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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종교개혁 - 모든 지체가 신언함

 

2003년 겨울훈련집회 메시지 10 의 주제는 <교회 건축을 위한 뛰어난 은사> 곧 신언(prophesyig)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16:18에서 자신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누굴 통해 그 일을 하실지에 대해서는 고전14:4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방언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고, 신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나니(원문에는 '덕'이란 말이 없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내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이 땅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복음전파, 양육, 예배 시의 말함 등등이 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내는 신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모여 집회하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큰 주제입니다.


제가 약 20년 전인가요. 이 형제님의 책 'How to meet'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한 10 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리고..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으로 버스와 전철을 오가며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노트에다가 빡빡하게 써서 거의 열권에 가까운 노트를 한국복음서원에 들고 갔는데... 한 줄 쓰고 한 줄 띄고 이런 식으로 써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그냥 가지고 온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성경에 그리스도인의 예배가 어떠해야 한다는 <예배 형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말이 인상에 남습니다. 이 말은 예배 형식이 다르다고 해서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거나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현실을 돌아볼 때 지금 이 시간에도 기독교계 내에서는 주일과 주 중에 있는 여러 차례의 예배시 설교를 목사 혼자 준비하는 것이 큰 부담입니다. 또 설교준비만 하고 있을만큼 다른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그러다 보면 설교내용이 늘 은혜가 되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성도들은 목회자 입만 바라보고 예배보러 오고... 좀 은혜가 되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 예배당으로 성도들이 몰리고...


어느 목회자의 설교가 은혜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우리는


1) 예배시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귀만 가지고 가서 듣는 예배형식이 과연 성경적인가?


2) 이런 체계(한 사람만 말하고 나머지는 듣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는가? 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 볼 필요는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성경을 근거를 가지고 실제로 몸을 건축하는 실행을 할 때 우리는 양심의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 사람만 말하는 식의 예배는 사도들이 각 교회들을 방문했을 때 소위 사역집회를 가질 때는 그리했지만(행20:7), 그 지역에 붙박이로 남아서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장로나 목사가 매 주 혼자만 말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린도 전서 14장은 목사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지체된 성도들이 신언의 말을 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고전14:1: 31).


또한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듣기만 한다면 말하는 사람은 기능이 계속적으로 강화될 것이고, 듣는 사람들은 편해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행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효과는 매우 적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특정 예배당 한 곳에 오래 있어 온 성도들은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미리 꿰고 있을 만큼 들어 아는 지식은 많을지 모르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을 해 내는 면에서 있어서는 영적인 벙어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역사를 볼 때 이러한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듣고, 듣는 사람은 평일에는 말하는 사람을 위해 열심히 돈 벌어서 사례하는 체계>는 하루 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경적인 실행이 아니라고 해서 모든 지체들이 신언하는 성경적인 방식으로 바꿔가는 것은 가히 혁명에 가깝도록 어려운 일입니다. 당장 혼자 말하던 사람은 말할 기회가 줄어 들어서 불만이고, 평소에 말 안하던 사람은 뭔가를 말해야하는... 안 하던 일을 하자니 고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성경 말씀대로 순수하게 믿고 따르는 길을 갈 때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알지만 이러한 성경적인 집회 방식에 대해서는 워치만 니 형제님이 1930 년대에 이미 이러한 진리에 대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 세계 지방교회들이 주일 예배 방식을 소위 모든 성도들이 신언하는 체계로 바꾸기 시작한 것은 1980년 대 초부터입니다. 이제 이러한 혁명적인 실행을 해 온지는 벌써 20 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고린도전서 14장의 성경적인 신언집회를 백 퍼센트 회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으나, 가장 성경에 근접한 집회 방식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앤드류 형제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수영장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맨날 수영장에는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만 멋진 폼으로 수영하고 다른 사람은 물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와 잘 한다 하며 구경만 하는 것은 성경적인 집회 모습이 아니다.


수영장에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든 뛰어 들어 물에서 놀게 해야 한다...(처음엔 개 헤엄, 어떤 이는 자유형, 어떤 이는 물 장구, 어떤 이는 개구리 헤엄을 치지만 자꾸 물 속에서 놀다 보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린 아이처럼 물장구만 치던 사람이 제법 폼이 나오는 수영 선수로 다듬어져 가고, 꼬로록 물 만 먹고 헤엄은 전혀 못치던 어떤이는 이제 물 속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수영을 도와 주는 위치에 서게 되고....) 이런 것이 교회의 신언 집회 모습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고린도 전서 14장의 집회를 이뤄갈 것입니다.


이제 이 집회에서 다룬 신언에 대한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신언의 정의


고린도 전서 14:1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신언을 하려고 하라(prophesy)>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언하는 것(개역성경은 이것을 예언으로 번역함)은 일반적인 이해처럼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말해내는 것 또는 그리스도를 위해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근거는


1)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서인 이사야서를 보아도 장래 일을 예언한 것은 극히 일부(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일 뿐 거의 대부분이 이사야가 하나님을 말해 내고 하나님을 위하여 말해 낸 기록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언은 장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포함하되 그것만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말내해는 것이 주된 의미입니다.


2) 고전 14:4 본문에 의하면 신언은 교회를 건축합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2020년에 LA에 지진이 나서 집들이 다 무너질 것이다 라는 예언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를 건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체험하거나 빛 비춤 받은 하나님의 말씀(그리스도)을 말해낼 때 은혜를 받고 공급을 얻어 듣는 사람들 안에 영적 생명이 자라게 됩니다.


3) 신언은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해 주기도 하고(고전14:3)...모든 사람을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권면을 받게 한다고 했는데(14:31)...다만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본 빛과 내가 체험한 말씀이 다른 지체들에게도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 그들로 주 앞에 바로 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2. 신언을 준비함


신언은 갑자기 방언이 터지고, 환상이 보이고, 병 낫게 하는 능력이 생기고 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사람 말을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갓난 아이가 사람으로 태어 났다고 해서, 나자 마자 유창하게 사람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아기는 사람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그 안에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말을 잘 하려면 자꾸 옹아리도 하고, 의미도 알 수 없는 말도 지껄이고 하는 연습의 방면과 부지런히 젖을 먹고 밥도 먹어 그 생명이 자람으로 또렷하게 말을 하게되는 방면이 요구됩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신언은 마치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체면을 차리고 실수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평생 외국어 못 배웁니다. 모처럼 신언했더니 누가 자기 쳐다보고 웃었다고 마음이 상해서 다시는 신언 안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바보같은 결정입니다. 또 신언 했는데 자신의 신언 내용을 놓고 남이 이러쿵 저러쿵 한다고 신언을 안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이상한 발음을 해서 남을 웃기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웃는지를 잘 물어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또 누가 신언 내용과 형식에 대해서 조언을 해 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이래야 신언에 진보가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마음의 준비 이외에


다음과 같은 신언의 구성요소들을 이해하고 있으면 좋습니다.


1)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딤후3:16-17, 겔3;1-4).
2) 성령님의 즉각적인 영감 (고전14;32, 37a, 요일1:6-7, 롬8:4).
3) 하나님의 권익과 경륜, 교회와 지방교회들, 세상, 개인 차원의 성도들, 우리 자신들에 대한 영적인 조망(엡1:17, 고전2:11-12).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아침에 주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 그분과 대화하는 친밀한 시간들을 꾸준히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간 후 평소에 부지런히 땅을 경작하여 소출을 가진 후 1년 3차 절기 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 갈 때 소출 중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주께 드리고 함께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신16:16).

 

3. 신언 내용을 풍성케 하는 자료


교회 밖의 분들은 소위 지방교회 안에는 목사도 없다고 하고, 신학도 안 한 사람들이 이 사람 저 사람 일어나서 말하니 그 내용이 보잘 것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 중엔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거나 전도사로 봉사하다가 교회 생활에 합류한 분들도 물론 계십니다. 더구나 1년 2 차례씩 약 일주일 이상 합숙을 하며 성경 66권을 연구해 오길 20 년 이상 지속해 왔습니다. 전 세계의 성도들 중엔 이러한 성경 추구 기회를 직접 경험한 분들도 많고 또 간접적으로 그 자료 책자나 비디오를 통해 이러한 풍성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을 성경 본문과 그 해설을 하루 분량으로 편집해서 공급하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료들은 거의 모든 성도들을 일반 목회자들 이상의 성경지식과 깊이로 장비시켜 줍니다. 물론 개인 차가 있고 어떤 것은 미처 우리의 체험이 되지 못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반 기독교계의 설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유능한 설교자가 1시간 동안 설교하는 것과 2-30 명의 성도들이 일주일 동안 준비한 신언 내용을 2- 3분씩 짧고 강하게 말해낸 것 중 어느 것이 더 풍성한지...어느 것이 성도들을 더 온전케 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가 더 풍성하고 더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목숨 걸고 시대의 조류를 거슬려...모든 성도들이 하나씩 하나씩 신언하는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되...특별히 신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1>

 

<신언하는 자는 교회를 건축하나니, 고전14:4>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나으니라, 고전14:19>

 

<너희는 다 ...하나씩 하나씩 신언할 수 있느니라 ye may all prophesy one by one...고전14:3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신언하기를 사모하며...고전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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