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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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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7)

 

 

[이인규님] 다시 말하여 ‘육신에 있다’는 말의 뜻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상징적이며 상태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며, ‘영에 있다’는 말은 ‘거듭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육신(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 로마서의 문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후에(롬 3:21-5:11) 어떻게 하면 성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그의 글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롬 5:12-8:13). 그런 그가 롬 8:9 후반부(삽입부)를 제외하고 갑자기 '거듭남'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특히 롬 8:7-9은 롬 8:6의 연속으로 회복역 롬 8:6은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롬 7장의 싸움과 연속된 것으로 비록 우리 안에 '생명의 영의 법(롬 8:2)'이 있지만 우리의 생각을 육체가 아닌 영에 두어야 생명의 영의 법이 작용함을 알 수 있다(무조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선택권'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하는데 우리의 실지 체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알려 주고 있다. 즉 거듭난 믿는 이라 하더라도 그의 생각을 육체에 둔다면 '사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인규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이인규님의 주장대로 육신에 있지 않고 항상 영에 있는 그런 사람인가? 그래서 성화될 필요도 없이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 그런 놀라운 사람이란 말인가? 물론 이인규님의 주장처럼 '육신(육체)'이 전인적인 면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므로(가령 갈 5:17) 우리는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을 외면하고 성경에 제시된 한 방면의 진리로 성경에 제시된 다른 방면의 진리를 배척하고 외면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신실하지 않은 것이고 결국 '생명의 성장'에 손실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인규님]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고깃덩어리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외면하는 전인적인 인간 자체의 소욕을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은 문자적으로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혼에 속한 사람’(헬, 푸쉬기코스)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영과 혼은 실제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의미상 혹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으며은 인간성의 특수한 방면으로서 사람과 하나님을 결합케 하는 방편으로, 은 인간에 내재한 속사람의 세속적 행동과 관습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 이인규님은 인간론 맨 처음에 "정통교단에서도 어느 교단은 이분법을, 어느 교단은 삼분법을 가르친다. 물론 필자는 어느 교단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언급을 했었다. 아마도 자신은 안토니 후크마와 같이 '전인설'을 주장하는 것 같은데 정통교회에서 실제로 이분설이나 삼분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그런데 미국 기독교심리학 협회 회장이었던 안토니 후쿠마는 이인규님과는 다르게 워치만 니의 내적 성찰에 대해 높이 평가한 바가 있다. 이인규님은 이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인규님의 논리 전개를 보면 두 군데를 빼고는 거의 '전인설'에 입각해서 비판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다. "정통신학에서는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 봅니다.", "영혼과 육체가 따로 따로 주를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이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는 성경은 그들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뜻을 언급한다.", "물론 성경에서 바울은 육체와 영을 구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육체’와 ‘영’은 인간의 육신적 부분과 영적 부분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는 표현이다."

 

이와 같은 언급만으로도 이인규님이 '전인설'을 믿는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인규님이 두 가지 실수(?)를 하게 된다. 그 첫번째는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물론 정신적인 영혼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부분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라고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자신은 '전인설'을 믿지만 성경에 '이분설'의 근거도 있다고 인정(?)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더 놀랍게도, "다시 말하여 영과 혼은 실제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의미상 혹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으며 영은 인간성의 특수한 방면으로서 사람과 하나님을 결합케 하는 방편으로, 혼은 인간에 내재한 속사람의 세속적 행동과 관습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것은 그가 전인설을 주장할 뿐 아니라 이분설도 믿고 이제는 삼분설도 믿겠다는 의미인가? (심지어 '영'과 '혼'의 차이에 대해 설명까지 해 주고 있다.)

 

교회 역사가 지속되면 지속될 수록 과거에 오해받았던 단체가 '정통'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개신교' 전체가 그러했고 침례교가 그러했고 감리교가 그러했으며 오순절 교회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런 많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이인규님은 '자신의 신학'이 있는가? 이인규님의 신학은 정통 카테고리 안에 있는 모든 단체의 신학과 동일한 신학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정통처럼 보이지만 '신앙'과 '체험'은 없는 죽은 카멜레온 신학일지도 모른다.

 

 

[이인규님] 죄는 그 자리를 육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자아가 죄를 짓는 것이다.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 이인규님은 여전히 '전인설'을 주장하고 있고, 죄(생명)와 죄들(행위)의 차이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육체에 거하는 것은 죄들(행위)이 아닌 죄(생명)이며 이 죄는 바깥의 낱낱의 범죄들이 아닌 "우리 속에서 우리를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게 하고 그런 자연스런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힘인 것이다. 이인규님은 이 힘이 자신의 전인적인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인가?

 

이인규님이 '마음'을 언급해 주셨으니 사람의 타락 과정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영'에는 '직감', '교통', '양심'의 세가지 기능이 있고, '혼'에도 '생각', '감정', '의지'의 세가지 기능이 있다. 그리고 '마음'은 혼의 세가지 기능에 영의 '양심'이 더해진 것이다(자세한 것은 '영에 속한 사람' 참조).

 

사람이 타락한 후에 그나마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죽었지만(기능을 상실했지만) '양심'은 오히려 깨어났기 때문이다(창 3:7, 롬 2:15). 만일 사람이 이 양심을 주의한다면, 그렇게 '악인'은 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의 죄에 굴복하고 영의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여 혼의 의지로 죄를 계속 선택할 수록 '양심'은 화인맞게 된다(딤전 4:2). 즉 감각이 없게 되어 더 이상 경고의 음성을 발하지 않게 된다.

 

이 시점이 되면 혼의 생각은 갈수록 죄를 '정당화' 하는 이론의 견고한 요새가 있게 되며(고후 10:4-5) 감정은 갈수록 자극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며 의지는 죄를 선택하는 데 빨라지게 된다(이 배후에는 우리의 혼을 차지하려는 '영적 전쟁'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반대되는 위의 예수님이 언급하신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되면 죄를 짓는 것이 '전인적'으로 보이게 된다.

 

'죄'와 '죄들'에 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링크를 참조해 보실 수 있다. http://www.localchurch.kr/21853

 

 

[이인규님] 즉 (1) 이단적인 신론인 양태론 (2) 이단적인 아폴로내리우스의 기독론 (3)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삼분법적인 인간론과 이원론이 혼합되어 “하나님 = 예수 = 살려주는 영”의 공식을 만들어내고, 예수를 “신성(영) + 인성(육 + 혼)”으로 분리시킨 다음에, “예수그리스도 = 지방교회 교인 = God man"이라는 공식을 만들어서 신인합일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부활이며 천국이며 재림이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유일하고 참교회이며, 기독교는 사탄의 왕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오해이다” 혹은, 자신들이 “복음주의이다”라고 거짓 조작을 하는 자들이 바로 지방교회의 정체인 것이다.

 

---> 이인규님의 모든 오류의 근원은 그의 '인간론'에 있다. 성경이 '구분'해 놓은 것을 구분하지 않을 때 결국 기독론에도, 그리고 신론에도 오류가 있게 된다. 이인규님은 왜 삼신론을 믿게 되었는가? 사람을 전인적으로 보다 보니 성령님은 외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해 주시는 분이고 그의 안에 거하시는 분은 아니게 되며(요 14:17, 롬 8:9) 이런 관점이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성경적인 상호 내재를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삼위일체는...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삼신론 이단자가 된 것이다.

 

반면 지방교회 측은 사람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는 성경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기에(살전 5:23), 그리고 체험적인 면에서도 자신의 영 안에 주님께서 계시는 것을 늘 '체험'하고 있기에 요 14:10-11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전인적으로 보는(이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균형잡힌 관점을 갖고 있기에 마 3:16-17과 같은 말씀도 부인하지 않고 성경대로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성도와 대화 하면서 동시에 영 안에서 주님과 교통하는 것도 가능한 '전인적'이면서도 셋으로 구분된 인간론을 이론이 아닌 날마다의 체험으로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적인 인간론을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를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이 아폴리나리우스의 기독론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한 사람은 아니며 이인규님이 '전인설'을 믿고 있기에 분리라고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이인규님이 '영'과 '혼'의 구별을 말해 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인규님도 자신이 정죄한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을 믿으려는 것인가? 그리고 지방교회 측은 누구보다도 '사람의 영'의 존재를 인정하고(롬 8:16) 삼분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 사람의 영이 없는 아폴리나리우스의 기독론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소설을 써도 너무 쓴 것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요한 웨슬리의 주장이 더 의심스러운 것은 아닌가?

 

"인간의 자연적 구성요소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에서 한가지 흥미있는 주장이 있다. 모든 자연인은 이분설로 설명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영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살전 5:23에서 영, 혼, 육을 말할 때 "이 셋 중에서 뒤의 둘 만이 인간의 자연적 구성 요소이다. 첫째 것은 기독교인에게서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부수적이며 초자연적 은사이다.""(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76-77쪽) 이인규님은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이 신성(영)을 갖게 되면, 그들이 바로 God-man 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는데 혹시 위 요한 웨슬리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기독론에서 이인규님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형제들'로 만듦으로 신격의 제 4격이 되게 한 것은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그것은 엄중한 것이고 성경의 진리를 가리는 것이지만 기본 진리만을 아는 사람들이 인식하기란 쉽지 않은 심화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생자의 형제들이 아닌 하나님의 맏아들(그분의 '인성'이 거룩하게 되고 높여짐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의 형제들이 되었기에(롬 8:29) '신인합일론'과는 무관하고(이인규님이 주장한 것이 사실 신인합일론이다) 성경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요 11:25)라고 말씀하신 분과 연합되었기에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면 생명과 평안을 체험하고(롬 8:6)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게 되며(빌 3:10) 우리의 마음이 '천국'이 된다(마 5:3, 10). 물론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우리의 생명의 성장 안에서 기다리며(막 4:26-29, 빌 3:20) 모든 믿는 이들이 실제로 부활할 것과(고전 15:51-53, 살전 4:15-16) 장차 이 땅에 출현할 천국(천년왕국)의 보상에 참여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고전 4:5, 고후 5:10).

 

그리고 우리는 배타적으로 보일지라도 성경에 없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고(계 17:1-6) 사람을 기쁘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갈 1:10). 그리고 우리는 균형 잡힌 관점으로 모든 믿는 이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형제들로 인정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를 지키기를 힘쓸 것이다(요 17:21, 23, 엡 4:3). 우리는 비성경적인 것에 배타적이지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에 대해 배타적이지는 않으므로 이인규님의 "자신들만이 유일하고 참교회이며"라는 주장은 우리와 무관하다(성경의 교회론'사람'에 대한 것인데 이인규님은 혹시 비성경적인 교회론을 갖고 있기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근거도 없이 "기독교는 사탄의 왕국이라고 주장"했다고 모함함으로((1)번 글을 보라) 믿는 이들 사이에 미움과 분열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믿는 이들과 교통을 추구하려는 지방교회 측의 낮은 자세에 대해 "자신들이 “복음주의이다”라고 거짓 조작"을 한다고 폄하하고 조롱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론에 대한 하나의 잘못된 이해가 또 다른 잘못된 이해를 가져오고 와이셔츠의 처음 단추를 잘못 끼웠을 때 결국 (위 이인규님의 주장과 같은) '완성된 소설'이 나오게 된다. 이런 소설이 '정통'의 입장에서 발매가 되면 인기리에 팔리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는 땅에 파묻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살아 있고 그분이 하신 말씀은 결코 헛되이 그분께 돌아가지 않게 된다(사 55:9-11). 그분의 회복은 여전히 전진할 것이며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고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에 의해 높임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이인규님] 6. 신인합일론

 

1) 신화(신인합일론,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 : 부활, 거듭남, 재림과 동의어

 

지방교회는 자신들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는데, “자신들은 하나님과 동일한 신격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지방교회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격적인 위치가 된다고 가르친다고 비판한 적이 없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는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에서는 예수는 God-man의 첫 샘플이었으며, 지방교회 교인에게 그 영이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지방교회, 몰몬교, 신천지등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것을 신인합일설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지방교회의 신인합일설은 사람과 하나님의 구별이 없는 "똑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 한 권위 있는 이단 연구 단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러나 CRI라는 단체는 2009년 처음으로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는 발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틀렸었다(I was wrong.)”라는 말보다 더 하기 힘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냐하면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는 격언을 실천하는 사역으로서, 기꺼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2009년 제32권 제6호 특집판, 5쪽)

 

그리고 이인규님이 제기한 소위  「신화(Deification)」 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러한 표현은 뉴 에이지나 힌두교 지도자들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비기독교적이거나 우상 숭배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몰몬 교도들이나 암스트롱 교도들도 그러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에 그것은 사이비 기독교이거나 이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믿음의 말씀(Word of Faith)이나 늦은 비(Latter Rain) 교사들이 사용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가장 우호적으로 말해서 정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교회 교부들과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정통 교리의 범주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의 전후 관계와 용어의 정의를 제공하지 않은 채 이러한 인용문들을 정통이 아니라는 증거로 공표한 것은 학자답지 않고, 감정적이며, 무책임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2009년 제32권 제6호 특집판, 25쪽)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 초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의 선포에 반향하며 다음과같이 고백한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미국 복음주의신학자협의회(ETS) 연례모임에서 발표)

 

 

[이인규님] 2)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든지 "예수를 닮는다"는 견해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등의 주장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성경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이 무엇일까?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방교회가 신인합일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정통신학의 연합개념과 같다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인 그루뎀은 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어감에 있어 각자의 개성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되지는 못하며 그리스도에게로 흡수되거나 우리의 개성을 영원히 잃어 버리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자신으로 남아서(고전13:12)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요일3:2) 그의 얼굴을 대하며 그에게 경배를 드리고 이마에 이름을 가지고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성품에 있어서는 서로 정확하게 같으면서도 독립적인 위격으로 남아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도 다른 은사들과 기능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되어갈 것이다"(마10:39, 요10:3, 계2:17, 시37:4)(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63쪽)

 

---> 이인규님이 위 글을 올린 것은 지방교회 측의 신화(Deification)에 대해 깊은 연구 없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함으로써 반론을 시도하고자 한다.

 

"...초기 교회가 구원을 신화로 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도에 있어 우리는 이와 동시에 구원에 관한 현대의 유력한 견해가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 나타난 진리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 시대에 사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고 단언한다. 역사 속의 나중 단계에 의해 진리가 더 진보해야 할 때, 우리는 최소한 구원의 내용과 목표에 관한 이해에 있어 보다 원시적이다. 인간이 신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막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설계하신 것에 저항하고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범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화에 관한 초기 교회의 가르침을 주의해서 살펴봄으로써 최소한 함축적으로라도 이 진술을 증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신화로 최종 완결된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관찰해 온 바대로 하나님 안에서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의 구분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때문에 사람은 결코 신격에는 참여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삼일성의 네번째 인격이 될 수 없고, 결코 신으로 경배 받을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창조물로서의 속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결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영원토록 사람의 형상과 사람의 본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코 편재할 수 없다. 사람은 창조시 부여받은 제한된 정신적 기능을 영원히 가질 것이고, 결코 전지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안과 밖 모두에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은 기껏해야 창조의 제한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신화 개념을 수용하는 많은 현대 교사들은 이러한 전제들을 무시한다."(“…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케리 로비쇼우, http://www.localchurch.kr/2663)

 

위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으로 신화 진리의 '전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위 이인규님이 인용해 주신 웨인 그루뎀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웨인 그루뎀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 간다'고만 주장한다면 어쩌면 지방교회 측의 신화 진리와 접점이 있는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래 내용을 주의해서 읽어 보기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행동을 흉내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는 더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본받으면서 점점 그와 같이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 간다.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러"(고후 3:18)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 간다(엡 4:13, 15). 그래서 마지막 결과는 온전히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롬 8:29; 고전 15:49),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되도록"(요일 3:2)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온전히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살후 1:10-12; 요 17:10)."

 

위 내용은 이인규님이 인용해 주신 글의 바로 위에 있는 문단으로 출처는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중권, 은성, 562-3쪽"이다. 그리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방교회 측의 주장과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처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인규님은 이 내용을 못봤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신학 이전에 정직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합당한 인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을 말할 수도 있고 토론을 할 수도 있지만 상대방의 주장을 왜곡해서라도 입증해야만 되는 것이 '진리'라면 그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는 아닐 것이다. 이인규님은 무엇이 두려워서 신성한 무도회장에 웨인 그루뎀의 '신데렐라'는 오지 못하게 했는가? 왜 웨인 그루뎀이 연출한 무대에서 '주인공'을 제외한 채 무도회를 시작하려고 한 것인가?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비판함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입증하는 데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정직한 이단 연구가가 되는 데도 실패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이인규님이 공정한 이단 연구가였다면 웨인 그루뎀이 주장한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으로 지방교회 측의 동일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지 찾아서 비교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웨인 그루뎀의 '하나님의 공유적인 속성'에 대한 내용은 감춘 채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대한 글만 인용을 하고 그것으로 지방교회 측의 '하나님의 공유적인 속성'에 대한 내용을 비판한 것이다.)

 

 

*   *   *

 

그동안 주님의 인도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인규님의 '지방교회의 이단연구보고서'에 대해 답변을 드려 보았다. 부족한 부분은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시고 미처 답변을 드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더 나눌 수 있기를 원한다.

 

끝으로 이인규님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리고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작은 성도

 

 

이인규님께 드리는 글

 

이인규님은 자신이 신학책을 많이 보다 보니 자신이 신학을 잘 알고 있다는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오류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신학책들과 친숙한 것'을 '신학 자체를 잘 알고 있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메타인지'에 의해 자신이 속게 되면 그 친숙한 분야에 자신이 '전문가'라고 생각하게 되고 전문가다운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먹힐 수도 있다. 일반인들은 상대적으로 그 사람보다는 신학에 덜 친숙하기 때문에 그가 현란한 말로 '신학 지식'을 쏟아 내고 또 '정통 신학'을 사수한다는 '명분'까지 있으면 그의 행동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전문가'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학'이 없다. 그는 책에서 읽은 정통에 속한 신학자들의 말은 다 자신의 사상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책에서 읽은 것이고 잠시 기억 속에 있을 뿐 논쟁이 시작되면 다시 찾아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주님은 항상 그분의 진리의 어떤 방면을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그것으로 전체 교회에 공헌하는 어떤 사람들을 일으키신다. 이런 사람의 신학은 기존의 신학의 기반 위에 있지만 그보다 더 전진된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의 신학, 자신의 체험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기존의 신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때로는 심한 반대를 받게 되는데 이럴 때 주님에 의해 부정적으로 사용받을 수 있는 사람이 소위 위에서 말한 '전문가'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악한 영'이 가장 부추길 수 있는, 망상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정도 체험이 있고 신학에 정통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 쉽게 가말리엘이 취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취하기가 쉽다(행 5:33-40).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 체험이 있어야만 '겸손'할 수 있으며, 신학적으로 어느 정도 '체험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자신은 큰 태평양에서 다만 한 동이의 물을 길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저 바다보다도 넓을 수 있는 그분의 진리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인규님은 '이단 연구' 분야에 어느 정도 공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성공'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자신의 분량을 넘어서 결국 '망상'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이런 망상은 '성숙의 과정'에 이르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마도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겸손을 배우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 이제는 나를 위한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게 하기 위해 때로 주님은 '악한 영'을 통해 우리로 망상에 빠지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아닌가?

 

주님 안의 연장한 성도들은 '망상'에 대한 많은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은혜는 그분의 빛 비추심과 함께 망상에서 돌이켰을 때 온다. 그분의 빛은 이유를 말하지 않으며 그분 앞에 쓰러지게 한다. 이것이 위협과 살기로 등등해서 교회를 잔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달려갔던 사울이라는 한 청년이 체험한 것이다(행 9장).

 

이인규님은 어쩌면 '하나님의 손길'을 못 보고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의 이 변론을 처음부터 자세히 주님 앞에서 읽어 보라. 혹시 이인규님도 우리와 같은 '변론을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에 대해 알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밝혀져야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빛 앞에 엎드러진 겸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몫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인규님이 이 은혜의 몫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8)

 

 

이미 7편의 글로 반박글을 마감했지만 이인규님의 비판글 내용이 좀 더 남아 있고 하는 김에 마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번외편(?)'의 의미로 반박글을 마저 적어 보았다. 기회가 된다면 이인규님의 다른 비판글도 반박글을 적어 볼까는 현재 생각중인데, 주님의 인도하심과 상황을 봐서^^

 

 

[이인규님] 3) 지방교회의 신일합일

 

지방교회의 신일합일의 방법은 그야말로 유치한 수준을 드러낸다.

 

- 우리가 또한 삼일적으로 아들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신 그 영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를 때 당신은 주님을 누린다.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 주님을 더 부를수록 당신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시며 실제의 영이며 당신 안에 계신 그 영을 더 갖게 된다. 실제란 주로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성분 안에 있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이 하나님의 실제이다.(위트니스 리, 새 예루살렘, 396쪽)

 

---> 아마도 이인규님은 회심 전의 사울과 같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이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귀함을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는 아마 '교리적'으로만 알 뿐이고 실제적인 '체험'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체험은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당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한 죄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온 세상이 반대하는 예수...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일이었다(행 9:21).

 

이인규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가치와 영광스러움을 알고 있는가? 온 세상이 반대해도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더 크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위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핍박을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핍박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행 9:14).

 

그리고 이인규님이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와 같은 언급을 오해할 수 있는데 삼위일체를 바울과 같이 실제적으로 체험하지 않고 신학책에서 사변적으로 추구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인규님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에서 세 위격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들이 오셨을 때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시며(사 9:6)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고전 15:45) 또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접촉할 때 '주의 영'이 되신다(고후 3:17).

 

그러므로 위 언급은 우리의 체험에서 너무나 성경적이다. 다만 교리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은 결코 '주의 영'이 되지 못하시는 것이다. (참고 http://www.localchurch.kr/35007)

 

 

[이인규님] -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올 준비가 되셨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즉시 우리의 영의 종착지에 도착하신다. 우리의 영은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이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28쪽)

 

---> 주님은 이미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셨고(행 2:17),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된다(행 2:21). 이것은 성경 말씀이다. 그리고 요엘서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운 순간이고(욜 2:28-32) 베드로가 한 오순절 날의 첫번째 메시지이다. 이인규님은 이것이 '유치한 것'으로 보이는가?

 

 

[이인규님] - 우리는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해 설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 '오 주 예수'를 세 번만 말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불신자가 해야 할 것은 입을 열고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믿을 의도가 없다 할 지라도 그들은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의도가 있든 없든, 그들이 창문을 여는 한 공기는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Lee Stream magazine, 교회와 신앙에서 발췌)

 

---> 출처를 정확하게 조사해서 알려 주면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다. 어떤 사람의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앞 뒤 문장들을 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인규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비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좀 우려스럽다).

 

다만 '짐작'만으로 답변을 드리면, 우리는 복음 전파에 우리의 관념이 있을 수 있다. 복음 전파를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꼭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영리'나 '다리 예화' 혹은 지방교회 측의 '인생의 비밀' 같이 짧은 메시지만으로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 '설교'는 논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고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한 이후에 해도 충분하다.

 

지방교회 측의 복음 전파의 특징은 이러한 짧은 메시지를 전한 후에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롬 10:8-13에 언급된 사도 바울의 권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인규님] - 교회가 그분의 이 한 영을 마시며 그 분과 한 영이 됨: 우리가 "오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이 성령을 마셔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성령이 오신다. 우리가 부르는 것은 주님이지만 받는 것은 성령이다. 예수는 그 분의 이름이요, 성령은 그분의 인격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오게 된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이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이 온다.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9쪽)

 

--->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출 16:1-36) 깨어진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마셨다(출 17:1-7). 이것은 하나의 예표로 교회인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고(요 6:35)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셔야 함을 의미한다(요 7:37-39). 그럴 때 우리의 조성이 변화되어 우리가 그분을 더 닮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고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시는 많은 길 중에 '한가지'일 뿐이다. 우리는 그 외에도 찬송을 통해,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고 복음전파와 양육을 통해, 그리고 소그룹 생활과 다양한 집회들을 통해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누리고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시고 있다.

 

우리는 장래 영원 안에서 여전히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누리고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실 것이다(계 22:1-2).

 

이인규님은 어찌하든지 지방교회를 사이비 이단처럼 보이게 하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을 왜곡하고 있지만 이 실행은 성경에 많은 근거와 본이 있으며(http://www.localchurch.kr/2607)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이인규님은 어쩌면 주님과의 많은 대화 없이 신학책만을 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인규님] -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생명을 분배하는 영이 되심은 그 분이 사람에게 오시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제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 분을 믿는 것이다. 그 분을 믿는 길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분은 즉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그 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는 그 분 안에 들어 간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분을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인 우리의 영 안에 모셔온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28쪽)

 

---> 위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오순절 날의 장면은 교회의 태동을 알리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고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첫번째 말씀을 전한 순간이었다. 그 때 베드로는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리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선포했다(행 2:17, 21, 회복역).

 

이인규님은 위 인용문이 이 선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방교회 측의 다음 글을 보라.

 

"죽음과 부활의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할 일이 없다. 다만 입을 열어 한마디 할 때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 아마 당신은 어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내게 있어서는 한 번 외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어찌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일이 이렇게 빨리 우리 몸에 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행전 2장 17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과는 무엇인가? 21절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을 보았는가? 17절과 21절은 서로 연결되고 상통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육체 위에 일하신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것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지도 모르고, 주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이심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분명히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성령을 부어 주셨고, 성령은 벌써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다만 부르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워치만 니, 하나님의 복음, 191-192쪽)

 

 

[이인규님] 그들은 "오 주여"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양태론의 마지막 단계인 생명의 영이며 부활의 영인 삼일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실재인 그 영이 그들에게 들어오고,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들어온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성숙하게 자라나면 그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소위 신일합일이라고 불리는 방법이 주문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소설이 완성된다. 엘리 제사장이 영적인 눈이 멀어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술에 취한 것으로 본 것처럼(삼상 1:14), 오늘날 거대 교단들의 핍박으로 인해 주님 앞에 마음을 토로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지방교회 측 성도들의 실행이 이인규님에게는 한낱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겉으로 내색을 안 해서 그런가?).

 

만일 이인규님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예레미야라는 한 청년의 체험을 소개해 주고 싶다. 예레미야는 그의 시대 때 아주 어려움에 처했었고 심판받은 그의 백성들을 향해 아픈 마음이 있었다.

 

"주님께서 저희를 민족들 가운데 쓰레기와 배설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희의 모든 원수들은 저희를 향해 입을 벌렸습니다. 저희 위에는 두려움과 구덩이, 황폐와 멸망이 임하였습니다. 제 눈에서는 제 백성의 딸의 멸망으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 제 눈물은 그치지 아니하고 쉼 없이 쏟아지니 여호와께서 하늘들에서 내려다보시고 살펴보실 때까지 그러합니다.

 

제 눈은 제 성의 모든 딸들 때문에 제 혼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제게 까닭 없이 원수 된 이들 저를 한 마리 새인 양 사냥하였습니다. 제 생명을 구덩이에서 끝내 버리려고 그들은 제게 돌을 던졌습니다. 제 머리 위로 물이 넘쳤기에 저는 '이제 끊어지고 마는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애 3:45-54, 회복역)

 

만일 우리에게 예레미야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이인규님은 무엇을 하겠는가? 여전히 웨인 그루뎀의 신학책을 추구하겠는가? 혹은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홈페이지에 반박글을 올리겠는가? 아니면 간절히 기도를 하겠는가? 심지어 애 3:44은 "주님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두르시어 기도가 도달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서 바로, "오, 여호와님! 저는 아주 깊은 구덩이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애 3:55, 회복역)."라고 말한다. 때로는 기도도 통하는 것 같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이것이 예레미야라는 한 청년이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교회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이 시대에 예레미야와 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인규님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그만 핍박하고(행 9:14) 바울과 같이 누군가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추구하십시오."(딤후 2:22, 회복역)라고 권면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인규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에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면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신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주장일 따름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 이인규님의 말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교리'만을 알 뿐 체험은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은혜롭게도(?) 이인규님이 어려움을 당하게 하심으로 예레미야와 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깊은 구덩이 안으로' 인도하고 계신다(이인규님이 이단을 정죄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자신이 이단이 된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곳에서는 오직 한가지만이 통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애 3:55).

 

그리고 그럴 때 위 성경 구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회심 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침례를 받을 때'(행 22:16) 경험했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실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 회복역)

 

 

[이인규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은혜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용어는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다. 부활, 천국, 거듭남, 구원등은 모두 기독교와 다르며, 그들이 말하는 용어는 결국 신인합일을 뜻한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새 창조 안의 부활한 나를 말한다. 이 부활한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우리의 인성과 연합시키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부활한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3쪽)

 

---> 충분히 설명 드렸지만 좀 더 언급하면, 롬 6:4-5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회복역).

 

여기서 5절의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은 4절의 '침례'를 말하고, 5절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는 4절의 '생명의 새로움으로'를 의미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장래 우리가 실제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하고 침례 받은 후에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롬 6:6-23에 나오는 것이다.

 

이인규님은 이러한 부활을 들어 보았는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용어는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다."고 그랬는데 이인규님이 그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성경을 잘 알기에 성경의 용례도 모르고 감히 단언하여 말하는가?

 

이인규님은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그랬는데 정작 이인규님 개인이 기독교의 용어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인규님] - 그와 같이 완결된 영을 살아날 때, 이것이 바로 완결된 영의 부활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부활은 어떤 능력이나 사물이 아니라 한분의 인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분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더욱이 부활의 실제는 삼일하나님의 최종완결인 그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론 -삼일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부활은 하나임-을 갖는다.

 

---> 우리가 침체되어 있고 사망 가운데 있을 때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하면 주님을 접촉하게 되고 주님은 부활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지방교회 측에서 말한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부활이신 주님, 부활의 실재인 생명 주는 영을 접촉했기 때문이다(요 11:25, 마 22:32). 물론 우리는 '실제적인 부활'도 믿는다.

 

 

[이인규님] -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이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의 왕국, 329쪽)

 

---> 본인이 인용한 내용이 본인의 주장을 뒤엎는 부분이 있는 것도 모른 채 지방교회 측의 재림이 기독교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대방과 진리를 논해야 된다는 것이 주님 앞에 안타까움이다.

 

 

[이인규님] -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심으셨고,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계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익고 성숙할 때, 그것은 그분의 오심의 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닐 것이다.(왕국, 330쪽)

 

지방교회는 예수의 재림도 다르고, 예수의 부활도 다르며, 사후의 천국도 부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오직 신인합일이며, 지방교회로 들어오는 단체구원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며 오해라고 조작을 하고 있다.

 

---> 깨어 있는 것은(마 24:42)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며(마 25:4)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되는 것이다(막 4:26-29). 그럴 때 주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도둑처럼 닥치지 못할 것이다(살전 5:4).

 

이인규님은 본인이 모르고 체험이 없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틀린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이런 이인규님의 관점이 맞기 위해서는 그는 어느 정도 전지(全知)해야 하며 성경에 기록된 것 중 그가 하지 못한 체험은 없다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어쩌면 그는 지방교회 측이 신화(Deification)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이인규님은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영광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인규님] - 죽으면 천당(국)간다는 말은 이교도의 가르침입니다. 사탄이 한 최대의 거짓말 중 하나는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하늘 어디엔가 있는 집)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이교도적인 거짓 사상이 버젓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믿음 생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을 변질시킴으로 참된 성도들 생각 속에서 말끔히 씻겨져야 할 누룩인 것입니다.(지방교회 게시판의 글)

 

-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죽으면 주 예수를 믿는 한, 그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들이 일단 죽으면 그들은 천당에 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여러분이 왕국의 비밀을 안다면 여기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왕국, 315쪽)

 

---> 앞에서 충분히 언급을 했지만, 우리가 죽을 경우 혼과 영이 육체와 분리가 되고 '혼과 영'만 있는 채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상태를 '벌거벗은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고후 5:3), 우리가 부활해서 하늘에 속한 몸을 입어야 비로소 '천국'에 (물론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거쳐(고후 5:10))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사후 천국'은 비성경적인 교리가 되는 것이고, '사후 낙원'과 '부활 후 천국(천년왕국)'이 성경적인 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너무나 상식적인 것인데, 이인규님은 일일이 설명을 해 줘야 하니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다.

 

 

[이인규님] -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체적인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의 나라요, 하나의 민족이요, 하나의 단체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32쪽)

 

- 한 단체를 얻고자 하신다. 삼일하나님 그 분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 안으로 역사하게 하시어 그들을 한 무리가 되게 하고, 단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이것을 매우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는 곧 성도 개인의 신령함이 아니라 온 교회들이 하나님께 얻은 바 되고 거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33쪽)

 

---> 개인을 얻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결국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 그분의 집, 그분의 거처를 원하신다. 그분은 몸 전체를 원하시지, '발'이나 '팔'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시겠는가? 내게는 손과 발과 각 지체가 다 귀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합쳐진 '몸'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단체를 얻고자 하신다"는 것이다(우리가 어릴 때에는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헤아리지만 성숙하게 되면 '주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헤아리게 된다. 우리는 성숙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주님의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전 2:16)).

 

가령 그분은 성전을 원하시지, 돌이나 금으로 된 재료 한두 개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돌'이나 '금'은 자신의 구원받은 것을 기뻐할지는 몰라도 주님은 '성전'이 필요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이러한 지방교회 측의 관점을 '단체구원'이라며 조롱하고 있다.

 

 

[이인규님] - 그러므로 천국의 실제와 외형은 교회와 함께 시작해서 교회와 함께 나아갔다. 천국의 실제와 외형은 교회와 함께 하며 교회에 달려 있다. 한편으로 천국의 실제가 교회 안에 감취어져 있고, 또 한편으로는 천국의 외형이 교회의 외양과 함께 한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교회 시대를 끝내실 때 천국의 실제와 외형도 끝날 것이다. 그 때 주 예수님은 천국의 외형, 즉 소위 기독교계를 불태우실 것이다. 동시에 천국의 실제는 천국의 나타남이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 왕국, 667쪽)

 

지방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은 비록 기독교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개념 자체가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 기독교에 수많은 분파된 이단들을 양산한 곳이다.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옹호하여 주는 목사들이 있다는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 우리가 어떠한 명칭을 붙이든 주님은 "내 하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식물마다 모두 뿌리째 뽑힐 것입니다"(마 15:13, 회복역)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성경에 있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라면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 3:10은 "각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라고 권하고 있다.

 

심지어 주님의 일꾼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건축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하고 있다(고전 3:12). 지금은 모든 것이 비밀 가운데 있어서 누가 건축한 것이 적합한지 알 수 없지만 "그날에 각 사람의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 일이 불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될 것이다(고전 3:13).

 

심지어 믿는 이들이 한 일도 이러하거늘 성경에 없고 이교도적인 실행으로 말미암은 일이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일이 어떠하든 주님을 영접한 믿는 이들은 "자신이 한 일은 불타 버릴 지라도" "그 사람 자신은 구원을 얻되"에 해당되게 된다(고전 3:15).

 

이것이 우리가 조직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보는 이유이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믿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위해 우리 주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셨듯이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   *   *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생각해서 '진리를 밝히려는 목적'으로 이인규님이 쓴 "지방교회의 이단연구보고서"에 대해 변증글을 작성해 보았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라고 기도했으며, 사도 바울은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라고 고백했다.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다운 일일까? 우리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옳다면 우리는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CRI의 편집장인 엘리옷 밀러의 고백 속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월터 마틴과 파산티노 부부는 하나님-사람들이 진술한 지방 교회 측의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범죄 혐의를 밝혀 줄 어떤 것도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비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북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출판물에서 지방 교회들을 다룰 때는 엄격한 신학적 접근을 취했다.) 그러나 SCP의 신학적인 결론이 우리와 유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다른 혐의에 대한 불신은 일단 접어두고 소송 문제에서 그들을 지지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공동의 대의와 동지애를 위해 진실을 억누름으로써, SCP가 지방 교회들에게 지은 죄에 참여했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참된 형제자매들을 거짓되게 이단으로 낙인찍는 죄를 지었다." (http://www.localchurch.kr/20553)

 

"믿음과 실행의 비본질적인 몇몇 문제에 관해 지방 교회들과 우리 사이에 아직도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전에 그들을 ‘정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 단체’로 평가했던 것은 우리가 그들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 비록 우리가 여기 서방에서 익숙하게 된 것들과는 다르지만, 이들은 확실히 믿는 이들의 정통 단체이다." (http://www.localchurch.kr/20582)

 

그리고 AIA의 설립자인 그레첸 파산티노 코번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나의 이전 연구(밥과 월터와 엘리옷과 칼과 함께 발전시키고 공유했던 연구)는 틀린 결론을 내릴 정도로 불충분했다. 나의 현재 연구(행크와 엘리옷과 함께 발전시키고 공유한 연구)는 이전 것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하며, 나의 이전 결론을 뒤집을 정도로 충분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개 서한에 서명했든지, 얼마나 여러 번 부적절한 출처가 동일하게 인용되었는지 간에, 이 저널의 특집 기사가 뒷받침하는 결론이 진리의 승부에 있어서 더 유력하다. 지방 교회들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인 항목들을 믿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대적하기보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다른 이단 연구자들이 우리가 한 만큼 심도 있는 연구에 재착수하지 않을 것이라면 자신들이 한 정죄를 철회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형제를 잘못 고발하거나 이단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기로에 놓여 있다. 우리에게 무슨 영적인 권리가 있어 이 문제에 대한 재고를 거절할 것인가?" (http://www.localchurch.kr/21535)

 

우리는 독자들이 지금까지의 지방교회 측의 변증과 이인규님의 글의 무게를 달아 볼 것을 요청드린다. 이인규님의 주장이 옳은가? 아니면 CRI의 엘리옷 밀러와 AIA의 그레첸 파산티노 코번과 같은 분들과 지방교회 측의 변증이 옳은가? 하나님은 우리의 영들의 무게를 달아 보시는 분이다(잠 16:2).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원한다.

 

끝으로 '보름스 의회'에서 마르틴 루터가 한 고백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작은 성도

 

 

덧붙여: 우리가 성경 해석에 있어 근본주의 노선에서 철저함을 추구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으로 느껴지는 언급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철저한 성경 해석 자체에 있고 이러한 태도는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엄격'하고 그래서 우리도 힘들 때가 많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정말 배타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배타적이지 않게 되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려지게 된다(마 5:13, 눅 14:34-35). 그리고 부끄럽지만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도 조롱받는 믿는 이들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비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맛'을 회복할 때 비판받는 것이 아닌 믿는 이로서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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