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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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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의 실상

 

 

요즘 이인규 권사가 인터넷에서 뜨고 있다. 그는 그렇게 어렵다는 삼위일체론을 시원 시원하게 설명해 준다. 그래서 그의 말은 인기가 있다. 그가 말하면 무게가 실린다. 그가 정통이라고 하면 정통이 되고, 아무개는 양태론이라고 하면, 비판 대상은 즉시 양태론 이단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일까?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따라서 그의 말을 다 믿으면 안 된다. 아래 글은 왜 그런지를 설명해 준다.


1. 판단하는 사람은 문제가 없는가?


우선 신학서적을 여기 저기 인용하지만, 이인규 권사는 정식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의 신학이 정식으로 검증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런데 과거에 지방교회들과 토론한 내용에 따르면, 그의 신론은 문제점들이 너무 많다. 소위 ‘이인규 권사식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을 네 가지로 요약해 보겠다.


1) 삼위의 세 위격을 세 사람들처럼 착각한다.


각기 구별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신다. 삼위는 한 동일 본성을 가지신다. 여기까지는 성경적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세 위격들은 어떻게 계시는가? 설명이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 위격을 세 사람들처럼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통 신학자들은 세 위격을 사람에 비유하여 설명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결같이 경고한다. 삼신론 내지는 다신론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인규 권사는 아래와 같이 세 위격의 관계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 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예를 들지요...한 학교의 10명이 같은 반 1학년 1반 입니다. 그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들이 독립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학년 1반에서 분리된 것과 뜻이 다릅니다. 』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가 같은 반 10명의 학생들간의 관계와 같다는 위 말은 각각의 아이들처럼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전제한 설명이라 다신론이다. 우리가 믿는 삼위 하나님은 학교가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학생들처럼 그런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시다. 그런데 그의 이런 시각은 다음 사례에서도 반복된다. 그가 실수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서로가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뜻하였을까? 아니면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는가?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안에 인격적으로 동시존재하며, 빌립보교인들의 인격이 바울의 인격 안에 동시존재, 상호내재하였는가? 과연 그들은 한 인격이었는가?”


이인규 권사는 삼위의 세 인격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처럼 비록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같은 믿음 안에서 연결된 상태와 같다고 믿는다. 이 역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다신론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듯이 정통 신학자들은 세 위격을 세 사람처럼 생각하는 이런 견해를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으로는 셋이나 실체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님의 실체를 아담과 하와와 셋에 비교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역시 잘못된 것이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 241쪽, 원출처: Gregory of Nyssa, QNTD (5:334 ).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실 수 없으시다. 그분들은 마치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이 그런 것처럼, 서로 나란히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1947, p109).


“신적 실체는 각 사람의 경우처럼 개체적 부분의 한 종류로 간주될 수 없다”(김석환, 삼위일체에서 ‘페리코레시스’ 이론에 관한 분석)


이 한 가지 오류만으로도 이인규 권사는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다신론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하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남을 정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다신론 사상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2) 상호내재 개념이 정통 신학자들과 너무 다르다.


“(상호내재가 인격 안의 인격이 아니라는 증거, 한 가지만)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는 내 안에서 본 바니라... 윗 문장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안이라는 인격적인 장소에서 보았다는 뜻인가? 빌립보 교인들은 모두 귀신들인가?”


이인규 권사의 삼위일체론은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그러다 보니 위에서처럼 상호 내재를 설명한 것에도 같은 오류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과연 세 위격간의 상호내재도 이인규 님의 주장처럼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과 (빌립보 지방에 사는) 빌립보 교인들”처럼 비록 몸은 비록 떨어져 있으되 서로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식을 가리킬까?


우선 아래 정통 교부들의 상호내재론과 이인규 권사의 그것은 너무 다르다. 정통교부들는 위격 간의 분리를 인정치 않는다. 그러나 이 권사는 세 위격을 세 사람에 비유함으로 세 위격 간의 분리를 전제로 상호내재를 설명한다. 우리 하나님은 구별은 되나 분리된 존재는 아니시다.


『위격 간의 상호내재 : 닛사의 그레고리는 신격의 위격들이 시간 안에서, 장소 안에서, 직무 안에서, 또는 활동 안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김석환, 위 책, 228쪽)


“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실체의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삼위의 구별을 위해서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가 다 들어 있다.”(김석환, 29쪽).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 (George Bull 성공회 주교,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요14:10)라고 선언하신 바와 같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1권, p169)


(다마스커스 요한)”각 위격은 각각 다른 위격 안에서 어떤 연합 (coalescence)없이 존재(being)를 가지신다.”(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843-844).


“신적 존재양태들(the divine modes of being)이 상호간에 서로 서로를 아주 완전하게 조건지으며 스며들어서 하나가 항상 다른 둘 안에 계신다.”(Karl Barth, CD 1/1, p 370).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과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함께 만난다. 각 품격은 서로 혼합되거나 혼돈 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1972년)


(어거스틴)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김석환, 299쪽).


이 단락을 매듭짓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인규 님은 세 위격이 독립된 세 사람과 같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견해가 위의 어거스틴의 견해와 충돌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옳고 어거스틴이 양태론자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 신학 위에 세워진 칼빈신학, 칼빈신학 위에 세워진 한국 장로교단 신학은 양태론 이단자에게 기댄 셈이 된다. 이인규 님식 양태론 정죄의 칼끝을 지금처럼 자기 마음대로 겨누도록 마냥 방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인규 님식 이단정죄에 대한 진지한 재 조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3)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위격간의 동일시를 양태론으로 착각한다.


정통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몇 가지 명제가 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다 라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이것은 본체론적인 삼위일체에서 위격 간의 구별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성경본문 자체가 위격들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경우이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9:6).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같더라…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영이더라’(계5:6)


위에서 처럼 본문이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것을 H. 바빙크, R. B. Gaffin, 박형용 박사같은 비중 있는 신학자들은 성경대로 받아 들인다. 이것은 양태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 본문들은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기능상의 동일시를 말하는 것이며, 여전히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서의 위격의 구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들을 양태론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이 점을 설명하는 문맥 때문이다. 이인규 님도 마찬가지이다.


4) 셋인 방면을 말하는 본문을 너무 강조함으로 한 분 하나님을 전제한 본문이 희생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성경에는 세 위격의 구별을 증명할 구절이 많다. 이인규 님의 문제의 글 “(3) 양태론의 오류와 모순” 에서 열거한 11가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세 위격의 구별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한 하나님을 증명할 때 어려움이 따른다. 세 위격은 구별되시지만 분리가 불가하신 분임을 무시할 때 특히 더 그렇다. 아래와 같은 말씀들은 이인규님에게는 말문이 막히는 부분이거나 설명에 억지가 따를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의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성부가 성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 성자는 이 땅의 사역을 마치신 후 저 하늘로 돌아가셨다. 지금은 성부 옆에 앉아 계신다. 그 대신 그분은 보혜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다. 성자는 나중에 재림하실 때나 이 땅에 오실 수 있다. 이런 논리 구조 속에서는 성부나 성자가 이 땅 또는 이 땅에 사는 사람 가까이 오실 수도 없고 오시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논리를 고집하면 아래 말씀은 안 풀린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저 하늘에 남아 계시고 재림 때나 오실 그리스도가 어찌 지금 이인규 님 안에 계실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된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편재성’으로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는 어디든지 편재하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불신자 안에도 편재하시는가? 만일 그렇다면 예수 믿으라고 복음 전할 필요가 무엇인가? 위 서신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편재하시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그분의 편재성을 이인규님 만큼 몰라서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편재성을 이 구절 해석에 끌어 들이는 것은 역시 말이 안되는 억지 설명이다.


(2)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빌1:21).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골1:27). 저 하늘에 남아 계신 그리스도가 어찌 이 땅에 사는 사람 속에 계시며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를 살 수 있는가? 바울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이인규님은 이런 말씀을 두고도 그리스도가 벌써 당신 속에 재림했느냐고 따질 것인가?


(3)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저 하늘에 남아 계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사는 바울이 어찌 얻었다고 하는가…설명이 궁색해 진다.


(4)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이인규 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은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실 뿐 결코 이 땅에 사는 사람에게 생명으로 내주하실 수가 없다.


(5) “내가 볼 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1:17-18).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으시고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고 말씀하신 분은 분명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다. 재림 전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저 하늘에 남아 계셔야만 하는 이인규님식 삼위일체로는 풀기 어려운 말씀이다.


지금까지 성자와 관련 된 본문이었으니 이번엔 성부가 연관된 본문을 보기로 하자.


(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8:16).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니라”(요8:29). 이런 본문은 세 위격이 구별은 되나 분리불가임을 믿으면 얼마든지 이해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처럼 세 위격의 엄격한 분리를 강조하면 본문해석이 안 되거나 왜곡 되게 된다.


(7)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4-6). 이 역시 인규님처럼 세 위격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면 풀리지 않는 난해 구절이 되고 만다. 그러나 힐라리우스 등의 정통 교부들은 여기서 아버지는 성자와 성령을 포함한 개념으로 본다. 이인규 님은 앞에서 보듯이 이런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한다는 정통 삼위일체를 양태론이라고 착각하고 정죄해 왔다.


(8)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위 말씀은 성부와 성자께서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역시 이인규님에겐 난해 구절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한가지 또 짚고 넘어 갈 것이 있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내주를 성령이 성자를 ‘대신하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요일 3:24를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문맥은 그런 뜻이 아니다. 즉 헬라어 원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가 ‘주가 저 안에 거하시나니’가 아닌 ‘우리가 아느니라’를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이인규님은 삼신론 내지는 다신론의 의심이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정통 신학자들이 문제 없다고 보는 ‘위격 간의 기능상의 동일시’를 양태론으로 오해한다. 더 나아가 삼위의 분리에 가까운 구별을 고집함으로 삼위의 분리불가를 전제한 성경 본문을 소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람의 말을 너무 솔깃해서 받아 들일 필요는 없다. 자신도 동일한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런 사람은 결코 양태론자가 될 수 없다.


이 글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인규 권사의 삼위일체관을 자세히 분석하여 소개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비유를 든 것 등에서 약간의 오해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큰 틀에서 볼 때 균형잡힌 정통 삼위일체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은 간단히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에서 신학자들과 이단 변증가들에 의해 그 점이 확인된 바 있다. 이인규 권사의 바라보는 시각에 오해 내지는 오류가 있기에 양태론처럼 보일 뿐이다.


이제 이인규님이 정의한 양태론을 여기 소개해 보겠다. 그리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과연 그것에 해당되는지 보기로 하자.


“(이인규) 양태론이란 결국 단일신론이다. 즉 성부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와서, 그분이 죽고 부활하여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동일한 한분의 인격(위격)의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로서 나타나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사역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이인규식 양태론이 되려면, 성부가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왔으니 저 하늘에 성부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래야 양태론 공식에 들어 맞는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성육신 후에도 여전히 성부가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이 땅에 오신 아들은 육신되신 후에도 하늘에 있는 성부를 떠나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은 삼위가 구원의 경륜을 거치는 과정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정통 삼위일체관이지 결코 양태론이 될수 없다. 하나 더 보자.


“(위트니스 리) 우리는 또한 셋(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 영원하심을 믿는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아버지가 영원하시다고 말하고, 히브리서 1장 12절과 7장 3절에서는 아들이 영원함을 지적하며,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는 영원한 성령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시다"(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307쪽).


<이인규식 양태론 공식>에 의하면 각 위격은 절대로 영원할 수가 없다. 성부는 성자가 되실 때 소멸되고, 성자도 다시 성령이 되심으로 사라져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이와 달리, 삼위가 각각 영원하심을 성경 근거를 제시해 가며 확증하고 있지 않은가!


교회 역사상 <구별되는 세 위격이 영원하심을 믿는 양태론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번 제시해 보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인규 권사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라는 잘못된 생각을 이번 기회에 말끔히 씻어버릴 것을 권면드린다. 그런 오해를 씻는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조금 더 인용 소개해 보겠다.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288쪽)


“우리가 아버지, 아들, 영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어떤 소문들과 비난들이 있다. 나는 그런 비평가들과 비난자들이 어디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영이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를 원한다.”(위트니스 리, 위 책, 303 쪽).


“성경은, 아버지가 한동안 존재했으며 그 다음 아들이 왔으며 그 다음 얼마 후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영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이 구절은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들으며, 그 영은 성도들을 강화시키며, 아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진다.”(위트니스 리, 위책, 306쪽)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하나의 면을 보았으나, 셋의 면에는 실수를 범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가 끝난 뒤에는 오직 성령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격의 셋 가운데 있는 동시존재와 상호 내재의 영원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이것을 부인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성령, 29-30쪽)


“어떤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한다.『마태복음 3장 16절부터 17절을 볼 때, 거기에 아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말씀하셨으며, 그 영은 아들 위에 임했다. 셋이 모두 동시에 행동했다. 분명히 이러한데, 당신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답은, 우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보다 더 많이 믿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순수한 말씀에 따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모든 것을 믿는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307쪽).


“아들이 아버지와 상호 내재한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은 이런 상호 내재를 계시하는 또 다른 구절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들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동시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동시 존재하실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 존재하시며 아들은 아버지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33 쪽).


3.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가 아니다.


아래 내용들은 이인규 권사가 [양태론이 몰려오고 있다]라는 문제의 글에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라며 인용 소개한 것들이다. 그런데 아래 내용들은 한결같이 1)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말하거나, 2) 구원의 경륜을 설명하거나, 3)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위격 간의 기능적 동일시를 말하는 대목들이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게 상호내재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전제로 본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표현들이다. 양태론이 아니다.


1)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아들 안에 있으며, 아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을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297쪽).


위트니스리는 위 인용문에 바로 이어서 “…많은 예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도 그 자체로는 이 실체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창조에서 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예를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은 이런 경고의 말은 쏙 빼고 바로 윗부분까지만 인용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래야 수증기 비유 등을 들어 양태론으로 몰아가기 쉬워서 그랬던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고의적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사실은 위 인용문 앞에는 더 긴 설명들이 있다. 문맥과 함께 읽음으로 전체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대목이다.


아무튼 위 설명은 세 위격의 존재론적인 방면을 설명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대신에 고후 13장 13절이 말하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 이 셋이 우리의 누림과 체험 안에서는 각각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맞물려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우리의 체험에서 어디까지가 성부의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성자의 은혜이며, 또 무엇이 성령의 교통인지를 칼로 무우 자르듯 구별하여 설명할수 있겠는가. 이인규님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전후 문맥을 무시한 채 이상하게 읽힐 만한 부분만 쏙 뽑아 문제삼는 일은 이제는 그만 했으면 한다.


2)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 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 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성경에 근거한 이런 설명이 왜 양태론이라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마 첫 문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성부’로 착각해서 성부가 성자가 되었다고 한다 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후 문맥은 그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일차적으로는 ‘성자’를 가리킨다. 위트니스 리는 성육신의 주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한(히 10:5) 성육신으로 보내셨다.”(신약의 결론-그리스도, 193 쪽)


그러나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세 위격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육신의 주체는 아들이되 성부와 성령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하시는 아들 즉 삼위 전체이시다 라고 할수 있다(골2:9). 두 가지 설명이 다 지극히 성경적이다. 이 문맥은 양태론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


3)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 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이 부분도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이인규님의 입맛에 맛는 부분만 떼어 내어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위 인용문 바로 윗 부분은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라 불리우지만, 그분이 자신을 인성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안에 주신 바 된 아들이 되셔야 한다.” 라고 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이 대목은 이사야 9:6에서 볼 수 있는 ‘구원의 경륜상의 위격간의 기능상의 동일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통 신학자들은 성경 그대로 이해하고, 어설픈 이단 감별사들은 이것을 양태론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위트니스 리는 위 인용문 앞에서 요일 2:23를 근거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시는 세 위격이 우리 안에 영접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구원의 경륜상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도 불리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다. 무엇이 문제인가?


4)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42쪽).


이인규님은 위 글 인용시 위트니스 리가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고 한 점을 주목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우리가 앞에서 다뤘던 이사야 9:6 (아들=영존하시는 아버지), 고후 3:17 (아들=그영)과 같은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위격간의 기능적인 동일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는 위 인용문 뒤에서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다.”라고 말함으로 이 점을 확증해 준다.


이제 반론문을 마무리 해 보겠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인규 님의 신론은 문제가 좀 있다. 이인규 님처럼 세 위격을 세 사람의 관계처럼 생각하면 위격의 구별에서 지나쳐 위격 간의 분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삼신론 내지는 다신론에 가깝게 되어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또한 이사야 9:6, 고린도 후서3:17처럼 성경 본문 자체가 구원의 경륜상의 기능에 있어서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것은 양태론이 아니다. 이인규 님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 교계 내의 이 방면에서의 전문 신학자들의 도움을 구해 보기 바란다.


누구든 선입관을 버리고, 어느 일부분이 아니라 시간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철저하게 그 자료들을 연구해 본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균형잡힌 정통 삼위일체론을 믿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최근에 미국에서 7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위트니스 리를 양태론자라고 괴롭혔던 그레첸 파산티노 여사가 소책자를 하나 썼다. 자신이 젊었을 때 부분적인 자료에 의존하여 위트니스 리를 양태론자로 오해했던 것을 인정하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그리고 지방교회들이 정통이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임을 적극 알리는 내용이다. 오랜 추가 연구 끝에 극적 반전이 이뤄진 것이다. 우리는 이인규 권사에게도 이런 변화를 기대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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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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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3.09.26. 09:24
이인규 권사는 한기총에서 삼신론 이단으로 정죄된 최삼경 목사와 최소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같은 견해 즉 분리된 세 하나님들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세 사람들같은 세 하나님(인격들) 사상입니다. 이단의 잣대로 이단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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