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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론 논쟁 - "교인이면 다 천국인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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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론 논쟁 - "교인이면 다 천국인가" (5)

 


전OOO 목사님께(5)


대화가 반복해서 오고 갈수록 전OOO 목사님의 성경 진리 인식의 정도와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 삼위일체, 구원, 종말(낙원, 천국, 휴거), 교회, 율법, 특정 성경본문 이해에 있어서, 주 예수님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가르쳤던 것과는 너무 다른 가르침을 붙들고 계십니다(아래 ‘값싼 구원론’ 등 참조).


한 예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내가 다시 산고를 치느노라”(갈4:19)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눈에는 이미 구원받았기에 가만히 놔두어도 자동으로 휴거될 대상을 향해,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게 하려고 다시 산고를 치른다’는 바울이 불쌍해 보이고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이단처럼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바울에게 문제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을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목사님은 지난 글의 일부 항목들에 대해 어느 정도 재반론을 하셨지만, 그마저도 본인의 심각한 문제점만 더욱 노출시키고 계십니다. 매우 죄송하지만, 그야말로 총체적 부실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가 난감할 정도입니다. 이하에서 저도 목사님처럼 논증없이 간략 간략하게 거론된 쟁점들만 재차 거론하는 방식으로 해명글을 써보겠습니다.


1. 지방 교회측이 ‘모든 거듭난 믿는 이들이 다 휴거된다’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그렇게 안 가르친다고 목사님께서 주장하신 것은 명백한 거짓말임을 지적했습니다. 거짓말을 반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휴거는 ‘익은 곡식’을 추수하는 것임을 성경 본문 자체가 말씀(계14:4, 15-16참조)하고 있음에도, 얼마나 익어야 (성화되어야) 휴거되느냐고 따지는 것은 그렇게 말씀한 분께 직접 하실 일입니다.


3. 계14:1-5의 첫열매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고 거듭 우기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입에 거짓말이 없었나요”? 전혀 엉뚱하고 잘못된 해석입니다.


4. 지방 교회측은 위 첫열매(14만 4천)를 목사님 주장처럼 “환란 중 휴거 받은 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에 ‘환란 전에 휴거된 자들’이라고 여러번 밝혔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지금처럼 무성의하게 글을 쓰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5. 눅21:34-36에 대해서도 감람산이든 성전이든 이들이 불신자가 포함된 ‘일반대상’을 겨냥한 말씀인지 아니면 이미 ‘믿음을 가진 제자들’을 겨냥한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들 즉 ‘너희’를 향해  하신 말씀 중에, “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리니…”(17절)를 포함하여 믿는 이들을 염두에 둔 내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목사님 주장대로라면, ‘일반 대상’(불신자)도 ‘주 예수님 이름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미움을 당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비상식적인 억지 주장일 뿐입니다.


6. 바울을 비롯한 서신서 기자들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거듭난 후에 생명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3:6, 벧전 2:2). 이것을 “믿고도 열심히 살아야 하니 불쌍한 사람입니다”라고 조롱하듯 말하는 것은  ‘생명’ 그리고 주관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의 결과인 ‘생명의 성장’에 대한 목사님의 진리 인식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7. 목사님은 ‘영생’을 말은 하지만 그 영생을 얻은 초기 상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젖이나 먹을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기들”(고전3:1-2) 상태임을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어린 상태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로 세우려고(골1:28-29), ‘하라’(do), 혹은 ‘하지 말라’(don’t do)는 권면을 하며 힘껏 수고한 사도 바울까지 ‘불쌍하다고’ 조롱할까 두렵습니다. 목사님은 생명이 자란다(골2:19)는 말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그것을 위해 어떤 실행을 하고 계시는지요?


8. 앞서 제시한대로 ‘씨 뿌린 것이 익으면 수확(휴거)한다’고 말한 것은 성경 자체입니다(계14:4, 15-16). 이런 말씀에 대해 “그런 망발을 내뱉다니 매우 안타깝고 분노까지 치밀어 오릅니다”라고 하시니 그 분노의 근원이 과연 무엇일런지요?


9. 씨뿌림(영생 얻음) 이후 자라고 성숙해야 추수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성경이 말씀하는 바 입니다(막4:26-29,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으니 ...땅 속에 씨를 뿌려…처음에는 싹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그후에는 이삭에 낟알이 가득하게 되느니라. 그러나 열매가 익으면 그가 즉시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휴거)때가 왔음이라). 그럼에도 이런 말에 대해 “어리석고 단순하게 성경을 보는 것은 너무 유치한 해석들, 대화조차 하고 싶지 않을 지경입니다”라고 하신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씨만 뿌렸으면 무조건 다 휴거되고 아무 문제없다는 식의 ‘생명의 성숙과정’을 무시하는 구원론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파 구원과 유사합니다.


10. 말씀하신 갈라디아서 1:6의 ‘다른 복음’은 할례 등 ‘의식적인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유대인 거짓 형제들(행15:1)을 겨냥한 말이었지, 생명의 성숙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주 안의 형제들을 정죄하라고 쓰인 말이 아닙니다.


11. 갈라디아서는 ‘성령 받음’을 이중적으로 말합니다. 즉 갈3:2의 성령 받음은 과거 시재인데, 갈3:5의 성령 받음은 현재 계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전자만 인정하고 후자를 행위구원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이며 그 자체가 사도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장성한 아들이 되는 단계 즉 아들의 명분을 얻는 것까지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갈4:5, 엡1:4-5). 결코 영생 얻어 거듭나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12. 성경적인 구원론은 목사님이 현재 주장하는 구원과 많이 다릅니다. 쉽게 말해 목사님이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어린아기’(고전3:1) 만드는 복음이라면, 성경은 이 어린 아기가 젖과 말씀을 먹고 자라서 장성한 사내아이가 되는 것까지의 복음입니다(엡4:13, 골1:28). 따라서 바울은 이미 거듭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롬1:15, 그러므로 나로서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그럼에도 이것을 행위구원이라고 정죄하고 불쌍하다고 조롱하고, 어리석고 단순하게 성경을 본다고 나무라시는 것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반복하거니와, 아래 내용이 참된 복음이요 구원관입니다.


“1) 위 주장과 달리,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보혈에 근거한 죄사함과 칭의(엡1:7) 그리고 영생이신 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죽어있던 사람의 영이 거듭나는 것(요일5:12, 요1:12, 3:6)까지를 말합니다. 여기까지 경험한 이들을 성경은 ‘구원받았다’(엡2:8)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원은 다시 취소되거나 지옥(불못)에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또 귀한 일입니다.


2)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미 거듭난 이들에게 ‘구원을 이루라’(빌2:12), 혹은 ‘생명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5:10) 혹은 “믿었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음이라”(롬13:11)라는 식으로 현재 진행형 혹은 장차 다가올 구원의 방면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각각 ‘혼의 구원’(벧전1:9), ‘몸의 구속’(롬8:23, 빌3:21)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3. 거듭 말씀드리지만,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다른 복음’은 할례, 안식일 준수, 음식에 관한 규례를 지켜야 구원받는다 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키지, 지금처럼 ‘은혜 안에 계속 머물므로 생명이 자라고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라는 말을 정죄하라고 쓰인 말이 아닙니다.


14. ‘율법의 행위’(롬3:28)와 ‘믿음의 행위’(the work of the faith)(살전1:3)는 전혀 다른 두 가지입니다. 성경은 전자를 배척하고 후자를 권장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지방 교회측 누구도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계속 이들을 ‘율법의 행위’를 지키는 사람들처럼 거짓되게 몰아가고 조롱하고 계십니다. 이 점 즉각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15. 성경은 대속의 죽음에 기초한 객관적인 의와 거듭난 이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산 결과인 주관적인 의 두 방면을 말합니다. 특히 성경은 후자를 어린양의 신부가 예비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즉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계19:9)이라고 말합니다. 마22:11-14는 ‘결혼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이가 혼인 잔치에서 쫒겨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전OOO 목사님의 칭의론은 성도들이 ‘의로운 행실’인 ‘세마포 옷’을 예비하는 자체를 행위구원으로 정죄하고 훼방하는 반쪽 짜리 칭의론일 뿐입니다(칭의에 대한 자세한 것은 https://www.localchurch.kr/1691 를 참조).


16. 목사님의 칭의론은 영적인 갓난 아기(고전3:1)의 상태도 장성한 자(히5:13-14)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반쪽 칭의론입니다. 사람의 죄된 본성은 거듭난다고 즉시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피로 구속된 이후에도 여전히 말씀의 물로 씻고 거룩케 되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엡5:26). 그 후에라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27절)로 (신랑 앞에) 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즉 성경적인 구원은 ‘위치’만 아니라 ‘상태’에서도 그리스도인다운 존재가 되는 것까지를 목표로 합니다. 이 점을 무시하고, 교리적으로 의인되었으니 아무 문제 없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어떤 이들은 ‘값싼 구원론’자들이라고 부릅니다(http://blog.daum.net/kssuh84/1564 참조).


17. 앞서 언급했지만 목사님은 지금 갈라디아서를 크게 잘못 적용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음(갈3:2)을 말할 뿐 아니라 이어진 ‘계속적인 성령받음’(갈3:5)을 말합니다. 목사님은 후자에 대해 무지함으로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오해하고 정죄를 하고 계십니다. 지방 교회측 중 누구도 할례받아야 휴거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신에 ‘계속적으로 성령받음’(갈3:5)을 ‘육체의 행위’로 간주하는 자체가 심각한 오류이고, 휴거를 구원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 오류의 연장일 뿐입니다.


18. 목사님은 칭의와 거듭남만 구원이라고 오해하나, 성경은 생명의 성숙을 통한 혼의 변화도 ‘혼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벧전1:9). 이처럼 구원 개념이 성경과 다른 것이 목사님의 치명적인 문제점입니다. 더구나 구원의 결과인 휴거까지 구원 자체로 착각하다 보니 구원론이 더욱 뒤죽박죽입니다. “구원을 받았기에 그 받은 구원을 구원답게 이뤄간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이뤄간다는 말입니까? 말 장난이 안 되려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19. 1) 하나님 보시기에 추수 할만큼 익어가는 것(생명이 성숙)이 성화입니다. 오늘날 생명의 성장 곧 성화와 무관한 밖의 경건의 행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 그리고 얼마나 익어야 추수할지는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3) 휴거되면 바로 새 예루살렘(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휴거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한 전 단계일 뿐이고, 4) 그 후에는 선악간에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마12:37, 네 말들로 인하여 네가 의롭게 되고, 또 네 말들로 인해 네가 정죄함을 받으리라, 고전3:15 자신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불에 의해서인 것처럼 그렇게 되리라, 마25:30 너희는 그 쓸모없는종을 바깥 흑암에 내어 던지라). 그럼에도 목사님은 현재 이런 엄중한 경고의 말씀은 무시하고 ‘값싼 복음’으로 성도들을 속이고 계십니다.


20. “에베소에 여기 저기 흩어진 교회들이 많았다”는 주장 역시 성경에 전혀 근거없는 억지입니다. ‘집회소’는 성경에서 말하는 ‘이 집 저 집’(행2:46)처럼 집회하는 장소를 의미할 뿐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교회는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 뿐입니다(마16:18, 엡4:4). 그 하나 뿐인 교회가 각 지방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 지방에 있는 교회’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적인 교회론은 얼마나 명쾌하고 분명합니까?


21. 세 구별된 위격들이 한 동일 본성을 소유하시지만, 한 신격(골2:9, 데오테스, 2320)을 가지심으로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지방 교회측 삼위일체이자 성경적 삼위일체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 침례받으실 때 내려오신 성령을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침례받으시기 전에는 예수님 안에 성령께서 안 계셨습니까? 바로 그런 삼위를 분리시키는 사상이 삼신론 사상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아들 하나님 안에 다른 두 위격들이 영원전부터 영원토록 상호내재 하십니다(요14:11). 목사님의 주장처럼 마3:16-17도 성경의 기록이지만, 요14:11도 성경 기록입니다. 따지지 말고 둘 다를 굳게 믿어야 하며,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면 그가 이단입니다!


22.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죽은 강도는 어째서 낙원에 갔습니까?”라는 질문과 현재의 쟁점인 휴거는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낙원은 믿고 죽은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부활 전까지 거기서 안식하는 임시거처일 뿐 영원히 살 천국이 아닙니다. 낙원과 천국이 어떻게 다른지는 이미 첨부글로 소개드렸으나 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시간을 내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낙원은 영혼과 몸이 분리된 상태에서 전자만 가지만, 천국은 부활 후 전인격이 다 갑니다.


낙원과 천국 : https://www.localchurch.kr/1592


23. “주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것인지 말씀해 보세요.”라고 하셨지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는 길(빌3:8)을 갔던 사도 바울은 무엇을 자랑했을까요?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도 바울이 갔던 것처럼, 고난 중에도 힘껏 누리고 얻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 자신의 풍성(엡3:8) 외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24. 평화 조약이 있다고 해서 금방 휴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이레(7년)의 절반이 지나기까지는 평화 조약은 깨지지 않습니다. 말세에 세상의 동정을 살피는 것은 필요할 수 있으나, 만일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처럼 정작 내면의 기름준비는 없다면 그 또한 간교한 사탄의 속임수에 속는 것입니다. 성경은 휴거된다고 해도 그릇에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그날에 있을 혼인잔치에서 거절될 것이라고 엄숙히 경고하고 있습니다(마25:12).


그럼에도 이러한 의의 말씀은 행위구원으로 치부하여 거부하고, 값싼 구원만으로 성도들을 안심시켰다가 막상 그날에 혼인잔치 참여가 거부될 때 그 책임을 누가 지실 것입니까? 본인이 좋아하는 구절만 골라서 붙잡고 의의 말씀, 딱딱한 음식과 같은 말씀엔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은 훗날 더 큰 재앙에 직면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전OOO 목사님께서 하고 계신 사역의 실상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입으사 목사님께서 자신의 부족을 시인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결단을 내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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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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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5.11.13. 01:40
<교인이면 다 천국인가>라는 책을 펴낸 전지덕후 목사님은 성서 침례교단 목회자이십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 마음 속에서 갈등을 갖는 분들에게 위 책은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사함과 거듭남이 구원의 전부이고 이들은 때가 되면 모두 휴거되어 새예루살렘 천국으로 직행하니, 생명의 성장의 길을 가려고 애쓸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 등이 전한 신약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다른 가르침'입니다.

사탄은 이처럼 교묘하게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하여 또 다른 방면의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전지덕후 목사님이 전하는 복음은 최근에 "값싼 구원" 혹은 "값싼 복음"이라고 회자되며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 윤리적 기준에도 못미치는 삶을 사는 작금의 한국교계 현실을 가져온 뿌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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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5.11.13. 01:45
성경은 어린양의 혼인에 참여하는 신부가 '세마포 옷'을 예비해야 하고 그것은 곧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19:9)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전지덕후 목사님은 이러한 '믿음의 행위'(살전1:3)를 '율법의 행위로 착각하고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심지어 행위구원 이단사상이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분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막상 휴거되더라도 혼인 잔치에 들어갈 자격이 없어서 신랑되신 주 예수님에 의해 거부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마25:10-12참조). 경계해야 할 책입니다.
전지덕후 2016.02.23. 02:17
새예루살렘
보아하니 이 분이 그 분같기도;;
세마포 옷이 성도들이 옳은 행실이니 옳은 행실 없이는 예수님을 믿기만 해 가지고는 안되는군요? 그렇죠?? 옳은 행실이 없으면 천국 못가는군요. 그렇죠??....예수님만으로도 구원이 충분하냐 안하냐의 질문에 바로 답도 못하고 계속 빙빙 돌리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본색을 드러내더니.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니 옳은 행실 없이 천국 못간다고??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옳은 행실은 그의 옷의 질, 상급의 질, 천국에서의 누림의 질을 말 하는거예요. 어디 감히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당신의 그 더러운 행위를 갖다 대요.
고린도교회에 보면 이방인들조차도 범하지 않는 죄를 범했다고 바울이 격분해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버지의 아내를 범한 인간이 나오는데 그도 결국은 그 영이 건짐을 받는 것에 대하여 바울이 말하고 있어요.(고전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십자가 옆에 같이 매달린 강도는 그날 예수님 믿고 어떤 선행도 없이, 어떤 선행도 할 기회 조차도 없이 예수님과 함게 낙원에 갔어요. 오늘날에도 온갖 죄악 속에 살다가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는 사람들도 많아요.
천국가서 옳은 행실로 왔다고 더러운 입으로 자랑할 인간이군요. 그래서 행위구원인것이고 그래서 이단이라고 하는거예요.

무슨 말같잖은 소리를 하길래 성경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답한 것이 하나 있는데 대화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 없는것에 매달려서 그거 틀린거 하나 발견했다고 마치 본인이 옳은냥 의기양양한 모습이 가소롭더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데려감을 당한자와 버려둠을 당한자에 대한 이야기는 우습더군요. 제가 그것을 다시 물었을 땐 답도 안하더니;;

구구절절 축축 늘어지는 이야기들만 있을 뿐..
읽어주기도 힘든 편지들이었어요. 나중에 보내온 편지들은 읽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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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6.02.23. 07:26
전지덕후
간단하게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1. 구원
"예수님만으로도 구원이 충분하냐 안하냐의 질문에 바로 답도 못하고 계속 빙빙 돌리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본색을 드러내더니..."---무엇을 구원이라고 하는지요? 아마도 님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초반부만을 구원으로 생각하시는듯 싶습니다. 롬5:10 후반부가 말하는 구원에 대해서 더 알아보시는 것이 필요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2. 낙원
"예수님 십자가 옆에 같이 매달린 강도는 그날 예수님 믿고 어떤 선행도 없이, 어떤 선행도 할 기회 조차도 없이 예수님과 함게 낙원에 갔어요..."----그래서 낙원에 가면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지요? 낙원은 믿은 사람들이 가는 일종의 임시거처일 뿐입니다. 낙원에 간 사람도 훗날 몸을 입고 부활하기 위하여 그 낙원에서 나와서 공중으로 휴거됩니다. 그후에 공중에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요. 그 몸으로 행한 바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고후5:10).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후에도 자기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다 라고 말했습니다(고전9:27). 님이 전하는 복음에는 이런 부분들이 빠져있습니다.
전지덕후 2016.02.23. 02:07
위에 새예루살렘님 안녕하세요.
죄사함과 거듭남이 구원의 전부는 아니고요. 죄사함과 거듭남이 구원이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고요. 구원의 전부라 함은 사실 구원이 전부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연장통 속에 갖은 연장이 들어 있어서 꺼내서 사용하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이것 저것 검색하다가 이 글을 보게 되었는데 ..
이 글을 쓰신 분과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고 받는 중에 처음 부터 하고 싶은 말은 있으나 그 논점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잘 말씀을 못하시길래 제가 좁혀 드리는 중에 결국은 제가 주장하는 대로 '믿고 구원 받아도 휴거 못 되고 선행이 뒷받침이 안된다면 휴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행위 구원으로서 이단이라고 제가 말씀 드린 것인데....

1. 나중에 그래서...나는 이러저러 하게 믿음 좋게 잘 살아서 천국 왔습니다. 하고 자랑 할 수 있겠군요.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잘 좀 보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 성화된 삶으로 구원 받습니까? 구원 받은 자가 휴거가 못되다니요. 결국은 7년대환란때에 다 성화된다고요? 무슨 근거로? 막무가내식 우기기로?? 결국은 예수님만 가지고서는 안되고 자기가 착하게 살아서 휴거 되는거네?

이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고 몇 차례나 편지를 주고 받고서야 겨우 포인트가 좁혀져서 이해를 하다니, 처음부터 이 문제 때문에 메일을 줘 놓구선 이해를 못해서 한참을 헤메더군요.....이런 사람하고 무슨 대화를 내가 했는지;;; 어휴 시간 낭비였어요.

그럼 얼만큼 성화 되어야, 얼만큼 기도해야, 얼만큼 전도해야, 혹은 그 어떤 신앙의 행위충족조건이 얼만큼 되어야 휴거 되는지요. 하루 1시간 기도 햐면 되나요? 혹은 몇 명 전도하면 되나요? 혹은 야동 한 편만 보는건 허용 되나요? 혹은 혹은 혹은.....그 기준은 어떻게 아나요? 만약 이 기준 안다고 하면 정말 미친놈이라고 말 해 주고 싶습니다.
결국은 계시록21:8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자들"에 속하게 되고 이 두려워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자들이 그의 마지막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글 남겨봤자 의미도 없지만.

2. 휴거론 논쟁이라니;; 나는 그 사람과 휴거론을 나눈 적이 없습니다. 휴거란 이거다 저거다 이렇게 해야 휴거론 논쟁이지 이 분과는 휴거론을 나눈 적이 없습니다.
이 분은 앞 뒤 통찰력도 없이 어리숙하게 성경과 문장을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구원이 휴거고 휴거가 구원이다" 라고 제가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나긴 납니다. 하두 말을 돌리고 질문의 정곡을 파악을 못하고 자꾸만 답변을 빙빙돌리며 답을 안 하기에 울화통이 터져서 몇 차례 이어서 편지를 주고 받았고요. 구원 받았으면 휴거 되는 것이고 휴거 되는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다는 취지로 이야기 한 것을 휴거론을 논하였다고 하니 어이가 없네요.

그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약간 성가시고 짜증도 좀 난다고나 할까요? 편지가 오가면 갈 수록 역시 평신도, 역시 이단.....이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율법의 행함의 구절을 말씀 드렸더니 그것은 율법에만 국한된 이야기라고 하시더군요...
행함 전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해도 충분한 구절입니다.

이 곳 카페에다 오간 내용을 다 오픈하며(상관이야 없습니다만) 첵 이름과 기타 모든 정보는 오픈 하면서 제 이름은 또 전***라고 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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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6.02.23. 07:34
전지덕후
님은...생명의 씨뿌림(거듭남?)까지는 말씀하시는 것같은데, 성경 도처에서 말하는 '생명의 성숙' 방면에 더 연구가 필요한 분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다만 우리 안에 말씀의 씨가 뿌려진 단계만이 아니라 그 씨가 우리 안에서 자라서 추수되는 문제임을 못 보신 것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방면의 구원(믿음의 결국 혼의 구원을받음이라, 벧전 1:9)외에도 단체적으로 주님의 몸으로 건축되어가는 방면이 완성될 때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은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엡1:4-5, 4:13, 5:25-27이 이런 사상을 전달하는 본문들입니다.
첫눈 2023.06.12. 20:46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믿는다 하면서 그 분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것은 애초에 믿지 않았기 때문에 행할 수도 없는 게 아닐까요?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흙 먼지를 만지는 아이에 흙 그만 만지고 손 씻고 오면 네가 평소 좋아하던 게임기 사줄께..라고 하는 부모의 말씀을 아이가 믿는다면 발랑대며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음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믿는 것도 어려운 게 우리의 모습인듯 하네요. 겨자씨를 검색해 보세요.. 그 정도의 크기에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두렵고 갈팡질팡하는 것, 근심 걱정하는 것, 화를 내는 것, 모두 율법을 강요할 게 아니라 믿음이 없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네요.

 

질문이.. 전제부터가 틀린 것 같습니다.. 행위의 문제가 안이라 믿음의 문제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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