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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탐방(35) - 팔레스타인 땅(4)

 

이스라엘 탐방(35) - 팔레스타인 땅(4)

 

 

1. 맘루크 왕조 지배 시대(AD 1250 - 1517)


A. 정의 - 맘루크(Mamluk)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노예병을 뜻한다. 이들은 전사로 양성되며, 노예라 할지라도 기회를 얻으면 높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고 국가나 사회의 요직에도 등용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인정하면 어머니가 노예라 할지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이슬람 사회에는 노예가 세운 왕조가 존재할 수 있었다.


B. 신흥 맘루크 왕조 - 이들은 칼리프 시대 때부터 존재했으며, 아바스 왕조 말기에 들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역할도 커지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전쟁, 몽골 제국의 침입 등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면서 필수불가결한 군사집단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맘루크 군사 집단은 자신들의 권력을 자각하게 되면서 스스로 지배권을 노리게 되었다. 맘루크들은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무능한 후계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워지자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정권을 차지했다. 초기에 노예 출신의 지배자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시리아 지방에 침입한 몽고 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지배층의 신뢰를 얻어 이슬람 사회에 수용되었다.


C. 맘루크 왕조 시기의 팔레스타인 - 맘루크 왕조가 이집트에서의 권력다툼과 몽고로부터의 시리아 방어 등 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 역시 침체기를 맞았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종교적으로 가장 심한 쇠퇴기를 겪었다. 특히, 십자군이 세운 많은 건축물과 교회들은 무참히 파괴되었고, 이슬람 양식의 사원이 많이 건축되었다. AD 1260년 몽골이 점령한 다마스쿠스 지역은 맘루크 왕조가 '아인 잘루트 전투를 통해 정복하였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이후 맘루크 왕조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맘루크 왕조는 처음부터 기독교와 대항하여 싸우는 '성전'을 외치며 비이슬람교도들을 박해했고, 이는 차츰 이슬람교와 비이슬람 간의 적대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팔레스타인 지역, 특히 예루살렘을 비롯한 악고(Akko), 욥바(Jaffa) 등에 존재했던 유대인 공동체는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황폐해졌다. 그 때까지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에는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으나, 그 외의 주변 지역은 쇠퇴하였다. 가자와 람레 및 나블루스(세겜) 등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 활동이 유지되었으나, 나머지 지역의 중산층은 몰락하였고, 유대인의 평균적인 경제 수준은 형편없이 낮아졌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열악한 정치·경제적 상황과는 달리 종교적 위상은 높았다. 맘루크 왕조 시대에도 기독교인과 유대인 순례자들의 행렬이 예루살렘을 향해 꾸준히 이어졌다.


D. 맘루크 왕조의 멸망 - 맘루크 왕조는 페스트 창궐과 신흥 해양국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에 따른 중계무역 이권 손실과, 그리고 외침에 대항할 만한 군사력의 부재로 인해 AD 1517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당했다.


2. 오스만 제국 지배시대(AD 1517 - 1918)


A. 정의 - 13세기 말 소아시아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가 몰락하면서 크고 작은 공국들로 분열되었다. 오스만 1세가 이끄는 왕국은 소아시아 지역의 공국들 가운데 가장 높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왕국은 오스만 1세의 이름을 딴 오스만 제국을 성립하였다(AD 1299).


B. 오스만 제국의 정복 전쟁


1)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행정적·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비잔틴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과거에 유럽 지역을 침공한 세력은 많았지만, 단순한 침공차원을 넘어 정복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서로마 제국 말기의 훈족과 게르만족, AD 10 - 11세기의 마자르족의 공격은 대규 모 침공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정복전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침공이 유럽을 약탈하여 부를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정복하여 통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경우는 정치적인 목적에다 전 유럽을 이슬람화하려고 하는 종교적인 목적이 결합되어 정복전이 매우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2)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 오스만 1세가 죽은 뒤에도, 오스만 제국은 영토를 확장시켜 발칸반도를 장악하였다. AD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AD 1444 - 1446, 1451 - 1481)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비잔틴 제국의 천년 수도 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수십만의 인구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망을 보유한 경제 네트워크의 중심지였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했고, 급격히 팽창하는 제국의 수도로 적격이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Istanbul)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은 매우 빠른 속도로 팽창을 하였다.


3) 헝가리 왕국의 오스만 제국 저지 - 당시 유럽 지역은 두 개의 방벽에 의해 보호 받고 있었는데 하나는 이미 멸망한 비잔틴 제국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마자르족의 후예인 기독교 국가 헝가리 왕국이었다.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연승을 이어온 군사 강국이었다. 그러나 헝가리 왕국은 주변국들의 견제로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이후 약 50년 동안 오스만 제국·헝가리 왕국 주변국 간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제국은 헝가리 왕국에 의해 번번히 패배했고, 이후 주변국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방법으로 헝가리 왕국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자연 재해와 왕위계승권을 두고 발생한 내전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이 중단되었고, 이러한 일시적인 소강 상태는 AD 1520년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만 1세(AD 1520 - 1566)가 즉위하는 시점까지 이어졌다.


C. 오스만 제국 최전성기를 이끈 슐레이만 1세 - 오스만 제국은 이란(사파비 왕조),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맘루크 왕조) 지역까지 장악한 이후에, 전열을 정비하여 유럽 진출의 관문을 막고 있는 헝가리 왕국으로 향했다. 헝가리 왕국은 이미 지휘부의 부재와 군사력의 약화로 절대적인 열세였다. AD 1526년 오스만 제국은 모하치 전투(도나우강 유역)에서 헝가리 왕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고, 그 여세를 몰아 헝가리 왕국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약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며 번영을 누렸던 헝가리 왕국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오스만 제국은 여세를 몰아 유럽으로의 진출을 실행에 옮겼으나, AD 1529년 빈 공방전에서 발목을 붙잡혔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왕조의 침략으로 인해 유럽 정복에 대한 야욕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D.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멸망 - 이후 슐레이만 1세는 인접 국가들과 평화조약을 맺으며 내정에 집중하였다. AD 1566년에 슐레이만 1세가 사망할 때까지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후의 오스만 제국은 슐레이만 1세와 같은 절대적인 통치자의 부재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걸었다. 오스만 제국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제후국들의 독립과 서양 열강의 침입, 그리고 자체적인 근대화에 실패하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오스만 제국은 독일측에 서서 참전했으나 패전의 책임으로 인해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공화국으로 거듭나면서, 약 600년에 걸친 제국으로서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였다.


3. 오스만 제국의 팔레스타인 통치


1) 오스만 제국의 관용책


팔레스타인 지역은 AD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점령당한 이후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 가자, 나블루스 (세겜), 제파트(사페드)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오스만 제국 이전 시기에 예루살렘을 지배했던 셀주크 투르크와는 다르게,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슐레이만 1세에 이르러서는 예루살렘을 완벽하게 둘러싸는 성벽을 완공하였다(AD 1539 - 1542). 오스만 제국의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2)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이주와 정착


a. 15 - 16세기 중반 - 이 시기와 맞물려 스페인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대추방이 이뤄지면서 스페인계 유대인들(세파르딤)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었다(AD 1492, 1497). 유럽에서 이들이 가져온 새로운 기술과 상업은 오스만 제국에 경제적·정치적 안정을 제공하였다. 새로운 이주민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제파트로 향했다. 그리하여 제파트는 16세기 중반에 유대인 인구가 1만 명에 달하는 직물 산업의 중심지로 번창했고, 유대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대의 신비주의)'가 번성했으며 동시에 '슐란 아루크(유대 법전)'에 성문화된 것과 같이 유대 법률이 제파트 학파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퍼져 나갔다.


b. 17 - 19세기 중반 - 17세기 말 '유다 하시드'와 '하임 말라크'가 이끄는 메시아 운동가들에 의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아 운동이 발효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이 증가하였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약화로 인해 러시아, 프랑스(나폴레옹)의 침입을 받았으며, 이러한 혼란기는 유대인의 정착을 유리하게 해주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으며, 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경작지를 사들였고, 유럽과의 무역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통치 기간 중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대한 9년 동안의 이집트 통치(AD 1832 - 1840)는 유대인의 정착을 유리하게 해주었다.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는 동안, 보다 많은 유대인이 이주해 왔으며, 양측으로부터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지원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예루살렘 성 안의 인구가 과밀했기 때문에 유대인 거주 지역을 세웠으며 (1860년), 이후 25년 동안 교외 지역에 추가로 7곳의 거주 지역을 건설하였다. 또한 유대인 들은 이스라엘 전역의 농지를 매입하고 정착했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기도 했다.


c.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 -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의 갈등, 그리고 이집트 수에즈 운하 건설(AD 1859 - 1869) 등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은 황폐화되었고 인구도 급격히 감소했다. 유럽·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아쉬케나짐)은 이런 상황을 기회로 삼았다. 이들은 AD 1896년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이 제창한 '시온주의 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AD 1500년대에 5000여 명에 불과했던 유대인 이주민은, 제1차 세계 대전(AD 1914 - 1918) 때 85,000여 명에 이르렀다. AD 1917년 영국의 벨푸어 선언이 유대국가의 독립 의지를 북돋았고, 유대인 이민자의 파도가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치권을 영국에게 내어주었고, 영국은 30여 년간(AD 1917 - 1948)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게 되었다.


4. 최근의 팔레스타인(AD 1918 - 현재)


A. 제1차 세계대전과 벨푸어 선언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 내 유대인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이스라엘의 민족국가를 인정해 준다는 내용의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영국은 오스만 제국 내부의 아랍인들의 반란을 유도하기 위해 아랍인들의 독립국가 건설 보장을 명목으로 '맥마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AD 1918), 승전국 영국이 패전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받았다.


B. 영국의 위임통치


1) UN의 위임통치 결정 -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UN의 전신)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대 국가 건설을 거듭 약속했지만,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기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2) 유대인들의 이주와 정착 - 1800년 전후로 활성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이주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본격화 되었으며, 1930 -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AD 1939 - 1945) 때 이르러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1919 - 1923년에는 주로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이주민들(약 3만 5천명)은 유대인 공동체 형성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유대인 공동체의 사회적·경제적 토대를 마련 했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농업 공동체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다.


1924 - 1932년에 주로 폴란드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이주민들(약 6만명)은 도시를 발달시키고 상업을 진작시켰다. 이들은 주로 텔 아비브, 하이파 그리고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3) 제2차 세계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0년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유럽 으로부터 히틀러의 인종 차별 정책을 피해 약 16만 5천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해왔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각자의 지식과 기술, 경험을 바탕으로 유대인 사회의 수준을 높였다. 도시와 농촌의 생활환경은 개선되었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은 더욱 풍부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유럽 내 유대인들의 귀환을 부채질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 독일 나치를 상대로 훌륭하게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정부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걱정하여 유대인들의 무장을 해제 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반영 감정을 품게 했고, 이후 '이르군', '레히', '이스라엘 자유 투사회'와 같은 단체를 통해 혁명 운동이 이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강경한 정책(군대 파견, 영국 백서 발표)은 유대인들의 독립 의지를 불태울 뿐이었다.


C. UN의 분할 독립안 - 결국 1947년 영국의 위임 통치권은 UN(국제 연합)으로 넘어갔고, 유엔 안보리(안전 보장 이사회)는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D. 이스라엘 독립 선언과 중동전쟁


1) 독립 선포 - 아랍인들은 분할 계획에 전면 반대했고, 유대인들을 향한 공격을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외부로부터 무기를 들여와서 서예루살렘, 하이파, 티베리아스(디베랴), 제파트(사페드), 욥바 등의 도시들을 탈환했다. 1948년, 다비드 벤 구리온은 텔 아비브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독립을 선포하였다.


2) 제1차 중동전쟁 - 독립을 선포한 1948년 5월 14일 밤,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 5개국 연합군은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모두 격퇴하였다. 전쟁 기간 중 UN이 중재에 나섰으나, 아랍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랍 연합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재침략하였으나, 오히려 더 많은 영토를 이스라엘에게 내주게 되었다. 제1차 중동 전쟁은 1949년 UN의 중재로, 이집트는 네게브 지역을 이스라엘에게 내어주는 대신 '엘아리쉬-아부 알제일라 선'과 '가자 지구'를 차지하기로 동의하였다. 이후 레바논, 요르단(동예루살렘은 요르단령), 시리아는 휴전에 동의하였으나, 이라크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의 꿈인 이스라엘 재건은 시온주의 창설자인 헤르츨의 예측대로 50년 만에 이루어졌다.


3) 제2차 중동전쟁 -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대량 이민과 아랍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발이 이어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1950년, 귀향법을 제정하고 이민부를 두어 약 100개국에서 이민해온 유대인들을 수용했다. 1956년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도발함으로써 제2차 중동전쟁을 유발시켰다. 이에 이스라엘은 병력을 동원하여 100시간 만에 시내 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이집트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UN연합 군의 개입과 중재로 인해 시내 반도와 가자 지구 등의 점령지를 이집트에게 반환했다.


4)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1960년대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지속적인 국경 분쟁을 일으켜 왔으며, 시리아는 1963년 이스라엘이 추진하고 있던 물수송망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갈릴리 지역을 산발적으로 공격하였다. 이어서 이스라엘 주변에 위치한 아랍국들은 군사 협정을 맺고 이스라엘을 고립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이집트의 국경을 넘어 카이로 공군 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아랍 연합군의 전투기를 폭격하였다. 이로 인해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제2차 중동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상군과 기갑부대를 운용하여 3일 만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및 가자 지구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요르단, 시리아의 공격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국경선을 확대하였다(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단강 서쪽 점령). 1967년 11월, UN은 '이스라엘은 6일 전쟁 이전의 군사 분계선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중재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당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


5)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과 결과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뇌부는, 그들의 정치적인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1973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시내반도와 골란고원을 기습하였다. 이것이 욤 키푸르(유대인의 속죄일) 전쟁이라 일컫는 제4차 중동전쟁이다. 아랍군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미국의 평화 정책은 이스라엘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객관적인 전력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24시간 만에 상대 전력의 절반을 파괴하였다. 다음 날에는 기선을 제압하여 이집트와 시리아를 압박하였고, 이후 UN 안보리의 중재로 휴전을 결의하였다. 4차례의 중동전쟁 결과, 아랍국들은 더 이상 무력을 통한 국경선 변화의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본래 UN분할지역보다 50%가 많은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스라엘의 시내반도로부터의 철수)' 체결로 평화 정책을 추진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불화가 심화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은, 전쟁 중에 아랍 석유수출기구 (OPEC)가 감행한 '석유의 무기화'로 인해 제1차 오일쇼크의 원인이 되었다.


E.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이스라엘은 4차례의 중동전쟁으로 인해 현재의 국경선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 재건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1964년에 비밀저항조직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ian Liberation Organization)'를 결성하고 대(對) 이스라엘 투쟁을 이어나갔다.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의 집단 반 이스라엘 투쟁인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후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국은 평화를 모색하게 된다.


F. 평화 협정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사이에 '영토와 평화의 교환'을 원칙으로 한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여 팔레스타인 자치국가 건설에 합의하였고, 1994년 팔레스타인은 자치 국가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후 1997년 이스라엘 정부의 동예루살렘 지역에 대한 유대인 정착촌 건설 감행, 1998년 미국과 요르단의 중재로 평화를 모색한 '와이리버 협정' 등, 양측은 휴전협상과 충돌을 이어나갔다. 이에 2003년 미국과 UN, 러시아, EU 등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중동평화 로드맵(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 목표)'을 제안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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