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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 이단, 미혹하는 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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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jerusalem.org/ 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 글을 쓴 분은 최삼경 목사님과 같은 신학교 같은 교단 소속입니다. 그러면서도 글의 내용은 정 반대입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정반대 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 이단, 미혹하는 자...란?

 

지금 기독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이단 판단 정죄의 기준은 성서가 아닌 교리에 입각해서만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리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교리가 형성되지 않았던 사도 시대의 사도 바울까지도 교리라는 도마위에 올려 놓고 그리스도인이니냐, 아니냐, 하는 어이 없는 논쟁을 하고 있을 정도로 모든 판단 기준이 교리에 입각해서만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잘못된 기현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세때는 물론이었거니와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항상 그래왔듯이 교리는 교권확립과 입지확보의 수단으로 악용되어지고 있으며 이렇게 교리에 입각한 신앙의 풍토와 환경이 지속되는 한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1. 성서적 신앙과 교리적 신앙의 차이점

 

기독교 신앙은 크게 교리적 신앙과 성서적 신앙의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다. 교리는 이성의 이해력을 통하여 논리라는 연장 하나만을 사용하여 믿음에 도달시키려는 반면, 성령은 철학 등이 사용하는 논리보다는 성령의 능력(큐피터의 화살)으로써 믿음에 도달시키려 한다. 성령의 능력이란 성령의 역사를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교리처럼 획일화된 방법이 아닌 환경과 처지에 맞게 그때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서 역사 하시는 다양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성서적 신앙의 특징은 인간 내면의 인격적이고 인간 삶의 실질적이며 윤리적 교훈의 범주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교리적 신앙의 특징은 본질에 대한 객관적 규정과 학술적 방법에 역점을 두고 있기에 신앙이 형식적으로 흐를 수 있다.

 

학자들이 그렇듯이 자기의 사상에 대하여서는 절대적인 반면 남의 것에 대하여서는 수용하지 않으려는 배타성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신앙에 반영이 되어 신학의 논쟁으로 발달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발달된 수많은 논쟁중의 하나가 흑백 논리인 이단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현실은 내가 지금 남에게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이단이라고 더 큰 소리로 판단, 정죄해야만 자신의 지위를 지탱해 나가는 실정이다. 기독교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최후의 해결책은 이단으로 몰아 버리면 모든 문제들을 쉽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모든 문제 해결을 사랑으로 해결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의 신앙의 수준이 높다, 낮다, 신앙심이 있다, 없다...등의 모든 기준은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고, 기도와 구제를 많이 하고...등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사랑'의 기준에 두어야 하는 것인데 현대 교회는 성서의 기준인 '사랑'이 아니라 교리에 기준을 두고 신앙의 모든 판단과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 이단, 미혹하는자, 거짓선생, 거짓 선지자....등은 성경상 같은 의미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하며, 신약에서는 적그리스도와 미혹하는자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두 군데(요일4:2-3, 요이1:7)에서 언급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2-3)

 

"미혹하게 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1:7)

 

이 두구절의 말씀을 토대로 적그리스도와 미혹하는자의 실체에 대하여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것을 문자적인 해석을 한다면 '육체로 오신 것'과 '육체로 임하심'에 대한 해석은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을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적그리스도냐의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독교인으로써 성육신과 재림을 부인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문자적 해석으로만 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이단이란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판단하지 말 것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성경에 없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 정죄, 판단하는 이단정죄는 이미 성경의 말씀 밖으로 한참 이탈한 것이다.

 

성경적인 해석으로 한다면 위 구절(요일4:2-3, 요이1:7)로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적그리스도가 되느냐 하는 이단론의 본질적인 문제를 규정하고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성령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하자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5-17)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령의 관여와 개입이 되었을 때만이 주라고 시인할 수 있는 믿음과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찐빵을 만들려면 속에 내용물인 앙꼬가 들어갔을 때만이 찐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앙꼬가 없는 것을 찐빵이라고 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도 성령이 없이 신앙을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이며 성령이 심령에 내주하여 성령에 의한 성령의 교훈과 가르침 인도함을 받는 사람만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있으면 그리스도인이며, 반대로 성령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자이며 곧 미혹하는자, 적그리스도가 되는 간단한 논리인 것이다.

 

지금의 신학의 문자적 해석으로써는 이단론이란 없다고 해도 된다. 설령 있다해도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으로써 교회는 관용과 사랑을 끝까지 행하며 사랑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단 사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임을 성서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이라고 판단 정죄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고자 간청했을 때 주인은 알곡이 다칠 것을 염려해서 가만 두라고 하며 알곡과 가라지는 추수 때 추숫꾼들이 와서 알곡은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불에 태움을 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마13:24-30) 또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이면서도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에 대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8:11)라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본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단론자들은 무슨 근거와 권리로 성경에도 없는 것을 정죄 판단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보여준 본을 왜 지키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기독교의 신앙관에서는 자유롭고, 넓고, 포괄적인 신앙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무슨 근거와 권리로 좁고 협소한 공간에다 깃대를 꼽아놓고 이곳만이 정통이니 이곳으로 모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판단 정죄하는 것인가.

 

지금까지의 이단론의 기준은 교리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진행이 되었던 것이며 한국 교회는 주인의 명령을 거역하는 이단론자들의 성급한 이단색출로 말미암아 기독교 전체가 말살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자신이 속한 교단과 자기 교회만 제외하고는 서로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도 자성의 소리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대로 라면 이단이 아닌 교회가 어디 있는가. 한국 기독교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든 이단론자들의 정체는 과연 누구인가?

 

그동안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겠다는 명분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가 자신의 교권 확립과 입지 확보를 위한 어그러진 충성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불타는 사명감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자신의 영달과 더러운 입에 하루 세 번 풀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명감이라고 허울좋은 명분을 빙자하지 말고 속히 성서로 모두 돌아가야 한다. 그동안 형제를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던 불타는 사명감은 이제 끄고 오직 사랑으로만 분출해야 한다.

 

가말리엘 교법사의 말대로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5:38-39)라고 말한 것과 같이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박태선, 문선명의 몰락을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 진리는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며, 진리만이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는 비 진리가 아무리 번성한다해도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속히 쇠잔해 지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는 이단 문제에 대해서 가만히 하나님께 맡기고 어떻게 역사 하실 것인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성급한 판단을 삼가야 하며 오직 사랑을 바탕으로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가는 것이 기독교적인 참 신앙인 것이다.

 

사람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 즉 나 스스로의 주권이란 없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있는 피조물인 것이다. 성경에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자의 종"(벧후2:19)이 된다고 한 것과 같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영의 지배인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영에서 빠져나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지배하에 있으라는 것이며(요3:5)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롬8:9)

 

2. 성령의 외적인 표적과 내적인 증거

 

성령을 받은 자들은 내적, 외적인 확실한 증거와 표적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표적들을 통하여 성령의 유무를 알 수 있으며 이것으로 그리스도인과 적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외적인 표적

 

외적인 표적에 대하여서는 마가복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이와 같이 성경은 분명히 믿는자들에게는

 

①귀신을 쫓아내며

②새 방언을 말하며

③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④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러한 표적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를 규정짓는 정확하고 확실한 선언이며 이 표적들은 어느 특정인들만이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군인이라면 병과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총검술은 누구나 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기본으로 따라오는 표적들인 것이다. 마치 실과 바늘같이 믿음과 능력들은 서로가 불가분 관계이기 때문에 특히 귀신을 쫓는 능력과 신유의 능력은 믿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들을 치료하고 계신 현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에 대하여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는 것이라고 비방할 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리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어떻게 사단의 나라가 서겠느냐 하시며 사단이 사단을 쫓지 않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믿는 자가 귀신을 쫓는 능력이 있으면 그것은 성령으로 하는 것이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마12:22-28)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이와 같이 귀신쫓는 능력이란 성령 없이는 안되는 것이기에 이러한 표적을 행한다는 것은 성령이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증표와 같다. 만약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령이 없다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인이라고 단정해도 되는 성서적인 정확한 판단법인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표적도 없는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한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언어도단이다.

 

내적인 증거

 

내적인 증거와 표적으로는 사랑의 증거를 들 수 있다. 성령이 충만히 내주한 심령 위에는 항상 생활 속에서 행위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마치 고급향수를 뿌렸다고 자랑하면서 고약하고 역겨운 냄새만 난다면 이것은 가짜 향수를 뿌렸다는 간단한 논리와 같이 성령이 있다고 하면서 성령의 열매가 내면으로부터 형성되어 생활 속에 표출되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성령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 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내적, 외적인 증거와 표적이 나와야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증거와 표적들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으며 도리어 이러한 능력과 표적을 행하는 교회를 이단이라고 지목하고 매도시켜버리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 역사, 계시적 신앙이라고 하면 어딘가 진부한 신앙 아니면 이단이라고 서슴없이 정죄하며 매도하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다.

 

신학은 이단론의 판단을 교리에 의해 구분을 짓는다. 그러나 성서는 성령(영)으로만이 구분 질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원수 갚는 것은 나에게 있다(히10:30) 라고 선언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만이 판단자요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대 기독교가 자행하는 이단론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완전히 무시하고 배제시킨 채 철저한 인간의 지혜, 지식과 힘으로 방어하고 해결하겠다는 인본주의적 신앙관인 것이다.

 

이단이란 성령으로 하지 않는 모든 사상 곧 인본사상을 이단이라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서도 가르치고, 인도하는 그들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우매자요, 소경이며 거짓 선생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런 자가 설교를 하면 미혹시키는 자요, 이단 사상을 설교하는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생인 것이다.

 

불교의 자비(慈悲), 유교의 인(仁), 기독교의 사랑(愛)...등 명칭은 각각 달라도 모든 종교의 추구하는 바는 사랑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방종교와 다른 점은 불교는 자비로, 유교는 인으로 끝나지만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병기를 가지고 하늘나라를 침노해 들어가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모든 이방종교가 추구하는 사랑 곧 자비와 인은 인간들의 소망 사항이며 이상론일 뿐이지 실현 불가능한 것을 기독교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취해버리는 것이기에 성령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종교를 뛰어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며 구원은 오직 기독교에 있다고 주장하는 대 종교로써의 기독교가 정작 교파에 의한 집안 싸움에만 골몰해 있으며 자신들이 소속된 교파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작태를 출현하고 있다.

 

사도 시대 때 고린도 교회에서는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런 것 필요 없이 직통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각각 나뉘어 주장했을 때(고전1:12) 바울은 이를 책망을 하며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하며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했다.(고전1:31)

 

고린도 교회가 그랬듯이 지금 현대 교회도 나는 칼빈파요, 나는 루터파요, 또 내가 정통이요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선생은 하나이며(마23:8) 지도자도 그리스도(성령) 한 분(마23:10)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직 성령의 인도만이 신앙의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참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도 영으로 드리고(요4:24) 기도도 영으로 해야하며(고전13:1) 믿음도 성령이 오셔야 되며(고전12:9, 갈5:5) 구제, 봉사도 영으로 해야하며(빌3:3) 성경도 성령에 의하여 보며(벧후1:21)...등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지혜와 지식 등의 교훈을 하나님(성령)께 직접 받고(고전2:13) 무엇하나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을 한다 하면서도 성령에 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동안 올바른 신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곧 그리스도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집안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집 일만 몰두 했다는 꼴이다.

 

3. 교리는 철저한 인간의 계명이며 양의 탈을 쓴 이리

 

아군이 게릴라들과 깊은 산속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투는 몇 년이라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식량과 전투물자가 없어서 항복해야만 하는 것인데 몇 년이 지났는데도 게릴라들의 전투가 가능한 것은 누군가 전투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충분한 물자 수송을 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바울의 사상의 핵심인 오직 성령만으로 신앙하라고 했는데 그 동안 성령없이도 기독교 신앙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게릴라들에게 누군가가 물자를 대 주었듯이 누가 성령없이도 기독교 신앙이 가능하게 했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리라는 것이다.

 

교리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하여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신들의 교리도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함부로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는지, 아니면 성령으로 났는지(요8:44)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자가 진단법'을 가르쳐 주셨다. 즉 육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성령에 속해 있는지 스스로의 자가 진단으로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7:17-18)

 

이와 같이 교훈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어야지 인간 스스로의 지혜는 불의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혜사 곧 성령에 의한 인도가 아닌 교리 또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등에 의한 모든 것은 모두 가짜인 것이다.

 

지금의 현대 교회의 신앙은 성서 위주가 아니라 어거스틴, 토마스아퀴나스, 쯔빙글리, 바젤, 칼빈, 칼바르트......등의 교리의 틀에 의하여 성경을 짜 맞추어 공과 공부를 하고 있기에 성경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교리를 만들었다면 (현대 교회의 열매로 보아서는 성령에 의한 역사였는지 아니었는지는 검증된 바가 없다) 그들의 교리는 그들만의 신앙의 견해와 사상일뿐이지 성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는 절대적인 계명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계명인 교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 자리에 앉아 있다. 교리로써 이단정죄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은 곧 교리가 법(인간의 계명)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계명이 성서보다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 위에 인간이 앉아 있다는 것이 아닌가.

 

교리란 신학자들의 신앙적 견해이며 사상일 뿐이고 하나의 이상론에 불과한 것이다. 기독교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 동안 교리는 기독교 믿음의 실천신앙에서 실패했으며, 하나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론이었다는 것이 검증된 현 시점에 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지금의 기독교를 교리로써는 더 이상 유지하고 지탱할 수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또 교리에 의거한 교파들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은 "그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마7:16)라고 하신 것과 같이 성령에 의한 신앙이었다면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지 옥수수나 감자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리에 의한 개신교는 사랑이 아닌 질시, 반목, 이단이라는 정죄와 판단...등과 육체의 열매들로만 주렁주렁 열려 추접스럽고 더럽게 얼룩져 있으며 도저히 기독교라고 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각 교파의 교리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의 이상론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교리로써는 도저히 신앙을 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기독교의 생명은 성령이며 싫던 좋던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내야 하는 성령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령없이 신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모든 것이 양의 탈을 쓴 것이다.

 

교리는 사람이 만든 사람의 계명으로써 성령이 없어도 신앙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보조제로써 보기는 아름답고 간편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으나 그 안에는 독이 들어 있는 가짜이기 때문에 양의 탈을 쓴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쫓을 뿐이지 그리스도를 쫓는 것이 아닌데도 현대 교회는 교리가 성경보다 더 우선시되고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헛된 속임수에서 그동안 그리스도의 신앙이 노략질 당하여 왔다.

 

신앙은 이렇게 "진 자는 이긴 자의 종"(벧후2:19)이 되는 사느냐, 죽느냐의 영의 치열한 전투속에서 이긴 자만이 살아남는 실제적인 상황에서 세상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라는 멸망의 그물을 치고 우는 사자처럼 믿는 자들을 삼키려 하고 있다. (벧전5:8)

 

우리 신앙인들은 여기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눈알이 뽑히고, 손발이 잘려 포로로 끌려가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이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포로가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신학은 그동안 진정으로 신앙 생활을 하려는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이라고 매도하면서 통째로 잡아다 세상에 넘겨 버린 뚜쟁이 역할만 세상에 충실히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기독교 신학의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간판만 교회이지 머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하며(골1:18), 오직 성령이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4. 성서(사랑과 성령)로 돌아가라

 

기독교는 지금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지 학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학자는 쓰레기처럼 널려 있다. 이들이 마치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 흉내를 잘 낸다 해도 원숭이는 원숭이 일뿐이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인 것이다.(요3:6)

 

진정한 기독교의 정통이란 사도시대에 사도들의 행적인 사도행전에 맞추어야 하며 사랑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 속에서 신앙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기독교는 유치하고 맹목적인 교리라는 틀에서 벗어나 기독교의 행동 강령인 오직 사랑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볼 때만이 기독교의 본질에 도달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교훈)은 오직 사랑이며 사랑을 통하여 신앙의 궁극인 성령에 도달시키고자 하신 것이다. 성경 66권의 내용은 마5장 전체에 그리스도 신앙의 행동지침으로 요약되어 있으며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 되는 것이기에 마5장의 지침에서 벗어난 것은 말씀을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 교훈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마5장 전체를 지킨다는 것은 율법인 인간의 인격과 노력의 한계를 넘어 신의 성품인(벧후1:4) 성령에 의한 신의 경지(요10:35)로 들어가지 않으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행동과 믿음의 요구들인 것이기에 인간의 이성에 의한 교리로써는 마5장 전체를 지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말씀 하셨는데 '세상을 이겼다'라는 것은 기독교의 궁극인 사랑으로 승리했다는 것이며 반대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반목, 질시, 판단...등으로 세상의 지배를 당하고 끌려 다닌 다는 것이다.

 

'세상'을 '태산같은 바위덩어리'라고 한다면 '교리'는 '계란'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아무리 계란을 던져도 바위를 깨뜨릴 수 없는 것과 같이 교리에 의한 신앙으로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에 도달할 수 없으며 신앙이 겉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율법에 철두철미했던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대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 하셨던 것과 같이 교리에 의한 신앙으로는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종교로 전락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바위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만이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 교리에 의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물 한방울 없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장미 한 송이를 피우겠다는 환상에 젖어 있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거의 2,000년간 이러한 환상에 젖어 신앙을 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에 의한 신앙만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신들메조차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는 '나의 율법에 의한 신앙의 수준으로는 영적인 당신의 신앙의 수준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나이다' 라는 해석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도와 주심으로 부르짖고, 찾고, 구하는 자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마5장을 행하게 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능력을 나타내고 싶어하시며 믿는 자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행함으로써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데, 도리어 현대 기독교는 이방종교만큼도 못한 윤리, 도덕성을 갖고 있으며 마5장 앞에서는 속수 무책이며 마냥 무력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 없이도 인간의 힘으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잘못소개 받고 거짓에 미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는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씀을 벗어난 것으로 성서의 위배인 것이며 또한 적그리스도적인 행위인 것이다. 사랑을 파괴시키고 깨뜨려 가면서까지 이단론을 운운하고 주장하고 변론하는 자체가 성령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떠한 교리나 교파, 규범...등도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요일2:8) '사랑'보다 절대로 우선될 수 없으며 사랑을 바탕으로 한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고 지키는 것만이 참된 기독교의 신앙인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행적은 바로 성령의 행적이며 성령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곧 오직 성령의 능력과 인도 속에서만 사명을 감당했던 것으로 사도들이야말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의 표본들이라 할 수 있는 반면 예수그리스도에게 책망의 대상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이 시대에 성령의 역사와는 상관없이 오직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노력으로만 행하려는 형식적이고 교리주의적인 현대교회와 목회자들의 대표적인 표본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교회는 사도행전 그대로를 재현해야 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기독교로써의 부활이 가능한 것이며 성령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바로 '이단' '적그리스도' '미혹하는 영'인 것이다.

 

일부 교리주의자들은 그 동안 증거한 메시지에 대하여 부정하겠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언하는 바이다.

 

그들에게 성령이 겨자씨만큼만 있다 해도 조만간 이 메시지에 대하여 부정했던 입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입에서 스스로 이 메시지 내용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자신을 볼 것이다. 그러면 그때 그 역사가 성령의 강권역사인 것으로 깨닫고 이 메시지에 대하여 판단하지 말것을 바라는 바이다.

 

지금부터 두 번 다시 이단론을 언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화와 저주와 진노가 있으리라. 귀 있는자들은 성령이 하시는 소리를 들을 찌어다.

 

할렐루야 세세토록 영광 홀로 받으소서 - 아 -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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