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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탐방(34) - 팔레스타인 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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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탐방(34) - 팔레스타인 땅(3)

 

 

1. 앗수르 제국 시대(BC 900 - 607)


BC 721년에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왕국에 조공을 강요했다.


2. 바벨론 제국 지배시대(BC 606 - 536)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민족을 포로로 잡아갔다. 바벨론 제국은 70년 만에 메데-바사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유대민족은 포로에서 귀환하기 시작했다.


3. 페르시아 제국 지배시대(BC 536 - 332)


유대민족의 포로귀환을 허락하고 민족의 재건을 원조했다.(고레스 왕) BC 536년 이스라엘은 70년 만에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구약시대 마지막인 BC 430년에도 여전히 바사의 속국이었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기 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4. 헬라 제국 지배시대(BC 332 - 63)


BC 336년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 그리스와 연합하여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렀고, 그 결과 BC 331년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이후 헬라 제국 시대가 이어졌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알렉산더 제국의 세 후계자에 의해 분할통치가 이뤄졌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셀류쿠스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셀류쿠스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중요한 사건은 마카비 혁명(BC 167)으로서, 통치권이 헤롯 대왕(BC 40)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지속된 하스모니안 왕조를 가져왔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한 세기 가량 권력투쟁과 내전으로 얼룩진 역사를 이어나갔고, BC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5. 로마 제국 지배시대(BC 63 - AD 476)


BC 63년 폼페이우스의 원정 이후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통치를 받았고 BC 40년 헤롯 왕이 유대 왕으로 책봉되면서 로마의 지배가 한층 강화되었다. 헤롯 대왕(BC 37 - 4)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BC 4년 병들어 죽을 때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 기간 중에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이 갈릴리 지역이었던 만큼 신약성경은 헤롯 안디바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는 AD 26 - 36년까지 10년간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했는데, 이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 사역하시고,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압력에 의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했다. 로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를 왕으로 택하였으나, AD 44년 아그립바 왕이 사망한 뒤 행정관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행정관의 정책과 성향은 유대 사람들에게 반감을 샀고, 그들의 반란 움직임에 기름을 부었다. 로마에 의한 직접 통치 기간 동안 대리자 역할을 담당했던 몇몇 행정관들은 포악하고 부패한 정책을 펼쳤으며, 종교적으로 유대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독립을 위해 열심당원들(갈릴리 사람 유다의 추종자들)은 로마의 통치에 대항해 최전선에서 싸웠으며, 정치적 독립을 꿈꾸던 시카리들(자객이라는 뜻)에 의한 무장 폭동이 발생하였다.


* 제 1차 유대 반란


로마 통치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자 유대 민족주의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는 AD 66 - 73년의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발생한 제 1차 유대 반란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 민족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주었다. 반란군들은 지휘부의 통일성 부재와 내분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로마에서 파병한 베스파니아누스 장군이 로마 26개 군단 중 1/4에 달하는 6만의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을 앞두고 로마의 정치적 혼란으로 이 작전은 중단되었다.


* 티투스(Titus)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 이후 베스파시아누스(AD 68 - 79)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고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책임을 맡겼다. AD 70년에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린 뒤 성을 함락하였고, 통곡의 벽만 남기고 성전을 파괴했다. 이후 열심당원들에 의한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지만, AD 73년 마사다에서 960명의 유대인들이 항복 대신 자살을 택함으로 제 1차 유대 반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제 1차 유대 반란은 유대 사람과 초대 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성전과 성전의 제사 제도가 사라짐으로 유대인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했으며, 그 반대급부로 초대 교회는 견제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 제 2차 유대 반란(바르 코크바 반란)


이러한 상황에서 AD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의 열렬한 민족주의적 사상을 탄압하고자 반유대교 법령을 반포해 안식일 준수와 할례 의식을 금지했다. 또한 예루살렘을 이방 사람의 성지로 완비한 로마 식민지로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제 2차 유대 반란(AD 132 - 135)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란의 주동자인 '바르 코크바'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로마 군단과 비유대 사람들을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로 내쫓았다. 그러나 로마의 진압 작전으로 인해 바르 코크바는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예루살렘 남서부 벧엘(Bethel)로 후퇴하여 AD 135년까지 항쟁하였으나, 모든 반란군이 살해됨으로 유대 반란의 막은 내리게 되었다. 이 반란의 결과 유대 사람의 영적 중심지가 갈릴리 지역으로 옮겨졌고, 갈릴리가 랍비식 삶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나중에 이곳에서 유대 사람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h)와 탈무드(Talmud)가 만들어졌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밖으로 쫓겨났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이름을 유대에서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고 이방인들을 위한 유피테르(주피터, 제우스) 신전을 지었다.


6. 비잔틴 제국의 지배시대(AD 324 - 1453)


AD 395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 로마가 이룩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세계사상 불멸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1. 정의 - 고대 로마 제국의 연속이 동로마 제국이며, 고대 로마 제국과의 구별을 위해 붙여진 이름이 비잔틴 제국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고(AD 313) 수도를 동쪽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시점(AD 330)을 비잔틴 제국의 시작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2. 예루살렘에 교회가 건축됨 - 이 시기 많은 교회들이 지어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헬레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곳에 성묘 교회를 지었다. 예수탄생 교회와 예수승천 교회 역시 이 시기에 지어졌다.


7. 초기 아랍 지배시대(The Early Arab Period)(AD 640 - 1099)


A.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 AD 640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된 이후부터 십자군의 침공을 받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이슬람교가 생성되던 시기는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 발생한 전쟁으로 인한 혼란기였다. 이때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무함마드(Muhammad)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사상을 혼합하여 병든 인간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하였다. 이슬람교에서는 A.D 610년 무함마드가 메카(Mecca)에서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고 우상숭배 타파와 평등과 평화를 강조하는 이슬람교를 완성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유일신 사상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인 메카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했기에 극심한 배척을 받았다. 이를 피해 무함마드는 메디나(Medina)로 이주했는데 이것을 '헤지라(AD 622년)'라 하며 이슬람력의 원년(元年)으로 삼는다. 후에 그는 AD 630년 메카를 정복하면서 이슬람 교세 확장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B. 칼리프 시대 - 무함마드가 죽은(AD 632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아랍의 지배는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이후 아랍 세계는 '칼리프(신의 대리인)' 제도에 의해 유지되었다. 칼리프는 이슬람 공동체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를 뜻한다. 칼리프 칭호는 정통 칼리프 시대(AD 632 - 661), 옴미아드 왕조(AD 661 - 750), 아바스 왕조(AD 750 - 1258)로 이어지지만, 후대로 갈수록 이슬람의 종교적 수장이라는 형식적 지위로 전락한다. 칼리프 제도는 아바스 왕조가 멸망하는 AD 1258년까지 지속된다.


C. 이슬람 제국의 기독교 관용 정책 - AD 638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한 이후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대인 공동체는 이슬람의 보호 아래 일상생활과 무역활동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관용 정책도 펼쳐졌다. 이것은 당시 이슬람인들이 기독교인들에 비해 소수였고, 행정 업무를 담당할 기독교 행정관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과 유대교와 기독교의 공존은 옴미아드 왕조 시대까지 이어졌다.


D. 이슬람 제국의 기독교 탄압 -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인들이 늘어나면서 위기감을 느낀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또한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에 걸쳐 이슬람 제국의 영토 확장이 일어나면서 대부분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 유대인들이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들어오게 되자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역시 발생하였다. 거주 이전의 자유와 상업 활동을 제한 받았고, 나아가 언어·종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받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대인들이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기 말경 이스라엘 땅에 있던 유대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종교적인 응집력은 점차 상실되었다.


8. 십자군 원정시대(AD 1099 - 1291)


* 십자군 원정시대는 AD 1099 - 1291년까지 약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약 4세기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직간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칼리프 시대로부터 아바스 왕조에 이르기까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했으나, 10세기 후반부터 국력을 회복한 비잔틴 제국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이후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투르크(AD 1037 - 1242)에 의한 지배 시기에는 이 지역을 두고 이슬람 세력과 비잔틴 제국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 이슬람 제국에 의한 성지 순례 방해 -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고 비잔틴 제국의 군대는 만지케르트 전투(AD 1071)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패배함으로 인해 이집트를 제외한 중동 지역 대부분을 빼앗긴 상황이었다. 갈수록 강성해지는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성지 순례자들이 박해를 받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을 받던 비잔틴 제국은 마침내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 십자군 전쟁 전개


1) 십자군 원정 선포 - 당시 로마 교황은 '카노사의 굴욕'사건을 계기로 세속 군주와의 대립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확고한 절대 권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우르바누스 2세는 비잔틴 제국의 요청을 기회로 삼았다. 십자군 전쟁은 정치, 종교, 경제적 요소가 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유럽 사회는 대내적으로 안정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향상되는 등 외부로의 팽창욕이 증가하던 시점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지배 계층부터 노예 계급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정치·종교·경제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후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향후 200년간 이어지는 전쟁의 시작을 선포하였다.


2)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점령 - 이후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중세 기독교·이슬람·유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년 동안 십자군과 이슬람 세력이 번갈아 가며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 사회의 내분(셀주크 투르크,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으로 손쉽게 1차 십자군 원정을 성공한 십자군에 의해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3) 십자군에 의한 유대인 박해 -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 기사들은 팔레스타인 여러 지역에 라틴 왕국을 세웠으며, 비기독교인들에 대해 철저한 박해를 가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이슬람인과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라틴 왕국에 의한 예루살렘 점령은 약 2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십자군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유대인이든 이슬람교도이든 간에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을 지켜나갈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개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십자군의 종교적 위세 속에서도 유대인만이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유일한 세력으로 남았다. 유대인은 교회 지도자들의 악선전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교회는 기독교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과 박해를 정당화하였다.


4)이슬람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재탈환 - 셀주크 투르크의 분열을 극복하고 세력을 규합한 살라딘(AD 1137 - 1193)의 아이유브 왕조(AD 1169 - 1250)가 하틴전투(AD 1187)에서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면서 십자군은 물러났다. 십자군이 살라딘에게 격파당하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요새화 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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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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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2-3 세기 그리스도교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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