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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설, 이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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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설, 이분설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입장은 무엇인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토대로 간략하게 요약해 보겠다.

 

(1) 영과 혼을 나눠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

 

이 세상에는 실익이 없는 논쟁도 많다. 특히 성경말씀과 무관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의는 무익할 때가 많다. 혹자는 사람은 전인적임으로 이것을 이분, 삼분으로 나누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이 전인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이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거듭난 사람이 성경 말씀을 지켜 순종하려고 할 때 사람의 영과 혼을 나누어 이해해야 할 불가피한 현실에 직면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16:24). 이어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고도 하셨다. 위에서 <목숨>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문은 <프쉬케>(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혼'(프쉬케)를 보존하거나 또는 부인하는 것은 주님을 계속적으로 따르는 노정에서 핵심 관건이 된다.

 

그런데 만일 <영>과 <혼>이 같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자기(혼)를 부인할 수 있는가?

 

이분설 지지자들은 마16:24-25이 말하는 <부인하는 주체>와 <부인되는 대상(혼)>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혹자는 우리 안에 오신 주님으로 자기 혼을 부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과 혼을 동일실체로 보는 이분설 시각에서는 '주님과 하나된 영혼'이 '주님과 하나된 영혼'을 부인하는 것이 되어 말이 안 된다. 논리구성 자체에 어려움이 있다. 이처럼 성도가 이 주제와 관련된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우발적인 체험은 있으되 지속적인 영적 진보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이분설 지지자들은 머리 속에 <자기부인>에 대한 객관적인 성경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실제로 체험된 자기 부인의 역사는 그리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그 원인을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영과 혼을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믿는 이들의 영적 생명과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 만일 믿는 이가 영의 경계를 모른다면...어떻게 영성이 성장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믿는 이들이 영과 혼을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에...그들의 영적 생명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한다. 그리고...혼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에 속한 생활에 거하고 영에 속한 것을 더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다수가 이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먼저...영과 혼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 다음 영에 속한 것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2000, 30-31쪽). ('영에 속한 사람' 영어전문을 보려면 https://www.ministrybooks.org/books.cfm?id=3A5D 참조 )

 


따라서 성도들은 영적 생명의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영과 혼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은 우리 깊은 속의 <연합된 영>(사람의 영+ 영이신 주님, 고전6:17)으로 우리의 <타락한 혼(생각, 감정, 의지)>을 부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갈2:20, 빌1:21). 물론 이런 이론을 아는 것이 이런 생활을 살도록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른 진리 인식이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에게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2) 영과 혼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근거

 

이분설은 영(spirit, 루아흐, 프뉴마)과 혼(soul, 네페쉬, 프쉬케)이라는 두 말이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됨으로 사실상 그것들은 <한 실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에 불과하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a) 로마서 8장 6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For the mind of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of the Spirit is life and peace"(Jay. P. Green,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Hendrickson, p 915). "Now the mind of the flesh[which is sense and reason without the Holy Spirit] is death-death that comprises all the miseries arising from sin, both here and hereafter. But the mind of the (Holy) Spirit is life and soul-peace[both now and forever](존더반 출판사의 '확대 역 성경'(The Amplified Bible, 1972)).

 

위 확대 역은 우리 영 안에 계신 성령이 주시는 평강이 영으로부터 우리의 혼으로까지 확대되어 '혼의 평강'(soul-peace)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0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1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2 

 


위 말씀은 또한 <생각을 육신에 두면 사망이고, 생각을 영에 두면 생명과 평안>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NASB(토마스 넬슨 출판사, 1978)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1088쪽)). 결국 위 본문은 <육체와 영>, <생명과 사망>을 결정짓는 권한을 <생각>(혼의 주도적인 부분)에 부여하고 있다.

 

만일 2분설 주장처럼 생각이 '영혼의 한 부분'이라면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을 포함한 이분설 주장자들은 위 롬8:6에 근거하여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영과 생각>이 분리될 수 없는 <한 실체의 두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체험 상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영과 생각이 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영, 혼, 몸을 각각의 실체로 보는 3분설로 이것을 설명해 보겠다. 만일 어떤 거듭난 성도가 주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묵직하고 피곤하여 어찌할까를 잠시 고려하다가 주일 집회를 빠지고 늦잠을 더 자기로 생각을 굳히고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생각을 육에 둔 경우). 그 결과 그의 몸은 다소 피로가 풀렸겠지만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주일 집회에 빠진 것에 대해 속은 편치 않을 것이다. 즉 영적 사망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몸은 피곤하지만 깊은 곳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하여, 더 자고 싶은 육신의 욕구를 거절하고 주일 집회를 가기로 생각을 굳히고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보자(생각을 영에 둔 경우). 이 때 그는 몸은 조금 고단하겠지만 주일 집회로부터 얻은 은혜로 인해 깊은 속에 평강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 16:24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은> 경우에 해당된다.

 

위 두 유형 중 우리의 체험과 일치되는 것은 당연히 삼분설에 근거한 설명인 후자이다.

 

만일 2분설 주장처럼, <영>과 <생각(혼)>이 한 실체라면 어떻게 생각이 한 실체인 영을 거스리고 도리어 다른 실체인 <육신>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b) 누가 복음 1장 46-47 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My soul doth magnify the Lord, And my spirit hath rejoiced in God my Saviour).

 

위 말씀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에 대해 반응한 대목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영>이 구주 하나님을 기뻐했고, <혼>은 주를 찬양한다고 했다. 이렇게만 보면, 영과 혼이 구별 없이 교대로 사용된 채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한 단어 한 단어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위 말씀에서 마리아가 <영>으로 구주를 기뻐한 시점은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이다(hath rejoiced). 그런데 마리아의 <혼>으로 주를 찬양한 시점은 <현재시제> 동사를 쓰고 있다(magnify).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리아의 깊은 속에 있는 <영>이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였고 그 영의 기쁨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친 결과로 그녀의 <혼>이 주를 찬양하게 된 것이다. 두 동사 시제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영과 혼이 각각 다르며 두 존재의 반응시점도 각기 다른 것을 증명한다. 영과 혼은 이처럼 차이가 있다.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은 이런 설명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1679).

 


(c) 히브리서 4장 12절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되나(살전5:23),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인류의 타락으로 사람의 영의 기능이 약화된 이후 사람의 영과 혼의 기능상 구분은 더 어려워졌다. 이것을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믿는 이가 거듭나기 전, 그의 영은 혼 안으로 타락하여 혼으로 포위되고 조성되어 혼과 하나가 되었다. 결국 영의 기능과 지각은 혼과 섞여져서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영의 주된 기능은 상실되고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영은 혼의 부속품같이 되어 버렸다.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강해질 때 자연히 영의 기능은 사람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거듭난 후에도 혼과 영이 분리되는 역사가 필요하다"(위 영에 속한 사람, 45-46쪽).

 

그러나 거듭 난 사람은 처음엔 여전히 이런 구분이 희미하지만, 점점 우리 존재의 깊은 속 영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편의상 이것을 연합된 영, 속사람, 새사람이라고 해 보자)과 우리의 <변화 받지 못한 생각, 감정, 의지>(혼, 겉사람, 옛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구조가 형성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가 말씀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해 갈 때 우리 깊은 속에 있는 연합된 영의 원함과 이것을 거스리는 것과의 '대비'는 점점 더 선명해진다. 이것을 히브리서 4:12의 영과 혼을 찔러 쪼개는 역사로 볼 수 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안에 신체(body)는 아닌 두 세력 간에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즉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교제를 통해 영적 상태가 좋을 때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가 타락한 혼을 이기고 밖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성경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나쁠 때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는 묵살되고 우리의 옛혼(옛 사람의 생각, 감정, 의지)의 요구가 밖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반대로 <내 안의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사는> 경우이다. 이런 것들은 거듭난 성도들의 일상적인 체험이지만 영과 혼을 구분(분리)하지 않으면 체계적인 설명 이 안 되는 부분이다. 영과 혼을 다른 두 존재로 보아야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제 히브리서 4장 12절의 '영과 혼'을 조금 폭 넓게 접근하여 해석해 보겠다.

 

4장 전체의 문맥은 히브리서 수신인들에게 '안식에 들어 감'을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8절에서 '여호수아가 주는 안식'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우리는 이 안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11절에서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Let us labour...)고 말함으로 이 안식이 다만 물질적인 가나안 땅만이 아님을 암시한다. 즉 여기의 안식은 저자(바울)와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을 포함한 영적이고 현재적인 의미의 안식을 포함한다. 이어서 히브리 기자는 <안식에 들어감을 힘쓸 것>과 <순종치 아니한 본을 따름>을 대비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이어서 12절에서 현재 쟁점이 되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는 검보다도 더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도록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위 11절에서 언급된 '저 안식'(that rest)을 우리 영 안에 오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46). 왜냐하면 우리는 마11:28에 근거하여 주님께 나아갈 때만 참 안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거하는 동안 자신들의 불신하는 생각, 변덕 많은 감정, 거스리는 의지(혼)로 의심하고 불평하고 거역함으로 안식을 얻지 못했다.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를 영접했던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도 유대교 사회와 참된 교회 생활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혼 (생각, 감정, 의지)안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방황하는 오늘날의 믿는 이에게도 거의 동일한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늘 우리의 혼의 방황을 끝내고 우리의 영과 관계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릴 이끈다. 혹은 은혜의 보좌로부터 얻은 넘치는 공급으로 우리의 혼의 방황이 끝난다.

 

중요한 것은 안식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영 안에는 늘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과 방황>은 거의 우리의 혼-특히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식과 방황은 결코 같은 실체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또한 <안식이 있는 영>과 <방황하는 혼(생각)>도 동일 실체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방황하는 혼은 깊은 속의 안식의 영에 의해 부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황하는 혼은 안식인 연합된 영에 순종함으로 안식이 우리의 혼 안으로도 역사 되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안식 안에 들어가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된 영의 요구를 거절하고, 굳은 마음과 따지는 생각 안에 머물므로 영적인 메마름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히브리서 4장의 해석방식은 우리의 체험에 기초함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1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2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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