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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man of va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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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특히 민수기, 여호수와를 보면 '용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영어 성경을 보면 'man of valor, man of war, valiant man' 이런 단어들이 다양하게 사용된다. 사실 여호수아, 갈렙, 그리고 많은 사사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이스라엘의 병사들이 다 '용사'로 호칭된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용사들의 역할은 정말 지대했다. 물론 여호와가 싸우시는 분이었지만, 그분의 싸움은 용사들에 의해서 집행되고 용사들과 함께 했다. 구약을 촘촘히 읽어보면, 많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죽어나갔다.


가장 탁월한 용사를 한 명만 들라면, 역시 다윗일 것이다. 다윗은 당대에 가장 노련하고 기량이 탁월한 용사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한 야심가 사울의 이기심과 시기로 인해서 사울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고, 피 말리는 추격과 피난이 대략 7.5년을 이어졌다(그는 15세에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고, 7.5년을 피난생활을 하고 나서,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으로 7.5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40년을 다스렸다).


이것은 정말 개탄할 일이다. 사람의 인성을 가장 철저하게 파괴하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가장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야심이다. 야심이란 무엇인가? 지위를 탐내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분의 왕국의 건축을 위하여 주신 것을 자신의 독재국(monarchy)을 세우려는 것으로 전용하려고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협박하고, 분위기를 조장하여, 분위기가 다른 사람을 압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 있으면, 성도들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obssession' 즉 사람에게 눌리게 된다. 이런 업세션이 있게 되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게 된다. 참고로 교회의 하나는 실행의 일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이 점에서 일치하면 되는 것이다(실행이 없는 것은 교회의 수치가 아닌데, 그리스도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수치임). 사실 이것이 유일한 실행이라면 실행이다(아마도 어떤 분들에게는 오해를 살 소지가 있는 발언이기도 한데, 잘 알아서 들으시면 좋겠다).


그러므로 용사란 바로 이 실행에서 용감한 사람인 것이다. 무엇이 사람을 용사로 만드는가? 그것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 사는 것이다. 그리고 소극적인 방면에서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대체하려고 가해지는 온갖 것들로부터 우리의 맘을 그리스도의 가정이 되도록 지켜야 한다. 이런 사람을 찾아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도 엄청나게 많이 사람의 업세션에 걸린 케이스였다는 것이고, 지금은 조금씩 나오는 중이다.


(예를 들면 어떤 한 도시에 사는 성도의 가족이 다른 도시나 혹은 그 도시의 다른 부분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자. 누가 말하기를 '왜 교통없이 움직이느냐?' 혹은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은 여기서 십자가를 배워야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 이런 말들은 듣는 사람을 사람의 영향 속으로 이끌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 사실상 이런 일에는 아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주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일체 가타부타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 이것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머리되심과 그분의 주권을 믿음에서 연유한다.


어떤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이 가라면 가고, 아니라 하면 안간다"고 말한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내적인 주님의 누림을 감소시켰음을 간증할 수 있다. "교통 감사합니다. 그럴지라도, 결정은 내가 주님 앞에서 하도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교회생활은 주님이 머리가 되는 생활이다. 분열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교회생활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는 문제, 혹은 같은 도시의 다른 부분으로 이주하는 문제를 가지고 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해야 할 것인가? 물론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이런 문제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결정에 맡기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이 부분도 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맘을 열고 잘 들어보시고 성급하게 오해를 하지 않으셨으면....).


당장 어떤 사람이 떠나버리면 여기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생각은 주님의 머리되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말인 것이다. 주님이 가게 하신다면, 그 후의 충원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 어떤 사건이나 사람도 주님의 머리되심을 대체하지 못하도록 맘을 지켜야 한다. 이런 일이 쉽겠는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고, 그래서 용사라고 부른다.)


사울은 여호와가 버린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하고 사람들을 축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직 그를 따르는 사람들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핍박하고 진멸하곤 했다. 그는 또한 박수와 술객을 이스라엘 땅에서 완전히 몰아 냈다. 이런 일은 그가 여호와에게 버림 받은 이후에 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 혼돈이 되었다. 사람이 그르되 완전히 그르지 않은 듯도 하고,...그래서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이 원인이었다.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어떻게 분별을 할 수가 있을까? 나 자신이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러한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특별히 모두가 다 성경을 말하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말이다. 내가 최근에 배우고 있고 체험적으로 매우 확실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주님의 내주하는 영이 내 안에서 운행하고 있음이 느껴지는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만나고 난 후에 나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가, 아니면 까닭은 모르지만 자꾸만 답답해 지는가? 말은 다 맞고 영적인데,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더욱 운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오직 이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누가 무엇을 말하던지, 아니면 내가 아무리 성경적인 말을 하더라도, 그리고 실행을 하더라도, 내 안에서 생명이 증가하는가, 아니면 사망이 증가하는가?" 이 기준을 대입해서 답이 no라고 나오면, 누가 무슨 말을 하건, 그것은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많다(미국에서 어떤 권역을 여러 해 전에 여행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 속이 너무 답답하고 흐름이 너무 없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때 왜 그러는지 거의 이해를 못했는데, 최근에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말에 있지 않고, 내적인 생명의 느낌, 즉 기름부음의 가르침만이 정말 참되고 거짓이 없음을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


(내적인 생명의 느낌을 말할 때 균형을 잡아야 할 방면도 있다. 내가 생활해 온 교회생활의 관념과 습관과 많이 다른 생소한 개념임으로 천연적인 사람의 반응 안에서 평강이 없을 수도 있다. 많은 때, 나는 어떤 것들이 틀렸다고 생각한 것들 중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이 그것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많다. 그런데 이런 정정은 대개가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고, 배운 것, 익숙한 것...이런 영역에 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작정 따르거나 부인하지 말고, 주님 앞에 가져가서 자신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 일이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 역시 용사였다. 그는 또한 믿음의 사람이고,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천연적인 관계와 정을 못이겨서, 야심가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결국은 아버지와 한날 죽임을 당했다. 우리가 생명의 사람들과 교재하고, 야심가를 피하는 것은 주님과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주님이 이런 방면에서 경험과 지혜와 생명의 성숙과 진리의 인식과 속생명의 느낌을 강화하시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사울의 무기드는 소년의 예를 보자. 구약에서 어떤 인도자의 무기드는 자는 그 인도자의 가장 큰 신임을 얻는 사람이다. 사울이 부상당했을 때, 사울은 무기드는 소년으로 자신을 죽이라고 했다. 결국 소년은 그것을 하지 못하고, 사울은 자신의 칼 위에 엎어져 자결을 했다. 이것을 본 무기드는 소년도 자결을 했다. 나는 그 소년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소년은 사울의 야심을 도왔고, 여호와를 대적하는 일에 동참했을 뿐이다. 결과는 사울과 동일한 심판을 받은 것이었다. 신약의 빛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일에서 완전히 실패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야심있는 자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제공하는 천연적인 우호나 선대, 신뢰가 주님의 머리되심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감동이 되어서, 사람의 영향력이 주님의 머리되심을 대체하도록 한다면, 우리의 누림은 감소될 것이다. 영적인 일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동역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개인, 개인 안에서 주님의 인도가 그러하기 때문에, 외적으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천연적인 선호나 관계가 우리의 교회생활에서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할 일이다.


다윗은 사심이 없이 주님을 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했다. 다만 우리는 사람의 영향력으로 인해 주님의 머리되심이 방해받지 않도록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불이익이나 혹시 핍박이 온다면 감수하더라도 그러해야 한다. 사울의 위협에 그는 저항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다만 그의 면전에서 자신을 피난 시키는 일을 했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불의에 항거하는 방식이, 맞공격이나, 대적함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을 위해서 싸울 필요가 전혀 없고, 상대를 공격할 필요도 더욱 없다. 다만 자신의 현 상태를 분명하게 말하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일이다. 외적인 어떤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체들의 교통에 열린 맘을 유지하고 듣되, 내적인 생명을 따라서 나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실행이 내가 부담이 없다고 틀렸다는 것은 아니므로, 주님이 자신에게도 그런 부담을 주시는지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


(요즘은 많은 지방교회들 안에서, 한 때 '찬밥(?)'이던 대학생 봉사가 한참 뜨는 국면인 듯 하다. 나 또한 그런 움직임의 중심에 몇 년을 있어오는 중이고, 이 방면에 대해서 부담도 많다. 이것이 온 교회의 중심 실행일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각 사람은 내적인 주님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내적인 주님의 인도가 노년층을 돌보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 편하고 주님도 누려진다면, 우리는 이런 분들이 압력을 받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더우기 교회 안에는 각종 필요가 존재하는 것이고, 몸의 지체들의 기능, 혹은 부담도 다양할 수록 더 좋은 것이다. 우리는 실행을 획일화 하는 것이 교회의 건축이 아니요, 다양한 기능들이 상호 조율되는 것이 건축임을 보아야 한다. '아멘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자칫하면 주님의 타이밍을 앞서기가 쉽상이다. 다양한 기능이 조율된다고 해서, 교회가 일정한 부분에 힘을 쏟을 수가 없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사실 조율된 다양성이 존재할 때, 한 곳에 힘을 쏟는 일이 훨씬 부드럽고 힘이 덜 든다.)


사울은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자신의 독재국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실패했다. 다윗은 다만 주님과 주님의 뜻만을 관심했다. 그럴때 모든 외적인 환경 안에서 주님은 다윗에게 피할 길도 있게 하시고, 결국 주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서 그분께 크게 쓰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뜻만을 관심하고, 다른 아무 것도 관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조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주권의 하나님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그분의 때에 이루실 것을 믿고 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강건케 되어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생활의 건축을 위해 싸우는 용사 MAN OF VALOR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임재가 함께 할 때만, 우리는 교회건축을 위한 영적인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영광스런 경주를 완수하는 용사가 되는 것이다. 아멘

 

 

글쓴이 : 빛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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