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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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에 대한 진리토론

첨부 1

 

방지기(박00)님께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계21:2, 9-10에서 언급된 새 예루살렘이 실제의 금으로 된 '황금성'이라고 가르치고 믿어 온 분들에게 그 말씀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을 다시 한 번 깊게 묵상'해 보시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단사상이 너무나 투텁게 참된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속여왔기 때문에 한 두번에 씻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깨닫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방지기 님처럼 "새예루살렘을 문자적인 도성 즉 진짜 금덩어리 집"으로 믿게 되면, 다음 두 가지 질문에서 폭로되는 엉뚱하며 참람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 갈4:26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새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고 했는데[방지기님의 영적인 출생은 진짜 금덩어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덩어리로 거듭난 것이 아니고 '은혜'이신 그리스도 자신 곧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영 안에 영접함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요1:14, 요일5:11-12, 요3:6). 금덩어리는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성도들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둘째, 계21:2, 9-10은 새예루살렘을 어린양(주 예수님)의 신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방지기님처럼 새예루살렘이 진짜 금덩어리라고 믿으면(이제는 말을 살짝 바꿔서 '문자적인 금'이라고 믿는다고 함) 예수님이 진짜 금덩어리(또는 문자적인 금덩어리)와 결혼(연합)한다는 참람한 이단사상이 됩니다. 구약에서 예표로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그분의 이름을 두셨지만, 신약 이후로 그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산 인격이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교회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 즉 거처로 지어져 간다고 거듭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22, 벧2:5, 엡4:11-16). 특별히 엡5장은 말씀의 물로 "사람인 성도들을 씻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신부로 단장하고 계신 것이 이 시대에 주님의 건축 역사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역하고 의심하고 쓸데없는 쓰레기들로 가득찬 재료들인 우리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감싸시며 영적양식으로 공급하시며 조금씩 변화되게 하시는 이 성화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지금"하고 계시는 일이며 신부인 우리의 체험들입니다(살전5:23).

 

어린양 예수는 돌덩어리 금덩어리 그것도 아니면 "물질적인 금은보석은 아니며 그렇다고 영도 아닌 문자적인 금은 보석-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런 말을 한 방지기님은 이해나 하십니까?-"과 결혼(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예루살렘 성=도성=어린양의 아내'라는 말에서 도성이 "물질적인 금은보석이 아닌 문자적인 금은 보석"이라는 뜬구름 잡는 해석이 바로 그 말한 사람이 혼돈 가운데 있다는 것을 폭로시켜 주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금은보석이 아니고 영적 의미를 가진 표현임으로 해석이 필요한 말이다 라고 쉽게 이야기 하면 될 것을 그렇게 되면 위트니스 리의 이런 주장을 동조하는 것이 되며 지금까지 진짜 금덩어리라고 주장해온 자신의 논리가 무너지고 마니까 이런 자신도 이해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토록 확신과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했지만 하나님 자신은 그를 빛으로 쓰러뜨려서 정신을 차리게 하셨습니다. 과연 누가 기세 등등하여 좌우충돌하는 사울을 STOP시켜 구원할 수 있었습니까? 하늘에서 강하게 비취는 빛 만이 참 상태를 폭로시킬 뿐입니다.금 덩어리에게서 태어났고, 예수님이 장차 금 덩어리와 혼인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단이 아니고 성경을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엉뚱한 논리로 정죄하시는 방지기님께 주님의 긍휼이 있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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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 성경은 아버지 집을 금덩어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고 있는 성경말씀 중에 요한복음 14장 2절이 있습니다. 즉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는 말씀에서 언급된 '하나님 아버지 집'을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뭇 사람들 사는 집같은 물질적인 집 특히 새예루살렘과 관련해서는 금덩어리집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행17:24말씀에 반대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을 영접한 성도들, "사람들"임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비교해 볼 때 한참 빗나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집없고 돈없는 설움을 겪은 분들은 장차 금은 보석으로 된 집에 살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귀가 솔깃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맨션이 아버지 집의 일부임으로 아버지 하나님도 금 덩어리 집에 사신다는 말이 되는데 이런 거짓말은 하나님 아버지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탄은 이 땅에서 지금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살후1:1 영어 킹제임스 성경 참조)의 지체들을 결코 속여 먹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성경은 아래의 예에서 보듯이 아버지집이 금덩어리가 아니라 "사람들"이라고 거듭 거듭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3장 6절은 그리스도는 그의 집(아버지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But Christ as a Son over his own house: whose house are we....).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을 다시 기억하기 원합니다. 'WHOSE HOUSE ARE WE' 위 말씀에서 WE는 금덩어리가 아니라 주님 영접하고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위 말씀에서 심판이 시작된 '하나님의 집'은 바로 "우리'입니다. 영어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한데, For the time is come that judgement must begin [AT THE HOUSE OF GOD]: and if it first [AT US], what shall...에서 [ ]친 두 부분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성도들인 것은 다음과 같은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더욱 분명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다른 설명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집=교회입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난 성도들인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0절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은 For he looked for a city which hath foundation, whose builder and maker is God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교회건축'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종된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이 한가지 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마16:18, 엡4:11-12).

 

따라서 '아버지 집'을 금덩어리나 실제 보석덩어리로 지어진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한 구절의 해석을 잘못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갈망과 뜻을 착각하는 것이며 성도들을 성경의 가르침의 초점에서 빗나가게 하는 것임으로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방지기님이 하나님께 장차 받을 유업을 '금덩어리 집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집이 '실제 금덩어리로 만들어진 맨션하우스'인가 아니면 성경 도처의 가르침대로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안에 이끌려진 믿는 이들'인가에 대해 추구하는 믿는 이들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의 목표와 직결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빛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요한복음 14:10, 20절, 요일2:24, 3;24, 4:15절의 말씀들이 추구하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열려지고 체험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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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지어짐

 

오랫동안 세뇌된 사람들이 금방 자기의 확신을 부인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동서 냉전 구조아래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의 숱한 사례들에서 보았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특별히 영적인 진리에 있어서 더 한데 그 이유는 이 세상 신인 사탄이 사람들의 생각을 눈 멀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빛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4:4).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특별히 생각이 새로와짐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be y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롬12:2).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 또는 요14장의 하나님 아버지의 거처가 진짜 금덩어리인가 아니면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된 단체의 새사람인가의 토론은 사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맑은 정신으로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In whom... all the building... groweth unto an holy temple in the Lord)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위 말씀에서 터(foundation)니, 모퉁이 돌이니, 건물이니,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니, 지어지느니 라는 말들이 언뜻보면 물질세계의 건축공사판 용어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영적 감각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것이 진짜 콘크리트덩어리나 돌덩어리나 사람들이 들어가 살 진짜 물질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진짜 모퉁이 돌덩어리가 아니며 본문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2장 21절을 개역성경은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번역했지만 영어성경은 'growth'라는 동사를 썼고 이 성전의 위치가 'in the Lord'라고 말합니다. 특히 gorwth라는 동사는 엡4:15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골2:19에서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처럼 생명있는 유기체의 성장을 말하지 진짜 금덩어리가 커지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의 씨로 들어오신 그리스도가 그 형상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거처의 건축'임을 성경은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21-22의 'In whom' 또는 22절의 "ye" also are builded together 같은 짧은 구절이라도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거처가 '진짜 금덩어리'라는 주장은 수그러들텐데... 너무나 아쉽지만 영적인 이해는 사람의 지식만으로 되는 것은 아님으로 다만 위하여 기도할 뿐입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 눈(The eyes of your understanding)을 밝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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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이 금덩어리와 결혼한다는 가르침은 참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요한계시록 21장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방지기님처럼 '금 덩어리 집'으로 보든지 아니면 지방교회 성도들처럼 신부(고후11:2)요 새 사람(엡2:15)인 현재 우리들의 장래모습이라고 보든 새 예루살렘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종착역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라톤을 뛰면서 100미터 달리기로 착각하고 달린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새 예루살렘을 죽은 금 덩어리 집으로 아는 것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살아있는 인격체로 보고 믿음 생활하는 것은 현재와 장래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죽은 돌덩어리, 차가운 보석 덩어리가 아니요 산 인격인 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첫째, 계21:2, 9-10은 '새 예루살렘'을 '어린양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외에도 치수와 재료와 기타 등등 새 예루살렘의 많은 항목들이 성경에 쓰여 있지만 그러한 것들로 만들어진 새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신부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지기님은 피상적인 표현에 집착하여 이 신부가 진짜 금덩어리 집이라고 주장을 하시고 계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또는 신약의 성도들 사이에 신랑이니 신부니 심지어 하나님이 장가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할 것이라는 등의 충격적인 표현들을 쓰고 있지만 한 번도 진짜 금 덩어리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신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사람들을 신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신부를 진짜 금 덩어리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것 이상으로 참람한 것입니다(호2:7, 19, 사54:5, 렘2:2, 3:1, 14, 31:32, 창2:21-24, 겔16:8, 23;5, 마9:15, 요3:29, 고후11:2, 엡5:25-32, 계19:9, 아가서 전체, 마12:24).

 

둘째, 계시록21:11절은 이 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having the glory of God). 신약시대 이후로 금 덩어리 집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졌다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다'(...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 Amen)고 말합니다(엡3;21). 하나님의 영광은 돌덩어리, 금 덩어리 안에서 표현될 만큼 값싼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생명과 본성과 나타남으로 취한 구원받고 변화되고 영광 안으로 이끌려진 많은 아들들을 통해서 표현됩니다(히2:10, 벧후1:3-4, 요일3:2).

 

셋째, 계시록21:23은 새 예루살렘 성에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 큰 성에 하나님과 어린양이 빛과 등이 되어 어떻게 비추신 단 말입니까? 가로등처럼 서 계시든지 조명탄처럼 하늘에서 계속 터지셔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교회시대에 빛 되신 하나님이 성도들 안에서 빛나심으로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 되었고(...now are ye light in the Lord...)(엡5:8), 발광체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빌2:15원문). 심지어 요일1:7은 저가(하나님)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다고 말합니다(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one with another). 이처럼 빛 되신 하나님은 성육신 된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한 '교회들'을 통해서 지금 빛나고 계시고 영원토록 빛나실 것입니다.

 

넷째,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우리의 거처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의 거처입니까? 이런 질문에 우리 모두는 성경을 근거로 답변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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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의 수건을 벗겨주소서!!

 

성경을 읽지만 그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거나(행8:30-31) 잘못 해석한다면 말씀하신 분인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말귀 못 알아듣는 상대방과의 대화처럼 답답한 일이며 엉뚱한 일들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방지기 님의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보듯이 새 예루살렘에 관한 성경말씀은 많은 분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대표적인 진리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해석이 필요한 '상징'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데서 오는 끔직한 빗나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은 문자대로 해석하고 어떤 것은 상징으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균형 잡힌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해석의) 첫 번째 원칙은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말씀의 글 뜻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여야 한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아무리 어렵거나 부적절하게 보일 지라도 글 뜻 그대로의 의미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사야에서 주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은 분명하다. 이제 주님은 이미 처녀에게서 태어나셨다... 우리는 가능한 한 원칙을 붙들어야 하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고수해야 한다.[다만 어떤 환상이나 예언, 비유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불합리할 때만]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WL,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한국복음서원, 1991, 60-61쪽).

 

이런 균형 잡힌 성경해석 원칙을 가진 형제님을 '알레고리'가 어떻고 라며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처신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면 많은 말을 통해 실수하고 헛점을 노출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확신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계21:2, 9-10)을 진짜 금 덩어리(성)라고 고집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진짜 꼬리 달린 어린양(계5:6)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터무니없고 불합리한 해석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보는 몇 가지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항목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첫째, 계22장 1절은 새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하늘 어디에 의자가 둘 있는데 아버지 하나님이 한 의자에, 어린양이신 주님이 또 다른 의자에 점잖게 앉아 계시는 그림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된 '두 하나님들'로 믿는 끔직한 이단사상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 의자에 앉으신 분, 몸은 하나이나 머리가 셋인 분 등으로 묘사된 그림이나 조각은 진짜 이단인 여호와증인들에게까지 조롱과 웃음거리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주님이 그 많은 세월동안 의자에만 나란히 앉아 계신다면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하시겠습니까? 또한 '아버지께서 일하니 나도 일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요5:17)? 거기다가 원문에 의하면 '보좌'라는 단어는 단수임으로 보좌가 하나 뿐이니 한 의자에 두 분이 앉으려면 얼마나 불편하시겠습니까?

 

삼위 하나님은 분리되어 나란히 앉아 계신 '세 하나님들'이 아니십니다. 서로 안에 상호 내재하시며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은 되나 세 개(두개)의 의자에 앉듯이 결코 분리될 수는 없는 '셋-하나'이신 분입니다(요14:10, 20, 롬8:29, 마28:19). 이처럼 영이신 하나님(요4;24)을 물질적인 분으로 오해하여 물질적인 의자에 억지로 덩그러니 앉혀놓는 이단사상은 사탄이 넣어준 누룩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누룩입니다. 만일 보좌가 저 하늘에만 있다면 지금 서울에 사는 성도들이 어떻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저 하늘에 있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히4:16)?

 

하나님이 우리 영 안에 생명주는 영으로 들어와 계시므로 우리의 육신의 생각을 돌이켜 영에 둠(롬8:6)으로 우린 어디 살든지 즉시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3:16-18, 히4;16). 지금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므로 이런 보좌의 실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장래에 새 예루살렘 성 어느 한 귀퉁이에 보좌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둘째, 계22장 1절은 또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른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H2O인 물이 의자 밑에서 흘러나와 길 한복판으로 흐르면서 그 넓은 성에 사는 사람들의 식수원이 될 것이라고 상상할 것입니다. 물이 얼마나 콸콸 넘쳐야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강물이 길 한복판으로 흘러서(...a pure river of water of life... in the midst of the street of it), 통행에 불편을 준단 말입니까? 주님은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은 별로이고 내가 주는 물을 먹어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셔 놓고 성경 끝에 가서는 다시 우리에게 우물물과 같은 강물을 먹게하신다는 말입니까(요4:5-15)? 주님이 주신 물은 그 속(사람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I shall give him, shall be in him a well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고 약속하셔놓고(요4:14) 이제 자기 안에 있는 샘물은 맛이 갔으니 보좌에서 나온 물 떠다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처럼 강물을 실제 물로 해석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한 뜻으로 바뀌고 맙니다. 위 말씀에서 'IN HIM A WELL OF WATER... INTO EVERLASTING LIFE 라는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묵상한다면 계22장의 새 예루살렘에 있는 강물을 진짜 물이 아니라 영적 해석이 필요한 상징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방지기 님이 새 예루살렘 성은 문자대로 해석하시면서 이 강물은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원칙도 없는 뒤죽박죽 해석이 될 것입니다.

 

셋째, 계시록 22장 2절은 새 예루살렘 성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was there the tree of life) 매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힌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생명나무도 진짜 나무이고 열두 가지 열매도 진짜 열매로 해석하면 얼마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위 말씀에서 동사(was)나 명사(the tree of life)나 다 단수이니, 그 수많은 사람들이 끼니때가 되면 온 성에서 단 하나뿐인 생명나무에 달려들어 열매를 따려고 아우성을 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지금 이 땅에서도 사과, 배, 복숭아, 자두, 앵두, 포도, 머루, 산딸기 등등 적어도 12가지는 넘는데 그날 가서 고작 열두 가지 열매가 무슨 그리 큰 매력이 될는지... 그리고 매일 열매나 따먹고 물 마시고...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하나요?

 

사실은 계시록 21-22장과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성경 에스겔서 47-48장에 이미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질 것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하려고 비슷한 이야기를 두 번씩 이나 반복한단 말입니까? 성경을 깊이 연구하신 분들은 구약 에스겔서에서 묘사된 것은 예표요 그림이라면 신약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묘사된 것은 그 예표와 그림의 실제요 성취인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마치 사진과 실물의 관계와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방지기 님같이 사진도 사진이고, 실물도 사진이다라고 우긴다면 정상적인 사람들은 결코 이런 억지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새 예루살렘이 진짜 금 덩어리 성이라는 가르침은 사탄이 넣어준 누룩이요 이단사상이지 순수한 성경해석은 아닙니다. 방지기 님에게 주님의 긍휼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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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은 '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1차적으로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세상 죄를 지고 가는 진짜 어린양'처럼 엉뚱하고 심지어 참람할 때는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혹시 그 뒤에 영적의미가 있는지를 고려해 보는 것이 상식이 있는 성경학도의 태도일 것입니다. 아래 박OO님의 질문처럼 새예루살렘이 어떤 규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미국대륙 반 만한 진짜 황금덩어리로 해석해버리면 그런 황금덩어리가 어린양의 신부라고 하는 말씀에 가서는 이건 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을 해야 정상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일학교 학생도 진짜 금덩어리가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신부라고 누가 가르치면 '선생님 그건 좀 이상해요'라고 말할줄 알텐데, 이처럼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새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아내임을 말한 바로 다음 장인 계22장 17절에서 성경은 그 새예루살렘인 신부가 말씀하시기도 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아 이건 치수도 해석이 필요한 상징이구나 라는 인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큰 그림에서 상식이 통하는 대화가 되지 않으면 세세한 해석을 해준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1. 새예루살렘은 가는 것(to go)이 아니라 되는 것(to be) 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시는 것은 지금은 시간과 공간상 새예루살렘과 전혀 관계도 없지만 장차 그 때가 되면 진짜 황금 보석으로 꾸며 놓은 '그 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넣어준 이러한 누룩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속아왔고 또 그런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를 진짜처럼 가르쳐 왔는지... 천국의 완성과 나타남이 장차 있을 것이지만 현재 믿는 이들 안에 천국의 실제이신 그리스도가 계신 것처럼 장차 새 예루살렘은 완전히 나타날 것이지만 교회시대인 지금도 부분적인 영역에서는 그 실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붉은 흙이었던 우리가 거듭남으로 산돌로 변하고 또 고난의 환경가운데 열과 압력을 받아 보석으로 변할 때 그 부분은 새예루살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나무나 풀이나 짚이 아닌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마음 안에 있던 것입니다(고전3장). 고린도 전서 3장의 문맥을 차분히 읽어보면 거기서도 새예루살렘이 되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은 우리가 이른 곳이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성경기자는 율법이 주관하는 불유쾌한 분위기를 묘사하다가 분위기가 바뀌어서 은혜가 주관하는 항목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구약, 율법은 밖의 보이는 것, 땅에 속한 것, 한시적인 것들이라면 신약, 은혜가 주관하는 것은 영적이며 영원하며 하늘에 속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신약성도들이 이미 시온산과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위 문장에서 동사로 쓰인 '프로세르코마이'는 미래시제가 아니라 '완료시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방지기 님처럼 장차 진짜 금덩어리 산인 새예루살렘에 갈 것이라면 위 하나님 말씀은 방지기님의 근거없는 고집때문에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변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으로 방지기님의 잘못된 생각을 비추시고 새롭게 하심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진리를 진리되게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방지기 님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에 아직 이르지 못했는지는 모르나 이 땅에 많은 참된 성도들 영 안에 새예루살렘의 실제가 있고 그것은 지금도 그분들의 영에서 혼으로 또 몸을 향하여 건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땅에 속한 예루살렘은 진짜 돌덩어리로 만들어지지만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은 성도들 안에 은혜로 들어오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가 형상을 이뤄가심으로 건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건축의 역사가 먼저 완성된 이기는 자들의 이마에 새예루살렘의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것입니다(계3:12).

 

2.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방지기님은 '신인합일설'이 어떻고 엉뚱한 말을 하셨지만 위 고린도 전서 6장 17절 말씀은 하나님인 주가 사람과 합하여 '한 영(one sprit)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스도와 그의 몸의 지체들 처럼 성경 도처에서 발견되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그 사람에겐 믿음생활의 실제는 없고 공허한 지식과 의문 율법만 있을 뿐입니다. 결과는 사람을 거룩한 성경말씀으로 판단하고 죽이는 것이지요(고후3:6하). 주님은 부활하신 후 생명을 주어 살리시는 영이 되셨고, 이 땅에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고 오셨건만...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도 성경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그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합니다. 앞의 영(대문자)은 하나님, 뒤의 영은 사람의 영을 가리킵니다. 그영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 다음에 떠나가지 않고 우리의 구속의 날까지 우리안에 사시면서 변화시키시고 형상을 본 받게 하시고 영광으로 이끌고 계십니다(엡4:30, 롬8장, 갈4:19). 이런 최종결과는 계시록 22장 17절입니다. 즉 그영과 신부가 하나가 되어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그림입니다.

 

3. 방지기님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십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4장 끝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다, 우리가 이땅에서 잠시 받는 환란은 지극히 크고 중한 영광을 이루게 함인데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진짜 금덩어리, 생명도 없고 차가운 금덩어리 성을 유업으로 받을 것을 간절히 원함으로 지금 이땅에서 힘을 다하여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추구하는 참된 성도들의 소망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박OO님은 초대교회 이래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고 차가운 금덩어리 집 한 귀퉁이를 분양 받으려고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렸다고 "진짜" 믿으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긍휼이 박OO 님에게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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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금덩어리 어머니도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4:26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새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Jerusalem which is above is free, which is the mother of us all)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새 예루살렘을 박OO 님처럼 진짜 황금덩어리라고 계속 고집한다면 어린양 예수께서 금 덩어리와 결혼한다는 참람한 교리에 이어 누런 금 덩어리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도 한다는 엉뚱하고 이단적인 구원론을 야기 시키게 됩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러한 토론은 사실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지방교회측의 주장처럼 우리가 은혜이신 주님자신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요일5:11-12, 요1;12, 3:3, 6, 벧전1:23), 아니면 박OO 님의 확신 어린 해석처럼 다음에 성도들이 들어가 살 황금덩어리 집인 문자적인 성을 통해 거듭 났는지의 문제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자신의 거듭난 체험을 통해 정답을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1. 갈라디아서 주제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가진 종교를 대치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성경해석 방식은 특정구절뿐만 아니라 그 구절의 앞 뒤 문맥과 그 장과 그 책 전체의 흐름을 참고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6에서 언급된 '어머니'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그리스도를 대비한 책입니다.

 

즉 율법은 사진이요, 사람밖에 있는 것이요, 사람을 폭로하고 요구하여 결국 죽이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실제요, 사람 안에 들어온 생명이요, 사람을 공급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고 결국 살리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그리스도로 인도하는데 율법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밖의 율법이 아닌 안의 그리스도가 생명률로서 우리를 주관하고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빛이 부족하여 이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2. 갈라디아서 4장은 세 방면의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들의 명분의 영이 율법의 보호를 대치했다는 사실입니다(갈4:1-7). 둘째는 그리스도가 약속의 자녀들 안에서 형상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4:8-20). 셋째는 그 영을 따라 난 자녀들과 육체를 따라 난 자녀들의 대비입니다(4:21-31). 이러한 대강의 그림만으로도 4:26절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들의 명분의 영, 우리 안에 들어와 형상을 이루시는 그리스도, 그 영 또는 그 영을 따라 난 자녀들의 노선 안에 있는 어떤 것이지 진짜 금 덩어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기본성경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3. 새 언약=사라=위에 있는 예루살렘(새 예루살렘)=자유자=어머니= 은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여자'(사라, 하갈)를 '두 언약'이라고 말합니다(for these are the two covenants). 또한 하갈을 땅에 있는 예루살렘, 사라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함으로 두 예루살렘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전자는 율법에 기초한 옛 언약이라면 후자는 은혜에 기초한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렘31:31-34, 히8:8-12에서 보여주는 새 언약의 내용은 피로 인한 죄 사함과 내주 하는 생명의 법으로 인한 생명의 구원의 축복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사도행전 26장 18절에서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라고 말하며 자신의 기업도 이 안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어머니인 새 언약,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새 언약에 의해 은혜로 죄사함 받고 거룩케 된 무리이지 진짜 금 덩어리가 아닙니다. 즉 사람 안에 들어오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갈3:14-16) 자신이신 은혜가 성도 안에서 형상을 이룬 결과이지 '돌덩어리 금 덩어리 황금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 믿는 이들의 어머니를 진짜 금 덩어리 성이라고 우기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너무 지나친 성경해석입니다.

 

그런데 이런 엉뚱한 발상이 어느 특정개인의 잘못이라면 모르나 소위 바른 교리를 위해 변개된 개역 성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킹 제임스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공통된 생각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지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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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덩어리인가,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형상인가!

 

거짓은 참이 올 때 무너집니다. 한국교계 내에서 '새 예루살렘을 진짜 황금덩어리로 보는 괴악한 누룩'은 조만간 깨끗하게 제거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대가를 치르며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추구하는 성도들의 장래보상이 '금 덩어리 한 귀퉁이를 분양 받는 것'이라고 우롱하는 것은 주님과 성도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금덩어리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단사상이 주는 보다 심각한 피해는 이 시대에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어(요10:10)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갈4;19) 그리스도가 그들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도록(엡3:17) 협력해야 할 성도들의 관심을 가증스러운 금 덩어리 집으로 돌려놓음으로 실제적인 하나님 집 건축을 지지부진하게 만든 것입니다(엡4:11-16). 하나님의 참된 거처인 교회건축을 관심 하는 소수의 분들만 '이 전이 황무하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학1:4-5).

 

1. 하나님이 사람 안에 계심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사상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저 멀리 사람밖에 계실 때는 비밀스럽기는 해도 복잡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느 날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성육신 했을 때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혼돈에 빠졌습니다. 그런 혼돈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알량한 자신의 지식과 인식능력을 바탕으로 '성경적 사실'을 따지고, 분석하고, 체계화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단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실제 육체를 입었을 리가 없다는 주장으로 성경사실을 부인했습니다. 또 어떤 이단은 예수님이 사람이시지만 그분의 혼과 몸만 그렇고 그분의 사람의 영은 '로고스'로 대치되었다고 함으로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 분리할 수 없는 참 하나님, 온전한 하나님이 계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사람(God-man)이신 예수그리스도가 타락했던 사람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는 단계에서는 사람들은 더 혼란스러워 합니다. 특히 '사람 안에 들어오신 주체'에 대한 이해는 가히 폭넓고 다양한 이단사상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 자신은 아니고 말씀만 들어 왔다느니, 성령하나님 만이고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은 아니라느니, 양자 삼은 것이지 진짜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은 아니라느니, 거듭남으로 족하지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자라난다는 것(골2:19 원문, 엡1:23, 요10:10, 고전3:1-6)은 정통신학이 아니라느니, 예수님의 인성은 부활시 벗어버렸고 무소 부재하신 신성만으로 사람 안에 들어 오셨다느니.... '사람의 생각'으로 순수한 성경말씀들을 부정하는 이러한 이단사상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암초와 같은 장애물들입니다. 박OO 님의 사례에서 우리는 단지 그 빙산의 일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2. 새 예루살렘은 생명 안의 구원(롬5:10)의 최종완성입니다.

 

God-man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법적인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부활 후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은 '생명 주는 영'이 되어 사람 안에 들어오시고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것이 유기적인 구원의 시작인 거듭남의 본질입니다(롬5:10, 고전15:45, 요3:6, 고전6;17, 요일3:9). 거듭남은 생명의 구원의 시작이며 믿는 이들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가 생명으로 자라시고 형상을 이루사 마침내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맏아들인 자신의 형상과 똑같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즉 사람의 영의 거듭남, 혼의 변화됨, 몸의 영화롭게 됨이 하나님의 큰 구원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룸을 계시하는 갈라디아서를 포함한 신약의 서신서는 [그리스도]가 [성도들 안에서] [지금] 하고 계신 생명의 구원의 역사(롬5:10), 거룩케 함의 역사(살전5:23),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는 역사(고후5:21),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는 역사(엡3:17, 요14;23)를 말하며 새 예루살렘을 포함한 계시록 내용들은 그러한 역사들의 최종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3:1-6, 갈4:19, 고후3:18, 롬8:29).

 

요약하면, 사복음서에서는 생명의 씨를, 서신서에서는 씨뿌림과 자람을, 계시록에서는 생명의 수확을 말하며 지금 토론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은 이러한 생명의 수확물인 것입니다(막4:26-29, 고전3:1-6, 계14:4, 15-16). 계시록 21-22장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구성하는 모든 항목들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지금 체험할 수 있는 것이며 사실 지금 그 실제 안에 살고 계신 분들에겐 이런 말들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들의 삶의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식적으로 성경을 아는 사람들 머리 속에서만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오 주 예수님! 우리 모두에게 빛 비추사 속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게 하옵소서(엡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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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이 '진짜 금 덩어리'든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최종완성'이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의 최종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진짜 금 덩어리라고 잘못 안다면 조만간 심각한 혼란과 이를 가는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로 모 기독 월간지에 기고된 웃지 못할 실화 하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서울 광진구에 소재한 모 교회 목사님이 고급자재를 수입해와 심혈을 들여 짓던 예배당 건축현장에 올라갔다가 그만 낙상하여 돌아 가셨답니다. 그런데 예배당 건물을 진짜 하나님 성전으로 착각하던 일부 사람들이 목사님을 순교자로 추대하자는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서엉전' 건축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요. 또한 이름만 대면 다 알 어떤 목사님은 방송설교에서 이 다음에 새 예루살렘가면 멋있는 잔디에서 신나게 골프도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2)이라는 이름의 의미만 제대로 이해해도 위와 같은 코미디는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the holy city, new Jerusalem)이...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는 말씀에서 언급된 '거룩'(holy) '새 '(new), '예루살렘'(the foundation of peace)이란 말 자체에서 이 성이 물질적인 진짜 금 덩 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조성된 한 무리의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거룩(Holy)

 

성경에서 쓰인 거룩이란 말의 의미는 적어도 '위치상의 거룩'과 '성분상의 거룩'의 두 방면이 있습니다. 먼저는 거룩 자체이신 '하나님을 위해 어떤 것의 위치가 분별될 때' 위치상 거룩해졌다고 말합니다. 즉 금은방의 금은 거룩하지 않지만 성전에 들여진 금은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마23:17, 19).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천주교 주장처럼 성자로 추대 받아야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모든 믿는 이들이 다 '성도들'(saints)입니다(골1:13, 고전1:2).

 

그러나 살전 5:23에서 사도 바울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할 때의 거룩은 위치상의 거룩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성분상의 거룩'을 가리킵니다(벧후1:4, 살전4:3, 4, 7, 살후2:13, 요17:17). 본문은 이미 위치가 분별된 '너희'를 하나님이 친히 거룩케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은 타락 전의 아담처럼 단지 '죄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인 거룩으로 조성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제의 밀가루에 기름이 적셔지되 제3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고 여전히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기묘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상태를 이뤄 가는 것입니다(레2:4, 고전10:16-17, 롬12:5, 12:27). 이런 최종결과가 바로 거룩한 성(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계21:2).

 

2. 새(new)

 

성경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말합니다(전1:9-10). 실제로 최신유행이라고 해서 비싼 돈을 주고 사지만 어느새 구식이 되고 중고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6천년 묶은 옛사람인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에베소서 4장 23-24절은 "오직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And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And that ye put on the new man, which after God i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을 따라 지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말합니다(골3:10-11, 엡2:15-16, 롬6:4 하). 즉 새 사람은 개인이 아닌 단체적인 믿는 이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입니다(엡1:23). 우주 가운데 몸은 하나이며 새사람(단수)도 하나 뿐입니다. 성경에는 새사람들(복수)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그리스도) 자신만 새로우신 분이며, 이 분이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연합된 영이 되셨습니다.(고전6:17). 믿는 이들이 말씀을 통해 그분을 먹고 마실 때(요6:57, 고전12:13), 이 연합된 영이 사람의 혼의 일부인 생각(mind)을 새로움으로 적시어서 낡은 생각도 새로워지게 하는 것입니다(롬12:2).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 안의 물로 우리의 옛사람의 티와 주름과 흠(spot, wrinkle, blemish)을 씻어 내고(엡5:26-27), 새로움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 안에 더하심(골2:19)으로 우리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해 가시고 계십니다.(딛3:5, 계19:8) 이처럼 새사람을 입어 가는 최종완성이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엡4:24, 계21:2).

 

3. 예루살렘 (평강의 기초)

 

성경의 원어에 의하면 'Jeru'는 기초(foundation)를 'salem'은 평강(peace)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요한 복음 14-16장에서 긴 말씀을 전하신 다음 16장 마지막 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These things I have spoken unto you, that in me ye might have peace)"고 하셨습니다(33절). 그분 밖에서는 유엔 평화군이나 각종 평화회담도 참된 평화를 보장할 수 없고, 잉꼬부부의 평화가 일생동안 지속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참 평강 이시므로 그분에게 기초를 둔 평강 만이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요14:27, 롬16:20, 15:33, 살전5:23, 히13:20, 빌4:7, 9). 그런데 새 예루살렘은 평강이신 하나님과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된 성도들의 영원한 상호내재임으로 누구도 이 평강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요14:20, 계21:2). 우리는 새 예루살렘으로서 영원토록 최고의 평강을 맛보고 누릴 것입니다. 진짜 금 덩어리는 새롭지도 거룩하지도 평강을 주지도 못하며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말 못하는 우상의 재료로 쓰일 때가 많을 뿐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고작 2400Km(?) 진짜 금 덩어리 성을 짓기 위해 2천년 동안 수고하고 계신다는 허황된 거짓말, 괴악한 누룩이 한국교계 안에서 속히 말끔히 씻겨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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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3장에서의 새 예루살렘

 

성경 66권은 통일된 한 권의 책이므로 각 내용들에는 일관성과 상호 연관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의 본질을 참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린도 전서 3장에서도 새 예루살렘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고린도 전서 3장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집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고전:11)와 합당한 건축재료로 제시된 금, 은, 보석(12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박OO 님처럼 계시록에 언급된 새 예루살렘의 기초와 재료(계21:19-20, 18, 21)가 진짜 차가운 보석 덩어리를 가리킨다고 엉뚱하게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고린도 전서 3장에 대한 바른 이해는 현 시점의 성경 적인 교회생활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1. 고린도 전서의 바른 이해

 

고린도 전서는 고린도 교회에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고전2:2)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의 뿌리인 타락한 옛사람을 예수와 함께 죽은 실제 안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입니다(롬6:6). 본질상 십자가 체험 없는 교회 생활은 문제투성이 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문제들의 근본원인이 성도들의 영적 생명이 어린데 기인함으로 그들에게 생명의 성숙을 통해 하나님의 집의 합당한 건축재료로 변화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 전서 3장은 '생명의 성장의 필요성'(3:1-9), '천연적인 것이 아니고 변화된 재료로 건축함'(10-17), '모든 것은 교회를 위하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함'(18-23)을 말함으로 이 점을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생활은 하나님의 농장에서 영적 생명의 성숙을 통해 산출된 건축재료로 하나님의 집을 짓는 생활이며, 이런 건축의 최종완성이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고전3:9, 계21:3).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위하며 이 모든 것은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 안에서 박OO 님의 잘못된 해석인 진짜 금 덩어리 보석덩어리가 끼여들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2.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 건축공사장 총감독(a wise master builder)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기초(foundation)로 놓았으니 더 이상 다른 기초를 놓지 말라고 경고합니다(고전3:10-11). 이처럼 진짜 차가운 보석덩이가 아니라 사신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초 돌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문이요 길이십니다. JESUS 외에 우리를 구원 할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마16:16-18, 행4:12, 고후11:4, 갈1:6-7, 요10:7, 14:6).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에베소서에서는 성도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엡2:20-22). 그러나 이것은 사도와 선지자가 또 다른 기초라는 의미가 아니며 그들이 본 계시와 그들의 존재 안에서 유일한 기초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열두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함은 물론 입니다(계21:14).

 

이처럼 기초가 있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와 새 예루살렘은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영역 안에 있는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인 연합이지 절대로 차가운 진짜 금 덩어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요14:20, 엡2:20-22, 벧전2:4-8, 딤전3;15, 요일1:3).

 

3. 새 예루살렘의 건축 재료

 

사도 바울은 또한 본문에서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하나님의 집 건축재료의 재질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있습니다. 즉 금, 은, 보석은 괜찮지만, 나무, 풀, 짚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고전3:10, 12-15).

이런 말씀에서도 문맥상 금이니 은이니 보석이니 하는 표현들이 박OO 님의 억지 해석처럼 진짜 금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전후 문맥과 영적 의미를 고려해 볼 때 이런 보석들은 십자가를 통과한 것들, 그리스도에 속한 어떤 것들입니다. 즉 우리의 변화된 인성에 생명 주는 영이 체험적으로 연합된 결과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나무나 풀이나 짚은 생명에 속하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어떤 것들입니다. 즉 믿는 이들의 천연적인 배경과 옛사람의 노력과 열심에서 나온 것들은 다 나무, 풀, 짚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십자가의 깊은 죽음과 자기를 부인함(마16:24)을 체험함 없이 천연적인 재능과 열심으로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불태워질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고전3:15). 평생 수고한 결과가 재질불량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새 예루살렘은 진짜 금 덩어리와 보석 덩어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함으로 변화된 믿는 이들과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과정을 통과하신 삼일 하나님의 연합의 최종완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계시는 계5:6, 요1:14, 고전15:45, 요14:10, 20, 골2:19, 마16:24 등 핵심적인 말씀들이 닫혀 있어 많은 분들에겐 [닫혀 있는 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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