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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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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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9-2)

 


4. 정통교회사적인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


(이인규님) ”그렇다면 정통 교회사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회사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곧 양태론을 의미하였다.


#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사벨리우스주의를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부른다. 혹은 문제의 기능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외부관계를 '운영하시는' 방식을 가르키므로, '경륜적 삼위일체'이라고 부른다.(문자적으로 '가정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말)"(윌리스턴 워커의 기독교회사, 101-102쪽) 게다가 지방교회가 정통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4세기 이후에 한번도 정통신학인 적이 없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 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이인규님의 “교회사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곧 양태론을 의미하였다.”라는 말은 심각한 사실 왜곡이자 치명적인 거짓말입니다. 아래 자료들은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깔뱅 등등의 개혁자들은 주로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더 강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주축을 이루는 개혁 신학자들이 다 양태론 이단자들이란 말입니까?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이인규님의 거짓말과 달리, 아래 자료들은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현재에도 신학계 내에서 삼위일체 연구와 관련하여 활발하게 거론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료1) 이승구 교수는 자신의 <개혁신학 탐구>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핵심 요지는 “우리가 고전적 관점에서의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본대로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이다.”라는 것입니다.


http://www.hapdong.ac.kr/home/bbs/board.php?bo_table=e10&wr_id=214


자료2)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깔뱅 등등의 개혁자들은 주로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더 강조하며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사변적 논의들"을 경계한다.”


http://www.global-kangdongcampuswww.sisa21.co.kr/search.php?query=%EB%B0%B1%EC%B6%A9%ED%98%84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초대교회 교부들도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정통삼위일체이다라고 말한다. 즉 초대교회 교부들이 사용했던 용어이므로, 무조건 정통삼위일체라는 주장이다. 지방교회와 같은 주장이 곧 양태론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음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은 인격들(persons), 얼굴들(faces), 가면들(masks)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빌어서 세 위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ce)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후 같은 세기의 사벨리우스는 터툴리언의 개념으로부터 약간 애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론(이는 문자적으로 아버지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신고난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과 같은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 그는 세 개의 구별된 실체들이 한 신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성부의 형태, 성자의 형태, 성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참조: 물, 얼음, 수증기와 같이 유사성을 갖는 세 인격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가폐 성경사전 779쪽)


지방 교회측과 달리, 사벨리우스는 존재론적인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면서 양태론적인 주장을 함으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위 말은 지방 교회측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 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지방 교회측과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캘빈은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와 논쟁을 하엿던 적이 있었다. 그는 지방교회와 동일하게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였으며, 양태론자였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하다. 일면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베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34쪽)


지방 교회측과 아무 상관도 없는 말입니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세 위격을 삼중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 셋이 언제나 함께 한 공간 안에만 국한되어있다고 믿음으로서 실제적으로는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이 말하는 삼중적이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공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지방교회는 구약에서는 외부적으로 하나님만이 사역하셨고,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예수로 오셨다고 보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결국 육신을 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며, 죽음과 부활 후에는 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삼위는 결국 하나님 자신이 거치고 변화되는 단계와 과정을 의미한다. 그들의 상호내재란 삼중적인 요소이며,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인격이 아니고, 즉 양태론을 위장하기 위한 추상적인 변명일 뿐이다.


이 역시 지방 교회측이 믿는 바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인규님의 공허한 거짓 주장일 뿐입니다.


다음과 같은 몇 군데의 위트니스 리의 1차 자료 인용만으로도 지방 교회측이 양태론이라는 이인규님의 거짓정죄는 사실이 아닌 것이 증명되고도 남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 (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288쪽)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 내재함이 모두 있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310쪽)

 


5. 상호내재


(이인규님)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상호내재란 "페리코레시스"라고 한다. 그것을 지방교회는 상호내재라고 하는 장소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는 종속주의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논리이다. 즉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적본질을 가졌다는 주장으로 종속주의를 무색하게 만드는 그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논리였다. 그러나 상호내재는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던 논리였으며, 실제로 양태론자들이 그 용어를 악용하였던 것이다.


상호내재는 요14:10-11에 따른 것이며 삼위 중 셋을 강조하는 쪽이 삼신론이 되지 않고, 하나를 강조하는 쪽이 양태론이 되지 않는 일종의 안전장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은 지속적으로 이 개념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그 자체가 정통 삼위일체와 거리가 있는 신론을 신봉한다는 간접 증거입니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 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위 본문은 상호내재 개념은 계속 다듬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지 이인규님처럼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인규님)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페리코레시스를 상호내재라고 하는 장소적인 개념으로 보았으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 개념을 장소적 개념뿐 아니라, 상호상통, 상호교류라는 동적인 관점으로도 보았다.


# 한편 세 번째 소주제인 페리코레시스 이론과 관련하여 헬라어인 페리코레시스 용어 그 자체를 분해해 보면, 페리코레시스 용어는 다소 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내주의 의미도 포함하지만, 다소 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관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호관통(상호상통)의 의미에서의 페리코레시스에 관한 진술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격들의 삼위성에 관하여 진술할 때, 상호내재(공통내재)의 의미에서만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49쪽)


위 말 역시 상호내재가 장소적 개념도 있고 상호관통의 개념도 있다는 말이지 이인규님처럼 장소적 개념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인규님은 신학책을 어설프게 읽음으로, 그 본문이 자신의 주장을 뒤집고 지방 교회측의 주장을 지지하는 내용인 것도 모르고 본문을 인용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인규님)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바실은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에 대해서 상호교류와 대자적인 관계의 개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즉 본질의 단일성과 상호교류하는 구별되는 인격으로 간주한 것이며, 그것은 오늘날의 정통삼위일체의 초석이 되어진다.


# 우리는 위격들의 상호내재성, 즉 후에 이른바, 페리코레시스(교류, 상호순환)라고 불리우는 교리를 발견한다. <신성은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세 위격들 속에는 '본성의 동일성'이 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위격들의 구별에 따라서는 둘이 별개>이나, <본질의 공유에 따라서는 하나>이다. 위엄은 둘로 쪼개지지 않고, 영광도 나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 의해 설명되는 영광송 역시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형상에 따른 영광은 원형에로 나아간다. 한 경우에는 모방의 이유인 형상이고, 다른 경우에는 본질에 의한 아들이시다. 그러니까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를 갖는다. 그리고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 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나 <각 위격은 한 동일실체를 전부를 갖되,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을 갖는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150쪽).”


위 “그러니까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를 갖는다. 그리고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 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라는 내용 역시 이인규님의 신론과 다르고 지방 교회측의 그것과 일치합니다.


(이인규님) ”갑바도기아 교부중 바실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 한 하나님 아버지, 한 독생자, 한 성령께서 계시다. 우리는 <그 위격들의 각각>을 따로 따로 선포한다. 그리고 그들을 함께 헤아려야만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수성의 개념에 대한 무지한 진술에 의해 당황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두 번째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우리는 전제군주론을 고수하면서, 또한 <동시에 위격의 개체성>을 고백한다.(같은 책, 145쪽)


또 갑바도기아 교부중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양태론자들과 같이 위격을 혼동하지 않았으며, 단일신론자와 같이 실체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즉 위격은 구별되어야만 하지만, 실체는 분리되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초과됨이나 결핌함이 없고, 이 단일성은 혼동됨도 없으며, 또 나뉘었다고 해서 분리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해서 사벨리우스의 (위격의) 혼동이나 아리우스의 (실체의) 나눔으로부터 똑같이 보호받을 수 있다. 사벨리우스와 아리우스는 정반대의 악들이지만 그 사악함에 있어서는 똑같이 악하다.(같은 책, 191쪽)


그레고리는 더욱 정확하게 세 위격과 한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위격은 개별적이며 구별되고 나뉘어지지만, 신격(신성)의 관점에서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대는 한 빛의 섬광과 동시에 셋에 의하여 즉시 조명받아야 한다. <개별성이나 위격들에서는 셋>이다. 또는 누가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위(persons)에서는 셋이다. 왜냐하면 그 음절들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한, 우리는 그 용어들에 대해서 시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관점에서는 즉 <신격의 관점에서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위격들은 구분없이 나누이기 때문>이다. 위격들은 구분 안에서 연합된다. 왜냐하면 신격은 셋 안에서 하나이고, 그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셋 안에 신격이 있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셋이 바로 신격이다.(같은 책, 217쪽)


물론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약간의 개인적인 관점이 다르며, 어거스틴 역시 그들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들의 견해는 고전적 삼위일체로 불리우며, 그들의 논리는 그 당시에 미완성적인 삼위일체론의 논리적 전개와 발전의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이러한 교부들의 견해중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만을 고의로 선택하여, 그들이 사용하였던 용어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이라고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인규님 안에는 위 정통 교부들이 고백하고 지방 교회측도 믿는, “신격은 셋 안에서 하나이고, 그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셋 안에 신격이 있다”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위 갑바도기아 삼대 교부들은 삼위의 셋의 구별을 특별히 강조하는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그럼에도 삼신론자가 아닌 것은 위에서처럼 1) 그 셋이 바로 신격이다 라는 관점과 2) 상호내재 교리를 동시에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삼위의 셋은 강조하되 그들이 가졌던 안전장치는 오히려 비판하고 배척함으로 이단의 길로 빠져든 것입니다.


# 이러한 사실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어거스틴에게는 위격과 본성(혹은 본질)을 정확하게 구별하게 하는 적절한 틀이 없다는 점이다. 그의 선배들 및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은 위격들이 논리적으로 신적본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어거스틴을 양태론(즉 사벨리우스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의견들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어거스틴의 견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206쪽)


#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 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쪽)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 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임에 분명하지만, 그가 사용한 용어 때문에 오히려 양태론자라고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고, 실제로 그의 견해는 양태론자에게 오용을 당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는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교회사는 평가한다...그러나 그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지방교회는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견해를 정통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사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지방교회의 거짓말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 갑바도기아의 삼위일체론은 몇가지 중요한 면에서 미완성임을 알 수 있다. 그 삼위일체론에는 휘포타시스들의 상호점유와 신성의 원천으로서 성부의 수위성 사이에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 초래하고 있었다. 이 긴장은 그 후 논쟁을 낳았으며 결국 분열을 초래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4쪽)


실제로 교회 역사상 양태론자들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일부 주장과 특히 용어를 사용하며, 그들의 양태론적인 주장을 합리화시키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의 방면을 강조하여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고,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셋을 강조하여 삼신론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다른 방면들을 동시에 강조함으로 진리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필립 샤프는 이점을 그의 책 '그리스도인 교회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Many passages of the Nicene Fathers have unquestionably a tritheistic sound, but are neutralized by others which by themselves may bear a Sabellian [modalistic] construction; so that their position must be regarded as midway between these two extreames’(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I, Erman's, p674).


위 내용의 요지는 니케아 교부 등의 글들은 삼신론적인 인상이 있지만 다른 방면에서 양태론 구조를 가짐으로 서로 상쇄되어 두 극단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가 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이러한 안전장치 없이 분리된 세 위격들을 고집함으로 이단입니다.


(이인규님) ”지방교회의 주장은 양태론이다. 그들이 아무리 내재적으로 상호내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변명하여도, 교회사를 정확히 아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일 따름이며 더욱 명백한 영태론일 뿐이다. 양태론은 성경의 심각한 모순을 가져온다.....이것에 대해서 해괴하고 이상한 변명과 해명을 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의 인격적 구별과 상호작용에 대해서 양태론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성경적인 기록을 최우선적인 순위로 올려 놓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태론을 고집하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대속의 개념이 무너진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려는 목적으로 파송되어지는 성령 하나님의 인격과 그를 보내시는 성부와 성자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다.


계승적인 양태론을 주장하다보면. 하나님의 영원불변성에 대한 성경적 기록이 부정되어야만 하며, 하나님의 무소부재, 편재성에 대한 성경적 기록이 부정되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사람의 구별조차 없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망발을 하게 되는 이단교리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


재림하시는 예수의 인격을 부정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2000년 동안의 기독교인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림에 대해서 숱하게 기록되어있는 성경말씀을 단지 상징적으로만 해석하여야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기록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는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이미 세워진 독특한 교리를 맞추기 위하여 기록된 성경을 부정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그러한 교리는 이단적 주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으며 들리지 않는다. 마치 동산에서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아담과 하와와 같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말에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미혹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위 내용들은 지방 교회측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들입니다. 균형잡힌 정통 신학자들처럼 1) 삼위의 구별되심과 존재론적인 상호내재로 인한 분리 불가하심, 2) 삼위가 동일 본성을 공유하심, 3) 성경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방면과 죄인의 구속과 완전한 구원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있음을 믿는다면 다 해결될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정하고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부정함으로 스스로 모순에 직면하고 자가당착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또한 위에서 여러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 소개했지만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함으로 지방 교회측을 비판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공격받는 처지에 놓이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바른 상호내재’를 소개한다고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이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는 삼신론자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6. 올바른 상호내재의 뜻


(이인규님) ”본인은 상호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다만 본인이 믿고 지지하는 상호내재란 성경적인 개념의 상호내재이며,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이며, 지방교회의 것과 다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재란, 여태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며 양태론적인 성향을 가졌던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실제 예를 살펴보고,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모두 한 인격일까? 많은 사람이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하는 것을 말하는? 아니면 믿음으로 인한 유기체적인 영적 상호교류을 뜻하는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종이나 자주자와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한 인격이며 한 장소에 동시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서로가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뜻하였을까? 아니면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는가?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안에 인격적으로 동시존재하며, 빌립보교인들의 인격이 바울의 인격 안에 동시존재, 상호내재하였는가? 과연 그들은 한 인격이었는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 유기체적인 영적 상호교류를 의미하였는가?


위에서 우리는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이 말한 상호내재가 ‘장소적 상호내재’임과 동시에 더 나아가 ‘상호관통’의 상호내재임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인규님이 소개하신 내용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이 소개하신 위 내용들은 엄밀히 말해서 전통적인 상호내재(각기 다른 위격들이 상호 안에 거주함)와 무관한 사례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언급들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이인규님에게는 ‘상호내재’가 마치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과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이 ‘마음으로만 하나되는 식’의 개념이라고 이인규님이 착각한 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인규님은 반복해서 상호내재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위 정통 교부들이 말한 상호내재는 장소적 개념일 뿐 아니라 ‘상호 관통’ 개념임이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이인규님의 상호내재 개념이 비성경적이고, 정통 개념과 다른 것이라는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이인규님) ”즉 앞에서 말한 요한복음 14장의 "서로의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는 "인격 안의 인격"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상호내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하자.”


이런 사상이 삼위 분리 세 하나님들 이단 사상의 뿌리입니다.


#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요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요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신학자들과 정통신학에서는 "상호내재"란 "본질적인 하나" 혹은 "유기체적인 영적연합"을 의미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즉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연합"을 의미한다.


원래가 상호내재가 인격의 구별을 전제한 개념입니다. 문제는 이 구별된 인격(위격)들이 ‘상호’ ‘내재’함을 믿는가 부인하는가 입니다. 이인규님은 지금 계속 ‘상호’ ‘내재’를 부인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오픈 주석은 누가 쓴 것인지도 불명한 자료입니다.


웨슬레 목사도 역시 상호내재를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주장한다. 웨슬레는 그 상호내재를 "일치" 혹은 "단일성"으로 해석하며, "구별된 인격"을 주장한다. 즉 "단일적인 신적본질의 일치"와 "구별된 인격"을 말한다.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위 자료 역시 이인규님에게 불리하고 지방 교회측의 관점과 일치하는 자료입니다. 지금 쟁점은 인격의 구별성을 다 인정하되 각 인격들이 ‘상호’ ‘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방 교회측이나 웨슬리는 상호내재 한다는 것이고, 이인규님은 안 한다는 것인데,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말은 지방 교회측의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로마 감옥의 바울과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 간의 ‘상호내재’라는 이인규님의 주장은 상호내재가 아니며 삼위를 분리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유명한 개혁신학의 조직신학자인 웨인 그루뎀도 다음과 같이 상호내재를 설명하였다. 즉 정통신학이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 상호교류)란 동일한 신적본질과 구별되는 인격간의 상호교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당연한 말입니다. 페리코레시스 개념 자체가 위격의 구별을 전제로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음 두 가지 자료제시를 통해 이인규님의 그릇된 ‘상호내재’ 주장과 지방 교회를 양태론이라고 공격하는 것이 근거없는 억지임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상호내재 개념


-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성공회 주교,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요14:10)라고 선언하신 바와 같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1권, p169, 성문).


-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케누스(Damascen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장신대 김명용 교수).


- 그런데 캅바도키아 교부들 가운데서도 이 페리코리우시스라는 개념을 통하여 '신격 내에서 위격들 사이의 관계가 세 인간들의 공통의 인간성(common humanity)과의 관계와 유사하다'라는 개념을 배격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이 문제를 분명히 한 사람은 닛사의 그레고리였다(250쪽). '한 신격이 항상 세 존재양식들(three modes of being) 안에서 또는 행위 영역들 안에서 또는 상호 관계들(mutual relations) 안에서 한 실체적 실제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로부터 떨어져서 생각되실 수 없고, 아들께서도 성령으로부터 떨어져서 파악되실 수 없다. 아들께서는 항상 아버지 안에 계시고, 성령께서도 항상 아들과 함께 계신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252쪽).


-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일성과 삼위성을 논하면서 위격들의 '상호내주'의 관점에서의 삼위일체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셋은 상호간에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서는 무한하시다.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시다'(김석환, 위 책 299쪽).


- 8세기 중엽에 활동한 다마스커스 요한도 '각 위격은 각각 다른 위격 안에서 어떤 연합 (coalescence) 없이 존재(being)를 가지신다(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843-844).


- 칼 바르트도 '신적 존재양태들(the divine modes of being)이 상호간에 서로 서로를 아주 완전하게 조건지으며 스며들어서 하나가 항상 다른 둘 안에 계신다'(Karl Barth, CD 1/1, p 370)(김석환, 위 책 300쪽).


-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과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함께 만난다. 각 품격은 서로 혼합되거나 혼돈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1972년).


2. 지방 교회측이 양태론이 아니며 정통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증거들


▶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형식화된 사도신경은 사벨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위 양식론과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신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단지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남일 뿐이라는 것이다... 삼위 양식론에는 성경적인 어떤 근거가 있으나, 이단적인 극단으로까지 너무 멀리 나아갔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하나의 면을 보았으나, 셋의 면에는 실수를 범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가 끝난 뒤에는 오직 성령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격의 셋 가운데 있는 동시존재와 상호내재의 영원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이것을 부인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29-30p-


▶ 우리가 아버지, 아들, 영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어떤 소문들과 비난들이 있다. 나는 그런 비평가들과 비난자들이 어디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영이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믿으며 선포한다.


아버지가 영원하심


이사야 9장 6절에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용어가 있다. 이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인 번역은 「영원의 아버지(Father of eternity)」 혹은 「영원한 아버지(eternal Father)」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아들이 영원하심


아들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아들에 관하여,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7장 3절은, 『그분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이란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직선보다는 원이 영원한 하나님의 상징인 이유이다. 그분은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다.


영이 영원하심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한 영」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라 우리는 셋―아버지, 아들, 영―모두가 영원하시다고 선포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3p-


▶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시며 양식(modes)으로 있는 것이 아님


아버지, 아들, 영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7절까지를 보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우리는 이 두 구절에서 아버지께 그 영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시는 아들을 갖는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들, 그 영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그분의 영으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 영, 아들 그리스도를 갖는다. 모두는 동시에 존재한다.


성경은, 아버지가 한동안 존재했으며 그 다음 아들이 왔으며 그 다음 얼마 후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영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이 구절은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들으며, 그 영은 성도들을 강화시키며, 아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진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혹은 교제가 언급된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 4절부터 6절까지는 은사(gifts)의 영, 행정(administrations)의 주, 역사(operations)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영, 주님, 하나님을 본다. 다시 한 번 그 영, 아들,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역사하신다는 것을 본다. 그 영은 은사들을 주시며, 주님은 행정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은 역사(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가 일찍이 존재하심을 그치고 아들이 그분을 대체하려고 오셨으며, 그 후 그 영이 아들을 대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 아들, 영 셋 모두가 영원하며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어떤 비평가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요 그 영이라고 가르칠 때, 그는 신격의 세 위격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부인하고 삼위 양식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한다. 비평가들이 나에게, 아들이 서 있고, 그 영이 내려오며,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곳인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적어도 그들이 믿는 것만큼은 믿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 아들, 영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완전히 믿는다.


나는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계된 모든 구절들도 믿는다. 예를 들면 계시록 1장 4절과 5절은,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아버지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며, 그 영은 일곱 영이며, 아들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에서 아버지, 영, 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승천 후, 오순절 후에도 존재하신다.


여러 개의 다른 구절들도 같은 것을 계시한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 영의 교통하심을 본다. 더욱이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는, 『내가 ...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비노라... 너희를 ..... 그분의 영으로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가운데 거처를 정하게 하옵시고』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아버지, 그 영, 그리스도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삼위 양식론자라는 비난은 거짓된 것이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한다. 삼위 양식설은 하나님이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며, 아들의 계시는 승천과 함께 끝났다고 가르친다. 아버지, 아들, 영의 영원성은 삼위 양식설에 의해 부인되었다. 삼위 양식설은 이단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5-306p-


▶ 그러나 우리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또한 마태복음 3장 16-17절과 고린도 후서 13장 13절과 계시록 1장 4-5절과 에베소서 3장 14-17절과 같은 구절들도 믿는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31p-


▶ 아버지, 아들, 영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


어떤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태복음 3장 16절부터 17절을 볼 때, 거기에 아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말씀하셨으며, 그 영은 아들 위에 임했다. 셋이 모두 동시에 행동했다. 분명히 이러한데, 당신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답은, 우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보다 더 많이 믿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순수한 말씀에 따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모든 것을 믿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7p-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내재함이 모두 있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동시에 존재함은 같은 시간에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서로 안에 거함은 정의하거나 이해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 용어가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안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성경은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가 그와 함께 왔음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이와같이 그 영이 왔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왔다. 더욱이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는 외적인 방법으로 아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주관적으로 아들 안에 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10p-


▶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자신의 뜻을 행치 않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절들은 주 예수님이 그분의 땅에서의 사역에서 그분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셨음을 분명히 가리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594p-


▶ 신약은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함께하신다고 말할 뿐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가 상호 내재하심을 계시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상호 내재한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은 이런 상호 내재를 계시하는 또 다른 구절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들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동시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동시 존재하실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 존재하시며 아들은 아버지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33p-


▶ 삼일 하나님은 영원 과거에 그분의 신성한 계획 가운데서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 성육신되시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영원한 구속을 이루기 위해(엡 1:7-9)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은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 되도록 창세 전에, 즉 영원 과거(벧전 1:19-20)에 정해지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192p-


▶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한(히 10:5) 성육신으로 보내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193p-


▶ 특별히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 나무 곧 십자가 위의 우리의 대속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00p-


▶ 시편 22편 22절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회중에서 아버지를 찬송하실 것임을 예언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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