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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두 방면과 서방교회, 동방교회

 

구원의 두 방면과 서방교회, 동방교회

 


아래 글은 지금 논의되는 율법과 복음 주제를 좀 더 넓은 시야로 조명하고 둘 사이의 접점을 찾기 위한 시도입니다.


로마 천주교와 그로부터 나온 개신교는 서방교회 전통을 따릅니다. 어거스틴이 그들의 신학적 뿌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주로 죄들로 부터의 구원을 관심했습니다. 즉 타락 이후의 인류의 상태로부터 문제를 풀어가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죄들을 폭로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이 강조됩니다. 결과적으로 죄, 구속, 칭의 등이 이들 구원론에 있어서의 주된 키워드입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신학이 주류인 한국 교계 내에서도 이런 특징들은 쉽게 관찰됩니다.


이러한 서방교회와는 달리, 동방교회는 이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신학적 관점을 따릅니다. 이들은 타락 이후의 인간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인류 창조 목적을 매우 관심합니다(이레니우스의 총괄 구원론 등). 그 결과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이 구속과 구원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같게 된다는 소위 신화사상이 강조됩니다. 오늘날과 달리, 3-5 세기 초에 이러한 신화사상은 정통 교부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논의되던 주제였습니다. 문제는 한국 교계가 동방교부들의 저서들이나 동방교회 실행에 접촉점을 갖지 못하고 교회 역사의 두 흐름 중 한 곳에만 노출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류가 갖는 문제를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입니다. 율법의 정죄와 피의 구속은 인류를 죄들에서 구원받게 합니다. 그러나  영적 사망에서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부활 생명이신 주님 자신이 필요합니다. 서방 전통이 전자를 강조했다면, 동방 전통은 후자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려면 둘 다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8:3).


그렇다면 이런 구절들이 말하는 ‘생명 안에서의 구원’과 ‘율법이 못하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맏아들을 본 받은 많은 아들들의 산출”이 그것입니다(롬 8:29). 이것은 율법의 정죄와 요구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된 그 침례의 기초 위에, 생명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존재 안에 들어오시고(거듭남), 자라서(변화), 온전히 나타나실 때(영화롭게 됨) 가능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 예루살렘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신학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임을 보아야 합니다. 서방신학은 죄인들을 율법으로 폭로하여 그들에게 소망이 없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알게 했습니다(갈3:24). 동방신학은 그 후에 생명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내주하시며 구원을 이뤄가시는 방면을 강조합니다(골1:27-29). 물론 여기서의 구원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 입니다(28절). 이 둘이 합쳐질 때 성경이 계시하는 완전한 구원의 그림이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한국 교계도 서방교회의 유산의 도움을 소중히 간직하되, 동방교회의 유산에게도 마음을 열고 접근해 보는 페러다임의 대 전환을 시도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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