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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수호―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첨부 1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인용문 1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시므로 그 아들은 틀림없이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분께서 아버지라고 불리시기는 하지만 실지로는 아버지가 아니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께서 아버지라 불리시면서 아버지가 아니실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위치에 계신(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나오실 때 그분은 아들이시다. 따라서 한 아들이 주어지셨지만 그분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우리에게 주어지신 바로 이 아들이 바로 아버지 자신이시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도 제1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영, 820-821쪽) 


인용문 2

 

…신격 전체,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235쪽)


인용문 3

 

삼일성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매우 부적합하며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와 연결되실 때,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뒤에 남겨지시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신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또 다른 위격이신 아들을 보내어 구속을 성취하시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격이신 영을 보내신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사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시는 반면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온다. 믿는 이들은 기도할 때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는다. 신격을 이렇게 분리된 위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 (생명 메시지, 제3권 220-221쪽)


인용문 4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영이시다.…그리고 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요 또한 아버지이시다. 할렐루야!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하여, 영문판 18-19쪽)


인용문 5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하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또한 주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아들, 영,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이시다. (삼일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성경적 계시 http://contendingforthefaith.org/responses/booklets/triune.html)


인용문 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위격이나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위격이시다.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 문제―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신격 안에 영원히 구별되심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제목 아래 처음 여섯 개의 인용문을 모아 놓은 것은 각 인용문이 말하는 신격에서의 한 위격과 또 다른 위격의 동일시, 곧 아들과 아버지를 동일시 하거나 아들과 영을 동일시하는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의 인용문을 따로 떼어 자세히 살펴보게 한 것은,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하나이신 방면만 가르치고 셋이신 방면은 가르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 교회는 우리의 하나님이 영원히 하나이시며 동시에 셋이시라는 점을 오랫동안 확증해왔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역대로 간혹 어떤 사람들이 가르친 것처럼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일 뿐’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간 안에 나타나신 단계들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양태론(modalism)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나타나신 연속적인 단계들을 의미하거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일 뿐 신격 안에서 그 셋이 영원히 구별되는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서명인들은 위트니스 리에게 이러한 양태론의 혐의를 씌우려 했던 것 같다. 양태론은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일부  믿는 이들과 기독 교사들 사이에 있는 아주 오래된 이단이다. 양태론 개념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우리는 양태론에 대해 역량 있는 학자가 제시하는 간략한 정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정의된 양태론


켈리(J. N. D Kelly)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초기 교회의 교리에 대한 자신의 저서[10]에서 양태론(전문 용어로는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이다)의 단순한 형태와 정교한 형태 모두에 대한 최고의 해설을 제공한다. 단순한 형태의 양태론은 2세기 말에 서머나의 노에투스(Noetus of Smyrna)와 “프락세아스”(Praxeas)가 신봉한 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즉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하며 아버지와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고통당하시면, 아버지도 고통당하신다. 신격에는 어떤 구별도 있을 수 없다.”(켈리 120).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양태론의 본질은 하나님은 오직 아버지로만 존재하시고 아들은 “아버지 자신의 투영으로서 말로나 명목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다(켈리 120). 같은 설명이 영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양태론에 의하면 신격 안에는 구별된 세 위격이 아닌 유일한 아버지만 계시며 그분이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영으로 불리신다.


보다 조직적이고 철학적인 형태의 양태론은 사벨리우스(Sabellius)(그의 이름에서 사벨리아니즘이 비롯되었다)가 주장했다. “그는 신격을 세 운행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단일체로 간주했고…아버지는 형태 혹은 본질이며, 아들과 영은 아버지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양태들(modes)로 간주했다.”(켈리 122)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진정한 실재들이지만 영원히 그러하지는 않고, 아버지가 시간 안에서 일하시는 과정에서 “먼저는 아들로, 그 후에는 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켈리 122). “따라서 창조자이시자 율법 수여자로 여겨지신 한 신격은 아버지였고, 구속을 위해 한 줄기 광명이 투영되듯 비치다가 사라지셨으며, 그러다가 세 번째로는 바로 그 신격이 영으로서 은혜를 불어넣고 주시기 위해 운행하셨다.”(켈리 122, 에피파니어스 (Epiphanius) 주해, 해어 Haer 62.1) 이렇게 보다 복잡한 형태의 양태론의 본질은 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일시적 혹은 연속적인 세 양태인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서 나타내시어 그분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시며, 세 양태가 서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단순한 형태의 양태론처럼 이러한 형태의 양태론에서는 신격 안에 구별되는 세 위격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한 위격이 시간 안에서 두 번째가 되고, 이후에는 세 번째가 된다. 두 형태 모두에서 양태론은 삼일성의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이단적인 극단에 이르렀고, 삼일성의 진정한 셋인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영원히 함께 존재하심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했다.


위트니스 리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임이니라”(사9:6),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나니”(고전 15:45하), “주님은 그 영이시니”(고후 3:17)라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가르친 것 때문에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고 양태론을 믿는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위에서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여섯 개의 인용문을 한 데 모아 놓은 것도 같은 비난을 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참으로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에서 셋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고 양태론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이다.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을 반대하고 신격에서의 영원한 구별을 지지함


위트니스 리가 구두로 전한 메시지와 출판물에서 거듭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는 양태론을 전하지 않았다.[11] 그는 자신의 청중들에게 양태론의 오류에 관해 많은 주의를 주었는데 그 중에 두 번은 다음과 같다.

 

양태론(Modalism)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영원하지 않고 모두 동시에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세 표현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삼신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이 학파들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여러분은 양태론자인가? 제발 여러분이 양태론과 관계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극단적인 관점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세 하나님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도 큰 이단이다. 아마 과거에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120-121쪽)

 

양태론은 또다른 이단으로서, 극단적인 위치를 취한 결과이다. 양태론을 주장한 사람은 사벨리우스(Sabellius)였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영원히 동시에 존재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양태론적 사상에서 셋은 다만 신성한 존재의 연속적인 나타남이거나 그분의 활동의 일시적인 세 양식(mode)이다.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 이사야 9장 6절과,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14장 9절이 양태론 입장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삼신론이 세 위격의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세 하나님으로 종결된 것처럼 양태론은 신격의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아들이 오셨을 때 아버지는 끝났고 영이 오셨을 때 아들이 끝났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생명 메시지(4), 127-128쪽)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의 구별이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가르침에서 존중되어야 할 영원한 실재임을 분명하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 영원한 구별이 없다는 모든 사상을  거절했다. 다음의 발췌문이 그 증거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에 구별은 있지만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시고,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시며, 그 영은 아들이나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께서 분리되셨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분들께서 상호 내재, 즉 서로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삼일성의 셋은 동시에 존재하시면서 구별되시지만 그분들의 상호 내재는 그분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분들은 그분들의 상호 내재 안에서 공존하시므로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되지는 않으신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주요 항목의 중점, 20쪽)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므로 그분들이 정확히 똑같다고 말할 수 없다. 그분들이 정확히 똑같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 어떤 구별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만 하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아니실 것이다. (주님께 유용한 그릇, 영문판 157쪽)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이시다. 한 분 유일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세 방면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모두 하나님이시며, 영원하고,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안에 계시며, 분리되실 수 없다. (진리 공과, 1단계 제1권 29쪽)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교회가 오랫동안 확증해 온 바와같이, 위트니스 리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대한 계획 또는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해 시간 안에서 움직이실 때에도 각각 경륜 안에서 구별되는 움직임을 가지실 정도로 셋 사이의 구별이 존중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이해는 다음의 발췌문에서 분명하게 선포된다.

 

아버지는 계획, 곧 경륜의 첫 단계를 성취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는 일을 하셨다. 선택하시는 일과 예정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이루신 것이며 아들이나 영께서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을 깨닫는 데 주의 깊어야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홀로 하지 않으셨다. 삼일 신격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 영과 함께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 (장로 훈련 (3)-이상을 실행하는 길, 110-111쪽)

 

아버지의 계획하시는 일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일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그 계획의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같은 책, 112쪽)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지를 사용하셨으며, 우리를 선택하셨고, 예정하셨으며,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또한 하나님은 육신이 되셨고 구속을 성취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고 계시며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거나 영이 우리를 예정하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육신이 되셔서 우리 죄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셨다거나 구속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성경에서 우리가 아버지의 교회나 영의 교회는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는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는데, 이것은 아버지로서 그분의 기능이 낳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133-134쪽)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 아들은 모든 일을 이루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육체가 되셨고 육체 안에서 이 땅에서 사셨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같은 책, 112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를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는 양태론자라고 주장하거나 암시하는 것조차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처럼,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에 대한 양태론적 관점을 분명히 부인하였고, 영원히 존재하는 신격 안의 실재들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구별을 분명하게 확증했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라는 제목 아래 제시한 여섯 개의 인용문처럼 말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합당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여섯 개의 인용문 모두가 신성한 삼일성에 관해 동일하게 중요한 또 다른 방면, 즉 하나님이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도 하나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공개 서한에서처럼 따로 분류된 여섯 개의 인용문이 양태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위트니스 리가 말하려는 것, 즉 보다 큰 문맥에서 여섯 개의 인용문 내용들이 분명히 말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하나님이 하나(the oneness)라는 진리를 확증하는 데 있었다.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도 이 진리에 동의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하나라는 진리와 위트니스 리


우리는 하나님이 셋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신격 안에서 영원히 구별되는 실재들이심을 인정하는 한편, 또한 우리가 믿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고, 세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삼일(triune)이심을 확실히 믿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모세에게 반향하여)과 바울이 각각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님이시다(막 12:29, 비교 신 6:4)”,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 8:6)”라고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기본적인 이해를 믿음 안에서 간직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셋(three)이심을 이해하지만 세 하나님(three Gods)이라는 것은 단호히 부인한다. 역대로 그리스도인 교회의 신앙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성 안의 한 하나님의 실재를 고백한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큰 비밀이지만, 우리는 인간의 지성에 따라 혼자서, 무의식적으로라도 세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삼일 하나님에 관해 자신이 이해한 것을 점검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요청한다. 여러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분리된 세 위격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12], 초기 교회 시대[13]와 종교개혁 시대[14]에 그리스도인 믿음에 있어서 위대한 교사들과 현 시대의 존경받는 신학자들[15]이 합당하게 확증하는 것처럼, 항상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고 바르게 이해하는가?


우리가 믿기에 이 질문은 삼일 하나님의 비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공개적으로 그렇게 고백하지는 않지만 관념에서는 종종 세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잘못된 신앙인 삼신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어왔다. 사실상 우리가 위에서 검토한 다양한 형태의 양태론은 초기 교회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분리된 세 하나님이라는, 이성적이지만 분명히 잘못된 개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겨났다(켈리 119). 하지만 신성한 삼일성을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더 교묘한 위험 요소는 결코 양태론이라는 명백한 오류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 교회는 이러한 양태론 이단을 반복해서 물리쳐왔다.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인 믿음은 세 하나님이 있다는 관념인데, 그런 관념이 많은 믿는 이들의 부주의한 생각, 심지어 기독 교사들의 방심한 생각 속에서 종종 암암리에 신봉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교회 안에서 유지되었고 현재까지도 우리 가운데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양태론이라는 명백한 오류는 비교적 쉽게 배척하고, 삼일성 안의 한 하나님이라는 참된 진리도 믿음으로 진지하게 이해하지만, 그것은 분리된 세 위격 즉 분리된 세 하나님이라는 단순화되고 숨겨진 개념으로 더 쉽게 대치되곤 한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에서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삼신론에 대한 관념과 자주 싸웠다. 그의 책에는 삼신론을 분명하게 고발한 곳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 제시한 몇 가지 예로도 요점이 충분히 파악될 것이다.

 

오늘날 어떤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사실상 무의식적으로 삼신론적이다. 이들 교사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구별되실 뿐 아니라 분리되어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구별되신다(distinct)고 말할 수는 있지만, 분리되신다 (separate) 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분리시킬 수 없고, 영에게서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셋 모두 동시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신약의 결론―하나님, 39쪽)

 

또 다른 큰 이단은 삼신론(tritheism)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동시에, 분리되신 채 공존한다고 말한다. 삼신론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상호내재를 무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삼일 하나님을 세 하나님으로 분리한다. 이것은 오늘날 만연해 있는 이단이다. 성경에서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고 분명하게 말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히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는 것을 자백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믿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지식, 영문판 72쪽)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참으로 하나이시고 한 하나님이시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삼일성(Trinity)을 믿지만, 결코 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세 하나님을 믿는 삼신론(三神論)은 이단이며 우리는 그것을 유죄판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신격 안의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요한 서신 라이프 스타디, 보급판 210쪽)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삼일 하나님의 셋을 세 신(gods)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삼신론의 그릇된 가르침을 믿는다. 세 신이 있다는 가르침인 삼신론은 이단이다. 신격의 셋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신격의 셋은 상호 내주하시며 서로 안에 사신다. 이것은 상호 내재라 불린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내재적 조망, 107쪽)


 

인용문 3과 6


공개 서한에 있는 처음 여섯 개의 인용문에 대한 평가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각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의 셋이 분리된 하나님들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뒤엎으려 한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인용문 3과 6에서 이러한 시도는 매우 분명하다.


인용문 3

 

삼일성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매우 부적합하며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와 연결되실 때,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뒤에 남겨지시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신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또 다른 위격이신 아들을 보내어 구속을 성취하시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격이신 영을 보내신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사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시는 반면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온다. 믿는 이들은 기도할 때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는다. 신격을 이렇게 분리된 위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 (생명 메시지, 제3권 220-221쪽)


인용문 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위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위격이시다.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우리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인용문 3에서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상당히 부적합하고”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고 규정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전통이나 개인적 정서가 어떻든 간에, 신격의 셋이 분리된다는 관념을 인정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적절한 설명이 아니다. 따라서 영께서 믿는 이들 안에 거하기 위해 오실 때, 그 행동은 영의 행동으로 구별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오심과 내주하심이 아버지나 아들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16] 그 셋이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는 되시지 않는다는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합당하게 붙잡아야 할 신앙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영께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영과 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이러한 인상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고, 서명자들이 인용문 3을 불쾌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바로 그들 자신도 이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위트니스 리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영이 아버지와 아들과 분리되어, 분리된 세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상이다. 그는 인용문 3에서 강하게,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며, 영이 믿는 이와 연결될 때 아버지와 아들이 영과 분리되신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것은 셋 사이의 구별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분리된 세 위격, 즉 분리된 세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무효화 한다. 더 나아가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독자들이 이 인용문을 통해, 지금 영이 믿는이들 안에 계시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지금 보좌에 계신다는 것을 위트니스 리가 부인한다고 이해하기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부인하고 있는 것은 “신격이 이러한 분리된 위격들로 쪼개진다.”는 잘못된 개념이지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신다는 사실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아들 안에 계실 때 또한 보좌에도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이 구별은 되어도 분리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신성한 비밀이다. 한 면으로, 신격 안에 있는 셋은 동시에 존재한다. 다른 한 면으로, 그분들은 상호 내재한다. 그분들은 서로 내주하고 계시며 서로 침투되어 계신다…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도 계시고 동시에 보좌 위에도 계셨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시며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25-26쪽)


물질적인 영역의 논리와 달리,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들에 있는 보좌에 계셨고, 또한 땅에서는 아들과 함께 계시고 아들 안에 계셨다(요 8:29; 10:38; 14:10, 20, 21; 17:23). 그분들은 확실히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되실 수는 없다. 아들이 계시는 곳에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아들 안에 계신다. 이와 같이, 영은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거하신다. 이것이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3에서 강조하는 중점이다.


이와 같은 강조는 인용문 6에도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분리된 세 위격이 아니며, 세 하나님도 아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이 기본적인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의심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분리된 위격(separate persons)이나 세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옹호하기 원하는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들도 우리가 묻는 것처럼, 서명자들이 이 인용문을 왜 불쾌하게 여기는지를 물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또한 위트니스 리가 “그분들은 한 하나님, 한 실재이시다.”라고 말한 것에 서명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위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밝혔듯이, 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철저히 기독교적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자 셋이시기 때문에, 한 실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또한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또한 셋이신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삼일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한 방면만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강력하게 주장한 바와 같이 그분이 한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또한 한 실재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아마 “그분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위격이시다.” 라는 위트니스리의 말에 걸렸을 것이다. 전통적인 사상은 삼일성의 비밀을 보통 “세 위격 안의 한 하나님”으로 표현해 왔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앞서 제시된 그의 다른 책들을 통해 우리가 본 배경과 반대로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영원히 구별되시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이해될 수는 없다. 단지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6에서 셋이 하나의 위격이시라고 말했다는 것 때문에 그를 양태론적 관점 안에 두려고 하는 것은 그 인용문의 출처인 문맥에도 어긋나고, 그의 광범위한 저술에서 드러나는 강한 증거와도 반대된다. 기껏해야, 위트니스 리가 위격이라는 용어를 신격 안에 있는 구별을 묘사하기 위한 최고의 용어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따질 수 있을 것이고, 확실히 그러한 논쟁은 그의 글의 여러 발췌문들에 근거하여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신성한 삼일성의 셋을 묘사하기 위해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그의 주저함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는 자주 신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현재 회장을 포함한 4명의 서명자들이 함께 가입되어 있는 달라스 신학교의 공동 설립자 중 한 사람)가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 설명한 것을 덧붙였다.

 

세 위격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는 없고, 성경 해석을 위해 사람이 추가한 것이다. 셋―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달리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세 위격’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이다.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설명하기 위해 ‘세 위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세 위격은 실지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주석으로 유명한)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는 그의 책 신약의 원리에서 신격의 삼위일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썼다. “‘위격’ 이라는 용어도 가끔씩 반대를 당한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그것이 부적절하고, 심지어 긍정적인 오류라고 비난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확실히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이를 것이다. …‘실질’(substance) 또는 ‘위격’(Person)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 단어들을 사람의 실질이나 인격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에 대한 진리와 체험은 신학 용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 위격에 관해서는 이 정도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삼신론이 될 것이다.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영―에 관하여, 10 11 W.H. 그리피스 토마스, <신학의 원칙들: 39 개의 글들에 대한 소개>에서 인용함 [6판, 그린우드, S.C. 다락방 출판사, 1978], 31)


세 위격이라는 용어가 가진 문제점은, 일반적인 어법에서 그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세 인격을 가리키고, 세 명의 분리된 존재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이시라는 방면의 진리에 위배된다. 위트니스 리는 위격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강조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다음의 발췌문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편리를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는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많은 복음 전파자들, 사역자들, 목사들, 성경 교사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세 분이시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배운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또한 세 분이시라는 사실에 당혹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다(마 28:19). 어떤 이들은 세 인격 안에 한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성경에서 인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삼일 하나님과 관련하여 찾아볼 수 없다.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인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는 인격이라는 단어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면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인격이라는 단어는 신격의 셋을 묘사하기 위하여 잠시 빌어올 수는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 따른 교회 생활의 실행, 94쪽)


사실, 그는 그의 사역의 책에서 세 위격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는데, 특별히 이 용어의 명백한 위험을 강조하지 않을 때에 그렇다. 다음은 신격의 셋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이 용어를 사용한 많은 예 중 하나이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결코 그분들이 세 하나님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분들은 셋이지만 한 하나님이시다. 그분들이 한 하나님이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세 위격이 있다. 이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경배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또한 이분이 우리가 믿고 흠모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다! 할렐루야!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하여, 영문판 25-26쪽)


이처럼 우리에게는 전통적인 실행을 따르면서 세 위격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위트니스 리의 분명한 예들이 있다. 또 우리에게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모아 놓은, 한 위격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그의 인용문이 있다. 위격(person)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의 합당한 주저함과 그 용어 사용에 대한 그의 관대함을 안다면, 독자들은 인용문 6의 내용에 있어서 위트니스 리에게 잘못이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위트니스리의 참된 입장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거나, 나쁘게 말한다면, 무시하려고 했다.

 


인용문 1, 4, 5


이제 인용문 1, 4, 5로 돌아가 보자. 공개 서한에서처럼, 이 인용문들만을 놓고 보면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의 가르침에서 삼일성의 위격 사이의 차이점을 흐리고, 더 나쁘게는 무효화 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앞부분에서 우리가 적절하게 증명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들을 영과 동일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평이한 말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곧 인용문 1, 4, 5에서 위트니스 리가 해설하는 다음의 세 절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몇몇 신학자들이 삼일성의 위격들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때로는 위격들을 잘못 분리시키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아들을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하는 성경적인 동일시를 이러한 구별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는 반면, 위트니스 리는 애초에 왜 성경에서 동일시가 이루어 지는지를 이해하고자 했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신성한 영감으로 된 성경 본문을 가장 중요시함으로써 성경 외의 다른 것이 진리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동일시를 말하는 것이 다름 아닌 성경이라는 점과, 이러한 동일시의 의미도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몇몇 신학자들은 성경 밖의 신학적 체계를 적용하여, 위의 성경 구절에서 아들께서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되시는 것을 부정한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에 있는 이러한 부분들과 그외의 다른 모든 부분들을 이해할 때 그러한 접근 방식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신학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성경 밖의 신학 체계가 신성한 진리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신학자들이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시와 아들과 영의 동일시를 부인하는 이유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들의 신학이 아들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실 수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이실 수 없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하려면 이 절들의 의미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만일 지면이 허락된다면 여기에서 그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제시되고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17] 이러한 다른 해석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없지만 그것들 모두에 대한 기초는 분명하다. 이러한 해석들로 대표되는 신학은, 아들이 어떤 식으로도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는 성경 본문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며 이 절들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리는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위트니스 리의 진술이 성경 본문에 근거함을 알려주는 인용문 앞뒤 내용들은 하나도 소개하지 않았지만, 사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문 1과 4에서 이사야서 9장 6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된 두 부분 모두의 이전의 문맥에서 이사야 9장 6절을 인용한다. 두 인용문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지신 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우리 모두가 믿어야 하는)이실 뿐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서명자들은 우리가 믿지 않기를 희망하는)라고도 불리심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 인용문에서 위트니스 리가  의도한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했지만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생략한 인용문의 앞뒤 문맥을 아래에서 괄호로 묶어 추가로 제시한다.


인용문 1 [문맥에서]

 

[이사야서 9장 6절에 있는 대구(對句)는 이렇게 말한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영존하시는 아버지라…할 것임이라.” 여기에 언급된 아들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은 참으로 분명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신다. 이 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기록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시므로 그 아들은 틀림없이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분께서 아버지라고 불리시기는 하지만 실지로는 아버지가 아니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께서 아버지라 불리시면서 아버지가 아니실 수 있겠는가?…어떤 사람도 가까이할 수 없는 위치에 계신(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나오실 때 그분은 아들이시다. 따라서 한 아들이 주어지셨지만 그분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우리에게 주어지신 바로 이 아들이 바로 아버지 자신이시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도 제1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영, 820-821쪽)


인용문 4 [문맥에서]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영이심


[이사야서 9장 6절은 말하기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다. 이 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기’와 짝을 이룬다. 그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아들’과 짝을 이룬다. 그렇다. 그분은 아기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베들레헴의 구유에 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아기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아들과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한 하나이시다. 아들은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이 문제를 완전히 설명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의 이름은…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이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시겠는가? 만약 우리가 이 절에서 말하는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 절에서 말하는 ‘아들’이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한 계시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는 말씀에 따라 아기가 되신 주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깊이 믿는다.] 그리고 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또한 영존하신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요 또한 아버지이시다. 할렐루야!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하여, 영문판 18-19쪽)


일단 우리가 위에 제시된 위트니스 리의 말에 대한 성경 근거를 알고, 또한 그가 말한 내용들이 전적으로 성경적임을 깨닫는다면, 서명자들이 인용문 1과 4를 본문과 따로 떼어 놓음으로 얻는 극적인 효과 중 일부는 상실된다. 그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어떤 방면에서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히 타당한 인식이다. 그리고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이신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위트리스 리가 여러 곳에서 강하게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되신다는 동등하게 타당한 진리의 관점을 여전히 유지한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이 문장은 쉽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쓰여있다.” 즉 “이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라고 했을 때 암묵적으로 그 구별을 인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아들와 아버지의 동일시를 부정하는 해석들을 통하여 그 어려움이 제거된 설명을 하고자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경이 확고하게 지지하는, 신격 안에서의 상호 내재의 실재를 호소하는 방식으로 그 어려움을 설명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8-11).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같이 설명했다.

 

이 상호내재에 관한 말씀이 요한복음 14장10절 상반절에 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가 있다. 요한복음 14장11절에서 주님은 계속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이 어떠한 비밀인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아들이 말씀하실 때 아들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신다. 그분들이 서로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하시는 말씀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신다.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32-33쪽)

 

어떤 이들은 아들과 아버지가 분리되시고 아들은 단지 아버지를 대표하신다고 잘못 생각해 왔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대표의 문제가 아니라 체현의 문제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체현되어 계신다(골 2:9). 우리는 아들을 볼 때 아버지를 본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은 아버지와 분리되실 수 없다. 그분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하나이다.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34쪽)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거나 아들을 그 영과 동일시하는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설명할 때, 위트니스 리는 그가 느끼기에 이 성경 구절들의 밑에 깔린 상호내재의 실재를 신격 안에서의 하나에 대한 근거로 호소했다.[18]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히 상호내재하시기 때문에, 이사야 9장6절에서 볼 수 있듯이, 때때로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시되신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확실히 구별되시는 아들은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거주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참으로 아들이 계시고 참으로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은 그분들 사이에 구별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내주하시고 아들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신다는 의미에서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실 수 있고 또한 아버지시라는 사실은 신격 안의 하나를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명인들이 우리에게 인용문 1과 4의 출판을 중단하고 부인하라고 한 요구는 표적을 잘못 겨냥한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실지로 요청하고 있는 것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선포를 전파하는 것을 중지하고 부인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분명히 거절한다.


인용문 5에서 위트니스 리는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 할 뿐 아니라 그 영과도 동일시 한다.


인용문 5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시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분은 또한 주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아들, 그 영,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이시다. (삼일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명확한 계시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responses/booklets/triune.html)


그러나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은, 이 인용문의 본문  앞에 소개된 더 넓은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가, 참으로 주 예수님이 아버지와 그 영과 함께 하는 아들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자 주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련의 성경 구절들을 검증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단락의 서두에서 제시한 세 절은 위트니스 리가 검증한 것 중 일부인데, 그는 이 문맥에서 좀 더 많은 내용을 제시한다.[19] 다시 말해서, 위트니스 리의 요점은 성경 자체가 이러한 동일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구별의 관점에서 그 구절들을 설명하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잠재적인 삼신론에 따라 그것들을 해석할 수도 없다. 이사야 9장 6절에 관해 위에서 말한 것(아들을 아버지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일시 한 것)에 더하여, 우리는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신격 안에는 오직 한 생명 주시는 영만 계신다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추가해서 말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님은 그 영”이심을 말하고, 바울 서신의 전후 문맥은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 영과 동일하시다는 인식은 바울 자신이 정당화 한 것이다. 최근에 출판된 가장 최근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학문적 연구가 반영된 영어 표준역 스터디 바이블에서 바울이 아들과 그 영을 동일시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가 짐작하건대, 공개 서한에 서명한 ‘70 명 이상의 복음주의 기독교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은 이 성경을 중시한다.)

 

이 어렵고 축약된 문장을 놓고 다양한 설명이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그리스도인의 체험 안에서 함께 기능을 발휘한다고, 즉 주님(그리스도)이 그 영의 사역을 통하여(그분들은 여전히 구별된 두 위격이시지만) 우리에게 오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SV스터디 바이블[Wheaton, Ill.: Crossway Bibles, 2008] 고전 3:17의 각주)


이 복음주의 학자들은 다른 가능한 해석으로 그들의 주석을 이어가고 있고 또 그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그분이 “그 영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한(그분들은 여전히 구별된 두 위격이시지만)”그리스도를 그 영과 동일시하는 해석도 유효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확실히 이 해석은 위트니스 리와 같지는 않지만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그 영과 동일시하는 관념을 허용한다. 위트니스 리처럼 그들도 성경이 이 구절에서 “난해한… 진술”을 하고 있고 그러한 진술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아들과 그 영을 얼마큼은 동일시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성경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또한 그분을 그 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위트니스 리의 방식은 아들과 그 영의 상호 내재, 즉 상호 내재에 의해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명인들은 공개 서한에서 독자들에게 이 점을 밝히지 않았다.

 


인용문 2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제목 아래 있는 나머지 인용은 육체 되심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에게는 아래의 단어들이 삼일성 안에 있는 구별을 무효화 하거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삼위 각자가 가지시는 구별된 역할을 혼잡케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 단어들을 보다 큰 맥락에서 떼어 놓았다고 추정한다. 그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 2

 

…신격 전체, 곧 삼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 (the entire Godhead, the Triune God, became flesh.) (하나님의 신약 경륜, 235쪽)


우선 순전히 논리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본문에서 떼어 놓은 이 인용문의 전후 문맥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이 여덟 개의 단어들(영문 참조) 안에 들어 있는 ‘신격 전체’와 ‘삼일 하나님’ 이라는 표현 자체가 삼위일체 내의 구별을 내포한다고 우리는 말하고 싶다. 위트니스 리가 신격 전체라고 한 것은 신격이 단순하고 내적으로 평범한 실재가 아님을 그가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그가 삼일 하나님을 언급한 것은 한 하나님이 셋이시라는 개념을 믿고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서명인들이 첫번째 제목 아래 있는 다른 다섯 인용문에서처럼 위트니스 리가 신격이 영원히 구별되심을 믿지 않는 양태론자임을 알리려고 이 단어들을 떼어 내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떼어 낸 인용문의 문장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인용문 자체는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였다는 증거가 될 수 없고, 우리가 지금까지 위에서 보아온 그의 모든 사역의 책들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서명인들이 따로 떼어낸 이 여덟 단어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한 것은, 자신들의 평가에 의하면 위트니스 리가 육체 되신 아들의 역할과 아버지와 그 영의 역할들의 구별을 혼동했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따로 떼어낸 그 여덟 단어들만 가지고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 안의 구별된 역할을 혼동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이 단어들을 발췌한 장의 모든 지면들을 읽지 않았거나 독자들이 그것을 읽기를 원치 않았다.[20] 위트니스 리는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계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요점을 완전한 문맥에서 다룬다. 우리는  우리가 인용문 2에서 말한 것의 근거를 제시하도록 필요한 요점 몇 개를 아래에서 인용하겠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태 속에 성령으로 잉태 되셨는가를 말해 준다(1:18, 20). (하나님의 신약 경륜, 232쪽)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오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주 예수님은 그분이 역사하실 때 아버지가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요 5:17). 이것은 구속하는 역사가 또한 아버지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같은 책, 234쪽)


그런 다음, 인용문 2와 다음 내용이 뒤따른다.

 

신격 전체, 삼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경륜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육신이 되셨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이 분은 ‘하나님-사람’으로 태어나셨다. 우리는 이 ‘하나님-사람’을  ‘아들-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하나님-사람’은 ‘삼일 하나님-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사람’이시다. 그분은 땅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삼십 년 동안 삼일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서 사셨다. 이 삼십 년 동안에 그분은 나사렛에서 대부분 목수이셨다. 그분이 목수 일을 하시는 동안 아버지께서 그곳에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 또한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하시는 동안 그분은 모든 것을 영에 의해 하셨다(마 12:28). 그분은 놀라운 분이시다. (같은 책,  235-236쪽).


마지막으로 그 장의 이 부분에 있는 마지막 단락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아버지가 하신 것은 다 아들 안에서 영에 의해 하신 것이며, 아들이 하신 것은 다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서 하신 것이며, 영이 하시는 것은 다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것임을 깨닫기 바란다. 신격 안에 있는 셋은 분리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경륜적으로는 신격 안의 셋이 연속적이시지만, 본질적인 방면이 여전히 경륜적인 방면 안에 남아 있다. 아버지의 선택하심과 아들의 구속하심과 성령의 적용하심은 모두 경륜적이지만, 이 경륜적인 방면 안에 본질적인 삼일성의 방면이 여전히 있다. 아버지께서 선택하실 때, 본질적인 삼일성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아들이 구속하기 위해 왔을 때, 또는 영이 적용하기 위해 올 때 본질적인 삼일성이 거기에 있다. 성경 육십육 권의 결론인 요한계시록은 삼일성의 본질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계시이다. 우리는 본질적이면서도 경륜적인 놀라운 분을 보았다. (같은 책, 238쪽).


위트니스 리는 “잉태되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오셨으며,” “육체가 되신” 분이 참으로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들의 구속’이지 아버지의 구속이나 그 영의 구속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가 오래동안 믿어온 것처럼, 육체 되심의 구별된 행위자(Agent)는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그의 요점의 일부는 아들이 육신 안에서 오셨을 때, 삼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그 아들은 아버지와 그 영과 분리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격 안에 있는 셋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은 육신 안에서 오셨을 때, 본질적으로 “성령으로 태어나셨다.”(마 1:18,20) 그분이 무엇을 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하시는 일 안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셨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그분은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일하셨고 자기 자신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그러므로 아들이 육체가 되실 때, 그분은 신격의 셋 가운데 존재하는 상호 거함의 방식(상호내재)과 그분들이 하나로 함께 일하심의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합병시키셨다. 그 후의 출판물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 명료하게 밝힌다.

 

신성한 삼일성의 하나님은 하나의 합병체이시다(요 14:10-11).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그 존재와 하시는 일에서 합병체이시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상호 내재하심으로 합병되셨다. 이것에 관해서 주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절)라고 말씀하신다. 11절 상반절에서 그분은 계속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상호 내재하심으로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하나로 일하심으로 합병체이시다. 10절과 11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너희는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보았다. 이 일은 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결코 스스로 어떤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아버지의 일이다. 아버지와 나는 상호적으로 함께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나로 함께 일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이 합병체임을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  29-30쪽)


위트니스 리가 “신격 전체, 즉 삼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The entire Godhead, the Triune God, became flesh.)라고 여덟 개의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음”을 시인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 안에서 운행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요일 4:2). 그러나 우리는 또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존재와 행하심에서 아버지와 그 영과 합병하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신격 전체 즉 삼일 하나님을 그분의 존재와 행하심 안에 합병하셨다(골 2:9). 그분이 육신 되셨을 때 삼일 하나님 전체가 그분과 함께 계셨고, 그분 안에서 행하셨다. 위트리스 리도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확실히 육체 되심의 주체이시지만, 자신의 존재와 행하심 안에서 아버지와 그 영을 합병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와 그 영으로부터 아들을 떼어 내는 것이고 그 셋을 별개의 인격들로 분리시키는 것이며, 세 하나님을 제안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우리가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복음주의 학자들이나 사역의 인도자들이라는 서명인들의 지위가 어떠하든, 서명인들과 똑같은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인용 1부터 6까지의 본성에 관하여


위에서 보았듯이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과 삼신론 모두의 헛점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믿기로 위트니스 리는 또한 자신의 가르침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길을 추구하고 또 찾아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가 어느 쪽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지지한다는 말에 설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글에서 이 여섯 문장들을 따로 떼어 낸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보다는 좀더 공정하고 고귀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이해하기를 정중히 요청한다. 공개 서한이 출판되기 훨씬 전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저서의 일부가 어거스틴(A.D.353-430)의 글처럼 문맥을 무시한 채 잘못 인용되어 그가 양태론자나 삼신론자인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여러 해에 걸쳐서 나는 삼일 하나님에 관해 많은 메시지를 전해왔다. 만일 그 메시지에 있는 어떤 문장을 문맥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내가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문장은 문맥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마치 내가 삼신론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양태론도, 삼신론도 가르치지 않는다.

 

신성한 삼일성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선두에 있는 어거스틴(Augustine)은 때로는 양태론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때로는 삼신론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분리된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양태론을 가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셋―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또한 삼신론을 가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한 분이시라는 것, 즉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사9:6)는 것과 아들이 그 영이시라는 것(고전 15:45, 고후 3:17)을 계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지적할 때 우리는 양태론을 가르친다는 거짓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글을 공평하고 온전하게 고찰한다면 우리가 양태론도 가르치지 않고 삼신론도 가르치지 않으며 성경에 따라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자명해질 것이다. (신약의 결론―하나님,  45-46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자신들 이전에 살았던 다른 이들이, 어거스틴뿐 아니라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과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 교부들 및 삼위일체에 관하여 견실한 정통 교리를 소유한 다른 교사들의 저서들을 취급할 때 범한 비슷한 잘못을 학자들로서 유의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합당한 연구를 위한 기본 원칙 중 하나인, 자신들이 인용한 출처를 정확하고 완전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실수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들의 심각한 잘못을 인식하고, 부당하게 위트니스 리를 깎아내리려는 그들의 의도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에게 동의하거나 그의 사역을 받는 우리에게 동의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표한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의 저서들을 부당하고 비전문적이고 비양심적으로 취급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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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J. N. D. 켈리(Kelley),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Early Christian Doctrines rev. ed.)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78), 영문판 119-126쪽.


[11] 다음 책자들을 참고하라.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3-34쪽, 45-47쪽, 58-61쪽, 진리의 변호와 확증 27-28쪽, 신약의 결론-하나님 35-36쪽, 신약의 결론-교회 451-453쪽,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122-124쪽, 그리스도의 탁월성 84-85쪽, 장로 훈련 제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53쪽, 110쪽, 126쪽, 신성한 계시의 중심 노선 28-29쪽, 하나님의 경륜과 신성한 삼일성의 전달의 비밀 영문판 150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만한 지식, 영문판 71-72쪽, 성경의 기본 계시, 27쪽, 주님께 유용한 그릇, 영문판 157-158쪽, 생명 메시지 2권 127, 132-133쪽,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의 중점, 23-25쪽.


[12] 이어지는 논의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공개 서한에서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위트니스 리의 저술을 인용할 때 언급한 성경 구절들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더 많은 말씀들이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13] 터툴리안(2세기 경): “이것이 내가 선언하는 믿음의 원칙임을 항상 기억해 주기 바란다. 내 믿음이 증언하는 바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 분리되실 수 없다는 점이다(‘교부들의 가르침’에 있는 ‘프락세이아스를 반박하며’ 9권, [John R. Willis 편집, S.J.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6] 영문판 177쪽에서 재 인용);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4세기경): “간략히 말해서 신격은 개별적인 위격들로 분리되지 않는다.”(다섯 번째 신학 연설-성령에 대해(The Fifth Theological Oration-On the Holy Spirit) 14 단락, 니케아 회의 및 그 후의 교부들 시리즈 2권 [NPNF2] [Philip Schaff 및 Henry Wace 편집.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VII: 영문판 318쪽에서 재 인용); 가이사랴의 바실(4세기 경): “왜냐하면 세 위격에 대해 생각할 때 아들이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계신 것으로 이해하거나, 성령이 아들께로부터 분리되어 계신 것으로 이해하는 등 결코 단절이나 분리의 개념을 떠올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서신들 (Letters) 38번째 서신, 앞의 John R. Willis의 책 185쪽에서 재 인용); 암브로우스(4세기경):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구분이 있음을 견지하며 세 위격을 혼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분리됨이 없는 구분이자 복수성이 없는 구분이다.”(그라티우스에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 4:8, John R. Wills의 책 185쪽에서 재 인용); 675년 7차 톨레도 공회에서 채택된 신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세 위격이 서로 분리되시지는 않지만 구분되신다는 점을 선언하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규정한 대로 이 세 위격이 모두 인정되셔야 하지만 분리되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J. Neuner & J. Dupuis, 가톨릭 교회 교리 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신앙 [5차 개정판, London: HarperCollisns Religious, 1991] 영문판 113-114쪽).


[14] 칼빈 외(1559년): “세 위격은 서로 혼동되지 않고 구분되신다. 하지만 서로 분리되시지는 않으며, 같은 본질을 지니시고, 영원성과 능력에 있어서 서로 동등하시다.”(프랑스인의 신앙 고백 제6조, 기독교 신조에서 인용) [Philip Schaff 편집, David S. Schaff 개정, Harper and Row, 1931,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3], 영문판 363쪽); 마틴 루터(1566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로 하자. 곧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니고 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곧 세 사람, 세 천사, 세 아들, 세 창문이라고 할 때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식으로 하나님에 관해서도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하나님은 그 실체가 그런 식으로 분리되거나 나뉘어지시지 않는다. 오직 유일한 단 하나의 신성한 본질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의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탁상 담화, William Hazlitt 번역 및 편집, [London: George Bell and Sons, 1875], 영문판 75쪽); 2차 헬베티아 고백(1566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대하시고 분리되실 수 없는 이 한 분 하나님께서 그 인격이 서로 분리됨 없이, 또 서로 혼동됨 없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구분되신다는 점을 믿고 가르친다.”(16세기 개혁 신앙 고백에서 인용) [Arthur C. Cochrane 편집,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6], 영문판 228쪽).


[15] 아우구스트 H. 스트롱(August H. Strong): “성경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교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 위격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구분해 칭하지만 그 사이에 분리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조직 신학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영문판 333쪽); H. R. 멕킨토시(H. R. Mackintosh): “그렇다면 앞에서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엄밀히 말해, 세 분이 분리된 의식 존재가 아님을 단언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실재가 있다는 점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드러낼 딱히 좋은 다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 [Edinburgh: T&T Clark, 1913], 영문판 524쪽);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한 인격이 있을 때, 구별되는 개별적인 본질도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인격은 구분되는 별개의 개체이다. 그 안에 담긴 인간 본성은 각각 개개의 본성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우 서로 별개로 존재하거나 분리된 세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성에 있어서뿐 아니라 숫자적으로도 하나뿐인 신성한 본질 안에는 다만 위격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조직 신학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1941], 영문판 87쪽); 루이스 스페리 쉐퍼(Lewis Sperry Chafer): “이 지점에 이르러 딱 맞는 적당한 용어를 찾을 수 없는 곤란함이 발생한다. 위격들은 서로 분리되시지 않지만 구분되시기는 한다. 삼일성은 분리되어 존재하시지 않지만 세 위격이 연합된 상태로 이루어진다. 서로 너무도 완전히 연합되어 한 하나님을 형성한다.”(조직 신학 [Dallas: Dallas Seminary Press, 1947], 영문판 276쪽):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우리가 신격 안에 구분되는 세 위격이 계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이 서로 별개의 인격이듯 세 위격 각자가 서로에게서 별개로 분리되어 계신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분되실 수 있지만 분리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가 동일한 하나의 실체 혹은 본질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 위격은 워싱턴과 제퍼슨과 프랭클린이 나란히 존재하듯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은 서로 배어들고 침투해 계신다. 서로 안에 계시고 서로를 통과해 계신다.”(신학 연구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7], 영문판 109쪽). 이외에도 수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16] 찰스 고어(Charles Gore): “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없는 개체들이시다. 각자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한다. 한 분의 오심은 다른 분들의 오심이다. 따라서 성령의 오심은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음에 틀림없다.”(하나님의 아들의 육체 되심 [New York: Charles Scribner & Sons, 1891] 영문판 218쪽); 제임스 데니(James Denney): “여기(고후 3:17)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지적인 체험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고린도후서 [London: Hodder and Stroughton, 1894] 영문 134쪽); H. B. 스위트(Swete): “성령은 그분의 일하심에 있어서 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분으로 발견되신다. 그러므로 성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죽은 것이나 영은….산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하시는 것과 동등하게 간주된다.” [생략된 부분은 성경 본문 참조.] (신약에 있는 성령 [London: Macmillan and Company, 1910] 영문 301쪽); W. H.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 “조심스럽게 이 진리의 두 방면을 보존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서로 다르시지만 동일하시고, 동일하시지만 서로 다르시다.”(성령 [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86 (1913)] 영문 144쪽); 로레인 뵈트너: “우리가 기도할 때 주 기도문에서처럼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 이것은 삼일성의 첫째 위격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하나님이신 세 위격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신학 연구 [Phillipsburg, NJ: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영문 107쪽); F. F. 브루스 (Bruce)는 골로새서 1장 27절의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는 구에 대해 언급하며 “바울에게 있어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성령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같은 개념이었다(비교 롬 8:10-11). 물론 바울은 다른 곳에서 다가올 영광의 소망 또는 보증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제시하기는 한다.”고 말한다(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영문판 86쪽).


[17] 이 절들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참고하려면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한 성명서’에 담긴 ‘신성한 삼일성에서 아들의 구별되심’을 보라 (http://www.lctestimony.org/StatementOfTeachings.html#divine-trinity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은 복음의 확증: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해 (DCP Press, 2009), 15-22쪽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웹상에는 http://www.contendingforthefaith.com/eBooks/Concerning%20Our%20Teachings.pdf에 수록되어 있다.


[18] 상호 내재의 교리는 결코 위트니스 리가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내재는 교회가 시작된 후로 교회의 확증을 받아왔다. 아타나시우스: “결국 이 사람들은 뱀의 독이 퍼진 것처럼 여전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읽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우리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이라고 하신 말씀을 폄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마치 불경건한 마음 깊은 곳에서 토해나온 것처럼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 안에 담겨 있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담겨 있을 수 있느냐?’라고 반박하면서 말이다(아리안주의 추종자들을 반박하며, 설교 III, NFPF2, 제 IV권 23, [필립 샤프 및 헨리 웨이스 개정.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영문판 393쪽); 포이티어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혼동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이 분들은] 서로를 담고 계신다. 그 결과 한 분은 영구히 다른 한 분을 감싸고 계시고 다른 한 분은 자기가 감싸고 있는 그분께 감싸여 계신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난제이며, 아무리 연구해도 신성한 존재의 이 상태에 대한 적절한 비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삼일성에 관해, NPNF2, 제IX권 [필립 샤프 및 헨리 웨이스 개정.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영문판 62쪽]); 어거스틴: “그러므로 세 위격에서 두 위격이 서로 안에 계시고 모두가 각각의 위격 안에 계시며, 각 위격이 모두 안에 계시고, 모두가 모두 안에 계시며, 모두가 하나이시다. 부분적으로 보는 것이든 ‘거울을 통해 보듯 희미하게 보거나 수수께끼를 풀 듯 끙끙거리며 보는 것이든’ 이것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기뻐할지어다. 보는 사람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며 감사를 드릴지어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눈 먼 상태에서 괜히 트집 잡지 말고 경건을 통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할지어다.”(삼일성에 관해, NPNF2, 제III권 [필립 샤프 및 헨리 웨이스 개정.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영문판 103쪽); 죠지 불(George Bull) 주교: “위격들은 서로를 담고 있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자가 지적했듯 셋 모두가 가늠할 수 없는 소재를 지니고 계신다. 그 결과 한 위격이 어디 계시든 그곳에는 다른 두 위격도 계신다. 다시 말해서 그분들 모두가 모든 곳에 계신다.”(니케아 공회 신조에 대한 변호 제2권 [Oxford: John Henry Parker, 1852], 영문판 652-653쪽); W. H. 그리피스 토마스: “우리가 신격 안에 있는 구분을 언급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구분이라는 말이 서로 분리된다는 뜻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구분은 극히 중요한 상호 내재나 포함을 함축한다.”(신학 원리 [New York: Longmans, Green & Co., 1930], 영문판 31쪽).


[19] 이 책자 전문은 인터넷 상에서 볼 수 있고 인용문 5에서 제시된 바 있다. 독자들은 그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길지 않은 내용이므로 독자 여러분이 전문을 읽어보기를권유한다.


[20] 이 장 전체를 http://www.ministrybooks.org: 하나님의 신약 경륜 (God’s New Testament Economy) 21장에서 읽어볼 수 있다. 1998년 4월 한국복음서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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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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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2.07. 04:09
다소 내용이 어렵기는 하지만 조금만 집중에서 읽어본다면,
매우 잘 짜여진 삼위일체론 강의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신학교에 가도 삼위일체만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강의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면 성경을 깊이있게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최00님, 이00님처럼 비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을 옳은 것으로 착각할 때 균형잡힌
삼위일체론을 가진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경솔하게 정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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