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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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신학대학원 신학과 천준혁 님 졸업 논문에 대한 반박

첨부 1

 

고려신학대학원 신학과 천준혁 님 졸업 논문에 대한 반박

 

 

 I. 들어가는 말

 

1994년 11월 고신대학원 신학과 천준혁 님은 <지방교회의 교리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 - 위트니스 리를 중심으로> 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을 제출한 바 있습니다. 본 반박문은 해당 논문 전반에 걸쳐 발견되고 있는 문제점들과 치명적인 실수들을 지적함과 동시에, 지방교회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되었습니다.

 

위 논문은 A4 용지 24매 정도이나 서론과 성경본문 인용 그리고 교회사적 서술 등의 배경 설명을 빼면, 지방교회를 직접 비판한 분량은 6-7매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직접적인 비판 부분도, 다른 비판자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해명되고 답변되었던 바 사실상 중복하여 반박할 필요는 없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천준혁 님(이후 ‘논문 작성자’로 표기하기로 함)과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그 자료들의 출처를 소개드리고, 위의 논문이 비판하는 부분을 간략하게 요약한 후 그에 대한 지방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형식을 취할 것입니다.

 

해당 논문 작성자는 논문 서문에서 지방교회 측이 믿는 바를 "구체성 있게, 명료하게 주장하지 않아서”  "(자기의 비판이) 지나친 해석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움이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은 지방교회 측은 믿는 바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논문 작성자가 연구 능력 혹은 연구 태도의 불성실로 인해 이를 간과하여, 본인의 염려대로 ‘지나친’억지 해석으로 치달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예로 해당 논문 작성자는 <요한복음 7:39의 그영>과 관련하여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의 영원 전부터 존재하심’를 부인한다고 오해 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님이 영원하심을 증명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 했습니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은 그에 대해 이미 1989년에 발간한 <성령론>(총 650 쪽, 한국복음서원 발행) 책자 79 쪽에서 히브리서 9장 14절에 근거하여 '성령이 영원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충분한 자료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성급히 논문을 쓰다 보니 생긴 해프닝인 셈입니다. 논문의 전개를 보면 논문 작성자는 지방교회 측을 기본적인 성경지식이나 상식적인 교회역사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은 1차적으로 해당 논문이 잘못 제시하고 비판한 내용들을 반박하고 바로 잡는데 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또한 지방교회 구성원들이 한 면에서 본인들의 믿음과 실행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며,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오해와 궁금증들을 해소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집필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이 논문 작성자는 물론 지방교회에 대해 오해와 궁금증을 가졌던 모든 분들에게 건설적인 대화의 창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II. 쟁점들에 대한 요약과 반박

 

(우선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 논문이 제기한 항목들은 이미 최삼경 목사(예장 통합 측 전 이단상담소장)와 지방교회 측이 약 3년에 걸친 진리 토론 가운데 충분히 다뤄졌고 반박되었습니다. http://www.forthetruth.or.kr/booklets15.htm 에 가시면 지방교회측이 대응했던 글들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외에 '삼일 하나님’은 http://triunegod.chch.kr (한글)를, 삼위일체( Trinity)와 기독론 (Christ)에 대한 진리 변증은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 (영문)의 해당 메뉴를, 지방교회측의 핵심 진리에 대해서는 신학 변증잡지인 《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archives.html (영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외 지방교회 측의 조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의 결론》(총 8권,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믿는 이들(1, 2), 교회 왕국, 새 예루살렘, 한국복음서원 발행)도 지방교회의 진리를 공식 대변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문 작성자는 논문 제목에서는 '지방교회 교리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지만 실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문제', '그 영(the Spirit)에 대한 비판', '삼일 하나님에 대한 비판'에 한정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도 위 세 주제들에 대해서만 항목 별로 비판 의견을 요약 소개한 후 해명 또는 반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1) 논문 작성자의 비판 요지 :

 

논문 작성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간략한 관점과 함께 비판 대상 원문을 인용했습니다.

 

<성경의 기본계시>라는 책자(p.25)에서 "그러나 그분의 인성은 신성하지 않았다..."라고 함으로 신성과 인성을 철저하게 나누어 놓고 있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자(pp.54-55)에서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 신성과 인성을 혼합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 부분은 사람의 자격만 있을 뿐 하나님의 자격이 없고 부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자격이 있게 되었다“라고 한 것은 인간 예수로 살아 있을 때는 완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같은 책 p.54에서 "본래 그분은 영원 과거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 때 그분 안에는 신성이 있지만 인성이 없었다. 그분은 육신이 될 때 인성을 입었다. 신성을 가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다. 그러나 그분이 인생을 입은 후 이 인성 부분은 사람의 아들 될 자격만 있고 하나님의 아들 될 자격은 없었다“라고 한다.

 

그 후 아래와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1) 철학적인 이원론에 빠져서 신비에 가까운 그리스도의 양성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결합으로 본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으로 보며, 인성을 사람으로 본다. 신성은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로, 인성은 보다 열등하고 하급으로 여긴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양성론자들과 이원론에 물든 영지주의자들의 길을 답습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 당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삼위 중 한 분인 그를 저등급의 하나님으로,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자격미달의 단순한 인간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2) 비판에 대한 반박 또는 해명


(1) 개괄적인 반박


우선 학생 신분이었던 해당 논문 작성자는 논문에서 위트니스 리를 “기초적인 기독론도 이해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절하해 버리는 대담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19세에 그리스도인이 된 위트니스 리는 일평생 70여년간 성경을 연구하며 전세계 각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아왔으며, 여러 신학 조류의 산맥들이 펼쳐져 있는 미국에서만도 30여 년 간 성경 해석에 헌신하고 주님의 몸과 몸의 지체들을 섬겨왔던 분입니다. 수많은 언어로 번역된 신구약 전권에 대한 주석서 《라이프 스타디》와 함께, 광범위하게 보급된 신약 회복역 성경의 주석을 썼으며, 기독론에 대해서만도 71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서적을(그리스도론, 한국복음서원, 1991년 발행) 집필한 바 있습니다. 만일 논문 작성자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언급한 모든 구절을 총망라하여 그에 대한 해설과 견해를 담아 놓은 이 책을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읽어만 보았던들, 자신의 논문의 가치와 신뢰성에 치명적인 흠집들을 내어 버린 그러한 성급한 판단과 심각한 오류들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위트니스 리는 칼케돈 신조가 정의하는 내용의 기독론을 믿습니다 (각주1). 이 말은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죄만 없으시지 우리와 같은 참된 사람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분의 한 인격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구별은 되지만 혼잡되거나 분리됨 없이 존재하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여 말한 것을 가지고 ‘철학적 이원론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 뿐 아니라, 도리어 양성의 구별 가능성 자체들 부인하는 것으로 간주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한 창조주이신 그분의 신성을 거룩하게 보고 사람의 인성을 그것과 차별화한 것에 대하여  '인간이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이원론에 물든 영지주의자다’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논문 작성자의 신학적 이해 및 텍스트 독해 수준을 의심하게 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관점 또한 ‘피조물인 사람(인성)은 창조주인 하나님(신성)보다 열등하지 않고 대등하다’는 주장으로 비칠 위험성이 농후합니다. 더욱이 논문 작성자는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입으신 인성도 신성하다“라고 주장함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인성을 가진 참 사람이 아닌 분이라는 인식이 엿보이고 있어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평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말한 전체 내용 중에서 문맥과 방향성을 모두 무시하고 일부만 떼어내어 그것을 상대방의 입장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그것에 임의로 비판을 가하고 혐의를 씌우는 것은 모든 연구자들이 극복하고 버려야만 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혼합'(mingling)되었다는 말 역시 두 요소가 합해져서 제 3의 본성을 산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점은 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각주1) 위트니스 리 주석, 신약 회복역 성경(RcV) 요 1:14 각주 2 (flesh에 대한 각주) 참조하십시오. 
 
(2) 지방교회 측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거론하게 된 배경


 지방교회 측(위트니스 리)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성경과 칼케돈 신조의 허용 범위 내에서 다음과 같은 난해한 성경 본문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매도할 것이 아니라 과연 아래 해당 본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함께 연구하고 또 기도로 가져갈 수 있기 원합니다.

 

a) 사도행전 13:33 :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문맥을 볼 때 여기서 말한 '오늘’은 성육신이 아닌 주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1:21이 말하는 '아들을 낳으리니’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사람’이 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로 재차 낳은 바 된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b) 로마서 1:3-4 :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이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인성)와 '성결의 영’(신성)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구분 자체가 소위 철학적 이원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 본문에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부활 후 '인정되신 것’(호리조, 3724)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c) 고린도전서 15:45 하 :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위 본문에서 <마지막 아담>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이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라는 구절은 언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d) 로마서 8:29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아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 전부터  삼위의 제 2격으로서 '독생자’(요1:14, 18, 3:16, 요일4:9)이신 그분이 언제, 어떤 연유로 많은 영적인 형제들을 가진 것을 함축하는 '맏 아들’의 지위를 얻으셨습니까?

 

위 질문들에 대한 지방교회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시 '예수님의 신성'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되, 그분이 성육신 때 입으신 '인성'이  부활 후 '영화롭게 된 인성‘(빌3:21)- '거룩하게 된 인성‘ 혹은 '높여진 인성‘ (uplifted humanity)-이 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각주 2). 이것이 위 본문 중에 나오는 '오늘 너를 낳았다'(행13:33),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맏아들이 되셨다'(롬8:29)는 부분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 후 신성도 인성도 아닌 소위 '제 3의 본성’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며, 인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고린도전서 15:44이 말하는 '신령한 몸'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각주 2) 위트니스 리 주석, 신약 회복역 성경(RcV), 롬 8: 29 각주 4(Firstborn에 대한 각주) 참조 하십시오.

 

이러한 진리 항목들은 매우 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교사들 중에서 이 주제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개혁 신학 쪽에서는 화란 개혁교회 총회장을 6번이나 역임한 바 있는 앤드류 머레이 (각주 3)가 그의 저술 '그리스도의 영’에서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즉 그는 부활 후 영화롭게 된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켜 '새로운 거룩한 인간성’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 후의 인성을 함께 묶어 이르기를 '신인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이라고 말했습니다(각주 4). 이 점은 그 영에 대한 부분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각주3) http://www.semvit.org/left_sub03-1_content.asp?id=5642&page=1

 

각주4) 앤드류 머레이 (임석남 번역), 그리스도의 영(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43p) 참조하십시오.


결론적으로, 위트니스 리를 포함한 지방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별되시되 분리되거나 제 3의 본성을 가지지 않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 참 사람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사람이신 이 분이 부활 후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은 그분이 성육신 때 입으신 인성이 썩지 않는 신령한 몸(고전15:44)이 되신 것을 함축하며 우리는 이러한 분을 구주와 생명으로 믿고 영접함으로 거듭납니다. 부활시 예수의 인성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라는 문제는 우리가 영접한 분이 누구인가와 관련하여 매우 깊이 있는 주제입니다.  

 

2. 그 영에 대하여


1) 논문 작성자의 비판 요지


지방교회측은 사도들의 가르침 pp. 17-18에서 "'그영'(the Spirit)이란 칭호는 간단하지만 이 칭호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그 영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시다(요7:39). 예수는 그분의 부활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 그분이 영광 받으신 후에 그영이 거기 계셨다." 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이들은 본문에 대한 지나친 해석으로 성령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사역으로 미뤄 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는 삼위일체의 구조 속에서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 영'이라고 할 때는...포괄적 의미의 성령을...부활이라는 것을 통해서 완성된 하나님으로 본다...구약(출3:13, 삿3:10, 욥33:4)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을 불완전한 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니케아 고백 "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Son, who together with the Father..."에서 "who together"라는 말에 저촉된다.


2) 비판에 대한 반박 또는 해명


(1) 개괄적인 반박 :


지방교회측이 히브리서 9:5의 '영원하신 성령'이란 말씀에 따라 영원 전부터 성령님이 계셨음을 확고하게 믿는다는 점은 이미 밝혔습니다. 지방교회 성도들이 성령 사역을 예수의 사역 이후로 미뤄버리는 잘못을 했다는 지적도 터무니 없는 말입니다. 아울러 마태복음 3:16-17을 근거로 성부, 성자, 성령님이 '동시에 함께' 계심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각주 5), 위 니케아 고백 중 'who together'라는 말에 저촉된다고 하는 것은 그 근거가 없습니다. 아울러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 있어서는 성부, 성자, 성령은 이미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으로  지방교회가 썼다고 비판하는 '완성된'이란 말뿐 아니라 논문 작성자가 선호하는 '완성이신'이란 표현조차도 성령 하나님과 관련하여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요한복음 7:39에서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라는 말을 했을까요? 이 구절에 대한 논문 작성자의 혼돈은 성경이 말하는 '영' 또는 '그영'은 무조건 <제 3격만의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항목을 달리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각주 5)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동시에 함께 존재하심에 대해서는, 위트니스 리,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1991년 발행) 304-305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문제가 된 요한복음 7:39의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의 바른 의미


 먼저 관련 성경본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But this spake he of the Spirit, which they that believe on him should receive: for the Holy Ghost was not yet given, because that Jesus was not yet glorified(KJV)).


위 구절은 단순한 것 같지만 매우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점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a) 위 구절을 단순히 <삼위일체의 제 3격인 성령님을 말하는 구절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위 성경 본문 자체가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 본문은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제 3격 성령>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으로 어느 때 어떤 이유로건 '아직 계시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언뜻보면 이상해 보이는 이러한 성경본문 자체를 정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b) 성경 번역자들은 이런 모순을 인식했는지 원문에 없는 '저희에게'(영어 성경은 'given')라는 말을 삽입하여 성도들 안에 아직 성령(그영)이 안 계신다는 의미라고 풀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소개할 앤드류 머레이의 지적처럼 이러한 임의적인 문구 삽입은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크게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문대로 '그영이 아직 안 계신다' 라고 읽고 그 바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c) 위 본문은 '그영이 아직 안 계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지 못한 것'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관계를 각각 구별도 되고 분리되기까지 하는 세 하나님들(삼신론)로 보아서는 안 되며, 삼위는 각각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으신 분들로서 구원의 경륜을 함께 통과하셨다고 성경대로 삼위일체를 믿을 때 비로소 이 구절을 이해하는 기초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우리는 과연 삼위 중 누가 성육신 하셨는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은 삼위 중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요1:14).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 안에는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는 성부와 성령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은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라고 말함으로써 신격의 일부인 제 2격(성자)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을 포함한 모든 신격이 아들 안에서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으나 그렇다고 분리되시지도 않는 상태'로 육체를 입었음을 말합니다(각주 6).

 

d) 이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때'는 언제이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검토 할 차례입니다. 누가복음 24:26에서 주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에 들어간다'는 말은 눅24:46, 고전15:43상, 행3:13상, 15상, 빌3:21에 근거해 볼 때, 예수님의 부활 시에 그분이 성육신 때 입으셨던 육의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으로서의 주 예수님(제 2격)은 본질상 원래부터 영이시지만(요4:24), 그분이 성육신 때 입으신 인성(사람의 부분)은 죽음과 부활을 거치시면서 '영광의 몸'이 되셨고 결과적으로 그분의 신성과 인성 모두가 영, 즉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5:45 하반절이 말하는 이러한 생명주는 영이 바로 요한복음 7:39이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아니하신고로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한 말씀이 가리키는 '그영'인 것입니다.

 

e) 따라서 요7:39이 말하는 '믿는 자의 받을 그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의 구조 속에서 생각하는 제 3격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위 d) 항목에서 설명한 대로의 '생명주는 영' 또는 '그영'(the Spirit)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논문 작성자의 생각처럼 우리가 믿을 때 제1, 2격 하나님을 제외시킨 제 3격의 성령만을 영접한다고 이해한다면, 매우 심각한 진리적 오류와 체험적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요한 일서 5:12에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라는 말씀과 충돌합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성령>이 있는 자가 아니라 <아들>이 있는 자가 생명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설사 성령이 내주해도 아들이 없다면 결국 생명이 없는 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만일 이런 모순을 대충 넘기기 위해 성령이 곧 아들이라고 한다면 양태론 이단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그렇다고 성령은 아들을 대리함으로 성령이 있는 것이 곧 아들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 '이 비밀은 곧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등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내주를 말하는 수많은 성경 본문들과 충돌을 일으킬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제 3격 성령은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고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는 상태로 육신을 입으시고 또 부활하사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고 믿는다면, 요7:39를 포함한 성경의 모든 말씀과 일치하고 우리의 체험과도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여정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 되심의 방면을 말한 것이지만(롬8:10), 하나님에게는 이와 달리 하늘 보좌와 그 우편에서 통치하시고 중보하시는 방면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롬8:34).


각주 6) 골2:9의 '신격'(데오테스, 2320)은 사랑, 거룩, 공의 같은 하나님의 '신성'(롬1:20)(데이오테스, 2305)과는 다른 단어로서 성부, 성자, 성령 같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런 '신격의 모든 충만'(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이 '예수 안에서 육체로 거하신 것'(For in Him dwells)이 성육신에 대한 보다 더 정확한 이해입니다.  


(3) 요한복음 7:39의 그영에 대한 앤드류 머레이의 관점


화란 개혁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추구하는 경건한 믿는이들에게 존경받는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영' 제 5장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에서 요7:39의 '그영'에 대해서 매우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위 각주 4 참조). 그 중 인상적인 대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표현은 매우 기이해 보인다. 그래서 '삽입된' 말씀-개역성경은 '저희에게'를 삽입함-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서야 비로소 성령이 임하시라는 사실의 참된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이끌 것이다."(41p).

 

" 또한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아들이 육신이 되심으로 새로운 현존의 무대에 등장하신 것도 알고 있다. 그 아들이 하늘로 되돌아가셨을 땐 하나님의 독생자로서는 변함이 없으셨지만 이미 예전과 같은 존재는 아니셨다. 그는 인자로서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나신 자였으며 스스로 완전하게 하시고 깨끗케 하신 영광스런 겸손으로 옷입으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영도 실상 새로운 존재이셨다."(41-42pp).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그는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영, 즉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후 높이 들림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임하신 것이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으로 짜여진 생명을 지니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그리스도가 오심은 인간의 죄와 그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함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제로 다시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었다"(42 p).

 

"그 죽으심 안에서 죄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자신을 마치 곡물의 씨앗처럼 드리심으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셔야만 했다.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얻은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그의 영은 그의 인간적인 생명의 영으로서 임하셨다. 그 생명이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영광을 얻은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개인적으로 수행하시고 획득하신 모든 것, 즉 그 자신과 그의 영광스런 생명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안에 새로운 거룩한 인간성을 완성하심으로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생명을 이제 전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성령은 하나님의 인격적 생명이셨던 것처럼 인간들의 인격적 생명이 되실 수 있게 된 것이다."(43 p).

 

결론적으로, 앤드류 머레이나 위트니스 리는 논문 작성자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그것들은 양면성을 가진 성경 진리의 또 다른 면을 말했거나 일반적인 인식보다 더 깊은 부분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일 뿐 결코 비성경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차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기존의 관념이 절대적이고 선한 것이며, 새로운 관점은 낯설기 때문에 옳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의 태도 대신, 과연 어떤 것이 성경에 더 부합되는 가를 고려하며 진지한 자세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3. 삼일 하나님에 대해서


1) 논문 작성자의 비판요지


'이들은 삼위일체를 삼일 하나님이라고 특별하게 부른다. ...세 분의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각각 그 시대를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으로 보며...<그영과 몸> 105-106 pp에서는 '하나님-사람에는 성육신됨과 인생과 만유를 포함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있다', 라고 하고, <하나님의 경륜> 48 p에서는 '삼일 하나님이 한 사람이 되셨는데 그분의 이름이 예수시다' 라고 하며, <그영과 몸> 17 p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그분으로 생명주는 영이 되게 했다. 끝으로 이 부활은 삼일 하나님을 최종완성 시켰으며...'라고 한다. 이것은 좀더 발전한 양태론적인 단일신론에 불과하다. ...이러한 주장은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말에 따르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게 된다. 즉 신약의 하나님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 그영은 완전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보다 더 우수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자신의 존재가 불완전하다면 누가 믿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완전한 존재양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불완전한 분이 아니시다.'  


2) 비판에 대한 반박 또는 해명


(1) 개괄적인 반박:

 

우선 '삼일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영어의 ‘Triune God’을 직역한 것입니다. 서방세계에서 영어 ‘Triune God’은 '삼위일체(Trinity)’와 병행되는 지극히 일반적인 용어일 뿐이며,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손쉽게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안입니다.(각주 7) 결국 이것은 ‘삼위일체’에만 익숙해져 있는 한국의 신학도들이 익숙지 않기 때문에 갖게 되는 오해와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보다 깊이 이 부분을 연구하다보면 오히려 삼일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진리적으로 한층 더 타당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방교회측은 논문 작성자의 오해와는 달리 아버지가 아들이 되시고 다시 아들이 성령님이 되는 식의 양태론을 믿지 않습니다. 인용 소개한 글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가 쓴 510쪽 분량의 '하나님'(한국복음서원, 1991)이란 책 302-308pp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영원하시고, 동시에 존재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양태론을 정말 아는 사람들은 삼위가 영원히 존재하고 셋이 동시 존재하심을 믿는 양태론은 어떤 형태이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디에도 하나님의 위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언급이 없고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그분보다 열등한 분이라는 언급이 없음에도 임의로 이런 표현들로 남을 공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 삼일 하나님(또는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 역시 서두에 지방교회측 인터넷 자료나 책자 등을 통해서 보다 정확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각주 7)  루터교단 관련 싸이트 http://www.triunegod.net 를 보면 삼위일체를 'Triune G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삼일 하나님이 과정을 거쳤다거나 완성되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신성이 아닌 그분이 입으신 인성에 초점을 맞춘 말임


논문 작성자의 오해는 먼저 성육신 하신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한 차이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제 1격과 3격은 '분리되어' 저 하늘에 남아 계시고  오직 삼위 중 1/3인 제2격(성자)만 성육신하셨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제 2격이 성육신의 주체이시되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 성부와 성령 또한 성자 안에서 성육신하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라는 골로새서 2:9과 요한복음 8: 16, 29 14:10-11, 20 등의 말씀은 후자가 더 성경적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과정을 거쳤다', '완성되었다'라는 말은 주 예수님의 변함없으신 신성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 안에서 통과하시고 인성 안에서 이뤄진 사실들을 말한 것입니다.(요1:14, 고전15:45)(각주 8).


각주 8) 사실은 동일한 오해가 앞서 언급한 최삼경 목사와의 토론에서도 제기 되었고 또 충분히 반박된 바 있습니다. 자세한 반박 내용은 최삼경 목사와의 토론 글 모음 싸이트인  http://www.forthetruth.or.kr/booklets15.htm 의 네번 째 글 후반부에 있는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한 최삼경 목사의 비판을 반박함'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논문 작성자는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구별되나 분리되심 없이 동시 존재하시고 또한 상호내재하시는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와 그러한 삼위 하나님이 구원의 경륜을 위해 거치신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혼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지방교회 측의 이러한 양면을 모두 성경대로 믿는 균형잡힌 삼위일체관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우리가 삼위-특히 성령과 예수님 - 중 누구를 영접했는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고, 힘써 형상을 본 받아야 할 본으로서의 '맏아들'(롬8:29)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 부재하여 우리 안에서 이뤄져 가야 할 구원의 과정과 최종목표(빌2:12, 롬5:10, 8:29, 계3:12, 21:2, 9-10)를 상실하고 구원을 죽은 다음 천국가는 장소적 이동으로만 생각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아 왔습니다.  

 

4. 성경의 가르침, 교회사적 고찰에 따른 비판에 대한 반박


논문 작성자는 논문에서 위와 같은 직접적인 지방교회 측 주장을 원문 인용 후 비판한데 이어서 성경과 교회사를 기준으로 다소 중복된 비판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논문 형식을 위해 이런 식의 추가 서술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추가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 부분만 간략하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의 가르침


논문 작성자의 비판 : '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정하고 성령만을 강조하여 마치 성령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인 것처럼 이해하는 위트니스 리...양태론적인 일원론자로 볼수 있으며...삼위 하나님이 마지막 '그영'이라는 성령으로 완성된다고 하여 ...이런 것은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한 것이고 점차로 발전해 왔다고 볼수 있다.'


지방교회측 반박: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삼위의 인격을 구별함에서 지나쳐서 세 분이 각각 '분리되기도 한다'라고 믿는다면, 요한일서 5:12, 골로새서 3:4에 비춰볼 때 교리는 많이 알지만 정작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없는 종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가 구별은 되나 분리는 안되시는 존재 양식으로 성육신, 죽음, 부활을 통과하신 후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을 믿고 이 영을 영접한다면 참된 거듭남과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 구원의 과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논문 작성자의 비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켜 인성으로는 아들 될 자격이 없다고 까지 말했던 것을 기억하라...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임을 증거하고....그리고...참 인간이심을 증거한다. ..그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있으며 이 신성과 인성은 혼합된 것도 아니며, 연합도 아니며, 신비로운 상태로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예수'만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도'만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지방교회측의 반박: 지방교회측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15:44-45 본문처럼 주 예수님이 부활 전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구절들의 의미를 좀 더 섬세하게 알려면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여 논하는 것이 불가피 합니다. 요7:39의 '예수가 영광을 입지 않았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과정 안에서 예수의 인성이 약화된 적도 약화시킨 사실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방교회 측은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 후 높여지셨다는 말합니다.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소홀이 할 때 소위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다'라는 이상한 주장조차도 성경진리처럼 전파될 우려가 있습니다. 필요할 때 적절하게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주 예수님의 양성의 신비로운 조화를 더 성경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논문 작성자의 비판: '위트니스 리는 성령을...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왔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선재성을 의심하는 것이며...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구약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이들은 성령을 복합적인 영으로 보고 있다...그렇게 되면 성령 하나님을 어떤 신적인 화합 물질처럼 보아야 할 것이다...이것은 ...성령의 위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고...성령 하나님을 유사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지방교회측의 반박 : 서론에서 이미 밝혔지만 지방교회측도 성령님이 영원하시다는 사실은 믿습니다. 또한 성령이 제 1격, 2격과 '분리된 존재'라고 믿는다면 삼신론에 해당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우리 안에 어떤 위격이 내주하시는가 하는 문제에 이를 때 성경의 언급들과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세히 다뤘습니다. 성령은 신적 화합 물질도 아니고 구별된 위격이 없으신 것도 아니고 유사 본질도 물론 아니십니다. 이런 것들은 지방교회와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전 15:45가 말하는 <생명주는 영>을 만일 논문 작성자처럼 삼위 중 1, 2격을 제외시킨 <제 3격만>이라고 본다면 마지막 아담인 제 2격이 부활 후 제 3격이 되었다는 말이 되어 큰 혼란과 암초에 봉착하고 말 것입니다.

 

2) 교회사적인 비판적 고찰


논문 작성자는 이 항목에서 교회역사상 있었던 니케아 회의, 콘스탄니노플 회의, 켈세돈 회의 등에서 논의된 것들을 장황하게 소개한 다음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논문 작성자의 비판: ' 지방교회 역시 삼일 하나님이...그영이 되었다고 한다...아리우스주의와 흡사하다...삼위 하나님을 양태론적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경륜이란 개념을 강조하면서 어떤 때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또 어떤 때는 아들...또 다른 때는 그영으로 나타나셨다고 한다..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신성과 인성을 혼합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유티케스의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측의 반박: 양태론이니 유티케스와 같다느니 하는 말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 지방교회와 무관합니다. 이 점은 예장 통합측 전 이단 상담소장이었던 최삼경 목사와의 토론에서 충분히 반박되고 해명되었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었다'라고 했을 때 쓰인 단어는 '밍글링'(mingling) 으로서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이 서로 섞이고 연합되더라도 고유의 특성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 2:4에서 고운가루와 기름이 섞여져 소제를 만든다는 언급에서 쓰여진 성경 용어이기도 합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자세한 것은 위 최 목사와의 논쟁 지방교회측 네 번째 글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밍글링이라는 단어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III. 결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 측 신앙은 성경 66권과 근본주의 가르침 그리고 교회 역사상 생명의 노선 안에 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도움을 통해 진리와 생명의 체험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계 내에는 이러한 방면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천준혁님 처럼 신학 수업을 막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지방) 교회측 혹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해 참된 이해를 갖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비판에 많은 무리가 따른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실 위에서 다룬 주제들은 매우 깊은 진리임으로 이런 간략한 글로는 세세한 것을 다 다루고 논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진한 부분이 혹 있다면 추가적인 대화를 통해 더 다룰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지난 80년 대 초반부터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신론을 천준혁 님처럼 오해하여 비판을 가해 왔던 이단 변증 단체인 CRI 측과 Answers In Action 대표인 패산티노 여사가 최근에 종전의 태도들을 모두 바꾸었습니다. 즉 텍사스 대법원에 제출된 공식 문서(각주 9)에서 “지방교회는 이단이 아니다” 라고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양측이 인내와 그리스도인의 사랑 안에서 오랫동안 열린 대화를 나눠 온 결실입니다. 이에 앞서 교파를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신학 교육을 자랑하는 플러 신학교측도 동일한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각주 10).


한국 교계 내에서도 천준혁 님을 포함하여 지방교회 측을 잘 알지 못함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열린 대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각주 9) 미국의 저명한 이단변증 단체인 CRI 현 책임자인 'Hank Hanegraaff'는 2006년 8월에 텍사스 대법원에 제출 된 'Brief of Amicus Curiae' 문서에서 '이단'이라는 단어가 사회학적이든 교리적이든 지방교회에 적용되어서는 않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썼습니다. 'Gretchen Passantino' 여사 역시 이런 행크 해나그래프의 결론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문서로 밝혔습니다. 해당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From my own direct study of and extensive interaction with the Local Church and Living Stram Ministry, I have concluded that the word "cult" does not apply to the Local Church either sociologically or theologically."


각주 10)
http://www.forthetruth.or.kr/mboard.php?bcode=notice&mode=read&page=1&cat=&part=&keyword=&bidx=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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