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1)(2)

첨부 1

 

관리자 주: 이 글은 작은 성도님의 개인 차원의 반박글이지만 이인규님의 '지방교회의 이단연구보고서'에 대한 오류와 문제점들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은 것 같아 작은 성도님의 허락을 얻어 이곳에도 게시합니다(가독성을 위해 색칠 및 강조 표시를 추가했습니다).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1)

 

 

이인규님이 쓴 '지방교회의 이단연구보고서'라는 글을 읽어 보았다. 뭐랄까, 나름대로 한 교단에 이단 연구를 보고하기 위해 쓴 글 같은데, 그동안 보아 온 논문들과 비교해 볼 때 전문 신학자가 쓴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글을 쓴 당사자는, "그들의 교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책을 많이 읽고 깊은 연구를 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며,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그렇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글 내용으로 봤을 때 아마도 본인은 아닌 것 같은데.

 

이 글은 이인규님의 글에 대한 작은 반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 교단에(?) 이단 연구를 보고하기 위해 쓴 글이라면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럼 시작해 볼까?

 

(참고로 성경은 편의상 '개역개정' 성경을 인용하였으며, 정확한 내용이 필요할 경우 회복역에서 인용하고 '회복역'이라고 표시해 두었다. 다만 문맥의 흐름상 회복역임을 알 수 있는 경우에는 생략하기도 하였다.)

 

 

[이인규님] ...그러나 약 3개월 후에 토론이 아직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방교회는 일방적으로 토론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며 토론을 사실상 포기하는 일이 있었다.

 

---> 오래 전에 그 토론을 지켜 본 기억이 난다. 이인규님은 상대방이 글을 올리기가 무섭게 (아마도 상대방의 글은 전혀 읽지 않고) 본인이 이미 작성해 둔 글을 올리는 일을 반복하였고, 그래서 토론이 중간에 종결된 것으로 기억한다. '토론'이 아닌 (귀는 없고 입만 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연설회 같은 느낌이었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필자에 대한 비난성 글을 계속 인터넷에 올려 놓고 “이인규권사와 최삼경목사는 삼신론자이다”라는 맹비난을 하였는데, 공식토론조차 기권한 사람들이 장외에서 비난하는 것은 진정한 태도가 아니며...

 

---> 공식토론이라고 불리기에는 많이 민망한, 일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토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인규님의 목적은 '진리' 보다는 토론에 '이기는 것'이 목적이었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인규님은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카페에 자신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해 놓은 다음에(혹 들어 올 수는 있지만 글은 올릴 수 없게 해 놓은 다음에, 혹 글은 올려도 바로 삭제가 되게끔 해 놓은 다음에) '장외에서 비난하는 것(?)'도 문제 삼고 있는, 본인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하지 않기를 원하는 아주 특이하신 분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고 말하고 있다.

 

 

[이인규님] 그 내용도 역시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거짓 조작과 변명에 불과한 내용일 뿐이다. 또한 양태론적인 시각에서 보면 정통삼위일체는 당연히 삼신론으로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이인규님은 최삼경 목사의 ‘세 인격, 세 영들’ 사상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위 사상은 한기총과 예장 통합 측에 의해 각각 삼신론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인규님이 이런 시각이 있기 때문에 지방교회 측의 신론이 혹 '양태론'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이인규님] 또 몇년전 지방교회는 풀러신학교 리챠드 무어 학장이 지방교회를 이단이 아니라고 평가하였다는 선전을 하기도 한 바 있었는데...

 

---> 거듭 권면을 드려야 될 부분인데, 이인규님은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반박을 하는 것을 좀 훈련하면 좋을 것 같다. '풀러 신학 대학 성명서(http://www.localchurch.kr/1792)'에도 잘 나와 있듯이 이 성명서는 어떤 개인의 평가가 아닌 '풀러 신학 대학'의 성명서이다(이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예를 들면 '교단의 결의'와 '총회장 개인 명의의 성명서'이다).

 

 

[이인규님] 즉 친이단성향을 가진 인사를 앞세워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조작하는 케케묵은 수법으로서, 최근의 몇몇 이단들이 사용하는 수법과 동일하며,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가증스러운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지방교회는 건전한 종교 단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 자신의 잘못된 전제를 근거로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것도 다음과 같은 자극적인 문구들을 써가며... "이단이 아니라고 조작하는 케케묵은 수법", "이단들이 사용하는 수법", "가증스러운 이중적인 행동", "건전한 종교 단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인규님의 현란한 말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영향을 받았을까?

 

그러나 지방교회 측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단체와 개인은 '풀러 신학 대학(총장 개인이 아닌 대학이다)' 외에도 CRI의 행크 해네그래프, 엘리옷 밀러, AIA의 그레첸 파산티노 등 많은 분들이 있다(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분들이 있는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an-open-letter.org/en/full-testimonies-page/) 이인규님은 이들도 "친이단성향을 가진 인사"로 보고 있을까?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대외적으로 말할 때에는 자신들이 정통기독교와 동일한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마치 오해에서 비롯된 것처럼 조작하는 비양심적인 이단 단체이다. 즉 대내적인 가르침과 대외적인 주장이 다른 이러한 이중적인 성향을 가진 이단들이 너무 많으며...

 

---> 그러나 이인규님의 이러한 주장과는 다르게 CRI 저널에서는, "나(행크 해네그래프)는 이번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의 특별판에 실릴 특집 기사로 완결될 연구 기획에 착수했다. 근본적인 연구가 미국뿐 아니라 중국, 대만, 한국, 영국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이뤄졌다. 이 연구에는 말 그대로 수백 권의 책과 논문과 교회 문서와 음성 자료와 영상물에 대한 주의 깊은 평가가 포함되었고, 법정 자료들까지도 참고했다. 우리가 한 근본적인 연구의 결과는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라는 말로 압축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인규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료들을 참고했으면서도(이인규님은 아마 12권 정도 인용을 한 것 같다) 이인규님이 보신 "대내적인 가르침과 대외적인 주장이 다른 이러한 이중적인 성향"을 그들은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인규님] 지방교회의 정체에 대해서 그 실상을 파악하는 이단연구가들은 우리나라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들의 교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책을 많이 읽고 깊은 연구를 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며,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단들보다 더욱 위험하다....

 

---> 지방교회 측의 책을 12권 정도 인용을 한 사람이 할 말은 우선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인규님이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한다"고 오해하는 이유는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한 지방교회 측과 이인규님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지방교회 측은 모순처럼 보이는,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실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 들이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인규님은 이것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본인이 생각하기에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우리의 이성에 논리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이인규님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들의 교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책을 많이 읽고 깊은 연구를 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며,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인규님이 그렇게 하셨는지는 의문이지만) 바로 그렇게 연구를 한 곳이 앞에서 언급된 CRI와 같은 단체이며 또 「미국 종교 백과 사전」의 저자인 '존 고든 멜튼 박사'와 같은 분도 있다.

 

[존 고든 멜튼 박사의 공개서한 중에서] 저는 최근 지방교회로부터 그들의 생활과 믿음에 대해 예년에 제가 미국 종교 백과 사전을 저술하며 하였던 것보다 더 엄정한 조사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저는 1984년에 이 조사를 시작했고, 여러분이 참조하도록 조사 결과의 일부를 동봉했습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저는 위트니스 리의 저술을 거의 대부분 읽었으며...

 

[존 고든 멜튼 박사의 법정 증언] 나는 위트니스 리의 책을 읽기로 작정한 양보다 더 많이 읽었고, 다른 「지방 교회들」로부터 온 정기 간행물뿐 아니라 다양한 「지방 교회」 모임으로부터 온 정기 간행물 일체를 최선을 다해 읽었습니다. 또 시애틀에 있는 빌 프리맨의 사역에서 나온 연속 출판물도 읽었지요. 더디의 사본을 완독했을 뿐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해 읽은 책은 6피트 가량 됩니다.

 

이런 분들과 지방교회에 대한 이인규님의 신학적인 결론에 차이가 있다면 누가 "그들의 책을 많이 읽고 깊은 연구"를 했으며 누가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있는지 공정한 평가가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이인규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방교회는 단순한 이단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기독교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부정하는 심각한 이단으로서 그들에게 미혹되어서 지방교회를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목사들이 나온다는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며, 우리는 지방교회의 정체를 똑바로 직시하여야만 한다...

 

---> 익히 알려져 있듯이, 지방교회 측의 서적은 누구라도 구매가 가능하고 접근 및 열람이 가능하다. 심지어 https://www.ministrybooks.org/와 같은 사이트는 지방교회 측의 서적을 거의 대부분 올려 놓은 사이트이기도 하다(이것이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단체의 행동일까?).

 

그리고 지방교회 측의 서적을 거의 대부분 읽은 '존 고든 멜튼 박사'는 "나 개인적으로는 지방교회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관한 근본적인 교리에서 벗어난 부분을 한 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CRI의 행크 해네그래프는 "CRI는 논쟁에 문외한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순교자들이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린 교리들인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교리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고 지방교회에 대해 증언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기독교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부정하는 심각한 이단"으로 결론을 내리고 주제넘게도 "지방교회를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목사들이 나온다는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라며 많은 목사님들에게 훈수까지 두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과연 신학자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이인규님의 연구 결과가 맞는지 아니면 참된 신학자다운 자세로 지방교회 측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공정하게 연구한 CRI나 존 고든 멜튼 박사님의 연구 결과가 맞는지 그 분별은 그리 어렵지 않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

 

 

[이인규님]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이 기독교와 다르다는 주장과 기독교는 사탄이 세운 종교라는 배타적인 주장을 한다. 아래의 지방교회의 배타적인 교회론을 읽어 본다면, 그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동일한 복음주의라고 주장하든지, 오해라고 변명하는 것은 모두 거짓 조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요 교리에서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듯이, 이들의 교리는 기독교의 교리와 전혀 다르며, 이들은 자신들을 포함한 극소수만이 이 교리(God-man)를 알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를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9쪽)

 

---> 이인규님은 '이 문제'가 무엇인지 궁금해 할 독자들을 위해 좀 더 폭넓게 인용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궁금해 할 독자들을 위해 좀 더 인용을 하면,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를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오히려 어떤이들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이 말하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는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믿어야 할 성경 안의 말씀이다... 오늘날 생명 주는 영은 최종 완결된 영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7장 39절은 예수께서 아직 부활 안에서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더라고 말한다. 명백히 성령이 거기 있었고, 하나님의 영도 창세기 1장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영이 아직 없을 수 있는가? 이것은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부활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오직 옛 창조만 있었고 아직 새 창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한복음 7장 39절(...for the Spirit was not yet)과 관련된 신학 논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아마도 전 교회사를 통틀어 관련 논문을 쓴 사람이 10명 정도 될까?). 그 중 고신 신대원 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신 변종길 박사님이 계시고 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김병국 교수님과 화란 개혁교회 총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한 바 있는 앤드류 머레이 등이 있다. 지방교회 측은 이렇게 '이 문제'를 본 사람은 '극소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 구절에 대한 관점은 앤드류 머레이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이런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이 기독교와 다르다는 주장"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인규님] -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사람이심을 시인한다. 또 이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53쪽)

 

---> 일반적으로 교리에는 기본적인 교리가 있고, 비성경적인 교리가 있으며, 기본 교리에 기반을 두고 더 심화된 방식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교리도 있다. 예를 들면 요 7:39에 관한 부분은 기본 교리에 기반을 두고 더 심화된 방식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교리일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 부분이 난해 구절일 수가 없는 것이다. 기본 교리에 기반을 두고 그 위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위 하나님-사람들에 관한 교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인규님은 기본 교리가 아닌 것은 모두 '비성경적인 교리'라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지방교회 측의 주장은 기독교와 전혀 다르며 대외적으로만 기독교의 교리와 동일하다고 위장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은 '기본적인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성경의 더 깊은 (특히 난해구절이라고 생각되는) 방면에 대한 해석도 회피하지 않고 추구하기 때문에(이것이 교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일부 신학자들의 태도와 다른 것이다. 그들은 교단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감히 '지방교회'가 옳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신앙 양심상 틀렸다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신학에 조예가 없는 이인규님 같은 분이 일차원적인 관점에서 '기본적인 교리'와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심화된 방면의 해석'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비록 이인규님의 눈에 "대내적인 가르침과 대외적인 주장이 다른 이러한 이중적인 성향을 가진 이단들"로 보일 위험이 있을지라도 기본적인 교리에 동의하면서 성경의 난해 구절에 대해서도 더 깊이 추구하려는 믿는 이들에게는(위의 링크에서 언급된 분들을 참고하라)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인규님] - 마찬가지로 교회 시대에서 그분은 이러한 이기는 무리들을 기독교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 분은 오직 그분의 회복 안에서 소수의 이기는 자들을 찾아낼 수 있다. 계시록 14장은 비록 많은 이들이 구원받았지만 이기는 자들은 그 수가 다만 144,000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67쪽)

 

---> 위 구절에서 말한 '이러한 이기는 무리들'은 앞의 내용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도 바울과 같은 수준의 성숙한 믿는 이들의 '무리들'을 말한다. 기준이 이렇게 높기 때문에 이 글을 쓴 위트니스 리도 "나는 자주 엄숙하게 자문하며 심지어 울면서 주님께 물어본다. "오 주여, 제가 오늘 당신의 이기는 자입니까?". 나는, 나는 아니다라고 감히 말하지 않지만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일까봐 두렵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어떤 것들을 부활 안에서 하지 않고 천연적인 사람 안에서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어떤 것들을 믿음으로 하지 않고 내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였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66쪽).

 

사도 바울과 같은 수준의 성숙한 믿는 이들의 '무리들'이 이 시대에 어디에 있는지 이인규님이 혹시 안다면 소개해 주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는 심지어 회복 안에서도 '소수'일 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인규님] -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삼일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삼일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심의 실제이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비밀. 24쪽)

 

---> 저자의 의미는 "삼일 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시는 것"은 어떤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르침'과 '분배'는 차이가 있는데, 가르침은 우리가 지키고 해야 되는 어떤 것이고 분배는 우리가 원하는 어떤(가령 사랑스럽고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분배하셔서 우리로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우리가 소위 '은혜를 받을 때'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가 원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당연히 이것은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앞뒤 문장들을 인용해 보겠다(참고로 저자는 기독교를 '가르침'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기독교의 '교'는 '가르침'이란 의미임). 아래에 인용된 글의 문맥을 주의해서 보라).

 

"이것은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아버지께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하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게 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본문]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할지라도 매우 인정 많고 매우 선하며 매우 사랑이 풍성하여질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좋다고 할지 모르나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사랑이 풍성하다고 할지 몰라도 우리 자신들은 우리에게 사랑이 조금도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어떠한 철학과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이러한 문맥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자극적인 한 문장을 떼어 내어 "그들은 대내적으로 스스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줄기차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다만 분배는 어떤 가르침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예를 들면 '내가 사랑해야지' 해서 하는 사랑은 '가르침'에 따라 하는 사랑이고, 우리가 말씀이나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을 때(삼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분배되실 때) 자연스럽게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자신들만이 유일한 참 교회라는 차별성과 배타성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를 거짓, 사탄, 바벨론, 음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여 지방교회가 복음주의에 충실한 곳이라면 기독교는 사탄이 세운 교회가 됨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 가라지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큰 나무는 오늘날의 기독교계를 의미한다. 누룩은 이교도의 모든 관습, 세상적인 것, 죄있는 것, 우상숭배를 의미한다. 여자는 로마 천주교, 심지어 기독교계까지도 의미하며, 악한 자는 사단 자신이다. (위트니스 리, 왕국, 265쪽)

 

---> 위트니스 리는 마태복음 13장을 해석하면서 정확하게 주님이 사용하신 '어떤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고 있는데(그 의미가 과연 그러한지는 두번째 문제임) 이인규님은 뭉뚱그려서 "지방교회는 자신들만이 유일한 참 교회라는 차별성과 배타성"에 해당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기독교를 거짓, 사탄, 바벨론, 음녀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 19절의 '악한 자'를 지방교회 측은 사탄 자신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이 '악한 자'가 사탄이라는 것인데) 이인규님은 이것을 둔갑시켜서 "기독교를 사탄이라고 정의하는 지방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가라지들'이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고 말하고 있는데(주님은 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해석해 주심(마 13:38)), 이인규님은 "기독교를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왜 이렇게 상대방의 글을 '정확하게' 읽지 못할까? 신학 지식 이전에 정확한 성격과 국어 실력의 문제로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왜곡이 가능한 것은 이인규님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의 글을 보려 하는 것은 아닐까?

 

 

[이인규님] 기독교를 사탄이라고 정의하는 지방교회에서, 한기총과 교단의 이대위에게 자신들을 재평가하여 달라고 요청한다는 자체가 웃을 수 없는 코메디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탄이며 음녀라고 부르는 기독교에 자신들도 동일한 복음주의 사상을 갖고 있으므로, 자신들을 재평가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뒤로 돌아서면 즉시로 웃음을 보이며 그들의 긴 혀를 낼름 거릴 것이다.

 

---> 이인규님은 그동안 지방교회 측이 "기독교를 사탄이 세운 왕국이며", "기독교를 사탄이라고 정의하는 지방교회에서...", "기독교는 사탄이 세운 종교라는 배타적인 주장을 한다."고 강력하게 반복해서 주장했었다. 그리고 4개의 인용문을 제시했는데 그 중, '사탄'이란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위 인용문 하나이다.

 

그런데 독자들께서도 이미 보셨듯이 지방교회 측은 마 13:19의 '악한 자'가 사탄이라는 말을 했을 뿐 어디에 이인규님의 주장과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혹 지방교회 측의 책은 무수히 많으므로 필자가 미처 읽어 보지 못한 자료가 어디에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인규님은 자신이 '난독'을 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기독교를 사탄이라고 정의하는 지방교회"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한 단체를 이렇게 왜곡하고(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그것을 근거로 거짓된 보고서를 한 교단에 연구보고서로 제출하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나중에 주님 앞에서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심히 우려스럽다. 그리고 이인규님이 운영하고 있는 카페를 보면 이러한 이인규님의 자료에 근거해서 왜곡된 자료를 진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많은 분들이 있는데, 누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 (계속)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2)

 

 

[이인규님] 필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교회의 이단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이 세가지 교리는 오직 한가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즉 “예수그리스도는 God-man의 첫 샘플이며,...

 

---> 믿는 이들에게 주님을 영접한 이후의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닮은(지방교회 측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격을 제외하고 그분과 똑같이 되는) 성화된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방교회 측의 답변은 이것이 주님의 '되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에는 그분께는 '신성'만 있었을 뿐 '인성'은 아직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 그분은 '신성'이 있으시면서 동시에 '인성'도 있으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 되셨다. 이것을 지방교회 측은 '하나님-사람(God-man)'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마치 "웨슬리는 예수는 그 자신이 선포한 자, 즉 신-인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전통에 서 있다."(김영선,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70쪽)와 같다).

 

 

[이인규님] 지방교회 교인도 그와 똑같은 God-man이 될 수 있다” 라는 공식을 맞추기 위하여 모든 것을 전개시키고 있다. 즉 지방교회 교인에게 그 영(그들은 성령이라고 하지 않는다)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예수와 똑같이 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그 영’은 성령이 아니며, 그 영은 과정과 단계를 거친 양태론적인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 (이 부분은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상세하게 설명드려야 할 것 같다. 이인규님도 "가장 중요한 세가지..."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그분의 '신성'에는 변함이 없으셨지만 그분의 '인성'은 벗어버리신 것도 아니요 이전과 같이 다시 죽으실 수 있는 인성의 상태로 부활하신 것도 아니요, 성경의 기록에 따라 영화롭게 되신 인성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빌 3:21). 성경은 이것을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회복역)고 기록하고 있다.

 

즉 그분의 성육신 때에는 신성에 인성이 더해지셨고,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는 그분은 여전히 신성이 있으시고 인성이 있으시지만 그 인성은 더 이상 죽지 않는 하늘에 속한 몸, 영화롭게 된 인성이 되셨다는 것이다(고전 15:44). 그리고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는데, 성경은 아들이 성육신 하셨을 때 아들이 성육신 하신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성령의 상호내재는 여전히 유지되는 상태로 성육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의 표현으로 말하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셨다(요 1:14, 요 6:46에 쓰인 'para'라는 전치사는 'from with'의 의미임). 즉, 아버지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버지는 한 면에서 아들을 보내셨고 동시에 '상호내재'라는 삼위의 변치않는 원칙으로 인해 아들의 성육신에 '참여'하셨다. 이것은 성부 고난설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은 지상사역시 한 면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요 17:1) 동시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도 계실 수 있게 된 것이다(요 17:21).

 

이런 삼위의 본질적인 방면으로 인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은 더욱더 그분이 취하신 '인성'과 관련하여 복잡한 방면들이 있게 되었다. 한 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주셨고 그분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심판하셨지만 동시에 아들 안에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이 부활은 심지어 하나님의 영이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이 되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영원토록 존재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그 명칭이 나타나게 된다. 즉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성령이 계셨고 하나님의 영이 계셨지만(같은 영을 말하는 것임) 아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없었던 것이다(요 7:39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그분의 '인성'을 벗어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신성'에 더해 그분의 영화롭게 된 '인성'도 포함된 영이다. 이러한 영은 그분이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즉 그분의 부활하심 이전에는 '신성'의 영만이 존재했을 뿐, '신성-인성'의 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분이 부활하신 이후에 비로소 이러한 영이 존재하게 되었고 바로 이 영의 상태로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 오실 수 있는 분이 되셨다(롬 8:9-10, 바울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한 점은 (8)번 글 참조). 물론 그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롬 8:34).

 

그분은 한 면에서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셨지만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시라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우리는 거듭나거나 성화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외적으로 그분의 인도를 구하고 그의 축복과 보호를 구할 뿐 그분과 '연합'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성육신 때 '하나님-사람'으로 오셨고 그분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부인하심으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우리의 본이 되셨다(요 6:57).

 

그리고 이제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러한 본을 '재생산'하고 계신다(롬 8:29). 그분이 우리 안에 처음 들어 오셨을 때 (우리가 그분을 믿고 영접했을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고, 오랜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점점 더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엡 3:17). 그리고 이렇게 거처를 정하시는 것의 결과가 조금씩 성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인내하고 때로는 엄위하며 동시에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예수님과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신격에서는 아니지만 그분과 동일한 '하나님-사람들(God-men)'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말할 때 '성령'은 보통 신격의 세번째 위격의 '통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성경은 '성령'이란 표현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 '예수의 영(행 16:7)',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더 많이는 단순하게 'the Spirit'이라고 언급한다(요 7:39). 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성령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 안에 인성이 포함된 '그 영(the Spirit)'이시기 때문이다(계 22:17). (참고 http://www.localchurch.kr/3374)

 

이런 부분은 이인규님의 눈에는 '비성경적인 교리'로 보일지는 몰라도 지방교회 측은 사실상 마르틴 루터 이후로 주님의 회복의 노선의 모든 적극적인 유업을 계승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은 개신교가 서방교회의 전통 아래 있어 덜 주목받고 있는 교부 시대의 적극적인 유산도(예를 들면 신화(Deification) 진리) 계승하고 있음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즉 이 부분은 기본적인 교리에서 더 깊이 추구해야만이 알 수 있는 심화된 진리이며 성경과 신학을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람이 평가할만한 교리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 '되셨기'(요 1:14, 고전 15:45) 때문에 우리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의 영 안에서는 (그분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God-men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주된 부분인 혼과 관련해서는 아직 천연적인 사람인 부분이 많을 것이다(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기'와 같은(고전 3:1)). 그러므로 그분을 닮아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영 뿐 아니라 우리의 주된 부분인 혼 안에도 거처를 정하시게 되며(엡 3:17) 결국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변형되어(고전 15:44, 빌 3:21) '신격에서는 아니지만'(골 2:9, 행 10:26, 행 14:11-15)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요일 5:12, 벧후 1:4, 요일 3:2). 이것이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다(롬 8:30, 골 1:27).

 

 

[이인규님] 지방교회의 책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전형적인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성자 예수로 오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으로 왔다는 세 과정과 세 단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한 인격을 말하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읽고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적으로 매우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

 

--->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양태론처럼 보이는' 글들을 죽 나열한 다음에 위와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지방교회 측의 글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신약은 우리 하나님이 삼일(triune)이심을 계시한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삼일성에 관해 세 가지 주요 학설―삼위 양식설삼신론성경에 따른 순수한 계시―이 등장했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모두 영원한 것은 아니고 또 동시에 모두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가르치며, 단지 한 하나님의 세 가지 잠정적 나타남일 뿐이라고 말한다. 삼신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세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삼위 양식론과는 전혀 무관해야만 한다. 삼일성에 관한 그러한 극단적인 견해는 이단이다. 마찬가지로 세 하나님이 계시다고 가르치는 것도 역시 큰 이단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5-36p)

 

"삼위 양식론은 하나 안의 셋의 극단적인 면이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 안의 셋에 대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삼위 양식론은 극단에 치우쳐서 성경의 제한을 뛰어 넘고 있으며 셋 안의 하나인 면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무효화하고 있다. 삼위 양식론은 하나의 면에 관한 성경의 한도를 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극단위에 있는 이단이다. 삼신론은 반대편의 극단 즉 셋의 극단이다. 삼신론은 셋의 면에 관한 성경의 한도를 넘어서 셋의 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의 면을 소홀히한다. 또한 그것도 역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분명히 셋이기 때문에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삼위 양식론처럼 삼신론도 성경의 한도를 뛰어넘어서 하나의 이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은 둘 다 극단적인 것으로서 이단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6p)

 

"여러 해에 걸쳐서 나는 삼일 하나님에 관해 많은 메시지들을 전해 왔다. 만일 그 메시지들 안에 있는 어떤 문장들을 그 문맥으로부터 끄집어 낸다면, 내가 삼위 양식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또 어떤 문장들을 그 문맥으로부터 끄집어 낸다면, 마치 내가 삼신론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삼위양식론도 삼신론도 가르치지 않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7p)

 

이인규님은 본인이 인용한 말과 위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조화시킬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이 보기에 지방교회 측은 "대내적인 가르침과 대외적인 주장이 다른 이러한 이중적인 성향을 가진" 단체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실 이것이 이인규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방교회 측이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신실한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런 지방교회 성도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위와 같이 말했다면 이것은 그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 얼마나 방해가 될 것이며 대다수의 지방교회 측 성도들은 정말로 믿을 것이 아닌가?

 

 

[이인규님]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정통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을 하고 있다. 그는 정통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한다.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287쪽)

 

---> 누가 봐도 "'어떤'('모든'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라고 한 대목은 문제가 없는 표현 같은데(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인규님은 "정통 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인규님은 누군가가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정통 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라고 말해 주겠는가? 이인규님이 위 인용문을 비판하는 이유는 혹시 '자신을 비판한다'고 느껴서인가?

 

 

[이인규님] 아래 글을 보면 지방교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노골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태론의 시각으로 볼 때에 정통삼위일체는 삼신론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초석이 된 니케야신조까지 부정을 한다.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내신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아 신조의 교리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439쪽)

 

---> 니케아 신조는 325년에 채택된 신앙 고백문이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기초로 381년에 채택된 신앙 고백문이다. 그런데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자인 김명용 교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2000년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로, 또한 가장 정통적인 신조로 꼽히는 신조이다."라고 주장하며,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통 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즉 성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이 세 분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조는 이 세 분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어느 곳에서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 정통 삼위일체론의 결정적인 신조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인규님은 이러한 장로교 신학자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니케아 신조를 기초로 채택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고도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장로교 신학자가 있는데, 니케아 신조를 보고 위와 같이 말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것인가? 위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충분치 않다"고 말한 것을 이인규님의 주장처럼 "삼위일체의 초석이 된 니케야신조까지 부정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한 것일까? 이인규님이 결코 인용하지 않는 지방교회 측의 다음과 같은 자료도 있다. 이런 자료도 함께 인용하고 평가해야 '선동하는 사람'이 아닌 공정한 이단 연구가가 아닐까?

 

"비록 사도들의 신조가 단순한 방식으로 쓰였지만 그것은 교부들이 심도있고 철저하게 연구를 하고 말씀을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 니케아 신조에 이단적인 것이 전혀 없고, 실제로 나쁘지 않지만 여전히 그 내용들에 있어서는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아직 정본(正本)으로 공인받지 못한 일곱 권의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한국복음서원, 2001, 61-63쪽).

 

그리고 지방교회 측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종성 박사님의 글에 대해서는 이인규님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대한 고백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고백과 비교할 때 매우 간략하다. '또 성령을 믿는다'로 되어 있을 뿐 아무 설명이 없다. 이와 같이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조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고백만으로는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권위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 그러나 사도신조의 내용 구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삼위일체론의 표준이 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삼신론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언급하면서도, 그 셋이 하나라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1995, 85-86쪽과 머리말 참조)

 

 

[이인규님] 즉 양태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삼위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지만, 자신들은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고 상호내재한다고 가르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캘빈의 시대에도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가 있었다. 그가 주장한 내용이 바로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베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IVP, 234쪽)

 

---> 양태론의 가장 큰 특징은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었다면 당연히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은 삼위의 '동시존재'를 믿기 때문에 이인규님이 언급해 주신 것처럼 '양태론'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베투스는 '삼중적인 신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칼빈 등이 그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중이다(인용 부호를 자세히 보라). 즉 세르베투스의 입장에서 누군가가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라는 말이다(이인규님이 '아마도' 비판에 눈이 멀어 누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인규님] 앞에서 충분히 검토한 바와 같이 지방교회는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으로 육신을 입고 왔으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의 세 과정, 세 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세 과정과 세 단계의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고 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웃을 수도 없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으로 육신을 입고 왔으며"라는 주장이 문제가 있다면 여기서의 '하나님 자신'을 이인규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인규님은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리고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죽으시고 부활하여 생명 주는 영이 되신 것은 '성경 말씀(고전 15:45)'인데 이인규님은 성경 말씀에 무슨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참고로 지방교회 측의 성육신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래의 글을 인용해 보겠다.

 

"계획이 세워진 후에는 아들은 그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실 필요가 있었다. 아들은 성육신되시기 위해, 즉 육신이 되시고 사람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오셔서 삼십 삼 년 반 동안 인생을 사시고,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아들은 오셔서 이 모든 역사를 이루셨지만, 이러한 역사들을 홀로 이루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이루셨다. 아들은 오셔서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여 만유를 포함한 구속 역사를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이루셨다. 만일 아들이 홀로 스스로 오셨다면, 다시금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동시 존재하심과 상호 내재하심 그리고 그 본질을 위태롭게 했을 것이다."(장로훈련 Ⅲ. '이상을 실행하는 길' 중에서)

 

 

[이인규님] 성경을 보면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파송한다.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위의 파송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의 황당한 주장을 들어 보면 양태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 이인규님은 삼위가 '구별'되는 것에 지나쳐서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지방교회 측의 주장이 이인규님에게 양태론처럼 보이는 것이고 이인규님이 삼신론자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인규님에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몇가지 드리고 싶다. 왜 예수님은 요 14:16에서 (아버지께 구하셔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후에 요 14:18에서 '내가' 너희에게 온다고 하셨는가? 그리고 요 14:23에서는 "우리(예수님과 아버지)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는가? 왜 성령을 파송했는데 내(예수님)가 오시고 심지어 우리(예수님과 아버지)도 함께 오시는가?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시는 분인데, 왜 그분들이 오셨는가?

 

 

[이인규님] 그렇다면 보내는 성부하나님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있고, 보내심을 받으시는 성자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 있으며, 파송되는 성령에게도 동시존재, 상호내재가 된다면, 삼위일체는 구위삼체가 되는가?

 

---> 이인규님은 "...삼위일체는 구위삼체가 되는가?"라고 질문해 주셨는데, 만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가 '다른' 분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에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당연히' 같은 분이 아닌가? 이인규님은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기도의 대상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할 때의 그 '아버지'가 '같은' 분이라고 믿지 않는가? (이해가 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의 답변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말 같아서 심히 우려스럽다('도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인규님께 적용하자면(요 20:29), "그대는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믿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하실 것이다).

 

이시점에서 먼저번 글에 언급한 대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로버트 고벳)"에 관한 글을 소개해 주고 싶다.

 

"성경에서 우리의 관점에 전달된 진리의 양면성은 그것이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를 산출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영광이다. 미심한 점을 밝히며, 다양한 외형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의 법칙을 유지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다양한 결과들을 추적하여 하나의 원칙을 찾는다. 이러한 완전함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그는 회피하거나 부인한다."

 

고벳은 계속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본성상 그분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원칙으로 계속하여 역사하신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벳은, "만일 성경에서 외견상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원칙이 병행하는 것이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복수 안의 단일성」「단일성 안의 복수」는 세상과 성경이 모두 기초로 삼는 중요한 원칙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명백하게 모순되는 문장에 관해 고벳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행동하려고 하기 전에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둘 모두를 명백하게 확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벳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받아들이는 근거는 우리가 그것들을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둘 모두를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에 관한 많은 논쟁이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고벳이 말한 것처럼, "진리에 대한 반대되는 관점들은 다른 시대에 고찰되었던 주제의 다른 부분들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벳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시는가? 그분이 그들의 기질과 지적인 편견에 상반되는 진리의 관점을 확증하실 때, 그들은 그분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편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것 중 한 가지를 무시할 것인가?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성도는 둘 다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류가 없으신 그의 아버지께서 각각을 차별 없이 증거하시기 때문이다."("삼위 양식론, 삼신론,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 중에서) (계속)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댓글 2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2020.08.26. 03:18
저도 예전에 이인규님이 지방교회 측과 토론할 때 직 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열매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그때와 달리 최근에는 이인규님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의 정통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이인규님은 합동 교단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지요.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2020.08.26. 03:26

이인규씨는 위 지방교회 측과 토론 때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이인규 씨) "예를 들지요…한 학교의 10명이 같은 반 1학년 1반입니다. … 그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들이 독립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학년 1반에서 분리된 것과 뜻이 다릅니다."

이처럼 삼위격의 분리와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 한국교계에 의해 삼위일체에서 이단 규정을 받게 된 것은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정통 신학자들의 말과 이인규 님의 주장은 함께 갈수가 없을 만큼 간격이 큽니다.


"삼위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는 될 수 없다"(H. Bavinck, G. D. II 2, p288 "Ze Zijn unus Deus, ze Zijn niet te scheiden" - 터툴리안).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실 수 없으시다. 그분들은 마치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이 그런 것처럼, 서로 나란히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로레인 뵈트너, 'Studies In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p. 109).

“주기도문에서 … ‘아버지’라는 단어는 … 배타적으로 첫째 위격만이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위의 책, p. 107).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