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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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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3)

 

 

[이인규님]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또다른 보혜사인 성령, 그를 보내신다고 하셨을까?

 

성경은 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분 예수라고 말하고 있을까?

 

예수님은 왜 자기 자신인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을까? 삼위일체가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위로부터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왔을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에 예수가 아버지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으며(행7:55), 다윗은 시편110:1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내 주’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마22:43, 눅20:43-44. 행2:34-35에서 시편110:1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재성을 직접 말씀하셨다.

 

---> 이인규님은 '아버지'가 '하늘'에 계셔야만 구별이 되고 예수님 '안에' 계시면 구별이 안 된다고 보시는 것 같다(너무 영적인 사실을 물질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우리 역시 마 3:16-17의 침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과,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는 성령님과,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다 믿는다. 그런데, 성경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도 계시다고 하지 않는가(요 14:10-11)? 이인규님은 이 말씀을 어디에 두겠는가? 우리의 답변은 '둘 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어거스틴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어거스틴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앞으로 세워서 어거스틴의 등 뒤에 숨어서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속이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무엇일까? 고전적 삼위일체에서 “상호내재”는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윤무(輪舞)를 말한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다”는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이 상호내재라는 주장은 초대교회에서 종속론(오리겐)이 등장하였을 때에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주장으로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에 의하여 주장된 것이다. 즉 초대교회에서 고전적인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잘못된 주장이 등장하였는데, 즉 성부가 가장 크고, 성자예수와 성령은 좀 열등한 신성을 가졌다는 소위 ‘종속론’이라는 주장이 오리겐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예수는 열등한 신적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요한복음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소위 상호내재라는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 상호내재는 서로가 동등하다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주므로서 종속론에 멋진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호내재라는 이론은 종속론을 반격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삼위의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된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상호내재)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IVP, 186-187쪽)

 

---> 결국 이인규님의 주장은 "상호내재라는 이론은 종속론을 반격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삼위의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자신은 '상호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리고 인용해 주신 글을 보면 상호내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내재는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에 대해 설명을 필요로 하는데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그 점에서(아마도 휘포스타시스들을 '현존양식'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데 지방교회 측은 상호내재에 관한한 어거스틴과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어거스틴은 캅바도키아 교부들과는 달리 휘포스타시스들을 신위(神位) 안에서의 '존재 양식'으로 정의함) 왜 캅바도키아 교부들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제시하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상호내재(coinherence)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99쪽).

 

 

[이인규님]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은 종속설을 반격하기 위한 용어였다. 또 상호내재는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개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에서는 동적인 개념으로서 ‘상호침투, 상호순환’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게 된다. 정통신학은 인격이 구별되며, 상호교류가 가능한 상호내재의 개념을 안전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고전적 삼위일체를 슬쩍 끄집어 내어,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닌 것처럼 조작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교회사적인 배경은 언급하지 않고 감추면서 단지 초대교회 교부들과 어거스틴도 이런 주장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는 교회사적인 조작을 하는 것이다.

 

---> 이인규님은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라고 말한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 속에 아버지께서 계시다고 그러셨는데, 최삼경 목사는 자신도 '상호내재'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결국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 것은 믿지 않는다. 이인규님은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예전에 쓴 글에 의하면,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최삼경 목사를 옹호해 주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인규님은 성령의 '내주'를 믿지 않는가?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간구하셔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 주시는 진리의 영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14:17), 이 성령이 이인규님 안에 있는 것은 '장소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상호 교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은 이인규님이라는 인격 안에 있는가, 아니면 인격 안에 인격은 있을 수 없고 그렇다면 '구별이 되지 않으며' '상호 교류'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인규님의 인격 안에는 '없다'는 것인가? 거듭나고 성령의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성령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고전 6:19, 약 4:5)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구별이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믿는 이들이 '직감' 안에서 성령님과 교통하고 있는데(고후 13:14, 요일 1:1-10) 이러한 교통은 이인규님의 말에 의하면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상호 교류가 가능한 것인가? 이인규님은 이러한 체험이 없는가?

 

이인규님이 고전적인 삼위일체라며 폄하하는 어거스틴의 상호내재 관점은 예수님의 말씀과 비교했을 때(요 14:10-11)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잘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점이 틀렸고 잘못된 것인가?

 

 

[이인규님] 양태론자들은 자신을 양태론이 아니라고 감추고 위장한다. 그 이유는 양태론이 기독교 2000년 교회사에서 단 한번도 정통신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태론자들이 가장 변명을 하는 단골 메뉴가 바로 “자신들은 어거스틴과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고전적 삼위일체는 현재의 삼위일체와 다르며, 삼위일체가 정립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항상 이단적인 주장이 먼저 등장하고, 그것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정통신학이 정립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전적 삼위일체는 정통신학이 정립되어가는 한 과정이었다...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본질을 의미하였는데, 나중에 예수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이며 성령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가 되므로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거스틴이 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단어가 “가면‘이라는 뜻도 갖고 있었다. 즉 연극에서 배우가 가면을 바꿔 쓰고 일인다역을 하는 개념으로서, 양태론의 의미가 풍기는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어거스틴이 양태론자였다는 내용이 아니라, 어거스틴이 번역한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칼케톤 회의에서는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를 동의어라고 선언하게 되므로서, 양태론적인 오해를 종식시킨다.

 

---> 오해를 받았지만 결국 오해가 종식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더구나 지방교회 측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어거스틴이 사용한 '인격(위격)'이라는 단어도 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더욱 문제(?) 없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인규님은 이제 지방교회 측이 오해의 여지가 있어 사용을 피하고 있는 인격(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또 비난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290쪽)와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즉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이 고전적인 삼위일체'라고 비판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과 반대되는 글이 나오면 자신이 뭘 비판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분 같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정통 삼위일체가 형성되어진 용어의 과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는 정통삼위일체를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 헬라인 친구들은 한 본질과 세 실체라고 말했으나, 라틴인들은 한 본질(혹은 실체)과 세 인격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이 신비스로운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충분하겠다...... 세 인격이라고 말한다면, 왜 세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 각각을 유일한 한 인격이라 부를지언정, 세 인격이라고 부를 수 없다.(위트니스리 리, 성령, 51쪽)

 

---> 이인규님은 위 인용문을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으로 생각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위 인용문은 '어거스틴'이 말한 것이다. 다시 한번 책을 정확하게 살펴 보라. 그리고 '어거스틴'의 말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그는 정통삼위일체를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사과하기 바란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또 자신들은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그들은 초대교회 교부들도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자신들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본질적 삼위일체는 결국 상호내재이며, 그들이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곧 사역적 양태론을 뜻한다.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그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곧 양태론을 의미하는 사역적인 삼위일체이며, 그들이 말하는 본질적 삼위일체는 위장된 상호내재인 것이다.

 

---> 이인규님은 자신이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세 위격의 '동일시'는 제외하고).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인규님은 명칭상으로만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믿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적으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속에 ('본질적인 삼위일체'가) '함몰되어' 있어서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삼신론자'의 양상을 띄고 있다. 이 점은 위에서 설명드린 '상호내재'와 관련된 지방교회 측의 반론을 보면 더욱 분명할 것이다.

 

익히 잘 알듯이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세 위격'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페리코레시스'의 원리를 통하여 '한 실체'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반대임). 마찬가지로 이인규님 역시 현상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방면(경륜적인 삼위일체)만을 주의하다 보니, 셋의 방면을 강조하고 심지어 세 위격이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 사상이 아주 문제이기는 해도 만일 이인규님이 캅바도키아 교부들과 같이 성경적인 '상호내재'의 원리를 받아들여 '한 실체'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인격 안에 인격이 있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면 '상호 교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이 직접 하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는 말씀을 믿지 않는 (최삼경 목사와 동일한) 삼신론 이단자가 된 것이다.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글을 오해하여 "지방교회는 또 자신들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고 말했는데, 지방교회 측의 글을 인용까지 하고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지방교회 측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을 말하면서 '동시에' 본질적인 삼위일체도 믿고 있으므로 비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다(위 인용문을 자세히 보라). 그리고 이인규님이 인격 안에 인격이 있는 상호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기 때문에) 지방교회 측의 상호내재가 '위장된 상호내재'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인규님]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이들이 말하는 용어의 뜻을 파악하면 이들의 주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인 분류일 뿐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단지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즉 그들이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으로만 구별되어진다는 것으로 양태론이라는 스스로의 고백과 같다. 동일한 한 하나님이 사역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으로서, 구약에서는 아버지로 사역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로 사역하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이 곧 사역적(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어떤 것인가?

 

---> 본질적인 삼위일체는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사람과 가지는 관계를 말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34, 257쪽). 지방교회 측의 글은 바로 이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이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실제적으로 안 믿고, 본질적인 삼위일체만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 지방교회 측이 주장하는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일과 기능을 위해 세 위격이 구별되게 '보일 뿐이고' 이들의 본심은 본질적인 삼위일체만 믿는 것인데 그것도 위장된 '상호내재'라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마 3:16-17에서 침례를 받으시는 아들과,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는 성령과,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지방교회 측의 관점에는 '구별되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이 참되게 믿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상은 '참된 것'이 아니고 세 위격이 서로 안에 거하는(이인규님이 보기에는 인격 안에 인격이 있음으로 서로 구별도 안되고 상호 교류도 불가능한) (양태론적인) '한 하나님'이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인규님은 마 3:16-17의 '침례를 받으시는 아들과',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는 성령과',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만 믿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삼위의 동시 존재와 구별(심지어 '분리')은 너무도 쉽게 인식이 되지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은 이 구절을 왜곡해서 "삼위일체는...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인규님의 이런 시각이 조절되지 않는 한(정통 삼위일체로 돌아오지 않는 한) 지방교회 측의 주장은 영원히 이인규님에게 이단처럼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이인규님이 틀린 자(ruler)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측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틀린 자로 많은 틀린 사람들의 오류를 어느 정도 측정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의 자가 틀린 한 '정통'도 틀리게 된다는 것을 이인규님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계속)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4)

 

 

[이인규님]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 혹시 이인규님은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가 현대 삼위일체 신학에서 아주 '핫(hot)한' 주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혹시 주변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신학을 하신) 분이 있다면 (이 주제에 대해) 적극적인 면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인규님] 이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단지 사역적으로 구별되는 삼위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이미 4세기 이후에 자취를 감춘 이론일 뿐이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경륜적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위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이러한 유형의 경륜주의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른 시기는 성자에 대한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IVP, 151쪽)

 

---> 이인규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위 주제와 관련된 지방교회 측의 글을 소개해 드리고 싶다. 바로 이렇게 '믿는' 것이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모두를 다 주의하는 것이다.

 

본질적인 삼일성과 경륜적인 삼일성

 

본질적인 삼일성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어떤 순위가 없이 동시에 동일한 방식으로 상호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의 행정적인 안배 안에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아버지는 첫번째 단계를 취하시며, 아들은 두번째 단계를, 그리고 성령은 세번째 단계를 취하신다. 아버지는 계획하셨으며, 아들은 성취하셨고, 그 영은 아들이 아버지의 계획을 따라 성취하신 것을 적용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그분의 경륜 안에서의 잇따른 절차 혹은 순위이다.

 

본질적인 삼일성은 그분의 존재하심을 위한 삼일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며, 경륜적인 삼일성은 그분의 움직이심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말한다. 신성한 삼일성의 본질이 필요하며, 신성한 삼일성의 계획 또한 필요하다.

 

삼위 양식론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영원하지는 않으며,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지도 않고, 단지 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세번의 잇따른 나타남이라고 가르친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가 계셨고 그 다음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는 끝났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그 영이 왔을 때 아들은 끝났다. 삼위 양식론은 셋이 하나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해석은 삼일성의 존재를 위태롭게 했다. 그들은 삼일성의 본질과 경륜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 분명한 조망을 갖고 있지 않다. 본질상 신격의 셋은 동시에 동등하게 존재하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시에 동등하게 상호 내재하신다.

 

아버지의 계획과 아들의 성취와 그 영의 적용

 

게다가 하나님 곧 삼일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계시므로 하나의 계획을 세우셨다. 그분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정적인 안배를 하셨으며, 따라서 그분은 경륜을 갖고 계신다. 이러한 경륜 안에서 신격의 셋은 연속하여 계신다. 이것은 경륜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역사가 필요하다. 아버지는 계획 곧 경륜의 첫 단계를 성취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시는 역사를 하셨다. 선택하시는 역사와 예정하시는 역사는 아버지께서 이루신 것이며 아들이나 영이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을 깨닫는 데 주의 깊어야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홀로 하지 않으셨다. 삼일의 신격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 영과 함께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께서 우리를 홀로 택하시고 뽑으셨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 내재하심과 동시 존재하심을 위태롭게 하게 된다. 삼일 하나님의 상호 내재하심과 동시 존재하심은 영원부터 영원에 이른다.

 

계획이 세워진 후에는 아들은 그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실 필요가 있었다. 아들은 성육신되시기 위해, 즉 육신이 되시고 사람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오셔서 삼십 삼 년 반 동안 인생을 사시고,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아들은 오셔서 이 모든 역사를 이루셨지만, 이러한 역사들을 홀로 이루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이루셨다. 아들은 오셔서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여 만유를 포함한 구속 역사를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이루셨다. 만일 아들이 홀로 스스로 오셨다면, 다시금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동시 존재하심과 상호 내재하심 그리고 그 본질을 위태롭게 했을 것이다. (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라. http://www.localchurch.kr/3570)

 

이인규님은 그동안 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조금 불리해질 경우 자신도 그것을 믿고 있고 그러나 지방교회 측과는 달리 정통적으로 믿는다는 식으로 빠져나갔었는데(예를 들면, '상호내재' 토론), 이번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토론에서는 '연구가 부실했는지' '부정적인 면만 언급을 해서' 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우리는 이인규님이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또는 본질적 삼위일체 개념은 초대교회 때부터 많이 논의되었으며, … 둘 중 어느 한 쪽만을 인정하고 다른 쪽을 부인하거나 경시하면 이단적 견해가 될 위험성이 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1995년, 대한기독교출판사, 643, 680쪽)고 경고한 이종성 박사님의 말을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인규님] 양태론은 단순한 이단적인 신학적 이론이 아니다. 양태론을 주장하게 되면, 와이셔츠의 처음 단추를 잘못 맞춘 결과가 되어 나중 단추를 채울 수가 없다. 실제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는 곳도 있으며, 실제로 지방교회는 예수의 가시적(可視的)이며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며, 죽어서 가는 사후 천국의 장소적인 개념도 부정한다. 또 양태론에 의하면 성령이 곧 다시 오신 예수가 되며, 예수가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양태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별도의 예수의 재림은 없게 된다. 또 양태론자들에게 구약의 하나님의 신, 성령과 오순절 이후의 성령은 다른 존재가 된다. 성령은 오순절 이후에 처음 등장한 하나님 자신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뢰아는 구약의 ‘하나님의 신’을 천사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이 동일한 존재가 되므로 십자가 대속의 개념이 달라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은 죄에 대한 대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공급하기 위한 신인합일의 목적이 된다.

 

---> 지방교회 측이 양태론을 믿지 않는 것은 충분히 증명을 해 드린 것 같다. 우리의 '증거'를 받고 받지 않고는 이인규님과 독자들의 몫이다.

 

그럼 이인규님과 같이 '삼신론'을 믿으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먼저 아버지께서 이인규님 안에 오실 수 없게 된다(요 14:23). 그리고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으므로 이인규님 안에 거하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요 14:20, 23). 그리고 불행하게도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이 되며(요일 5:11-12)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는 말에 해당되게 된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아닌가?

 

혹 이인규님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리해' 오셨으므로 문제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인규님의 주장에 의하면) 인격 안에 인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성령님은 이인규님 안에 들어가실 수 없게 된다(요 14:17). 혹 그 성령님께서 들어가실 수 있다고 해도 이인규님은 "성령님께서 '인성'을 입으신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예수님(신성-인성)과는 다른 예수님(신성)을 영접한 것이 된다. 이것이 '다른 복음'이 아닌가(갈 1:6-9)?

 

그리고 지방교회 측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과 동시에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도 믿으므로 이인규님의 말처럼 "실제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는 곳도 있으며, 실제로 지방교회는 예수의 가시적(可視的)이며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며... 별도의 예수의 재림은 없게 된다"와는 무관하게 된다.

 

나중에 해당 글에서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지만, 이인규님은 위와 같이 말한 것의 증거로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소개해 주고 있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신약의 결론, 왕국, 329쪽)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지는 않고"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는 말이 아닌가? 지방교회 측의 찬송을 들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얼마나 많은 찬송들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예를 들면, http://www.praisenote.net/1380http://www.praisenote.net/2224). 만일 이인규님의 말대로 "예수가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양태적인(?) 존재가 되었다"면 그분이 이미 재림하신 것인데 지방교회 측 성도들은 왜 그분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그리고 죽어서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경우 '낙원'이고 믿지 않는 이들의 경우 '음부'가 된다(음부 안에 낙원이 있고 그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음, 눅 16:26). 천국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간략히 말하면 '천국'은 주로 마태복음에서 말했고 은혜 시대 때 '실재'와 '외형'이 있으며 대환란 후에 주님이 오실 때 천년왕국에서 천국의 '출현'(나타남)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하나님의 영은 신성만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은 신성에 주님의 영화롭게 된 인성이 더해진 영이다. 신성의 면에서는 '동일한' 영이지만 인성이 더해졌으므로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 되는 것이다(롬 8:9).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이 동일한 존재가 되므로 십자가 대속의 개념이 달라진다"고 주장하였는데 아래의 글이 좋은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두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 아들은 모든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역사를 이루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역사를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위트니스 리, 장로훈련 Ⅲ. 이상을 실행하는 길, p.109-113)

 

위와 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와이셔츠 단추'는 걱정을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인규님은 왜 "하나님 자신"이 성자와 성령은 배제 된 성부 하나님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이 믿고 있는 관점이 아닌가!

 

 

[이인규님] 교회사를 통하여 살펴 보면, 초대교회의 기독론에서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주장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주장 중에서 많은 이단적인 주장이 있었는데 간략하게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➀ 예수는 인간적인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의 결합이라는 일부 그노시스파

➁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한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사벨리우스파의 양태론

➂ 그리스도의 일부는 피조물, 일부는 창조주라고 하는 반신으로 만든 아리우스파

➃ 인간이 육체와 혼과 영의 세부분이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육체와 혼의 두부분이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영으로 들어온다는 아폴로내리스파의 견해

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여 양성을 주장한 네스토리우스파

 

---> 좀 더 자세히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다.

 

1. 신성부인 이단 - 유대인들, 특히 에비온파 이단이 여기에 해당된다(A.D. 107, 이단정죄됨).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데, 이들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부인한다.

 

2. 인성부인 이단 - 가현적 영지주의자들(Docetists) 이단이 여기에 해당된다(A.D. 70-170). 이들은 육체를 악하다고 보며, 예수님의 육체는 진짜가 아니라 육체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3. 신성 불완전 이단 - 예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이단이다. 아리우스와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A.D. 325).

 

4. 인성 불완전 이단 - 일반적인 사람은 <영, 혼, 몸>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로고스(영 대신), 혼, 몸>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아폴리나리안’(Apollinarians) 이단들이 여기에 해당된다(A.D. 381).

 

5. 신성, 인성 분리 이단 - 네스토리안(Nestorians) 이단들은 예수님의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구별도 되고 심지어 분리도 된다고 주장한다(A.D. 431).

 

6. 신성, 인성 혼합 이단 - 유티키안(Eutydhians) 이단들이다(A.D. 451).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 결과 신성도 인성도 아닌 제 삼의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산성과 알칼리성이 만나 중성을 산출하는 것처럼 고유의 두 본성이 유지되지 못하게 한다.

 

 

[이인규님] 우리는 이러한 이단적인 기독론에 대해서 벌콥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노시스(영지주의)와 아폴로내리우스, 그리고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단들의 기독론을 혼합시킨 것이 바로 지방교회의 기독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지방교회는 삼위일체의 이단적인 양태론과 함께, 기독론에서 초대교회부터 존재해 왔던 그 이단적인 주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위와 같이 '기독론의 이단들'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것을 믿을 리가 있는가? 지방교회 측의 기독론은 칼케돈 신조와 일치하며 아래 인용문과 같다.

 

“…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다. 그 분은 완전한 인성뿐 아니라 온전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 분 안의 두 본성은 혼돈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두 본성을 소유하고 계실지라도 여전히 그 분은 한 인격이시다. 그 분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고, 그 분의 본성도 혼돈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전체 안에서 보여진 합당한 계시이다. 이것은 또한 역대로 하나님의 교회의 정통적인 관점이다. 하나님이자 사람이시고,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고, 분리됨이나 혼잡됨이 없는 우리 주님은 참으로 비밀들 중의 비밀이시요, 영원히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위트니스 리, 진리의 변호와 확증, 96-97쪽).

 

 

[이인규님] 기독론에 의한 몇가지 중대 오류 - 인성의 실재성에 대한 부정

 

제 2세기의 그노시스파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을 부정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순화한 육체, 혹은 천적인 육체로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적인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신적인 그리스도는 임시로 인간예수와 결합하였다고 보았다. 제 4세기의 싸벨리우스파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루이스벌콥, 기독교신학개론, 197-198쪽)

 

루이스벌콥이 말한 “인간적 예수와 신적 그리스도의 구별”이 바로 아폴로내리우스의 주장이며, 우리는 기독론에서 특히 아폴로내리우스에 대해서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인간적 예수와 신적 그리스도의 구별”은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이 아니라 위 인용문처럼 '그노시스파의 어떤 사람'이 주장한 것이다(본인이 인용하고도 다른 말을 하니 좀 당황스러운데 이 사람이 바로 요일 2:22에 언급된 '케린투스'이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위 책의 그 다음 단락에 '이성의 완전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나온다.

 

 

[이인규님] - 그(아폴로내리우스)는 사람이 신, 혼, 영의 3부로 구성되었다는 헬라철학의 3분설의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가 죄의 좌소인 영의 자리를 취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체와 혼만을 가지셨고 영의 자리는 로고스가 채웠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축소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영이 없는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신복윤교수.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 102쪽)

 

아폴로내리우스는 예수를 인상과 신성으로 분리하였는데 그가 말한 신성은 ‘영’이었으며, 그가 말한 인성은 ‘혼+육’으로 분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신성, 예수의 영은 곧 성부하나님 자신의 양태론적인 개념으로 본 것이다. 즉 양태론적으로 볼 때에 성부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오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영’이 되고, 이것을 지방교회는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그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달리 구별한다.

 

---> 예수를 인성과 신성으로 '분리'한 사람은 아폴리나리우스가 아니라 '네스토리안'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를 인성과 신성으로 분리'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이인규님은 아폴리나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신학 가운데 불신했던 신학 경향이 있었고 그것은 훗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킨 네스토리안 이단으로 드러난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키는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심지어 성육신 하신 주님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구별을 강조하는 안디옥 학파의 이중적 기독론에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지방교회 측은 예수님에게도 '사람의 영'이 있다고 믿는다(이렇게 당연한 것조차 변증을 해야 하나 싶은데 이인규님이 상상의 나래를 펴니 진실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변증이 불가피하다. 아래 인용된 회복역과 각주 내용을 보라).

 

(마 27:50)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그분의 을 내어 주셨다." "And Jesus cried out again with a loud voice and yielded up His spirit."

 

(요 12:27 각주1) "사람이신 주님은 그분께서 곧 겪으셔야 할 죽음 때문에 혼이 괴로우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도록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안에서는 자신이 이때에 온 것이 바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으셨다." "As a man, the Lord was troubled in His soul because of the death He was about to suffer, Hence He prayed, "Father, save Me out of this hour." However, it must have been that in His spirit He realized that it was for the glorifying of the Father that He had come to that hour."

 

영어 회복역과 각주를 보면 알겠지만 둘 다 그분의 '영'이 '소문자'로 되어 있다. 만일 이인규님의 주장대로 '성부 하나님 자신'이시라면 당연히 대문자를 썼을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사람의 영'이 언제 "성부 하나님 자신의 양태론적인 개념, 성부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오신 것"이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인규님] 정통교회의 기독론은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인성과 신성이 변화하지 않은 채 하나의 품성으로 연합하였다고 가르친다. 즉 지방교회는 인간 예수를 혼과 육으로 분리시켰고,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성부하나님 자신을 영으로 분리시킨 것이다.

 

---> 이 시점에서 이인규님의 이상한 말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다. 이인규님은 서두에서 "어느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되거나 서로 대립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말해 주었는데 (신학에서는 '용어' 하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질문을 드려 보겠다.

 

이인규님은 정말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된 적이 없었다"고 믿는가? 예를 들면, 마 22:41-46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구별을 하셨기 때문에 질문을 하신 것은 아닌가? 또 롬 1:3-4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구별해서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구별이 아닌 분리라고 생각하는가? (이인규님이 구별을 분리로 본다면 혹시 구별조차 부인하는 단성론자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다. 이 부분은 후론 하도록 하겠다.)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이 사도 바울의 롬 1:3-4절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 것에 대해 '분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깊은 우려의 마음이 있다. 분리란 네스토리안 이단과 같이 인성과 신성을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분이 '2개의 연결된 위격들(two united hypostasis)'을 가지고 계신다 정도를 말해 주어야 비로소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성부 하나님 자신을 영으로 분리시킨 것"이라는 이인규님의 상상력은 위의 회복역과 각주 내용에서 보듯이 지방교회 측과는 무관한 '소설'이었음을 충분히 증명해 드린 것 같아서 '재판(reprint)'을 하지 않기를 권하는 바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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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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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20.08.26. 03:33
다루는 주제가 난해하고 글이 제법 길어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학생이나 목회자분들은 신학교 때 깊이 다루지 않았던 삼위일체론을 복습 내지는 보완한다고 생각하면 동기 부여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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