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나눠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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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유br 간증 1: 전제(奠祭) ― 부름 받아 주님을 섬김

 

전제(奠祭) ― 부름 받아 주님을 섬김

 

 

아침에 한 가지 일을 더 교통하고자 합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몇몇 형제자매님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전시간 봉사를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는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볼 때 이러한 길을 가는 모든 이는 자신이 맹렬한 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리는 것 같다고 느낄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우 단순하게 주님의 인도를 따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은 참되시고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이전에 베드로와 요한을 부르신 주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제가 젊었을 때, 주님께서 워치만 니 형제님을 부르시는 과정을 보았을 때, 매우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또한 리 형제님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체험에 대해 읽었을 때, 오직 영에 속한 사람만이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니 형제님과 리 형제님 그리고 바울과 아브라함을 대하실 때와 똑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지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실재를 보지 않는 한 누구도 여러분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부추김으로 봉사를 한 것이라면 여러분의 봉사는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이 이것을 분명히 밝혀줄 것입니다. 만약 주님 자신이 여러분을 감동시키신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조만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저의 간증을 하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로 다짐했을 때, 단지 1년 동안만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모아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1년을 일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저를 지원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리 형제님이 봉사하라고 저를 부르셨을 때 저는 곧바로 나왔습니다. 형제님은 우리에게 캠퍼스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캠퍼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 합니다. 대도시이든 소도시이든 그 모든 곳에 가야 합니다. 누군가가 요청하면 가야하고, 요청하지 않더라도 가야합니다. 여러분이 가기만 한다면 무언가를 산출해 낼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4절을 보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은 씨를 뿌리지 않으신 데서 거두시는 마음이 굳은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저는 씨를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허벌판에 교회도 없는 곳에 가서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열 몇 시간을 운전하여 랄리(Raleigh N. C.) 근처에 사는 한 부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의 이름과 주소는 다른 이에게 전달받은 것이었고, 그것이 정확한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앉아서 ‘이러한 방법이 과연 소용이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리 형제님이 주님 품으로 가시고, 제가 형제님의 유품을 정리할 때였습니다. 저는 형제님이 1962년도부터 8년 내지 10년 동안의 시간을 이렇게 달려오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아내는 미국 사람인데 고향은 외딴 시골이었습니다. 한 나이 든 형제님도 그곳에서 오셨습니다. 그 형제님이 제게 말했습니다. 60년대에 워치만 니 형제님의 책을 본 몇몇의 사람들이 리빙 스트림에 편지를 써서 리 형제님께 오시기를 요청하면 리 형제님은 즉시 가셨습니다. 얼마나 먼 곳이든 부르기만 하면 형제님은 가셨습니다. 형제님은 호주를 시작으로 뉴질랜드, 중앙아메리카로 가셨습니다. 어떤 곳은 매우 외졌지만, 주소만 있다면 형제님은 기꺼이 가셨습니다.

 

한 번은 리 형제님이 저를 부르셔서 한 형제와 함께 어떤 곳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형제가 물었습니다. “비행기 표는 누가 지불하나요?” 리 형제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상, 주님의 회복 안에 한 가지 훌륭한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하는 이가 군량을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의 동역자 형제님들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일본에 개척하러 가든, 한국에 개척하러 가든, 단지 위임만 주었을 뿐 금전적인 지원은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워치만 니 형제님이 리 형제님을 보내셨을 때도 위임만 주시고 금전적 지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형제들을 러시아로 보낸다면, 사랑의 돌봄으로 그들에게 늘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공급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첫째, 공급이 있어서는 안 되고, 둘째, 어디로 가는 것은 무기징역과도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어떤 곳에 간다면 바로 그곳에 묻혀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개척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온전하게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위의 원칙에 따른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만약 고정적인 수입이 있고 정해진 기한이 있다면, 그러한 봉사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은 필리핀의 동역자 천(陳) 형제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천 형제님은 50년대부터 주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리 형제님은 1년 중에 3분의 1 정도의 시간을 필리핀에서의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리 형제님은 그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격려하셨고, 천 형제님은 그 젊은이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리 형제님의 확증을 받으러 갔다 했습니다. 리 형제님은 천 형제님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으셨고, 다만 자신의 간증을 들려주셨다고 합니다.

 

리 형제님은 자신이 주님을 섬기려 했을 때 워치만 니 형제님께서 이것을 확증해 주셨고, 그렇게 전시간 봉사를 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교회의 재정은 리 형제님과 형제님의 동생이 거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외국 기업에서, 다른 한 사람은 세관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온 교회의 재원은 모두 이 두 형제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길 필요가 있었을 때, 형제들은 모두 이것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실지로 전시간 봉사를 하기 시작했을 때, 형제님은 생활의 현실적인 필요들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시작했을 때, 형제님께 이미 아이가 둘 있었습니다. 리 형제님의 자매님 친정에서는 리 형제님이 전시간 봉사를 하는 것을 매우 달갑지 않아 했고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영 안에서 확증한다고 하였지만 실지로(사실상) 재정적으로 지원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리 형제님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중일 전쟁이 시작되어 생활이 한층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리 형제님의 첫 번째 자매님은 주님을 매우 사랑하며 믿음으로 생활하는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자매님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에 달려가서 동물들에게 사료로 주는 콩깻묵을 사신 적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매님은 형제자매들을 만났는데, 형제자매들은 자매님에게 무엇을 사셨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자매님은 다만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실 뿐 콩깻묵은 그대로 덮어 두어 형제자매들이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자매님이 미역을 건지러 해변에 가셨는데, 거기서 자신의 친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척은 자매님에게 “왜 그렇게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려 하는 거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자매님은 거기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죽더라도 지금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이 둘이 다 자랄 때까지 키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때라면 저는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리 형제님은 이 이야기를 천 형제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리 형제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천 형제님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리 형제님이 말을 마치자, 천 형제님은 “저는 분명합니다.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리 형제님이 하신 말씀은 들을 때 놀라서 기겁할 내용이었지만, 천 형제님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비행기표를 사는 것에 대해 리 형제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다음 주가 되어서 리 형제님과 몇몇 형제님들이 자유롭게 교통하실 때 믿음으로 생활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지난주에 비행기표에 대해 얘기했을 때 리 형제님은 대답이 없으셨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형제님이 하신 말들은 사실상 그 대답이었고, 저 역시 형제님의 말들로부터 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섬길 때 반드시 믿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인들은 믿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습니다. 사실 주님은 참되고 살아 계신, 큰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니 형제님에게 살아 계신 분이셨고, 리 형제님에게도 살아 계신 분이셨으며,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도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있는 곳에 그분의 신실하심이 나타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여러분이 부자가 될 일은 없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을 일도 없습니다. 이 말이 곧 저의 간증입니다.

 

그 당시에 리 형제님은 제게 “왜 그렇게 많은 것을 고려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고민하고도 분명하지 않다니. 나에게는 2주면 충분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자매는 아직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제게는 지원이 있는 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1년 동안 저축해 놓은 것이 있어 상황을 봐 가며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식으로 전시간 봉사를 한다고 선포하지 않고 다만 개인적으로 모든 시간을 내놓을 뿐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어느 날 밥을 먹는데 리 형제님이 제 옆에 앉으시더니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계속 질질 끌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빨리 가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가지만, 어찌 됐든 주님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3년 혹은 5년 동안 발버둥치지만, 주님은 이런 것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각 사람이 사람의 안배가 아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저는 자신을 드려 리 형제님을 섬겼지만, 리 형제님은 저의 주님이 아니었으며, 주 예수님이야말로 저의 주님이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제 몫을 드릴 수 있다면 저는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모두 주님을 섬기는 것이므로 주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반드시 우리를 향하여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베드로와 같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21장의 기록은 상당히 인간적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현실 생활 속에서 자주 겪게 되는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든 예수님께서 주님이십니다.

 

병에 걸렸던 2004년 연말에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니, 제가 1979년(그때 중국은 막 개방한 상태였고, 저는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정식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이미 전시간자로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부터 작년까지를 포함하여 주님을 섬긴지 이미 25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005년 1월 1일, 저는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지난 25년이 매우 가치 있었다고 느낍니다. 그 기간 동안 서로 손을 잡고 당신과 동행한 것은 다른 무엇과도 비할 데 없이 달콤했습니다. 외적으로는 사람을 섬기며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당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게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요. 주님, 저는 세상에 조금도 미련이 없으며, 이미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신다면, 부디 저에게 또 다른 25년을 주시어 제가 한 번 더 이전과 같이 가치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주님께서 제 기도를 들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제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제 깊은 속에는 주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어느 누가 희생할 수 있나?” 찬송을 쓰게 된 동기

 

《어느 누가 희생할 수 있나?》[중국어 원문 제목은 전제(奠祭)임-역자 주] 이 찬송은 앤드류 유 형제님이 2009년 니 형제님이 쓰신 찬송 “대가 없이 사랑케 하소서‘에 대해 반응하는 찬송이다.

 

2009년 4월 22일 앤드류 유 형제님은 한 형제님이 보내준, 주님의 회복의 역사와 간증에 관한 한권의 원고를 받았다. 그는 단숨에 그 귀한 간증과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고는 여러 번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십여 일 동안 구름 같은 증인들의 간증이 계속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잠을 이루지 못한 어느 날 밤, 그는 “어느 누가 희생할 수 있나?” 이 찬송을 작사하여 그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 찬송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9년 5월 3일, 저는 이러한 간증들을 읽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선 형제님들이 걸어온 길과 오늘 저와 함께 이 길에 있는 충성된 동반자들의 간증들을 생각하며, 또 니 형제님이 쓰신 “대가 없이 사랑케 하소서”라는 찬송을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하여 간략하게 이 찬송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증인들에게서 ‘미소 가득한 그들의 얼굴’과 ‘주가 남기신 발자취’를 보았습니다. 그러고서는 니 형제님이 임종 시에 하신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지켰다.”라는 말씀과 리 형제님이 저의 손을 잡으시면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하신 ’희생‘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누가 이렇게 허비할 자격이 있고 또 누가 이렇게 희생할 수 있느냐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저도 대가 없이 사랑케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이 길에서 충성을 다하는 앞선 형제님들과 동반자들에게 이 찬송을 드립니다.(2009년 5월 3일 새벽 3:40 홍콩에서)

 

“어느 누가 희생할 수 있나”

 

어느 누가 희생할 수 있나 어느 누가 허비할 수 있나

그들이 가진 기묘한 풍성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네

모두 쏟아 소진 될지라도 항상 넘치도록 채워지네

자신 향한 축복 구치 않고 자신 향한 보상 바라잖네

속박에도 체념치 않고 고난에도 애통치 않아

솟구치는 사랑의 물결 영원까지 흐르고 흘러

 

죽음 삼키는 생명의 넘쳐 흐름 파쇄시키는 향기 가득한 부활

주가 남기신 발자취 따라 묵묵히 따를자 부르네

미소 가득한 그들의 얼굴 영광스러운 노정 보이네

 

이 길의 가치를 이미 보았으니 즐겁게 모두 포기하리라

내 인생 마칠 때까지 기쁨의 전제로 모두 다 쏟아 부으리

당신의 임재 떠나지 않게 주여 나로 사랑케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쁨 간직해 영원히 나의 눈물 그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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