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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삼신론 이단임을 스스로 드러낸 김홍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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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삼신론 이단임을 스스로 드러낸 김홍기 목사

 


김홍기 목사는 아홉 번째 글에서 ‘삼신론’ 교리를 기초로 자신의 논리를 펼침으로써 평소보다 더 길게 쓴 글이 자신을 더 옭아매는 부메랑이 되게 했다. 이번 글에서 크게 두드러진 김 목사의 문제점은 ‘한 신격’(골2:9, 테오테스) 개념에 대한 무지이다. 그 결과 김홍기 목사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의 존재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다.”라고 말하여 잠재되었던 이단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런 모습은 그가 영원히 동시 존재하시는 세 위격들께서 존재론적으로 상호내재 하신다는 정통 삼위일체의 방면에 무지한데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그 외에도 그는 삼위 하나님의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를 말하는 표현들을 여전히 양태론으로 오해한다. 김 목사는 자신의 신론이 이처럼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다른 믿는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칼로 휘두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유사한 광경을 신약 성경 안에서 유대인들과 주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요8:52-59, 10:30-33).


그러나 지방 교회측은 지난 CRI의 사례(“우리가 틀렸었다”)를 통해, 현재는 다소의 오해가 있어도 진리는 결국 진리로 드러난다는 것을 체험한 바 있다. 우리는 김 목사가 성경 도처에 언급된 ’one God’ 즉, ‘한 신격’ 개념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한 신격 안에 계신 동일 본성을 공유하시는 세 위격들(웨스트민스터신조 2장 3절)이라는 성경에 계시되고 정통 신학자들이 믿어 온 바른 삼위일체론을 갖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다소의 사울도 유대교 안에 있었을 때, 현재의 김 목사처럼 “기세가 등등하여”,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죽이려고 했다”(행9:1). 즉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심하게 해치던 사람”이었다(14, 21절). 그러나 눈이 열려 주 예수님을 ‘나’(Me)(행9:4-5)로 만난 후에, 그는 박해하던 그 예수님의 이름을 자신도 부르고(행22:16) “누구든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다른 이들에게도 권했다(롬10:10). 우리는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한 하나님’(One God)에 대해 김 목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딤전1:2, 13).

 


1. 워치만 니(위트니스 리)는 ‘지방 교회’ 창시자가 아니며, 양태론과도 무관하다.


‘지방 교회’(local Church)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로 구성된 주님의 한 몸(엡4:4)이 그들이 거주하는 각 ‘지방 (City) 단위’로 그 지역 교회로 불리워진다는 성경 원칙이다. 이 원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2절(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러한 대부분의 신약 서신서의 명칭과 수신인의 범위(롬 1:7, 고후 8:1, 갈 1:2, 빌 1:1, 골 1:2, 계 1:11)에서 이 '한 지방의 한 교회' 원칙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런 원칙이 초기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실행되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갈라디아서 1장 2절(“갈라디아의 교회들)에서 처럼, 여러 도시들이 포함된 '도'(道, province)를 언급할 때는 '교회들'이라고 ‘복수’ 명사를 썼고, 단지 한 도시(city) 범위에는 교회를 ‘단수’ 명사로 썼다(행 8:1, 13:1, 계1:11)는 점이다. 이 지방을 범위로 한 지역 교회 원칙은 성경에서 개 교회의 ‘장로들을 세우는 범위’인 점도 흥미롭다(행14:23, 딛1:5를 비교해 볼 것). 워치만 니가 이러한 지역교회 범위에 대한 원칙을 성경에서 재발견하고 성경대로 실행했지만(그 당시 중국 본토에 약 600개의 지방 교회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 목사처럼, “지방 교회가 워치만 니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자 사실 왜곡이다. 또한 그것은 지상에서 교회를 참되게 “시작하신” 유일한 분이신 주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마16:18). 사실 ‘지방(local) 범위의 지역교회’ 원칙을 말한 것은 아래에서 보듯이 워치만 니만이 아니었다.


(2) 정통 기독교와의 교회관 비교 ... 'Ekklesia라는 말은 신약에서 114번 나오는데 이중에 85번은 지역 교회(local Church)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 에클레시아의 근본개념을 ... 지방적인 단체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용어의 어원과 신약에서의 사용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도시와 지방별의 지역 교회(local church)를 인정하기 보다는 국가 단위의 교회, 즉 '기독교 복음 침례회'에 소속된 신자들로 이루어진 것을 참 교회로 가르치고 있다'(장로교 합동교단 교육국, 기독교의 이단들, 304-305쪽).


"한국 교회의 큰 문제중 하나를 ... 개교회주의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한 교회가 한 지역을 책임지는 형태이다. 이 제도가 정말로 정착되면 교회나 교단 사이의 대립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 우선 같은 교단 소속 교인들을 주거 지역의 교회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 종교개혁 이후 불필요하리 만치 갈갈이 찢어져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재결합과 연합이 우리의 최대과제라 생각한다"(정훈택, 교회와 신앙 96년 12월호, 99-101쪽).


그렇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이들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우리는 편의상 그들을 ‘주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근접한 표현임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다만 각 지에 나타난 그 교회의 구성원들일 뿐이다. 물론 그 각각의 교회는 소위 ‘주의 회복’ 외에도 그 지역 안에 거주하는 참되게 거듭난 모든 이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처럼 교회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지방 교회’라는 용어를 지금의 김 목사처럼 가볍고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양태론: 그 외에 김 목사는 워치만 니에게 경솔하게 ‘지방 교회의 양태론 이단 교리의 창시자’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그는 이 기회에 워치만 니에 대한 세간의 우호적인 평판에 의도적으로 손상을 주려는 것 같다. 김 목사는 워치만 니가 찬송가 490장(LSM 출간 영어 찬송가-한국복음서원 찬송가 368장) 5절에서 “주님, 당신은 전에 아버지로 칭함을 받으셨지만, 지금은 성령으로 칭함을 받으신다”라고 한 말을 자신의 비판 근거로 제시했다.


만일 위 찬송가 가사 내용이 ‘전에 아버지로 칭함을 받으셨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시다.’라거나, 지금은 성령으로 칭함을 받으시니,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나 주님도 아니시다.’라는 의미라면, 양태론 이라는 김 목사의 주장이 맞다. 하지만 위 말은 결코 그런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 찬송가 3절은 “이전에 성부 오실 때 예수 안에서 오시듯 지금 주 영 안에 왔네. 영으로 우린 주 아네”라고 말함으로써 각 위격들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위 5절은 구별된 삼위께서 서로 안에 계신 분임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삼위의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이 포함된 ‘삼위 전체’라는 성경적인 개념만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인 것이다(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all in each). 즉 하나님은 창조 당시는 ‘창조주’이시나 구속 당시에는 ‘구속주’로 불리시고, 또 부활 후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연합되신 때는 ‘남편’으로 불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사54:5). 이것은 그분께서 거치신 구원의 경륜에 대한 우리의 체험의 방면을 말한 것이다. 김 목사의 오해처럼 그분이 지금 ‘그 영’이시고 더 이상 ‘성부’와 ‘성자’는 아니시라는 양태론적인 말이 아니다.


위 찬송가 안의 ‘주님’(Lord)은 단지 성자만이시니 성부나 성령은 ‘Lord’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삼위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 사상이, 이러한 오해와 갈등의 뿌리일 뿐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워치만 니(위트니스리)는 지방 교회를 시작한 사람도 아니고, 양태론자는 더더욱 아니다.

 


2. 지방 교회측이 마틴 로이드 존스를 양태론자로 둔갑시켰다는 김 목사의 주장은 거짓이다.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측이 “마틴 로이드 존스나 빌리 그래엄 같은 정통 설교자들을 마치 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몄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이들을 마치 ‘일위’를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인 것처럼 둔갑시켜 놓은 지방 교회의 행위는 확실한 ‘교리 사기’이고, ‘학문적인 범죄’인 것이다!’라고 막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지방 교회측은 한번도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일위일체’를 믿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따라서 없는 말(사실)을 근거로 ‘교리적 사기’니 ‘학문적인 범죄’니 라는 막말을 쏟아 낸 김 목사의 변증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김 목사는 “로이드 존스나 그래엄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하나님을 한 인격(a person)으로 지칭한 것은 ‘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 정, 의를 소유하신 한 ‘인격적인 분’(a personal being)으로 묘사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가 ‘지정의를 소유하신 한 인격적인 분’으로 묘사한 그 하나님은 도대체 몇 분 하나님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로이드 존스가 본문에서 ‘Gods’라는 복수 명사가 아니라 ‘God’(is a person)이라는 ‘단수명사’를 쓴 것을 볼 때 ‘한 하나님’(One God)을 말한 것임이 자명하다.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인격이시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이 1차적으로 신적 본성을 가리키더라도 여전히 그런 주체(주어)는 한 하나님(God 혹은 One God)이시지 둘 혹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한 신격(골2:9)으로서의 'God’을 말하면 ‘일위 일체’라고 반발하는 그 자체가 자신이 둘 혹은 세 하나님들을 믿는다는 반증일 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한 신격’(one Godhead)은 세 위격들(three Persons)을 포함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것을 가리켜 ‘일위 일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음 항목에서 다룰 ‘한 신격’(데오테스)을 ‘세 위격들 중 어느 한 위격’으로 착각하는 것은 김홍기 목사의 일종의 고질병이 아닌가 생각된다.


3. 김홍기 목사가 ‘신격’(데오테스) 개념에 무지한 것이 현재의 쌍방 갈등의 뿌리이다.


김홍기 목사는 자신이 성경적인 ‘신격’(골2:9, 데오테스, 스트롱번호 2320) 개념에 무지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여러 차례의 말로 거듭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삼위 전체가 포함된 한 신격?” 이런 표현들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정통신학이 삼위를 하나로 묶어서 ‘한 인격’ 혹은 ‘한 위격’ 혹은 ‘한 신격’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가? 이와 같이 삼위를 아우르는 개념은 하나님의 ‘본성’이지, 한 인격 혹은 한 신격 개념이 아니다. … 성경의 하나님을 ‘하나’로 표현하려면 한 인격의 하나님이 아닌 ‘한 본질의 하나님’으로 표현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성경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를 말하려면 ‘위격’이 아닌 ‘본질’이 되어야 한다(김홍기 목사, 9번 토론글).


우리가 성경을 펴서 읽을 때 수도 없이 등장하는 단수의 ‘하나님’(God)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한 이후 끝절인 31절까지 거의 매 구절마다 단수의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이 분이 바로 ‘삼위가 포함된 개념인 한 신격의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듭시다.”라고 함으로써 여기서의 ‘하나님’은 ‘우리’로 지칭된 ‘세 위격들과 동격 개념’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대교도와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분은 성부 하나님만으로 오해하고, 가이슬러가 신학을 공부한 학교의 한 종신 여교수는 이 하나님을 ‘알라’와 동일한 분으로 오해한다. 그리고 김홍기 목사는 이 단수의 ‘하나님’은 ‘신격’이 아니라 ‘신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의견들은 다 제대로 된 성경적인 신관에서 크게 빗나간 것들이다.


이들과 달리, 지방 교회측은 ‘이 ‘신격’(골2:9, 데오테스, 2320)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전체가 포함된 ‘One God’ 개념(창1:26)인 반면, ‘신성’은 그 하나님의 본성을 가리킨다(롬1:20).’라고 이해한다. 이에 대해 김 목사는 나름대로 영어 사전, 성경, 신학자들의 말을 동원하여 골로새서 2장 9절의 ‘Godhead’는 ‘신성한 본성’을 가리킨다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이제 이에 대해 차례로 반론해 보겠다.


영어사전:


김홍기 목사는 “Merriam-Webster 영어 사전을 보면 Godhead를 “divine nature or essence”(신적인 본성 혹은 본질)라고 정의한다. 즉 영어로 Godhead는 ‘하나님의 본성 혹은 본질’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위 같은 영어 사전은 ‘Godhead’가 ‘신적 본성’을 가리키지만, 대문자일 경우에 ‘Godhead’는 하나님(God)을 의미하고, (Full Definition of God에서) 그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 또는 통치자로 경배받으시는 … 지존자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capitalizedthe supreme or ultimate reality: as a : the Being perfect in power, wisdom, and goodness who is worshipped as creator and ruler of the universe.). 따라서 영어 사전의 정의로도 ‘Godhead’는 ‘경배받으시는 지존자’를 가리키지, 김 목사의 주장처럼 ‘신성한 본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김 목사 주장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참고로 dictionary.com 에서도 ‘Godhead’의 1차 정의는 우주의 최고 주권자, 성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성령의 거룩한 삼위일체이다. ‘신성’은 부차적 개념으로 소개된다(1. the essential being of God; the Supreme Being. the Holy Trinity of God the Father, Christ the Son, and the Holy Ghost 2. (lowercase) divinity; godhood. 3. (lowercase) Rare. a god or goddess; deity).


성경:


골로새서 2장 9절에서 단 한번 사용된 ‘신격’의 원문은 ‘데오테스’(스트롱 번호 2320)인데, 다아비 역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것을 ‘Godhead’로 번역했다. 그런데 김 목사가 동일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로마서 1장 20절의 해당 단어의 원문은 ‘데이오테스’(스트롱 번호 2305)이다. 둘은 스트롱 번호가 다르다. 이처럼 스트롱 번호가 다른 것은 그 단어들은 다른 단어임으로 그 뜻 또한 같을 수가 없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존 넬슨 다아비 역은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살려서 로마서 1장 20절의 ‘데이오테스’를 ’Godhead’가 아니라 ‘Divinity’(신성)로 번역했다. 그는 특히 ‘Divinity’에 대한 난하주(h)에서, “What is characteristic of God; not ‘Godhead,’ as in Col. 2. 9.”라고 적어서 둘은 전혀 다른 단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참고로 회복역 성경은 이러한 다아비 역의 용례를 따랐다. 그 외에 서로 다른 두 헬라어 단어를 동일한 영어 단어로 번역한 역본들은 모두 오역이다.


성경 학자들:


그렇다면 권위있는 성경용어 학자들은 ‘데오테스’(골2:9)와 ‘데이오테스’(롬1:20)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먼저 헬라어 성경용어 권위자인 Henry Alford는 자신의 명저인 <Alford’s Greek Testament>(Vol.III) 골로새서 2장 9절 ‘데오테스’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두 단어들을 혼동하여 써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θεότης’ the abstract of ‘θεος’, must not be confounded with ‘θειότης’ the abstract of ‘θεῖος’, divine, which occurs in Rom.i. 20. where see Fritzsche’s note…”(218쪽).


또 다른 저명한 성경용어 학자인 W.E. Vine도 자신의 <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330-331쪽에서, 다음과 같이 ‘divinity(롬1:20)와 Godhead(골2:9)는 구별(distinguished) 되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더구나 Vine은 “사도 바울은 이 ‘데오테스’를 아들의 본질적이고 인격적인 신격(神格)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논란의 여지를 아예 차단하고 있다.


"divinity" the RV rendering in Rom. 1:20 (AV, "Godhead"), is derived from theios (see DIVINE, A), and is to be distinguished from theotes, in Col. 2:9, "Godhead."   ... But in the second passage (Col. 2:9), Paul is declaring that in the Son there dwells all the fullness of absolute Godhead; they were no mere rays of Divine glory which gilded Him, lighting up His Person for a season and with a splendor not His own; but He was, and is, absolute and perfect God; and the Apostle uses theotes to express this essential and personal Godhead of the Son" (Trench, Syn. ii).


위 내용들을 볼 때, '데오테스'(신격)(골2:9)는 ‘데이오테스’(신성)(롬1:20)와 전혀 다른 단어이고 또한 전혀 다른 개념이다. 즉 ‘신격’은 신구약 성경 도처에서 언급된 '유일 무이한 한 데오테스의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신6:4-5, 출15:11, 왕상 8:60, 사45:5-6, 딤전2:5, 롬8:30, 고전8:6, 약2:19). 물론 이 ‘한 하나님’(One God)은 동일 본성을 공유하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신 구별된 세 인격들로 존재하신다. 따라서 “그러니까 위와 같은 성경의 번역자들에게는 골 2:9의 ‘세오테스’와 롬 1:20의 ‘세이오테스’는 완전히 동일한 것, 즉 신성인 것이다.”라는 김홍기 목사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한 ‘신격’ 개념 조차도 김 목사가 양태론으로 오해하는 것은 그가 현재 최소한 이 주제에 있어서 깊은 어둠 가운데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에 대한 바른 번역은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에 나오는’ Godhead’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관련하여 김 목사는 다음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다. 1) Godhead는 ‘하나님’(God)으로 해석 해야 한다. 김효성 목사도 자신과 같은 입장이다. 2) 지방 교회측이 Godhead‘신격’으로 “잘못된 번역을 하여 이단 교리로 둔갑시켜 놓고” 박윤선 박사도 그렇게 번역했다"며 “후안무치한 교리 사기를” 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1) 김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영어 표현(Godhead)은 ‘하나님’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영어 사전들은 Godhead를 “divine nature or essence”(신적인 본성 혹은 본질)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Godhead(하나님)는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도 모순임이 드러난다. 즉 만일 영어 사전이 Godhead를 ‘신적인 본성’으로 정의한다면, 그 정의대로 번역해야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김 목사는 엉뚱하게 Godhead를 ‘신적인 본성’이 아닌 ‘하나님’(God)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어로’God’이지 ‘Godhead’가 아니다. 이 점은 중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김 목사처럼 두 개의 다른 단어를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은 번역의 섬세성을 살리지 못한 나쁜 번역, 즉 넓게 보면 오역일 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김 목사의 영어 사전 정의 조차도 틀린 것이었음을 보았다.


관련하여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신적 본질을 가리킨다는 김 목사의 억지 주장과 달리, 정통교부인 닛사의 그레고리는 ‘하나님’을 삼위의 보편적인 측면에서의 존재를 설명하는 용어라고 정의한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56쪽). 김석환 박사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펴낸 책인 <교부들의 삼위일체>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 번역에 수 많은 형태의 오역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본인은 신격의 단일성 안에 삼위께서 계시니 곧 한 실체요 한 권능이요 한 영원성이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라고 ‘Godhead’를 ‘신격’으로 번역하고 있다(위 책341쪽). 김 박사는 또한 자신의 위 논문에서 ‘Godhead’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헬라어 ‘데오테스’에 상응하는 ‘신격’으로 번역하였다라고 적고 있다(341쪽).


2) 이제 지방 교회측이 Godhead를 ‘신격’으로 번역하면서 박윤선 박사도 동일하게 그 단어를 ‘신격’으로 번역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 김 목사가 ‘후안무치한 교리 사기’라고 막말을 한 것은 과연 정당한지 살펴 보겠다. 이것은 사실 확인 문제임으로 그리 복잡할 것이 없다. 박윤선 박사가 쓴 <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서> (영음사) 23쪽에 소개된 박윤선 박사 본인의 관련 번역은 다음과 같다.


'본질상 단일하신 신격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는 누구로 말미암지 않으시고 ...'


위와 같이 박윤선 박사는 Godhead를 '신격'으로, person을 '위(격)'으로, substance를 '본질'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참고로 위 번역에 ‘본질상 (단일하신)’ 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만, 그에 해당하는 영어 원문은 ‘unity’임으로 ‘본질상’ 이란 말은 영어 원문에 없는 말이 추가된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박윤선 박사는 지방 교회측과 동일하게 ‘Godhead’를 신격으로 번역했다는 지방 교회측의 주장은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아래와 같이 근거없는 막말을 함부로 쏟아내어 공개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지방 교회측의 평판에 먹칠을 한 것에 대하여, 지방 교회측은 김홍기 목사가 다음 글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김 목사가 양심이 깨어있는 사람인지 지켜보겠다.


(김홍기 목사) ”그런데 지방 교회는 이것을 “단일한 신격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라고 번역을 해놓았다. 이는 마치 삼위가, 지방 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처럼, ‘한 신격’ 혹은 ‘한 인격’ 안에 계시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조작을 해놓은 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단일한 신격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라고 한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에서, 우리는 두 개념[삼위와 일위]의 조화를 볼 수 있다(박윤선,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서, 영음사, 23쪽).” 지방교회의 이러한 글 쓰기 행태는 이중 교리 사기를 보여준다.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을 잘못된 번역을 통해 이단 교리로 둔갑시켜 놓은 후, 소위 ‘한 신격’ 혹은 ‘한 인격’ 안에 삼 위격들이 계시다는 지방교회의 이단 교리를 정통 신학자인 박윤선 박사가 인정하는 것처럼 조작을 해놓은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이중 교리 사기’인 것이다! 지방 교회가 이런 후안무치한 교리 사기를 계속한다면 앞으로 이에 상응한 심판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9번 토론글)

 


5. 고넬리우스 반 틸이 말한 ‘one Person’의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김홍기 목사는 반 틸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는 “반 틸이 지방 교회의 ‘신격’이라는 용어나 개념을 사용했을 리가 만무한데, 지방 교회는 반 틸의 진술을 제멋대로 ‘신격’이라는 단어로 번역해 놓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반틸이 “마치 삼위의 하나님을 ‘한 위격’의 하나님으로 말한 것처럼 ‘교리 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사실은 과연 무엇인지 차례로 보기로 하자.


1) 반틸이 ‘신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 여부: 먼저 반틸이 ‘신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방 교회측이 멋대로 ‘신격’으로 번역했다는 김 목사의 터무니 없는 주장은 자신이 임의로 번역하여 인용 소개한 아래 단락 자체로도 거짓임이 폭로되고 있다. 아래 내용 안에서 반틸은 분명히 두번이나 “Godhead”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방 교회측은 그것을 ‘신격’으로 바르게 번역했고 김 목사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오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안의 세 위격들에 관하여 말한다(yet we speak also of God of three persons in the Godhead.). 위격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의 각각은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된다고 말한다. … 하나님의 위격들(the persons of the Godhead)은 상호간에 서로에 대하여 철저하시며(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lipsburg: P&R Publishing, 2007), p.348). (김홍기 목사의 9번 토론글 중에서)


2) 반 틸의 한 인격 개념: 이제 반 틸이 ‘삼위의 하나님’을 ‘한 신격’(또는 한 인격)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번역문 그리고 바로 뒤의 영어 원문을 통해 살펴보겠다.


우리는 '하나님 즉, 신격 전체가 한 인격이시다'라고 단언한다. ...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하나의 수적인 동일성을 현시함을 신앙으로 간직해야만 한다. 심지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내에서 조차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다 라고 주장해야 한다. (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229)


위에서 보듯이 반 틸은 ‘신격 전체’를 ‘한 인격’으로 말하고 있다. 그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do assert that God, that is, the whole Godhead, is one person. … Over against all other beings, that is, over against created beings, we must therefore hold that God’s being presents an absolute numerical identity. And even within the ontological Trinity we must maintain that God is numerically one. He is one person. When we say that we believe in a personal God we do not merely mean that we believe in a God to whom the adjective "personality" may be attached. God is not 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27


위 영어 원문을 볼 때 반틸은 분명히 ‘신격 전체’(the whole Godhead)‘one person’(한 인격)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 교회측이 “교리 사기”를 치고 있다는 김 목사의 막말은 거짓임이 밝혀졌다. 이제 반틸이 말한 ’the whole Godhead, is one person’(신격 전체가 한 인격이시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김 목사) 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세 위격이 다 포함된 존재인 신격 전반’(지방 교회측)을 말한 것인지를 살펴보자. 그런데 이것도 김 목사가 현재 대변하는 가이슬러의 아래 말에서 쉽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의심스러울 때는 선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원칙을 적용하여, 반 틸이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주장하는 것은 삼중 인격적인 존재(a tri-personal being)인 신격 전반(the Godhead overall)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이해하거나,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한 분(as on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와 세 분(as thre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가 정확히 똑같은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가이슬러의 ‘오픈 레터’ 반론문 중에서)


위 가이슬러의 말은 반 틸의 ‘신격 전체가 한 인격’이라는 표현은 1) 삼중 인격적인 존재인 신격 전반을 가리키거나, 2) ‘세 분’을 가리키는 ‘one person’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가이슬러의 해석에 따르면, 그 어느 경우이든 반 틸의 위 언급이 김 목사의 주장처럼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가리킬 여지는 전무하다. 오히려 그것은 세 위격들이 포함된 신격 전체를 가리킨다는 지방 교회측의 주장에 부합하다.


3) 김홍기 목사의 오만함과 삼신론적 사고방식: 김홍기 목사는 반 틸에 대하여 다룬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터무니 없이 부당한 주장을 말하고 있다.


(1) 오만함: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는 마틴 로이드 존스나 고넬리우스 반 틸과 같은 정통 설교자와 신학자의 말한 의도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고 독자들과 한국 교회 및 세계 교회를 상대로 ‘명백한 교리 전문 사기’를 자행하고 있다. 이런 ‘명백한 교리 사기꾼들’과 정식으로 지상토론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을 상대해 주는 것은 이들이 자격 있는 논객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반론권이라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지방 교회의 이단 교리를 확실히 파헤쳐서 독자들과 한국 교회의 이해를 돕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따르면, 김홍기 목사 자신이 ‘신격’개념 이해에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현실은 바로 보지는 못하면서 위와 같이 말하는 것은 ‘영적 교만’으로 비쳐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김 목사는 지금보다 더 유연한 자세로 토론에 임해햐 할 것이다.


(2) 삼신론적 사고 방식: 김 목사는 또한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를 위격(person)에 적용하면 이단이 된다.”라고도 했다. 이러한 김 목사의 주장은 하나님을 ‘one person’으로 말한 반 틸도 이단으로 만들고 있다.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창조주”요 “구속주”요 우리의 “남편”이신 “온 땅의 하나님(God)”(사54:5)은 도대체 몇 분인가? 둘 또는 셋인가? 이사야 54장 5절이 말씀하는 그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단수) 안으로 침례를 주라(마28:19)고 할 때의 그 ‘이름’(Person)과 동일한 분이 아니신가? 이것을 성경은 ‘신격’(Godhead)이라고 한다(골2:9). 이러한 <한 신격의 하나님을 믿으면 이단>이라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김 목사는 또한 지방 교회측이 그렇게 생각할 것으로 추측하며 다음의 말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는 말씀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아들과 성령은 구별된, 즉 다른 분이다. … (그런데 지방 교회측은) 아들이 성령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과 아버지’가 ‘아들과 성령과 아버지’를 보내셨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진술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지방 교회의 이단 교리의 관점에서 본 왜곡된 진술이다.”


김 목사의 이런 말들이 자신이 성경을 이해하는 균형잡힌 조망이 부족함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 목사의 엉터리 추측과 달리, 지방 교회측은 (a) “아들이 성령을 보내셨다”라는 말씀 그대로 믿는다. (b) 그러나 그 아들과 성령은 각각 1/3씩이 아니라 ‘삼위 전체’라는 것이다. 즉 (a)은 성경이 삼위의 경륜적인 방면을 기록한 것이고, (b)는 삼위의 존재론적인 방면의 특성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김 목사처럼 이것을 ‘성자와 성령은 각각 1/3 위격이시고, 한 위격이 다른 위격을 보내면 둘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다.’라고 오해하는 것이 김홍기 목사같은 삼신론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단 교리의 소유자인가?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골1:27, 요일5:11)!

 


6. 과연 로레인 뵈트너, 찰스 핫지, 어거스틴 등의 말은 왜곡되었는가?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측이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위격 간의 기능적인 동일시’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 했던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수많은 정통 신학자들의 언급들(지난 #8 지방 교회측 글 참조)과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이 포함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용했던 어거스틴, A. H. 스트롱, 로뢰인 뵈트너 등에 대해 중구난방식으로 반론했다. 그러나 그의 부실한 반론글 안에는 ‘삼위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신 분’이라는 주장 등 김 목사 안에 잠재되어 있던 더 많은 심각한 문제점들이 밖으로 노출되고 있다. 이제 필요한 부분들에 대하여 차례로 반박 또는 비판해 보겠다.


1) 경륜적인 삼위일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 김 목사는 다수의 정통 신학자들이 인정해 온 <경륜적인 삼위일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라는 성경본문 해석기법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신실한 성경 교사들은 '주는 영이시니’(고후3:17)라는 본문을 우리의 구원을 다루는,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동일시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것은 결코 지방 교회측만의 견해가 아니다. 따라서 김 목사가 지금처럼 이런 해석법 자체를 이단시 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우리는 이 주제를 이미 여러번 변증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과 한국 복음주의신학회 회장을 역임한 박형용 박사께서 신학 지남 1978년 봄호(통권 180권) 28-39쪽에 발표한  내용을 재차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본다. 참고로 이 논문의 전문은 https://www.localchurch.kr/theology/23379 를 참조하기 바란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광범위한 문맥을 통해 관찰해 볼 때 “主는 靈이시다”(17a)라는 표현을 주관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적 역사적 전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동일시하는 것은 그 성격상 구속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 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라고 표현한 것이다.


2) 본질적인 방면에서의 위격의 동일시?: 지방 교회측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 하신 것도 김 목사가 양태론으로 보고 있다고 반박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김홍기 목사) 바울과 예수님은 지방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기능상으로 위격을 동일시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과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를 … 본질상 동일시하신 것이다.(9번 토론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1)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시다.’ 혹은 (2)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라고 할 수는 있어도, 김 목사의 주장처럼 (3) (본질상) ‘성자는 성부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질상) 주님은 성령이시다(고후3:17).”라고 하고, 주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요14:9)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인가?


김 목사는 자신의 이러한 이단적인 주장을 뒷받침 하려고 다음과 같은 웨인 그루뎀의 말을 인용 소개했다. “삼위일체 안의 구별된 삼위는 목적과 그들이 무엇을 생각할지에 관해 하나이실 뿐 아니라 본질이 하나 이시며 그들의 본성이 하나이시다”(Systematic Theology, 238). 그러나 이 웨인 그루뎀의 말은 위 (1) 혹은 (2)를 말한 것이지, 결코 (3)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위격’과 ‘본질’을 혼동하는 이단은 지방 교회측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이 동일 본질을 근거로 위격들을 동일시한 김홍기 목사 본인임이 드러난다.


3) 로레인 뵈트너: 지방 교회측은 로레인 뵈트너가 ‘주기도문에서의 아버지가 배타적으로 제 1격만이 아니라 삼일 하나님을 가리킨다.’라고 말한 것을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 삼위 전체라는 근거로 인용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김홍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먼저 그의 말을 소개한 후 뒤에서 반박해 보겠다.


(1) (김홍기 목사) ”(지방 교회측은) 뵈트너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한 인격’ 혹은 ‘한 신격’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교리 사기’이다. 왜냐하면 뵈트너가 사용한 표현(Triune God)은 ‘삼위 전체’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번역해야 옳기 때문이다. 정통 신학자들과 정통 교회가 ‘Triune God’(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삼위와 한 본질’의 하나님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지 ‘삼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


반박: 우리는 ‘주기도문에서의 “아버지”(Father)는 배타적으로 “삼위의 첫번째 위격만”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신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라고 한 뵈트너의 말을 근거로, ‘한 위격(예를 들어 성부)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 삼위 전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목사는 위와 같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를 참으로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해당 영어 본문을 보면 누구 말이 맞는지 분명해 질 것이다. 즉 아래 영어 원문은 Father … refer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이라고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이렇게 분명한 문장을 놓고 더 이상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hillipsburg, NJ: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p. 107


(2) (김홍기 목사) “위에 있는 지방 교회의 진술을 보면 “성부는 단지 제 1격만이 아니라 삼위 전체’라고 말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것은 뵈트너가 표현한 문장의 배열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전체, 즉 ‘한 인격’ 혹은 ‘한 신격’으로 둔갑시켜 놓으려고 한 교활한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뵈트너는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The Triune God is our Father)라고 표현을 했다. 이러한 문장 배열은 뵈트너가 이 말을 할 때 하나님의 위격과 관련지어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지어 말한 것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반박: 김 목사의 위와 같은 억지 주장 역시 Father … refer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라는 뵈트너 본인의 말에 의해 근거없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참고로 뵈트너는 위 책 바로 그 다음 장(p.10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어느  한 위격은 세 위격들 전체를 포함한 삼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지방 교회측의 주장을 더 확고하게 지지해 주고 있다.


The singular pronouns I, Thou, He and Him are applied to each of the three Persons; yet these same singular pronouns are applied to the Triune God who is composed of these three persons. Hence too much stress must not be laid on the mere term.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can be distinguished, but they cannot be separated.


뵈트너는 위 글에서 “단수 대명사들(나, 당신, 그, 그를)은 세 위격들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되지만, 또한 이러한 동일한 단수 대명사들은 이들 세 위격들로 이뤄진 삼일 하나님에게도 해당 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과 ‘세 위격들’이 동격임을 가리키고, 김 목사의 억지처럼 ‘하나님의 본성’을 가리킨 것이 결코 아니다. 김홍기 목사는 자기 양심상 뵈트너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성부 하나님은  세 위격들(three persons)이시다’라고 결코 고백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분리된 삼신론 기준에 따르면 ‘성부’는 오직 ‘성부’만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자신의 이러한 치부를 가리려고 여러가지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은 결국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찰스 하지: 지방 교회측은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고후3:17)에서 노먼 가이슬러가 여기서의 ‘주님’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 아래 두 곳의 찰스 하지의 견해를 인용 소개한 바 있다. 즉 찰스 하지는 아래에서 보듯이 가이슬러와 달리 위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주님은 그리스도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이것은 신약의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주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가리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 경우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주님이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4절에서 너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다고 하고, 16절에서는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킬 때 너울이 벗겨진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주님은 그 영이시다.(Charles Hodge, An Exposition of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859, 1980), p. 73


“주님은 그 영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 그분들은 하나이시며 같은 분이시다. Charles Hodge, An Exposition of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859, 1980), p. 74


그럼에도 김 목사는 이어지는 인용문에서 밑줄을 그어가며, 찰스 하지의 동일시는 지방 교회측처럼 ‘경륜적인 동일시’가 아니라 ‘동일 본질’에 근거한 동일시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같다. “주는 성령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 그들은 하나이시고 동일하시다. 하나이시고 동일한 위격이 아니라, 하나이시고 동일한 존재(Being)이시다.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의미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이것은 본질과 능력의 동일함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Charles Hodge, A commentary on 1 & 2 Corinthians, 73) (밑줄 강조는 필자의 것)”.


그런데 김 목사는 위 인용문에 이어서 갑자기 아래와 같이 분노에 찬 막말을 여과없이 쏟아내고 있다.


“(김홍기 목사) 지방 교회측은 아타나시우스와 찰스 하지를 포함한 더 많은 권위 있는 성경 교사들이 이 본문에서의 ‘주’는 예수님을,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한 점을 구체적인 출처 제시를 통해 밝히고 있다”(#8). 그러나 지방교회는 찰스 핫지가 지방교회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꼭꼭 숨겨 버린다. 그리고 마치 찰스 핫지가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 참으로 더럽고 비열하며 간교하고 요사스러운 ‘교리 전문 사기’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필자가 이 점을 이전의 글에서 위와 같은 찰스 핫지의 진술을 직접 인용하며 비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가증한 짓을 계속하고 있다. 참으로 ‘뻔뻔스럽고 요사스러운 이단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지방교회는 시간을 내어서 조금만 들춰보면 백일하에 드러날 명백한 교리 사기를 ‘상습적’으로 하면서 자신들을 비판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비정통과 이단으로 둔갑시키는 ‘간악한 교리적 테러리스트들’이다!(토론글 9번)”


그러나 지방 교회측은 찰스 하지의 위 내용을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을 소개할 때 서두에서, “이 문서에 다음의 글들이 인용되었다 해서 그것들이 각 항목의 해석에 있어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거나,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가 진리의 각 방면에서 그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출처들은 참으로 주 예수님을 그 영과 동일시하고 있다.”라는 안내문을 달았다.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responses/Geisler-Rhodes/scholars-on-Christ-being-the-Spirit.html


무슨 말인가 하면, 예를 들어 찰스 하지가 비록 다른 이유로 그렇게 말했을 수는 있지만, 1) 가이슬러와 달리  지방 교회측과 동일하게 고후3:17에서의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과, 2) 그리스도가 성령이시다 라고 둘을 동일시 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 교회측은 찰스 하지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과 다를 수 있음을 안내문으로 고지까지 해 놓았다. 그렇다면 지방 교회측은 김홍기 목사가 쏟아낸 “참으로 더럽고 비열하며 간교하고 요사스러운 ‘교리 전문 사기’”, “뻔뻔스럽고 요사스러운 이단”, ”악한 교리적 테러리스트들”이라는 막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 답지 못한 입에 담지 못할 이런 거친 표현들을, 그 말을 한 김홍기 목사 본인에게 고스란히 돌려줄 수밖에 없다. 아울러 남은 토론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답게 써줄 것을 김홍기 목사에게 재차 정중하게 요청한다.


어거스틴: 김홍기 목사는 아래에서 어거스틴이 말한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라는 말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 삼위를 논한 것”이라고 했다.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299쪽).


그러나 지방 교회측은 위 어거스틴의 말을 ‘그들 자체가 무한하시다’라는 속성과 관련하여 제시한 것이 아니다. 김 목사는 지금 엉뚱한 해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방 교회측은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 삼위 전체’이심을 어거스틴의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all in each)는 말을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어거스틴은 인용문 바로 앞에서 하나을 합한 것 만하며, 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지금 신적 본성이 아니라 ‘위격들’을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성을 말하면서 ‘하나’, '둘’ 혹은 ‘셋’이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김 목사도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다음과 같이 유치한 표현까지 섞어가며 자신의 초점이 빗나간 반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김홍기 목사) 지방교회여, 유치하고 어리석은 비몽사몽 중에서, 꿈 깨! 이런 말이 당신들의 귀에 노랫가락 소리와 함께 쟁쟁하게 들리지도 않는가? “어거스틴과 김홍기 목사는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삼위는 상호내주하신다고 믿는 바가 동일하다고 전해라!” 성령이 신자들 안에 거하시면 본질적으로 성부-성자-성령 삼위가 다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는 구별이 되시나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기 때문이다(9번 토론글 중에서).


그러나 김 목사는 위에서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모든 위격(all)이 각 위격(each) 안에 거하심으로 ‘어느 한 위격은 삼위 전체와 동일하다.’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지방 교회측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롱할 이유가 없다.


웨인 그루뎀: 김홍기 목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빌려 삼위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한 삼위 전체라는 아래와 같은 정통 신학자인 어거스틴의 말을 뒤집고 싶어하는 것같다. 그러나 오히려 웨인 그루뎀은 김 목사의 의도와 달리, 아래의 어거스틴과 동일한 말을 하고 있다.


삼위일체 내의 어느 한 위격도 전체 삼위일체보다 더 작지 않으시다. 삼위일체의 존재양식은 하나님의 실체 자체와 동일하다. 각 위격은 신적 존재 전체와 동일하시고, 또 다른 두 위격을 합한 것이나 세 위격 전체와도 동일하시다. 이 세 위격은 모두 합하여 각자와 동일하다(김석환, 위의 책,  300쪽).


그럼에도 김 목사는 “정통 교리는 “아들이 삼위 전체”라는 말이나 “아버지가 삼위 전체”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한 위격이 삼 위격 전체’가 된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태론적인 언어와 개념이기 때문이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분리된 삼신론적 관념을 계속 붙들고 있다. 만일 김 목사의 위 말에 따르면 당장 “각 위격은 신적 존재 전체와 동일하시다.”라고 말한 정통 신학자인 어거스틴도 양태론자가 되고 만다. 그는 “만약 한 위격을 전체와 관련시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 혹은 본성 혹은 존재와 관련되어야 한다.”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은 왜 “또 다른 두 위격을 합한 것이나 세 위격 전체와도 동일하시다.”라고 본질이 아니라 ‘위격’을 자꾸 거론하고 있는가?


김 목사는 아래에 인용된 웨인 그루뎀의 말인 “각 위격은 완전히 하나님이시다’라는 명제를 논하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본성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Ibid., 233-38)”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웨인 그루뎀은 해당 부분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며 각 위격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려고 했지, 하나님의 본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아래 김 목사가 인용한 웨인 그루뎀의  진술은 오히려 각 위격을 분리시켜 1/3 하나님으로 보고 있는 김홍기 목사의 삼신론적인 견해를 경고하고 있다. 또한 웨인 그루뎀은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한 하나님의 전 존재를 소유한다.”라고 위 어거스틴 그리고 지방 교회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 혹은 단지 하나님의 삼분의 일이 아니시다. 아들은 완전히 그리고 충분히 하나님(wholly and fully God)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성령도 그러하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각 위가 하나님의 오직 삼분의 일임을 나타내는 도표 14.1에 따라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 도리어 우리는 아버지의 위격은 그분 자신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whole being of God)를 소유하신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들은 그분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를 소유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그분 안에 하나님의 전 존재를 소유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함께 말할 때 우리는 아버지 혼자, 혹은 아들 혼자, 혹은 성령 혼자에 관해서 말할 때보다 어떤 더 큰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 아들 역시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이시다(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52).


김홍기 목사는 자신의 이단적인 신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가져와 소개하고 있지만 위에서 보듯이 결과는 늘 지방 교회측의 관점이 정통이고, 김 목사의 관점이 비성경적이고 비정통임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다. 웨인 그루뎀이 김홍기 목사 같은 이들이 삼신론 이단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위의 책, 248쪽).

 


7. 삼위께서 공간적으로 분리된다고 말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삼신론 이단을 주장하는 김홍기 목사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측이 지난 8회 토론글에서 노먼 가이슬러에 대해서 비판하자 그를 대리하여 반론 하면서 놀라운 말을 하고 있다. 즉 지방 교회측이 “그 결과 이들[가이슬러 박사와 김홍기 목사]은 변명의 여지마저 ‘구조적’으로 차단된 분리된 세 하나님들’ 신봉자가 되었다.”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 “결국 이 말은 ‘위격들의 공간적 분리’를 묘사한 성경의 진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것이 된다.”라고 반응했다. 이 말은 자신들이 삼위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 세 위격들’을 정통 삼위일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엉겁결에 실토한 것과 같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에게 본 토론 첫번 째 글에서 제목으로 다뤘던 동일한 취지의 질문을 해 보겠다. 귀하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공간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시는 분들”이라고 참으로 믿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귀하는 명실 상부한 삼신론 이단 신봉자이다. 신 구약 성경 어디에도 삼위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신다는 기록이 없다. 왜냐하면 삼위는 영원토록 서로 안에 내주하시는 한 신격(Godhead)이신 분 즉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김 목사의 인간적인 생각처럼 (성자는 이 땅에, 성부는 저 하늘에) ‘공간적으로 분리’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여전히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고”(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요1:18), 또한 ‘하늘에 계셨다’(“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the Son of Man, who is in heaven)(요3:13)라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성부께서도 성자를 보내셨지만, 여전히 이 땅 위에 오신 성자 안에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즉 주 예수님은 “내가 판단할지라도 내 판단은 참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요8:16). 또한 주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 내용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요17:21).


이처럼 존재론적인 면에서 서로 안에 상호 내주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결코 공간적으로 분리되실 수도 없고 분리되신 적도 없다. 만일 어떤 외부 여건이나 상황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각각 분리되신다면, 그런 하나님은 참 지존자가 아니시다. 삼위를 공간적으로 분리되실 수 있고 또 분리되셨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무소부재’하심(욥11:7-10; 시145:3, 139:5-12, 66:1, 왕상8:27, 렘17:27, 28엡4:6)마저 부인하는 참람한 이단 사상이다.

 


8.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김홍기 목사의 우문 (愚問)들


김홍기 목사는 자신의 삼위를 각각 분리시키는 삼신론적인 사고로 인해 아래와 같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는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거듭 지적해 온 것처럼 김 목사가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논의되어 온 방면들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김 목사가 아래에서 지적한 구절들은 다 우리의 구원의 경륜과 관련해서 삼위께서 거치신 과정들을 묘사하는 내용들이다. 즉 삼위는 경륜적으로 한 위격이 다른 위격을 보내시고, 사람으로 오신 위격이 죽음을 거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시지만,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는 늘 동시 존재하시고 서로 안에 거하심으로 분리나 승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삼위일체론을 균형있게 인식하는 이들의 상식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이러한 경륜적인 방면의 본문들을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착각함으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씩 차례로 반론해 보겠다.


(김홍기 목사) ”성경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은 준(準)삼신론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요 6:57). 리에 의하면 이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준삼신론이다. 또한 이 말씀대로 설교하고 가르치면 준삼신론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기 때문이다.”


반론: 성경 말씀이 준삼신론일 수가 있는가? 성부가 성자를 보냈으니 두 분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이라고 착각하는 김 목사의 그 잘못된 사상이 준삼신론일 뿐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경륜적으로는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지만, 또한 분리되실 수 없는 존재론적 특성상 한 위격이 오실 때 다른 두 위격들도 함께 오셨다(요8:16, 29, 16:32).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성부와 성자는 결코 분리되실 수 없고 또한 한번도 분리되신 적이 없으시다.


(김홍기 목사)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리에 의하면 이 말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준삼신론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하고 가르치면 준삼신론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기 때문이다.”


반론: 이 역시 동일한 착각에서 나온 우문일 뿐이다. 주님은 존재론적으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신다(요14:10-11, 17:21). 따라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실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신 속성을 보더라도 삼위께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신 위격’이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참람한 삼신론 이단 사상이다.


(김홍기 목사)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리에 의하면 이 말씀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준삼신론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하고 가르치면 준삼신론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기 때문이다.


반론: ‘어느 한 위격이 오실 때, 다른 두 위격들이 포함된 삼위 전체가 오신다’라는 어거스틴, 스트롱, 불(Bull) 주교 등이 말한 정통 삼위일체론만 붙들어도 이러한 우문이 나올 수가 없다. 이런 발상 자체가 김 목사가 세 분리된 위격들을 신봉한다는 간접 증거이다.


(김홍기 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리에 의하면 이 말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준삼신론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하고 가르치면 준삼신론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위격’을 말하기 때문이다.


반론: 이 역시 경륜적인 방면의 본문이며, 존재론적으로 성부와 성자는 영원토록 서로 안에 거하심으로 분리되실 수 없다.

 


9. 위격이 동일하다고 말하면 무조건 양태론인가?


김홍기 목사는 자신의 아홉 번째 토론글에서 이미 반박 또는 해명된 아래와 같은 말들을 재차 거론하며 양태론 이단 교리라고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김 목사가 현재와 같은 혼동에서 구출받고 바른 삼위일체론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몇 번이라도 재차 설명할 용의가 있다.


(김홍기 목사): (인용 시작) “(1)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성령이시다. ... 그리고 아들이실 뿐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이신 주 예수님.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고, 그는 또한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할렐루야!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73), pp. 18-19


(2) 성령이시고, 그분은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또한 주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이시며 성령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시다(Witness Lee, The Clear Scriptural Revelation Concerning the Triune God)


(3) 삼십여 년 전 상해에서 워치만 니 형제는 이 구절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17절에 있는 ‘그’(성령)는 18절에 있는 ‘나’(주)인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언급했다. ... 워치만 니 형제는 찬송가 490장(LSM 출간 영어 찬송가-한국복음서원 찬송가 368장) 5절에서 ‘주님, 당신은 전에 아버지로 칭함을 받으셨지만, 지금은 성령으로 칭함을 받으신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워치만 니는 그의 찬송에서 주님을 성령으로만 아니라 아버지로도 칭했다.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0)


이렇게 이곳 저곳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하며 아들과 성령이 동일하다고 나팔을 불고 다녔는데 여기서는 맞고 저기서는 그렇지 않다고? <삼위 전체>를 말했건 무엇을 말했건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을 ‘한 인격’(a person) 혹은 ‘한 신격’이시라 말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것이 양태론 이단 교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인용 끝)


반론: 먼저 우리는 ‘주는 영이시니’(고후3:17)처럼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는 지방 교회측 만이 아니라 권위있는 신학자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해석 방식임을 지적해 왔다. 김 목사가 인용 소개한 위 (1)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 김 목사는 주 예수님께서 ‘나=아버지’이시라고 두 위격을 동일시 하신 것을 ‘본질이 같다’는 전제 하에 동일시 하신 것이라고 본인도 주장해 놓고 ‘아들과 아버지를 동일하다고’ 말하면 무조건 양태론 이단이라고 우기는 것은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진 것이 아닌가?


또한 거듭 설명한 것처럼 ‘한 신격’(데오테스)이신 삼위 하나님(웨민 신조2:3)은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시는 유일무이한 창조주 하나님(God)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위 (2)는 이러한 한 신격 개념에 기초한 언급임을 이해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김 목사는 이러한 한 ‘신격’ 개념에 무지하여 심지어 ‘세 위격들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신다.’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삼신론 이단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것은 자신이 웨인 그루뎀이 경고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단일성’(the unity of God as one undivided being)을 손상시킨(웨인그루뎀, 조직신학, 248쪽) “많은 복음주의자들” 중 하나임을 스스로 실토한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웨인 그루뎀이 말한 ‘분리’는 ‘본성의 분리’가 아니라 ‘존재의 분리’이다. 왜냐하면 이 경고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인데, 이런 명칭으로 불리려면 최소한 삼위께서 본성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정도의 상식을 갖췄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통 삼위일체에 따르면,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한 삼위 전체’이심으로 예를 들어 우리 안에 오신 분을 ‘성령’이라고 해도 맞고, ‘아들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즉 우리가 믿을 때 영접한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주요 남편이시다. 단지 경륜적인 성취의 시간 차이에 따라 창조와 구속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실재로 체험되는 것에도 시간 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위 (3)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반 독자들은 이런 쌍방의 토론글을 대할 때 너무 복잡하게 느껴지고, 좀더 쉽게 설명이 안 될까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 있다. 이런 필요를 감안해서 좀 더 쉽게 논점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지방 교회측은 성경 도처에 언급된 ‘하나님’(God)을,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잘 정의해 놓은 대로 “1).한 신격 안에서 2).동일 본성을 공유 하시는 3).세 위격들”이라고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김홍기 목사는 2)와 3)은 공감하되, 1)을 말하면 양태론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 쟁점이다.


그러나 위 영어사전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 즉 ‘신격’(골2:9의  ‘데오테스’)에 해당되는 ‘Godhead’는 “우주의 창조주 또는 통치자로 경배받으시는 지존자” 혹은 성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성령의 거룩한 삼위일체 이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는 성경의 계시 그리고 위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 혹은 ‘여호와’라는 단어를 읽을 때, 이것을 ‘성부 하나님만’(여호와의 증인들), 혹은 ‘알라와 동일인’(Wheaton 대학 종신 여교수), 혹은 ‘신성’(김홍기 목사)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대신에 성경 도처에서 언급된 ‘하나님’(God)은 “성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성령의 거룩한 삼위일체”라고 이해 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간단한 문제를 놓고 이토록 긴 토론이 필요한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가이슬러나 김홍기 목사가 자랑하는 철학과 신학적 성취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마16:17, 엡1:17)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소의 사울’과 ‘바울’ 간의 대립인 것이다. 주님께서 김홍기 목사의 눈을 뜨게 하사, 그가 ‘어둠에서 빛으로’의 놀라운 전환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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