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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에 뿌리내린 음녀의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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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에 뿌리내린 음녀의 누룩??

 

김OO


저는 미국 플러턴교회 생활을 하는 한 작은 형제입니다. 한국의 '디시피 코리아'(DCP Korea) 출판사로부터 현재 말씀보존학회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지방교회에 뿌리내린 음녀의 누룩>이란 글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글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1995년 12월호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제가 그 글을 쓴 김OO 형제(지금은 말씀보존학회를 떠나 진리침례교회를 개척하여 목사가 된)에게 항의 메일을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을 부탁받으면서 제가 들은 약간의 배경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실 자체가 심각하게 왜곡된 위 글이 인터넷 검색에서 오랫동안 상위를 차지하며 지방교회 측에 대한 거짓된 정보를 유포하고 있기에, 출처를 관리하는 쪽에 글을 삭제할 수 있는지를 문의했고, 담당이신 이OO 이사님으로부터 다음 두 가지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 성경을 근거로 옳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달라.
2. 검토해 보고 타당하다면, 월간지와 싸이트에 올리겠다.


위 문제의 글은 현재 말씀보존학회 홈페이지(지식뱅크-이단연구)에 편집부의 이름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쓴 분은 글을 쓴지 2년 후 쯤인 1997년 5월경 말씀보존학회를 떠났고, 현재는 쌍방간에 친밀한 교류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홈페이지에 따르면 해당 교회는 정동수 님의 '흠정역'을 선호함). 이런 다소 애매한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 반박 또는 해명 글을 쓰는 것이 합당할지를 잠시 고민해 보았습니다. 글쓴이가 "지방교회에 1년 이상 몸담고 있었으며 3년 이상 위트니스 리의 회복역 신약주석 성경, 라이프 스타디,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비롯한 100여 권의 단행본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그런 사람이 지방교회 측의 "핵심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저의 반박 상대는 말씀보존학회 편집부가 아닌 글을 쓴 장본인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방향 설정에 대해 미리 말씀보존학회 측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문제의 글은 제법 긴 서론 외에 네 가지 항목들(최종권위, 성경해석, 교리, 지방입장)을 본론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후 말미에서 "삼일 하나님,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징계와 보상, 종말론, 성령과 사람의 영" 등에 대해서도 추후 글을 쓸 것처럼 말했지만, 그 약속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말씀보존학회에 2년 가량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방교회에서 1년 가량 생활하다가 떠난 후 부정확한 인식을 토대로 근거없는 비판을 했듯이, 역시 자신의 짧은 경험을 토대로 말씀보존학회 측을 비판하는 위치에 현재 있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앞으로 추가 비판이 있을 경우 그 때 재차 다루더라도, 이 글에서는 글쓴이가 다뤘던 1. 최종권위 문제, 2. 성경해석 문제, 3. 교리에 대한 태도 문제, 4. 교회의 지방적인 입장 문제만을 반박 대상으로 하겠습니다.


전반적으로, 김OO 목사님께서 지방교회 측을 비판하신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실'(fact)을 왜곡한 것에 있습니다. 아울러 '최종권위' 문제는 본인 자신도 나중에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이며, 요한복음 14장 2절 '아버지 집(안의 처소)'에 대한 성경 해석은 오히려 비판하는 쪽의 진리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항목 별로 차례로 다뤄 보겠습니다.


1. 최종권위 문제


'최종권위'라는 말 자체가 킹제임스 성경진영 외의 분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인터넷 상에서 이 최종권위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 내용들을 처음부터 지켜보아 왔습니다. 이러한 관찰에 따르면, 킹제임스 진영이 말하는 '최종권위'란 교리 해석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번역 성경 간에 본문 내용에 차이가 있을 때는 <1611년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최종권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OO 목사님은 문제의 글을 쓸 당시에는 한글로 처음 번역되었고 유일하게 변개가 안 되었다는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한국인들'에게는 최종권위이다 라는 입장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미 많이 알려진 것처럼,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송오역) 외에도 권위역(박만수역), 흠정역(정동수역), KJV 완역한글판(서달석역), 공인역(이일배역) 등 킹제임스 한글 성경의 복수화가 이뤄진 이후, 과연 그 중에서 어떤 한글 번역본이 최종권위인가 하는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최종권위 문제로 남을 정죄하려면, 최소한 킹제임스 진영 자체 내에서 먼저 이에 대한 통일된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이 최종권위 문제로 지방교회 측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김OO 목사님께 질문드리고자 합니다. 김 목사님은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 외에, '한국인에게는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만이 변개되지 않은 유일한 최종권위의 성경이다'라는 20년 전의 입장을 지금도 고수하고 계신지요? 만일 어떤 이유로든 지금은 그런 입장을 버렸다면, 김 목사님의 글 중에서 최소한 이 부분 또한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참고로 김OO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진리침례교회 홈페이지는 지역교회 안내 란에서 정동수 목사님이 관리하시는 것으로 알려진 "KeepBible을 참조"하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은 김 목사님의 최종 권위에 대한 위 글을 쓸 때의 입장이 지금은 바뀐 것은 아닌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끝으로, 김OO 목사님은 '지방교회' 개념 자체를 크게 오해하고 계십니다(자세한 것은 '지방입장'을 다룰 때 언급할 것임). 부득이 말씀 드리자면, 저는 "지방교회 생활 30년 이상, 수백 권의 관련 책들"을 읽었지만, 지방교회 측이 "성경보다 교회에 더 권위를 두는 경우"를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김OO 목사님께서 지방교회 측과 로마 카톨릭 교회를 억지로 연관지은 후 아래 글에서처럼 이런 저런 비판을 하신 것은 전부 팩트가 없는 거짓말들입니다. 성경은 "거짓된 것을 벗어 버리고, 각자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엡 4:25).


"지방교회는 마태복음 13:33의 여인이 계시록 17장의 음녀이며 이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이 면에서는 모든 개신교회들보다 앞서 있는 셈이다. 문제는 지방교회도 역시 자기들의 "지방교회"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교회로 내세우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교회에 더 권위를 두고, 결국은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하나님께서는 지방교회만을 통해서 진리를 계시 하시고 따라서 지방교회만이 성경의 올바른 해석자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2. 성경해석


위트니스 리는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성경은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즉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불합리할 때만 예외적으로(예를 들어 '어린양'(요 1:29))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라고 가르칩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김OO 목사님은 그것을 완전히 '반대로' 왜곡시켜 놓고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 자체를 왜곡시킨 경우는 성경 근거를 제시할 사안도 못 되고 단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면 족합니다. 그 후의 판단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독자분들에게 맡기면 될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들에서 공공연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비유적으로(Allegorically and Spiritually)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밝히고 있다"(김OO).


"제 4장 성경 해석의 원리… 첫 번째 원칙은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쓰게 하실 때 하나님은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를 초월하여 영적인 해석으로만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말씀의 글 뜻 그대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원칙을 붙들어야 하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고수해야 한다… 다만 어떤 환상이나 예언, 비유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불합리한 때만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위트니스 리,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한국복음서원, 1991년, 58-61쪽). (성경 해석의 원리 전문 https://www.localchurch.kr/3815)


또한 김 목사님은 문제의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요한복음 14장 2절의 '처소'(place)가 물질적인 새 예루살렘 성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의 영'이라고 잘못 영해했고, 3절에서의 '다시 오면'도 주님의 재림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뤄졌다'라고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해석을 심지어 오리겐 등 알렉산드리아 성경변개자들의 해석방법이라고 함으로 성경변개 문제와도 연관을 지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쟁점은 요한복음 14장 2절의 아버지 집에 있는 '거할 곳'(처소)이 물질적인 장소인가 아니면 영적인 실체인가, 또한 '다시 오심'이 재림인가 아니면 부활 이후 생명주는 영이 되신 주님(고전 15:45)께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새 예루살렘(계 21:2, 9-10)이 진짜 금으로 된 물질적인 성인지 아니면 생명의 유기체인지 여부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쌍방의 진리해석 상의 이견에 대해, 먼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 측의 입장을 소개하고, 후에 김OO 목사님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으로 반박해 보겠습니다.


우선 전후 문맥을 볼 때, 요한복음 14장 2절의 '거할 곳'과 '처소'(a place)는 모두 바로 앞의 '나의 아버지 집'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처소' 혹은 '거할 곳'이 어디인지는 아버지 집이 과연 무엇이며, 어디 있는지를 밝히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 2절의 '거할 곳'은 헬라어로 '모네'(3438)인데, 같은 장 23절에서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라는 문맥에서 재차 사용 되었습니다. 또한 20절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내주를 말하는데, 여기서의 그 날은 '부활'의 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14장 문맥 전체에서 볼 때, 아버지의 집 혹은 그 안의 거처나 '처소'는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같은 물질적인 장소가 아닌 영적인 유기체입니다.


성경에서 이처럼 아버지의 집이 '물질적인 장소' 개념에서 영적인 '유기체' 개념으로 전환된 것은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내 아버지 집)을 허십시오.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것입니다"(요 2:19)라고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땅에 있는 물질적인 성전을 생각했지만, 주 예수님은 성전 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유기체로서의 성전 즉 아버지 집 개념은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 성도들이 포함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하나님의 집이 곧 하나님의 교회이다'(딤전 3:15). '그분 안에서 건축물 전체가 함께 연결되어 자람으로써, 주님 안에서 성전이 되고 있다'(엡 2:21)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과 해석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결코 김 목사님 비판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성경 변개자들" 같은 엉터리 영해가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을 위해 마련되고 있다는 '처소'가 문자적으로 저 하늘 어디쯤에 있을 '물질적인 장소'라는 김 목사님의 주장의 모순을 가장 쉬운 방법으로 지적해 보겠습니다. 김 목사님은 말씀보존학회 출신이시니 주님의 재림이 이미 휴거되었던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지상 재림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유 14, 15, 행 1:11). 또한 재림 후에는 지상에서 천년 왕국이 있게 될 것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짧은 시간에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짓고 계신다는 그 물질적인 '처소'의 정체성도 문제지만, 설사 완공된 후에도 성도들은 그 처소를 비워둔 채 예수님과 함께 다시 지상으로 내려 와야 합니다. 또한 그 처소가 진짜 금으로 이뤄진 물질적인 건축물인 새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면, 어린양이신 주 예수님은 금덩어리 신부와 결혼하셔야 하는 모순에 봉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적인 금이 아니라 정금처럼 변화된 이기는 자 즉 사람이 그 새 예루살렘의 기둥이라고 말씀합니다(계 3:12, 고전 3:12-13). 따라서 이처럼 전혀 다른 쌍방의 성경 해석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바른 성경 해석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두고자 합니다.


김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삼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최종권위로 삼는 헬라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입각해… 성경을 뜯어 고쳤고 그 산물이 바로 오늘날 <킹제임스 성경>(영어의 경우)과 <한글 킹제임스 성경>(한글의 경우)을 제외한 모든 변개된 성서들이다. 따라서 최종권위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지 못한 지방교회가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을 택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교회 홈페이지에서는 "덕(virtue)을 갖추지 못한 채 지식만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시행착오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서" 1997년 5월에 진리침례교회를 개척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의 글을 쓸 당시에 자신이 몸 담았던 단체를 겨냥한 말처럼 들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과거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한 셈입니다.


3. 교리에 대한 태도


위트니스 리는 '교리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앙을 구성하는 '핵심진리'(유 1:3)는 힘써 싸워 지키되, 침례, 세례 등과 같은 '지엽적인 진리 항목들'에 대해서는 서로를 용납하는 융통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교회 생활의 특수성, 일반성, 실행성' 참조). 이것은 지방교회 측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따라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골 3:4)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고 거처를 확대해 가심으로(엡 3:17) 그분의 몸이요 한 새사람의 완결인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1:9-10)(김OO 목사님은 이것을 "지방교회의 최종 목표는 모든 교파가 해체되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한 지방에 하나의 교회로 단합하는 것이다"라고 왜곡시킴). 즉 저희는 한 몸 안의 지체들끼리 지엽적인 교리를 가지고 끝없이 싸우고 분열되는 것보다는, 모든 일에 겸허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짐으로써 몸의 하나(엡 4:4)와 성령의 하나를 지키는 것(엡 4:3)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방교회 측의 지극히 성경적인 자세를 김 목사님은 엉뚱하게도 "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태도"라는 식으로 반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누룩이라고 부르시면서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것" 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는 '위선'과 '부활과 천사들과 영을 부정하는 것'을 가리킴으로, 베드로가 보았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마 16:16)과 그분의 몸인 교회(18절)를 중심 삼는 지방교회 측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김 목사님 주장처럼 '환란 전 휴거'니 '환란 후 휴거'니 하는 교리 논쟁을 하고, 소위 간격 이론이 관련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어떤 표현을 놓고 신경전을 벌임으로 점점 분열이 고착화되는 킹제임스 진영의 현실이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김 목사님은 문제의 글에서 다른 동료 믿는 이들인 지방교회 측 성도들을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정과 자기 최면에 걸린 사람들"로 함부로 폄하하셨습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의 그러한 교리 지상주의 사고방식이 본인의 고백처럼 "덕(virtue)을 갖추지 못한 채 지식만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시행착오"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보셨으면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건축합니다(고전 8:1).


4. 교회의 지방적 입장


적지 않은 분들이 혼동하는 항목이 바로 이 '교회의 지방적인 입장'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방 입장'이란 모든 거듭난 믿는 이들로 이뤄진 주님의 몸인 교회(마 16:18, 엡 4:4)가 시공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 어떤 기준을 범위로 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주장하는 것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는 말씀처럼 각 교회는 '고린도', '예루살렘'(행 8:1), '안디옥'(행 13:1),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계 1:11)와 같이 '한 도시에 한 개의 교회'로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 도시들이 포함된 도(道) 개념인 '갈라디아'의 경우는 성경은 '갈라디아 교회들'(갈 1:2)처럼 복수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신약 서신서들은 거의 대부분 이 원칙을 따라 수신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측은 '지방(city) 단위의 각 교회 원칙'을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원칙을 따를지 여부는 각자의 신앙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본 빛에 따라 결정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 이런 지방 입장이 틀렸다고 하려면 더 성경적인 원칙을 제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김OO 목사님은 원칙도 일관성도 없는 여러 말로 지방 입장을 비판하셨습니다. 이제 그러한 비판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뒤에 저의 의견을 달아 보겠습니다.


(김OO) "그러나 문제는 워치만 니 형제가 그리스도의 몸 된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각 지역에 세워지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는 고린도 성읍에 살고 있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 즉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고린도에 세워진 단 하나의 지역교회(local church)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당시 지역교회가 하나밖에 안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후 여러 개의 지역 교회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 (저의 의견) 위 비판은 근거 없는 '추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방에 있는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곧 그 지방의 '지역 교회'인데, 이 둘을 나누는 것도 성경에 근거가 없고 현재의 분열된 상황을 감안한 타협적인 발상일 뿐입니다.


(김OO) "갈라디아서 1:2의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은 그야말로 지역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교회"라는 단어는 주님의 몸 된, 보이지 않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엡 5장), 구약의 불러낸 무리인 이스라엘(행 7장), 이교도들의 성전(행 19:37), 지역교회들(갈 1:2)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문맥을 살펴 확인해야만 한다." --- (저의 의견) 이 말도 역사적 교회들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입니다. 갈라디아라는 도(道) 단위 지역 안에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등과 같은 여러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 도시들 안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기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교회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여 지칭한 것입니다. 이 말이 한 도시 안에 여러 지역교회들이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구약의 에클레시아 개념과 신약에서 성령과 연합된 실재를 갖는 신약교회는 구별되어야 하며, 신약의 서신서는 다 그 당시 현존하던 신약 교회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김OO) "지방교회는 현재 서울에만 10개가 넘는 집회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서울 교회"라는 이름 하나만 사용하고 집회모임은 따로 갖는다. 함께 모여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데도 이름만 하나로 갖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 (저의 의견) 하나의 교회란 꼭 한 곳에 다 모여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수많은 가정들에서 따로 모여 떡을 떼었지만(행 2:46) 성령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the Church which was at Jerusalem)라고 단수로 표시했습니다(행 8:1). 왜냐하면 각 교회는 각 도시 단위인데, 그 단위 별로 장로들을 임명하는 것이 사도들이 세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행 14:23, 딛 1:5 비교 참조).


(김OO) "필자도 한 때는 한국 교회들의 분열을 놓고 마음 아파하다가 이 지방적 입장의 교리가 성경적이고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천안교회"에 합류하여 생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온전한 성경을 통해서 오늘의 축복된 자리로 인도해 주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저의 의견) 그런데 왜 지금은 주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그 "축복된 자리"에 계속 계시지 않으십니까?


(김OO) "바울이 자기 민족의 구원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필자도 한때 함께했던 지방교회 형제 자매들이 진리로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면상 더 자세히 더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짚고 넘어간 것 같다." --- (저의 의견) '계란 껍질'은 병아리가 부화하기 까지 흰자와 노른자를 보호하는 데는 요긴하나, '부화된 병아리'가 출현하면 계란 껍질은 쓸모 없게 됩니다. 김 목사님이 중요시 하신 지방 입장은 계란 껍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 성도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최고의 인격체이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골 1:27). 그리고 그분의 몸과 그 몸의 완결인 새 예루살렘입니다(엡 4:16, 계 21:2). 김 목사님은 겨우 1년만 생활하시다 보니 '계란 껍질'만 아시고 '부화된 병아리'의 고귀함은 보지 못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김OO 목사님이 비판하신 존 넬슨 다아비는 성공회 사제였지만 하나님께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심을 보고(계 2:6), 성직자의 지위를 버리고 평범한 형제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정반대로 한 때는 형제이셨지만 이제는 목사로 불리는 신분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만일 지금의 그 목사직이 에베소서 4장 11절의 원문(포이에마)처럼 '목자'로서 성도를 목양하고 가르치는 의미라면 호칭은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담임 목사로서 다른 형제 자매님들이 조금이라도 높이 보는 위치에 계신다면 그것이 바로 목사님이 비판하시는 '음녀의 누룩'일 수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 혹시라도 필요 이상으로 김 목사님을 폄하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구합니다. 아울러 대승적 차원에서 이러한 반박 또는 해명의 기회를 허락해 주신 말씀보존학회 측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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