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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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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9-1)

 


지방교회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상호내재(이인규님의 원글 제목)


아래 글을 쓴 이인규님은 장로교 합동총신 교단에 의해 삼신론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습니다.


(이인규님)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사역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다. 특히 지방 교회와 같은 경우는 자신들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있다고 변명함으로서 자신들의 양태론을 숨기고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고의적인 조작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모순과 오류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지방교회는 그 용어가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주장이었므로,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사역적) 삼위일체가 무엇이며, 그러한 주장이 과연 정통 삼위일체인가를 살펴보자.

 

 

1. 놓쳐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별개의 관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느 사람을 말할 때에 정면으로 볼 수도 있고, 측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그러한 관점이 서로 다른 사람을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방향에서 보든지 그 사람은 동일적인 인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측면으로 볼 때에 그 사람은 눈이 하나만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그를 눈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 사람은 측면으로 보거나 정면으로 보거나 그는 눈이 둘인 정상적인 사람이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을 때에, 경륜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내재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인 것과 같다.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그 두가지가 전혀 다른 관점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자기의 이단적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조작일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란 인격이 구별되어지는 셋이고, 본질은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내재적으로나 경륜적으로나, 인격은 셋이고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통삼위일체는 삼위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져야만 하며 상호작용이 가능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인 기록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외적이든, 대내적이든, 본질적이든, 경륜적이든 그것을 가리지 말고, 삼위는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지며 상호교류가 가능하지만, 그 세 위격의 본질은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야만 한다.


성자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은 비둘기처럼 머리 위로 임하셨으며, 하늘로서는 성부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기자의 사실적인 기록이다.


이것을 경륜적(사역적)인 기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 성경적인 기록은 본질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여야만 한다. 성경의 기자는 4세기에 만들어진 이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관점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었으며, 오로지 경륜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적인 기록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구분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그 두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인규님처럼,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거나 둘이 같은 것이라고 간주하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삼위일체론이 왜곡되어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3:16-17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오셨다 라고 하고, 하늘에서 (성부의) 음성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말씀만 절대화 한다면, 그 시점에서 예수님 안에는 성부와 성령은 안 계신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삼위를 ‘각각 분리된 세 존재들’(하늘, 공중, 이 땅)로 보는 다신론 이단 사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곳에서 ‘성부가 성자 안에 성자가 성부 안에 계신다’(요14:11) 라고 말씀함으로써 이러한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바로 잡아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정통 삼위일체가 되게 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방면을 말하는 마3:16-17 뿐 아니라 본질적 삼위일체의 방면을 말하는 요14:11도 동일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처럼 어느 한쪽의 말씀(예를 들어 마 3:16-17)만으로 삼위일체를 규정하면, 그 자체로 또 다른 곳의 상호내재를 말하는 성경본문을 부정하게 되고, 결국 이인규님처럼 세 하나님들을 믿는 삼신론 이단에 빠지고 맙니다.

 

끝으로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별개의 관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이인규님의 독단적인 주장은 위에서 본 것처럼 성경과도 배치될 뿐 아니라 건전한 대부분의 신학자들의 관점과도 크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장신대 강사이신 백충현님은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부흥에 대한 하나의 개혁신학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에 관한 현대의 일곱가지 입장들’이란 소제목으로 둘의 구분과 조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논문의 결론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하심과 하나님이 세상과 맺으시는 심원한 관계성 양자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구별성과 일치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엉터리 이단 감별사인 이인규님의 주장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에 더 신뢰를 둘 수 있을지는 아래 원글을 직접 읽고 각자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hichang/91599


(이인규님)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어느 때라도 기독교의 성부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성부하나님이 돌아가신 적이 있거나 혹은 돌아가실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생명의 근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경륜적으로만 돌아가시고, 본질적으로는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가 있는가? 그러한 설명은 궤변이며, 분명한 양태론적인 이단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화목제로 삼으시고 인류의 구원사역을 성취하셨다.


즉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 주장은 양태론적 이단이며, 소위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성부고난설이며, 결코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며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지방 교회측 누구도 예수님과 성부의 인격이 ‘구별됨’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주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삼위의 구별에 더해 성부가 성자 안에 성자가 성부 안에 상호내재 하심도 믿을 뿐입니다(요14:11). 이인규님은 후자를 부인합니다.

 


2. 지방교회가 말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내재적으로는 삼중적인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주장하며, 경륜적으로는 삼위가 세 단계와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너무 유치하고 조악한 주장이다. 양태론적인 주장을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위장하고 감출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 위트니스 리의 개인적인 방법이 지방교회를 더욱 망가뜨린 것이다.


게다가 그 용어를 교회사에서 빌려와 정통신학인 것으로 위장하려는 수법이 지방교회를 더욱 악화시켜 사이비집단으로 추락시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양태론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발각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주장대로,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렇다면 예수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진다. 즉 성부의 시대에 예수라는 신약시대의 과정은 아직 거치지 않은 장래의 과정이 되어지며, 성령이라는 과정은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거쳐야 할 미래적인 과정이 되어진다.


즉 세 과정과 세 단계라고 하는 삼위의 사역은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내재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내재적이라는 용어의 뜻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인가?


양태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에, 어떻게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며 상호내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볼 때에, 지방교회가 말하는 삼위 -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동시에 존재하는 인격인가, 아니면 서로 시간적 차이를 갖는 과정과 단계란 말인가?


예를 들어, 본인의 사역적 직분의 구별, 즉 교회의 권사와 회사의 사장과 집안의 가장이 상호교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호내재 혹은 동시존재할 수 있는가? 즉 "나"라고 하는 동일인격의 세 직분 혹은 세 사역이 나에게 동시존재, 상호내재 한다면, 그것이 과연 구별되는 세 인격이란 말인가?“


이인규님의 위와 같은 궤변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분하는 정통 성경 교사들의 입장을 부정한 결과로서 스스로 곤란한 상황에 봉착한 것일 뿐, 지방 교회측이 말하는 삼위일체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입니다.


지방 교회측은 먼저 영원 전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내재하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상호내재는 삼위 중 어느 위격이 어떤 과정이나 단계를 거친다고 파괴되거나 손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호내재 자체가 바로 삼위의 존재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거친 경륜은 크게 두 단계입니다.


첫째는 성육신입니다(요1:14). 이 성육신의 주체는 성자(혹은 성자 안에 상호내재하시는 삼위 전체)이시며,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으신 사건입니다(골2:9, 갈4:4). 그럼에도 이인규님은 이것을 성부가 성자가 되신 사건이라고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인규님 안에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오직 성부만 하나님이시다 라는 여호와의 증인식 이단적인 하나님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성자(혹은 삼위 전체)께서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주는 영이 되신 사건입니다(고전15:45). 이것은 성자 혹은 삼위 하나님 전체는 전혀 변함이 없으신 상태에서, 그분의 육신만 죽을 인성에서 죽지 않을 인성이 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과정을 거쳤다.’ 혹은 ‘단계가 있다’라는 말이 이인규님의 엉터리 주장처럼 ‘성부께서 성자가 되시고’(더 이상 성부는 안 계시고), ‘성자가 성령이 되셨다’(더 이상 성부와 성자는 안 계신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에 삼위 전체가 성자 안에 계시면서 성자가 통과한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통과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경의 기록이고, 또 신약 사복음서와 서신서가 말씀하는 바입니다.


(이인규님) ”더 쉽게 지방교회의 경륜적 삼위일체에 비슷하게 접근하는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약 본인이 회사에 과장이었고 부장이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지금 사장이 되었는데, 본인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세 단계와 과정이 한 인격에 상호내재, 동시존재될 수 있는가?


본인이라는 동일인격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과정과 단계가 서로 인격적인 상호교류를 할 수 있다는 이상한 개념이 바로 지방교회의 주장이다.....게다가 더욱 황당한 거짓말은 이러한 주장을 정통신학이라고 거짓말을 한다는 자체이다.”


이인규님은 ‘삼위가 상호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라는 정통 삼위일체의 명제를 부인함으로 위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단추가 잘못되니 무슨 말을 하든 위와 같이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인규님은 자신의 잣대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인규님) ”성경의 기자들이 본 기록은 과연 내재적인가? 경륜적인가? 도대체 어떤 기록은 내재적으로 구분하고, 어떤 기록은 경륜적이라고 구분하라는 이야기인가?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성경기자들은 어느 사건은 내재적으로 기록하였고, 어느 사건은 경륜적인 관점으로 기록하였단 말인가


지방교회의 양태론적 견해에 대해서 불리하면 경륜적이고, 유리하면 내재적이라고 구분하는가? 과연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경륜적(사역적)으로만 하늘로 기도하라고 하셨단 말인가? 과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실 때에, 그 절규의 소리를 내재적(본질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절규하셨는가? 과연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성부하나님께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을 때에, 그것이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같이 내재적과 경륜적 두가지 관점을 나누어 기도하셨단 말인가? 위트니스 리의 궤변을 직접 들어보자. “


이인규님은 다른 믿는 이들을 비판하기 전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겸손히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방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요8:16, 29, 16:32 등입니다.


이 중에 한 곳만 보겠습니다. “내가 판단할지라도 내 판단은 참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참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8:16-17). 위 본문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부분이 바로 보내시고 보냄을 받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이라면, 그 뒤에 있는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가 상호내재 즉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으니 두 위격이 각각 멀리 떨어진 존재다 라고만 이해하면 그것이 바로 위격 분리 이단 즉 다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외에 앞에서 거론된 마3:16-17은 경륜적인 방면이라면, 요14:11은 존재론적인 방면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륜적으로 보냄을 받고 또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시는 등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존재론적인 특성(예를 들어, 상호내재)은 결코 파괴되거나 영향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이 자료를 참고: http://cafe.daum.net/soongsari/KfG/28


이인규님이 인용 소개한 위트니스 리 형제님 1차 본문에 대한 간략한 평가


1. #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위트니스 리는 아들 하나님이 '삼일 하나님의 제 2격이실 뿐 아니라,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관점에서 위 말을 한 것입니다(위 책 321쪽 참조). 또한 본문은 위 인용문 바로 앞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본문들인 출3:2-12, 삿6:11-24, 13:15-24, 슥12:8, 2:8-12 본문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위 인용문 뒤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교리상으로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에서는 참으로 그렇다...그러므로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분은 하늘에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다. 그 둘은 동일하다'. 위트니스 리는 우리의 체험 방면에서 위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체험 안에서 삼위는 종종 한분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 안에 각각 셋으로 따로 떨어진 세 하나님들이 계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본질적인 관점에서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이 자신의 안에 있는 자신에게 기도하였다고 위트니스 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위 밑줄친 부분의 이인규님의 말은 거짓이고, 허위사실 유포일 뿐입니다. 이인규님은 지금 엉뚱한 ‘자기 생각’을 마치 위트니스 리의 주장처럼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2. # 그러므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 (하나님, 323쪽)


(이인규님) “왜 위트니스 리는 스스로 모순이 되는 주장을 하고 있을까? 동시존재하는 삼위가 어떻게 하늘과 땅에 분리되어질 수 있는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이 스스로 다른 주장을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변명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그는 위장과 변명을 위한 논리로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의 다음 주장을 들으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인규님은 성자가 이 땅에 오셨으면 저 하늘에는 안 계신다고 착각합니다. 삼위를 각각 분리시키는 삼신론 이단 사상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자가 이 땅에 계시면서 자신이 하늘에 계신다고 말씀합니다(요3:13,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 he that came down from heaven, even the Son of man which is in heaven. 시제가 앞의 came 은 과거이나 뒤의 is 는 현재임을 참고).


정통 개혁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도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배타적으로 제 1격만을 말하지 않고,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삼위를 각각 분리시키는 이인규님의 이단 신론으로는 이런 지극히 성경적인 표현이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경륜적과 본질적인 설명)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매우 균형잡히고 성경적인 언급들입니다.


(이인규님) ”그는 본질적으로는 삼중적인 동시존재(결과적으로 한 인격, 한 실체)를 주장하지만, 경륜적 (사역적)으로만 셋으로 구별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경륜적 삼위일체는 4세기 이후에 양태론적이란 이유로 신학적 중심에서 밀려나 잊혀진 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빌려와서 정통신학인 것처럼 용어만 사용하는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괴상망칙한 논리로 만들고 말았다.


더욱이 상호내재라는 용어를 또 빌려와 자신들의 주장을 정통신학인 것으로 위장하려는 시도는 지방교회의 주장을 말조차 되지 않는 해괴망칙한 모순과 오류로 만들고 있다. 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을 살펴보자...”


위 이인규님처럼 삼위일체의 존재와 기능을 구별하여 말하는 성경본문들 중 어느 한쪽을 무시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이단적인 신론에 빠질 뿐입니다. 필립 샤프는 이점을 그의 책 '그리스도인 교회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Many passages of the Nicene Fathers have unquestionably a tritheistic sound, but are neutralized by others which by themselves may bear a Sabellian [modalistic] construction; so that their position must be regarded as midway between these two extreames"(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I, Erman's, p674).


위 내용의 요지는 니케아 교부 등의 글들은 삼신론적인 인상이 있지만 다른 방면에서 양태론 구조를 가짐으로 서로 상쇄되어 두 극단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양태론도 아니고, 중심에서 밀려나기는 커녕 최근의 삼위일체 논의에서는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주제입니다. 이 점은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아들 안에 있으며, 아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을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297쪽)


위 말은 고후 13:13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에서 '사랑' '은혜' '교통'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즉 일반적인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체험"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한 실체의 세 방면'이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 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53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위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성(인간)을 입으시고 거치신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모두 성경이 말씀하는 바입니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시고,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소위 계승설이라고 하는 양태론이다. 즉 이들이 말하는 삼위는 동일인격이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거치는 세 과정과 세 단계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 삼위가 본질적으로는 셋이 함께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고 주장하며, 경륜적으로는 셋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 양태론이 전통적인 정통삼위일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시간적인 사역적인 차이를 둔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본질적으로 보는 삼위일체가 경륜적으로 보는 삼위일체와 전혀 다를 수가 있는가? 지방교회의 이단성에서 더욱 위험한 점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상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이제는 거짓 조작과 위장까지도 거리낌없이 하는 사이비집단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가 스스로 판단하는 양태론(양식론)의 정의란 무엇일까?”


지방 교회측이 성자 하나님(혹은 삼위 전체)께서 육신을 입으셨다고 말한 것을 이인규님은 성부가 성자가 되셨다는 말이라고 거짓말로 각색을 하고 있습니다.


# 삼위 양식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는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37-38쪽)


성경적인 언급입니다.


(이인규님) "하나님은 이미 예수로 변화하였고, 예수는 이미 살려주는 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 지방교회의 양태론이다. 지방교회의 삼위는 한 인격이 거치는 세 단계이며 세 과정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 - 예수 - 영>으로 승계되었다는, 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두 단계, 두 과정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위 “하나님은 이미 예수로 변화하였고, 예수는 이미 살려주는 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 지방교회의 양태론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거짓말입니다. 이미 여러번 지적했습니다.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골2:9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나타남’을 말씀합니다. 갈4:4는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종합하면, 성육신의 주체는 성자이시지만, 1/3 하나님이 아니시고, 성부와 성령이 아들 안에서 상호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아들 예수님이 성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전통적인 가르침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인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 282쪽)


(이인규님) “전통적인 기독교는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아들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을 위트니스 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인규님은 다른 곳에서는 ‘위트니스 리가 성부가 예수님이 되어 성육신하셨다’고 해서 양태론이라고 우기더니, 위 글에서는 ‘위트니스 리가 아들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여러번 반복하였지만 위트니스 리의 관점은 아들 하나님을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이 성육신 되신 것임). 자기 말로 자신의 예전 주장을 뒤집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뒤죽박죽 사이비 이단감별입니다.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내신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 (하나님, 439쪽)


성경은 세 위격을 구별하나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이인규님)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위트니스 리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양태론을 임의대로 정의하면서 자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급기야는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초석이 되는 니케야 신조를 삼신론에 가깝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성부 하나님이 다른 인격이신 성자 예수를 보낸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다른 인격이신 성령을 보낸 것을 부정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글 하나만 더 보자...”


니케아 신조는 셋의 구별을 강조하여 바른 삼위일체 정립에 공헌한 것이 사실이나, 하나의 방면을 소홀히 하여 삼신론으로 빗나갈 여지를 남긴 것이 사실입니다. 아래 이종성, 김석환, 차영배 박사 등도 이에 동의하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니케아 신조의) 성령에 대한 고백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고백과 비교할 때 매우 간략하다. '또 성령을 믿는다'로 되어 있을 뿐 아무 설명이 없다. 이와 같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조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고백만으로는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권위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사도신조의 내용구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삼위일체론의 표준이 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삼신론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언급하면서도, 그 셋이 하나라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이종성, 삼위일체론, 85-86쪽, 머리말).


'니케아(신조)는 4세기 교회의 모든 교리적인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위일체 논쟁이 니케아와 더불어 더 진지해지기 시작하였다. 니케아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 신조에 서명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신조가 이해된 방식에 있어서는 서명자들 사이에 광범한 차이들이 있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76쪽).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관한 고백이 지나치게 간단하다.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나 동질인지 혹은 발출인지 조차도 밝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는 아직도 발전해야 할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아타나시우스와 세 갑바도기아 신학자들 및 힐라리우스 등을 통해서 더욱 발전되고 정립케 된다(차영배, 삼위일체론, 134-135쪽).


이인규님은 어설프게 아는 지식을 과신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 42쪽)


위 본문들은 존재론적인 위격의 혼동이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를 말합니다.


(이인규님) “더 이상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미 확인하였다시피 "아버지가 아들이고 아들이 그 영"이라는 주장이 곧 양태론이다.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인격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양태론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지 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는 그렇게(양태론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여 보자.... 위트니스 리는 분명한 양태론이다. 단지 자신은 본질적인 관점에서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이상한 궤변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그러한 이상한 변명을 인정하여 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인 지방교회는 자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게다가 정통교회측의 토론 상대방을 삼신론자라고 모함하고 있다. 과연 누가 정통삼위일체를 정의하고, 누가 양태론과 삼신론을 정의하는가?”


위트니스 리가 성자=성부, 성자=성령..이라고 말한 문맥은 사9:6, 고후3:17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위격 간의 ‘기능적인’ 동일시를 말한 것이며, 결코 존재론적인 방면의 위격간의 구별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위와 같은 말은 전 합동신학교 총장인 박형용 박사 또는 그분의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스승인 R.B. Gaffin 도 그렇게 말합니다.

 


3. 양태론과 성경의 모순점


(이인규님)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아래는 본인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성경적인 기록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만 한다. 양태론적인 시각으로 아래 성경구절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양태론은 비성경적이라는 증거가 되어진다.”


위 언급은 삼위가 내재적으로 상호내재 하신다 라는 성경의 사실(요14:11)을 양태론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전제가 있는 문제 제기입니다. 이인규님은 지금 일부 성경 구절로 또 다른 방면의 성경 구절들을 부인하라는 어리석은 요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 이성으로 보기엔 모순이 있는 것 같아도 그 모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하에서 이인규님의 비성경적인 주장을 폭로하기 위하여 역 질문을 제기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역질문의 요지는 존재론적으로 상호내재를 말하는 성경도 믿고, 경륜적으로 구별되게 존재하시는 분을 기록한 성경도 믿어야하며 어느 한 기록으로 다른 기록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이인규님은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저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각기 다른 두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정말 믿으십니까?


2)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는 것이 성경적인 기록이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면,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의 개념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이인규님은 예수님 안에서 제사를 받으시는 아버지와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각기 다른 두 아버지라고 정말 믿으십니까?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이인규님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영혼을 받는 아버지와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각기 다른 두 아버지라고 정말 믿으십니까?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구별한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이인규님은 다윗이 본 하나님 안의 예수와 또 다른 예수가 있다고 정말 믿으십니까?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성령을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이인규님은 상호내재하는 보혜사와 구별된 또 다른 보혜사 즉 각기 다른 두 보혜사가 있음을 정말 믿으십니까? 성경에서 실재는 ‘그리스도’이십니다(요14:8). ‘또 다른 보혜사’는 그 ‘실재의 영’이십니다(요14:17).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가?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은 구별되나 분리되실 수 없는 한 하나님이십니다(신6:4, 슥14:9, 말2:10, 갈3:20, 약2:19, 고전8:6).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상호존재하는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무엇인가? 복음서의 기자들은 삼신론자인가?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위 기록만 붙들어서 성자와 성령과 성부를 각각 하늘과 땅처럼 분리된 존재들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삼신론 이단입니다.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려오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아들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또한 성부께서는 하늘에 계심(마6:1)과 동시에, 이 땅에 보냄받은 성자 안에 계신다(요14:11)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 다를 성경 그대로 믿어야 하며, 이인규님처럼 삼위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면만 믿으면 삼신론자입니다.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스데반은 삼신론자였는가?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을 뿐 아니라 모든 거듭난 믿는 이들처럼 그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존재 안에 생명으로 영접하여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골1:27)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인규님은 전자를 강조하고 후자를 부인함으로 삼신론이라는 것입니다.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부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어느 한 위격은 그 위격 자체이실 뿐 아니라 삼위 전체이시기도 하다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전자만 믿고 후자는 부인함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로레인 뵈트너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배타적으로 제 1격만을 가리키지 않고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이인규님에겐 이런 관점이 없으니 이단입니다.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부어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고, 부음을 받으시는 예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으며, 붓는 성령도 삼위가 내재되어있단 말인가?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누가는 삼신론자였는가? 아니면 구위삼체론자였는가?


원칙적으로 예수라는 말은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분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마1:21). 이 말을 성자 하나님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11) 하나님의 편재를 설명하는 아래의 성경구절은 모두 틀렸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오직 성도의 몸 안에만 장소적으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옳은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4-25)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3-24)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15: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위 말씀 모두가 하나님의 편재를 가리킨다고 보는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28:20은 오직 믿는 이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지, 불신자에게도 편재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거듭난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셔서 그들 안에 거처를 정하시는 하나님(그리스도)의 방면을 모른다면, 그는 참 신약의 성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을 박해할 때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신 사건(행9:4)을 눈이 열려 이해하기 전까지는 사울은 신약의 믿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이인규님도 눈이 열려 이 차이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관련자료 : 이인규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의 실상 https://www.localchurch.kr/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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