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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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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5)

 

 

[이인규님] - 비록 그분의 인간의 부분(필자 주, 혼 + 육)이 죽었지만, 죽지 않는 그분의 신성한 부분(필자 주, 영)은 영원히 산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자신 안에 신성한 요소 곧 거룩의 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44-45쪽)

 

지방교회는 예수의 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고 신성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분리를 시키는 것이다.

 

---> 인용문에 이인규님이 '추가'한 부분에 대한 답변은 앞 글에서 충분히 드린 것 같다. 이인규님의 풍부한 상상력과 신학 지식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픽션(fiction)이라고 느껴진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출 20:16) 이 소설은 앞 글에서도 말한 것처럼 '재판(reprint)'이 되지 않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인규님이 자주 인용하는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중)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모든 속성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삼위에서의 영원한 성자의 신성을 확증한다."(은성, 50쪽)고 되어 있는데, 이인규님은 '예수님의 인성'도 위 인용문에 해당된다는 주장인가? 그럼 예수님은 신성만이 있는 분이 되시는데,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비판함으로 유티키안(Eutydhians)과 같은 단성론자가 되려는 것인가?

 

그리고 앞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인규님은 "어느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되거나 서로 대립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으며, 후술하겠지만 인간론에서도 비성경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그래서 이인규님이 영과 혼과 몸의 구별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이인규님은 "대외적으로는 정통 신학을 가진 것처럼 주장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이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쓰고 있는 구별과 분리 등의 용어는 정통 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아니다. 그는 아폴리나리우스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폴리나리우스는 구별한 것이며 오히려 양성의 분리에 대해서는 '대항'한 사람이다.

 

이런 이인규님의 이중적인 성향이 왜 문제가 되는지 본 글에서 좀 더 증명해 보도록 하겠다. 특히 위 지방교회 측의 인용문을 비판한 것은 그의 삼신론 만큼이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 온다.

 

 

[이인규님] - 그 분이 육체 안에 사셨을 때에 그분의 한 부분은 다만 사람, 곧 다윗의 씨였다. 그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부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인정됨을 통해서이다(같은 책 45쪽)

 

-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 이전에 그분은 그분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 분의 성육신으로 그분은 인성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 분의 존재의 부분으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의 인성은 그분이 부활할 때까지는 아들화 되지않은,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않았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23쪽)

 

---> 두번째 인용문의 소주제를 보면 알겠지만 이 부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요 1:14, 3:16)'도 되시고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 히 1:6)'도 되시는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기본 진리의 기초 위에서 더 깊은 진리를 논하는 방면이지 이인규님의 오해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그런 단순한 문제를 논하는 장이 아니다.

 

이인규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와 '맏아들'에 대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독생자란 아들이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분은 어떻게 '맏아들'도 되실 수 있는가? 그분은 '독생자'이시면서 '맏아들'이신가? 아니면 독생자였으나 이제는 '맏아들'이 되신 것인가? 바로 이런 부분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위의 설명이 있는 것이다.

 

 

[이인규님] - (골1:15-18의 구절)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67쪽)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육신으로 볼 때에는 다윗의 혈통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신(사륵스)과 성결의 영(프뉴마)은 대조되는 단어로서, 육체적으로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났고, 영으로 보면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과 같이 그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가, 부활 후에 바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인가? 결론적으로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신성은 일반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셨고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라는 뜻), 영으로 보아도 부활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정되다"는 단어는 헬라어 "호리조"로서 "공표하다, 선언하다. 결정하다"는 해석이 보다 분명하다. 영어로는 "be declared"(NIV, KJV)와 "to define correctly" 의 뜻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보아도 다윗의 혈통으로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으며, 영적으로 보아도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 골 1:15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www.localchurch.kr/29686

 

그리고 롬 1:3-4에 대한 이인규님의 해석은 어떻게 보면 기본적인 해석처럼 보인다. 그리고 만일 이인규님이 지방교회 측을 비판하는 데 이 내용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큰 문제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을 비판함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이인규님의 이러한 주장이 왜 문제가 되는지 간략하게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다.

 

먼저 이인규님의 주장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침례 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과(마 3:17) 높은 산에서 변형되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마 17:5), 그리고 부활 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에 큰 차이점이 없게 된다. 즉 그분 안의 ‘신성’이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난 것으로 여전히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내신 것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의 부활 시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은 독생자 방면이 아니라 '맏아들' 방면이라는 것이다. 즉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거듭남으로(벧전 1:3) 그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기 때문에(요 20:17, 히 2:10-12) 그분은 ‘독생자’가 아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신 것이다(롬 8:29, 히 1:6).

 

그러므로 역(易)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인성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함께 못박힘으로 한 면에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새로운 나로 다시 산 것처럼(갈 2:20, 엡 2:5) 그분 역시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신성’ 방면이 아닌 ‘인성’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인규님처럼 그분의 인성이 아닌 신성 방면이라고 오해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우리는 독생자의 많은 형제들이 되어 그분의 신격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이인규님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신격의 4번째 위격이 되어 참으로 (신격에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삼하 7:12-14, 시 2:7 등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예수님이 부활 시에 그분의 인성이 높여짐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을 증명해 드릴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글이 길어질까봐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인규님은 너무도 성경적인 지방교회 측을 잘못 비판하다가 그의 이단적인 기독론의 실체만 폭로되고 말았다.)

 

 

[이인규님] ➀ 예수(장소적인 삼분법으로 분리) = 지방교회 교인(장소적인 삼분법으로 분리)

 

즉 지방교회의 교인들에게 양태론적인 영이 내주하면, 그들은 곧 예수와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에게 양태론적인 ‘그 영’(신성), 즉 하나님의 실재가 들어오면 그들은 예수와 동일한 구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이인규님의 상상력이 무르익어 이제 그의 '소설'이 완성되는 지점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지방교회 측의 진리에 대해 충분히 변호하겠지만 동시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왜곡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인규님을 통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그의 주장이 '모순되는 부분'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데 이런 부분은 그의 소설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부분인 것 같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권면의 말도 드리고 싶다. 그럼 인간론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변론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위의 짧은 비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 우리는 사람의 '삼분설(영과 혼과 몸)'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의 영은 어디로 가고 "양태론적인 그 영(신성), 즉 하나님의 실재"가 우리 안에 들어 온다는 것인가? 혹 "예수의 영은 곧 성부 하나님 자신의 양태론적인 개념으로 본 것... 성부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오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영’이 되고"로 정의했기 때문에 지방교회 측 성도들도 '사람의 영'은 없고 예수님처럼 '양태론적인 그 영(신성)'이 대신 들어 온다는 것인가?

 

 

[이인규님] 그들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됨으로서 그들은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예수의 재림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재림이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기 위해서 지방교회는 사람도 장소적인 삼분법(영 + 혼, 육)으로 분리하고, 예수도 삼분법(영 + 혼, 육)으로 분리를 시킨 것이다. 이제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이해가 갈 것이라고 본다. 더 자세한 설명은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읽어보면 그들의 전모를 알게 될 것이다.

 

---> 지방교회 측의 재림관에 대해서는 앞 글에서 약간 설명드렸고 더 자세한 것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www.localchurch.kr/2854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수님에게도 '사람의 영'이 있고 우리에게도 당연히 '사람의 영'이 있다. 이 영 안에 우리가 거듭날 때 '생명 주는 영'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난' 이후부터 '생명의 성장'이 시작되는데 어린 아기에서 영적인 사람(고전 3:1), 즉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될 때까지(엡 4:13)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느 날 하늘에서 오시겠지만(행 1:11), 그분은 그분께 걸맞는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오신다(고후 11:2, 계 19:7-9). 물론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는 등 그 외 많은 일들이 발생하겠지만... 그분의 관심은 그분께 어울리는 신부를 맞이하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우리가 생명이 성숙해야(그분의 신부로 단장되어야) 그분이 오실 수 있다는 역(易)도 성립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이 오셨는데, 신부가 준비되지 않은(너무 어린) 결혼식이 되지 않겠는가? 즉 그분이 다시 오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이 자라야 하고 지방교회 측의 글은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위트니스 리, 왕국, 329쪽)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셨으며,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계신다. 그분의 오심은 이러한 변화시키는 역사의 완성이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 아니라 우리로부터 오실 것이다."(위트니스 리, 왕국, 329-330쪽)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우리로부터 오실 것이다."가 우리 안에서 생명의 성장이 있어야 하고 변화되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 그분의 신부로 단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성장'에 의해서 오고 계신다", 같은 책, 330쪽). 물론 우리는 '생명의 성장' 방면 외에 그분이 실제로 하늘에서 오시는 것도 믿는다(이인규님이 우리의 '두 방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지방교회는 예수의 가시적(可視的)이며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며", "별도의 예수의 재림은 없게 된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재림이 아니다", "지방교회는 예수의 재림도 다르고, 예수의 부활도 다르며, 사후의 천국도 부정한다."고 확신에 찬 소설을 쓴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인규님에게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요일 3:2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와 어떤 점에서 '같게' 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 구절에 의하면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게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한가지 더 질문을 드리면, 롬 6:5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무슨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장래 주님과 같이 '부활한다'는 의미인가? 혹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지방교회 측에게 한 것처럼 바울에게도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 아니다... 부활도 다르며"라고 말해주지 않겠는가?

 

 

[이인규님] - 그러나 그 분의 인성에는 죄가 없으며 결코 이전에 타락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인간의 부분은 구속될 필요가 없었으며 다만 높여질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인성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한 부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분이고, 다른 한 부분은 타락되고 부패한 부분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8쪽)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있다. 우리는 그 분과 한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당신 안에 담기 위한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45쪽)

 

---> 첫번째 인용문은 왜 인용을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인성은 '구속될 필요' 없이 부활 시에 영화롭게 되심으로 높여질 필요만 있었다는 뜻이고, 우리는 창조되었지만 타락했기 때문에 그분과 그 점에서 다르다는 것인데, 이 인용문에 동의가 안 된다는 것인가? 혹시 우리가 '구분해서' 말해서 '전적 타락'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다고 답변을 드리겠다(창세기 강해(보급판1), 257-271쪽).

 

두번째 인용문은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고 그 이유는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결국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그분과 하나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내용인데, 아마 이인규님이 역대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는지 조사가 부족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 같다.

 

(도움을 드리면,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클레멘트, 아리우스의 이단을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한 아타나시우스,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네우스 등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가르쳤다. 이외에도 마르틴 루터, 존 캘빈, 존 번연, 마담 귀용, 허드슨 테일러, 존 넬슨 다비, 아돌프 사피어, 앤드류 머레이 등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가르쳤다. 특히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까지 했다.)

 

 

[이인규님]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 바로 그 때 그들은 안팍으로 - 생명과 본성과 기질과 몸의 형태에서 -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4쪽)

 

---> 이 인용문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아타나시우스의 말과 정확하게 같은 내용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주장하되, 사람은 예수님처럼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하나님의 '신격'은 없다는 의미임)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이 됨’은 고대에서 아주 성행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325년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God became a man, that man may become god)”라고 말했다… 내가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이 있을 뿐 하나님의 신격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 있는 어떤 교사도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이상의 최고봉과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62-63쪽).

 

 

[이인규님] - 이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거듭난 후로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해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이 될 때까지 그 역사를 계속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인 우리 모두는 거룩케 됨, 새롭게 됨, 변화, 형상을 본받음의 과정을 거쳐 우리의 온 존재의 영화롭게 됨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8쪽)

 

---> 이인규님은 혹시 '하나님의 독생자'와 '하나님의 맏아들'의 차이에 대해 연구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독생자는 그 용어 그대로 신격의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유일한 아들)을 의미한다(요 1:18). 그리고 하나님의 맏아들은 그분이 부활 시에 그분의 '인성'이 높여짐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을 말한다(롬 1:4). 아마 지금쯤이면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 지방교회 측이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닌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 똑같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지방교회 측이 주장하는 신화(Deification)는 하나님의 신격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며 성경적이고 안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의 이단적인 기독론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많은 형제들이 되어 제 4격 하나님이 되게 한다. 그런 사상이야말로 정말 문제인 것이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사람(God-Man)이라고 부르며, 예수는 그 God-man의 첫 샘플이었다는 것이다.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이 신성(영)을 갖게 되면, 그들이 바로 God-man 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단적인 양태론과 이단적인 기독론이 아니라면 그들과 같은 주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적인 인간론이 결합되면, 그들의 신인합일론이 완성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가증스럽게 정통교회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복음주의였으며, 오해였다고 말하면서 재검토를 부탁하고 있으며, 한기총 회장에게 서신을 보내며,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었다, 더욱이 몇몇 기독교 인사들은 지방교회 세미나에서 축사를 해주고, 그들의 책을 광고를 해주며,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선전해주고 있었다.

 

---> 2세기 말에 블란서 리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이단들이 성행하였고 또 기독교에 대한 큰 박해가 있었는데, 리용의 감독이 된 이레네우스(Irenaeus)는 어떻게 하면 이 두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을지 고심하였다.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바르게 이해할 때 이 두 가지 문제―박해와 이단―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레네우스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 (Irenaeus, adv.haer. 5권 서론).

 

그리고 그의 이런 사상은 약 백여년 후에 등장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레네우스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 (Athanasius, de incar. 54,3).

 

그러나 이런 초대교회 때의 풍성한 유산은 어느덧 상실되었고 이제는 이런 진리를 다시 회복하고 계승하려는 믿는 이들을 향해 (이러한 역사도 모른 채) 이단을 수호한다는 사람이 비난하며 조롱하고 있다.

 

초대교회 때는 「신화(Deification)」 진리로 박해와 이단을 이겼는데 지금은 「신화(Deification)」 진리를 주장한다고 하여 박해를 받고 이단으로 몰리고 있다. 

 

이럴 때는 믿는 이가 무엇으로 이겨야 하는가? (계속)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6)

 

 

[이인규님] ➁ 지방교회의 영과 혼과 육에 대한 잘못된 삼분법

 

정통교단에서도 어느 교단은 이분법을, 어느 교단은 삼분법을 가르친다. 물론 필자는 어느 교단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살아있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된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는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에 대한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 영과 육의 대결, 선과 악의 대결의 이원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 롬 7장은 '율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이 왜 실패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율법을 모르고 '선을 행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실패하고 곤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데(롬 7:18)" 그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17)"이고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기(롬 7:21)" 때문이다. 이인규님은 이런 갈등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갈등은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성경적인 체험인가?

 

"살아있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된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본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혹시 우리가 영과 혼과 몸을 구분하는 것을 실제적이면서도 '영적인 의미'가 포함된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물질적인 의미로만 이해했기에 "살아있는 인간의..."라고 한 것인가? 그렇다면 안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성경의 용례를 따라 그렇게 구분한 것이고 '혼과 영의 분리'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히 4:12에 근거한다(물론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언급하는 것인데, 타락한 사람의 '영과 혼'은 마치 영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혼 안에 깊숙히 '파묻혀' 있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타락한 이래로 사람의 '혼'과 '영'의 구분이 모호하고 성경과 체험상 '동의어'처럼 보이기에 어떤 이들은 '이분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롬 7장의 체험이 없으면(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바울과 같이 극도로 의롭게 되려는 체험이 없으면) 사람을 '전인적인 존재(이것을 '전인설'이라고 한다)'로 인식하기가 쉽다). 즉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영을 따라' 살아야 되는데(롬 8:4-5), 비록 거듭나기는 했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 혼을 따라, 혼을 강화시키는 세상의 체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영을 따라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믿는 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영의 느낌'을 읽을 수 있도록 영과 혼이 분리되는 것이 필요하다(이것은 성령의 계시(엡 1:17, 히 4:12)로 말미암는다). 바로 이런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꼭 삼분설을 믿지 않아도, 이분설이나 전인설을 믿어도 가능하다(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향한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삼분설을 믿고 있는데 '지식'에만 만족하고 이러한 체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인규님] 이러한 주장이 한국교회에 소개된 것은 워치만 니로부터 우리에게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숱한 이단들(지방교회, 구원파, 베뢰아, 다락방등)이 나타났다.

 

심지어 정통교회에서도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살아서 분리되는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간주하여 아래와 같은 이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상당히 많으며, 또한 영성운동, 영성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영과 육이 분리될 수 있다는 이단적인 주장도 많이 있다.

 

---> 우리는 다른 단체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인규님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인규'님과 같은 분이 말하니 혹 우리와 같이 오해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다만 워치만 니가 영에 속한 사람 '서문' 및 '편집을 마치고서'에서 말한 것을 소개해 주고 싶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영적인 수준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이 책의 앞뒤에서 말한 것의 영적 생명의 수준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포기하지도 말고 억지로 머리로 연구하지도 않도록 부탁의 말을 드린다. 그 진리들은 당신보다 더욱 성숙한 생명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은 절대로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전쟁에 대한 이론의 책이 아님을 이해하기 바란다. 나 자신은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진리들을 여러 가지 고통과 실패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간증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진리 속에 불의 화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한 부류만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본래 많은 믿는 이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필요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한 권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필요성이 없는 독자라면 이 안의 진리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이 안의 부당한 것을 판단할 것이다..."

 

 

[이인규님] 어떤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는 이단이지만, 워치만 니는 이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방교회 인간론은 워치만 니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그들의 양태론인 ‘삼일론’이라는 용어 자체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들의 배타적인 교회론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왔으며, 특히 단체구원론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관계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들이 "마치 부자관계와 같았다"고 진술하며,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워치만 니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존다비와 앤드류 머레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워치만 니는 존다비의 극단적 세대주의와 앤드류 머레이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며, 특히 존다비의 그의 독단적인 성경해석 때문에 형제교회의 지도자들과 많은 분쟁을 일으켜 많은 지도자들이 형제교회를 떠났다고 전해진다. 지방교회의 인간론은 삼분법을 공간적인 장소적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예수와 사람을 동일한 존재로 보기 위한 이론 전개에서 지방교회의 중요한 교리가 된다. 사람의 안에서 사탄(욱체)과 하나님(영)의 이원론적인 대결이 있으며, 이것이 지방교회의 성화교리가 되어지며, 베뢰아의 귀신론이 영향을 받게 된다.

 

---> 위에서 답변을 드렸듯이 '전인적인 존재'로 롬 7-8장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분설로도 롬 7-8장의 체험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롬 7-8장에서 '하나님의 법'을 제외하고 3종류의 법이 나오는데 각각 우리의 존재와 관련되어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는 몇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인간론 외의 나머지 주제에 대해서는 앞 글에서 충분히 말씀을 드린 것 같다.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분들은 http://www.localchurch.kr/에서 검색을 통해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확인하실 수 있다.

 

 

[이인규님] - 죄는 사단의 체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이 두 체현들이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단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73쪽)

 

- 우리는 우리 존재에 세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그의 거처를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육체 속에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는가?(위트니스 리, 왕국, 218쪽)

 

---> 좀 길지만,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http://www.localchurch.kr/1885)이라는 글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조금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탐하지 않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의 이 요구를 만질 때,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하며 더이상 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반대하여 일어나 내부에서 우리로 하여금 탐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많이 작정하고 결정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탐심은 더욱더 우리 안에 무성해진다. 밖에 하나님의 법의 요구로 인해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즉시 우리 안에 악을 작용케 하여 우리의 선한 생각을 거스려 싸우게 한다. 더우기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교전에서 선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 진다...

 

우리는 비록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위에 요구들을 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 요구들을 실행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낼 힘이 전혀 없다. 게다가 죄의 법은 항상 선의 법을 반대하고, 선의 법이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방해하고 그 원함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강력한 힘과 함께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출인,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모든 요구들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낼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구출되어 자동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이인규님] - 사람의 세 부분, 니 형제님은 그의 그리스도인 생활 초기부터 사람에게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살전 5:23). 그는 혼은 사람의 인격이고 몸은 물질적인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바깥 부분이며 영은 영적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

 

정통신학에서는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 봅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치만 니로부터 시작된 인간론은 사람을 살아서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시킨다. 문제는 인간의 영에는 양태론적인 하나님이 거하고, 인간의 육에는 사탄이 거하게 된다는 이원론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인간의 혼에는 인격이 거하는데, 그 인간의 혼을 빼앗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단이 싸운다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인용문의 출처가 빠졌는데, 아마도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일 것이다.

 

그리고 (5)번 글에서 이인규님이 "인간론에서도 비성경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그래서 이인규님이 영과 혼과 몸의 구별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해 드렸는데, 그 점에 대해 답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독자라면, 이분설이나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구별하고 구분한다고 하여 그들이 유체이탈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그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겠는가? 심지어 영과 혼의 분리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문맥을 읽어 보면 (자신이 아무리 체험이 없다고 해도) '영적 체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더구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별한다고 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 의하면 영혼을 육체와 조금이라도 구별하거나 구분한다는 말을 사용하면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의미로 보고 '곧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분설이나 삼분설에 대해서는 "어느 교단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람을 살아서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시키는 곳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폴리나리우스가 비록 이단이기는 하지만 이인규님의 주장과 같이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키는" 이단은 아닌데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주장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있는 건지 그의 주장까지도 왜곡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인규님은 자신의 관점을 객관화 하지 못했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글을 봄으로 자신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만 드러냈다. 예를 들면, 구별은 구분과 다르고 구분은 분리와 다른데 이인규님은 구별이라고만 말해도 '분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모든 배후에는 이인규님의 인간론의 오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류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 교리에서 이단성은 거의 전반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의 정확히 교리를 파악하면 지방교회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➀ 신론(양태론, 승계론)

➁ 기독론(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키는 아폴로내리우스 주의)

➂ 인간론(영과 혼과 육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 이원론)"

 

우리가 익히 알듯이 인간론은 이단 판정에서 상대적으로 좀 관대하지만 이인규님의 인간론의 관점은 기독론과 신론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에 심각한 것이다즉 '인간론'에서의 오류가 위 기독론에 대한 관점에서 반영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원리로 신론에서 이인규님은 정통 신학자들의 '구별'에 대한 관점을 '분리'로 인식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 같다.

 

"삼위일체는...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가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위로부터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왔을까?"

 

이런 이인규님의 관점에 동의하는 정통 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심지어 이인규님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다고 생각하여 요한 웨슬리의 주장을 인용했지만 과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이인규님의 관점에 동의하고 있을까?

 

"상호 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누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 된다." (김영선,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93쪽)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듯이 요한 웨슬리의 주장은 이인규님의 주장과 비교했을 때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 차이를 가지고 이인규님은 그동안 지방교회 측의 관점에 대해 이단 판정을 해 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인규님] - 사단은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 인격화된 죄로 거하고 있다. 오직 살아있는 인격만이 어느 곳에 거할 수가 있다.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 있는 그의 근거지로부터 사단은 우리 혼을 차지하고 우리 혼을 그의 절대적인 통제 아래 두고 싶어한다.(왕국, 216쪽)

 

- 사단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리 몸으로부터 우리 혼에 대해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 이같이 사단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역사한다. 주님은 반대방향으로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역사하신다. 어느날 주님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축인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위트니스 리, 왕국, 217쪽)

 

---> 우리의 육체 안에는 (롬 7:17-18)가 있고 죄의 법(롬 7:23)이 있다. 그리고 이 죄의 법은 우리의 마음(생각)의 법(롬 7:23)과 싸워 우리를 곤고한 자가 되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며(롬 8:16) '생명의 영의 법(롬 8:2)'으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기를 원하신다(엡 3:17). 그러므로 우리 안에 '혼'을 차지하기 위한 영적 전쟁이 있고 영적 전쟁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주님이 우리의 혼을 점유하시는 정도가 곧 '성화'의 정도이다.

 

 

[이인규님] 그렇다면 육은 죄를 짓거나 사탄의 거처이고 영은 죄가 없으며 하나님의 거처일까? 육도 죄를 짓지만 영도 죄를 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거룩함을 온전하게 이루어 육과 영(spirit)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인간은 육체나 영적으로 모두 죄를 지으며 더러워진 것이다. 물론 성욕, 식욕같은 욕망을 육체적인 욕망이라고 표현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고깃덩어리 육체만의 욕망이 아니며, 결국은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육체는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아래 본문은 영혼과 육체가 따로 따로 주를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63:1)

 

---> 문맥을 보면 알겠지만 고후 7:1의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우상들과 같은 영적인 세계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한 영(고전 6:17)'이 되었는데 이인규님은 이 '연합된 영'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주님이 우리의 죄에 함께 참여하시는가?)? 죄를 지을 때는 '영의 느낌'을 억누르고 '혼의 의지'가 '육체의 욕망'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인규님의 '영'은 '육체의 욕망'이 자극할 때 '혼의 의지'가 죄를 선택하라고 죄에 동참하시는가? 왜 죄를 지으면 영 안에서 답답한가? 그것은 '영의 느낌'을 억누르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즉 '영'은 죄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롬 8:7에 보면 "육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한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회복역)"라고 되어 있는데, 이인규님의 육체는 성경 말씀과 달리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 있는 육체인가? 우리의 육체는 변하지 않는다(요 3:6). 다만 우리의 '혼의 생각'을 '영'에 둘 때(롬 8:6)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더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를 굴복시키고 우리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며(롬 8:11, 회복역 참조), '의의 병기(롬 6:13)'로 드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육체를 신뢰할 수 없는(빌 3:3) 믿는 이들의 정상적인 체험이 아닌가?

 

그런데 이인규님의 말에 의하면, 이인규님의 '육체'는 혼의 생각을 영에 두지 않아도 항상 주님의 일을 선택하는 '신령한 몸(고전 15:44)'인 것 같아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시편 말씀은 시편 기자의 '시적 표현'도 고려해야 하고(가령 시 139:9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라고 말하고 있는데 새벽에 '날개'가 있는가? 아니면 다윗은 '조류'가 되어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하려는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위 설명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인규님]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는 성경은 그들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뜻을 언급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 롬 6:5-6을 보면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어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로서 섬기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회복역)"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혼이 영의 느낌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위치, 죽음의 위치에 머무른다면(이것이 고후 4:11 전반부 말씀의 의미이다), 우리의 '죄의 몸'은 무력하게 되고 더 이상 죄의 노예로서 섬기지 않게 되며 (우리의 죽을 육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도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고(마 16:24)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다(빌 3:10). 이러한 부활관은 '성경적'이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체험도 부족한 이인규님에게는 얼마나 기독교의 부활관과 '다른' 것인지!

 

그리고 이원론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짧게 답변 드리면, 이원론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육체를 억압함으로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함으로 염세주의에 빠지거나 사람의 인간성과 이성을 무시함으로 신비주의와 반 이성주의에 빠지는 것 등이 있다.

 

그런데 지방교회 측은 죄성이 있는 육체를 생명의 영의 법이 있는 영에 굴복되게 하여(롬 8:13) 의의 병기로 드리게 함으로(롬 6:13) 결국 금욕주의와는 무관하고 (참고 http://www.localchurch.kr/1880) 독수리처럼 속된 것을 벗어나는 초월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소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필요와 짐을 짊어지는 방면도 동시에 주의함으로(회복역 창 1:20 각주2, 1:24 각주1 참고) 염세주의와도 무관하고(이 두 방면을 균형있게 주의하지 못하면 염세주의나 세속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한 면에서는 초월하지만 또 한면에서는 그 초월의 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섬긴다. '초월함'이 없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섬기려 하면 결국 세상과 하나가 된다), 영을 강조함으로 한 면에서는 혼(의 생명)을 부인하지만(마 16:24) 동시에 영의 출로로써 합당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필요한 새로워진 혼의 기능을 주의함으로(딤후 1:7) 반 이성주의와도 무관하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결국 성경 보다는 사람의 감정과 비성경적인 성령 운동 등의 문제가 있는데, 지방교회 측에 대해 증언한 유진 반 네스 고에치우스 박사의 증언과 CRI의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답변이 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지방 교회」 신학이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그들에게 이 찬송가를 읽어 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의 찬송가는 제가 언급했던 어떤 교회의 찬송가들보다 훨씬 더 정통적이었습니다. 그보다 정말 놀라운 것은 찬송시에 표현된 기독교 교리를 보는 것인데, 이는 교리들 중 어떤 것은 노래하기가 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가 찬송시에 들어 있으며 또 아주 분명합니다." (http://www.localchurch.kr/1280) (참고 http://www.praisenote.net/recommend)

 

"...지방 교회의 소속원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오늘날 애석하게도 복음주의 공동체의 대다수가 놓치고 있는 교리적 정확성에 대한 예리한 관심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방 교회들은 광범위한 교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합당한 교리(정통성)와 합당한 실행(건전성) 모두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일치되고, 비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자유를 갖고, 다른 모든 것들에서는 자비를 베풀라.”는 격언대로 전진한다. 휘장의 이편에 있는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계속 토론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함께 자라가며 영원을 지내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http://www.localchurch.kr/21568)

 

 

[이인규님] 물론 성경에서 바울은 육체와 영을 구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육체’와 ‘영’은 인간의 육신적 부분과 영적 부분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는 표현이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영을 좇는 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영’은 ‘성령 하나님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물론 정신적인 영혼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부분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된다. 특히 “육신에 죄가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 자체가 곧 성령을 거스리는 전인적인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 성경본문과 같다.

 

“육체(인간)의 소욕은 성령(하나님)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혼'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산 혼(창 2:7)'이라고 말하고 창세기에서도 종종 사람을 '혼(전인적인 의미로)'이라고 칭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창 12:5, 46:27 원문 참조). 이는 '혼'이 사람을 대표하고 사람의 존재와 특성과 생명은 혼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한 이후로 사람은 전인적인 의미로 '육체'라고도 불리우게 된다(창 6:3, 갈 5:17). 이는 다만 혼만이 아닌 이제는 '육체'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요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육체'를 '전인적인 의미'로 사용한 부분이 있고 육체로 불리운다고 해서 삼분설이 틀렸고 사람을 전인적인 의미로만 봐야 되는가?

 

오히려 '육체'로 불리운다는 사실이 사람에게는 '육체'가 있으며 육체가 타락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므로 여전히 이 구절들은 '삼분설'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우리는 타락한 사람에서 원래의 모형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인규님도 "'육체’라는 표현은 물론 정신적인 영혼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부분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다"고 실토하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이 있는데 왜 성경의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삼분설을 지지하지 않는가? 이인규님은 성경 해석을 '다수결'로 하는가? (그러나 원문을 보면, 전인적인 의미가 아닌 구분되는 의미로 영과 혼과 몸이 더 많은 것이 사실 아닌가?)

 

"'육신에 죄가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 자체가 곧 성령을 거스리는 전인적인 인간의 욕망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타락한 몸인 육체 안에 죄가 거한다는 의미이다(롬 7:17-18). 왜냐하면 죄는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주관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대하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하며,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압도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악을 우리에게 행하게 하는" 인격화 된 사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인규님은 이 '죄'가 혼에도 있고 영에도 있는 그런 '대마왕' 같은 사람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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