teaching, scholars will find a clear counterwitness to old misrepresentations of his ministry and a rich contribution to Trinitarian studies that is both orthodox and practical.


우리는 위트니스 리의 정통 삼위일체론(Trinitarianism)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앞에서 언급한 사안들을 좀 더 자세히 탐색할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그에게 붙여진 이단이라는 비난을 재평가할 것이며,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그의 특별한 관점인 합병을 세밀하게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진리가 단지 교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믿는 이들이 삼일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에 대해 몇 가지 결론적인 생각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합당하게 재고될 때 학자들이 그의 사역에 대한 과거의 오해들을 명확하게 해소하며 정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삼위일체 연구에 대한 그의 풍성한 기여를 수긍하게 되리라 믿는다.


Witness Lee's Trinitarian Orthodoxy


위트니스 리의 정통 삼위일체론


A particularly concise yet substantial statement of Witness Lee’s Trinitarian orthodoxy can be found in Lesson 2, “The Triune God,” in volume one of Truth Lessons,[6] a series he developed for teaching biblical truth to new believers. Referring to a number of verses, including 1 Corinthians 8:4 and Isaiah 45:5, Witness Lee emphasizes that God is one. Yet he points out that there are intimations of plurality in God in the Old Testament, as in Genesis 1:26 and Isaiah 6:8, where the plural pronouns “Our” and “Us” are used in reference to Him. The plurality is more specifically revealed by the Lord Jesus in Matthew 28:19, where He charges the disciples to go forth and make disciples of all the nations, “baptizing them into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he singular name of Father, Son, and Holy Spirit indicates not only plurality but, more specifically, triunity in God, as Witness Lee explains:


위트니스 리의 정통 삼위일체론을 특별히 압축하고 요점을 담아 진술한 것이 <진리 공과> 제1권의 제2과 "삼일 하나님" 편이다. 이 진리 공과 시리즈는 그가 새 신자들에게 성경 진리를 가르치려고 만든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고린도전서 8장 4절과 이사야 45장 5절을 포함한 많은 성경 구절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한 분(God is one)이심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구약 창세기 1장 26절과 이사야 6장 8절처럼, 하나님 안의 복수성에 대한 암시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 구절들은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복수대명사인 "우리의" 그리고 "우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러한 복수성(plurality)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그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라"고 명령하신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의해 더 분명하게 계시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가지시는 단수의 이름은 복수성뿐만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위트니스 리가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에 안에 있는 삼중성(triunity)을 가리킨다.


The Lord here clearly speaks of Three—the Father, Son, and Spirit. But when He speaks here of the name of the Father, Son, and Spirit, the name which is used is in the singular number in the original text. This means that though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three, yet the name is one. It is really mysterious—one name for Three. This, of course, is what is meant by the expression three-one, or triune….This name includes the Three—Father, Son, and Holy Spirit—and tells us that God is triune. Although God is only one, yet there is the matter of the Three—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7]


주님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셋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분이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말씀하실 때 그 이름은 원문에서 단수형이다. 이것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셋이시지만, 이름은 하나임을 의미한다. 세 분의 이름이 하나라는 것은 참으로 비밀스럽다. 물론 이것은 셋-하나(three-one) 혹은 삼일(triune)을 의미한다. … 이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셋을 포함하고, 하나님께서 삼일(triune)이심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one)이시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 셋의 방면(matter)도 있다.


Following his affirmation of the triunity of God, Witness Lee demonstrates that there are eternal distinctions among the Father, Son, and Spirit. First, each is said to be God, as, for example, in 1 Peter 1:2, which speaks of “God the Father”; Hebrews 1:8, which applies Psalm 45 to the Son, saying, “Your throne, O God, is forever and ever”; and Acts 5:3-4, where Peter confronts Ananias for deceiving the Holy Spirit and thereby not lying to men but to God. Furthermore, Witness Lee affirms that each of the three is eternal, as in Isaiah 9:6, which identifies the “eternal Father”; Hebrews 7:3, where the Son of God, typified by Melchisedec, is without “beginning of days nor end of life”; and Hebrews 9:14, which says that Christ offered Himself to God “through the eternal Spirit.” In his teaching Witness Lee recognized a strong testimony of distinction among the Father, Son, and Spirit in their each being God and each being eternal, a testimony that speaks also to their simultaneous, eternal coexistence.


하나님의 삼중성(triunity)을 확증한 후에,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영원한 구별이 있음을 논증한다. 먼저, 각각이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장 2절은 “하나님 아버지”를 말하고; 시편 45편을 인용한 히브리서 1장 8절은 아들에 관하여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보좌가 영원무궁하며”라고 말하고; 베드로는 사도행전 5장 3-4절에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고 했고, 그것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거짓말한 것이라고 했다. 위트니스 리는 더 나아가 삼위의 각각이 영원하심을 확증한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그분이 “영원한 아버지”와 동일하심을 언급하며; 히브리서 7장 3절은 멜기세덱으로 예표 된 하나님의 아들이 “생애의 시작도 생명의 끝도 없다”고 했고; 성경은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영을 통해”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리셨다고 말씀한다. 위트니스 리는 세 분 각각이 하나님이시고, 모두 영원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구별되신다는 강력한 증거이고, 이들 각각이 동시에, 영원히 공존하심의 증거임을 인식하고 가르쳤다.


In Truth Lessons Witness Lee further focuses on three portions in the New Testament that reveal the simultaneous coexistence of, and therefore the distinctions among, the three, which forbids their being successive modes of an undifferentiated monadic deity. One passage he cites is Ephesians 3:14-17, the apostle Paul’s prayer for the believers to experience the Triune God. Of these verses Witness Lee writes, “This portion of the Word shows that the Father hears the prayer, the Spirit strengthens the saints, and the Son—Christ—makes His home in our hearts. By this we can also see clearly that all Three coexist simultaneously.”[8] He writes further:


위트니스 리는 <진리 공과>에서 신약에 있는 세 분의 동시 존재와 각각 구별되심을 계시하는 셋의 방면에 초점을 두어 설명하고, 이 셋은 구분이 안 되는 단일 신격(monadic deity)이 연속적인 양태(modes)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인용한 에베소서 3장 14-17절은 사도 바울이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기도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이 말씀이 "아버지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 영은 성도들을 강하게 하시며,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 가운데 그분의 거처를 만드시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우리는 또한 이 구절에서 세 분 모두가 동시에 공존하심을 분명하게 본다." 위트니스 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refore, we do not believe that the Father ceased to exist and was replaced by the Son, then after another period of time the Son was replaced by the Spirit. We believe that the Three—Father, Son, and Spirit—are eternal and co-existent.[9]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아들로 대치되고, 이어서 또 다른 시기에 아들이 그 영으로 대치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셋은 영원히 공존하심을 믿는다.


By virtue of their eternal coexistence, as Witness Lee recognized, the three hypostases are eternally distinct. Coexistence, however, is only one aspect of their eternal, mutual relationship in the Godhead.


위트니스 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세 분은 영원히 공존하심으로 세 위격(hypostases)은 영원히 구별되신다. 그러나 공존(Coexistence)은 신격 안에 있는 세 위격들의 영원한 상호 관계의 단지 한 방면일 뿐이다.


The relationship among the three persons of the Divine Trinity, as Witness Lee points out, “is not only that they simultaneously coexist, but, even more, that they indwell one another mutually,”[10] or coinhere. This coinherence indicates their inseparable oneness. Relying particularly on the Gospel of John for textual evidence of coinherence, Witness Lee shows that the Son is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the Son, so that when the Son comes, He comes with the Father (14:10); that the Son and the Spirit come not only from but also with the Father (6:46; 15:26), as indicated by the dual denotations of the Greek preposition para; and that as the Son comes in the Father’s name (5:43), so the Spirit comes in the Son’s name (14:26), indicating that the Son’s coming is likewise the Father’s coming and that the Spirit’s coming is likewise the Son’s coming. Such identifications among the three are possible because all three coinhere and thus are inseparable. Witness Lee writes:


위트니스 리가 지적한 것처럼,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의 관계는 "그들이 동시에 공존하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 안에 상호 거주 혹은 상호 내재하신다." 이 상호 내재는 그분들이 분리 불가한 하나(oneness)이심을 의미한다. 위트니스 리는 특별히 요한복음에 있는 상호 내재의 성경 근거로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며, 아들이 오실 때,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요 14:10)는 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아들과 그 영이 아버지로부터 오실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오심(요 6:46, 15:26)을 보여준다. (이 구절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para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신 것처럼(5:43), 그 영도 아들의 이름 안에서 오시며(14:26), 이것은 아들의 오심이 아버지의 오심이고 그 영의 오심이 아들의 오심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셋의 동일시는 세 분이 모두 상호 내재하시고 분리 불가능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말한다.


The Scriptures clearly indicate that when the Son comes, the Father comes with Him; similarly, when the Spirit comes, both the Son and the Father come with Him. Furthermore, when the Son comes, the Father does not come with Him outwardly; rather the Father comes with Him inwardly and subjectively.


성경은 분명하게 아들이 오실 때, 아버지도 아들과 함께 오시고; 마찬가지로, 그 영이 오실 때는 아들과 아버지 두 분이 그 영과 함께 오심을 말한다. 더 나아가 아들이 오실 때 아버지는 외적으로 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내적이고 주관적으로 아들과 함께 오신다.


The Triune God has never been separated. When One moves, the other Two also move with Him. When One is sent, the other Two also come with Him. When the Son comes, He comes in the name of the Father; when He comes, the Father comes. When the Spirit is sent, He is sent in the name of the Son; His being sent is the Son’s being sent. Hence, the Son’s coming is the Father’s coming, and the Spirit’s being sent is the Son’s being sent. The Three—the Father, Son, and Spirit—are one. They cannot be separated for eternity.[11]


삼일 하나님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신다. 한 분이 움직이실 때 다른 두 분도 또한 그분과 함께 움직이신다. 한 분이 보내어질 때, 다른 두 분도 또한 그분과 함께 오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시고; 아들이 오실 때 아버지도 오신다. 그 영이 보내어질 때, 그 영은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어지고; 그 영 자신의 보내심이 아들 자신의 보내심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오심은 아버지의 오심이요, 그 영 자신의 보내심은 아들 자신의 보내심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은 영원토록 결코 분리될 수 없다.


By teaching coexistence and coinherence, Witness Lee affirmed that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each fully God, yet he maintained, as the Christian church has long held, that there are not three Gods but one God in three hypostases. Indeed, our God is the Triune God.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가르침으로써, 위트니스 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기독교계가 오랫동안 믿어 온 것같이, 셋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위격이심을 확증했다. 참으로 우리의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이시다.


As should be clear from this brief presentation,[12] Witness Lee’s teaching on the Trinity is entirely orthodox. But despite the clear enunciations of Trinitarian orthodoxy found throughout his ministry, some critics have persisted in denouncing him for teaching heresy. The ostensible reason for those charges, as noted earlier, is that those critics recoil at any identifications between the Father, Son, and Spirit for fear that the distinctions among the three are compromised by the identifications. But when Witness Lee made the identifications, he did so with full reliance on the Scriptures and with the orthodox understanding that while the three are eternally distinct, they are never separate, that is, they exist in an eternal relationship of coexistent coinherence.


이러한 간략한 소개에서 분명해진 것은 삼일성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완전히 정통(orthodox)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트니스 리가 자신의 사역의 전반에 걸쳐 정통 삼위일체를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일부 비판자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비난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세 위격을 동일시 하는 것이 그들 가운데의 구별성을 손상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트니스 리가 동일성을 언급한 것은 그 셋은 영원히 구별되시며, 결코 분리될 수 없으시다는 것, 즉, 그분들은 영원히 동시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는 관계로 존재하신다는 정통적인 이해와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The Charge of Heresy Answered


이단이라는 비난에 대한 답변


Modalism Defined and Repudiated


양태론의 정의와 그에 대한 반박


In the mid-1970s some critics in the countercult community began to accuse Witness Lee of teaching modalism. That charge is still in circulation despite having been answered thoroughly and repeatedly over the years.[13] More recently, he has been faulted for saying that God is “one person,” which critics have flaunted as evidence that modalism was indeed at work in his teaching. Witness Lee understood well the heresy of modalism and taught his listeners concerning its errors, but here it may be helpful to turn to Harold O. J. Brown, a respected authority on heresies in the early church, to define the heresy, both historically and theologically, before further demonstrating that Witness Lee’s teaching was not modalistic.


1970년대 중반에 이단대처 단체 소속 일부 비판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을 가르친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하고 반복적으로 해명해왔음에도 이러한 비난은 여전히 유포되고 있다. 더 최근에, 비판자들은 양태론이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 안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로서 하나님은 “한 위격”이시다(God is “one person”)라는 그의 진술을 제시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이 이단 교리임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성도들에게 양태론의 오류들에 관해 가르쳤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양태론적이 아님을 여기에서 더 증명하기 전에, 초기 교회 때 출현한 이단들에 관한 권위자로 존경받고 있고, 역사적이고 신학적으로 이단을 정의한 헤롤드 O. J. 브라운(Harold O. J. Brown)의 다음과 같은 말은 소개하는 것은 유익할 수 있다.


According to Brown, the heresy of modalism (or modalistic monarchianism[14]) began with Praxeas, who arrived in Rome at the end of the second century and taught “not merely that Jesus Christ revealed the Father, but that he actually was the Father.”[15] Praxeas was followed in Rome and in the teaching of modalism by Noëtus, Epigonus, and Cleomenes. They, like Praxeas, “taught that the Father himself had suffered and died, and then resurrected himself.”[16] In other words, these first modalists taught simply that there is one God, the Father, and that Christ is identical to Him, since, allegedly, there is only one person and not a distinction of persons in the Godhead. Consequently, in their zeal to preserve the oneness of God, these teachers forsook the distinct personhood of Christ and, implicitly, of the Spirit, and thus denied the genuine triunity of God.


브라운(Brown)에 따르면, 양태론 이단(혹은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프락세아스(Praxeas)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2세기 말에 로마에 도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아버지를 계시할 뿐 아니라, 그분은 실제로 그 아버지이셨다”라고 가르쳤다. 로마에서 프락세아스는 노에투스(Notus), 에피고누스(Epigonus), 클레오메네스(Cleomenes)의 양태론 교리를 추종했다. 그들은 프락세아스처럼 "아버지 자신이 고난받고 죽고, 스스로 부활하셨다고 가르쳤다." … 다른 말로 하면, 이들 초기 양태론자들은 유일한 한 위격만 계시고 신격 안에서 위격들의 구별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단지 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리스도는 그분과 동일하다고 가르쳤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유일성(oneness)을 보존하려는 열심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별된 인격성(personhood)을 버렸으며, 은연중에 성령의 인격성도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된 삼중성(triunity)을 부인했다.


Under Sabellius, who was in Rome in the early third century, the doctrine took on its more developed form, now known as Sabellianism. In this more sophisticated form of the doctrine, Sabellius held that God is “one Person (hypostasis), three names.”[17] For Sabellius the names of Father, Son, and Spirit “merely describe different forms of revelation; the Son revealed the Father as a ray reveals the sun. Now the Son has returned to heaven, and God reveals himself as the Holy Spirit.”[18] In this teaching the one God reveals Himself in successive stages, or “modes,” of Father, Son, and Spirit in time, but the modes, though genuine manifestations of the one God, are not eternal realities. As in its simpler form, this more developed modalism, while seeking to preserve the oneness of the Trinity, denies the eternal, simultaneous coexistence of the Father, Son, and Spirit and, therefore, is heretical.


3세기 초에 로마에 있었던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인도 아래서, 이 양태론 교리는 지금 ‘사벨리뉴스주의’(Sabellianism)로 알려진 더 발전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더 정교해진 형태의 교리에서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은 "한 위격(hypostasis)이시고, 세(three) 이름"이 있다고 했다.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단지 계시의 세 가지 다른 형태(forms)를 묘사한다고 했다. 즉 태양 광선이 태양을 계시하는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를 계시한다고 했다. 그 후 아들은 하늘로 되돌아가시고, 지금 하나님은 자신을 성령으로 계시하신다고 했다." 이 교리에서 한 분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연속적인 단계들 혹은 "양태(modes)"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한 하나님의 참된 나타나심이더라도 양태는 영원한 실체(realities)는 아니다. 삼일성의 유일성을 더 단순한 형태로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과정에서 이렇게 더 발전된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원하시고, 동시 존재하심을 부인하게 되었고, 결국 이단이 되었다.


In the following excerpt, one of many similar passages in his ministry,[19] Witness Lee demonstrates his understanding of modalism and why a modalistic view of the Trinity must be repudiated as heresy: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사역물 안에 있는 유사한 많은 단락들 중의 하나인 아래 발췌문에서, 양태론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왜 삼일성의 양태론적 관점이 이단으로 거부되어야 하는지를 논증하고 있다.


Modalism is another heresy, resulting from taking an extreme position. Its leading exponent was Sabellius, who claimed that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were not eternally co-existent. In modalistic thinking the Three are merely three successive manifestations of the divine Being or three temporary modes of His activity. Passages like Isaiah 9:6, where the Son is called the everlasting Father, and John 14:9, where the Lord says,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are used to support modalism's position.


양태론은 하나의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여 발생한 또 다른 이단이다. 양태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벨리우스였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영원토록 동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양태론적인 사고에서 세 분은 단지 신성한 존재(Being)가 세 가지로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 혹은 그분의 활동(activity)의 세 가지 일시적인 양태(modes)이다. 아들이 영원하신 아버지라 불리운 이사야 9장 6절, “나를 본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14장 9절이 양태론의 입장을 지지하는 구절로 사용되어 왔다.


Just as tritheism pushed the matter of the three Persons too far and ended up with three Gods, so modalism pushed the oneness of the Godhead too far and taught that when the Son came the Father was over, and when the Spirit came the Son was over.


삼신론은 세 위격들을 너무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결국 세 하나님들이 되게 한 것처럼 양태론도 신격의 유일성을 너무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결국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는 끝나고, 그 영이 왔을 때 아들도 끝났다고 가르쳤다.


This teaching we cannot accept.[20]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은 받을 수 없다.


Coinherence, Incorporation, Economy: Witness Lee's Basis for Understanding the Mutual Identifications in the Divine Trinity


상호내재, 합병, 경륜: 위트니스 리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상호 동일성(identifications)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


At this point some may wonder, “If Witness Lee taught orthodox Trinitarian doctrine and eschewed the error of modalism, why was he accused of teaching heresy?” The question is legitimate, and we can best begin to answer it more thoroughly by first referring to three verses that Witness Lee made frequent reference to in his ministry:


이 부분에서 일부는 "만약 위트니스 리가 정통 삼위일체를 가르쳤고 양태론의 오류를 멀리했다면, 왜 그가 이단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받았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문은 당연하다. 따라서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자기의 사역 시 자주 언급했던 세 구절을 먼저 인용하고 그 의문에 대해 좀 더 철저히 답변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And the government
   Is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ternal Father,
   Prince of Peace. (Isa.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So al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1 Cor. 15:45)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And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2 Cor. 3:17)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In these verses the Son is called “Eternal Father”; the last Adam, Christ, is said to have become “a life-giving Spirit”; and the Lord, Christ, is said to be the Spirit. Some expositors have relied on linguistic or interpretive devices to explain away the identifications of the Son with the Father and of Christ with the Spirit in an effort to guard against modalism,[21] but Witness Lee did not, choosing instead to affirm the simple declarations of the Bible, though not to understand them simplistically. Rather, he understood that the identifications rely on the oneness of essence in the Divine Trinity and on the coinherence and incorporation of the three persons. Concerning essence, coinherence, and incorporation he writes:


위 구절에서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우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하고, 그리스도이신 주님은 그 영이시라고 말한다. 일부 주석가들은 양태론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시와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를 피하여 설명하려는 언어적 혹은 해석적 장치들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그렇게 하기 보다는 성경의 단순한 선포를 확증하고, 그 구절들을 너무 단순화하여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길을 취했다. 오히려 그는 그 동일시들이 신성한 삼일성 내의 본질의 하나됨과 세 위격의 상호 내재와 합병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이해하였다. 그는 본질과 상호 내재와 합병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We may say that the Triune God has three persons but only one essence; the persons should not be confounded and the essence should not be divided;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three in person, but They are one in essence.[22]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유일한 한 본질과 세 위격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위격들은 혼동되지 않고 본질은 나뉘지 않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위격에서는 셋이시고, 본질에서는 하나이시다.


Among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there is distinction but no separation. The Father is distinct from the Son, the Son is distinct from the Spirit, and the Spirit is distinct from the Son and the Father. But we cannot say that They are separate, because They coinhere, that is, They live within one another. In Their coexistence the three of the Godhead are distinct, but Their coinherence makes them one. They coexist in Their coinherence, so They are distinct but not separate.[23]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구별되며 분리됨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시고,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신다. 그 영은 아들과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그러나 우리는 셋이 분리되신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셋은 상호 내재, 서로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시 존재하심 안에서 신격의 셋은 구별되시지만, 그들의 동시 존재가 그들을 하나로 만드신다. 그들은 자신의 상호 내재 안에서 동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으신다.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an incorporation by coinhering mutually and by working together as one. This means that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an incorporation by what They are and by what They do.[24]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상호 내재하고 하나로 함께 일하심으로써 합병되신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셋이 그 존재와 행하시는 일에서 합병체이심을 의미한다.


Because the three are an incorporation “by what They are and by what They do,” when one of the three acts distinctly to carry out the divine economy, He incorporates the operations of the other two in His manifest action, so that the Bible frequently identifies one with the other without compromising the eternal distinctions among them.


셋은 "그 존재와 행하는 일에서" 합병체이시기 때문에, 셋 중의 한 분이 신성한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구별되게 행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명확한 행함 안에서 다른 두 분의 활동들과 합병하신다. 그 결과 성경은 종종 그들 가운데 있는 영원한 구별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한 분과 다른 두 분을 동일시 한다.


The words of the Lord Jesus in John 14 provide testimony to the reality of incorporation and mutual identification: “Do you not believ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The words that I say to you I do not speak from Myself, but the Father who abides in Me does His works” (v. 10). Here the Son manifestly acts (“the words that I say to you”) and the Father operates distinctly in Him (“the Father who abides in Me does His works”); thus, the Son does not speak from Himself but from the Father who abides in Him. Therefore, the Son could say,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v. 9), because in His distinct and manifest action He incorporated the operations of the Father and thus was identified with the Father. Isaiah, then, could rightly prophesy that the Son would be called “Eternal Father” (Isa. 9:6). Nevertheless, the eternal distinction between the Son and the Father is not jeopardized by their mutual identification. Witness Lee writes:


요한복음 14장의 다음과 같은 주 예수님의 말씀은 합병과 상호 동일시의 실재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절). 여기서 아들은 분명하게 행하시고(“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구별되게 활동하신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행하심”). 이런 식으로 아들은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은 “나를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구별되시고 명확한 행동 안에서 그분은 아버지의 행함과 협력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라고 불리게 될 것을 정확하게 예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영원한 구별되심은 그들 상호 간 동일시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We can say that the Father and the Son are one because the Lord Jesus said, “I and the Father are one” (John 10:30). However, although the Father and the Son are one, between Them there is still a distinction of I and the Father. We must not disregard this point, because if we do, we would become modalists.[25]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10:30). 그러나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지만, 그분들 사이에는 여전히 나(I)와 아버지의 구별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양태론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As the Son incorporates the Father and thus can be called “Eternal Father,” so the Spirit incorporates Christ and makes Him real and practical in the living and experience of the believers. It is, therefore, in the realm of the believers’ experience that Christ is said to have become “a life-giving Spirit” and even to be “the Lord Spirit” (2 Cor. 3:18), for it is through the Spirit’s incorporation of Christ that Christ comes to the believers to work out the full effect of God’s salvation in them. In other words, a transfer of manifest action occurred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whereby the Spirit now acts manifestly to bear Christ, whose hidden operations the Spirit incorporates in His manifest activity, to the believers. It is in this experiential and economical sense that Witness Lee understood the various titles of the Spirit that indicate His coinherence with the Father and with the Son, including “the Spirit of God” (Rom. 8:9; 1 John 4:2); “the Spirit of your Father” (Matt. 10:20); “the Spirit of the Lord” (Acts 5:9; 2 Cor. 3:17); “the Spirit of His Son” (Gal. 4:6); “the Spirit of Christ” (Rom. 8:9; 1 Pet. 1:11); “the Spirit of Jesus” (Acts 16:7); “the Spirit of Jesus Christ” (Phil. 1:19); and “the Lord Spirit” (2 Cor. 3:18). The Spirit, therefore, incorporates the operations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He acts to make the Son, the embodiment of the Father, an experiential reality in the believers. Thus, “the Lord,” Paul says, “is the Spirit” (2 Cor. 3:17).


아들이 아버지와 합병되셨기 때문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 영이 그리스도와 합병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믿는 이들의 생활과 체험 안에서 현실적이고(real), 실제적이신(practical) 분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하고, 심지어 "주 영"(고후 3:18)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서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에게 오셔서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완전한 효능을 이루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 영의 합병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명백한 활동의 전달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에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 그 영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산출하도록 확실하게 일하신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비밀스러운 일 하심은 그 영께서 그분의 분명한 활동과 합병하게 한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영”(롬 8:9, 요일 4;2), “너희 아버지의 영”(마 10:20), “주님의 영”(행 5:9, 고후 3:17), “그분의 아들의 영”(갈 4:6), “그리스도의 영”(롬 8:9, 벧전 1:11), “예수의 영”(행 16:7),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 “주 영”(고후 3:18)을 포함한, 그분의 아들과 아버지와의 상호 내재를 가리키는 그 영에 관한 다양한 호칭들을 체험적이고 경륜적인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과 합병하시고, 또한 그 영은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이 믿는 이들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실재가 되도록 행동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은 그 영이시다”(고후 3:17)라고 말한다.


Witness Lee was not the only Bible teacher to recognize the identifications among the Father, Son, and Spirit or to apply them to the believers' experience. A number of scholars have written on this matter, but here a few examples will suffice to make the point.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동일시를 인지하고, 그것을 믿는 이들의 체험에 적용한 유일한 성경 교사는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써 왔지만, 여기에 그 일부만 소개해도 요점을 전달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Writing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the noted Baptist theologian Augustus H. Strong, referencing also Charles Gore, offered this remarkably clear description of the identifications in the Godhead based on the oneness of essence and the intercommunion of the three persons:


20세기 초의 유명한 침례교 신학자인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rustus H. Strong)은 자신의 저서에서 찰스 고어(Charles Gore)를 언급하면서 본질의 하나와 세 위격들 간의 상호 왕래에 근거하여 신격 안에 있는 동일시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놀랍도록 분명한 진술을 했다.


This oneness of essence explains the fact that, while Father, Son, and Holy Spirit, as respects their personality, are distinct subsistences, there is an intercommunion of persons and an immanence of one divine person in another which permits the peculiar work of one to be ascribed to either of the others, and the manifestation of one to be recognized in the manifestation of another. The Scripture representations of this intercommunion prevent us from conceiving of the distinctions called Father, Son, and Holy Spirit as involving separation between them…


이러한 본질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각의 위격에서는 구별된 실재(subsistence)이시지만, 그 위격들 간에는 상호 왕래(intercommunion)가 있고,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한 위격의 고유한 일(work)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한 위격의 나타남은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적 묘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이 위격들 간의 분리를 포함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를 지켜 준다.


This intercommunion also explains the designation of Christ as “the Spirit,” and of the Spirit as “the Spirit of Christ,” as 1 Corinthians 15:45: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2 Corinthians 3:17: “Now the Lord is the Spirit”;…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고”와 고린도후서 3장 17절의 “지금 주님은 그 영이시니”처럼, 그리스도를 “그 영”이라고 하고,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Charles] Gore, Incarnation [of the Son of God], 218—“The persons of the Holy Trinity are not separable individuals. Each involves the others; the coming of each is the coming of the others. Thus the coming of the Spirit must have involved the coming of the Son.”[26]


“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separable)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고;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어야만 했다”. [챨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218 쪽


New Testament scholar James D. G. Dunn identifies the risen Jesus with the life-giving Spirit and affirms that in the believers' experience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the two:


신약 학자인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아래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와 생명주는 영을 동일시 하고 믿는 이들의 체험에서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단언했다:


If Adam is the type of psychic existence, then Christ, the risen Christ, is the type of pneumatic existence. In short, verse 45b constitutes proof because Paul's experience of the [life-giving Spirit] convinces him that the exalted Jesus has a spiritual somatic existence and that in that mode of existence he is the pattern and forerunner of a new humanity.


만약 아담이 혼적인 존재의 예표라면, 그리스도,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의 예표이다…. 요약하면, 45절 하반절은 [생명주는 영]에 대한 바울의 체험이, 높여지신 예수께서 영적이면서도 육신을 가지신 존재이시고, 그러한 존재 모형 안에서 그분은 한 새로운 인성의 본이자 선구자이심을 그에게 확신케 했다는 증거가 된다.


…the life-giving Spirit they all experience is the risen Jesus, the last Adam…


…그들 모두가 체험한 생명주는 영은 부활하신 예수, 즉 마지막 아담이다…


Paul identifies the exalted Jesus with the Spirit not with a spiritual being or a spiritual dimension or sphere, but with the Spirit, the Holy Spirit. Immanent Christology is for Paul pneumatology; in the believer's experience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Christ and Spirit. This does not mean of course that Paul makes no distinction between Christ and Spirit.[27]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를 하나의 영적인 존재 혹은 … 영적인 차원이나 영역이 아니라, 그 영(the Spirit) 곧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다. …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바울에게 성령론이다. 믿는 이들의 체험에서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Theologian Alister McGrath recognizes that the identifications bear particular significance for the believers’ “encounter” with the Divine Trinity: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이 동일시가 믿는 이들이 신성한 삼일성과 "만남"을 위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It is also important to realize that the New Testament tends to think of the Holy Spirit as the Spirit of Christ as much as of God. The Spirit is understood to stand in the closest of possible relationships to Christ, so that his presence among the people of Christ is equivalent to the presence of Christ himself, just as the presence of Christ is treated as being that of God himself. In other words, to encounter the Son is really to encounter the Father and not some demigod or surrogate. To encounter the Spirit is really to encounter the Son and hence the Father. The enormous importance of this is obvious: The believer of today can encounter the living God at first-hand, not through semidivine or created intermediaries.[28]


신약이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자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아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 영은 그리스도와 가장 근접한 관계에 계신다고 이해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와 같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임재는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취급된다. 달리 말하면, 성자와 만나는 것은 곧 성부와 만나는 것이며, 어떤 신격화된 인간이나 신의 대리자와 만나는 것이 아니다. 성령과 만나는 것은 곧 성자 그리고 성부와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믿는 이는 신으로 추앙받거나 신으로 창조된 어떤 중재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다.


It is important to recognize that the identifications among the three persons and the oneness of their presence in the believers do not negate the distinct agency of each person in His function to carry out the divine economy, and Witness Lee understood this well. He rejected the error of patripassianism and held firmly to the orthodox position that it was the Son who was incarnated, crucified, and resurrected from the dead, and not the Father or the Spirit, although the Father and the Spirit indwelt the Son as He accomplished the Father's plan and purpose. In the following excerpts, Witness Lee makes this point very clear:


세 위격 간의 동일시와 믿는 이들 속에 있는 위격들의 하나된 임재가 신성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그분의 기능 안에서의 각 위격의 구별된 행동(agency)을 무효화 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한데, 위트니스 리는 이것을 잘 이해했다. 그는 성부수난설의 오류를 거절했고, 비록 성부와 그 영께서 성부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신 아들 안에 내주하실지라도 육체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은 아버지나 그 영이 아니라 아들이시라는 정통 입장을 확고하게 고수했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 발췌물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The Father accomplished the first step of the plan, of the economy. He worked in choosing us and in predestinating us. The work of selection and the work of predestination were done by the Father, not by the Son or by the Spirit. We must be careful, though, to realize that the Father did the selection and the predestination, but He did not do them alone. The Father of the Triune Godhead did the choosing and the predestinating in the Son and with the Spirit. If we say that the Father chose us and selected us alone, we jeopardize the coinherence and the coexistence of the divine Trinity. The coinherence and the coexistence of the Triune God are from eternity to eternity….


아버지는 계획 곧 경륜의 첫 단계를 성취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시는 일을 하셨다. 선택과 예정은 아버지께서 이루신 것이며, 아들이나 영이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을 깨닫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홀로 하지 않으셨다. 삼일 신격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 영과 함께 선택하고 예정하셨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 혼자 선택하시고(chose) 뽑으셨다(selected)고 말한다면,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 내재와 동시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삼일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상호 내재하시고 동시 존재하신다.


Also, in the second step of God's economy, the step of accomplishment, the Son did all the works. We cannot say the Father did the accomplishing work with the Son and by the Spirit. Neither can we say that the Spirit accomplished the Father's plan as the Son, with the Father. We can only say that the Son did all the works to accomplish the Father's plan with the Father and by the Spirit. Also, we cannot say that the Father became flesh and that the Father lived on this earth in the flesh. Furthermore, we cannot say that the Father went to the cross and died for our redemption, and we cannot say the blood shed on the cross is the blood of Jesus the Father. We must say that the blood was shed by Jesus the Son of God (1 John 1:7). We can neither say that the Father died on the cross nor can we say that the Father resurrected from the dead.[29]


또한, 하나님의 경륜의 두 번째 단계인 성취 단계에서 아들은 모든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역사를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예수 아버지(Jesus the Father)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As these excerpts demonstrate, each person in the Divine Trinity has His respective function to carry out the divine economy in time, yet in the mutual coexistence, coinherence, and coworking of the three, that is, in their existence as a divine incorporation, their essential oneness is not compromised.


이렇게 전문가들이 논증한 것처럼,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각 위격은 정해진 때에 신성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각각의 개별적인 역할이 있다. 하지만 동시 존재, 상호 내재, 그리고 셋의 동역, 즉 셋의 존재 안에 있는 신성한 합병 가운데 있는 그분들의 본질적인 하나는 손상을 받지 않는다.


To this point we have encountered in Witness Lee’s ministry an important distinction between God in His immanent existence (the immanent or essential Trinity) and God in His economy (the economic Trinity), a distinction that has long been recognized by theologians and is “[o]ne of the major issues animating contemporary discussions of Trinitarian theology” today.[30] Witness Lee explicitly defined the distinction and demonstrated why it is necessary for preserving the proper understanding of the Divine Trinity:


여기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신학자들이 알아왔고, 오늘날 “삼위일체 신학에 활력을 불어넣은 주요 쟁점 중 하나”인, 그분의 내적 존재 안에 계신 하나님(내재적 혹은 본질적 삼위일체)과 그분의 경륜 안에 계신 하나님(경륜적 삼위일체) 간의 중요한 차이를 위트니스 리의 사역에서 접하게 된다. 위트니스 리는 그 차이를 분명하게 정의했고, 왜 그것이 신성한 삼일성의 합당한 이해를 위해 꼭 필요한지를 논증했다.


Whereas the essential Trinity refers to the essence of the Triune God for His existence, the economical Trinity refers to His plan for His move. There is the need of the existence of the Divine Trinity, and there is also the need of the plan of the Divine Trinity.


본질적인 삼일성은 삼일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그분의 본질을 가리키고, 경륜적인 삼일성은 그분의 움직이심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가리킨다. 신성한 삼일성의 존재를 위한 필요가 있고, 신성한 삼일성의 계획을 위한 필요도 있다.


The Father accomplished the first step of His plan, His economy, by working to choose and predestinate us, but He did this in Christ the Son (Eph. 1:4-5) and with the Spirit. After this plan was made, the Son came to accomplish this plan, but He did this with the Father (John 8:29; 16:32) and by the Spirit (Luke 1:35; Matt. 1:18, 20; 12:28). Now that the Son has accomplished all that the Father has planned, the Spirit comes in the third step to apply all that He accomplished, but He does this as the Son and with the Father (John 14:26; 15:26; 1 Cor. 15:45b; 2 Cor. 3:17). In this way, while the divine economy of the Divine Trinity is being carried out, the divine existence of the Divine Trinity, His eternal coexistence and coinherence, remains intact and is not jeopardized.[31]


아버지께서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심으로 그분의 계획인 그분의 경륜의 첫 단계를 성취하셨지만, 아들 안에서(엡 1:4-5) 그 영과 함께 하셨다. 이 계획이 세워진 후에 아들께서 오셔서 그 계획을 성취하였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요 8:29, 16:32) 그 영에 의해(눅 1:35, 마1:18, 20, 12:28) 그렇게 하셨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아들이 성취하셨고, 아들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그 영께서 셋째 단계로 오셔서 적용하시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요 14:2, 15:26, 고전 15:45하, 고후 3:17). 이렇게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경륜이 수행되는 동안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존재와 그분의 영원한 동시 존재하심과 상호 내재하심은 그대로 보존되며 위협받지 않는다.


Because Witness Lee focused on the believers' experience of the Triune God in the divine economy, he often emphasized the economic aspect of the Divine Trinity. Consequently, some critics accused him of confusing the persons by affirming their mutual identifications and of introducing change into the Godhead by saying that Christ became the life-giving Spirit. But when Witness Lee says that the Son is the Father and that the resurrected Christ has become the life-giving Spirit, he is not confusing the persons of the Trinity or admitting change into the Godhead; rather, he is recognizing the economic aspect of the Divine Trinity, according to which the three persons can be identified with one another in their mutual operation to carry out the divine economy. Moreover, in His economic activity God indeed passed through the process of incarnation, human living, death, and resurrection, and now indwells His believers as the life-giving Spirit. Thus, He has undergone change in His economy, yet He has not undergone, nor will He ever undergo, change in His essence. Witness Lee writes:


위트니스 리는 신성한 경륜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그는 자주 신성한 삼일성의 경륜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일부 비난자들은 이로 인해 그가 각 위격을 동일시하고 위격 간의 구별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하여 신격이 변했다고 말한다며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아들이 아버지이고, 부활한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할 때, 그는 삼일성의 위격들을 혼동하거나 신격이 변했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신성한 삼일성의 경륜적인 측면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세 위격은 신성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위격 상호 간의 운행하심(operation)에서는 서로 동일시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적인 행위(activity) 안에서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하시고, 지금은 믿는 이들 안에 생명주는 영으로 내주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의 경륜에서 변화를 경험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자신의 본질 안에서 변화를 체험하거나 경험하지 않았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Triune God passed to become the life-giving Spirit is an economical, not essential, matter. Change with God can only be economical; it can never be essential. Essentially, our God cannot change. From eternity to eternity He remains the same in His essence. But in His economy the Triune God has changed in the sense of being processed. First, He who was merely God became a God-man. When He was merely God, He did not have humanity. But when He changed by becoming a God-man, humanity was added to His divinity.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God changed in His essence. On the contrary, He was changed only in His economy, in His dispensation. God has changed in His economy, but He has never changed in His essence.[32]


삼일 하나님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시려고 통과하신 과정은 경륜적인 문제이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변화(change)하신 것은 단지 경륜적일 수는 있지만, 결코 본질일 수는 없다. 우리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결코 변할 수 없으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그분의 본질에서는 같으시다. 하지만 그분의 경륜 안에서 삼일 하나님은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에서 변화하셨다. 먼저, 유일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사람이 되셨다. 그분이 유일한 하나님이셨을 때, 그분은 인성이 없으셨다. 하지만 그분이 하나님-사람이 되심으로 변화되었을 때, 인성이 그분의 신성에 더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이 변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그분은 단지 그분의 경륜 즉 그분의 분배 안에서 변화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변화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본질에서는 변화하지 않으셨다.


Witness Lee held firmly to both the economic and the immanent aspects of the Divine Trinity, and thus he could rightly acknowledge the mutual identifications of the three while also recognizing that the Son is not the Father, that the Son is not the Spirit, and that the Spirit is not the Son or the Father. Critics who have routinely charged Witness Lee with error have not made sufficient inquiry into his ministry to see that he strongly affirmed the orthodox understanding of these two aspects of the Divine Trinity.


위트니스 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경륜적인 측면과 내재적인 측면 모두를 확고하게 고수했다. 그래서 그가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시고, 아들이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이 아들 혹은 아버지가 아니심을 알고 있는 한, 셋의 상호 동일시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 항상 판에 박힌 오류로 위트니스 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신성한 삼일성의 이러한 두 측면에 관한 정통적인 인식을 강력하게 확증하였다고 보는 것에 대한 그의 사역에 충분한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다.


God as “One Person”


한 인격이신 하나님


As mentioned earlier, some critics of Witness Lee have denounced him for saying that God is “one person,”[33] but we hope it is sufficiently clear that in doing so he did not annihilate the eternal distinctions among the Father, Son, and Spirit in the Godhead. When he said that God is “one person,” he referred to the fact that God is one divine, eternal Being,[34] as orthodox scholars and Christian leaders from Lewis Sperry Chafer to Alvin Plantinga have also done by calling God a (singular) person.[35] Therefore, just as we Christians recognize that the existence of eternally distinct hypostases in the Godhead does not compromise our avowed monotheism, so we should recognize that the identification of God as “one person” does not jeopardize our cherished trinitarianism.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일부 위트니스 리의 비평가들은 그가 하나님을 "한 인격(one person)"으로 말한 것 때문에 그를 정죄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신격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한 구별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길 바란다.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말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의 신성하고 영원한 존재이심을 가리킨 것이며, 이는 정통 신학자들 그리고 루이스 쉐퍼(Lewis Sperry Chafer)로부터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에 이르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한 (단수의) 인격이시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격 안에 영원히 구별되는 위격들이 존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유일신 신앙(monotheism)을 양보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삼위일체론을 위태롭게 하지 않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The Christian Research Institute (CRI), a onetime critic of Witness Lee’s ministry that renounced its former stand, has affirmed the validity of referring to God as “one person” and, more notably, has expressed appreciation to Witness Lee for cautioning against describing the Father, Son, and Spirit as separate persons out of his concern that such a description compromises the very oneness of God’s being that Christians should seek to preserve. Elliot Miller, editor-in-chief of CRI’s Christian Research Journal, writes:


한때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비판했으나 지금은 예전의 입장을 철회한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는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을 한 인격이라고 말한 것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더 주목할 것은 CRI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분리된 인격들로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지해야 하는 하나님의 존재의 바로 그 하나를 위태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위트니스 리가 경고한 것에 감사를 표시한 것이다. CRI 저널 편집장인 엘리옷 밀러(Elliot Mill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re is clearly a sense biblically in which the three persons of the Trinity share a singular personal identity: Yahweh, the covenant-keeping God, who we appropriately refer to as “he” or “Him.” To affirm this is not to confuse the eternal and economic distinctions that exist between Father, Son, and Holy Spirit. It is rather to safeguard the equally important biblical truth that they comprise one eternal Being, a truth that describing them as three separate persons compromises. Those of us who have used the word separate to distinguish the persons of the Trinity owe a debt of gratitude to Witness Lee for pointing this out.[36]


성경에는 하나의 분명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단일한 신분을 공유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야훼를 적절하게 "그분"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영원하고도 경륜적인 구별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등하게 중요한 성경 진리, 즉 그분들이 하나의 영원한 존재로 구성되어 계신다는 진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그분들을 분리된 세 위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에서 빗나간 위태로운 것이다. 삼위일체의 위격을 구별하기 위해 분리(separate)라는 말을 사용해 온 우리는 이것을 지적한 위트니스 리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Critics of Witness Lee have evidently seized on the term “one person” out of a determination to “prove” his alleged modalism,[37] and they may counter our defense of his position with accusations that we are ignorant of modalism’s actual dangers and that we unintentionally advance the modalistic error by defending Witness Lee’s teaching. But with all that we have seen of his teaching on the Trinity thus far, it is indeed difficult to impugn Witness Lee for holding an aberrant view or, we hope, to charge us with ignorance concerning modalism or with harboring a latent tendency toward it.


위트니스 리 비평가들은 그가 양태론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한 인격"이라는 용어 사용을 제시해 왔는데, 그들은 위트니스 리를 변호하는 우리가 양태론의 실제적인 위험들에 대해 무지하고,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변호함으로써 의도하지 않더라도 양태론의 오류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삼일성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살펴본 바로는 그가 빗나간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바라건대 우리가 양태론에 무지하며 그러한 성향을 품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A Further Word concerning the Divine Trinity as an Incorporation


합병인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추가적인 말


As we have noted, Witness Lee taught that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an incorporation by coinhering mutually and by working together as one, and the Lord Jesus suggests the same in the Gospel of John: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위트니스 리는 신성한 삼일성이 상호 내재하시고 하나로 동역하는 합병체라고 가르쳐 왔으며, 주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같은 내용을 암시하셨다.


If I do not do the works of My Father, do not believe Me; but if I do them, even if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so that you may come to know and continue to know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10:37-38)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 여러분이 나를 믿지는 않더라도 그 일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고, 또 계속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요 10: 37-38).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but if not, believe because of the works themselves. (14:11)


여러분은 나를 믿으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는 일들 때문에라도 믿으십시오(14:11).


In these passages the Lord Jesus indicates that the works themselves testify that the Father and the Son mutually indwell each other. We can therefore understand that the Father and the Son—and, by implication, the Spirit—work together in the divine economy according to what they are in coinherence. The works manifest the mutual indwelling and mutual operation of the three, and therefore it is by the works that we see what kind of God He is and are compelled to believe in Him as He is, that is, as a divine incorporation. Referring to incorporation in John 14, Witness Lee writes:


주 예수님은 이러한 구절에서 그 일들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하고 있음을 증언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암묵적으로, 그 영께서 신성한 경륜 안에서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동역하고 계신다고 이해한다. 그 일들은 세 위격이 상호 내재와 상호 운행하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들에 의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며 있는 그대로 그분을 바라볼 때 신성한 합병체이심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위트니스 리는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신성한 합병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incorporated by coinhering mutually. Concerning this, the Lord Jesus said, “Do you not believ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v. 10a). In verse 11a He went on to say,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The Son is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the Son by a mutual coinhering.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상호 내재하심으로써 합병되어 존재하신다. 주 예수님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10절 상)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1절 상반절에서 그분은 계속해서 "여러분은 나를 믿으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거한다.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an incorporation also by working together as one. In verses 10b and 11b the Lord said, “The words that I say to you I do not speak from Myself, but the Father who abides in Me does His works….Believe…because of the works themselves.” Here the Lord seemed to be saying, “You have seen all the works which I have done. These works were not done by Me, for I never did anything of Myself. Whatever I did was the Father’s work. The Father and I work together mutually.” This working together as one reveals that the Divine Trinity is an incorporation.[38]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하나로 함께 일하시는 하나의 합병체이시다. 10절 하반절과 11절 하반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으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는 일들 때문에라도 믿으십시오.” 여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너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보았다. 이 모든 일들은 나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했든 그것은 아버지의 일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상호적으로 함께 일한다.” 이렇게 하나로 함께 일하시는 것은 신성한 삼위일체가 하나의 합병체임을 계시한다.


Therefore, Witness Lee concludes,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an incorporation both in what They are and in what They do.”[39]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그들의 존재와 행위 모두에 있어서 한 합병체이시다.”


The great teachers of the early church recognized this profound reality in God, although such an understanding does not seem to be commonly held by believers today. Noting that late-fourth-century “pro-Nicenes” used analogies to the human person to arrive at some understanding of the Trinitarian mystery,[40] Lewis Ayres avers that those teachers also recognized the limits of analogies and saw the need for an understanding that goes beyond what the analogies allow for. He writes:


비록 오늘날의 믿는 이들이 이러한 이해를 보편적으로 갖고 있지는 않지만, 초기 교회의 위대한 교사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를 알고 있었다. 14세기 후반에 “니케아 신조 지지자들”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인간의 인격에 대한 비유들을 사용했다. 루이스 아이레스(Lewis Ayres)는 그러한 비유들의 한계를 인식했고, 그 비유들이 전달하는 것 이상의 이해가 필요함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ugustine] does not, however, use the attributions of memory, understanding, and will to the divine persons to encourage us to think we can understand what it is like to be a divine person by analogy with our own experience of personhood. Because we accord these qualities to divine persons in their perfect form and within the context of the divine simplicity, we do not know what it is for divine persons to possess such qualities: as David Burrell says the analogy here is analogical. Thus for both Augustine and Gregory of Nyssa we will grow in understanding of the individual persons the more we understand their co-inherence and con-joint operation.[41]


그러나 [어거스틴]은 기억, 이해, 의지라는 속성들을 신성한 위격에 부여할 때 우리 자신의 인격에 대한 비유로 신성한 위격을 이해하도록 격려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러한 속성들을 그분들의 완벽한 형태와 신성한 단순성의 내용을 소유하신 신성한 위격들에게 부여하고 있기에, 우리는 신성한 위격들이 이러한 속성들을 가지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데이빗 부레엘(David Burrell)이 말하듯이 여기서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과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모두가 지지하는 것은 우리가 삼위의 상호 내재와 상호 연결된 운행을 더 잘 이해할수록 그 개별적인 위격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Particularly germane here is Ayres’s use of “co-inherence and con-joint operation,” which parallels Witness Lee’s “coinhering mutually and working together as one.” By citing the importance of mutual indwelling and co-working for Augustine and Gregory of Nyssa, Ayres makes a point that is very much in line with Witness Lee’s teaching, namely, that it is by “understanding” the persons in their “co-inherence and con-joint operation” that we can more fully know them as they are, even if they cannot be fully known by finite man.


여기의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점은 아이레스가 "상호 내재와 상호 연결된 운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상호 내재와 하나로써 상호 동역함"을 말한 것과 유사하다. 아이레스가 어거스틴과 닛사의 그레고리에게 상호 내재와 상호 동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한 것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한 중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 중점은 삼위를 그분들의 상호 내재와 상호 연결된 운행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사람의 인식에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삼위를 좀 더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Anne Hunt similarly observes that it is by their works that we can perceive, to some degree, the interrelationships among the three persons, and thus, echoing Karl Rahner, she contends, “the economic Trinity is the immanent Trinity.”[42] She comments further:


안네 헌트(Anne Hunt)도 유사하게 그들의 일하심으로 인해 우리가 삼위 간의 상호 관계을 어느 정도 인식할수 있기 때문에, 칼 라너처럼,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좀 더 논평한다:


Here is the intrinsic connection between the immanent and economic Trinity. It is through knowledge of the missions ad extra, revealed in the life and especially the paschal mystery of Jesus Christ, that we glean, if but dimly, the mystery of the processions ad intra. So what is revealed ad extra—t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Son, Spirit and Father, and the interrelatedness of the missions of Son and Spirit—constitutes the basis for our appreciation, albeit ever so limited, of the mystery of the Trinity ad intra, and the interrelatedness of Father, Son, and Spirit in se.[43]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관계는 이것이다.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내재적으로 진행되는 일들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특히 십자가 고난의 비밀(paschal mystery) 안에서 계시된 외적인 사명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드러난 것, 즉 아버지와 영과 아들의 관계와 아들과 영의 사명들의 상호 연관성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내재적인 상호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For Hunt, it is as we know “the missions ad extra” (i.e., the works), and especially the lif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that we can perceive, however “dimly,” what the Father, Son, and Spirit are in themselves.


헌트(Hunt)에게 있어서 우리가 "외적인 임무들"(예를 들어 그 일들)과 특히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는 것은 "희미하게나마"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그들 자신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To illustrate further the notion of incorporation as Witness Lee taught it, we will consider the following works recorded in the New Testament: the Son's incorporation of the Father and the Spirit in Hi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and the Spirit's incorporation of the Father and the Son in His function of giving life to the believers. By examining the splendid operation of the Divine Trinity in carrying out these steps in the divine economy, we see a glorious witness to the reality of mutual indwelling and co-working that is aptly described by the term incorporation.


위트니스 리가 가르쳤던 합병의 관념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신약 성경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고려해 볼 것이다. 그 일들은 아들께서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아버지와 영을 합병한 것과 그 영께서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기능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합병한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경륜 안에 있는 이러한 단계들을 수행하는 신성한 삼위일체의 영광스러운 운영을 살펴봄으로써 합병이란 용어가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상호 내재와 상호 동역의 실재에 대한 영광스러운 간증을 보게 될 것이다.


Incorporation in the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 있는 합병


Witness Lee understood that in the divine economy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work inseparably to accomplish what is distinct to one person alone, and he saw this unchanging principle in the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of Christ. While Christ the Son,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was crucified and resurrected from the dead, and not the Father or the Spirit, it is equally true that the Father and the Spirit were not separate from Christ but operated in Him as He was crucified for our redemption (Rom. 5:8; 1 Cor. 15:3; 1 Pet. 2:24) and raised for our justification (Rom. 4:25). Witness Lee writes:


위트니스 리는 신성한 경륜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한 위격에게만 해당하는 고유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도 적용된 것을 보았다. 아들이신 그리스도, 즉 아버지나 영이 아닌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러나 아들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롬 5:8, 고전 15:3, 벧전 2:24)와 우리의 칭의를 위해 일으켜지셨을 때(롬 4:25), 아버지와 영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도 동일하게 진리이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Hebrews 9:14 says that Christ offered Himself through the eternal Spirit. Jesus, in Himself alone, could not accomplish His crucifixion. To die on the cross as an offering to God, the Son needed the Spirit. Jesus did not die on the cross alone and separate from the Spirit. The Spirit was one with the Son. The Son died on the cross with the Father and by the Spirit.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were all involved in the Son's crucifixion. The death of Christ was not only the death of the man Jesus but also the death of the Son with the Father and by the Spirit. Because Christ offered Himself through the eternal Spirit, His death is eternally effective…


히브리서 9장 14절은 그리스도가 영원한 영을 통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고 말한다. 예수님 그분 자신만으로는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성취할 수 없었다. 아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영이 필요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영과 분리되어 홀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영은 아들과 하나였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모두 아들의 십자가에 못 박힘에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람이신 예수님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일어난 아들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영을 통하여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에 그의 죽음의 효능은 영원하다….


Acts 2:32 says, “This Jesus [the Son] God [including the Father and the Spirit] raised up.” The dead Jesus was raised up by God. Acts 10:40 and 41 show us that, on the one hand, God [including the Father and the Spirit] raised this One [the Son] on the third day; on the other hand, He [the Son] rose from the dead. Regarding the Lord as a man, the New Testament tells us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considering Him as God, it tells us that He Himself rose from the dead. Romans 8:11 refers to “the Spirit of Him [the Triune God] who raised Jesus [the Son] from among the dead.” The “Spirit of Him” may also be translated “the Spirit of the One.” The One who raised Jesus did the raising by the Spirit. These verses show us that the Divine Trinity was involved in the resurrection.[44]


사도행전 2장 32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며.”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지셨다. 사도행전 10장 41절과 42절은 우리에게 한 면으로는 하나님[아버지와 영을 포함한]께서 이 한 분[아들]을 사흘 째에 살리셨다고 말한다. 반면에, 그 분[아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인간으로서 주님에 관해서 말하자면 신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으로서 그 분에 관해서 신약은 우리에게 그 분 자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스스로 일어났다고 말한다. 로마서 8장 11절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아들]을 살려내신 그 분[삼일 하나님]의 영을 언급한다. 그분의 영은 또한 한 분의 영(The Spirit of the One)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예수를 살려내신 한 분은 이러한 살려내심을 영에 의하여 수행하셨다. 이러한 구절들은 신성한 삼위일체가 부활에도 연루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Based on this view, the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of Christ are seen to be an operation of the entire Trinity as a divine incorporation and not the independent action of a separable individual sent forth on a lone and distant mission. In the man Jesus, Paul tells us, “dwells 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 bodily” (Col. 2:9).[45]


이러한 관점에 근거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은 신성한 합병체로서 삼일성 전체의 운행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단독적이고 멀리 떨어져서 임무를 행하는 분리된 개인의 독립된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있다"고 말한다(골 2:9).


The Lord Jesus testified not only of His mutual indwelling and co-working with the Father but also that He and the Father are one (John 10:30; 14:9) and that He was never alone because the Father was always with Him (John 8:16, 29; 16:32). Likewise, Christ was conceived of the Holy Spirit (Matt. 1:18, 20; Luke 1:35), was led by the Spirit (Matt. 4:1; Luke 4:1), worked by the Spirit (Matt. 12:28), and therefore incorporated the operations of the Spirit in all His living and activity. Witness Lee rejected any idea that the Father and the Spirit were no longer in the Son or with the Son at Hi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for a separation among the three would indicate that God changed in His eternal being, which He did not. On the contrary, the divine incorporation was manifested in the man Jesus, and although He was the subject of the crucifixion and the resurrection, the three operated simultaneously to manifest His distinct action of being crucified and resurrecting from the dead.


주 예수님은 다만 아버지와 상호 내재하고 상호 동역하고 있다고만 증언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또한 그와 아버지가 하나이며(요 10:30, 14:9)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요 8:16, 29, 16:32)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마 1:18, 눅 1:35), 성령에 의해 이끌리셨으며 (마 4:1, 눅 4:1), 또한 성령에 의해 일하셨다(마 12:28). 따라서 그분은 자신의 삶과 활동에서 성령의 운행과 합병하셨다고 할 수 있다.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영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심과 부활 때 더 이상 아들 안에 혹은 아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사상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삼위 가운데 그러한 분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변화를 겪지 않으셨다. 반대로 신성한 합병은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서 발생했고 비록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주체이셨음에도, 세 위격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아들 고유의 행위에 있어서 동시에 운행하셨다.


The New Testament indicates that God was exceedingly active as Christ suffered on the cross, and again we should see in Christ's manifest activity the hidden operation of God to effect a victorious redemption through Him, which Witness Lee affirmed. In Christ's death, Paul tells us, God was operating:


신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셨을 때 하나님이 극도로 활동적이셨음을 보여주며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나타난 행위 안에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운행하심이 아들을 통해 승리의 구속을 이루었음을 볼 필요가 있다. 위트니스 리는 바로 이 점을 확증하였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운행하고 계셨음을 말한다.


Wiping out the handwriting in ordinances, which was against us, which was contrary to us; and He has taken it out of the way, nailing it to the cross. Stripping off the rulers and the authorities, He made a display of them openly, triumphing over them in it. (Col. 2:14-15)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이 적혀 있는 증서를 하나님께서 지워 버리셨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어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벗기시어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골 2:14-15)


Namely, that God in Christ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t accounting their offenses to them, and has put in us the word of reconciliation. (2 Cor. 5:19)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고, 그들의 허물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으며, 화목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고후 5:19).


While God was not apart from Christ but at work in Him crucifying “the handwriting in ordinances,” conquering “the rulers and the authorities,” and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the Scriptures nonetheless testify that He forsook Christ to judge Him for our sins. Witness Lee points out, however, that God’s forsaking of Christ was an economical matter, not an essential matter, so that God could forsake the dying Christ economically but could pass through death in Him essentially. Witness Lee writes that


하나님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규례들이 적혀 있는 증서"를 지우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정복하고,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일하셨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대해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버리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버리신 것은 경륜적인 문제이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통과하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when the Lord Jesus died on the cross to accomplish redemption for sinners, God forsook Him according to God’s economy. This was why He cried,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Matt. 27:46). On the cross He bore our sins and even became sin for us, suffering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At that moment, God forsook Him as far as God’s economy is concerned. But as far as God’s essence is concerned, God was passing through the death of the cross together with Him, for the essence of God was forever in Him; it never departed from Him.[46]


하나님은 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한 구속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경륜에 따라 그를 버리셨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라고 부르짖었던 이유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으며 심지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감당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에 관해서는 그 순간에 그를 버리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본질에 있어서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시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히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적 본질은 결코 그분을 떠난 적이 없었다.


The coinherence of the three persons is an aspect of God's intrinsic being, which is immutable, or unchangeable. Had Christ been alone at the cross, intrinsically separated from the Father and the Spirit, this would have necessitated a change in God's essential being. If one accepts the testimony of Scripture that the three of the Godhead coinhere essentially, then this intrinsic relationship in God's essential being would be unaffected by Christ's incarnation, human living, death, resurrection, and ascension.


세 위격의 상호 내재는 하나님의 내재적 존재의 한 방면이며 이것은 항구적이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혼자 계셨고 아버지와 영으로부터 내재적으로 분리되어 계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에 필연적으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격의 세 위격이 본질적으로 상호 내재하신다는 성경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 안에 있는 이러한 내재적인 관계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의해 영향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As we have seen, Witness Lee observed that Hebrews points to a Trinitarian reality (we may say the reality of incorporation) at the cross that precludes us from thinking of Christ as having acted apart from the Father or the Spirit in accomplishing the work of redemption. It was, the writer of Hebrews testifies, “through the eternal Spirit” that Christ “offered Himself without blemish to God” (Heb. 9:14), so that by the hidden operation of the eternal Spirit in the distinct action of the Son, the redemption accomplished by Christ was infused with an eternal efficacy. Christ, therefore, did not act independently of the Father or the Spirit to accomplish the work of redemption; rather, He incorporated the operations of the Father and the Spirit in His distinct action of dying on the cross, and His mutual coinhering and working together as one with the Father and the Spirit was not compromised by the Father’s forsaking of Him at the cross. Indeed, Jesus the Son of God was crucified, but the blood shed by Him was, Paul tells us, God’s “own blood” (Acts 20:28).


우리가 보아왔듯이 위트니스 리는 히브리서가 십자가에서의 삼위일체의 실재(이것을 합병의 실재라고 말할 수 있음)를 지적하고 있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일을 성취하실 때 아버지와 영과 분리되어 행동하셨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흠이 없는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것"은 바로 "영원한 영을 통해서"라고 하고(히 9:14), 그 결과 아들 고유의 행위 안에서 영원한 영의 숨겨진 운행하심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에 영원한 효능이 주입되게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구속의 일을 성취하실 때 아버지와 그 영과 독립적으로 행동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이라는 자신 고유의 행위 안에서 아버지와 그 영의 운행과 합병하셨다. 또한, 그분의 상호 내재와 아버지와 그 영과 함께 하나로서 일하심은 아버지께서 그를 십자가에서 버리셨다고 해서 무효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분에 의해 흘려진 피는 하나님 자신의 피였다(행 20:28).


To be sure, the Father was not the subject of suffering in Christ’s death on the cross,[47] nor was the Spirit the One who suffered, but an orthodox Trinitarianism must maintain that “in the visible death of Christ the three of the Trinity operated so as to make manifest the distinct activity of the Son on the cross.”[48] Furthermore, we must hold that “redemption is of the Son, but in operation redemption is the activity of the entire Godhead, Father, Son, and Spirit.”[49] In the crucifixion of Christ for our redemption, we see the glorious coordination of the Divine Trinity as a divine incorporation.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고통을 당한 주체는 참으로 아버지가 아니시며, 그 영께서 고통을 당하신 것도 아니며, 정통 삼위일체론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죽음 속에서 아들 고유의 행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운행하셨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 "구속은 아들에게 속하지만, 운행하심 안에서 구속은 전체 신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행동"이라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구속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우리는 신성한 합병체이신 신성한 삼일성의 영광스러운 협력을 본다.


As we saw above, Witness Lee also recognized the splendorous co-working among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again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all three operate inseparably to make manifest the distinct action of one, in this case, the Son in His rising from the dead. Here a simple review of some further New Testament evidence suffices to demonstrate the inseparable operation of the three in raising Christ from the dead, although, as with the crucifixion, it is imperative to affirm that it was distinctly the Son alone who resurrected. Witness Lee observed that while God is said to have raised Christ from the dead (Acts 2:32; 3:15; 10:40; Rom. 8:11), agency for the resurrection is also ascribed to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respectively. The Father, we are told, raised His Son Jesus from the dead (1 Thes. 1:10), and yet the Son foretold that He would raise Himself from the dead (John 2:19, 21; 10:17-18). Moreover, the Spirit was operating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Rom. 1:4; 8:11), and we can reasonably understand that the Spirit was the surpassing power that raised Christ from the dead (Eph. 1:19-20). All this is to say that while it was the distinct action of the Son to rise from the dead, He incorporated the operations of the Father and the Spirit in the economic process that He passed through, and the three are understood to have worked together to manifest the distinct action of the Son in His resurrection. Like the crucifixion, the resurrection of Christ was carried out by the incorporated operation of the entire Divine Trinity.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위트니스 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 시 신성한 삼일성 가운데 있었던 영광스런 동역을 알았고, 세 위격 모두는 한 위격의 고유의 행위, 이 경우에는 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행위(행 2:32, 10:40, 롬 8:11)를 드러내기 위해 분리됨이 없이 운행하신다는 점이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신약의 몇 구절을 더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실 때 세 위격이 어떻게 분리됨이 없이 운행하셨는지를 증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물론 십자가 사건처럼 부활하신 분도 아들 혼자이셨음을 확증하는 것은 필요하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지만(행 2:32, 3:15; 10:40, 롬 8:11), 부활을 위한 기능(agency)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 모두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말하지만(살전 1:10), 또한 아들은 자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설 것임을 미리 말씀하셨다(요 2:10, 21; 10:17-18). 더구나 그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운행 중이셨으므로(롬 1:4; 8:11) 우리는 그 영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게 하는 초월하는 능력(엡 1:19-20)이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비록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 아들 고유의 행위이셨지만 아들께서 자신이 통과했던 경륜적인 과정에서 아버지와 영의 운행들을 합병하셨고 세 위격도 부활이라는 아들 고유의 행위를 드러내기 위해 함께 일하셨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 박하심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일성 전체가 합병되어 운행하심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Incorporation in the Giving of Life to the Believers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심 안에서 합병되심


The reality of incorporation can also be seen in the work of the Divine Trinity to impart the divine life into redeemed humanity. In the New Testament the Spirit functions to regenerate the believers (John 3:6) and impart life to them (6:63; 2 Cor. 3:6), but He does not do this apart from the Father and the Son; rather, He incorporates the distinct operation of the Father to give life to the dead (John 5:21;), that is, to regenerate them (1 Pet. 1:3), and the distinct operation of the Son to give life to those whom the Father has given to Him (John 17:2). Concerning the oneness of the Divine Trinity in giving life to the believers, Witness Lee writes:


합병의 실재는 신성한 삼일성이 구속된 인류에게 신성한 생명을 전달하는 일에서도 관찰된다. 신약 성경에서 그 영은 믿는 이들을 중생시키고(요 3:6), 그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요 6:63, 고후 3:6)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 영은 이것을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독립되어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영은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즉 그들을 중생하게 하는(벧전 1:3) 아버지의 운행을 합병하며(요 5:21)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아들의 운행(요 17:2)을 합병하신다. 위트니스 리는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에서의 신성한 삼일성의 하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Both the Father and the Son have life in themselves [John 5:26]. So the Son can and does enliven people with life as the Father desires. In life's enlivening, the Son is truly one with the Father.[50]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자신들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요 5:26).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생명으로 사람들을 살아나게 한다. 아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서 참으로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In verses 63 through 65 [of John 6], the fifth section, we see that Christ became the life-giving Spirit. At the beginning of verse 63 the Lord says, “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At this point, the Spirit who gives life is brought in. After resurrection and through resurrection, the Lord Jesus, who had become flesh (1:14), became the Spirit who gives life, as is clearly mentioned in 1 Corinthians 15:45b. As the life-giving Spirit, He can be life and the life supply to us. When we receive Him as the crucified and resurrected Savior, the Spirit who gives life comes into us to impart eternal life to us. We receive the Lord Jesus, but we get the Spirit who gives life.[51]


다섯번째 부분인 [요한복음 6장] 63절부터 65절까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을 보았다. 63절의 시작에서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 시점에 생명을 주는 영이 소개된다. 육체 되셨던 주 예수님(1:14)은 부활 후에 그리고 부활을 통해 생명 주는 영이 되셨으며,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후반부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분은 생명 주는 영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이자 생명 공급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로 영접할 때 생명을 주는 그 영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영접하지만, 생명 주시는 그 영을 얻는다.


Who then is the He in verse 11 [of Romans 8]? Actually, the verse should read “the One Who raised Christ Jesus from among the dead.” Instead of “Him” it should be “the One.” This verse twice refers us to the Trinity in a very practical way. The Spirit, the One who raised Christ Jesus from among the dead, that is, the Father, and Christ Jesus Himself are all three mentioned. According to letters you have the three: the Spirit of the One who raised Jesus from among the dead. But according to your experience there is only one. If then the three are one, whom do you experience? The Spirit? Or Jesus? Or the One?… It is the Three-one who gives life.[52]


그렇다면 [로마서 8장] 11절의 ‘그분’은 누구이신가? 사실상,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라고 읽어야 한다. 그분(Him)이라는 말 대신에, 그것은 그 한 분(the One)이라고 해야 한다. 이 구절은 두 번이나 우리에게 삼일성을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 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분, 즉 아버지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 셋 모두가 언급되고 있다. 문자적으로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라는 세 번째를 소유한다. 그러나 여러분의 경험에 따르면, 오직 하나만 계신다. 만일 셋이 하나라면, 당신이 경험한 분은 누구이신가? 그 영이신가? 예수님이신가? 아니면 그 한 분이신가? 생명을 주시는 분은 셋-하나이신 분이시다.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therefore operate inseparably to manifest the Spirit in the one action of giving life, and in the life-giving action of the Spirit, all three are understood to be operating simultaneously. Thus, it is God—the Triune God—who has “made us alive” (Eph. 2:4-5) by imparting the divine life to the believers for their regeneration by the life-giving Spirit, the reality of Christ as the embodiment of the Father.[53] To be sure, the Spirit acts manifestly to impart life, but the giving of life is an operation of the entire Divine Trinity as a divine incorporation.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의 행동에서는 그 영이 나타나시도록 신성한 삼일성의 셋이 분리됨이 없이 역사하시고, 셋 모두는 그 영께서 생명을 주시는 행동 안에서 동시에 역사하고 계신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아버지의 체현이시자 그리스도의 실재이신 생명 주는 영에 의해 믿는이들이 거듭나도록 신성한 생명을 주입하셔서 “우리를 살리신 분”(엡 2:4-5)은 하나님 곧 삼일 하나님이시다. 참으로 그 영께서 생명을 주입하시려고 나타나게 행동하시지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 전체가 하나의 신성한 합병체로서 역사하신 것이다.


In the economical activity of crucifixion, resurrection, and life-imparting, the Divine Trinity acts according to what He is in His eternal being. As there can be no separation of persons in the Godhead, so there can be no separation between them in the divine economy, for the three act economically according to what they are immanently. The works themselves testify that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mutually indwell one another in all their activity, and the term incorporation, properly understood, conveys this truth quite appropriately. “God in His Divine Trinity,” writes Witness Lee, “is an incorporation, mutually coinhering and working together as one.”[54]


신성한 삼일성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생명 전달이라는 경륜적 행위 안에서 영원한 존재 안에 있는 구별됨을 따라 행동하신다. 신격 안에서 위격 간의 분리가 있을 수 없음으로 신성한 경륜 안에서도 그분들 가운데는 분리가 없는 데, 그 이유는 세 위격이 내재적인 삼일성에 따라 경륜적으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그 일들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그분들의 모든 행동 안에 상호 내주하신다는 것을 증언하며, 합당하게 이해만 된다면 합병이란 용어는 이러한 진리를 매우 적절하게 묘사한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 상호 내주하시고 하나로 동역하시는 합병체"라고 말한다.


Conclusion


결론


Witness Lee’s teaching on the Trinity, though sadly maligned and misrepresented by some over the years, has been shown to be solidly orthodox. Contrary to accusations that he taught the heresy of modalism, Witness Lee’s writings affirm 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 Trinity that is in accord with passages of Scripture that may at first glance appear contradictory. On the one hand, he maintained that the distinctions among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re genuine and eternal; on the other hand, he accepted the biblical pronouncements that the Son is called “Eternal Father” and that Christ is now the “life-giving Spirit.” To explain how both sides could be equally valid, he relied on the long-established notion of coinherence, and he held to the long-accepted proposition that there are both immanent and economic aspects of the Divine Trinity. By affirming these classic markers of orthodoxy, Witness Lee stood on the shoulders of those teachers whose labors the church has long regarded.


애석하게도 삼위일체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일부에 의해 수년 동안 비난과 오해를 받아 왔지만, 확고하게 정통임이 밝혀졌다. 그가 양태론 이단을 가르친다는 비난과 달리, 위트니스 리의 저술들은 얼핏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과 일치하는 신성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확증한다. 그는 한 면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이 참되고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다른 면에서 아들이 "영존하는 아버지"이시며, 이제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라는 성경 본문의 선언들도 받아드린다. 그는 어떻게 이 두 방면 모두가 정당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오랫동안 지지되어 온 상호 내재라는 개념을 믿으며, 신성한 삼위일체 안에는 내재적이고 경륜적인 방면들이 있다는 주장도 고수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정통 교리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들을 인정하고 교회가 오랫동안 경의를 표한 성경 교사들의 수고와 그 어깨 위에 서 있었다.


Witness Lee’s teaching of incorporation, whereby the three persons mutually coinhere and work together as one, provides a model for apprehending the immanent and economic relationships in the Divine Trinity and the perplexing issue of how one person can be identified with another without compromising the eternal distinctions between them. As the Son incorporates the hidden operations of the Father and thus can be identified with the Father and even called “Eternal Father,” so the Spirit incorporates the hidden operations of the Son and thus can be identified with the Son and even called “the Lord Spirit.” The Spirit, then, comes to the believers not as a deputized representative of the Son but bearing and communicating the Son Himself, the embodiment of the Father, to the believers for their experience of the Divine Trinity as a divine incorporation.


세 위격이 상호 내재하시며 하나로서 동역하신다는 합병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신성한 삼위일체의 내재적이고 경륜적인 방면들을 이해하는 것과 그분들 가운데 영원한 구별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한 위격이 다른 위격과 어떻게 동일시 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당혹스러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감추어진 운행을 합병시키기에 아버지와 동일시 되실 수 있고 심지어 "영존하는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처럼, 그 영도 아들의 비밀스러운 운행을 합병시키기 때문에 아들과 동일시 되실 수 있으며 심지어 "주 영"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 영은 그러한 상태로 믿는 이들에게 아들을 대표하는 위치가 아니라 아들 자신을 전달하시기 위해 오신다. 그 영이 전달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시며 이러한 전달은 믿는 이들이 신성한 합병체이신 신성한 삼일성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Throughout his ministry Witness Lee emphasized that the Divine Trinity is not for mere doctrinal understanding but for the believers' experience, and at times he was unfairly chided for denigrating biblical precision in favor of mystical subjectivity. As we believe this paper has shown, Witness Lee cared absolutely for biblical truth, and his teaching opened a door for a rich and full experience of the Triune God realized and imparted to man in the Spirit who gives life. Writing on 2 Corinthians 13:14 in a study note in the Recovery Version of the Holy Bible, Witness Lee demonstrates both a deep care for proper teaching and a concern that the Triune God not be taken as mere doctrine but would be rightly experienced and enjoyed by the believers. He writes:


위트니스 리는 그의 사역에서 신성한 삼일성이 단지 교리적인 이해가 아닌 믿는 이들의 체험을 위해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종종 신비주의적 주관성으로 성경적인 정확성을 깍아내린다고 부당하게 비난당했다. 우리는 본 논문이 합당하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고 믿는다. 본 논문은 위트니스 리가 절대적으로 성경 진리를 관심했고 그의 가르침이 생명 주는 그 영 안에서 사람에게 실재화되시고 전달되신 삼일 하나님을 풍성하고 완전하게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음을 설명했다. 위트니스 리는 신약성경 회복역 고린도후서 13장 14절 주석에서 적절한 가르침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삼일 하나님이 다만 교리만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합당하게 체험되고 누려지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을 표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grace of the Lord is the Lord Himself as life to us for our enjoyment (John 1:17 and note 1; 1 Cor. 15:10 and note 1), the love of God is God Himself (1 John 4:8, 16) as the source of the grace of the Lord, and the fellowship of the Spirit is the Spirit Himself as the transmission of the grace of the Lord with the love of God for our participation. These are not three separate matters but three aspects of one thing, just as the Lord, God, and the Holy Spirit are not three separate Gods but three “hypostases… of the one same undivided and indivisible” God (Philip Schaff). The Greek word for hypostasis (used in Heb. 11:1—see note 2 there), the singular form of hypostases, refers to a support under, a support beneath, i.e., something underneath that supports, a supporting substance.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the hypostases, the supporting substances, that compose the one Godhead.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다(요 1:17과 각주 171, 고전 15:10과 각주 101).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다(요일 4:8, 16).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이들은 분리된 셋이 아니라 하나의 세 방면이다. 이것은 마치 주님과 하나님과 성령께서 분리된 세 하나님이 아니라 “나누어지지 않고 나눌 수도 없는 동일한 한 하나님의 세 위격들”(필립 쉐프)인 것과 같다. 위격들(hypostases)의 단수형인 ‘위격’(hypostasis, 히 11:1에서 사용됨-참조 히 11장 각주 13)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받침대, 밑받침, 즉 밑에서 받쳐 주는 어떤 것, 받쳐 주는 실질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위격들, 곧 한 분의 신격을 구성하며 받쳐 주는 실질들이시다.


The love of God is the source, since God is the origin; the grace of the Lord is the course of the love of God, since the Lord is the expression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Spirit is the impartation of the grace of the Lord with the love of God, since the Spirit is the transmission of the Lord with God, for our experience and enjoyment of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with Their divine virtues. Here the grace of the Lord is mentioned first because this book is on the grace of Christ ([2 Cor.] 1:12; 4:15; 6:1; 8:1, 9; 9:8, 14; 12:9). Such a divine attribute of three virtues—love, grace, and fellowship—and such a Triune God of the three divine hypostases—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were needed by the distracted and confused yet comforted and restored Corinthian believers. Hence, the apostle used all these divine and precious things in one sentence to conclude his lovely and dear Epistle.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원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의 교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나눠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께서 하나님과 주님을 함께 전달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성령-과 그분의 신성한 미덕들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은혜가 먼저 언급된 것은 이 책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12, 4:15, 6:1, 8:1, 9, 9:8, 14, 12:9). 빗나가고 혼돈되었지만 위로를 받고 회복된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세 가지 미덕들-사랑, 은혜, 교통-을 지닌 신성한 속성과 세 신성한 위격들-아버지, 아들, 영-을 지니신 삼일 하나님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한 문장 안에서 이 신성하고 보배로운 것들을 모두 사용하여, 사랑이 가득하고 친밀한 그의 서신을 끝맺었다.


This verse is strong proof that the trinity of the Godhead is not for the doctrinal understanding of systematic theology but for the dispensing of God Himself in His trinity into His chosen and redeemed people. In the Bible the Trinity is never revealed merely as a doctrine. It is always revealed or mentioned in regard to the relationship of God with His creatures, especially with man, who was created by Him, and more particularly with His chosen and redeemed people.[55]


이 구절은 신격의 삼일성이 조직신학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삼일성을 지니신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성경에서 삼일성은 결코 단지 하나의 교리로서 계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관련하여, 특히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 더 특별하게는 그분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과 관련하여 계시되거나 언급된다.


It is our hope that this presentation of Witness Lee's teaching on the Trinity will stimulate further inquiry into his ministry. We believe that scholars will find there a rich and valuable contribution to Trinitarian studies that encourages the believers to advance in their experience of the Triune God unto the fulfillment of His eternal economy.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이번 발표가 그의 사역에 대한 추가 연구를 자극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학자들이 그러한 연구에서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에 대한 체험에서 전진하여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격려함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삼위일체 연구에 있어서 풍성하고 가치있는 공헌을 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을 믿는다.


—Defense & Confirmation Project


—변호와 확증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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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87), 61.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영문), 61쪽). All titles by Witness Lee as cited in this paper are published by Living Stream Ministry, Anaheim, CA. All subsequent references will be cited as LSM followed by the year of publication.


[2] Witness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LSM, 2000), 35.


[3] Witness Lee, Living in and with the Divine Trinity (LSM, 1990), 53.


[4] Allan Coppedge, The God Who Is Triune: Revisioning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7), 95. The definitions of terms such as coinherence and perichoresis may vary slightly from one writer to another, so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meaning a particular writer attaches to them. For example, Coppedge uses coinherence and perichoresis synonymously to denote mutual indwelling and mutual operation, whereas Witness Lee employs coinherence to denote the mutual indwelling of the three persons and incorporation to denote their coinherence and their working together as one.


(상호 내재(coinherence)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며, 특정 저자가 그 단어에 부여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위트니스 리는 상호 내주는 세 위격이 서로 안에 거하시는 것으로, 합병(incorporation)은 그 세 위격이 서로 안에 거하며 하나로 함께 일하시는 의미로 사용했으나, 코페지(Coppedge)는 상호 내재와 페리코레시스는 동의어로서 상호 내주와 상호 작용의 의미로 사용한다.)


[5] Coppedge, 95. J. Scott Horrell notes, “Although the idea appears in Gregory of Nazianzus and is developed in Maximus the Confessor, it is John of Damascus who popularizes the term perichoresis to describe the coinherence or mutual indwelling of the members of the Trinity.” (나지안 그레고리 때에 이 개념이 등장하고 고백자 막시무스 때에 발전되었으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삼위일체 구성원들 간의 상호 내재 혹은 서로 안에 내주하심(mutual indwelling)을 묘사하는 말로 대중화시킨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이다.) J. Scott Horrell, “The Eternal Son of God in the Social Trinity,” in Jesus in Trinitarian Perspective, Fred Sanders and Klaus Issler, eds. (Nashville: B&H Publishing Group, 2007), 58-59.


[6] Witness Lee, Truth Lessons, Level One, Volume 1 (LSM, 1985).


[7] Ibid., 16.


[8] Ibid., 18.


[9] Ibid.


[10] Ibid., 19. Fred Sanders uses the memorable phrase “mutual insidedness” to describe the perichoretic relationship among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See Fred Sanders, “The Trinity in Gender Debates,” Patheos, October 30, 2012, http://www.patheos.com/blogs/scriptorium/2012/10/the-trinity-in-gender-debates/. (프레드 샌더즈(Fred Sanders)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페리코레시스적 관계를 설명하는데, “상호 내부성“(mutual insidedness)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11] Ibid., 19-20.


[12] This brief presentation focuses on Truth Lessons to present the basic points in Witness Lee’s Trinitarian orthodoxy, but for more from Witness Lee on these points, (이 간략한 발표는 위트니스 리의 정통 삼위일체론에 대한 기본 요점을 제시한 <진리 공과> 시리즈를 주로 다뤘지만, 이 요점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추가 설명은 다음 자료들을 참고하라.) see also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LSM, 1973);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LSM, 2000), 26-40, 70-77; The Crucial Points of the Major Items of the Lord’s Recovery Today (LSM, 1993), 5-15; Elders’ Training, Book 3: The Way to Carry Out the Vision (LSM, 1985), 68-73, 75-85;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Messages 1-20 (LSM, 1985), 22-32.


[13] See, for example, 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Two Answers by Witness Lee (LSM, 1976); Ron Kangas, Modalism, Tritheism, or the Pure Revelation of the Triune God according to the Bible (LSM, 1976); A Defense of the Gospel: Responses to an Open Letter from “Christian Scholars and Ministry Leaders,”  vols. 1 and 2 (Fullerton: DCP Press, 2009).


[14] Harold O. J. Brown, Heresies: The Image of Christ in the Mirror of Heresy and Orthodoxy from the Apostles to the Present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4), 96. In his highly regarded work Early Christian Doctrines, J. N. D. Kelly similarly addresses the genesis and early history of modalism in a section titled “Modalistic Monarchianism.” See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Revised Edi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1978), 119-123.


[15] Brown, 101. Kelly notes that it is unclear who Praxeas actually was and that this Praxeas has sometimes been identified with Noetus and Epigonus. Kelly writes further, “Whoever he was, he seems to have taught that Father and Son were one identical Person (duos unum volunt esse, ut idem pater et filius habeatur), the Word having no independent subsistence and being a mere vox et sonus oris, and that consequently it was the Father Himself Who entered the Virgin’s womb, so becoming, as it were, His own Son, and Who suffered, died and rose again. Thus this unique Person united in Himself mutually inconsistent attributes, being invisible and then visible, impassible and then passible.” (Kelly 121)


(… 켈리는 추가로 이렇게 적고 있다. “… 그는 성부와 성자께서 한 분 동일한 인격이시고(duos unum volunt esse, ut idem pater et filius habeatur), 그 말씀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며 … 결과적으로 처녀의 태에 들어가고, 고난을 겪고, 죽고, 다시 사신 분은 성부 자신이다 라고 가르쳐 온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유일한 인격이 보이지 않다가 다시 보임, 무감각하다가 다시 감각 있음이라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속성들을 자신 안에서 결합했다”).


[16] Brown, 101.


[17] Brown, 103. Kelly observes that Sabellius gave modalism “a more systematic, philosophical shape” and that this more sophisticated version of the doctrine “tried to meet some of the objections to which the earlier brand was exposed.” (Kelly 121-122)


[18] Brown, 103. Kelly elaborates: “Sabellius, we are told, regarded the Godhead as a monad (his name for it was υίοπάτωρ) which expressed itself in three operations. He used the analogy of the sun, a single object which radiates both warmth and light; the Father was, as it were, the form or essence, and the Son and the Spirit His modes of self-expression. He may also have exploited the idea of the expansion or ‘dilation’ (πλατυσμός) of the divine monad, the Father by process of development projecting Himself first as Son and then as Spirit. Thus the one Godhead regarded as creator and law-giver was Father; for redemption It was projected like a ray of the sun, and was then withdrawn; then, thirdly, the same Godhead operated as Spirit to inspire and bestow grace.” (Kelly 122)


(켈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벨리우스는 신격을 세 가지 행동(operation) 안에서 그 자체가 표현된 하나의 모나드(monad) 라고 보았다. 그는 온기와 빛 모두를 발광하는 단일체인 태양을 예로 사용한다. 성부는 말하자면, 원형 혹은 본질이셨고, 아들과 그 영은 그분의 자기표현 양식들(modes)이다. 그는 또한 성부께서 처음에는 아들로 그다음에는 영으로서 자신을 투영시키는 발전 과정에 의해 신성한 모나드가 확장 또는 팽창된다는 개념을 사용해 왔다. 따라서 하나의 신격은 창조주와 율법 제공자로서는 아버지이셨고, 그것이 구속을 위해서는 하나의 태양 광선처럼 투사되었다가 다시 철수되고, 그다음에 세 번째로 같은 신격이 은혜를 부여하기 위해 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았다.”)


[19] Other examples of Witness Lee’s repudiations of modalism include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을 거부한 추가 증거들은 다음 자료들을 포함함)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LSM, 2000), 26-27, 34-36, 43-44; What a Heresy—Two Divine Fathers, Two Life-giving Spirits, and Three Gods!  (LSM, 1976), 3-5;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Messages 1-20 (LSM, 1985), 28-30;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Messages 221-239 (LSM, 1988), 2466-2467; Young People’s Training (LSM, 1976), 74-76, 84; Christ in His Excellency (LSM, 2000), 54; Elders’ Training, Book 3: The Way to Carry Out the Vision (LSM, 1985), 33, 68-69, 78; The Central Line of the Divine Revelation (LSM, 1991), 22; The Economy of God and the Mystery of the Transmission of the Divine Trinity (LSM, 2001), 150; The Full Knowledge of the Word of God (LSM, 1987), 71-72; The Basic Revelation in the Holy Scriptures (LSM, 1984), 24; Vessels Useful to the Lord (LSM, 2003), 157-158; Life Messages, vol. 1 (LSM, 1979), 269-270, 272-273; The Crucial Points of the Major Items of the Lord’s Recovery Today (LSM, 1993), 13-15.


[20] Witness Lee, Life Messages, vol. 2 (LSM, 1979), 269-270.


[21] For a brief review of some of these interpretations, see A Confirmation of the Gospel: Concerning the Teaching of the Local Churches and Living Stream Ministry (Fullerton: DCP Press, 2009), 15-16.


[22] Witness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LSM, 2000), 19.


[23] Witness Lee, The Crucial Points of the Major Items of the Lord’s Recovery Today (LSM, 1993), 10.


[24] Witness Lee, The Issue of Christ Being Glorified by the Father with the Divine Glory (LSM, 1996), 26.


[25] Witness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LSM, 2000), 34.


[26] A.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c1907; repr., Old Tappan: Revell, 1960), 332-333.


[27] James D. G. Dunn, The Christ and the Spirit, vol. 1, Christology (Grand Rapids: W. B. Eerdmans, 1998), 164-165.


[28] Alister McGrath, Studies in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7), 208.

In addition to the few examples offered here, others include the following:


Yet by virtue of the common essence, what one divine person performs each may be said to perform (the principle of perichoresis). Accordingly, the Son creates (1 Cor. 8:6; Col. 1:16) and the Spirit creates (cf. Job 33:4; Ps. 33:6); the Father redeems (2 Cor. 5:18-19; Eph. 2:4-5, 8) and the Spirit redeems (Rom. 8:4; Titus 3:5); and the Father sanctifies (Eph. 1:3-4; 1 Thess. 5:23) and the Son sanctifies (Eph. 4:15-16; 5:25-27). (Bruce Demarest and Gordon Lewis, Integrative Theology, vol. 1 [Grand Rapids: Zondervan, 1987], 267)

The Spirit in its working was found to be in effect the equivalent of Jesus Christ. Thus St Paul writes, If any has not Christ’s Spirit, that man is not his (Christ’s); but if Christ is in you, the body indeed is dead…but the spirit is life…; where the possession of the Spirit of Christ is clearly regarded as tantamount to an indwelling of Christ Himself. The same line of thought seems to be followed in the words, The Lord is the Spirit, but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But we all…are being transformed…as by the Lord the Spirit,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and ‘the Lord the Spirit’ (i.e. Christ in the power of His glorified life) are viewed as being in practice the same. (Henry Barclay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10], 300-301)

17. Now the Lord is the Spirit:  …Paul elsewhere distinguishes between the Lord (i.e., Christ) and the Spirit (cf. 1 C. 12.4f; 2 C. 13.14), but dynamically they are one, since it is by the Spirit that the life of the risen Lord is imparted to believers and maintained within them (cf. Rom. 8.9-11; see also note on 1 C. 15.45b). (F.F. Bruce, ed., New Century Bible [London: Oliphants, 1971], 193)

When believers complain that they cannot distinguish between the separate activities in their lives of the Father, the Risen Lord, and the Holy Spirit, the matter is sometimes phrased in a way that obscures God’s unity, a fundamental doctrine of both the Old and New Testament. Every action of any of the persons of the Trinity is an action of God, although in many actions the persons of the Godhead may be active in different ways. All authentic spiritual experience is an experience of the one God. (Carl F.H.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VI:2 [Waco: Word Books, 1983], 400.


For more examples see Brothers, Hear Our Defense (2): Concerning the Divine Trinity (Fullerton: DCP Press, 2011), 55-59, 91-104.


(여기 제시된 몇 가지 예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공통 본질에 의해 한 신성한 위격이 수행한 것은 각 위격이 수행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페리코레시스 원칙). 따라서, 아들이 창조하시고(고전 8:6; 골 1:16) 또한 그 영이 창조하시며(욥 33:4; 시 33:6 참조); 아버지가 구속하시고(고후 5:18-19; 엡 2:4-5, 8) 또한 그 영이 구속하시며(롬 8:4; 딛 3:5); 아버지가 거룩하게 하시고(엡 1:3-4; 살전 5:23) 또한 아들이 거룩하게 하신다(엡 4:15-16; 5:25-27).


그 영의 역사하심은 효과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된 것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곳은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하심과 마찬가지로 간주되는 것은 분명하다. 동일한 사고 방식이 다음의 말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다.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 주 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변화되고 있고 … ‘주님이신 그 영’(the Spirit of the Lord’)과 ‘주 영’(the Lord the Spirit)(그분의 영화롭게 되신 생명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은 같은 것을 실행하는 존재로 여겨진다(Henry Barclay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17.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주님(그리스도)과 그 영(고전 12.4, 고후 13.14 참조)을 구별하지만 , 일으켜지신 주님의 생명이 믿는 이들 안에 전해지고, 그들 안에 유지되는 것(롬 8.9-11, 고전 15.45하 각주 참조)은 바로 그 영에 의한 것이기에, 그들은 역동적으로 하나이시다(F.F. Bruce, ed., New Century Bible [London: Oliphants, 1971], 193).


믿는 이들이 자신들은 성부와 일으켜지신 주님과 성령의 삶에서 별개의 활동을 구별할 수 없다고 불평할 때, 이 문제는 가끔 신구약 모두에서 근본 진리인 하나님의 단일성(unity)을 모호하게 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삼위일체의 어느 위격의 각각의 행동은 비록 신격 안의 위격들이 많은 황동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활동해도 하나님의 하나의 행동이시다. 모든 참된 영적인 체험은 한 분 하나님(the one God)을 체험하는 것이다.)


[29] Witness Lee, Elders’ Training, Book 3: The Way to Carry Out the Vision (LSM, 1985), 69-71.


[30] Chung-Hyun Baik, The Holy Trinity—God for God and God for Us: Seven Positions on the Immanent-Economic Trinity Relation in Contemporary Trinitarian Theology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11), 62.


[31] Witness Lee, The Crucial Points of the Major Items of the Lord’s Recovery Today (LSM, 1993), 10.


[32] Witness Lee,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Messages 79-98 (LSM, 1996), 914-915.


[33] Witness Lee, The Triune God to Be Life to the Tripartite Man (LSM, 1996), 48. The full quote reads,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not three separate persons or three Gods; they are one God, one reality, one person.” (인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분리된 세 위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인격이시다.”)


[34] Interestingly, the context from which the above quote was excised makes this point quite well. Noting that there is one name for the three persons in Matthew 28:19, Witness Lee notes that the name “is the sum total of the divine Being, equivalent to His person.” He writes:


The revelation of the Triune God can be found throughout the New Testament. In Matthew 28:19, the Lord Jesus charged the disciples to baptize the nations “into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In this verse, name is singular in number, yet the one name refers to three persons. This shows that there is one name for the divine Trinity (see notes 5 and 6 on Matthew 28:19 in the Recovery Version). The word person is often used to describe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yet we must be careful in using such a term. Speaking of the term person, Griffith Thomas, one of the founders of Dallas Theological Seminary and a highly respected student of the Bible, said in his book The Principles of Theology (p. 31), “Like all human language, it is liable to be accused of inadequacy and even positive error. It certainly must not be pressed too far, or it will lead to Tritheism….While we are compelled to use terms like ‘substance’ and ‘Person,’ we are not to think of them as identical with what we understand as human substance and personality.”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not three separate persons or three Gods; they are one God, one reality, one person. Hence,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denoted by one name. The name denotes the person, and the person is the reality of the name. The name of the divine Trinity is the sum total of the divine Being, equivalent to His person. God is triune; that is, He is three-one. In some theological writings, the preposition in is added between three and one to make three-in-one. However, it is more accurate to say that God is three-one. Being three-one, He is one God, with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s His reality, His person. Thus, the name of the Triune God is Father, Son, and Spirit. Father, Son, and Spirit are not three different names; they are the unique name of the divine Trinity. Such a name is a compound title. Many of the divine titles in the Bible, such as “God the Father,” “the Lord Jesus,” and “the Lord Spirit” (2 Cor. 3:18), are compound titles. The compound name in Matthew 28:19 is composed of three parts—Father, Son, and Holy Spirit. (Witness Lee, The Triune God to Be Life to the Tripartite Man, 48-49)


(위트니스 리는 그 이름을 “그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라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일 하나님에 관한 계시는 신약 전반에 걸쳐 발견될 수 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 주라”고 명령하셨다. 이 구절에서 ‘이름’이라는 단어는 단수이지만 그 한 이름은 세 인격을 언급한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에 한 이름이 있음을 보여준다. ‘인격’이라는 단어가 자주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용어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이자 가장 존경받는 성경 연구가인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는 ‘인격’이라는 용어를 말하면서 그의 저서 <신학 원론>(31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의 언어가 그러하듯이 부적절함과 심지어 긍정적인 오류라는 비난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은 분명히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이 말은 삼신론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실체’(substance)나 인격(Pers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말들을 사람의 실체나 인격으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어떤 신학적인 글에서는 ‘셋’과 ‘하나’ 사이에 전치사 ‘안에’(in)를 삽입하여 ‘하나 안에 셋’이라고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셋-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셋-하나로서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그분의 실제와 인격으로 하는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의 이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이름이 아니라 신성한 삼일성의 유일한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은 복합적인 칭호이다. 성경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이나 “주 예수”나 혹은 “주 영”(고후3:18)과 같은 많은 신성한 칭호들이 복합적인 칭호이다.)


[35] Following are examples of scholars and Christian leaders, including Chafer and Plantinga, who have referred to God as a person in the singular sense:


…the Scriptures proceed in the presentation of the nature and character of God. He is a Person with those faculties and constituent elements which belong to personality. (Lewis Sperry Chafer, Systematic Theology [Dallas: Dallas Seminary Press, 1947], 180)

The definition of a person—that is, a knowing, willing, acting I—can have the meaning only of a confession of the person of God declared in His revelation, of the One who loves and who as such (living in His own way) is the person.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1 The Doctrine of God [Edinburgh: T&T Clark, 1957], 284.

When Scripture ascribes certain works specifically to the Father, others specifically to the Son, and still others specifically to the Holy Spirit, we are compelled to presuppose a genuine distinction within the Godhead back of that ascription. On the other hand, the work ascribed to any of the persons is the work of one absolute person. (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adelphia, P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61], 228)

The following is a simplified account of the idea of “person” which may be helpful, although the reader must appreciate that simplifications are potentially dangerous. The word “person” has changed its meaning since the third century when it began to be used in connection with the “threefoldness of God.” When we talk about God as a person, we naturally think of God as being one person. But theologians such as Tertullian, writing in the third century, used the word “person” with a different meaning. The word “person” originally derives from the Latin word persona, meaning an actor’s face mask—and, by extension, the role which he takes in a play.

By stating that there were three persons but only one God, Tertullian was asserting that all three major roles in the great drama of human redemption are played by the one and the same God. The three great roles in this drama are all played by the same actor: God. Each of these roles may reveal God in a somewhat different way, but it is the same God in every case. So when we talk about God as one person, we mean one person in the modern sense of the word, and when we talk about God as three persons, we mean three persons in the ancient sense of the word. It is God, and God alone, who masterminded and executes the great plan of salvation, culminating in Jesus Christ. It is he who is present and active at every stage of its long history. Confusing these two senses of the word “person” inevitably leads to the idea that God is actually a committee—which, as we saw earlier, is a thoroughly unhelpful and confusing way of thinking about God. (Alister McGrath, Studies in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7], 209)

If God is a living, conscious being who knows, wills, and acts—if, in a word, God is a person—then God is not a property or state of affairs or set or proposition or any other abstract object. (Alvin Plantinga, The Analytic Theist, James F. Sennett, ed.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1998], 239)

But there is a great deal of direct evidence for saying that God is a person. Have you noticed how the presence of God is always described in a personal way? Take the name of God that we have considered: ‘I am’, that is a personal statement, it is a person who can say, ‘I am,’ and God says that He speaks of Himself in this manner. Every single representative of God has declared that God is a person and not simply an unconscious force. (Martin Lloyd-Jones, Great Doctrines of the Bible [Wheaton: Crossway Books, 2003], 55-56)

Not only is God a spirit, but He also is a person—that is, He has personality, just as we do . Every trait we attribute to ourselves can be attributed to God. A person feels, thinks, desires, and decides—and so does God. A person enters into relationships—and so does God. A person acts—and so does God. God feels; God thinks: God sympathizes; God forgives; God hopes; God decides; God acts; God judges—all because He is a person. If He weren’t why pray to Him or worship Him? God is not an impersonal force or power; He is a person—the most perfect person imaginable. (Billy Graham, The Journey: How to Live by Faith in an Uncertain World [Nashville, TN: W. Publishing Group, 2006], 20)


(쉐퍼(Chafer)와 플랜틴가(Plantinga)를 포함해서 단수의 의미로 한 인격이신 하나님을 말해 온 신학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그분은 인격성(personality)에 속한 기능들(faculties)과 구성 요소들을 지니신 한 인격이시다(루이스 쉐퍼).


한 인격—즉 알고, 자원하고, 행동하는 나—의 정의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선포된 그분의 인격이 고백될 때의 그 의미, 곧 사랑하시는 분이시자(그분 자신의 방식으로 살고 계신) 그런 분으로서 그 인격(the person)이시라고 할 때 부여되는 그 의미만을 지닐 수 있다(칼 바르트).


성경에서 어떤 일들은 특별히 아버지에게, 다른 일들은 특별히 아들에게 또 다른 일들은 특별히 성령에게 돌려질 때, 우리는 그런 묘사들 이면에는 신격 안에 참된 구별이 있음을 전제한다고 보게 된다. 또 다른 면에서 위격들 중 어느 하나에게 돌려진 일은 전적으로 그 위격의 일이다.(고넬리우스 반 틸)


독자들이 단순화 작업에는 잠재적인 위험이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 ”인격”이라는 말은 3세기에 “하나님의 삼중성”(threefoldness of God)”과 관련하여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변해왔다. 우리가 하나님을 한 인격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한 인격이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3세기의 터툴리안 같은 신학자들은 다른 의미로 “인격”이라는 말을 썼다. “인격”이라는 말은 원래 배우들의 얼굴 가면 그리고 더 연장하자면 그들이 연극에서 가진 역할이라는 의미가 있는 라틴어 페르소나에서 파생되었다.


터툴리안은 세 위격들이신데 오직 한 하나님이 계셨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구속이라는 위대한 드라마 속에서 모든 세 가지 주요한 역할은 하나의 같은 하나님에 의해 연출되었다고 주장했었다. 이 드라마에 있는 세 가지 위대한 역할은 모두 같은 배우 하나님에 의해 연출되었다. 이 역할 중 하나는 다소 다른 방식 안에 계신 하나님을 계시하지만, 그것은 매 경우에 같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한 인격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단어의 현대적인 의미로 한 인격을 의미하며, 또한 세 위격들이신 하나님을 말할 때 우리는 그 단어의 고대 의미로 세 인격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룬 위대한 구원 계획을 지시하시고(masterminded) 수행하신 분은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이시다. 그 긴 역사의 각 단계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신 분도 바로 그분이시다. “인격”이라는 단어의 이 두 가지 의미를 혼동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실상 하나의 위원회(committee)이시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혼동을 주는 개념으로 몰아간다(알리스타 맥그렛).


만일 하나님이, 아시고 바라시고 행동하시는, 살아 있고 의식 있는 존재시라면, 즉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라면, 그 경우 하나님은 어떤 특성이나 상태나 성향이나 명제나 다른 어떤 추상적인 사물이 아니시다(알빈 플랜틴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꽤 많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늘 인격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었는지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자.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 이것은 인격적인 한 개인이 하는 진술로서, ‘나는 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대변자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은 단지 무의식적인 힘이 아니시라 한 인격이시라고 선포해 왔다(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은 영이실 뿐 아니라 또한 한 인격이시다. 즉 그분은 우리가 그러한 것과 똑같이, 인격성(personality)을 지니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각 특성을 하나님께도 돌릴 수 있다. 사람(A person)은 느끼고, 생각하고, 갈망하고, 결정한다. 하나님 역시 그러신다. 사람은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님 역시 그러신다. 사람은 행동한다. 하나님 역시 그러신다. 하나님은 느끼신다. 하나님은 생각하신다. 하나님은 동정하신다.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소망하신다. 하나님은 결정하신다.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판단하신다. 이것은 모두 그분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 아니셨다면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을 경배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힘이나 능력이 아니시다. 그분은 한 인격, 곧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완전한 인격이시다(빌리 그레함).)


[36] Elliot Miller, “Cultic, Aberrant, or (Unconventionally) Orthodox? A Reassessment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Christian Research Journal 32:6 (2009): 21-22.


[37] Critics who have charged Witness Lee with teaching modalism based on his use of the term “one person,” despite responses to that charge, include Norman Geisler (with Ron Rhodes) and Cal Beisner. (그러한 정죄에 대해 답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가 “한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근거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양태론이라고 비난해 온 사람들은 노먼 가이슬러와 칼 베이즈나가 있다.)


[38] Witness Lee, The Issue of Christ Being Glorified by the Father with the Divine Glory (LSM, 1996), 24-25.


[39] Ibid., 24.


[40] Lewis Ayres, Nicaea and its Legacy: An Approach to Fourth-Century Trinitarian Theolog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295-296. In his introduction Ayres writes, “By ‘pro-Nicene’ I mean those theologies, appearing from the 360s to the 380s, consisting of a set of arguments about the nature of the Trinity and about the enterprise of Trinitarian theology, and forming the basis of Nicene Christian belief in the 380s” (6). He refers to late-fourth century “pro-Nicene” theologians, such as Augustine and Gregory of Nyssa, as “pro-Nicenes.”


[41] Ibid., 296.


[42] Anne Hunt, “Trinity, Christology, and pneumatology,”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Trinity, ed. Peter C. Ph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370. Refuting modalism, Alister McGrath makes a similar point:


A helpful distinction may be introduced at this point to avoid a misunderstanding (technically, “Sabellianism”). We need to draw a distinction between God as he actually is, and the way in which God acts and reveals himself in history. In scripture, we find particular attention being directed to the way in which God acts in history—for example, in creation, redemption, and the giving of the Holy Spirit at Pentecost. Now, this might give the casual reader the impression that God is Father at this point in time (for example, at creation), and is Son at that point in time (for example, on the cross of Calvary). In other words, to put it very crudely, the impression might be given that God is Father until the birth of Jesus, that he is Son until Pentecost, and that thereafter he is the Holy Spirit. In fact,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ffirms that all of God’s actions reflect the fact that God is eternally what his revelation in history demonstrates him to be—Father, Son, and Holy Spirit. It may be that certain actions emphasize that God is Father, just as others may emphasize that he is Son—but God acts as a Trinity throughout all his works. Thus even at creation itself we find reference to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Gen. 1:1-3). (Alister McGrath, Studies in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7], 213)


(오해(엄밀히 말해서 “사벨리우스주의”)를 피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구별이 이 시점에서 소개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이 사실상 존재하심으로서의 하나님과 행동하시고 역사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 안에서의 하나님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역사(history) 예를 들면, 창조와 구속과 오순절에 성령을 주시는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방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  이제 이것은 부주의한 독자들에게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이 시점(예를 들어 창조)에서는 아버지이시고, 갈보리 십자가에서는 아들이시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아주 냉정하게 지적한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출생 전에는 아버지이시고, 오순절 전까지는 아들이시며, 그 뒤로는 그분이 성령이시다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사실, 삼일성의 교리는 모든 하나님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되시도록 역사 속에서 그분의 계시는 그분을 논증하심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다른 어떤 행동은 그분이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것과 똑같이 어떤 행동들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일하심에서 한 삼일성(a Trinity)으로 행동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심지어 창조 자체에서도 아버지와 그 말씀과 성령에 관해 말하는 것을 발견한다.)


[43] Ibid., 372.


[44] Witness Lee, Living in and with the Divine Trinity (LSM, 1990), 12-13. Brackets are in the original.


[45] Concerning the mutual operation of the Three in the living and work of Christ, Thomas F. Torrance is particularly helpful:


It was, of course, not the Godhead or the Being of God as such who became incarnate, but the Son of God, not the Father or the Spirit, who came among us, certainly from the Being of the Father and as completely homoousios with him, yet because in him the fullness of the Godhead dwells, the whole undivided Trinity must be recognized as participating in the incarnate Life and Work of Christ. (Thomas F. Torrance,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One Being Three Persons [London: T&T Clark, 1996], 108)

Since God’s Being and Activity completely interpenetrate each other, we must think of his Being and his Activity not separately but as one Being-in-Activity and one Activity-in-Being. In other words,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lways act together in every divine operation whether in creation or redemption, yet in such a way that the distinctive activities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re always maintained, in accordance with the propriety and otherness of their Persons as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his may be called the ‘perichoretic coactivity of the Holy Trinity’…

The primary distinction was made there, of course, for it was the Son or Word of God who became incarnate, was born of the Virgin Mary,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and rose again from the grave, and not the Father or the Holy Spirit, although the whole life and activity of Jesus from his birth to his death and resurrection did not take place apart from the presence and coactivity of the Father and the Spirit. (Ibid., 197-198)

Millard J. Erickson sounds a similar note:


Perichoresis means that not only do the three members of the Trinity interpenetrate one another, but all three are involved in all the works of God. While certain works are primarily or more centrally the doing of one of these rather than the others, all participate to some degree in what is done. Thus, while redemption is obviously the work of the incarnate Son, the Father and the Spirit are also involved. (Millard J. Erickson, God in Three Persons: A Contemporary Interpretation of the Trinity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235)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이 완전히 각자 안에 상호 침투되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존재와 활동을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활동 안의 존재’(Being-in-Activity) 그리고 ‘존재 안의 활동’(Activity-in-Being)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창조이든 혹은 구속이든 매번의 신성한 운행 하심(operation)에서 늘 함께 행동하시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행동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그분들 인격의 적정성(propriety)과 타자성(otherness)에 맞게 항상 보존되신다. 이것은 ‘성령의 페리코레시스적 공동 행위’라고 불리울 수 있다….


물론 기본적인 구별되심이 거기 있는데, 그 이유는 비록 그분의 출생부터 죽음과 부활까지 예수님의 전 생애와 활동은 아버지와 그 영의 임재와 동시에 활동하심을 떠나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육체 되시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신 분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시고 아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밀리아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일성(Trinity)의 세 구성원이 서로 안에 침투되실 뿐만 아니라 셋 모두 하나님의 모든 일 하심에 관여하심을 의미한다. 어떤 특정한 일이 주로 혹은 더 중심적으로 다른 분들이 아닌 이들 중 어느 한 분의 행동이더라도, 그것을 성취하는 데는 모두가 어느 정도 참여하신다. 따라서 구속은 분명히 육신을 입으신 아들의 일하심이지만, 아버지와 그 영 역시 관여하신다.)


[46] Witness Lee, Christ Revealed in the New Testament (LSM: 1989), 16.


[47] Augustine is helpful here:


The Son indeed and not the Father was born of the Virgin Mary; but this very birth of the Son, not of the Father, was the work both of the Father and the Son. The Father indeed suffered not, but the Son, yet the suffering of the Son was the work of the Father and the Son. The Father did not rise again, but the Son, ye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was the work of the Father and the Son. (Augustin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I, vol. 6, “Sermon II: Of the words of St. Matthew’s Gospel, Chap. iii. 13, ‘Then Jesus cometh from Galilee to the Jordan unto John, to be baptized of him.’ Concerning the Trinity,” Philip Schaff, ed. [1887; repr., Grand Rapids: Eerdmans, 1979], 261)

Thomas F. Torrance writes further:


Thus the atonement is to be regarded as the act of God in his being and his being in his act. That is not to say, of course, that it was the Father who was crucified, for it was the Son in his distinction from the Father who died on the cross, but it is to say that the suffering of Christ on the cross was not just human, it was divine as well as human, and in fact is to be regarded as the suffering of God himself, that is, as the being of God in his redeeming act, and the passion of God in his very being as God…While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re personally distinct from one another, they are nevertheless of one and the same being with one another in God, and their acts interpenetrate one another in the indivisibility of the one Godhead. (Thomas F. Torrance, The Mediation of Christ [Colorado Springs, CO: Helmers & Howard, 1992], 113)

It was not of course the Father but the Son who was incarnate and suffered on the cross, but the distinctiveness of the Persons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does not imply any division in the oneness of their being, or in the oneness of their activity, for God’s being and act are inseparable. (Ibid., 118)


(처녀 마리아에서 나신 분은 참으로 아들이시고 아버지가 아니시며,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의 이러한 출생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의 일하심이었다. 아버지가 아니라 참으로 아들이 고난을 겪으셨지만, 아들이 고난을 겪으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하심이었다. 아버지가 아닌 아들이 부활하셨지만, 그 아들의 부활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하심이었다(어거스틴).


토마스 토렌스(Thomas F. Torrance)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속죄는 그분의 존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동과 그분의 행동 안에 있는 그분의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아버지이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아버지와는 구별되신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이자 신성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 자신의 고난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그분의 구속하시는 행동 안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신 그분의 바로 그 존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수난(passion)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 인격으로는 구별되시지만, 하나님 안에서 서로에게 하나이자 같은 존재이시며, 그분들의 행동은 한 신격의 나뉘어질 수 없는 속성 안에서 서로에게 상호 침투되신다.


육체 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분은 당연히 아버지가 아닌 아들이시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이 구별 되심은 그분들의 존재의 하나 혹은 그분들의 활동의 하나에 있어서 어떤 식의 분열도 암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은 분리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48] Kerry S. Robichaux, “The Divine Trinity in the Divine Economy,” Affirmation & Critique: A Journal of Christian Thought IV:2 (April 1999): 40-41.


[49] Ibid.


[50] Witness Lee, Life-Study of John (LSM, 1985), 174.


[51] Witness Lee, The Fulfillment of the Tabernacle and the Offerings in the Writings of John (LSM, 1991), 182.


[52] Witness Lee, Perfecting Training (LSM, 1983), 492.


[53] For Witness Lee’s teaching on regeneration and the organic salvation that regeneration initiates, (거듭남과 거듭남으로 시작하는 유기적인 구원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여기를 보라.) see “‘In Life and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Witness Lee’s Contribution to a Biblical Understanding of Theosis,” pp. 10-14, published by Defense & Confirmation Project and presented at the 2015 Annual Meeting of the Evangelical Philosophical Society in Atlanta, GA.


[54] Witness Lee, Crystallization-Study of the Humanity of Christ (LSM, 1997), 46.


[55] Second Corinthians 13:14, note 1, Recovery Version of the Bible (LSM,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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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교회 삼위일체 논문(전문)―미국 복음주의신학자협의회(ETS) 연례모임에서 발표
    편집자 주: 이 논문은 아랫 글(https://www.localchurch.kr/29290)에서 소개해 드린 "지방교회 관련 ETS/EPS 논문들" 중 두번째 것으로 한글 번역은 영어 원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최소한...
  • 지방교회 관련 ETS/EPS 논문들 소개
    An Open Letter ― ETS/EPS Papers(공개 서신―ETS/EPS 논문들) An Open Letter 사이트에 올려진 지방교회 관련 ETS/EPS 논문들을 소개해 드립니다(영어 원문 및 한글 번역). An Open Letter 사이...
  • 회복역 성경을 통한 조명 -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회복역 성경을 통한 조명 -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거듭난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어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신 어린양 구속주이시다(요1:29). ...
  • 회복역 성경을 통한 조명 -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 영”
    회복역 성경을 통한 조명 -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 영” 믿는 이들이 믿을 때 영접한 분은 삼위 하나님 중 어느 위격이신가? 이런 질문은 구원론에 해당하며, 구원에 관한 지극히 ...
  • '신화'의 의미와 관련 성경구절들
    '신화'의 의미와 관련 성경구절들 이 신화(神化) 진리는 구원론입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우리에 대한 구원이 무엇을 최종적으로 지향하는가에 대한 논의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정통교부들이 ...
  •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장로교신학자 논문소개
    주(註): 아래 자료는 박형용 박사가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에 발표한 것입니다. 1) 원문에는 한문과 헬라어, 히브리어가 혼용되어 있으나 편의상 한국어로 바꾸어 표...
  • 무엇이 대표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인가?
    무엇이 대표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인가? C 님이 '개혁주의 신학'과 지방교회 신학을 비교하는 작업을 시작하심으로, 그렇다면 지방교회 신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개혁신학의 실상은 ...
  • 구원의 서정...과연 성경적인가?
    조직 신학에서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각 단계들을 설명하는 것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불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을 설명할 때 중생(거듭남)이 믿...
  • 성령론(2) - 니케아 공회의 이후 연구과정
    성령론(2) - 니케아 공회의 이후 연구과정 성령론은 삼위 중에서도 사람과 접촉점을 갖는 위격이라는 점에서 체험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성경적인 진리 위에 설 때만 성경적입니다. 교...
  • 성령론(1) - 혼란의 원인과 그 현상
    성령론(1) - 혼란의 원인과 그 현상 일반 성도들은 소위 신학적 주제에 익숙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과 달리 신학을 공부하신 분은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물...
  • 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 신학과 신화(Deification)
    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 신학과 신화(Deification) 한국교계 내에서 이런 '신화교리'(deification)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물론 심지어 목회자들에게도 매우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4) - 계시와 조명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4) - 계시와 조명 ‘계시(revelation)는 사도직의 종결과 함께 완성되었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입장입니다.[1] 여기에는 ‘계시’는 성경을 구성하는 어떤 것인데, 성경 66권...
  •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3) - 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3) - 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라...
  • 삼위 양식론, 삼신론, 그리고 삼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순수한 계시
    삼위 양식론, 삼신론, 그리고 삼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순수한 계시 신약은 우리 하나님이 삼일(triune)이심을 계시한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삼일성에 관해 세 가지 주요 학설―삼위 양식론(...
  • 지방교회측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
    지방교회측의 신화(Deification)에 대한 가르침 ― 지방교회측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 요약 ― 지방교회측이 펴내고 있는 신학 잡지인 '확증과 비평'(Affirmation & Critique) 2002년 10월호는...
  •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1.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