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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목사, 정통을 들먹이는 가짜 정통, 죽은 정통의 대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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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목사, 정통을 들먹이는 가짜 정통, 죽은 정통의 대변자

 


김홍기 목사는 자신을 마치 ‘정통 삼위일체론의 파수꾼’ 혹은 ‘미국 내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대변자’인양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입만 열면 정통 교회와 정통 신학을 들먹이지만, 사실상 주님의 몸을 분열시키는 교파주의 옹호자요,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어거스틴과도 다른 잠재적 삼신론의 소유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어거스틴이나 A. H. 스트롱처럼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 모두의 오심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에게 각 위격들은 ‘온전한 하나님’(fully God)이 아니라 다른 두 위격들이 배제된 ‘1/3 하나님’이실 뿐이다. 김 목사는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처럼, ‘주기도문의 성부는 배타적으로 제1격만이 아닌 삼일 하나님이시다.’(Our Father is Triune God)라고 결코 고백하지 못한다. 그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14:10)라는 주님의 말씀도 “본질상호내재”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처럼 ‘내가’도 본질이고 ‘아버지께서’도 본질이라고 이해하고, 그 둘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식의 김 목사의 상호내재론은 결과적으로 ‘구별된 두 본질들’을 주장하는 것이 되며 이것은 심각한 이단 사상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 이해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는 사람이 두둔하는 정통은 눈먼 정통, 가짜 정통, 죽은 정통일 뿐이다. 과거에도 김 목사같은 가짜 정통인 ‘바리새인들’이 참 정통인 ‘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끈질기게 박해하고 죽였다. 주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이 장래에도 반복될 것임을 다음과 같이 미리 예언하고 계신다. “그리고 여러분을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할 것입니다.”(요16:2-3).


그런데 이처럼 참된 ‘진리’(truth)에서 크게 빗나가 있는 김 목사는 진리와 무관한 ‘사실’(fact) 관계마저도 교묘하게 왜곡시켜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아버지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는” 김 목사가 지금처럼 자칭 삼위일체론의 파수꾼 행세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신실한 다른 믿는 이들과 단체들을 지방 교회측의 “로비에 넘어간” 이들로 왜곡시켜 조롱하는 그의 태도 역시 옳지 않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러한 김 목사 자신도 항간의 억지스런 이단 정죄 시류에 편승한 또 다른 희생양일 뿐이다.

 


1. 변칙적인 이단 정죄자들에 휘둘리는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의 희생양들


김홍기 목사는 ‘하비스트 하우스’가 펴낸 <이단과 신흥 종교 백과사전>(ECNR)에 대한 텍사스 항소 법원 판결을 두고, “1650억을 요구한 지방교회의 참담한 패소”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말은 오히려 변칙적인 이단 정죄를 일삼던 이들의 부끄러운 부분들이 폭로될 구실만 제공할 뿐이다.


김 목사는 앞의 글에서도 지방 교회측이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가 소송한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소송을 제기했다.”라는 식의 거짓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소문일 뿐이고, 사실은 지난 반 세기 동안 단 세 번의 소송만 있었다. 즉 <갓멘> 책자 재판의 명예훼손 판결, <마인드 벤더즈>의 책자 전량 회수 사건, 그리고 김 목사가 소개한 위 <ECNR> 책자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 많은 세 책자들은 재판 결과만 다를 뿐, 변칙으로 지방 교회들을 이단시하고 반사회적 집단처럼 만들어 매장시키려 한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그 수법은 이들 셋 중에서 <ECNR>팀이 가장 간교하고 그들을 돕는 배후 세력도 가장 막강하다.


위 백과사전의 두 저자들 중 한 명은 미국 내 유명한 기독교 TV 쇼 진행자이며, 자신의 쇼에서 다룬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판매한 이익금을 수입으로 삼는 사람이다. 김 목사가 극찬하는 노먼 가이슬러는 이런 그의 수익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사람이고,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하면서 ‘오픈 레터’에 서명한 이들 대부분이 이런 범주의 사람들 혹은 그들의 지인들이다. 또 다른 저자는 과거 SCP와의 갓멘 재판 때부터 지방 교회측과 오랜 악연이 있어 온 사람이다. 이들은 갓멘 재판 패소 후, 반격할 기회를 엿보던 중 1997년에 위트니스 리가 타계한 것을 기회로 백과사전에 명단만 슬쩍 끼워 넣은 식으로 비열한 지방 교회측 이단 만들기를 시도했다.


즉 그들은 노골적으로 "지방 교회가 이단이다."라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 책의 총론에 해당되는 약 17쪽 분량의 서문에 온갖 혐오스럽고 반사회적인 내용들, 즉 ‘마약 밀수’, ‘살인’, ‘매춘 장려’, ‘가끔은 여성 강간’, ‘어린이 성폭행’, ‘문하생 폭행’, ‘인신 제물’, ‘유아 제물’ 등을 이단들의 특징으로 열거한 후, 이 책에 포함된 개인이나 단체들은 서문이 열거하는 전부 혹은 일부에 연관이 있다는 식의 교묘한 편집을 해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엘리옷 밀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나는 그 책의 서문 전체가 용어들을 정의하는 데 부주의했고, 단체들을 구분하는 데 부정확하고 일관성이 없고 불공정했으며, 심지어 명예훼손으로 해석되기 쉬운 것을 보았다. 저자들은 ‘이단’을 정의하기 위해 신학적인 영역과 사회학적 영역 곳곳을 맴돌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을 전적으로 배제한 것도 아니었다. … 이처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그물망 안에는 그 모든 묘사들에 들어맞지 않는 단체들도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단체들이 그들 자신도 매우 혐오하는 다른 단체들과 함께 연루되는 데 분노하게 될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수긍할 만한 일이다. …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열두 장로 중 한 명이 유아 성 도착자이지만 법의 맹점을 이용해 유죄 판결과 징역형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의 아이는 그 문제의 장로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명의 장로들과는 안전하게 함께 생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열둘 중 누가 그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부모인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열두 장로 중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한 명의 장로에게 죄가 있을 때, 나머지 열한 명의 장로들 역시 의심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ECNR이 지방 교회측에게 행한 일이다(엘리옷 밀러, 우리가 틀렸었다, 42-43쪽).


지방 교회측은 위와 같은 터무니없는 모함에 대해 1년 동안 인내하며 대화로 해결할 것을 상대방에게 촉구하는 서한을 총 6회나 발송했다. 그런데 해당 출판사는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2001년 12월 14일에 지방 교회측을 상대로 먼저 미국 오레건 주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식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대화할 의도가 없다는 명백한 표시이고, 달리 해결할 길도 없음으로 지방 교회측은 명예훼손 시효 만료 일인 그 해 12월 마지막 날에 부득이 소송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김 목사의 왜곡처럼 돈이 목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간교한 유대인들의 훼방과 부당한 정죄로 자신의 신약 사역이 막히려 했을 때 시저(Caesar)에게 호소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행25:11, 26:32). 우리는 만일 김 목사 본인이나 본인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이 짧은 시간 내에 여러 번 재판을 찍어내는 잘 팔리는 책에서 위와 같은 간교한 방식의 모함을 받고 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김 목사가 언급한 소송 결과에 대해, 우리는 형식상으로는 지방 교회측이 패소했지만, 내용상으로는 양측이 모두 ‘윈윈’했다고 평가한다. 텍사스 주 항소법원은 유사 사건에 대한 위스콘신 주 항소법원의 판례와 달리, ‘종교 문제를 법원이 다루지 않는다.’는 식으로 피고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피고측은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ECNR 소송에서 자신들이 내린 ‘이단’ 정의에 포함된 비방 내용들이 지방 교회측과 연관된다는 ‘어떤’ 근거도 없음을 법정 선서와 함께 인정했다.” 즉 비록 울며 겨자먹기 식이지만, 그 책의 서문(총론)에 열거 된 각종 비방들이 지방 교회측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 그들이 공식 시인한 것은 지방 교회측에겐 소득이다. 엘리옷 밀러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단 대책 위원회의 회원들이 <마인드 벤더즈>(Mind Benders) 책자 공개 회수와 <하나님-사람들>(God-Men) 판결 이후에 좌절되어 자신들의 방법들을 살피고 재점검하는 자기 반성을 했다면 텍사스 항소법원의 판결로 인해 안심하며 정당성을 인정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 번의 재판 중 두 번의 판결은 지방 교회들을 반대하는 정죄에 대해 지방 교회측의 결백이 입증되었다. 결백이 입증되지 않은 나머지 한 건은 사실상 지방 교회측에 대해 제시된 증언들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법을 의아스럽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피고인들은 ECNR 소송에서 자신들이 내린 ‘이단’ 정의에 포함된 비방 내용들이 지방 교회측과 연관된다는 ‘어떤’ 근거도 없음을 법정 선서와 함께 인정했던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어떤 단체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맥락에서라면, 자신들이 자유롭게 거짓 증언(즉 아홉 번째 계명을 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세상 법정에서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기준이 세상에 요구되는 기준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했으니 그것은 축하할 일이 못 된다(위의 책, 43쪽).


위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의 명령으로 공개된 그들의 내부 자료들은 백과사전 출판사와 저자들의 감추고 싶은 숨은 이면들을 많이 노출시켰다. 먼저 두 저자들은 1980년대 초반부터 1999년까지 최소한 8개의 각기 다른 원고들에서, “신학적으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은 이단이 아니다”(“Theologically speaking, Witness Lee and the Local Church do not constitute a cult”)라고 적었다. 심지어 그들은 백과사전 재판 수정본 초안에서, “지방 교회는 이 백과 사전에서 이단이 아닌 유일한 그룹이며, 서문에 있는 이단들의 특징들이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The Local Church is unique among the groups in this encyclopedia. It is not a cult in the negative sense of the term, nor do the characteristics of cults in the Introduction generally apply to them.”)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위와 같이 교묘한 방법으로 지방 교회측을 그 책에 포함시킨 것은 자신들의 양심에 반한 행동이었고, 해당 출판사 사장이 법정 선서 후 증언한 내용처럼 경쟁 출판사인 LSM에게 의도적으로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저자 중 한 명은 비서에게 자신의 초고 내용 중에서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고”(really hit these guys hard), “마귀처럼 보이도록”(demonization) 가장 “불리하고”(damning) “손상을 입힐”(damaging) 내용만 추려서 백과사전에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악의를 가지고 교묘하게 지방 교회측을 반사회적 이단으로 조작했던 그들의 숨은 의도가 재판 과정에서 폭로된 것이다. 어떻게 학위도 많이 가진 학자요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비양심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바로 다음 내용이 그 이유를 말해 준다.


백과사전의 두 저자들은 다섯 개의 석사 학위와 네 개의 박사 학위를 소유한 학자요 전문가인 것처럼 자신들의 학력을 선전해 왔지만, 정작 ‘학력이 인정된 기관’(accredited institution)으로부터는 오직 하나의 석사 학위만 받았음이 드러났다. 조사 과정에서 학위 논문도 없이 학위를 받은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고의로 재판을 지연시키려고 허리를 다쳐 증언대에 나갈 수 없다는 문서를 법원에 제출한 바로 그 시기에 한 저자는 라스 베가스에 가서 허리를 굽혀 무거운 것을 드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진리 변증가들은 최소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부득이 실패한 것이 있다면 솔직히 시인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CRI측은 참 그리스도인 다웠지만 <ECNR> 측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했다. 그 연장선에서 그들은 분위기 반전을 위한 또 다른 모사를 꾸몄는데 그것이 바로 ‘오픈 레터’ 사건이다.


즉 김 목사가 지난 글에서 장황하게 소개한 ‘오픈 레터’ 인용문들은 바로 이 <ECNR> 팀이 주축이 되어 위트니스 리의 1차 자료들 중에서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낸 것들이다. 그들과 같은 진영에 속한 노먼 가이슬러 등 70명의 서명자들은 이러한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에 말려든 일종의 희생양들인 셈이다. 진리 변증을 하는 사람도 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책략과 거짓을 동원한 무리한 이단 정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2. ECPA 등은 로비만 하면 가입될 수 있는 곳이라는 식의 김홍기 목사의 궤변


김 목사는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는 적극적인 로비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서적상 협회(CBA) 및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신용조합(ECCU)에 가입했고, 2002년에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출판사 협회(ECPA)에 가입하는 일에도 성공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의 말투는 미국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에게 마치 자격이 없더라도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라고 해도 “적극적인 로비 활동”만 잘 하면 해당 단체 가입이 가능한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김 목사의 무책임한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위 단체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김 목사는 이 점을 회개하기 바란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만을 출판하는 LSM이 위 단체들, 특히 ECPA(미국 복음주의출판사 협의회) ‘투표권 있는 정회원’(voting member)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협회가 요구한 까다로운 자격 조건(http://www.ecpa.org/?page=member_bylaws)에 부합했기 때문이지, “적극적인 로비 활동” 때문이 아니다. ECPA 회원들 중에는 미국 성서공회, 존더반, 핸드릭슨, 인터바시티, 틴데일 하우스, 심지어 과거에 지방 교회측과 재판했던 토마스 넬슨 사와 하비스트 하우스도 포함되어 있다. 로비로 가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김 목사는 또한 교파주의를 부정하는 것과 LSM이 위 단체들의 회원인 것은 모순이라는 식의 공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교회들’과 ‘출판사’(LSM)의 차이를 간과한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이에 대해 엘리옷 밀러는 “(출판 관련) 그리스도인 연합체들에 가입한 것은 출판 기관인 LSM이지 ‘지방 교회들’이 아니다. 곧 공개 서한이 주요 비판 항목의 하나로 제시한 것과 달리, ‘지방 교회들’은 어떤 ‘복음주의 협회’의 소속원도 아니다(우리가 틀렸었다, 37쪽)”라고 둘을 잘 구분하고 있다. 즉 ‘교파주의’ 등 성경적인 교회 원칙에 위배된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출판기관(LSM)이 다른 출판기관들과 업무상 협력을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3. CRI와의 교제도 “적극적인 로비”의 결과라는 김홍기 목사의 궤변


김 목사의 지적처럼 CRI는 “미국에서 최초로 (지방 교회측을) 비판한 단체이고, CRI의 비판은 지방 교회를 향한 광범위한 비판 여론에 불을 당기게” 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양태론’ 등 지방 교회측을 향한 공격 내용들의 상당 부분은 CRI의 문서들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6년간의 철저한 재조사 후, “우리가 틀렸었다.”라고 하고, 지방 교회측을 “정통이고 주님의 몸 안의 참된 지체들”이라고 고백하게 하신 분은 몸의 머리이신 주님 자신이지 김 목사의 궤변처럼 “적극적인 로비”의 결과가 아니다. 이런 김 목사의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폄하 발언이야 말로 지방 교회측과 CRI에 대한 자신의 “증오심과 편견을 여과없이 드러낸” 것이다.


김 목사는 가이슬러의 말을 빌려, CRI가 지방 교회를 가리켜 “견고하게 정통이고, 여러 모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한 무리(지방 교회측)를 과도하게 방어하는 일에 그들의 훌륭한 재능들을 사용하도록 어떻게 설득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수수께끼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 다른 일도 아닌 진리변증 분야에서 앞장서서 비판하던 상대방을 이제는 정통이라고 재평가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게 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CRI측에게 있었는가? 가이슬러의 이 질문에 대하여 행크 해네그래프(CRI 대표)는 “우리가 틀렸었다” 특집판 서문에서 이미 그 답변을 해 놓고 있다.


(지방 교회측을 지지한) 그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우리의 성실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동기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중상 모략이 잇따랐다. 그 결과 재정 지원이 위태롭게 되었다. … 분명 CRI는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이러한 소란 가운데서 나는 직원들에게, 우리의 사역은 인기 경쟁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할일을 한다. 왜냐하면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우리가 틀렸었다, 4-5쪽).


위 말은 CRI 측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진리 편에 서기로 결심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 뿐만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행크와 엘리옷 밀러 등이 십 수년을 감옥에 갇혔던 중국의 지방 교회측 성도들을 만나 본 후, 그들의 존재와 삶 속에서 받은 깊은 인상이다. 행크는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한다.


어떤 대가가 든다 할지라도, 중국과 전 세계에서 박해당한 교회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실재는 나의 뇌리 속에 순식간에 영원히 새겨졌다. 허가 받지 않은 집회에서 허가 받지 않은 자료들을 읽었다는 이유로 투옥된 체험을 말하던 중국 여인의 얼굴에는 빛나는 미소가 넘쳤다. 자기 연민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직 신약 기독교의 참된 실재를 체험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광채만 있었다. 교제를 마친 그녀는, 어떤 대가가 들더라도 진리를 위해 서 있는 나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그 때처럼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직면한 것은 그 여인이나 그 여인과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위의 책, 5쪽).


그럼에도 김 목사는 편견을 버리고 긴 시간을 들여 철저히 연구한 자료들 그리고 현장 답사를 통해 보고 들은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가이슬러를 등에 업고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이슬러의 오랜 동료였고 지금도 최대한 진리만으로 이단변증을 하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따라서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는 지금이라도 CRI의 다음과 같은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옳다. 그것은 첫째, 위트니스 리에 대한 왜곡 정보가 아니라 전후 문맥이 고려된 지방 교회측의 설명 전체를 마음을 열고 들으라는 것이다. 둘째, 자신들이 아는 진리들 속에 오해 또는 일부 몰랐던 부분이 있음을 어렵겠지만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엘리옷 밀러는 특히 삼위의 ‘구별’과 ‘분리’ 개념, ‘상호내재’ 개념, 위격 간의 ‘경륜적인 동일시’ 등에 대해 진지하게 조언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현재 김홍기 목사가 가진 오류들이기도 하다.

 


4. 풀러 신학교와의 교제도 “적극적인 로비”의 결과라는 김홍기 목사의 궤변


김 목사는 “지방 교회는 명망 있는 신학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미국의 풀러 신학대학원을 택해서 활발한 로비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지방 교회는 풀러 신학대학원으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정통 인정을 받아냈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경솔한 용어 사용 역시 풀러 신학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김 목사 본인은 다른 이들이 “활발히 로비 활동”을 하면 이단도 정통이라고 자신의 명예를 걸고 공개된 문서로 선언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이런 명예를 훼손하는 말을 문서로 한 것에 대해, 풀러 신학교 측 그리고 한국에 있는 500여명의 풀러 신학교 동문 목회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기 바란다.


풀러 신학교는 자체적으로 약 2년간의 심도 있는 지방 교회 연구 후에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공식 발표했다.


풀러 신학 대학이 내린 결론은, … 하나님, 삼일성(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 성경, 구원, 교회의 하나와 합일, 그리스도의 몸 등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과 간증에 관해서 우리는 그들이 논의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정통(正統)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더구나 우리는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로 대표된 가르침들을 고수하는 사역의 인도자들이나 지방 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들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 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기를 기탄없이 권하는 바입니다(성명서 전문은 여기를 참조: https://www.localchurch.kr/1792)


이러한 성명서가 나온 것은 1) 양 측이 총 다섯 차례의 만남을 통하여 심도 있는 질문과 응답의 기회를 가졌고 그로 인하여 전반적인 신뢰 관계가 형성된 점, 2) 특히 신화(神化)에 대한 저서(One with God: Salvation As Deification and Justification)를 가진 조직신학자 벨리마티 커케년 교수가 지방 교회측의 신학 잡지인 <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이 다뤘던 ‘신화’ 특집 논문들을 이미 읽고 깊이 공감하고 있었던 점, 3) 풀러 신학교 측이 궁금해 하던 각 진리 항목들에 대해 지방 교회측이 상세히 해명한 변증서인 <복음의 확증>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eBooks/Concerning%20Our%20Teachings.pdf)을 깊이 검토한 후에 내려진 결론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풀러 신학대학원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노먼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성경의 무오성’ 관련 주장을 길게 인용하며 자신의 흠집내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에게 좀 더 정직해질 것을 요청한다. 즉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잣대로 풀러 신학교를 평가하려면, 동일한 잣대로 한국의 소위 정통 교단이라는 곳들도 평가해야 옳다. 구체적으로 장로교 통합교단은 직영 신학교 행사에 풀러 신학교 총장을 초청할 만큼 풀러 신학교와 유대가 깊다. 그렇다면 통합 교단은 정통인가 아닌가? 또한 풀러 신학교 졸업 후에 한국 교계에서 활약하는 약 500여명의 풀러 동문 목회자들은 정통인가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김효성 박사가 열거한 각 교단들의 정통성 여부를 여러 번 물었지만, 김 목사는 한국 교계의 눈치를 살펴서인지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다. 바로 이런 점이 그가 진리만 기준삼는 CRI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한편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한국교회를 깨운 복음주의 운동>(두란노, 1998)이란 책에서 미국 복음주의를 설명하면서, ‘빌리 그레함 전도집회’(일반 대중에게 확산),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전국적인 보급), ‘풀러 신학교’(지도자 양성), 미국복음주의신학회(ETS)(신학계의 저변으로 확대)라는 네 개의 키워드를 소개했다(51쪽). 그럼에도 김 목사는 풀러 신학교를 비판하고, 위 ETS도 불만을 품고 탈퇴(2003년)한 노먼 가이슬러를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변증가라고 한껏 추켜세우고 있다.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케네스 캔저는 <성경의 무오설>(제임스 보이스, 생명의 말씀사, 1997) 제 6장 ‘복음주의자들과 무오성 교리’라는 소제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가이슬러와 김 목사의 분리주의 경향과는 많이 다르다.


앞으로 다가올 수년 동안 다루어져야 할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인 성경의 무오성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 사이의 교제를 시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자들만 그러나 모든 신자들”을 표어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복음주의자들이 세운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경계도 그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따라서 그는 교회의 주님이시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제의 한계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해져야 한다(222-223쪽).


굳이 그런 용어를 쓴다면, 형제회 배경을 가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포함한 지방 교회측은 ‘성경의 무오성’을 비롯한 근본주의 5대 강령을 굳게 믿는다는 점에서는 근본주의이다. 그러나 풀러 신학교측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의 모든 참된 지체들과의 교제에는 제한없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는 복음주의이다. 한편 하나님의 경륜(딤전1:4)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에 방해되는 교파주의, 평신도 성직자 제도 등의 가르침들과 실행들로부터는 철저하게 분별된 위치에 선다는 점에서는 성경 제일주의이자 보수주의이다.


우리는 김 목사에게 지금처럼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모호한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즉 본인이 쓰는 용어 정의 차원에서 무엇이 복음주의이고, 무엇이 정통 교회이며, 무엇이 정통 신학인지, 그리고 자신의 교제 범위와 원칙은 무엇인지 확실히 밝혀주기 바란다. 만일 지금처럼 계속 침묵한다면 김 목사는 무원칙, 무자격 진리 감별사임을 스스로 시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5. 가장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의 전형인 소위 ‘오픈 레터’ 인용문들


‘백과사전 팀’은 앞의 재판에서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자 지방 교회측에 대한 새로운 공격으로 ‘오픈 레터’를 계획했고, 여기에 평소의 인맥을 총동원 했다. 그럼에도 ‘오픈 레터’에는 다음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위트니스 리 등 지방 교회측이 말하고자 하는 실체적 진실보다는, 누가 봐도 문제가 있을 법한 부분을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내어 1차 자료를 왜곡시킨 것이다. 그 점을 엘리옷 밀러는 이렇게 말한다.


액면 그대로 보면 이러한 말들(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낸 말들-필자 주)이 21세기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혼란을 줄 만하다. 그것들은 분명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방 교회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거의 없는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이 글만 읽고 난 후, “어디에 서명할까요?”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우리가 틀렸었다, 15쪽).


즉 백과사전 팀이 들고 온 지방 교회측 자료들은 ‘오픈 레터’ 서명자들이 보기에  당장이라도 서명을 하고 싶을 충동이 일어날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같은 내용임에도 전후 문맥을 감안하고 또 다른 곳에서 위트니스 리가 한 말을 알고 있는 CRI 측이 볼 때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엘리옷 밀러의 말을 들어보자.


CRI가 역사적 정통 교리를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는 것을 잘 아는 복음주의자들에게도 동일한 혼란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앞뒤 문맥을 볼 때 나는 “위 진술문은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없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양태론을 정통 교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에나 지금이나 오순절 연합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은 양태론을 CRI는 이단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의 위 진술문이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때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단 변증 분야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가르침들의 문맥을 이해하거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지방 교회의 가르침 전모를 주의 깊게 연구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위의 책, 15-16쪽).


둘째는 위 CRI와 달리, 오픈 레터 서명자들 거의 대부분은 백과사전 팀이 만든 왜곡된 발췌문 외에 지방 교회측 다른 자료들을 전혀 읽지 않고 서명했다. 이 점은 김 목사가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탈봇 신학교 알렌 고옴즈(Alan W. Gomes) 교수가 백과사전 저자들 중 한 명인 John Ankerberg에게 보낸 답신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지방 교회측 1차 자료를 한번도 연구해 본 적이 없고”, “원 출처들을 보지도 않았음으로 당신들이 발췌한 내용이 원문에 따른 것인지 확인할 수 없으며” 오직 당신들이 보내 준 인용문만으로 (지방 교회측을) 비평한다”라고 적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사정은 나머지 서명자들 대부분도 동일하다). 참고로 고움즈 교수의 해당 서한의 영어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I have never undertaken an independent study of Local Church literature … the critique that follows must be understood as based strictly on the samples you chose to send me. I do not have access to these original sources so I was not in a position to verify the accuracy of your abstraction /transcription with respect to the original source.”


이와 관련하여, 행크 해네그래프는 ‘분별’(D-I-S-C-E-R-N)이라는 제목의 CRI 저널’ 2010년호(Vol.33, No.03)에서, 70명의 서명자들 명단 중 (샘플로) 두 사람에게 전화로 확인했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서명자들은 ‘오픈 레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오픈 레터에 첨부하라고 빌려준 적도 없다고 했다(12쪽). 이어서 행크는 그 해당 글 각주 17번에서 “서명자 명단이 상당 부분 부풀려졌다(inflated)고 의심할만한 이유가 있다.”라고 적고 있다(15쪽).


실제로 Jerry Johnson은 입장을 바꿔 지방 교회측 지지자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오픈 레터 명단에 올려져 있고, William Dembski는 서명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빼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고, 일부는 그런 삭제 요청조차 거절되었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서명자들은 여전히 지방 교회측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명시 보았던 사실이 왜곡되거나 부풀려진 ‘나쁜 인용문들’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방 교회측은 문제가 많은 단체처럼 생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지방 교회측의 반론을 알고도 그들이 서명을 철회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지만, 설사 진리에 문제가 없음을 알았어도 CRI 나 위 Jerry Johnson처럼 직전 동료들로부터의 온갖 비난과 따돌림을 감수하면서도 진리 편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6. ‘오픈 레터’ 사건 그 이후에 생긴 일들


지방 교회측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냄으로써 오류가 되어 버린 오픈 레터의  위트니스 리 관련 자료에 대하여, 자체적으로 해명 혹은 반박하는 문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CRI 역시 ‘오픈 레터’에 대한 반론을 준비 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오픈 레터 서명자들 중엔 CRI 전직 참모 혹은 CRI 저널 전현직 기고자들이 포함되었고, 김 목사가 추켜 세우는 노먼 가이슬러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CRI는 지방 교회측과 오픈 레터 진영 모두를 잘 아는 제 3자로서 이 문제를 중립적으로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노먼 가이슬러와 김 목사는 마음을 열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김 목사는 흑백 논리에 갇혀서 CRI를 마치 배신자 취급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아무튼 ‘오픈 레터’에 의해 촉발된 갈등과 쟁점들은 세 차례에 걸쳐 중첩적으로 반박되었다. 1) 먼저 CRI에 의해 “우리가 틀렸었다”(Were Were Wrong)라는 특집 논문으로 1차 반박 혹은 해명되었고, 2) 지방 교회측이 1, 2차 답변(Responses to an Open Letter from “Christian Scholars and Ministry Leaders”(1) (2))을 인터넷에 게시했으며, (그후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CRI 글에 대한 반박이 있었고) 3) 이 가이슬러 등의 반박문에 대해 지방 교회측은 총 네 권(Brothers, Hear Our Defense(1)-(4))의 소책자로 심도있게 반박했다. 이 소책자들은 2011년에 발간되어 오픈 레터 서명자 전원과 미 전역의 신학교 도서관 등에 무료로 배송되었다. 따라서 순서로 보자면, 노먼 가이슬러측이 반응해야 할 차례임에도 약 5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김 목사는 “CRI측은 이들의 비판에 대해 아직도 답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라고 사실을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제는 지방 교회 측이 네 권의 소책자로 가이슬러에게 반박하고 또 질문한 내용들에 대해 가이슬러 측이 반응할  차례이다!


(가이슬러가 침묵하는 동안, 미국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지방 교회측을 이해하는 분위기는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한 예로 ‘미국 복음주의신학자 협의회’(ETS)는 2015년 11월 아틀란타에서 개최되었던 연례 컨퍼런스에 지방 교회측을 초정했다. 지방 교회측은 거기서 전직 회장인 폴 코펜과 함께 ‘신화’와 관련된, ’“생명과 본성에서 그러나 신격에서는 아닌”: Theosis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기여’(“In Life and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Witness Lee’s Contibution to a Biblical Understanding of Theosis)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웨인 그루뎀 등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들 대부분이 이 컨퍼런스에 참여했지만, 그 자리에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변증가라는 노먼 가이슬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ETS에 불만을 품고 오래 전에 탈퇴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 목사가 길게 소개한 소위 ‘공개 항의서’ 각 항목들(1.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2.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3. 복음주의적인 교회들과 교파들의 정당성에 관하여, 4.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과의 소송에 관하여)은 다음과 같은 자료들로 이미 충분히 반박된 것들이다.


1) 우리가 틀렸었다: CRI 저널 편집장을 30년 이상 역임하고 있는 엘리옷 밀러가 쓴 약 50쪽 분량의 명 논문인 “We Were Wrong” 한글 번역 전문: http://www.equip.org/PDF/KoreanOpt.pdf.


2) 복음의 수호: 지방 교회측 DCP 팀이 ‘생략된 전후 문맥’을 복원해 가면서 직접 반론한 <복음의 수호> 전문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eBooks/Open%20Letter%20Response%20(2).pdf).


3) 형제들이여, 우리의 변증을 들어보시오: 지방 교회측이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주장에 대해 심도있게 반론을 펼친 총 네권으로 된 소책자인 <Brothers, Hear Our Defense>(1)-(4) 영문판 자료 전문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responses/Geisler-Rhodes/index.html), 이 자료의 한국어 번역문(일부)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index.html).


우리는 김 목사에게 이미 영어권에서 이처럼 충분히 다뤄진 내용들을 다시 반복하기 보다는  그 토대 위에서 더 전진된 토론을 할 것을 여러번 제안했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기왕의 가이슬러의 말을 반복적으로 가져오는 진부한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관심도 없던 지방 교회측에 대해 짧은 준비 후 글을 써야 하는 김 목사의 입장이 이해는 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하다면, 지금처럼 성급하게 상대방을 정죄하고 여과없이 분노의 말을 쏟아내기 보다는 좀 더 유연한 자세로 토론을 이어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7. 김홍기 목사의 고질적인 문제점 (1) -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무지


김 목사는 역사적으로 논의되어 온 <존재론적인 삼위일체>(the Essential Trinity)와 <경륜적인 삼위일체>(the Economical Trinity)의 방면에 무지하다보니 다음과 같은 엉뚱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지방 교회의 견해에 의하면, 제2위격이신 아들과 제3위격이신 성령은 동일한 분, 즉 동일한 위격이시다. 따라서 지방 교회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면, 아들과 성령의 위격의 구별은 사라진다. 이것은 삼위의 구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성경에 반하는 이단 사상이며, 성경에 기초한 정통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확실한 이단 교리이다. 지방 교회가 “주[아들]는 영[성령]이시다”(고후 3:17)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아들과 성령은 본질상 동일한 분이라고 말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위의 구절을 해석하며 아들과 성령의 위격을 구별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아들과 성령은 동일한 분(person)이라고 주장하면, 또한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지방 교회는 아들과 성령의 위격을 구별하지 않는, 일위일체론, 즉 양태론 이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김 목사의 문제 제기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이것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과 무관하며,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임을 설명했다. 아울러 지방 교회측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는 위격 간의 분명한 구별을 유지한다는 점을 누차 설명했다. 이 점은 김 목사 본인도 지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동의한 바 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위격들이 혼동되어져서는 안 되고 본질이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시다.(Witness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Chapter 1, Section 5) [진술 #1]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진술을 접할 때 누가 리와 지방 교회가 정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엘리옷 밀러는 이러한 진술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지방 교회를 정통이라고 옹호한다.


김 목사가 자신의 입으로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진술―“위격이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등(필자 주)―을 접할 때 누가 리와 지방 교회가 정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실토해 놓고도 자꾸 다른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측컨대 김 목사에게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위격간의 기능적인 동일시’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고 잘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는 1) 이사야 9장 6절과 고린도 후서 3장 17절처럼 성경 본문 자체가 말하는 바이고, 2) 박형용 박사,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개핀 박사 등 정통 신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했다.


엘리옷 밀러는 “우리가 틀렸었다” 16쪽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빌 클린턴 정치 참모였던 제임스 카빌의 말을 빌려, “지방 교회측 문서에서 빈번히 거론된 본질적인 삼위일체(또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재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구별을 놓친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 김 목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우리는 김 목사에게 이승구 교수가 백충현 박사의 저서인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새물결 풀러스, 2015)의 추천사에서 잘 요약 설명한,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는 말의 의미를 잘 새겨볼 것을 권면한다. 아울러 엘리옷 밀러가 말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촌철살인적인 표현의 앞뒤 문맥을 다시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우리는 인내하며 위트니스 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삼위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두 곳을  더 소개할 것이다. 이후에는 더 이상 지금처럼 “지방 교회는 아들과 성령의 위격의 다름을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일위일체를 주장한다.”라는 근거없는 거짓말을 중단해 줄 것을 김 목사에게 정중히 요청한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볼 때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된 세 의식과 의지의 중심들 또는 사랑의 주체―개체 관계로 영원히 연관된 ‘(복수의) 나들(I’s)’로 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지만, 그분들 사이에는 여전히 ‘나’와 ‘아버지’의 구별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점을 무시한다면 양태론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라고 썼다(우리가 틀렸었다, 17쪽).


우리는 아버지께서 육체가 되셔서 이 땅에 사셨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1:7) …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위트니스 리, 장로훈련 제 3권, 한국복음서원, 1994, 112쪽).

 


8. 김홍기 목사의 고질적인 문제점 (2) - 성경적인 상호내재에 관한 무지


김홍기 목사는 자신도 상호내재를 믿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도 ‘삼위의 상호내주’를 믿는다. 그러나 지방 교회의 ‘공간적 상호내주’가 아닌 ‘본질적 상호내주’를 믿는다. 우리는 또한 지방교회와 달리 삼위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상호내주’ 하시나, 위격으로는 분명히 ‘구별’되어 계심을 믿는다. 달리 말하면, ‘삼위의 본질적 상호내주’는 위격의 혼동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지방 교회의 ‘공간적 상호 내주론’은 위격의 ‘혼동’을 가져온다. 지방 교회는 이것을 ‘경륜적 동일시’라고 말하며 정당화시키려 하지만, 삼위의 하나님은 경륜적으로 나타내실 때에도 위격에 있어서 분명히 ‘구별’되신다!”


김 목사의 위 주장은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이 글 서두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상호내주’론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요14:10)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간과한 것이다. ‘상호’(mutual)라는 말은 ‘내가’ 혹은 ‘아버지께서’처럼 구별된 위격에나 쓸 수 있는 말이지, 신성한 본질을 지칭하여 ‘상호’가 ‘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구별된 ‘두 본질들’이 ‘상호’ 내재한다."라는 말이 되고 만다.


이미 여러번 소개했고 위 요한복음 14장 10절 본문도 밝히 보여주는 것처럼, 정통적인 삼위의 상호내재론은 구별되는 위격들(나, 아버지께서) 간의 상호내재이다. 물론 이러한 상호내재는 결코 삼위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잃지 않는다. 김 목사는 여기서의 ‘구별’을 자신의 잠재적 삼신론 사상에 따라 사실상 ‘분리’ 개념으로 생각함으로써 혼란이 오는 것이다.


이 점은 김명용 교수가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에 게재한 논문과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삼위일체의 세 위격간에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 간의 관계에 까지 적용한 James D. Gifford Jr.의 박사 학위 논문 <Perichoretic Salvation>(Eugene, OR: Wipe&STOCK, 2011)을 볼 때 자명하다. 이런 이유로 삼위의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 완전한 하나님(fully God)이 되실 수 있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정통 신학자들은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 모두의 오심이다.”, “주기도문의 성부는 배타적으로 제1격만이 아닌 삼일 하나님이시다."(Our Father is Triune God)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다. 또한 “오직 한 분의 하나님 곧 아버지께서 계시니”(고전8:6)라는 말씀도 모순이 없게 된다.


그러나 잠재적 삼신론자인 김홍기 목사는 결코 위와 같이 고백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지방 교회측에게 하는 것처럼 어거스틴이나 A. H. 스트롱, 로레인 뵈트너 등을 향해 "그것은 틀렸다." 혹은 "그것은 이단이다."라고 말할 용기도 없다. 이것이 김홍기 목사식 어설픈 진리 감별의 어정쩡한 현주소이다.


둘째는 김홍기 목사가 ‘상호내주’에 엉뚱하게 ‘기능적 동일시’를 끌어다 붙인 것이다. 상호내주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방면의 특징이고, 기능적 동일시는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의 특징인 것에 무지하다보니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긴 것이다. 사실 둘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김 목사는 또한 “삼위의 하나님은 경륜적으로 나타내실 때에도 위격에 있어서 분명히 ‘구별’되신다.”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들에 답변해 보기 바란다. 1)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분(출3:6), 유월절 밤에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시겠다고 하면서 “나는 여호와로라’(I am the Lord)(출12:12)라고 하신 ‘나는’(I)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중 누구이신가? 2)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일곱영(계5:6)이란 말씀에서, 2격과 3격은 각각 무엇인가? 2격의 일부(눈)가 3격이 될 수 있는가? 3)  “여러분이 듣는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입니다”(요14:24)에서, 성부의 말과 성자의 말은 각각 어디까지인가? 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고후13:14)에서 어디까지가 ‘은혜’이고, 어디까지가 ‘사랑’ 그리고 ‘교통’인지 설명이 가능한가?

 


9. 김홍기 목사의 고질적인 문제점 (3) - 한 신격(데오테스)에 대한 무지


김홍기 목사는 <세 위격들 중 한 위격><세 위격 전체를 포함한 개념인 한 인격>(엄밀히 말하면, 한 신격(神格, 데오테스)의 차이에 무지하다. 혹은 좋게 말하면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단일한 신격삼위가 계시는데) 등을  제시하며 위 두 개념은 전혀 다른 것임을 여러번 설명했다. 그리고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다.’(마28:19)라고 말할 때는 ‘일위’가 아닌 ‘구별된 삼위 모두가 포함된’ 의미의 ‘신격’ 개념으로 그렇게 말한 것임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신격’(데오테스) 개념 자체에 무지함으로 아래와 같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나 그래엄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하나님을 한 인격(a person)이라고 지칭한 것은 ‘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 정, 의를 소유하신 ‘인격적인 분’(a personal being)으로 묘사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나 빌리 그래엄 같은 정통 설교자들을 마치 ‘일위’를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인 것처럼 둔갑시킨 지방 교회의 행위는 확실한 ‘교리 사기’이고, ‘학문적인 범죄’인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모함이다. 로이드 존스나 빌리 그래엄이 “하나님을 지, 정, 의를 소유하신 ‘인격적인 분’으로 말할 때” 그 하나님은 삼위 중 어느 한 위격(1/3)만을 가리키는 용어였는가? 아니면 삼위 전체가 그렇다는 말인가? 만일 전자라면 그들은 양태론자가 아니라 삼신론자가 되어야 옳다. 만일 후자라면 진리상 전적으로 옳은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방 교회측은 후자의 의미로 그들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


엘리옷 밀러는 “성경(그리고 성경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삼위일체의 한 위격만이 아닌 삼일 하나님을 가리키면서 “그분”이라는 단수 인칭 대명사를 쓴다. … 우리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야훼를 적절하게 ‘그분’이라고 칭한다.(우리가 틀렸었다, 21쪽)”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홍기 목사는 “한 위격만이 아닌 삼일 하나님을 가리키면서 “그분”이라는 단수 인칭 대명사를” 쓸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삼위는 세 개별체 즉 복수이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일위일체’ 즉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홍기 목사는 세 위격 전체를 아우르는 ‘신격’(골2:9) 개념에 무지함으로써 ‘하나님은 한 분(혹은 하나)이시다’(God is one)(약2:19, 신6:4, 롬3:30, 고전8:6)라는 말씀을 삼위의 ‘동일 본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크게 오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무로 된 책상’을 ‘책상’이 아닌 ‘나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그의 삼위일체론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치우쳤으며 깊이 병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창일 뿐이다. 김홍기 목사가 삼위일체론에 대해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깊은 속에 잠재된 이단성은 더욱 또렷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한국교계를 위하여 그의 이런 비성경적인 방면들을 거듭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측이 CRI, ‘미국복음주의 출판사 협의회’(ECPA), 풀러 신학교 등과 좋은 관계를 갖게 된 것을 ‘적극적인 로비 활동’에 의한 것이라 폄하했지만, 그것은 사실을 왜곡한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또한 지방 교회측을 ‘일위일체’를 가르치는 ‘양태론’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런 판단은 자신의 ‘경륜적인 삼위일체’, ‘성경적인 상호내재 개념’, ‘신격’(데오테스)에 대한 신학적인 무지에 의한 터무니없는 모함인 것도 밝혀졌다. 우리는 김 목사에게 지금처럼 노먼 가이슬러 편에 서서 ‘가짜 정통’ ‘죽은 정통’을 옹호하는 일을 그치고, “생각이 트인” 베뢰아 사람들(행17:11)처럼 “이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자신의 기존 관념을 말씀의 빛에 비춰보는 시간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엘리옷 밀러가 “우리가 틀렸었다”에서 지방 교회측을 오해하는 미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에게 한 진솔한 권면에도 귀를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한다. 끝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김홍기 목사에게 빛 비추사 ‘그릇된 정통’의 옹호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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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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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20.02.22. 01:54
위 긴 내용 중에서 김홍기 목사가 주장했다는 삼위의 본질이 '상호'내재 하는 것이라는 말은 심각한 문제가 있네요.

'상호'라는 말은 구별된 둘을 전제한 개념인데, 삼위의 본질이 둘 혹은 셋으로 구별된다는 전제는 교회 역사상 이단 사설로 정죄된 주장입니다. 바로 종속론 혹은 유사본질 논쟁이 그 한 예입니다.

김목사가 말한 '본질'에 대해서는 '삼위가 본질이 동일하시다' 혹은 삼위는 '동일 본질을 '공유'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통이고 성경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본질이 상호 내재 한다'는 말은 이단적인 표현입니다.
박사 학위까지 가진 분이 이런 주장을 했다는 자체가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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