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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39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

 

요 7:39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

 

 
신약의 약 절반을 쓴 사도 바울은 우리 존재와 밀착된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1:27),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 (갈2:20),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음”(빌3:8),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 (빌3: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심”(롬8:29), “교회는 그의 몸임” (엡1:23)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한국교계는 사람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주로 ‘제3격 성령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배경에는 성부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아들은 지상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신 다음, 하늘에 머무시면서 자신을 대리하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개혁 신학의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물론 이 자체는 큰 틀만 본다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을 너무 절대시하여 어느 한 위격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다른 두 위격이 함께 상호내재 하신다는 정통 삼위일체의 고전적인 원칙을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즉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3격)만 계시고 성자와 성부께서는 안 계신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전후 문맥에 대한 고려없이 성경에 언급된 ‘푸뉴마’ (πνεῦμα)를 ‘제 3격 성령 만을 가리킨다’고 성급하게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개역 성경이 원문에 ‘성(聖, holy)이란 단어가 없을 때도 무조건 ‘푸뉴마'를 ‘성령’ 으로 번역한 것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안에 오신 분이 바울이 서신서에서 말한 그 ‘그리스도’ (골 1:27) 이신지 아니면 ‘보혜사 성령’ 이신지를 놓고 이견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관련 성경본문 이해와  하나님을 삶속에서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방면 모두에서 다소 혼란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글은 요한복음7:37-39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외치셨던 ‘믿는 자가 받을 영’이 제 3격 성령님만을 가리키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쓰였습니다.

 
즉 오리겐 이후 지금까지 난해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어 온 위 구절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 안에 내주 하시는 분이 제 3격 성령님만이라는 기존의 일부 시각과 위 사도 바울의 관점 사이의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 난해 본문 중 하나임.
 

일각에서는 해당 본문에서 언급된 ‘영’(푸뉴마)은 당연히 ‘제 3격 성령님’인데 공연히 복잡하게 만든다는 시각도 있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신약 신학자들은 요7:37-39이 요20:22 등과 함께 해석이 쉽지 않은 난해 구절임을 인정합니다.

 
한 예로 J. Sidlow Baxter는 성경난제 해설(Studies in Problem Texts)(서울:생명의 말씀사, 1976) 제 1장에서 이 본문을 성경 난제 중 하나로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대표적인 개혁신학자들인 존 칼빈과 H.N 리델보스는 요 7:39에서 말하는 영이 제 3격 성령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 현현, 또는 선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변종길, 성령과 구속사, 개혁주의신행협회, 204쪽,  2006). 즉 칼빈에 따르면, 요7:39의 영은 ‘제 3격 성령’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gratia spiritus) 혹은 “성령의 충만한 현현”(plena spiritus exhibitio)입니다. 이것은 최소한 이 영이 ‘제3격 성령님’이라는 통상의 견해와 상반됩니다.

 
- 성경본문에 대한 정밀 검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그영( the Spirit)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요7:37-39)

 
τοῦτο δὲ εἶπεν περὶ τοῦ πνεύματος οὒ / ὃ ἔμελλον λαμβάνειν οἱ πιστεύσαντες εἰς αὐτόν· οὔπω γὰρ ἦν πνεῦμα, ὅτι Ἰησοῦς οὔπω / οὐδέπω ἐδοξάσθη.

 
위 헬라어 원문에서 보듯이 요한복음 7:39 본문에서 ‘영’(푸뉴마)은 두 번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영이 어떤 영인가를 놓고 크게 볼 때 두 가지 관점 즉 ‘성령’(Holy Spirit)으로 읽는 경우와 ‘성’ 자를 빼고 읽는 견해가 존재합니다.

 
구체적으로, KJV (the Spirit/the Holy Ghost) 외에, 미국 표준역(the Spirit/the Spirit), Darby 역 (the Spirit/(the) Spirit), 확대역(the Spirit /the (Holy) Spirit), Ryrie스터디 바이블(the Spirit/the Spirit) 등 거의 모든 영어 성경은 ‘Holy’ 를 빼고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헬라어 성경 단어 연구의 대가인 마빈 빈센트는 해당 구절의 ‘the Holy Ghost’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최상의 원문들은 ‘성’(holy)을 생략하며, 원문에는 정관사도 없다. 따라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은 단지 영이다. 원문대로는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임(The best texts omit αγιον, holy, and the definite article is not in the text, so that the strict rendering is simply spirit. Lit., spirit was not yet. (M. 빈센트, 신약 단어연구, 16쪽)

 
위에서 보듯이 많은 주석가들이 ‘하기온’ (αγιον)’이 없는 것을 원본으로 간주하나(변종길,  위 책, 203쪽), TR 등의 원문에는 ‘하기온’(αγιον)’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공정하게 말한다면, 현재 두 견해 중 어느 한 쪽만이 절대적으로 지지를 받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계 내에서 오랫동안 주된 성경으로 읽혀 온 개역 성경이 번역한 원문은 위 빈센트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하며 ‘하기온’(聖)(αγιον)’이 없습니다.

 
또한 백보 양보해서  KJV 계열 원문을 따라 ‘성령’으로 읽더라도 그러한 원문 자체가 여기서의  성령이 다른 두 위격은 제외된 제 3격 하나님만을 가리킨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7:39  헬라어 원문에 대한 더 심도있는 분석자료가 필요한 분은 아래 싸이트에 소개된 영어 논문 pp.6-7를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affcrit.com/pdfs/1997/01/97_01_a2.pdf )
 
 
-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 해석- 두 가지 견해
 

해당 본문(Spirit was not yet)에 대한 해석은 크게 볼 때, 1)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에도 성령은 있었으나 오순절 이후의 성령과는 그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관점과 2) 어떤 특정시점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특정시점 후에 존재하는 어떤 영을 가리킨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차례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1) 변종길 교수님 등의 견해


현재 고려신학 대학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변종길 교수께서는 이 주제로 1992년에 네덜란드 깜뻔 개혁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논문은 ‘성령과 구속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2006)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깜뻔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김병국 교수님은 자신의 논문 에서 위 논문 내용을 다룬 바 있습니다. 즉 김병국 교수께서는 변 교수님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오순절의 성령은 그 이전의 역사에 비해 풍성하게 주어졌다.


둘째, 39절의 ‘받을’이라는 단어는 앞으로 받게 될 성령의 역사가 성령의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활동과는 다른 어떤 것임을 시사한다.
 

셋째, 십자가 전의 성령은 영광받으신 예수님의 성령은 아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신예수님의 성령은 아니다.
 

넷째, ‘아직’이라는 단어는 구속사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단어는 성령의 오심과 역사하심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이후에 시작될 시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김병국, 요한복음 성령론의 새로운 해석: 역사적 배경을 기초로, 진리논단 제 13호-기독교 학부 편, 142쪽).
 

그리고 김 교수께서는 자신의 논문에서 “많은 주석가들은 (필자가 본 바로는 모든 주석가들은) 이 부분을 ‘성령의 역사의 정도’의 차이로 해석한다”고 전제하고, 이어서 위 네 가지 요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평합니다.
 

“첫째와 둘째의 지적은 성령의 역사의 정도 혹은 그 양태에 관한 것이다. 즉 오순절 이후의 성령의 역사는 그 이전의 역사와는 다르게 매우 강하고 독특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39절에 대한 설명으로는 미흡하다.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지 어떤 정도나 양태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와 넷째 설명은 오순절 이후의 성령이 그 이전의 성령에 비해 어떤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 차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위 논문집, 142쪽).
 

물론 김 교수님은 자신의 해석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옳은 것”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본문 자체는 선입관을 배제하고 본다면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그 시점 그리고 이유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볼때, 위 평가는 변종길 교수님 논문의 결론의 한계를 매우 날카롭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앤드류 머레이 등의 견해


화란 개혁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그가 쓴 경건 서적이 국내에도 여러 권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앤드류 머레이도 요한복음 7:37-39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기독교문서 선교회, 1999) 제 5장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에서 이 주제를 다룹니다. 중요한 관련 부분들을 이곳에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 먼저 앤드류 머레이는 요7:39 성경원문에 대해서는  ‘저희에게’라는 삽입문구를 뺴는 것이 오히려 원문을 바로 이해하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개시 번역상의 미묘한 차이를 감안하여 영어원문과 저의 개인 번역을 함께 제시하겠습니다. 영어 원문은 Andrew Murray, The Spirit of Christ(C. L. C., 1985(1978년 초판) 참조)
 

“The Holy Spirit was not yet; because Jesus was not yet glorified. The expression‍: the Spirit was not yet, has appeared strange, and so the word given has been inserted. But the expression‍, if accepted as it stands, may guide us into the true understanding of the real significance of the Spirit’s not coming until Jesus was glorified (pp.37-38).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셔서 성령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그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라는 표현은 매우 기이해 보인다. 그래서 '저희에게' 라는 말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원문 그대로 읽는 것이 예수님이 영광받으시고 난 후에 그영께서 임하시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게 해 준다."(41p).


* 또한 앤드류 머레이는 요7:39에서 언급된 영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영,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사람(神人)의 영 즉 참 하나님의 영이시자 참 사람의 영”으로 보고 이 분께서 예수님께서 영광받기 전에는 안 계셨다 라고 이해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요7:39의 난제를 ‘정도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로 접근한 최초의 개혁 신학자로 보입니다. 


“We have seen that God has given a twofold revelation of himself: first as God in the Old Testament, then as Father in the New. We know how the Son, who had from eternity been with the Father, entered upon a new stage of existence when He became flesh. When returned to heaven, He was still only begotten Son of God, and yet not altogether the same. For He was now also, as Son of Man, the first begotten from the dead, clothed with that glorified humanity which He had perfected and sanctified for himself. Likewise, the Spirit of God poured out at Pentecost was indeed something new.” (p.38)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중적으로 계시하셨음을 본다. 먼저는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그리고 신약에서 아버지로 계시하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셔 온 아들께서 육신되셨을 때 어떻게 새로운 존재의 단계에 들어가셨는지를 안다. 그 아들께서 하늘로 되돌아 가셨을 때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지만, 예전과 같은 존재는 아니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금 또한 죽은 자들 중에 먼저 나신 인자로서 그분 자신을 위하여 온전케 되고 거룩케 된 영광스러운 인성을 옷 입으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부어지신 하나님의 영께서도 실상은  새로운 존재이셨다. “


“When poured out at Pentecost, He came as the Spirit of the glorified Jesus, the Spirit of the incarnate, crucified and exalted Christ, the bearer and communicator to us not of the life of God such as, but of that as it had been interwoven into human nature in the person of Christ Jesus. It is in this capacity especially, that He bears the name of Holy Spirit, for it is as the indwelling one that God is holy.”(p.38)


“오순절에 부어지셨을 때 그분은 영광받으신 예수님의 영, 곧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높이 올려지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임하셨다. 그분은 원래 그대로의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인간 본성과 서로 긴밀하게 결합된 하나님의 생명을 지니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분이 되신 것이다. 그분꼐서 성령이라는 이름을 가지시는 것은 특별히 이런 능력 지니게 되심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그분께서 하나님으로서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And of this Spirit, as he dwelt in Jesus in the flesh and can dwell in us in the flesh too, it is distinctly and literally true; the Holy Spirit not yet. The Spirit of the glorified Jesus, the Son of man become the Son of God-He could not be until Jesus was glorified. This thought opens up to us further the reason why it is not the Spirit of God as such, but the Spirit of Jesus, that could be sent to dwell in us....”(P.38)


“그리고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 안에 거하셨던 것처럼 육신을 입은 우리 안에도 거하실 수 있는 이 영에 관하여, 성령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글자 그대로 사실이다.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분이신, 그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은 그분께서 영광받으시기 전까지는 계실 수 없었다. 이러한 사상은 왜 보내심을 받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단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신지의 이유를 더 고찰해 볼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And the Holy Spirit could come down as the Spirit of the God-man-most really the Spirit of God, and yet as truly the spirit of man. He could come down as the Spirit of the glorified Jesus to be in each one who believes in Jesus, the Spirit of His personal life and His personal presence, and at the same time the spirit of the personal life of believer.”(p. 40).


“성령은 ‘하나님-사람(神人)의 영’ 즉 참 하나님의 영이시자  참 사람의 영으로서 임하실 수 있었다. 그분은 영광받으신 예수의 영 즉 그분의 인격적인 생명의 영이요 그분의 인격적인 임재이자 동시에 믿는 이의 인격적인 생명의 영으로 오셔서 예수님을 믿는 각 사람 안에 계실 수 있게 되셨다.”


위 발췌문들을 근거로 우리는 요7:39의 ‘그영(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 라는 본문에 대한 앤드류 머레이의 관점을 다음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앤드류 머레이는 요7:39의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를  예수님이 영광받으시기 전에는 <하나님-사람의 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이것은 <제 3격 성령>이 믿는 이들 안에 안 계셨다는 의미라고 본 위 변종길 교수의 주장과 차별화 된다. 


(2) 그는 믿는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받은 영이 이 ‘하나님-사람의 영’이라고 말한다.


(3) 그는  이 ‘하나님-사람의 영’을 간혹 ‘성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요7:39의 본문을 ‘성령’으로 표시한 KJV 번역을 존중하되, 그 성령(the Spirit) 이 바로  ‘하나님-사람의 영’(the Spirit of God and man)이다 라고 ‘해석’ 했을 수는 있다.


이어서 요한복음7:39의 그영을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한 또 한 명의 신학자인 S. H. Hooke 가 쓴 논문 “The Spirit was not yet” 끝 부분 일부를 번역 소개 하겠습니다.


(자료출처: 영국 캠브리지 저어널  New Testament Studies 1963년 7월호(vol.9) pp. 372-380.  http://journals.cambridge.org/action/displayIssue?jid=NTS&volumeId=9&issueId=04&iid=3339368# )


“바울의 두 가지 언급이 요한복음 7장 39절의 명백한 역설을 이해하도록 빛을 비춰준다. 첫째는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인데, 거기서 그는 창세기 2장 7절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아담은 산 혼이 된 것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고 함으로 옛 창조와 새 창조를 대비 시킨다. 두번 째는 “지금 주님은 그영이시니”라고 한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이다.
 

바울은 처음 언급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들어가셨던 삶의 양식(the mode of life)이, 새 창조의 일부가 된 믿는 이들 안으로 주어지실 수 있는(can be imparted) 분임을 선언한다. 이어서 그는 두 번째 언급에서 요한의 말처럼 예수께서 영광 받으시기 전까지는 가능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새 창조 안에서 운행하실 수 있음을 단언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의 행동을 지시하시고 말씀을 불어 넣으시는 야훼의 산발적인 활동에 대해 말해 왔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께서 원래 계시던 하늘로 휴거되시고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시기 전까지는 그 영(the Spirit) 께서 믿는 이들 안에 들어 오셔서 그들의 생명이 되시고 또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함과 같은 그 예수의 생명을 믿는이 안에 산출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영(the Spirit)의 주어짐이 가능하기 전에, 신성한 경륜 안에서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신 결과로 새로운 어떤 것(a new thing)이 존재하게 되었을 필요가 있었다.

 
(이하 부터는 영어원문과 개인번역을 함께 소개해 보겠습니다)

 
The Eternal had entered into Time and in the order of time-experience it could be said that the Incarnated Word has assumed a new form of existence in becoming a life-giving Spirit, and that, correspondingly, the Spirit had assumed a new mode of existence in virtue of which he could become the life by which the whole of the new creation lived with the life of him who is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379-380)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 오셨다. 그리고 시간-경험의 질서 안에서 그것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즉 육체가 되신 말씀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심으로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지셨다. 같은 맥락에서 성령께서는 새로운 존재양식을 가지게 되셨다.그것에 의해 그분은 새 창조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분(예수님)의 생명을 지니고 살수 있도록 새 창조의 생명이 되실 수 있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S. H. 후크는 요한복음 7:39의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를 고전 15:45 (생명주는 영), 고후3:17(주는 영이시니)과 연관지어 설명합니다. 즉 그는 성육신 하신 말씀께서 (부활 후) 생명 주는 영이 되셨고, 바로 이 영이 ‘새로운 존재 양태’로 믿는이들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되신 분임을 암시합니다. 이런 관점은 큰 틀에서 볼 때 앤드류 머레이의 견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7:39의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 에서 언급된 영이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는 바로 이 영이 주님을 믿을 때 “믿는 이들이 받을 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합니다.
 

지금까지는 위 영을 원문에 없는 ‘저희에게’(given)라는 말을 번역시 삽입한 후 제 3격 성령께서 믿는 이들 안에 안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듣기에는 그럴듯 하지만 사본 상의 근거가 희박합니다. 또한 이런 해석은 위 김병국 교수님의 지적처럼 ‘그영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본문이 ‘성령의 역사의 정도의 차이’가 아닌 ‘어떤 존재’가 없었다는 점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견해는 영이 안 계신 이유로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한 설명에 있어 설득력이 다소 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견해보다는 비록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에는 생소한 듯하나 성경본문에 충실한 또 다른 해석에 귀를 기울여 볼만 합니다.
 

그것은 ‘The Spirit was not yet”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어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영은 어떤 시점(예를 들어 예수께서 영광받으신 시점인 부활시점)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활 후 새롭게 존재하게 된 고전 15: 45의 생명주는 영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본문에 충실한 해석 이라는 점에서 추구하는 믿는 이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전제가 옳다면, 우리는 요 7:39의 그 영을 ‘하나님-사람(神人)의 영’(복합적인 영)으로 본 앤드류 머레이의 관점을, 제 3격 성령만의 내주로 보는 관점을 대치하는 대안으로 진지하게 고려해 볼 근거를 가집니다. 또한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신 생명주는 영(고전15:45)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 됨으로 우리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1:21)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과 동일한 믿음의 고백과 삶의 간증을 가질 기초를 소유하게 합니다. 거듭난 이후 우리의 믿음 생활은 매 순간 내가 아니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꼐서 사시는 삶 입니다.(끝)
 

추신: 이 구절은 ‘제 3격이신 성령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거나 또는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에 있어서 제 2격(아들)이 제 3격(성령)이 되셨다’는 주장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제가 아는 한 이 곳에서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바른 의미를 함께 검토할 때 이런 두 가지 문제로 더 이상의 불 필요한 논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위에서 다뤘던 우리가 영접한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과의 관계, 소위 “안에”(in)의 의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성의 내주 여부 등은 여전히 추가 연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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